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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5:54:30

정감록

십승지에서 넘어옴
1. 개요2. 기원과 분석3. 내용4. 여담5. 매체6. 같이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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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은 조선 시대 말기에 등장한 작자 미상의 도참서.

2. 기원과 분석

정감록은 정본이 없다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이본이 많다. 온갖 도참서가 다 섞인 형태로 전해지지만, 정감록 모든 판본에 포함되기 때문에 아마도 원형이리라 추측하는 것이 감결(鑑訣)이다. 그리고 감결은 내용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또는 가야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그래서 책 이름이 정감록.

정감록이라는 제목 때문에 세간에는 정도전이 저술했다고도 하고, 혹은 정여립이 저술했다고도 하지만[1] 설득력은 없다. 정몽주나 그 후손이 썼다는 설도 있는데, 조선왕조 건국 직후 불안한 민심을 배경으로 이 책이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인 정도령이 조선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기본 줄거리 자체는 이미 16세기 말, 정여립의 난을 일으킨 정여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울러 인조 9년(1631) 2월 3일자 인조실록에 의하면 옥천에 사는 권대진이라는 자가 예언을 믿고 모반을 일으켰는데, 그와 한패인 권락과 권계 등은 '영남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한(澣)이고,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역시 권대진과 한 패인 양천식은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 날 기이한 사람을 보았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한(澣)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새로운 도읍의 주인이 될 만하였다.'라면서 장차 충청도의 계룡산을 새 도읍으로 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18세기 영조, 정조 무렵에 나왔다고 추측한다.[2]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 기록들 중에서 정감록이 최초로 언급된 예는 조선 영조 15년(1739) 6월 9일자 승정원일기인데, 여기서 영조 임금은 "정감록은 도적들이 믿는 책이니 매우 교활하고 사악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감록이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정감록에 원형으로 추정, 포함되는 예언서들은 전해졌다고 추측한다.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 세조실록 기사를 보면,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들을 개인이 갖지 말고, 나라에 바치도록 명했다."라는 내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민간에서 계속 돌아다녔고[3], 조선왕조가 무너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4]

정조 9년(1785)에 일어난 이율, 양형, 홍복영의 모반 사건(정감록 모반 사건)에 정감록이 확실히 등장하기 때문에, 분명히 그 이전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정도령의 모델이 실제로 청나라에 대항해 명나라를 복원하려고 한 정성공이나 그의 아들 정경이라고 보는 최근 학설에 의하면, 17세기 중반(인조 말 - 효종 연간)까지 성립연대를 올려 보기도 한다. 그 증거로 숙종실록 숙종 23년(1697) 1월 10일 3번째 기사 장길산의 난 항목을 보면 "중국인 승려 운부가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정진인 신앙이 숙종 대에는 확실히 있었고, 정성공이 주창한 반청복명 사상과 연관이 있다는 한 가지 증거가 된다.

그러나 정성공이 반청복명 활동으로 유명해진 때는 아무리 빨리 잡아야 명나라가 망하고 그가 무장투쟁을 시작한 1647년 이후부터다. 인조실록이 기록되던 17세기에는 인터넷도, TV도, SNS도 없었던 때였는데 과연 조선인들이 무슨 재주로 이제 고작 7살밖에 안 된, 그것도 먼 남의 나라에 사는 외국인 아이를 구세주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정성공이라는 7살짜리 어린 아이가 있음을 알기나 알기나 했을까? 물론 정성공이란 인물이 알려진 뒤에는 그 명성이 해상진인이나 해도진인 전설에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도령 자체가 정성공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자 논리비약이다.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내걸고 전쟁을 벌이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인들은 스스로 성이 정씨라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영웅을 그려낸 것이다.

정감록에 '이씨가 망한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의도를 내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정감록이 성리학을 위시한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내용 탓에 조선 시대에는 금기시되었지만 민간에는 암암리에 퍼졌다.

정감록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많은 신흥종교의 경전으로 활용되었다. 십팔자위왕설이 조선 건국으로 맞아떨어지자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반란에 적당한 명분을 끼얹으려는 새로운 도참설로 떠올랐지만, 십팔자위왕 때와는 달리 이 설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나마 억지로 끼워맞추면 정(鄭)에서 오른쪽 부수를 뺀 글자 전(奠)은 존(尊)과 비슷하다. 이 글자는 원칙적으로 성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 황실에서 고대에 황족 인명의 끝에 붙인다는 점을 들어 사실 정진인은 천황이고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이 정감록이 예언한 정씨 왕국이었다고 해석은 된다. 이러면 정씨 왕조가 중국 공격하고 왕을 세운다 운운은 중일전쟁만주국 등 일제의 괴뢰국으로 해석 가능.

