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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3:36

아인 랜드/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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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철학3. 자본주의
3.1. 고전적 자유주의자3.2. 신용과 시장, 케인스학파 비판
4. 기타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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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인 랜드의 이념들을 정리한 문서.

2. 철학

철학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형이상학인식론이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세계와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기초로 여러분은 인간의 정당한 윤리, 정치, 심미(審美)를 정의할 수 있다(이 경우, 만일 여러분이 실수를 한다면, 그 실수를 정정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준거틀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실이니, 사실이니, 실체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윤리적 정직을 옹호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만일 여러분이 단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다가 그와는 판이하게 느낀다고 공언하는 어떤 야심에 찬 흉한과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철학적 탐색, 1974, 아인 랜드
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또 인간 자신의 정신과 삶의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죄책감의 주요 근원은 내면성찰의 실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감정의 성격과 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을 제외하면, 감정 그 자체는 실재에 대해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내면의 성찰 즉 여러분들 내면상태를 개념적으로 알아내는 것에 철저히 정직하게 빠져들지 않고서는, 여러분들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그 느낌이 현실의 사실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지, 그릇된 반응인지, 혹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자기기만에 의해 생겨난 사악한 환상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내면성찰을 비웃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즉 축소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근본이라 받아들이고 감정이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도록 맡겨버린다. 이는 그들이 현실의 맥락(실재), 원인(동기) 및 그들 행위의 결과(목표)를 모르고 행동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 성찰분야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와 "어떻게 나는 그것을 알 수 있는가?"라는 두 개의 주요한 질문에 의거해 있다. 내면성찰의 분야에서 두 개의 주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와 "나는 왜 그것을 느끼는가?"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자신들에게 일련의 초보적이고도 피상적인 대답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 이외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갈등과 싸우면서, 때로 감정을 억눌렀다가, 감정적 발작에 마구 빠져들기도 하다가, 그것을 후회하다가, 다시 통제력을 잃기도 했다가, 또 내적 혼돈의 신비에 반항도 했다가, 무감각해지기로 결심을 하기도 했다가, 점점더 두려움과 죄책감, 자기회의(이것들은 점점 더 그 해답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가 자라나는 것을 느끼면서 인생을 허비한다.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것이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것인 양 경험하지만, 사실 그것은 복잡하고도 파생적인 총체로서 그로 인해 인간은 가장 흉측한 심리적인 현상의 하나인 합리화를 연습하게 된다. 합리화란 한 개인의 동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뿐 아니라 그 자신으로부터도 숨기는 것, 즉 한 개인의 감정에 그릇된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감정들에게 거짓된 설명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합리화의 대가로 그 개인의 인식능력은 방해받고 왜곡당하며, 궁극적으로는 아예 파괴되고 만다. 합리화란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맞게 실재를 재단하려는 시도이다.

철학적 구호는 손쉬운 합리화의 수단이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감정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한 구호들은 인용되고, 반복되며, 영속된다.
철학적 탐색, 1974, 아인 랜드
"아무도 그 무엇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시샘과 미움의 감정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당신한테는 그 말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은 논쟁의 유효함을 증명할 능력도 없고, 또 그러기를 꺼리고 있음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는 말은 그 자신의 불완전 속에 그대로 빠져 있고 싶은 욕구, 즉 도덕성을 회피하려는 욕구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잖아요"라는 말은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합리화이다.

"그것이 어제는 사실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은 모순을 없애버리기 위한 욕구의 합리화이다. "논리는 실재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요"라는 말은 실재를 한 개인의 변덕에 갖다 맞추려는 욕구를 위한 조악한 합리화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느껴요"라는 말은 단순한 합리화 이상 가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합리화의 과정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어떤 구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 구호(그것이 어떤 구호라도 좋다)를 움켜잡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 말이 실재와 부합되는지 여부에 따라 그 말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자신들의 감정과 잘 부합되는지에 따라 실재를 판단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탐색작업을 하고 있는 도중, 만일 때때로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람들이 그처럼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라는 화가 나도록 당혹스러운 질문들로 인해 저지를 당한다면, 사악한 철학은 합리화의 체계라는 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당신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처럼 당치않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 말도 안되는 생각이 다루고 있는 주제를 잘 살펴보면, 그것이 결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말도 안되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정교한 구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광포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비이성주의자는 감정의 파생적 성격을 감지하고는, 그 감정들의 최우위성이라거나, 위대한 무無이유성을 주장하는 대신 그것들을 현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정당화시키고자 할 것이고, 만일 그것이 현실과 모순될 경우에는 또 다른 현실을 발명해냄으로써 그것들을 지배자가 아닌 겸허한 반응자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에서 여러분들은 실재가 지닌 음울한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철학적 탐색, 1974, 아인 랜드
"본질적으로 나의 철학은 인생의 도덕적 목적으로서의 자신의 행복과 고귀한 활동으로 생산적인 성취, 그리고 유일한 절대로서의 이성과 같은 영웅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개념입니다. "
For the New Intellectual, viii
현 아인 랜드 연구소 사장의 아인 랜드의 사상 소개.

그녀의 철학을 가장 객관적으로 정리한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아인 랜드는 20세기의 사상가들 중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켜 온 인물 중 하나지만 그녀를 둘러싼 그 열렬한 찬반의 감정으로 인해 철학자로서의 아인 랜드에 대한 믿을 만한 평가는 오히려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감이 있다. 이를테면 아인 랜드의 광신적인 숭배자들이 객관주의를 설명한 것을 보면 종종 찬사 일변도이거나 전혀 무비판적인 반면 반대자들이 쓴 글을 보면 종종 적대적이거나 당혹스러울 정도로 부정확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주류 학계에서의 랜드의 철학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지 않고 무시당하는 경향이 많다. 철학 전문 분야 또는 연구 분야로서 랜드 또는 객관주의를 포함하는 대학은 거의 없으며 많은 문학과 철학 부서에서는 그녀를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아닌 대중 문화 현상으로 무시한다.[1] 이는 아인 랜드 본인이 의도적으로 대중에게 접근하길 택했기 때문이 크다. 실제로 아인 랜드는 다른 많은 종류의 철학체제를 무시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기존의 많은 철학인들에게 격렬한 반대를 샀다.[2] 그러나 반대로 아인랜 드는 권리이론과 윤리학에서 매우 독특한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냈다.

지지자들은 아인 랜드의 객관주의 철학은 주류에서 많이 연구되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들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잘 설명한다고 주장하며 주류학계에서는 비현실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나 포스트모던이 더 주류로 받아들여지고 데리다(해체주의) 등은 여전히 주류라는 점을 보자면 그저 비주류와 주류의 차이에 가깝지 객관주의 철학이 학계에서 인정받지 않는다해서 잘못되었다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3]

우선 그녀가 철학계에서 무슨 이단아 내지는 아무 소속이 없는 미아로 종종 간주되곤 하지만 사실상 오히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으로 돌아가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4]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그녀가 이전의 사상을 답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의 사상에 대해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그 특정한 과거의 사상들을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녀 스스로 그 철학적 내용을 개진해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는 것이다. 독창성이라는 것이 항상 찬양받아야 하는 덕목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랜드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독창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란 이론과 주장이 통합적으로 조직화된 체계를 뜻한다고 정의할 때 랜드는 고전적 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사상체계를 일단 구축해냈기 때문이다.

반대자들로부터 공격의 초점이 되곤 하는 논리의 비약이나 개념상의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아인 랜드 철학의 많은 요소들은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대단히 유사하다.

특히 정치철학면에서 인간의 자연권 및 제한된 정부에 대한 랜드의 시각은 소위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전통에 고스란히 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인 랜드의 저서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의 서두에 실린 철학에 대한 랜드의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랜드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그녀가 '존재의 최우위성(primacy of existen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랜드에게 있어서 어떤 세계가 인간의식의 외부에 존재함을 증명하려 드는 것은 불합리하다. 데카르트식으로 한편으로 외부세계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의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사유가 맞지 않는 이유는 의식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따라서 감각이란 유효하다), 외부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인간이 그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한다. 랜드는 움츠린 아틀라스의 주인공 존 갈트의 입을 빌어 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만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식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의식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의식이란 그 용어상으로 이미 모순이기 때문이다. 의식 자체만을 의식하는 의식이라는 것도 역시 용어상으로 모순이다. 의식이 스스로를 의식이라고 인정하기 전에 이미 그것은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의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 의식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지극히 건강한 관점이지만, 그 역시 강력하게 아퀴나스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룬 책의 저자인 셀레스틴 N. 비틀(Celestine N. Bittle)은 위에서 랜드가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의식의 재귀적인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의식에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의식적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평자들은 랜드가 이처럼 고전적인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 되는 인식론에 익숙한 현대 철학자들에게 무시를 당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대부분 임마누엘 칸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 객관주의를 부르짖으며, 외부세계의 존재를 그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는 최악의 경우, 상대할 가치도 없는 낙관적 유치함의 결과로 간주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 혹은 바뤼흐 스피노자 등의 고전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랜드 역시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러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하는 것을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인간의 의식(에 쌓인 데이터), 이를테면 '인상'이나 '사고'만을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고 "어떻게 이러한 데이터에서 우리는 이 데이터와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데카르트나 데이비드 흄, 무엇보다도 임마누엘 칸트를 신랄히 비판한다.

단적으로 말해, 랜드는 이러한 칸트 및 그 추종자들의 인식론적 전통으로 인해 1) 실재(reality)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2) 지식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이성이란 것도, 인간이 무엇을 안다는 것도 하나의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3) 인간의 정신이란 무기력한 것이다라는 등의 개탄할 만한 주장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랜드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것이지 거기에 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존재는 '자명한 개념'인 것이다. 존재의 최우위성이라는 이러한 견해는 곧 객관주의, 이성존중 등 랜드의 핵심 사상으로 이어진다.

랜드가 가장 존경했고 나름대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가장 유사함을 보이는 부분은 바로 윤리학의 면에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가치판단의 타당성은 실제 사실에 견주어서 확인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고, 이것은 곧 "가치란 자연의 사실에 불과하다 Values are simply facts of nature"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둘 모두 인간의 행복을 인간의 삶이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조망하고 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 둘 모두 행복을 순간적인 만족이나 기쁨으로 보지 않고 이성적 방식으로 이성적인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선한 삶에서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비취(Veatch)에 따르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는 곧 윤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문제이다)는 결국 '그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이로운가를 아는' 문제라고 얘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에서 보자면 윤리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말을 배우거나 걸음걸이를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는 미덕이고 이타주의는 악덕"이라고 랜드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역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개념과 연결해서 보면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이기주의는 인간의 약점이기는커녕 오히려 드문 강점이다. 흔히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니까" 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당연시하거나 냉소하지만, 이기심이란 당연시되어서도, 또 지탄받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잘 배우고, 잘 양육되고, 칭찬받고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정신에 끝까지 충실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성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기주의를 거부할 경우 대체로 두 개의 대안이 있을 수 있다. 그 첫째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위해 그 자신을 희생하는 중세적인 태도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로 흔히 이타주의라고 불린다. 이타주의란 단순한 친절, 관용, 선의의 동의어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남을 나보다 우선시 생각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랜드는 자신의 여러 주요 글들에서, 이러한 두 가지 대안의 모순과 사악함을 이론, 실제 및 역사적인 견지에서 반박한다. 여기서 이기주의란 결코 자신의 욕망, 이익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도덕적인 권리를 침해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므로, 아인 랜드가 주장하는 이기주의의 원칙에 의거해서 볼 때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러한 무책임한 이기적 태도는 궁극적으로 쌍방 모두에게 피해를 가져올 뿐이다.

