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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
<colcolor=#fff>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 |
<colbgcolor=#000> 본명 |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
출생 | 1813년 5월 5일 |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코펜하겐 | |
사망 | 1855년 11월 11일 (향년 42세) |
덴마크 코펜하겐 | |
직업 | 철학자 |
성향 | 실존주의, 대륙철학, 기독교 실존주의, 독일 비합리주의 |
모교 | 코펜하겐 대학교 (1841년 석사) |
종교 | 개신교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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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2. 번역명 논란
'쇠렌 키에르케고르', '쇠얀 키에르케고어' 또는 '키르케고르'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한국 키에르케고어 학회에서는 후자를 발음상의 이유로 적극 추천하나, 사실 전자가 더욱 널리 쓰이는 편이다. 한국 키에르케고어 협회는 비교적 최근인 2011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덴마크어 표기 세칙에 맞는 표기는 '쇠렌 키르케고르'이다. 사실 Søren Kierkegaard에 대한 덴마크 원어 발음은 국제 음성 기호로는 [sɶːɐn ˈkʰiɐ̯ɡ̊əɡ̊ɒːˀ\][2]로 옮겨지므로, 어느 쪽도 정확한 발음은 아니다. 다만 음운 구조 등을 보았을 때의 근사치적인 표준을 정해 두었을 뿐이다. 영어 발음은 [ˈsɒrən ˈkɪərkəɡɑːrd](소런 키어커가드)이다.한편 한국에서는 키에르 케고르라는 식으로, 마치 키에르가 이름이고 케고르가 성인 것처럼 쓰는 사람들도 있다. 표기에 여러 견해가 있지만 어쨌거나 하나의 성씨를 성-이름인 것처럼 나눠서 표기한 것만큼은 명백히 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나누어 쓰게 된 데에는 이름 'Søren'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한국에서의 관행 탓도 있는데, 번역가 안정효에 의하면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처음 키르케고르의 저작이 한국에 소개되어 번역되었을 당시 이름을 '쇠렌'으로 표기하는지, 아니면 '쇠얀' 또는 '죄얀'으로 표기하는지에 관해 한바탕 논쟁이 있었고, 이 때문에 문학 관련 인사들이 가급적 키르케고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름을 볼 일이 없어졌고 '키에르 케고르'와 같은 잘못된 표기가 남발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키르케고르를 논문 주제로 잡고 쓰려는 대학원생들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않는 키르케고르 논문과 연구에 의아할 텐데, 과거 1950년대부터 키르케고르는 연구되었지만 그 표기가 키엘케골[...], 키르케고아, 키르케가드 등 요상한 방식으로 통일되지 않은 채 이어져서 그렇다. 찾아보고자 한다면 한국 키르케고르 연구자 표재명 교수의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부록에 상세히 있으니 참고하자.
3. 생애
키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57세, 어머니가 45살일 때 출생했으니 이른바 늦둥이라고 할 수 있다.일곱 명이 모두 후처 소생으로, 전처는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 일곱 남매의 어머니는 본래 키르케고르의 아버지 집에 가정부로 있던 사람으로,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에 아이를 낳았다. 이런 사실은 워낙 양심적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일생을 두고 괴로워한 고뇌 중 하나였다.
맏형 페테르는 후에 목사가 되었고, 둘째 형은 상인이 되었으나 젊어서 미국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또 하나의 형은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숨졌다. 누나 둘은 자라서 결혼을 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어릴 때 사망했다.
아버지가 여든두 살에 돌아가셨을 때, 남은 형제라고는 페테르와 쇠렌뿐이였다. 쇠렌 키르케고르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의 형 페테르는 이후 루터 교회 주교로 활동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회프딩은 '키르케고르의 어머니는 단순하고 명랑한 부인이었다. 쇠얀은 모친으로부터 쾌활한 성격을 물려받았으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음울함과 서로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근엄하고 지극히 신앙적인 사람이었으나, 그가 어린 시절 목동이었을 때 산 위에 올라가 주님을 모욕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후처와의 비교적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생각이 그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우울함과 뒤섞였고, 이는 그의 가정이 극도로 엄격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그의 유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3]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소크라테스에 주안점을 둔 아이러니 개념론(Om Begrebet Ironi med stadigt Hensyn til Socrates)>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84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와중에 그는 1840년, 즉 1년 전 자신과 약혼을 한 10살 연하의 연인 레기네 올센에게 불과 1년여 만에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공부를 계속하러 떠난다. 그의 갑작스런 파혼에는 결혼에 대한 환멸,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위해서는 결혼과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깔려 있었다.[4] 그는 스스로를 "끔찍한 고뇌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야 하는 인간"으로 여겼다.
