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Взятие Шумшу, Взятие острова Шумшу, Десант на остров Шумшу
일본어: 占守島の戦い (しゅむしゅとうのたたかい)
교전국 | ||
소련 (1937-1941[1], 1945[2]) | 일본 제국 |
1. 개요
1945년 8월 18일~20일에 소련과 일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의 최후반기에 치러진 전투 중 하나. 놀랍게도 옥음방송 3일 뒤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다. 다만 이것이 소련과 일본 제국 사이의 마지막 교전은 아니며, 그 이후에도 쿠릴 열도 남부와 남사할린 등지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산발적인 교전들이 더 이어졌지만, 그래도 소위 전투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이게 마지막이었으며 이후에는 사실상 소련군의 일방적인 점령전 양상이었다.2. 전략적인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대독전선이 종료되자 소일 불가침조약의 유지 및 연장 여부를 놓고 간을 보던 소련은 급기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바로 그 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3] 극동쪽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당시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및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공격했으며 나아가 홋카이도까지 공략하고자 했다. 이는 과거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영토들을 되찾고 세계대전을 종전시킨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연합국과의 종전 회담에서 소련으로 하여금 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최대한 많은 영토를 차지하며 자신들의 이익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3. 지리적 배경
일본 북동부의 쿠릴 열도(Kuril Islands), 일본식으로는 치시마 열도(千島列島)의 섬들과 사할린 섬(일본명 카라후토)은 본래 아이누[4], 니브흐, 윌타, 오로치와 같은 여러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던 공간이었지만, 17~18세기 이후 에도 막부와 러시아 제국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양측은 서로 "이 섬도 내 것, 저 섬도 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일본은 이때까지만 해도 홋카이도(에조치)조차 섬 전체까지 완전히 개척하지 못한 상황이었고[5] 러시아 역시 동부 시베리아의 행정력이 부실했는데, 이 두 지역은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교차하는 패권의 충돌지였다.이후 두 나라간의 교섭이 19세기 내내 계속된 끝에 1855년의 시모다 조약을 통해 이투루프와 우루프 사이에 국경을 긋고 사할린을 공동관할로 편성했으며, 1875년에는 카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 (樺太千島交換條約, 화태천도교환조약)[6]이 조인되면서 쿠릴 열도는 전체가 일본령이 되고, 사할린은 러시아령이 되었다. 하지만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전쟁배상금 대신 사할린 섬의 남쪽 절반을 할양해야만 했고 이 지역은 1945년까지 일본령 가라후토가 되는데, 이는 마치 지금 일본이 "북방 4도"를 대하듯이 1905~1945년의 러시아-소련으로서도 억울하게 빼앗긴 땅이자 궁극적으로 수복할 고토로 여겨졌다.
쿠릴 열도의 자연적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배경 설명을 깔고 가자면, 이곳에는 쿠릴-캄차카 해구를 따라 대소 30여 개의 섬이 전장 1,200km에 걸쳐서 늘어서 있으며 각각의 섬은 시코탄과 하보마이 제외 모두 화산섬으로 비교적 험준한 지형이나 최북단에 있는 시무슈 섬(점수도, 占守島)만은 해안선이 대부분 단애로 이루어져 있기는 해도 대체로 평탄한 편이었으므로 일본군은 이를 이용해서 이 섬에 항공기지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시무슈에서 가장 가까운 소련영토인 캄차카 반도의 로파트카 곶까지는 15km에 불과하고, 맑은 날이면 반대편 해안의 소련군 초병들이 하품하는 모습까지(...) 쌍안경으로 관측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캄차카와 시무슈 사이에 있는 시무슈 해협은 거친 암초들이 많아서 안전항해를 할 수 있는 통로의 폭이 겨우 4km에 불과해서 각종 해난사고들이 잦은 장소이기도 했다.