객관주의에 따르면 이기주의란 모든 인간이 각자를 위해, 각자의 삶이 요구하는 가치와 미덕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움츠린 아틀라스의 존 갈트가 잘 요약해주고 있다. "내 목숨과, 내 목숨에 대한 사랑을 걸고 맹세하건대,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살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위해서 살아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그녀에게 있어 자기희생을 내세우는 이타주의는 죽음의 도덕으로 간주되는 반면, 이기주의 예찬은 곧 자본주의 예찬으로 이어진다.

"Global Balkanization"이라는 글에서 랜드는 다음과 같은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탐욕의 체제라고 불리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빈곤한 사람들을 어떤 집단주의 체제도 겨루지 못할 수준으로, 또 어떤 부족적인 집단도 꿈꿔보지 못해봤을 수준으로 끌어올린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민족주의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것은 종족을 추방하고 미국에서 과거 적대적이었던 수많은 인종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제도이다. 자본주의는 잔인하다고 불리어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 발전, 총체적인 선의를 가져온 제도이다. 자존심, 존엄, 자신감, 자기존중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러한 것들은 자본주의를 제외한 어떤 사회체제 속에서도 인간을 지탄받게 한 속성들이다."

위의 인용에서도 분명히 토로되고 있듯이, 자본주의는 그녀가 가장 열렬히 옹호해온 체제이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움츠린 아틀라스은 뭐니뭐니해도 자본주의를 열정적으로 신격화시킨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인한 개인주의자이자 합리적인 이기주의의 신봉자인 랜드는 그 제도야말로 개인권의 인식에 기본을 둔 유일한 사회체제며, 사회적 관계에서 강압을 뿌리뽑을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며, 근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만이 인간의 합리적인 본성과 조화되며, 그 제도만이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보호해주며, 그 제도만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랜드의 자본주의 옹호가 기존의 옹호론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애덤 스미스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대부분 '공공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면에서 이를 옹호하였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진정한 근간이 된다는 점은 간과해왔다. 따라서 급기야 칸트 이후 개인의 자유란 필요악인 것처럼 취급되었다고 랜드는 주장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는 원래 '신중함'이라는 무도덕성과 탐욕이라는 사악함을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고상한 사회사업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미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가 의거하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요소는 최소화시키면서 오히려 그 사회적인 결과만을 강조하는 꼴이라는 것이 랜드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 사회적인 효과로 인해 도덕적 우선권을 갖는 것으로 그릇되게 홍보하는 반면, 자본주의가 지닌 고유의 미덕, 즉 개인주의라는 면에 대해서는 점점 더 양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아인 랜드는 자본주의란 재산권을 포함한 모든 개인권을 인정하는 데 의거하고 있는 제도라고 정의한다. 이는 자본주의에 따른 결과('공공의 이익')와는 관계없이, 자본주의가 과연 어떤 기본적인 것에 의거하고 있는가를 얘기하려 한 것이다. 개인주의 및 개인의 독립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본주의는 결코 그 목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정의란 인간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고 각 개인이 받아 마땅한 것을 그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 비로소 이러한 정의가 가능하며, 자유로운 개인은 그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공의 이익'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결과일 뿐 자본주의를 평가하는 최우위의 요소는 아닌 것이다. 물론 다른 모든 사회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도 경쟁이라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은 개인의 자유라는 단 하나의 공통된 근저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따라서 그녀에 따르면 '자유방임(laissez faire) 자본주의'라는 말은 의미의 중복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곧 자유방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자들, 이를테면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주장하는 자들은 부의 불공평한 배분이니 착취니 하며 자본주의를 공격하지만, 랜드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이성적인 개인의 이익추구에 보답하는 제도이다. 자본주의와 이기주의의 밀접한 관계는 정신적, 물질적인 여러 면에서 뚜렷하다.

광범위하게 보았을 때 이윤동기란 한 개인이 그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일하게 하는 동기를 말한다. 객관주의의 기준에서 보자면, 그러한 동기는 전적으로 정당하며, 따라서 지극히 도덕적인 것이다. 사업가를 예로 들어볼 때 이윤이란 사업가가 사업에 들인 비용과 그 수입과의 차액이다. 만일 어떤 사업체가 있다고 할 경우, 사업주는 생산과 판매의 과정을 거쳐 일정한 자본을 축적해갈 것이고 사업주는 사업에 관련된 여러 가지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제품생산에 투자를 할지, 어떻게 그 사업체를 더 효율적으로 꾸려갈지 등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로써 그가 얻는 이윤은 그 사업을 이끌어 가는 그 자신의 창의력과 노력, 장기적인 비전, 용기, 효율성, 위험부담 등에 대한 보상이다. 마르크시즘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에서 보자면 이윤은 착취의 결과에 불과한데, 만일 오로지 육체노동에 의해 부가 창조되는 것이라면, 조립라인에 서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기생인간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록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랜드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열렬한 애국심을 보인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정치적인 기조[5]를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장 유사하게 구현해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음의 미국 독립선언문 속에 기술된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부분은 곧 랜드의 정치철학적 근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 그들은 특정한 고유의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에 속한다는 것, 이러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국민들 사이에 정부라는 기관이 존재하고, 정부는 피지배자의 동의를 통해 정당한 권력을 얻게 된다는 것, 이상은 자명한 진실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녀가 미국에 대해서 가장 우려했던 것도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가 되어야 마땅한 미국인들이 앞장서서 자본주의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본주의의 핵심 비전 속에 내포된 도덕성에 의거해 자본주의를 옹호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자본주의자들이 주변적인 현실적 근거에 의거해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있다고 그녀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랜드는 모든 다른 사회체제는 인간정신 기능의 모든 본질적인 면과 서로 충돌하지만, 자본주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의 이성적인 사회적 욕구에 맞물려 있는 유일한 '도덕적' 사회체제임을 강조한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랜드의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특성과 필요를 인지하고 이성과 사실에 의거해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제도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대의 자유지상주의자들 상당수는 아인 랜드를 읽음으로써 현재와 같은 견해에 도달하게 된 경우가 많다. 그들이 제한된 정부를 선호하건, 혹은 무정부주의를 선호하건간에, 최초로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행동이나 사상면에서 그들에게 원칙의 결정적 중요성을 각인시켜준 것이 바로 아인 랜드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랜드가 자유지상주의자로 분류되기는 어렵다.

개인권과 최소한의 정부를 옹호한것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정치운동에 호소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이기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사실 그녀 자신은 '권리의 히피들'이니 '무정부주의의 옹호자들'이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을 비난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무정부주의를 부정했다.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무정부 상태는 순진한 떠돌이 추상화입니다. . . 조직화 된 정부가 없는 사회는 동행한 첫번째 범죄자의 자비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범죄자를 갱단의 혼돈 속에 침투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부도덕의 가능성은 무정부 상태에 대한 유일한 반대가 아닙니다. 모든 구성원이 완전히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도덕적이었던 사회조차도 무정부 상태에서 기능 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 설립을 필요로하는 사람들 간의 정직한 의견 불일치에 대한 객관적 법률과 중재인의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The Virtue of Selfishness, 112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는 극우파의 편에 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신비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였고 종교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심히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반면 집단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아인 랜드의 평생에 걸친 혐오감은 앞서 설명했듯이 러시아에서 태어나 볼셰비키 체제가 자리를 잡던 시기를 직접 겪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1979년 필 도나휴로부터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녀는 "혐오 그 자체"라고 대답한 바 있다. "러시아는 이 지상에서 가장 흉물스러운, 따라서 가장 신비스러운 나라"라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자유로운 사고와 창조력을 억압하는 국가 주권주의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그녀의 자본주의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나란히 궤를 이루고 있다.

제1차적으로는 소설가였지만, 아인 랜드는 분명 하나의 철학체계를 구성해낸 철학자이자 사상가이기도 했다. 야망찬 소설가였던 그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세계가 현대의 지적 기류 속에서는 찾아보기 불가능했기 때문에 철학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한다. 이성적인 철학을 발전시킨 다음에라야 자신이 그리는 로맨틱한 소설의 설 자리가 있겠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한편으로는 소설가이자 극작가로서 글을 쓰게 되었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주의라는 철학체계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성적인 도덕적, 정치적 체제와 그러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의 비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그녀의 주장은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공감을 갖게 하는 데에도, 또한 분노를 자아내게 하기도 했다. 그녀의 철학을 하나의 새로운 통합된 체계로 받아들이고 열렬히 숭배한 추종자들도 많았던 반면,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철학적 훈련을 받은 철학계의 적자들은 그녀의 철학체계에는 개념, 정의, 혹은 논리의 발전상 상당한 허점이 있다고 공박했다. 특히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듯이,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논쟁가로서의 그녀의 독설 때문에 실제 많은 철학자들은 아예 상대할 가치가 없는 듯이 취급함으로써 그녀에게 응수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독설 때문에 그녀의 명철함이나 영향력이 부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니체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등도 모두 대단한 독설가가 아니었던가? 그 외에 랜드가 종종 무시되는 또 하나의 이유로는 그녀가 아카데믹하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다른 철학자들을 상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라, 대중매체도 즐겨 이용하며 일반인들을 상대로 얘기해왔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랜드가 과거의 철학개념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랜드는 진정코 철학이 삶을 '좌우한다'고, 즉 철학은 당장 철학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화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제자 레너드 페이코프는 랜드는 철학자인 동시에 광범위한 독자층에게 사상을 전달하고자 했던 전문지식인이라고 정의한다. 게다가 그녀는 '시장성에 입각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궤변가들처럼 그녀는 사상을 지적 시장에 내다 팔았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기존세력들의 분노를 자아냈다는 것이다. 소위 시장을 상대로 한 지식인으로서, 랜드는 학계에 속하지 않는 보통대중들을 상대로 자신의 논의를 펼쳤다. 그녀는 기본적인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보통사람들의 능력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2.1. 객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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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성 존중

"나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 옹호자라기보다는 에고이즘의 옹호자이다. 또한 나는 우선적으로 에고이즘의 옹호자라기보다는 이성의 옹호자이다. 만일 우리가 이성의 지고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적용한다면, 나머지 것들은 그대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이것, 즉 이성의 지고(至高)함은 과거에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내 연구의 가장 주된 관심사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객관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 The Objectivity, 아인랜드, 1971. 9.