결별 이후 그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여 각종 저작들을 내놓는다. 1843년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공포와 전율(Frygt og Bæven)>, 1844년의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5년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 1846년의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Afslu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 등의 주요 저작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여 출판되었으며, 그는 훗날 이 책들의 원저자가 자신임이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익명을 고수하였다.
이 시기의 저작들은 주로 헤겔을 비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후 그의 저작과 관련된 논쟁 속에서 그는 한동안 가명으로 저술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1849년의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이나 1850년의 <기독교의 훈련(Christelige Taler)>을 출판하던 시점에는 다시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그는 기독교, 특히 당시 덴마크와 독일의 주류였던 루터 교회의 비판에 집중하였다.
이후에 가명으로 책을 출판했던 것이 탄로 나면서 코펜하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나중에 코펜하겐 신문에 정기 연재 <기독교 세계 공격>을 투고하면서 자신이 가명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와 함께 덴마크 기독교 사회를 신랄하게 비난했다.[5]
키르케고르는 평생 특정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으며,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을 전부 저술 활동에 사용하였다.
이후 그는 1855년에 42세의 나이에 거리에서 쓰려졌고,[6]. 한 달여 뒤에 목사로부터의 성만찬을 거절하고 척수병으로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마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폭탄은 터져서 불을 지른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는 훗날 그의 철학이 재조명받으면서 현실이 되었다.
4. 사상
4.1. 진리는 객관성이 아니라 주관성이다
그의 사상은 언제나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전개된다. 그래서 그의 문제의식은 "참다운(본래적인) 나란 무엇일까?"이다. 그가 내린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그의 유명한 문구인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진정한 자기'라고 말한다. 그는 삶 자체, 진리 자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근대 철학을 싫어하였는데, 객관적인 철학이란 자신의 문제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개인들이, 결단을 내리면서 생기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7] 객관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인류의 진보를 꿈꾸는 헤겔 철학은 주체적 인간의 자기 확립을 퇴보시켰고,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진정한 삶이란 비객관적이고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즉 각자의 개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 일반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가 아니라 "특정 인간인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8] 따라서 그의 철학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면서도 윤리학적이다.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그는 3가지 실존의 형태 중 심미적 실존 A와 윤리적 실존 B의 입장에 대해 각각 연기를 하면서 글을 쓴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구체적으로 3가지 실존을 언급하는데, 실존을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 나눈다.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의 철학은 윤리학[9]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인간 '실존'의 근원을 인간의 내적 인격으로 보았으며, 인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자아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곧 주체적 사고는 체계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와 관계하는 사고, 실존하는 주체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다. 필연적으로 절망과 좌절이 따라오지만, 그 절망과 좌절의 고뇌는 실존의 결단을 촉구하게 한다.