점수도의 전체면적은 385㎢, 토질은 지표면에서 2m 깊이까지는 화산암이 풍화한 적토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밑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밑에는 암반이 있는데, 일부 산악지역이나 해안 단애에서는 이 기반 암층이 노출되어 있었다. 북쪽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날씨도 좋질 않아서 5~6월이 되어야 봄이 오는데, 70여 종의 각종 고산식물들이 꽃을 피우는 이 봄이라는 계절에도 바닷가에는 여전히 유빙이 떠다니고 시계가 5~6m밖에 되지 않을 만큼 진한 안개가 끼고는 했다. 안개가 끼는 계절이 지나고 8월이 되어 여름이 오면, 차가운 바다안개가 가끔 끼는 정도로 안개는 약해졌지만, 그래도 기온은 여전히 낮았기 때문에 하복이 필요하지 않아서 이곳의 일본군 수비대 병사들은 옷을 바꿔입을 필요도 없이 1년 내내 동복만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한 8~9월을 보내고 나면 점수도의 날씨는 가을 따윈 없이 곧바로 겨울로 바뀌었다. 10월 하순에서 5월 상순까지 반년 동안 내내 겨울이고, 11월부터는 지독한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데[7], 비록 지금 당장은 맑더라도 30분 안에 일기가 확 뒤집히면서 풍속 30~40m짜리 폭풍이 몰아치는 일이 예사였다. 이런 날은 시계가 거의 제로가 되곤 했으며 사병들이 막사 밖에 소변을 보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 실종되는 일도 매 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해륙 양면에서 사고가 많은 섬이었는데, 특히 12월부터 2월 사이의 기간에는 해상에 삼각파도가 발생해서 해상교통이 아예 두절되는 일도 잦았다. 이는 주둔군에 대한 각종 식량공급 및 지원에 심각한 장애가 되는 문제이기도 했으며, 때문에 이 섬에서 대규모 전투에 적합한 계절은 8~9월을 중심으로 겨우 서너 달 정도에 불과했다.
섬 북쪽의 171고지. 소련군의 상륙거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작은 고지는 소련군이 극복해야 할 바로 첫 목표였다.
이런 자연조건 때문에 나무들도 별로 크게 자라지 못했다. 강한 바람, 강풍 때문에 나무가 위로 자라지 못하고 땅으로 기게 되는데, 10m가 넘는 소나무가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붙어있는 이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니, 도로가 아니면 인마와 차량의 통행은 불가능했다. 단독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길 밖으로 벗어나지 못할 지경이니, 통행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이런 특징은 방어군에게 유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지독한 자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섬의 전략적 가치는 꽤 컸다. 단지 소련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치시마 열도의 확보로 오호츠크해를 사실상의 내해로서 통제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북태평양으로 영향권을 확장할 수 있는 요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연락로도 이 시무슈 해협을 지났으므로 시무슈에서는 이를 확실히 제압할 수도 있었다
섬 남쪽. 남쪽에는 작은 선착장과 항공기용 활주로, 몇 안 되는 건물 등이 몰려있었다. 섬 전체에 참호선과 토치카들이 있었으며 포진지도 다수 존재했다. 소련군은 섬의 북쪽에 상륙했다. 섬 둘레를 보면 알겠지만 상륙이 불가능한 지형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쿠릴 열도는 미국 영토인 북방의 알래스카와 알류샨 열도로부터 일본 본토로 가는 중계기지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시무슈는 서부에 자리잡은 해군의 카타오카 항공대 기지를 제외하고도 2곳에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가 있었다. 또한 폭이 2~3km정도 되는 시무슈와 이웃한 파라무시르 섬 (황연도) 사이의 파라무시르 해협(황연해협)은 기항지/정박지로 아주 좋았기 때문에 중부-북부 치시마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해공군기지가 점수도에 자리잡고 있었다. 점수도 이남에서 해공군기지를 모두 가진 섬은 거의 치시마 남쪽 끝에 있는 에토로후 섬밖에 없었다. 즉 여기가 뚫리면 바로 전선이 쿠릴 열도 남쪽 끝까지 밀리게 되는 것이고, 쿠릴에서 시무슈 이후 별다른 대규모 전투가 없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시무슈는 이렇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 섬이었지만 공격은 좀 까다로웠는데, 섬 주위를 빙 두른 해안단애 때문에 병력을 상륙시킬 장소가 별로 없었다. 소련측 해안과 가장 가까운 북동부의 타케다하마(竹田浜), 북서부의 벳토부누마(別飛沼) 정면 및 남쪽의 카게마(蔭澗) 정면만이 공격가능한 포인트였다.