우선 이성은 아인 랜드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객관주의의 모든 것은 바로 "이성을 따르라"는 명령 속에 압축되어 있다고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성이란 지극히 복합적인 고단계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함축하는 바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세심한 논의가 요구된다. 랜드에 따르면 이성이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제공된 요소들을 확인하고 통합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이를 바꿔 얘기하면, 감각을 통해 얻은 정보를 객관적인 인식형태의 요구에 조화되게 축약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다시 말하면, 지각을 통해 얻은 요소들을 논리의 법칙에 따라 개념적인 용어로 조직화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세 가지이다. 즉 이성의 자료가 되는 지각, 이성의 형태인 개념, 이성의 방법인 논리가 바로 그것들이다. 감정은 '인식의 도구가 아닌' 반면 이성은 인간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성은 일종의 판단능력인 것이다.

이성적인 탐구란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고에 의해 인도되며, 오직 증명 가능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증거로서 인정한다. 그렇다고 객관주의가 반감정주의는 아니다. 인식론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지만, 감정도 분명 인간생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단지 감정의 역할이란 어디까지나 실재의 발견과는 다른 것이다. 객관주의는 감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주의'에 반대한다. 만일 한 개인이 사고와 감정 사이에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는 제1차적으로 자신의 사고를 확인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모순되지 않는 새로운 통합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감정적인 조화를 이루는 의식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는 곧 인간의 삶에서 이성이 우선이고 감정이 그 결과임을 보여준다고 랜드는 주장한다.

감정주의와 이성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이성은 주관적인 감정이 발언권을 얻는 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행위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보는 신비주의자들[6]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그가 실재라는 개념을 인정한다고 할 때)란 알 수 없다고 결론짓게 될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것만 믿고, 회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모른다"고 잡아뗄 뿐이라고 랜드는 이 두 그룹을 통렬하게 공박한다.

이 둘 모두 감정을 길잡이로 삼는 감정주의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 랜드의 생각이다. 이 둘 모두 인간의 논리에 대한 갈구를 거부하며 오직 독단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려 할뿐이라는 것이다.

2.3. 평등주의에 대한 견해

사악한 무책임성의 고전적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로마가 불타고 있는 동안 바이올린을 켜며 시를 노래했던 네로 황제의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좀 덜 극적이지만, 그와 유사한 행위의 예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그 역할을 하는 배우들에게는 조금도 장엄한 요소란 없다. 거기에는 부풀려진 단 한 명의 괴물이 아니라 한 무리의 영양실조에 걸린 교수들이 연루되어 있고, 그들이 내는 소리는 그 가식성을 제외하고는 시(심지어 아주 형편없는 시라도)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그들은 불 주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고, 남을 돕고 싶다고 노래하면서 버려진 종이들을 불꽃 위에 들이붓고 있다. 그들은 전례없는 재난의 맨 가장자리에 놓인 지도자 없는 나라에 평등주의를 설교하는 무정형의 지성인들이다.

평등주의란 사실 너무도 사악하고 너무나 어리석은 원칙이어서 심각한 연구나 논의의 대상이 될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원칙은 특정한 진단용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변장과 은닉을 통해 지난 2백여 년 동안, 혹은 그 이상 동안 문명의 내벽(內壁)을 갉아먹어 온 숨겨진 질병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이다.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한 가족내의 얼빠진 구성원처럼, 평등주의는 어두운 벽장에서 도망나와서는 전세계에다 대고 그의 동정심 많고, '인도주의적'이며, 이타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형제들의 진짜 동기는 사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들을 멸망시키려는 것이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선하다는 이유로 선을 미워하는 것이 그들의 동기이며, 그 미움은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 즉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로 그 구체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들의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평등주의자들의 희망 근저에 놓인 정신적인 과정은 다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확인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둘째, 따라서 인간의 능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그러므로 그들은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워버릴 사회적 계획을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의 논의에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은 인과법칙에 대한 평등주의자들의 항거이다. 그들은 불평등한 원인에서 평등한 결과를, 혹은 불평등한 업적에 대해 평등한 보상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나는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고의 사회학과 교수인 베넷 M. 버거(Bennett M Berger)가 쓴 서평({더 뉴욕타임스 북 리뷰}, 1974년 1월 6일자)에서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그 서평은 허버트 간즈(Herbert Gans)가 지은 {더 많은 평등(More Equality)}이라는 책을 논하고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고, 또 읽을 생각도 없다. 그런데 특히 흥미롭고 시사적이었던 것은 서평자 자신의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허버트 간즈)는 애초부터 자신이 기회의 평등(오늘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 즉 통상 '여건의 평등'이라 불리어온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소득, 부, 그리고 권력의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다…… 간즈에 따르면, 소득의 재분배(대부분 신용소득세(Credit Income Tax)라는 형태로)를 통해, 그리고 권력의 분산을 통해 더 많은 평등이 성취될 수 있다. 이때 권력의 분산을 위해서는 단계화된 조직(예를 들어 회사나 대학 등)내에서 더 많은 평등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정치적으로 더 큰 유권자층을 이루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다수에 의해 계속 투표에서 밀리는 일이 없도록 불평등의 가장 큰 피해자인 소수파들에게 안전막을 제공해주는 일종의 '공동체 통제(community control)'에 이르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끊임없이 투표로 평가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불공평하다면, 가장 소수파에 해당되면서 투표를 하면 다른 그룹들에게 지는 거대 사업가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버거씨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경제적 힘과 정치권력을 계속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믿는 듯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무엇이라고 대답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건 그는 '민주주의'의 숭배자는 아닌 것이다.

버거씨는 허버트 간즈를 특정한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정책과학자'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그는 자신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얼마간 드러내준다. "이 병의 일부는 그 정책과학자(그런데 그는 엉터리로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옹호하는 변화를 호소력 있게 추진해나가는 데 필요한 사실, 이성, 그리고 계획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를 사로잡고 있는 악몽으로 인한 것이다. 그 악몽 속에서 정책과학자는 직책을 갖게 해준 후원자들과 유권자들로부터 정치적인 은혜를 입고 있는 국회의원회와 행정관료들로 인해 좌절되고 패배를 맛보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그가 그의 길을 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버거씨가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비단 물질적인 부라고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도록 다음의 글을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를테면 권력의 분산이 반드시 더 많은 평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타운미팅 같은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조차도 지역 정치공동체(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서는 더 학력이 높고, 더 명확하고, 더 정치적으로 정통한 사람들이 지나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다)를 제거하는 데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말은 곧 교육받은 자와 무식한 자, 명확한 자와 횡설수설하는 자,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참여하는 자와 나른하게 처져 있는 수동적인 자가 모든 사람의 삶에 똑같은 영향력, 똑같은 권력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평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총이다.

버거씨는 자신은 간즈씨의 평등주의에는 동의하지만, 더 많은 평등이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옹호함으로써 과연 그것이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솔직한 냉소로써, 버거씨는 '또다른 전략'이 있다고 제안한다. "평등주의에의 옹호는 불가피하게 다른 자유주의적 가치들, 이를테면 개인주의나 업적 등과 대치되고 만다. 그러나…… '시민권'의 옹호는 그런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사는 전체인구 중 더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완전한 기능의 시민권을 갖도록 해주기 위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리'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역사이다…… 20세기에는 인종적, 성적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 또 더 나은 주거환경, 더 나은 의료혜택, 더 나은 교육을 누릴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그 투쟁은 '평등'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그들 자신의 책임을 발휘해야 하는 시민(그들은 정의상(定意上) 서로 동등하다고 되어 있다)을 위해 필요한 여건이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지평 너머에 어떤 '권리'가 놓여 있는지 누가 알 것인가? 오르가즘에의 권리? 아름답다고 느낄 권리? 나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 나은 시민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시민권'이라는 용어를 전체주의적인 개념, 다시 말해서 삶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개념으로 부풀림으로써 평등주의적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버거씨가 이데올로기적인 함정을 설치하는 데 그처럼 노골적으로 조언하고 있다면, 과연 그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멍청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일까? 보통사람들일까? 아니면 개인주의와 업적을 잊는 대가로 그가 '오르가즘에의 권리' 같은 미끼를 던져주려고 하는 지식인들인가? 나는 당신의 추측 또한 내 것만큼이나 똑바른 것이기를 바란다.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 1974, 아인 랜드
월스트리트 저널(1974년 4월 19일자)에 실린 {아옌데의 유산(Allende's Legacy)}이라는 글에서 저자는 능력과 성격, 지식, 업적, 두뇌에 관계없이 소득과 부, 그리고 권력이 동등하게 배분되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보이고 있다.

"군대가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행동에 들어갔을 즈음, 물가는 2년만에 1천 퍼센트 이상 뛰었으며, 마지막 날에도 하루에 3퍼센트씩 오르고 있었다. 국가재정은 글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사회주의 정부는 여러 개의 미국인 소유 산업체들을 장악했다. 새로운 군사정부는 미국인 경영진들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했고, 그들 대다수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 칠레에 플라스틱 공장을 갖고 있는 도우 화학회사(Dow Chemical Company)가 있었다. 봅 G. 캐드웰은 남미 쪽 경영을 맡은 책임자였는데, 그 공장들 중 남은 게 무엇인가를 둘러보기 위해 기술팀과 함께 오게 되었다.

"우리 앞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공장은 여전히 작동 가능했지만, 이후 6개월만 지나면 공장의 어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참이었죠. 그때까지 그들은 아무 것도 검사해보지 않았던 겁니다. 밸브는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부식성이 강한 화학물질이 마구 새나오고 있었는데, 그 물질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식시킬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 공장에서 취급하던 극도로 발화성이 강한 화학물질이 언제라도 폭파할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안전이라는 건 전멸상태였죠." 캐드웰씨는 계속 설명한다.

"소화체계는 다 끊어져 있고 밸브는 다른 데 쓰려고 어디 밖에 내다놨더라구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당신네들이 이전에 여기 있었을 때도 불이 한 번도 나지 않았다면서요? 그러니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일 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이 보여주고 있는 정신상태(이러한 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정신상태)는 모든 인간의 악들 중 가장 혐오스러운 악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 새로운 칠레정부내의 일부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화학공장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 행위의 결과는 아직 그렇게 즉각적으로(그렇다고 그 결과가 그렇게 한참 뒤에 나타날 것도 아니지만)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노동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부는 아옌데 정부가 수립했던 형식과 조건에 의거하도록 모든 노동계약을 동결시켰다. 예를 들어 도우 회사의 계약에는 "모든 공장의 플라스틱 조각은 노조에 갖다준다. 그러면 노조는 그것을 판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 조항을 바꾸고 싶습니다"라고 그 회사직원은 얘기한다. "그 조항 때문에 노동자들이 플라스틱 조각만 생산하려고 하니까요."