4.2. 간접적 진리 전달
위에서 주체적 사고가 진리라고 키르케고르가 주장했다면, 이어서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어떻게 타인이 터득하도록 전달하는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저술한 박사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 소크라테스를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어>와 <철학의 부스러기>, 후기 저작인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반어법 '아이러니')이 진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위대한 방법이라는 것이다.흔히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로 유명하듯 끝없는 질문과 토론으로 상대의 무지를 폭로하는 철학자였는데,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가 말로만 산파술을 펼친 철학자가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 속에서 산파술, 곧 아이러니를 '실존적으로' 살아낸 철학자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의 박사 논문에서는 바로 소크라테스를 실존 변증법의 선구자라고 주창하면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그리스 철학자들[10]과의 접점을 파고들며, 2부에서는 자신의 시대 사조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낭만주의[11]와 헤겔 철학을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와 비교 분석 하여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무한한 절대적 부정성'을 갖춘 유일한 방식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는 생애 대부분의 저작을 가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이는 그의 이러한 사상과 관련이 깊다. 그는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진리란 없다고 생각하였고, 소크라테스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문을 전개하게 하여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만 '개인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접적으로 공유하는' 전달 방식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의 저작은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에 비해 상당히 '시적'인데,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보편적인 진리란 없기에 하나의 사상은 특정 개별 인간들의 사례를 통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후기 사상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주요한 대상이 된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인간 교사로서 인간 내면에 자리한 무지와 모순을 폭로해 주는 존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인간의 몸이라는 가명[12]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서 인간 세상이 도저히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폭로해 주는 존재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신뢰의 도약이었고, 그러하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각종 성사나 의식을 주관하는 '이성적인' 교회 체계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는 신앙이란 보이거나 존재하지 않고,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란 모든 사람들과 결별하여 '신 앞의 단독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은 선별적이고 논쟁적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 기독교 체계를 흔들고 그 정체를 폭로해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덴마크와 독일의 주류 기독교 신앙이었던 루터교 교회를 혹독하게 공격하였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실명으로' <선전>이라는 책자를 통해 "공공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죄를 하나 덜게 될 것이라"고 기존의 교회 체계를 공격하였으며, 기독교란 그 자체로 너무 숭고한 것이기에 자신은 본인을 차마 기독교도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철학계에서는 그의 입장을 단순히 신앙주의라고 표현하는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자유'가 반드시 실천적으로, 역동적인 실행력으로서 요구된다. 그의 독특한 체계로 가능성-현실성-필연성의 범주가 있는데, 그는 철학의 양상 범주로서 말하지 않고 본인만의 독특한 실존주의 철학으로 설명한다. 이 변증법적 연관을 맺는 것들이 자유, 책임, 진지함, 믿음이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되고, 지성을 통해 현실을 끝까지 이해하되 이성의 밑바닥, 심연 속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은 개별자 자신이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대부분 절망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상정한 후, 그렇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 유일한 대안은 믿음이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4.3. 『죽음에 이르는 병』
아마도 쇠렌 키르케고르의 저작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작품은 말년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죽음에 이르는 병』일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건 간에, 확실한 것은 키르케고르의 후기 사상, 즉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빼놓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는 절망의 세 가지 형태를 서술한다.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이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을 때 그가 설정하고 있는 계기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가 헤겔 철학과 맺고 있는 관계는 상당히 복잡한데, 왜냐하면 그가 전반적으로 헤겔의 관점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의 현실 존재를 설명할 때는 서로 상반되는 두 계기의 변증법적인 종합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인간은 종합으로 존재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영혼/영원/무한/가능성'이라는 초월적 계기와 '육체/시간/유한/필연성'이라는 물리적 계기의 종합으로 존재한다. 이때 가능성은 바로 자유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인간은 필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가능성을 꿈꾼다. 하지만 또한 현실적으로 인간은 물리적 법칙들에 속박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그의 물리적 존재는 필연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유는 가능성과 필연성의 변증법적 종합 속에 있다.[13][14][15]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제시되고 있는 심미적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직접적 심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반성적 심미주의'이다. 이때 전자는 동물적인 향락과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삶으로, 그러한 삶은 전적으로 필연에 의해 속박되어 있으며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상실한다. 반대로 반성적 심미주의는 인간이 예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세계를 무시하고, 오직 음모를 꾸미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은 두 심미적 계기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들을 종합해 내야만 한다. 심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윤리적 실존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물리적 한계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사실성'으로서의 절망에 대한 자각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자기는 '결단'을 내리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윤리적 인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오만함이다. 그는 자신이 절대자와의 관계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신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신인 동형 동성론의 오류에 빠져 있다. 이때 '윤리적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당대 사상사적인 맥락하에서 본다면 '인륜적 실존'으로, 즉 헤겔주의적인 용어로 옮겨도 큰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관념론을 수용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신과 같아질 수 있다고 하는 오만에 관해서이다.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의 대안으로 종교적 실존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기준에서 본다면 단순한 영아 살해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전적으로 고귀하다. 그것은 신 앞에서 윤리를 포기하는 압도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은 각각 절망 앞에서의 반항과 연약함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윤리적 실존이 절망을 인정하면서도 절대자에 대한 반항을 품는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절망을 수용하고 절대자 앞에서의 한없는 연약함에 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들, 즉 반항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는 신 앞에서 떨게 된다는 점에서 반항은 연약함과 구분되지 않는다.