4. 양측의 전력
4.1. 일본 제국
당시 섬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 제91사단이었으며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병대대는 총 6개 대대 규모였다.- 제73보병여단 (지휘관: 이와오 스기노 중장)
- 제74보병여단 (지휘관: 사토 소장)
- 제11전차연대 (지휘관: 이케다 스에오 대좌)
- 제2독립전차부대 (제11 전차 여단과 혼합 편제됨)
- 제91사단 제1포병부대
- 제91사단 제2포병부대
- 제91사단 정비부대
- 제54항공연대
4.2. 소련
소련군은 7개 보병대대를 가지고 상륙했다. 적정평가의 실수로 일본군이 더 적은 병력과 옅은 방어선을 가지고 있다고 오판했으며, 전차 등은 상륙의 어려움으로 끌고 오질 못했다. 포병대가 같이 상륙했으며 캄챠카에서 40여 대의 항공기가 지원했다. 호위함급 이하의 전투함정들과 다수의 수송선, 상륙함이 참가했다.5. 전투개요
5.1. 17일 이전
지휘관인 츠츠미 소장은 1944년 말에 소련이 일본을 맹비난한 일과 불가침조약의 연장을 거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일본군은 방치되었고 고립에 가까운 상태였다. 15일 항복 선언 방송을 들은 츠츠미 소장은 미군이 이곳에 상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장 해제 작업을 진행했다.그러나 소련군은 사할린과 쿠릴 전역을 소련의 영토로 점령하기 위해서 15일 오후부터 집결지로 해양 수송을 시작했다. 17일 23시부터 상륙전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5.2. 18일
소련군의 상륙은 안개와 암초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가 18일 새벽 4시에 소련군의 상륙부대가 섬에 상륙함을 기점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캄차카 반도의 소련 해안포들이 사격을 시작했으며 상륙정들이 안개 속에서 조용히 이동했다. 소련 해군의 소해정 오호츠크에서 발포된 130mm, 76mm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공군의 공습 지원과 폭격이 가세했고 상륙 주정들을 통해서 보병들이 상륙하기 시작했다. 새벽 5~6시에 소련군 상륙 주정들이 발각되어 해안포 사격에 피해를 입었다. 앞서 상륙한 선발대는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에만 급급해서 해안 진지들을 방치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일부 선발대는 부족한 병력으로 방어전을 치러야만 했다.시무슈 섬은 전쟁 기간 내내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던터라, 탄약과 장비 모두 부족함없이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18일 오후에 171고지(170고지와 동일)로 진출하던 소련군 선봉대를 16시, 70여 문의 야포 지원을, 포병 지원을 받는 제11연대 전차 40여 기가 덮쳤으며 소련군은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최초 상륙지로 후퇴했다. 이에 소련군은 상륙이 지연되어 몇 기 없던 45mm 대전차포와 100여정의 대전차소총으로 일본군 전차들을 격파했다. 일본군은 2시간 가량간 이어진 전투에서 투입한 40대의 전차중 30여 기를 상실했고 연대장 이케다 스에오 대좌까지 전사했다.[8]살아남은 전차들도 계속되는 소련군 증원병력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으며, 결국 18일 하루만에 일본군은 보유한 모든 전차[9]들을 상실하고 결국 그대로 부대는 전멸했다.
5.3. 19일
19일 오전에 일본군은 항복교섭을 위한 대표단을 소련군 진지로 보냈고, 오후에 항복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교섭 상태는 모호하게큼 유지되었고, 산발적인 교전이 지속되었다.전차부대를 상실하고 항공기를 띄울 수 없게 된 일본군은 고지와 언덕을 기점으로 방어전을 지속했다.