이번에는 커다란 샌디에고 텍스타일 회사의 경우를 보자. "그 회사가 1천3백여 근로자들과 맺은 계약은 글자 그대로 파산을 보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텍스타일 회사의 고용인들은 그들 임금의 일부로 일정한 만큼의 천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었고, 37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는 얼마든지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 가격은 그 회사가 손해보고 파는 가격이었다. 알렌드 대통령 통치하에서 근로자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그 천들을 암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알렌드 정부를 지지한다고 확언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한 정책 하에서 과연 어떤 회사, 어떤 나라, 혹은 어떤 부류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알고 있다. 물질적인 부족은 대중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가운데(그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평등주의 정부가 만들어낸 훨씬 더 심각한 또 다른 부족의 결과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경험함으로써 칠레는 심각할 정도로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의 부족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수많은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알렌드 체제하에서 그 나라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군사정부가 제시한 여러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뿐더러, 더 많은 핵심적 인물들이 해외의 더 나은 자리를 찾아 계속 떠나갔던 것이다…… 한 사업체 간부는 말했다. '이곳 칠레에서는 착한 사람들은 반드시 넉넉한 봉급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 미국에서 우리는, 마음 착한 사람들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면 안된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라고 듣고 있다.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버거 교수, 혹은 간즈 교수, 혹은 롤스 교수는 외친다. 그리고 만일 착한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또한 버거 교수는 우리는 모두 동등하다고 정의되기 때문에 '핵심적 인물'이라는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롤스 교수는 얘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똑똑한 두뇌 같은 불공평한 혜택을 받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간즈 교수는 우리에게 더 많은 평등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소화시스템을 고안해낸 사람과 발화성 화학물질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똑같은 봉급을 받아야 하고, 과학과 생산을 공동으로 통제함에 있어 똑같은 영향력, 똑같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뇌유출'이라는 용어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정부가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는 어떤 문제를 일컫는 말이다. 그들 정부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조국에 묶어놓음으로써 그 문제를 풀려 하지만, 사회이론가들은 두뇌와 생산 사이에 어떤 연관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다. 이 지상의 구석구석에 놓인 노예우리를 벗어나 자유를 찾기 위해 말이다. 노예를 조종하는 사람들과의 협동을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도덕적 행위거니와, 부수적으로는 그들이 인류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서비스(물론 그들은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이기도 하다. 그들의 명예를 위해서, 그들의 가치에 감사하고 그들의 중요성을 인정해주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세계의 곤경에 대한 염려를 토로하는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시선을 돌리고 알기를 거부했다. 실제적인 사람들은 사태를 알고 있었지만 침묵을 지켰다.

사회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이 칠레의 눈먼 야만인들에게 자네들도 모두 남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얘기한다면, 산업체들을 잡아채서는 암시장 축제에서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그들 야만인들에 대해 산업체란 손해를 보고는 운영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 못한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기업경영실, 대학강의실, 신문사설, 국회의사당 등에 속해 있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모든 물건에 제값이 붙어 있다는 것, 혹은 오늘 무엇인가를 강제로 차지하면 그 대가로 내일 굶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야만인들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만일 칠레의 어떤 공장이 망한다면 평등주의자들은 약탈할 다른 공장을 찾을 것이다. 만일 그 다른 공장이 휘청거리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올 것이다. 만일 은행에 돈이 없으면 그들은 외국정부로부터 돈을 꿔올 것이다. 만일 그 외국정부가 돈이 없으면, 그들 모두는 미국에서 돈을 빌릴 것이다.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나라 자신도 모르고 있기는 하지만)은 바로 미국도 파산상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하려 하든 그렇지 않든 이 세상에는 정의가 존재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보복을 당하고 있다. 그 보복을 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 보복의 무기는 너무 느리고, 너무 조용하고,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복의 결과(그 뒤에 남게 되는 완전한 파괴, 신음소리)로 인해서만 그 무기를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무기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실로 인해 생겨나는 인간이 빚어낸 재난이다. 그것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저질러지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 엄청난 규모로 인해 죄가 보호되기까지 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정신적 통찰력은 그 엄청남 앞에서 무너지고, 외면적인 복잡성 때문에 그 범죄는 공공연히 공적으로 행해지도록 허용된다. 수백 년 동안 인플레이션은 차례로 여러 나라를 무너뜨려왔지만, 인간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으며,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보다 더 지독한 처지였다. 동물들이 앞다투어 푸주간을 찾아다니는 격이었으니 말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인플레이션의 선결조건이 심리인식론적인 것이라고, 즉 인플레이션은 개념적 연결고리가 파손됨에 따라 생겨난 지각의 환상 아래 감춰진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여러분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바이다.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 1974, 아인 랜드
새로운 평등주의의 경우, 그것을 뒷받침하는 학문적인 출처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최초의 책은 아닐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괄목할 만큼 주목을 받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인 존 롤스(John Rawls)가 지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라는 책이다.

{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1972년 12월 3일자)에서는 그 책을 '1972년의 가장 중요한 5권의 책'에 넣었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록 그 책은 1971년에 출간되었지만, 1972년에 이르러서야 폭넓게 논의되었다. 그 난해함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평가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수년간 연구하지 않고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 {더 뉴욕타임스 북 리뷰} 자체도 1972년 7월 16일에 이르러서야 그 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뉴욕 시립대학교 철학교수인 마샬 코헨이 쓴 서평이 그 책의 맨 첫머리에 출간되었다. 그 서평이 발표된 시기가 조지 맥거번의 유세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것은 완전한 우연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또 읽을 생각도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러나 서평만으로 어떤 책을 판단할 수는 없기에, 지금부터 논의하는 내용은 서평에 대한 서평이라고 간주해주기 바란다. 코헨씨의 언급은 나름대로 주목받을 만한 것이다.

그 서평에 따를 것 같으면, 롤스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부, 권력 및 권위의 불평등이 정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불평등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작용되리라 합리적으로 기대될 수 있을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의사를 훈련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그 비용을 초래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은 업적이 훌륭한 기업가들에게 주는 보상금처럼, 그 비용을 제거하거나, 더욱 줄여버릴 경우 가장 못 사는 사람들이 더 못살게 될 경우에만 허용 가능하다. 만일 의사들에게 비용을 들이는 불평등을 허용함으로써 가장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거나 그들의 물리적 여건을 개선할 수 있다면, 그 불평등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등은 바로 그러한 정도까지만 정당화된다. 즉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더 훌륭한 선천적 이점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 혹은 더 유리한 사회적 여건 속에 태어난 사람들의 정당한 공과(功過)로서는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이 롤스씨 논문의 정확한 요약이라고 가정하자. 그 {더 뉴욕타임스 북 리뷰}의 12월 3일자 짧은 광고는 다음과 같이 앞서의 논의를 확언해준다. "재능 있는, 혹은 사회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노력해서 얻지 않았다. 그(롤스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든 날 때부터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시킨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들 행운에서 득을 취하도록 허용된다.'"

"……생산자들의 존재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바로 그에 기생하는 식객들 그 자신들이다. 그러나 식객들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존 갈트, [이타주의를 분석하면서], <움츠린 아틀라스>

어떤 악은 그 자체가 하도 엄청나서 보호를 받는 경우가 있다. 롤스로부터 인용한 글을 읽고 하도 기가 막혀서 씌어진 그대로의 의미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인즉 씌어진 그대로가 바로 그 글이 의미하는 바이다. 롤스씨(및 코헨씨)는 사회제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재능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 정치적 특권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재에 대해서, 정부의 특혜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즉 자연에 의해 특혜를 받아온 사람들(마치 '특혜'라는 용어가 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에 대해서], 사회적 불공평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불공평'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두뇌를 갖고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보다 두뇌를 더 잘 이용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새로운 '정의이론'은 사람들 사이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생각하기도 싫은 성격의 불공평을 제기하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의 '불공평'에 맞설 것을 요구한다. 즉 그것은 '자연의 특혜를 받은 사람들'(즉 재능 있고 똑똑하고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창출해낸 것을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아 무능하고,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들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보상을 창출해낼 수도 상상할 수도, 또 사실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모르는 그 무능하고 멍청한 사람들이 손 하나 까딱 않고 그 보상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코헨씨는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데 반대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롤스씨에 따르면 인간이 각기 다른 선천적 능력을 가지고, 각기 다른 사회적 지위에 속하도록 태어났다는 것은 공평하지도, 또 불공평하지도 않은 일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적 사실에 불과하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다음 문장은 왜 필요한 것일까?) 물론 남보다 더 큰 선천적 능력을 가질 자격이나 사회적으로 더 유리한 출발선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선천적, 사회적 '제비뽑기'는 도덕적 견지에서 보면 마구잡이식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제비뽑기는 이러한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평등주의자들의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를 다루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러한 개인간의 선천적, 사회적 차이는 모두의 이익,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불운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 만일 어떤 자연적 사실이 공평하지도 불공평하지도 않다면, 도대체 어떤 정신적 비약에 의해서 갑자기 그것이 도덕적 문제, 정의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왜 그 '자연적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불공평하지도 않은, 그리고 그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것에 대해 보상해야 하는 것일까?

코헨씨는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 얘기한다. "그렇다면 정의(正義)에 따라 자연적 기회와 사회적 행운은 집단을 위한 자원으로 간주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정의는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나누어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 이상이 바로 607쪽짜리 책을 읽고 '그 난해함을 이해하기 위해' 한 해를 보낸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이론인 양 간주된다는 사실 자체가 롤스씨의 독자들과 숭배자들이 지난 2천여 년간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준다. 그 책에는 이외에도 많은 내용이 들어 있지만 지금은 이쯤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하자.

인간에 대한 코헨씨(및 평등주의자들)의 관점이 글자 그대로 어린이용 동화에 나오는 견해와 똑같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 견해에 따르면 태어나기 전의 인간은 일종의 불확실하고 정체성이 없는 존재, 이를테면 아무 형체도 없는 진흙덩어리나 마찬가지이고, 요정이 나타나 여러 가지 속성('특혜'), 이를테면 지능, 재능, 미, 부, 부모, 등을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속성은 '마구잡이로'(이 말을 자연적 과정에 대해 적용한다는 것은 터무니없을 만큼 부적절하다) 주어져서, 태아 전단계의 비실체들 사이에 '제비뽑기'가 행해지게 되고, 승자는 사실 그의 '행운'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기' 때문에, 생후 인간은 인간으로서 어떤 것도 노력해서 얻거나 받을 만한 자격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소위 말하는 성숙한 지성이 결론짓는 바에 따르면 그는 '받을 자격이 없는' '부당한', 그리고 '노력해서 얻지 않은' 속성에 의해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노력해서 얻는다는 것은 결국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당신의 개인적 속성을 선택하고 노력해서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에도 특정한 가치는 있다. 즉 이는 모든 이타주의 이론의 근간이 되고 있는, 이른바 능력 있는 인간을 향한 거대한 질시와 미움을 투사하고 있는 심리적 고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낡아빠진 이타주의적 헛소리 중 가장 천박한 것을 늘어놓음으로써 롤스씨의 책은 이타주의의 궁극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그것은 윤리적 개혁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의의 이론(A Theory of Justice)}을 제1차적으로 윤리에 대한 책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논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내용을 믿건 말건, 사람들은 그것을 자본주의를 구하는 한 방법인 양 받아들일 수도 있다. 롤스씨는 이른바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도덕적 정당화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롤스씨가 겨누는 논쟁의 화살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그것은 공리주의자들을 향하고 있다)에 주목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다.