실존은 처음에는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지각하지만, 절망을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직접적 심미주의의 단계에서 인간은 그의 물리적 세계에 완전히 뿌리내린 채, 희미하게 절망의 단초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한 개인에게 주어진 행운이 파괴될 때(인간의 행운이란 아주 약한 것이기에 그 파괴는 쉽게 일어난다) 마침내 자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좀 더 진보된 인식, 즉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성적 심미주의는 절망을 회피하며, 그것과 맞서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절망에 맞서는 결단을 내리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절망의 원인을 찾기에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결단을 내리는 단계의 절망,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궁극적으로 지상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절망은 본래적으로 영원한 것에 관한 절망이며, 자기는 영원함에 관한 절망 앞에서 최초로 자신의 영원성을 자각하고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만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키르케고르 철학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절망이 더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며 끔찍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의 고유한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은 절망하지 않으며, 자연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교도만이 절대자의 앞에서 절망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떨며 종교적 결단을 향해 열려 있다. 오로지 그리스도교도만이 영원과 가능성 앞에서 끊임없이 절망할 수 있다. 이항 대립의 철폐라는 구호가 오히려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키르케고르의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인간 중심주의-그리스도교 중심주의의 맥락에서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지해 둬야만 할 것은, 그러한 평가에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면모가 있으며,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기획은 단순한 인간 중심주의 이상의 철학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필연성의 지배에 대하여 개인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의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4. 실존의 세 단계
위에 전개한 모든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세 가지의 실존적 단계를 어느 정도 상정하고 있다는 것에 대부분의 전공자들이 동의한다.크게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 나뉘며 세부적으로는 '심미적 실존' 속에 '직접성(Unmittelbarkeit)의 단계'[17] '유혹자의 단계', '자기 속의 고립된 환상에 폐쇄된 단계'가 있다. 모두 직접성에 종속된 개념이고 이 개념에서 벗어나게 되면 반성적 심미가의 단계가 된다.[18]
'윤리적 실존' 속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자와 세상에 충실한 윤리가', '종교에 대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서 믿지 못하는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무한한 자기 체념으로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에 경탄하면서 차마 믿음의 도약을 하지 못하는 안티 클리마쿠스'의 단계로 나뉜다.
'종교적 실존'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이성의 사유 끝에 알 수 없는 한계를 그저 양심에 맡기며 견뎌내는 '종교성 A'와 신이 인간의 가명을 쓰고 세상에 왔다는 사실 앞에서 믿음의 도약을 건너는 '종교성 B'로 나뉜다.
5. 영향
그나마 늘그막에 인정을 받았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달리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그의 생애 동안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비타협적이고 자학적이며 급진적이기도 했지만, 그가 덴마크어로 대부분의 저술을 진행하여 유럽 사회에 그의 사상이 알려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한몫하였다. 그에 대한 논의는 1890년도에야 겨우 역사에 등장하며, 그의 전집이 출판된 것은 1909년이었다.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본격적으로 재평가되어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대접을 받게 된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20세기 초반의 변증법적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실존주의나 기초 존재론에 대한 모든 사상은 그를 시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그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칼 바르트의 신학적 실존주의와도 다르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폴 사르트르의 철학적 실존주의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에 이르기까지 키르케고르는 마르틴 루터를 잇는 위대한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그 이유에는 전통, 권위, 성사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거부하고 오직 '신 앞에 선 단독자'에 주목하는 그의 개인주의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개인주의는 근대 철학과 또 다른 길을 향해 간다. 근대 철학이 모두 개인의 내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성을 향해 간다면 키르케고르는 초월(transcendentia)을 향한다. 헤겔의 전체주의적 철학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사변과 교리 해석을 통해 신의 기적과 신비를 설명하려는 모든 신학을 공격한 셈이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인간은 근대성의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점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슐라이어마허가 이성과 믿음의 조화를 추구하였다면 키르케고르는 투쟁을 추구하였다. 키르케고르의 변증법은 진정한 '이것이냐 저것이냐', 곧 철학이냐 신앙이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이성에 조금도 양보 없이 신앙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당대의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인 국가 교회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비난을 했기에 그의 사상을 신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당시 교양을 갖춘 지식인들을 향해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키르케고르가 교묘한 전략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존주의하면 떠오르는 프랑스의 흐름은 키르케고르와 현상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 쪽 라인은 헤겔이나 그 이전 낭만주의까지 가야 정확하겠지만, 의식의 지향성 등의 요소가 실존에 대한 고민과 합쳐져 자아와 만나 생겨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고등 사범 학교 교수인 프레드릭 보름스는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만남에서 실존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요약하고, 프랑스의 실존 관련 흐름은(실존의 문제라고 표현된다) 이것을 '실존은 주어진 것이며 이것이 만남으로 향한다.'로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6. 어록
성경은 이해하기 매우 쉽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계획적인 사기꾼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그에 따라 행동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척 한다.[19]
인생은 단지 뒤를 향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앞을 향해 살아가야만 한다.[20]
기도의 기능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21]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22]
사람들은 나를 너무나 형편없이 이해해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들에 대한 불만조차 이해하지 못한다.[23]
존재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는 미래를, 특히 당신이 결코 가져본 적 없는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24]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표현이지, 사랑받는 사람의 표현이 아니다. 마음 가는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개인들에 대한 진실을 드러낸다.[25]
세상의 모든 것이 오해였다면? 웃음이 사실 눈물이었다면? [26]
결혼하라, 너는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너는 후회할 것이다.