5.4. 20일
소련군의 공중 지원이, 항공지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군은 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치고자 했다.5.5. 21일
삿포로의 일본군 사령부에서 항복 지시를 내린다. 22일부터 일본군은 포로가 되었고 시무슈 섬 외의 다른 쿠릴 열도의 섬들도 항복했다. 소련군은 다른 섬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6. 결과
소련군 - 1,567명 사상 (516명 전사, 1,051명 부상 및 실종)일본군 - 1,018명 사상 (256명 전사, 762명 부상)
사흘간 이어진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섬을 점령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일본군 사상자에 비해 소련군의 사상자 수가 의외로 많은데 이는 상륙한 소련군은 전차도 제대로 증원되지 않은 알보병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서 일본군은 전차부대로 소련군을 압박하는게 가능했고 정예병들이었다.
데이비드 M. 글랜츠의 저서에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이유는 소련군이 이곳의 전투력 파악을 소홀하게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상륙 당일의 짙은 안개는 소련군의 상륙시도를 가려주었지만, 역으로 아군의 공중, 항공, 포병 지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최초상륙부대들은 가지고 내린 무전기가 고장나고 예비용 무전기들은 배에다가 실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보고조차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련군의 피해는 상륙 첫 날에 집중되었는데, 일본군은 잘 위장된 해안포와 진지에서 상륙주정과 호위함들에 피해를 많이 입혔고, 여기에 먼저 상륙한 소련군 선발대는 무리하게 교두보를 확장하려다가 박격포를 동반한 일본군 예비대의 재빠른 전개에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련군의 포병대는 다음날인 19일 오후 늦게서야 상륙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결국 소련군의 상륙 첫날은 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한 화력지원의 부족으로 열세에 처한 상태였다. 다만 상륙초기의 혼란이 진정된 18일 밤 이후 소련군의 전투력이 집중되어 다음날부터는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7. 그 이후
수비대였던 91사단소속장교 한 사람이 후에 남긴 증언을 보면 바로 항복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섬에 있는 정신대원들 포함 1,200여 명의 여성 비전투원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10] 그래서 수비대는 시무슈에 있는 배란 배는 모두 긁어모아서 어선을 개조한 구잠정 2척과 100톤 미만의 소형 범선 9척으로 선단을 편성하고 18일 밤에 이 비전투원들을 여기다가 태워서 홋카이도로 탈출시켰고, 정비병과 사병들도 가능한 배편과 비행기를 이용해서 내보냈다. 남은 장교와 하사관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갔다. 다만, 마지막까지 일본 제국은 남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내팽개친 것과 마찬가지로 쿠릴 열도 일대에서도 일본 본토 출신 장병들만을 탈출시키고 아이누족 출신 병사들은 버려두고 철수하여 이들은 소련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일본은 쿠릴 열도 및 남사할린에서의 전투에서 옥음방송 이후임에도 생각보다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소련군의 압도적인 무장공세 및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인한 일본군 내 전투 의지 상실이 겹쳐 패배하였고 그 결과 이 일대를 영영 잃게 되었다. 소련의 공세로 정복된 사할린과 쿠릴은 소련 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러시아령이지만 일본은 쿠릴 열도의 일부를 ‘북방 영토’로 명명하며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기에 쿠릴 열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일본 입장에서도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에서의 분전은 의외의 수확을 안겨다 주었는데 바로 소련의 대일전선 최종 목표였던 홋카이도 분할 점령을 좌절시켰다는 점이다.[11] 실제 소련은 일본군 기지와 거리가 있는 루모이에 상륙해 기습적으로 홋카이도를 동서로 횡단, 루모이-쿠시로 선으로 홋카이도를 반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슘슈 섬의 분전은 소련군의 상당한 병력 손실 및 전투 일정의 지연을 야기했고 사할린 방면에서도 본래 홋카이도 기습 침공을 위해 22일 이전까지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를 25일에서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 결국 소련은 이러한 상황이 미국의 격렬한 반대와도 맞물려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포기했다. 미주리 함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리는 9월 2일 이전까지 홋카이도를 분할 점령해야 했던 소련으로서는 쿠릴 열도 및 남사할린에서의 작전 지연이 미국의 반대와 더불어 홋카이도 침공 계획을 좌절시킨 주요 원인이었다.