19세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명실공히 자본주의의 모든 옹호자들은('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과 더불어) 공리주의 윤리를 그들의 도덕적 근간이자 정당화로 받아들여 온 반면, 자본주의와 이타주의적-집단주의적 성격의 공리주의 윤리 사이의 경악할 만한 모순은 회피해왔다.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공평성과는 조화될 수 없다고 코헨씨는 지적한다(나는 이 점을 1946년에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나의 소논문[미국주의의 교과서(Textbook of Americanism)]을 참조하라).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이타주의에 계속 집착한다면, 롤스씨는 그들이 이미 오래 전에 받았어야 마땅한 보복에 해당된다. 롤스씨는 그들보다 훨씬 강력한 일관성을 가지고 그들의 낡은 윤리기준을 새로운 기준('가장 대접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위한 최대의 행복')으로 대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된 목적은 과거 공리주의가 대체했던 사회계약이론을 정치적 도덕적 근간으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존 롤스의 견해에 따르면 '루소와 칸트의 사회계약이론'(그걸 모른다고?)은 공리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

코헨씨는 롤스씨가 '사회계약'을 확립하기 위해 진행해갈 길을 계속 요약해서 보여준다. 인간은 그가 '본래의 위치'라고 부르는 것 속에 위치될 것인데 그 '본래의 위치'란 자연상태가 아니라 '언제고 들어갈 수 있는 가상의 여건'이다. "사회를 다스릴 원칙들이 '무지의 베일' 뒤에서 선택되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정의가 보장될 수 있다. 코헨은 말한다. "이 베일은 그 '본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선천적 능력이나 자신들이 속하는 사회계층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에 이러한 무지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이 정당할 것이라고 무작정 믿게 만든다. 아울러 '본래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성적일 것이라고 가정되기 때문에(?!), 똑같은 주장으로 그들 모두를 설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계약 전통에서는 정치적 원칙이 만장일치로 채택된다." 아니다, 코헨씨는 '본래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계속 얘기를 해나감에 따라 그는 '가상적 여건'이 바로 태아 전의 진흙인간 상태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롤스는 '본래적 위치'의 특성을 이루는 불확실성(인간은 자신들이 좋은 재능을 부여받게 될지 아닐지, 부자가 될지 가난해질지 여부를 모른다)과 반드시 해야 하는 운명적 선택(이것들은 그들이 의거해서 살아가는 원칙들이다)이 주어진 이상, 합리적 인간은 게임이론의 '최대' 법칙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법칙은 보수적인 전략을 규정짓고 있는데, 여러 가지 대안들 중 선택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대안들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최악의 가능한 결과들을 서로 비교해 그 중 가장 덜 최악인 결과를 초래하는 대안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롤스씨의 윤리-정치적 원칙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성적으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 위한 루브 골드버그Rube Goldberg식 난해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건대, 나는 무지를 근거로, 즉 무지를 판단기준으로 삼고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모른다면, 그들은 '그에 준해 살아갈 원칙들'이나 '여러 가지 대안들', 혹은 무엇이 좋은, 나쁜, 혹은 최악의 '결과'인지 따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공평'해지기 위해서 무엇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몰라야만 하는 마당에, 그 중 어느 것이 가장 불리한('최악의 가능한') 결과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선택의 '최대' 법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장기적인 문제들에서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것들과 비교해서 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한다고 얘기함으로써 나는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롤스씨의 사회계약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당신들은 고통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당신들은 벌을 회피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우리들은 노력해서 상을 받기 위해 존재한다. 위협해봤자 소용없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한다."<움츠린 아틀라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코헨씨는 롤스씨와 완전히 의견을 같이하지는 않는다. 그는 롤스씨가 충분히 평등주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더 나은 업적을 내도록 '격려'한다는 차원에서 정당화되고 있는 여러 가지 불평등에 대해 사람들은 좀더 분명히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롤스가 그 자신이 시기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고려를 '본래적 위치'에서 만들어진 계산에서 제외시킨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분명히 그러한 고려들도 포함시켜야만 평등주의적인 원칙들의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곧 아무런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태아 이전 상태의 것들이 서로 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시기심을 달래주기 위해 정당한 사회가 그 최고의 구성원들을 그 최저 수준으로 모조리 깔아뭉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그들이 바로 그런 의미로 얘기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코헨씨가 다음과 같이 계속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일단 적절한 사회적 최소치에 도달하고 나면, 정의상(正義上) 많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제거(비록 그러한 제거가 그 최소치의 더 이상의 확대를 금지한다 하더라도)가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점이, 내가 무엇보다 주장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것은 약자를 높이 올려주고 강자를 아래로 떨어뜨리고자 하는, 즉 무능한 자들을 도와주고 능력 있는 자들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것일까?

이것은 사랑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미움의 목소리인가? 동정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시기의 목소리인가?

그러한 대뇌의 잔혹성으로 얻어지는 가치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코헨씨는 얘기한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거리감이라는 악을 축소시키고,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시키며, 공동체적 삶에의 보다 전면적인 참여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나는 일련의 경제적 이익쯤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고 본다." 누구의 삶이라는 것일까? 누구와의 공동체란 말인가? 누구의 가치관에 의거해서? 옆집 사람? 모퉁이에 사는 저 촌뜨기들? 히피들? 마약중독자들?

"대그니…… 나는 보았다…… 내가 무엇에 맞서 싸워왔는가를…… 나는 너를 구해야만 했다. 독(毒)안개 속에서 싸우며…… 네 길의 끝에서 도시의 높은 탑이 아니라, 비대하고 눅눅하며, 어리석은 절름발이가 진을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해(그런데 그가 마시는 그 진값을 지불하기 위해 너의 인생은 다 가버렸던 것이다!) 네 인생의 날들을 함부로 낭비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움추린 아틀라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코헨씨는 롤스씨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주의자적인 원칙들'을 거부한다고 지적한다(그것을 모른다고?). 그런데 롤스씨는 미국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미국인이지만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포드에서 교육을 마쳤다는 점을 잊지 마시라.

오늘날 평등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지난 2백 여년 동안 유럽의 지배적인 이타주의-집단주의적 지성인들은 민중의 대변자, 즉 짓밟히고 가진 것 없는 대중들의 옹호자, 무제한적인 다수통치의 옹호자가 될 것을 주장해왔다. 그 지성인들의 신학에서 '다수'라는 말은 전지전능한 것이었다. '다수의 의지'와 '다수의 복지'는 어떤 것이라도 허용하고 옹호하고 정당화시켜 줄(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그들 도덕의 근간이자 정치적 목표가 되었다. 그 일관성에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러한 믿음은 마르크스에서 벤덤을 거쳐 존 스튜어트 밀(그의 {자유론(On Liberty)}은 자폭적(自爆的)인 자유옹호자들이 택한 것 중 가장 해로운 집단주의적 저서였다)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유럽 사회사상가들이 공유했다.

20세기 중반, 그러한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굳게 믿고 있던 큰 바위가 얄팍한 얼음조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다수의 의지'라는 개념은 그 다수가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그들의 이상을 공유하지 않는 것을 보자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다수의 복지'라는 개념도 그들 자신이 미워했던 적, 즉 그 자유롭고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민중 대다수(사실은 모든 민중)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공산주의 러시아와 나치독일, 복지국가로서의 영국, 그리고 기타 자잘한 사회주의 제도들을 통해) 깨닫게 되자 무너지고 말았다.

일부 지식인들은 우파(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파산한 우파) 쪽으로 허둥지둥 향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일부는 아예 포기를 하고 마약과 점성학으로 돌아서 버렸다. 껍데기도, 존경도, 믿음도, 그리고 안전하고 대중적인 진부함까지 잃은 선도자들은 장황한 이론의 번쩍거림을 통해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수'에 대한 예찬은 이타주의-집단주의자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왜 천재나 백만장자 같은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광범위한 인류를 위해 희생하면 안되는가?"라고 떠들어대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다수의 광범위한 인류가 신이나 영웅, 혹은 왕들 같은 존재가 아니라 선천적인 무능력자라는 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자들이 재능 있는 인간들을 착취하고 숨통을 졸라매고 있다고 공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재능 있는 자들이 기능을 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방해하고 있다고는 이제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늦춰지거나 아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의 떡'이라는 약속을 비웃지 않는다. 그들은 떡을 주지 말아야 할 지상의 사람들에게 떡을 줘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개선시키겠다고 약속하지는 않는다. 생활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를 재배분하기 위한 모색을 꾀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전에 지녔던 믿음에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기존의 그들의 주장 중 여전히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희생이라는 단어이다. 이제 그들은 과거 항상 비밀스럽게 취해오던 형태(즉 희생을 위한 희생이라는)로 공개적으로 그 말을 설교하고 있다.

인간을 가장 저급한 범례의 수준으로 떨어뜨리고자 제안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자비심에서 그러한 일을 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인간에게서 열망과 야망, 혹은 희망을 앗아가도록 제안하면서 그를 평생 정체 속에 살도록 선고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동정심에서 우러나 그러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절름발이 수준 이상으로 발전해나가지 못하도록 금하자고 하는 사람은 인간애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노라고 주장할 수 없다. 천재가 어떤 성취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사람은 그 누구건 시기심과 미움 이외의 어떤 다른 동기가 있는 양 주장할 수 없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이성과 사실, 그리고 이 지상을 근거로 해서 악한 생각을 설교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음에 주목하라. 인간을 멸망시키는 이론을 옹호하는 자들은 항상 현실 밖에 멈춰서서 신비적인 근거나 영역을 모색해야 한다.

종교가들이 인간의 원죄라는 개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아담의 죄라는 신화에 호소해야 했듯이, 현존하는 세계를 없애기 위해 칸트가 본체의 세계에 의존해야 했듯이, 헤겔이 절대개념을 청해야 했듯이, 그리고 마르크스가 다시 헤겔을 필요로 해야 했듯이,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쪼그라들어 가는 문화의 더러운 수준에 맞춰 우리에게서 살 권리를 빼앗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태아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에 공짜로 얻은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웃에 사는 몽고증 백치가 자연으로부터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부당함에 대해 보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한 이론가는 마치 반대파들인 양 변장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애쓰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러나 칸트의 철학은 마치 '순수한 이성'인 양 제시된다. 이타주의는 '사랑'의 원리인 양, 공산주의는 '해방'인 양, 그리고 평등주의는 '정의'인 양 제시된다.

롤스씨의 책에는 '정의의 이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코헨씨는 롤스씨의 '정의(正義)'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코헨씨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움츠린 아틀라스에서, 터널에서 일어난 재앙을 다루는 과정에서 나는 그 재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책임이 있는 기차승객들의 이름을, 그 죄의 크기가 가장 적은 사람부터 죄가 가장 무거운 사람까지 서열별로 나열했다.