7. 기타
- 자신의 철학이 50년 뒤에 재조명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의 말이 들어맞았다.[27]
- 키르케고르의 전집은 약 60여 권 정도[28]인데 그중 일기가 30여 권이나 된다.
- 국내에서는 임춘갑 前 한국 키르케고르 협회장이 번역한 키르케고르 선집과 임규정 군산대학교 교수가 번역한 몇몇 저작들이 있는데, 덴마크어 원본이 아닌 영역본과 독역본을 대본으로 번역된 중역본이다.[29]
-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헤겔의 난해하고 역설적인 문체를 풍자적으로 따라하면서 자기自己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인간은 정신精神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일까? 정신이란 자기自己다. 그러나 자기는 무엇일까? 자기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 바꿔 말한다면 그 관계에 있어서 그 관계가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관계가 아니고,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다. 인간이란 하나의 유한과 무한의 종합,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 자유와 필연의 종합, 요컨대 하나의 종합이다. 종합이란 두 개의 것 사이의 관계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이른바 인간이란 아직 자기는 아니다.[30]
영화 감독 우디 앨런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키르케고르가 쓴 자아의 개념을 읽은 후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럴 수가! 이렇게나 명석한 사람이 있다니! (난 애들 동물 그림책에 나오는 퀴즈에 제대로 답하는 것도 어려운 사람인데!)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문장을 읽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키르케고르만 재밌었으면 됐지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31]
-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저서 『정치신학』에서, 정치적 결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키르케고르가 제시한 '결단'의 개념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변용 및 언급하고 있다.
- 아비코 타케마루가 집필한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殺戮にいたる病)과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15화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고〉(死に至る病、そして)의 제목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따왔다.
- 프리드리히 니체는 키르케고르의 저작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느 덴마크인 독자로부터 "우리나라에 키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쓴 책을 보면 당신이 쓴 책에서 나오는 말과 여러 부분이 일맥상통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는 "그럼 그가 쓴 책들을 보내줄 수 있느냐"는 답장을 보냈는데, 회답을 받기 전에 이탈리아 여행 중 정신병이 발병하면서 결국 키르케고르와 니체의 정신적 조우는 불발되었다.
- 의외일 수 있겠지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탐독한 철학자였다. 키르케고르를 일컬어 "지난 세기에 단연코 가장 심오한 사상가"였다고 극찬했을 정도.