8. 기타
일본 제국 제11전차연대가 참전했던 곳으로서 그 당시 격파된 일본 전차들의 잔해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들은 빈약한 전력으로 그나마 전과다운 전과를 보여준 정말 몇 안되는 일본군 전차 부대였기 때문에 이들의 이름을 딴 육상자위대 전차대대가 홋카이도에 주둔하고 있다.데이비드 글랜츠의 시무슈 섬 전투 내용을 정리한 글이 있다.
소련군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극동지역 최대피해지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이지만, 일본은 항복만 했지, 소련과 평화조약을 하지는 않았다.
9. 매체
일본의 만화가 타키자와 세이호의 작품 환영의 표범 제2장 우크라이나 혼성여단의 첫 전투 씬이 바로 이 전투이다. 주인공 카와세 전차장의 치하가 나름 활약하지만 소련군의 대전차총 사격을 받고 파괴된다.[1] 차관과 군수물자 지원 및 불가침조약 체결.[2]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관동군과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붕괴시킴.[3] 사실 소련이 간을 보았다는 것은 실제 스탈린이 소일 불가침조약의 유지 및 연장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소 의존적인 일본 외교가 앞에서 간 보는 행보로 일본 지도부를 애태웠다는 의미이다. 이미 얄타 회담 등을 통해 일찍이 소련의 대일 참전 여부는 결정되었으나 정보의 불균형 상황에서 일본과 서방 연합국 양측 사이에서 최대한 이익을 보기 위한 스탈린의 술수였다. 참고로 5월 독일이 패망한 후 외교적으로 소련을 제외한 모든 외교 채널에서 사실상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된 일본은 남사할린(가라후토) 영유권과 만주 이권, 츠가루 해협 통항권 등 여러 권리를 양도하는 대가로 소련에 대미 강화 중재를 요청하고 있었다.[4] 쿠릴 아이누, 사할린 아이누[5] 기껏해야 하코다테를 비롯한 오시마 반도만을 온전히 영유했으며, 그외에는 홋카이도 해안가 곳곳에 거점을 설치한 형국이었다. 실제 에도 시대 홋카이도의 중심지는 오시마 반도 남단의 하코다테와 마츠마에였다. 다만 17~18세기 즈음이 되면 그래도 홋카이도 대부분이 일본 영향권에 복속되었으며 몇몇 어민들은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 북쪽의 쿠릴 열도(북방영토)까지 진출했다. 나아가 이후인 1799년과 1807년에 걸쳐 홋카이도 전역이 막부 직할령으로 편성되며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기에 18세기~19세기 초에 이르면 서양에서도 홋카이도를 일본령으로 분류했다.[6] 카라후토=사할린 섬, 치시마=쿠릴 열도.[7] 초록배매직스에서 나온 창공의 포효에 수록된 <빙설>이라는 에피소드를 보면 이곳의 이런 기후가, 날씨가 잘 묘사된다.[8] 이때 이케다는 군복을 벗고 와이셔츠 차림에다가 머리띠를 두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케다는 만주국 육군 전차학교 교장 시절 시바 료타로의 스승이었다.[9] 총 8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10] 실제로 만주 작전에서 일본인 여성들이, 독소전쟁에서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함락된 후에, 수많은 독일인 여성들이 소련군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한 바가 있다. 또한 소련의 한반도 진주 당시에도 38선 이북의 많은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의해 학살, 강간당한 바 있다. 괜한 우려는 아니었던 셈이다.[11] 소련은 홋카이도를 굉장히 탐냈는데 이는 우선 사할린과 쿠릴 열도보다 온화한 홋카이도를 통해 안정적인 부동항을 영유할 수 있었고 전후 일본과의 물리적인 접경을 통해 동아시아내 공산주의 확장에 있어서도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나 면적이 좁은 쿠릴 열도 및 포츠머스 조약 이전 본래 러시아령이었던 남사할린과 달리 홋카이도 북부는 유럽 전선에서의 칼리닌그라드와 마찬가지로 소련 입장에서 확실하게 노획할 수 있었던 추축국의 본토이자 대국민 선전용 전리품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