그 명단의 맨끝에 나오는 가장 중죄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는 인도주의자들이다. "능력 있는 인간들이라고? 나는 그들이 무슨 고통을 받도록 되어 있는지, 그들이 과연 고통을 받을 것인지 여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무능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들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 솔직히 말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문제에 관한 한, 나는 그 일이 과연 정당한지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오늘날 이 607쪽짜리 '과학적' 저서는 바로 이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데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이상(Capitalism: The Unknown Ideal)}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성적인 성향과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제도라는 사실, 그것이 인간 그 자체의 생존을 보호한다는 사실, 그것의 지배적인 원칙이 정의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다."

만일 자본주의와 인간의 이성적 성향이라는 그 도덕적-형이상학적 근간이 파괴된다면, 그때 가서는 정의의 개념 또한 파괴되고 말 것이다. 분명 평등주의자들은 이 점을 이해하고 있는 반면, 공리주의적 견지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정의의 이론}이라는 그 책이 폭넓게 읽히게 될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향력 있는 책이 될까? 그렇다, 필경 폭넓게 읽히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말이다.

칸트의 것과 같이 그처럼 음울할 지경의 비이성적인 철학이 어떻게 해서 서구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고 당신이 의아해 한다면, 당신은 이제 그러한 과정을 다시 반복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적으로, 그리고 심리인식론적으로 롤스씨는 칸트의 제자이다. 칸트는 이성의 기본도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신비주의를 거부해온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시대의 인간들에게 비이성적인 생각들을 팔기 위해 요구되는 테크닉들을 맨처음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 테크닉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당신이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원칙에 입각한) 지독하게 악한 생각을 널리 유포하고자 한다면, 그 생각의 증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 반면, 당신의 결론은 뻔뻔스럽게 분명해야 한다. 그 증거는 회피적이며, 모호하고, 혼미하며, 우회적이고, 이치에 닿지 않으며, 아무 귀결도 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문장들에, 아무 상관도 없는 곁가지 문제들, 주절, 종속절에 다시 종속절의 종속절이 나오는 식의 논의에다가, 명명백백한 사실을 놓고 미주알 고주알 길게 증명을 하며, 독단적인 이론덩어리는 마치 자명한 것인 양 툭 던져주고, 과학, 유사과학,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는 것, 뒤를 추적조차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박식한 참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증거(이 모든 것은 무(無), 즉 정의(定意)의 부재에 의거해 있다)가 너무나도 얽히고 설킨 엉망진창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독자들의 비판적 능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나는 그 증거로 {순수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을 제시한다.

코헨씨는 그것이 바로 롤스씨 책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몇 군데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롤스씨 공식의 대담성과 단순성은 일련의 기본적인 정치적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고려된', 그러나 의문의 여지가 있는 느슨함에 의거한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여기서 '고려된'이란 '고의적인'이라는 뜻이다.

다른 모든 명백한 신비주의학파가 그러하듯이, 사악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해 불가능한 좀더 고차원적이고 신비로운 권위에 호소해야 한다. 읽혀지지 않는, 읽을 수 없는 책이 바로 이러한 목적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지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함, 가식과 두려움에 의존한다. 그것은 인간을 깨우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을 지적으로 위협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독자의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열등감을 겨냥하고 있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이지적인 사람은 그가 보기에 쓸데없는 횡설수설밖에 되지 않는 내용(그것이 바로 그 책의 테크닉이다)의 실타래를 푸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경멸에 찬 분노로써 그러한 책을 거부할 것이다. 반면 그 책의 내용을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코끼리의 인내심과 순교자의 끈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그 책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보통 수준의 지능을 가진 젊은이(그 중에서도 특히 철학이나 정치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라면 그 책이 '박식하다'느니 '중요하다'느니 '심오하다'느니 하고 주장하는 권위적인 발표의 홍수 속에서, 그 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종종 그는 그 책의 이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는데 그 자신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걱정스럽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그는 자신도 그 책에 대한 세간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공언할 것이다. 그 이론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그에 동의하는 목소리는 커져갈 것이고, 그러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의 정신적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들 대다수는 그 책의 원칙들을 망설이면서, 또 불안해하면서 받아들일 것이며, 그로써 그 자신의 지적 성실성을 잃게 되고, 근사치, 불확실, 자기회의로 이루어진 만성적 안개 속에 자신을 빠뜨리고 만다. 그들 중 몇몇은 지성(특히 철학)을 포기하고 '실용주의'라는 반철학적 저속함 쪽으로 전투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들 중 소수는 그 게임의 정체를 꿰뚫어보고는 그 악대차의 운전석으로 열렬히 헤치고 나아가, 정신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가능성을 포착하게 될 것이다.

그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내에 그 책을 분석하는, 즉 그 책의 신비를 '밝히고' 해설하는 평자들의 책이 도서관을 메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 책의 의미를 완곡하게 나타내려는 위무가들에서부터 그 책을 극찬하는 사람들(그들은 귀여운 무기력 정도가 그 책의 유일한 결점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또 그 이론을 그 이론과 정반대 되는 것과 조화시키고자 애쓰는 타협가들, 또 그 이론의 논리적인 귀결을 받아들일 것을 얘기하고 주장할 아방가르드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생각은 그 학문분야 전체에 확산될 것이다. 그러한 해석이 모순적이고 대조적인 성향을 띠는 이유는 그 책이 원래 심오하기 때문이라고(특히 "내가 어떤 책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책이 심오하기 때문이다"라는 모토에 의거해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둘러대질 것이다. 학생들은 교수들이 그 책에 담긴 이론의 증거를 알고 있다고 믿을 것이고, 교수들은 평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을 것이며, 평자들은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고, 결국 그 저자만이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떤 증거도 제기된 바 없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될 것이다.

한 세대만에 주석의 양이 너무나 막대하게 늘어나서, 그 원래 저서는 필생의 작업을 요구하는 철학적 전문주제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고, 모든 주석가들의 이론에 대한 전면적인 논의를 대동하지 않는 한(그런데 아무도 그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의 이론에 대해 어떤 형태로 반박을 하더라도 거부되거나 무시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과정을 거쳐 칸트와 헤겔이 지금의 지배적 위치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철학교수들은 칸트가 실제로 뭐라고 얘기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실제로 헤겔을 읽은 사람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책장마다 씌어진 각 단어는 들여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없는 것이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롤스씨의 책에 대해서도 이러한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다. 페레그린 워손씨의 [새로운 평등]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홍보전략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그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대중매체와 이 나라에서 속기 쉬운 사람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가장 적은 거리의 사람들을 향해서 떠밀려가고 있다. 게다가 롤스씨는 칸트와 연대해 있지 않다. 그는 새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태지 못한 채, 기존의 철학적 전통 중 최악의 것들만 마구 긁어모아 온 정치적으로 훈련된 시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칸트와 가장 두드러지게 유사한 점은 바로 방법과 동기, 그 두 가지이다.

칸트의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가 문화적으로 유사하다는 위험이 있다.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는 누구에 의해서건, 심지어 롤스씨에 의해서도 좌지우지될 수 있다. 칸트에 대한 아무런 지적知的 반대가 없었듯이, 오늘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지적 반대란 없다. 칸트의 반대자들은 모두 그의 근본적인 명제들(특히 이타주의와 신비주의)에 공감했던 사람들이었고, 단지 자잘한 것들을 트집잡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칸트의 승리를 더욱 도왔던 것이다. 오늘날 공리주의자들, 종교가들, 그리고 기타 잡다한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모두 롤스씨의 기본적 명제(특히 이타주의)에 공감하고 있다. 만일 그 책이 그들로 하여금 이타주의와 그 논리적 귀결의 본체를 꿰뚫어보게 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 책이 그들로 하여금 이타주의는 인간(과 이성, 정의, 도덕, 문명)의 파괴자임을 꿰뚫어보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들도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닫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롤스씨가 얘기하는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해도 그들로서는 할말이 없을 것이다. 사상이란 비실제적인 지성인들에게 맡겨진 무해한 놀잇감이라고, 그리고 어떤 사상이건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속여넘길 수 있다고 느끼는 그 '실제적'인 사람들(그들의 영혼은 지방으로 뒤덮여 있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칸트나 롤스의 이론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태만(지성인들의 태만) 때문이다. 타협할 줄 모르는, 이성적인 반대가 있었더라면 이미 그 당대에 칸트는 저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롤스는 무너뜨리기 더 손쉬운 상대이다. 특히 그의 것과는 정반대 되는 철학의 살아 있는 기념물이라 할 이 나라에서는(유럽에서였더라면 그는 더욱 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 그렇다.

미국의 대학캠퍼스(및 기타 지역)에 반항의 정신이 살아 있다면, 바로 여기, 즉 {정의의 이론}과 평등주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암시하고, 그러한 촉감을 주며, 그러한 냄새를 피우며, 그러한 시험풍선을 띄우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들이 지적으로, 정당하게,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할 악인 것이다.

만일 이성적 인간이 그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평등주의는 성공을 거둘 것이다. 번지르르한 평등과 형제애에 찬 정체된 세계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을 부패시키고 마비시키는 것이 칸트의 목적이었듯이, 평등주의자들의 목적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그들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평등주의자들의 이론 뒤에(그들의 감상적인 슬로건과 구역질나는 탄원, 그리고 말로 나타낸 쥐덫 같은 장황한 책들 뒤에) 숨겨진 동기를 알고자 한다면, 만일 당신이 그들의 하잘것없는 정신(그것을 위해 그들은 인류를 희생시키고자 한다)이 얼마나 거대하게 포장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 실체를 단 몇 줄로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할 경우, 그것은 그가 썩어빠졌을 때지요. 자존심이란 그가 무슨 일을 했든 죄 중에서도 가장 나쁜 죄니까요."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이 선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점에 대해 사과해야겠지요."

"누구한테요?"

"그런 일을 하지 않은 사람한테요."<움츠린 아틀라스>
제목 없는 편지, 1973, 아인 랜드

2.4. 칸트 비판

'의무'의 대옹호자는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가 다른 이론가들보다 워낙 월등히 멀리 나아갔던 탓에, 그와 비교해보면 다른 이론가들은 순진무구할 정도로 자비로워 보인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의무'란 미덕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러나 미덕은 의무 그 자체의 보상은 아니다. 만일 어떤 보상이 내포되어 있으면 그것은 이미 더 이상 미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일한 도덕적 동기는 의무를 위한 의무에의 헌신이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촉발된 행동만이 도덕적 행동[즉 자기이익이나 '선호'(욕구)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이 행해진 행동]인 것이다.

칸트의 말을 들어보자.

"인간의 삶을 보존하는 것은 의무이고, 게다가 모든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싶은 직접적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종종 갖고 있는 열정적인 관심에는 내재적 가치가 사라져버리게 되고, 삶을 보존하라는 격언이 아무런 도덕적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된다. 그들은 의무로부터가 아니라 의무에 따라 그들의 삶을 보존한다. 그러나 만일 역경과 절망적인 슬픔이 삶을 위한 즐거움을 완전히 앗아갈 경우, 만일 어떤 사람이 영혼은 강인한데 자신의 운명에 실망하고 좌절했다기보다 격분해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욕망도 두려움도 아닌 의무감에서 할수없이 삶을 계속해나갈 경우, 그의 격언은 도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7]

칸트는 계속해서 말한다.