3. 내용

필사가 반복되면서 판본이 다양하게 형성되었지만, 핵심요지는 조선왕조(木子,李)가 망하고 계룡산에 정씨가(奠邑,鄭)(정도령이라는 진인[5])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6]

정감록 모반 사건의 판본에는 이씨가 망하고 김씨, 유씨, 정씨의 삼국으로 나뉘었다가 최종적으로 정씨가 통일한다고 씌었다고 한다.[7]

다른 판본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8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5백 년(혹은 천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7백 년(혹은 6백 년이나 천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 : 개성) 도읍 천년(혹은 500년)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 왕조가 망하고 정도령, 혹은 정진인[8]이 새 왕조를 세우기 전까지 환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피할 십승지로 피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도 한다.[9]

문제는 이 십승지이다.[10]
그런데 몇 가지 묘한 점이 있다. 십승지로 지목된 곳들이 대체로 남부 지방이고 때가 되면 그리로 옮겨가야 한다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정감록의 형성지는 남부 지방에서 먼 북쪽, 특히 서북 평안도 지역이라고 추정함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봉기인 홍경래의 난이 농민 봉기에서 정감록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첫 사례이다. 이후 홍경래의 이름과 더불어 정감록은 19세기 농민 봉기의 바이블처럼 사용되었다.[12]

해당 지역들은 대읍(大邑, 큰 고을)은 전무하고, 상당수는 산속, 협곡, 바위 그늘 등 일반적 거주지로서는 부적합하지만[13] 대신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렵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다. 즉, 무릉도원이라기보다는 생존주의에서 언급하는 베이스 캠프에 가깝다. 이를 위와 조합하면,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했거나 세금문제 등으로 야반 도주한 사람들이 실제 역사의 빨치산마냥 숨어들기에 최적의 지세가 바로 저 십승지들이다.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정감록 하면 항상 언급되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이란 주문이 있는데, 이것의 해석으로 반란도 일어나고, 동학 등 조선 말 ~ 일제 강점기의 많은 신흥종교들이 제각기 해석해서 교리로 삼았다.[14]

4. 여담

5. 매체

6. 같이보기


[1] 정여립의 난 전에 정여립이 '목자망木子亡 전읍흥奠邑興'(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이라는 문구를 퍼뜨리고 반란군의 최고 수장이 길삼봉, 차장이 정팔룡이라 칭했다고는 한다. 다만 정여립의 난의 실체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2] 정조 9년(1785) 문양해(文洋海)라는 자가 정감록의 영향을 받았는지 가상의 신인을 만들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처형되었다. 이때 문양해는 사람들에게 장차 이씨가 망하고 나라가 세쪽으로 갈라지다가 끝내는 정씨가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선동했다. 아래의 정감록 모반 사건인지는 의문. 김귀주 쪽 사람인 이율, 홍국영의 사촌동생 홍복영이 가담했다. 훗날 구선복 역시도 난을 일으킬 때 앞장설 장군의 운세가 좋은지 문양해에게 물어봤다고 한다.[3] 조선 후기로 가면 양반들이 모이는 사랑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제거리가 바로 정감록에 적힌 예언에 대한 토론이었다고 한다. 비록 정감록이 조선 왕조 내내 반정부 불온문서로 분류되어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이 토론의 대상이 될 만큼, 무척이나 인기 있는 책이었던 것.[4] 쉬운 이해를 위해 비유를 하자면, 정감록은 오늘날 인터넷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글을 쓰고 편집할 수 있는 위키백과와 같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저작권에 대한 법이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글을 써서 책을 내는 필사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감록을 마음대로 추가하거나 편집했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가 퍼트리고 싶은 말이나 믿음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새로운 정감록 판본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5] 진인(眞人)은 도교에서는 수행을 마친 선인의 의미로, 불교에서는 바른 인간이란 뜻으로 쓰인다.[6] 그러나 본문 중에 정도령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7] 정씨의 나라가 건국된다는 내용은 앞서 언급한 정몽주•정도전•정여립의 예를 통해서, 당시 백성이나 조선 왕조 반대 세력들이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체재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8] 한 판본에서는 진인의 사주까지 서술하였다.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로 가운데, 즉 왕을 상징하는 토(土)의 천간이 4개나 있으며 사(뱀)가 진(용)이 된다는 뜻이다.[9] 십승지 중에서도 어느 땅이 좋은지는 해석이 다양하다. 군사적 요지인 곳이 좋다는 해석도 있고, 땅이 기름진 곳이나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 좋다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참고.[10] 다만 정감록의 판본이 워낙 많다보니, 십승지도 정감록마다 다 다르다.[11] 단 이쪽은 이론(異論)이 많다.[12] 단, 본문에선 북쪽 땅은 전부 불모지 취급이다. 단적인 예로 십승지 안에 북쪽 땅이 한 군데도 없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이북 출신들 중 정감록을 접하고 남쪽 십승지 일대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13] 하천 하나씩은 끼어서 거주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많은 피난민을 한꺼번에 부양할 만하진 않고, 척박한 내륙 산악지역이라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평도 있다.[14] 정감록 어느 판본에 '몸을 보전하기에 양궁(兩弓)만큼 좋은 게 없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은 불분명하다. 정감록에 영향을 받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궁을부(弓乙符)라는 부적을 그렸고, 부적을 궁궁(弓弓)이라 일컫기도 했다.[15] 마애(磨崖)라는 단어가 절벽이나 큰 바위에 새겼다는 뜻이다.[16] 심지어 정씨가 아닌 노태우의 선전 만화에는 정씨가 당나귀 정씨로 불리기도 한다면서 귀가 큰 노태우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연결하기도 했다.[17] 마침 정운찬 당시 총리 재임시기(이명박 정부)에 행정수도(현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 이전 논란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18] 출처: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 남민 저/ 소울메이트/ 2014년 3월[19] 이 대목이 최근 학자들이 정도령의 모델이 정성공이라고 추정하게 된 큰 근거이다.[20] 대륙의 기준은 그린란드지만 정감록이 쓰이던 시절에는 없던 기준인데다 당시 사람들이 그걸 알 리도 없고 지금도 지도를 보면 아메리카 대륙은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다 건너에 있는 건 맞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