[1] 개별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2] 굳이 한글로 적자면 [쇠안 키아거고\]에 가깝다.[3] 키르케고르 자신의 표현으로 '광기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으며, 그런 이유로 키르케고르는 "나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라고 한탄하곤 했다. 일찍이 애늙은이였던 것.[4] 그러나 그는 부인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혼 후에도 일기장에 레기네에 대한 예찬을 썼고 그녀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으며, 사망 후 전 재산을 그녀에게 양도하였다. 비록 그녀는 거절했지만.[5] 그의 글 중에 유명한 것이 "목사를 멀리하라"이다. 목사는 진정으로 원하는 건 사례비일 뿐이지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삯꾼의 말을 듣지 말고 진정한 주체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대놓고 말한다.[6] 은행에서 얼마 남지 않은 예금을 모조리 인출해 갖고 돌아오던 길에 쓰러졌다고 한다.[7] 키르케고르,'주체적으로 되는 것',임규정 역,지만지고전천줄,2008,p25[8] 그는 기독교의 교리가 이렇다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주체적으로 되는 것',임규정 역,지만지고전천줄,2008,p26-28 참고[9] 그러나 불안의 개념에 의하면 윤리학 a 와 윤리학 b 를 구분하는데, 윤리학 a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철학의 윤리학이라면 윤리학 b는 그의 독창적인 윤리학의 범주이다.[10] 크게 크세노폰, 플라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인물상을 비교한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감정적인 인물로 나타나고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마치 선지자와 같은 숭고함을 보여주는 철학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소피스트들이 투영된 모습을 갖추고 궤변과 함께 구름의 여신을 숭상하며 지혜를 이성이 아니라 광신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소크라테스는 희극 무대에서 자신이 등장하는 <구름>을 자주 관람했는데,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망가뜨리는 <구름>을 대중과 함께 관람하며 캐릭터 속에 담긴 소피스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또 자신이 관람하며 웃음으로써 모든 아이러니를 완벽하게 구성한다고 찬양한다.[11] 크게 슐레겔, 티크, 졸거[12] 그가 앞에서 계속 주장해 온 가명과 간접적인 진리 전달을 떠올리면 된다.[13] 초월적 계기로 가능성을, 물리적 계기로 필연성을 두는 것은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스피노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스피노자의 세계관에는 달리 될 가능성이란 것이 없으며,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또한 없다. 오직 필연적인 법칙에 의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고려했던 것은 이러한 세계관에 대한 대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4] 한편 이러한 이율배반, 즉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필연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존재의 이율배반은 칸트 철학에서 먼저 나타난다. 자유 의지와 인과 필연성의 이율배반은 칸트의 제3 이율배반으로, 칸트는 인간이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인과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이율배반을 해결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키르케고르 역시 칸트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15]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헤겔 철학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높다. 사실 칸트가 내세운 예지계-현상계에서의 이중적인 자유 개념은 헤겔 철학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변주되는데, 헤겔은 다만 그 용어를 배후와 현상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16] 다만 원저의 구조상으로는 종교적 실존이 윤리적 실존에 앞서 설명되고 있다.[17] 욕망과 욕망의 대상이 분리되지 못한 단계, 욕망과 욕망의 대상이 분리되었지만 대상이 다양해지면서 실체를 잃는 단계, 욕망의 대상이 한정된 대상으로 통합된 단계로 나뉜다. 간단히 말해서 그저 쾌락에 충실한 존재에서 권태를 느끼고 우울이 오는 단계를 포괄한다.[18]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는 크게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네로 황제, 여러 여자들을 연애하면서 항상 설렘을 느끼려는 유혹자 요하네스, 결국 자신 밖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는 심미가 A로 나누고 있다.[19] The Bible is very easy to understand. But we Christians are a bunch of scheming swindlers. We pretend to be unable to understand it because we know very well that the minute we understand, we are obliged to act accordingly. (Søren Kierkegaard, Provocations)[20] 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21] The function of prayer is not to influence God, but rather to change the nature of the one who prays.[22] Anxiety is the dizziness of freedom.[23] People understand me so poorly that they don't even understand my complaint about them not understanding me.[24] The most painful state of being is remembering the future, particularly the one you'll never have.[25] Love is the expression of the one who loves, not of the one who is loved. Those who think they can love only the people they prefer do not love at all. Love discovers truths about individuals that others cannot see.[26] What if everything in the world were a misunderstanding, what if laughter were really tears?[27] 비슷한 예로 니체 또한 자신의 철학이 100년 뒤에 재조명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100년이 되기도 전에 니체는 일류 철학자 반열에 들어가며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28] 오차가 있을 수 있음.[29] 다만 이게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재 국내에서 덴마크어가 가능한 철학 전공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30] 이 말을 대강 해석해 보자면, 인간이란 유와 무의 종합처럼 서로 대립쌍을 이루는 두 개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한 개의 종합이다. 하지만, 자기란 두 개 사이에 관계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정신이고 정신은 자기지만 인간은 자기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31] http://profron.net/fun/WoodysPhilosophy.html 번역 출처는 도널드 파머, '키르케고르 실존극장', 정영은 역, 필로소픽, 2016,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