"틀림없이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이웃을, 심지어는 우리의 적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이 끌리는 사랑이란 명령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전혀 내키지 않지만, 그리고 심지어 자연스럽고도 억누를 길 없는 혐오감이 자리하고 있을 때조차도 의무감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감정적 사랑이 아니라 실천적 사랑이다.그것은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의지에, 감미로운 공감이 아니라 행동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만이 명령될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도덕성의 첫 번째 제안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려면 의무에서 행위가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의무'라는 반개념은 실재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 사실에 선행해 앞뒤 맥락이나 결과에 관계없이 한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무'는 이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사람의 지식과 판단을 능가해버림으로써 사고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그 개인의 행동과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의무'는 가치를 파괴한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명령을 위해 한 개인의 가장 귀한 가치를 배반하거나 희생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기쁨이나 욕망의 경험은 그 개인의 동기의 도덕적 순수성을 의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가치를 한 개인의 도덕적 중요성에 대한 위협으로 변모시킨다.

'의무'는 사랑을 파괴한다. 마음이 끌려서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의무'는 자존심을 파괴한다. 그것은 존중받을 자아를 아예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도덕성이라는 명목으로 악몽을 받아들인다면, '의무'가 도덕성을 파괴한다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된다. 윤리학의 비본체적(deontological, 의무에 중심을 둔) 이론은 규정된 '의무'의 목록에 도덕적 원칙들을 국한시키고는, 인간존재의 실제적 문제들이나 관심에 대해서 도덕성을 전혀 적용하지 않으면서 어떤 도덕적 안내도 없이 인간의 남은 생애를 버려두고 만다. 이러한 이론들에 따르면 일이나 경력, 야망, 사랑, 우정, 기쁨, 행복, 가치(그러한 것들이 의무로서 추구되지 않는 한) 등은 무도덕적인 것, 즉 도덕적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만일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준에 의해 사람은 자신의 일상적 선택을 하고 삶의 진로를 정할 수 있을까?

비본체적 이론에 따르면 모든 개인적 욕망은 도덕성의 영역에서 추방된다.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이건 살인하고자 하는 욕구이건 개인적 욕망에는 아무런 도덕적 중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의무감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도덕성은 정직한 노동에 의해서 삶을 지탱하는 것과 강도질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낳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직해지기를 원한다면 그는 도덕적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 칸트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정직은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도덕적 의미'는 없는 것이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훔치고 싶은 심각한 욕구를 느끼면서도 '의무' 때문에 정직하게 행동하려고 자신을 강요하는 악독한 자아압제자만이 칸트나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성에 나쁜 이름을 가져다주는 이론이다.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인과관계 대 의무, 아인 랜드
도덕성에 대해 광범위하게 확산된 두려움과 분노(도덕성은 우리의 적이며 무감각한 권태와 고통이 지배하는 퀴퀴한 영역이라는 느낌)는 신비주의자나 금욕주의자, 혹은 기독교적 규율의 산물이 아니라, 인생, 인간 및 이성에의 흉측한 혐오를 담고 있는 기념비, 즉 임마누엘 칸트의 영혼에 대한 기념비인 것이다[물론 칸트의 이론은 가장 저급한 질서로 이루어진(즉 '본체적' 질서로 이루어진) 신비주의이지만, 그는 그것을 이성의 이름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인간지성 발달의 초보적 수준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사실이 곧 그가 이성을 버렸음을 보여준다].

만일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경우를 우리가 '천재'라고 칭한다면, 칸트는 인간의 두려움과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지를 감지하고 유린하며 그것들을 영속시키는 능력 면에서 천재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적인 면에 대해서가 아니라 심리적 요소들에 대해 영향력을 미쳤다. 도덕성에 대한 그의 관점은 그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홍보되고 있으며, 그는 단지 그들에게 형식적, 학문적인 위상만을 부여할 뿐이다. 칸트식 '의무'는 아이가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니까 그것을 해야 한다고 단언하는 부모들에 의해 가르쳐진다. 아무 이유 없고, 독단적이며 모순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해야 한다must'의 끊임없는 난타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현실적 필요와 인간의 변덕간의 구분을 파악할 능력을 잃은 채(혹은 결코 얻지 못한다) 전자를 거부하고 후자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비열한 인생을 살게 된다. 현실이라는 말의 완전한 의미에 비추어본다면, 그는 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성인이 되면, 모든 형태의 신비주의를 거부할지 모르지만 칸트적인 심리인식론은 그대로 남게 된다. 그는 모든 어렵고 불쾌한 과제는 자신에게 과해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부과물이라고 계속 간주하게 된다. 즉 화가 나면서도 할 수 없이 행하는 의무로 간주하는 것이다. 생활비를 버는 것이 '의무'라고 그는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되는 것도 그의 '의무'이며, 심지어는 이성적으로 되는 것도 그의 '의무'이다.

현실에서의 경우, 그리고 객관적 윤리학에서의 경우에는 '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선택과 '의무'라는 개념에 의해 가려진 원칙, 즉 인과법칙에 대한 완전하고도 분명한 인식이 있을 뿐이다.

윤리학에 대한 적절한 접근, 즉 칸트주의에 의해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형이상학적 출발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가장 잘 예시될 수 있다. 어떤 현명한 흑인여자는 자신에게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던 상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이보세요, 죽는 것 빼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답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인간의 기본적인 선택사항일 뿐이다. 산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선택행위이다. 만일 그가 살기로 작정한다면 그의 선택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행동원칙이 요구되는지를 이성적 윤리가 얘기해줄 것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수많은 '해야 한다'는 조항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조건부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식은 '∼하다면, 당신은 ∼해야 한다'이고, 이때 '∼하다면'은 인간의 선택을 뜻한다. 즉 살고 싶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일하고 싶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고 싶다면, 무엇을 할지를 여러분이 알고 싶다면,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 알고 싶다면, 여러분은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인과관계 대 의무, 아인 랜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요구되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 사람은 '의무'라는 반개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못한 그 원칙을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일깨울 필요가 있다. 그 원칙이란 다름 아닌 인과법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최후의 인과관계(그것은 사실 의식적 존재에만 해당되는 것이다)의 법칙, 즉 목적이 수단을 결정짓는 과정, 다시 말해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적 윤리학에서는, 의무가 아니라 인과법칙이 사람의 행위(특히 장기에 걸친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행위들)를 고려하고 평가하고 선택하는 데 있어서의 길잡이 원칙이 된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서는 행동하지 않는다. 목표를 정하는 데 있어서, 그는 그것을 성취하는 데 요구되는 수단을 고려하고, 수단의 어려움이라든지 기타 그 자신의 다른 가치나 목표들의 전면적이고도 계층적인 맥락에 비추어 검토한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으며, 과연 어떤 것들이 불가능한지를 너무 쉽게 결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의 맥락을 던져버리지 않고 현실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으며, 만일 그가 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속일 수 있는 칸트적 권위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을 완전히 깨닫고 있다.

만일 어려움에 부딪혀 사기가 꺾일 경우, 그는 어떤 목표를 위해 자신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를 상기한다. 그는 "과연 그러한 어려움을 겪을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완전히 자유롭게 재고하며 물을 수 있고, 이 경우 그가 원하는 가치를 포기하는 이외에는 어떤 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성적으로 봤을 때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사람은 그러한 경우 거의 포기하는 법이 없다).

유사한 상황에서 칸트주의자는 그 자신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도덕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자동적인 반응은 죄책감과 두려움(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의무'가 금하고 있는 어떤 약점에 대한 두려움, 그 자신이 도덕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증명될까 봐 느끼는 두려움)이다. 그의 목표의 가치는 마음에서 사라져버리고 그는 자기회의의 홍수 속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는 이러한 우울한 방식으로 자신을 한동안 몰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 오래는 아니다. 칸트주의자는 중요한 목표를 이루어내거나 떠맡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한 목표들은 자신의 자긍심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무'라는 원칙과 최종적인 인과관계 법칙간의 결정적인 심리적 차이들 중 하나이다. 인과관계의 추종자는 외부로 눈을 돌린 사람이며 가치중심적이며 행동중심적이다. 이는 곧 그가 현실중심적임을 의미한다.

'의무'의 추종자는 자기내부로 눈을 돌리고 있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이때 자기중심적이라 함은 합리적, 실존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심리병리학적인 견지에서이다. 즉 현실에서 유리된 자신에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때 '자기중심적'이란 '자아(회의)중심적'이라는 뜻이다.

그 두 가지 원칙 사이에는 다른 많은 차이들이 있다. 인과관계의 추종자는 자신의 가치를 이룰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에 대단히 헌신적이다. 그러한 사람은 모순을 갈망한다거나, '어떻게든'이라는 말에 의존한다거나, 현실에 반기를 든다거나 하는 일을 결코 하지 못한다. 그는 그러한 모든 경우에서 그가 거부하고 해를 입히게 될 것은 칸트적인 권위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임을, 그 대가는 '비도덕'이라는 어떤 신비로운 이름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욕망과 그 자신의 가치파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인과관계 대 의무, 아인 랜드
칸트주의자, 혹은 준칸트주의자는 어떤 것에 심오한 가치를 부여하도록 자신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설명할 길 없는 '의무'라는 것이 장기적인 계획, 또는 그러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가 행했을 투쟁을 무효로 만들면서 어느 때고 그 자신의 가치희생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목표가 없는 경우, 모든 과제(이를테면 생계를 잇는다는 등의)는 의미 없는 고된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그것을 의무로 간주한다. 즉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의무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무에 대한 맹목적인 반항에서, 그는 현실에 대해 화를 내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의 소망이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목표가 아무런 수단 없이 성취되는 어떤 영역을 찾아 도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신비주의 쪽으로 사람을 모아들이는 잠재의식적 과정이다.

'의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반(反)인과관계적이다. 그 근원에 있어 '의무'는 효율적인 인과관계 원칙을 거부한다. 의무란 원인불명의 것(혹은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것은 궁극적인 인과관계 원칙을 거부한다. 의무란 결과에 관계없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과관계의 추종자가 결코 그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을 무책임한 것이다. 인과관계의 추종자는 자신의 행위의 모든 예견 가능한 결과들을 고려하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인과관계의 효율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신을 인관관계의 매개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그리고 모순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노력은 결코 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칸트주의자들이 죽여버린 미덕, 즉 책임감을 발달시킨다.

신비스러운 '의무'나 선택하지도 않은 의무 따위는 아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선택하는 의무를 아무 주저 없이 숭배하는 사람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의무는 정당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상호신뢰로 이어지는 요소이며, 사람들 사이의 협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해로운 영향을 좀 보라. 앞에서 인용한 사전적 정의에서처럼, 개인적 의무란 마치 경멸스러운 주석이나 되는 양 거의 내던져져 있다. '의무'의 근원은 '양심, 신앙심, 정의, 혹은 법이 영원히 명하는 바'로 정의되고 '책임'의 근원은 '용도, 관습, 혹은 타당성이 명하는 바'로, 그리고 나서는 하나의 후기(後記)로서 '그리고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그리고 종종 개인적인 약속, 혹은 동의'를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정의된다(강조는 필자 자신의 것임). 개인적인 약속이나 동의란 유효하고 구속력을 갖는 유일한 책임이며, 그것 없이는 다른 어떤 것들도 가능하지 않고 가능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자신의 선택과 행동(및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너무도 과중한 도덕적 원칙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의무'의 도덕성이라는, 이른바 쉽고 자동적이고 생각이 필요 없는 안전한 것이라고 그들 자신이 믿는 것에 굴복함으로써 그것을 회피하고자 한다. 종종 때가 너무 늦어서야,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인과관계의 추종자는 설명할 수 없는 연결고리나 택하지 않은 짐, 불가능한 요구, 혹은 초자연적인 위협 없이 인생에 직면한다. 그의 형이상학적인 태도나 지침이 되는 도덕적 원칙은 다음과 같은 스페인의 오래된 속담으로 가장 잘 요약될 수 있다. "신이 이렇게 얘기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갖고 그 값을 치러라."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바, 그것의 의미, 그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고귀한 인간의 미덕, 즉 이성이 필요하다.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인과관계 대 의무, 아인 랜드
현대역사에서 칸트의 철학은 모든 주요 심리적 악덕을 체계적으로 합리화시킨 것이다. 이 세계의 형이상학적 열등성(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이뤄진 현상의 세계)이란 현실에 대한 혐오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성으로는 실재를 볼 수 없고, 이성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은 이성에 대한 혐오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성을 '이상적'인 몽상가들의 쓸데없는 빈둥거림과 같은 것으로 축소시키는 심각한 종류의 인식론적 균등주의를 위한 합리화이다. '본체적 noumenal' 세계의 형이상학적 우월성은 감정의 최우위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로써 감정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수단에 의해서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힘을 부여받게 된다.

인간이 다른 종류의 의식을 통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그 자신의 의식을 통해서만 사물을 인지할 수 있다는 불평은 활자로 지금까지 고백된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심오한 유형의 간접성을 위한 합리화이다. 즉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뭐라 생각할지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와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의 생각에 따를 것인가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넋두리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의식에 의해서도 가공되지 않은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소망은, 변덕을 숭배하는 자들이 그 자신의 감정에 부여한 자동적 전지전능의 수단을 통해, 인식의 노력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소망의 합리화일 뿐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따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희생을 통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은 호색적이고 자학적인 쾌감(이는 인간의 정신, 야망, 성공, 자존심, 그리고 이 지상에서의 삶의 만끽을 깨뜨리는 쾌감이다)을 느끼면서 여러분을 향해 추파를 던지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승려의 이미지(와 영혼)를 위한 조악한 합리화이다. 이상과 같은 것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의 불과 일부일 뿐이다.

슬로모션으로 미시적 스크린에 비춰보았을 때, 철학의 역사란 개인정신 속에 있는 생각의 작용임을 주목하라. 그릇된 전제들을 받아들인 사람이라 해도 그것들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때까지,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한, 그 전제들은 그의 마음속에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자라나 궁극적인 논리적 결론에 이르고 만다. 문화의 경우에도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다. 만일 어떤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그릇된 전제들이 도전을 받지 않으면, 그 문화의 잠재의식인 양 행동하는 그 다음 세대들은 그 그릇된 전제들의 궁극적 결론을 짜내고 만다.

칸트가 객관을 집단으로 대체함에 따라 ('범주categories'가 '현상적' 세계를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형태로) 그 다음 단계로 헤겔의 철학이 등장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관주의subjectivism를 위한, 즉 ('현상적'인 물질적 상황에 잔학한 힘을 가진 절대적인 상황을 세움으로써) '본체적', 비물질적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야심찬 엘리트의 권력욕을 위한 합리화이다. 엘리트 그룹 외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한 미래에 순종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일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다음의 부수적 단계로 등장한 것이 바로 실용주의이다. 그것은 원칙과 미래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구체에 묶인, 순간에 좌우되는 반개념적인 정신을 위한 합리화이다.
철학적 탐색, 1974, 아인 랜드
철학이론을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죄책감을 느끼는 집단(이들은 칸트주의자들의 승리에 가장 많이 기여한 자들이다)은 그 이론을 경멸한다고 공언하는 그룹인데, 그들은 바로 과학자들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이것도 칸트철학의 지맥(地脈)이다)의 이런저런 변형을 채택하면서, 그들은 칸트의 본체적 차원을 거부하지만 물질적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 실재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과학은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조물을 다루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도덕성에 대한 어떤 관심도 거부하면서, 도덕성이란 이성이나 과학의 힘 너머에 있으며, 따라서 주관적인 변덕에 내맡겨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제 물리과학과 인문과학간의 단절을 주목해보라. 비록 이론과학의 발전은 둔화되고 있지만(뭐니뭐니해도 결점투성이의 인식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과거 힘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과학은 아직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인문과학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공간적으로 과학은 태양계 너머에 다가가고 있지만, 인문분야는 원시시대의 늪지로 뒷걸음치고 있다. 과학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른 운하계로부터의 무선송신을 모니터하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서는 점성학이 점차 유행하고 있다. 점성학과 흑마술 강의가 대학에 개설되고, 위대한 과학적 업적인 텔레비전의 전파를 타고 점성술이 어엿하게 방송되고 있다.

과거 나치독일을 이끌던 흉한들을 위해 과학자들이 군사로켓을 기꺼이 생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러시아를 다스리는 흉한들을 위해 핵무기를 기꺼이 생산해내고 있다. 뉴멕시코에서 원자핵폭탄을 처음 실험하고 있던 중, 그 폭탄을 만들어냈던 로스 알라모스 그룹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그의 주머니 안에 네 잎 클로버를 지니고 있었다는 일화가 언론에 소개된 바 있었다. 보다 최근에는 에드거 미첼이라는 우주비행사가 달로 가는 도중 초감각적 감지感知실험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마술과 신비주의를 믿는 우주과학자 이야기도 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칸트철학이 이룩한 지식과 믿음간의 '명예스럽고도 지속적인 평화'인 것이다.

자, 이제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집권하게 되어 핵무기 사용 여부를 고려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칸트주의자로서 그는 이성과 지식, 그리고 사실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믿음, 즉 감정, 다시 말하면 변덕스런 충동에 의거해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주의가 서서히, 그러나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방식으로 현대의 정치분야를 파괴하고 있다는 예는 얼마든지 많다. 인플레이션 대 '동정'이라는 싸구려 희극을 보라. 복지국가 정책이 이 나라(와 전全문명세계)를 거의 경제적 파탄(그 전조는 바로 인플레이션이다)에까지 몰아넣었지만, 압력을 행사하는 집단들은 비생산적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이 기부하라고 요구하면서 반대자들에게는 '동정심'이 없다고 소리지른다. 동정 그 자체는 밀은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자라게 할 수 없다. 이미 망한(즉 자신의 자원은 다 소모해버린 채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내줄 것이 없는) 사람(혹은 나라)의 '동정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여러분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정도까지 실재를 회피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칸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정심'이란 도덕적 용어이고, 철두철미하게 칸트주의자인 지성인들에게 있어 도덕적 문제들이란 물리적인 실재와는 유리되어 있다. 도덕성의 과제는 요구를 하는 것이고 물리적 '현상'의 세계는 그에 부응해야 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아울러 물리적 세계는 비실재적이므로 그 세계의 문제와 결핍은 '본체적' 참된 실재에 의해 지배되는 도덕적 목적의 성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사업가 여러분, 그따위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학교를 당신의 돈으로 보조하는 이 판국에 대부를 받거나 투자를 하면서 0.5퍼센트의 이자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칸트의 이론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선생들과 지적인 지도자들이 어떤 깊고도 교묘한 정당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보통사람들이 환영하는 모든 이론의 궁극적인 결과(이를테면 "이성적이 돼라, 네가 그러고 싶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과 같은)를 위해서는 그 정당화가 더 교묘할수록 더 좋다는 것이다.

칸트의 숭배자인 폴센 교수가 아래에서 공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칸트체계의 음울한 비이성성(非理性性)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동기를 주목해보라. "칸트가 그의 시대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은 그가 견딜 수 없는 불안감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준 구원자처럼 보였다는 사실에 의거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세기 후반 내내, 감정의 주장과 실재 이해에 관련된 예전의 견해가 점점더 의문시되었다. 과학은 예전의 믿음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가슴은 여전히 그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칸트는 그러한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다. 그의 철학은 한 인간이 솔직한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정직한 믿음을 갖는 것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점에 대해 수많은 가슴들이 열정적으로 그에게 감사를 해왔다"(6∼7쪽. 강조는 필자의 것임. 더 이상의 언급은 필요하지 않다).

철학은 이성적인 존재를 위해서 필요하다. 철학은 과학의 근간이요, 인간정신의 조직자이고, 인간지식의 통합자이고, 인간 잠재의식의 프로그래머이고, 인간가치의 선택자이기 때문이다. 이성, 즉 인간의 인식능력에 반反하는 것인 양 철학을 그에 대치시키는 것, 철학을 미신의 대변자요 수호자인 양 변모시키는 것은 인류에 대해 어떤 현대의 잔학에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현대적 잔학의 원흉이기 때문이다.
말(馬)의 입으로부터, 1975, 아인 랜드

2.5. 이기주의

대중적인 용법에서, "이기심"이라는 단어는 악의 동의어입니다. 그것이 연상하는 이미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체 더미 위에 짓밟고 살고있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으며 즉각적인 순간의 어리석은 변덕을 만족시키지 않고 추구하는 살인적인 짐승이죠.

그러나 "이기심"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사전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개념은 도덕적 평가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 선악 일지 여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실제 이익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윤리의 임무입니다.
The Virtue of Selfishness, vii
생산에 대한 자기 이익을 보는 사람과 그리고 그건을 강도로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도덕적 차이가 있습니다. 강도의 악은 그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에 관해서 무엇을 존중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가치를 지닌 것을 선택했다. 그가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인간 이하의 수준에서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기심"이 의미하는 바가 전통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면, 이것은 이타주의의 최악의 기소 중 하나입니다. 이타주의가 자존심이 강한 자급 자족의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지원하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희생하지 않는 사람. 이타주의는 희생 동물과 희생자, 희생자와 기생충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자비로운 공존이라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고 정의에 대한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타주의가 인간의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he Virtue of Selfishness, ix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과 당신의 삶에 커다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중요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사심없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행복을 얻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파생시키지 말아야하며, 그 사람이 당신을 필요로하는 것에 대해 자기 희생적인 동정심으로 만 동기 부여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해야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렇게 칭찬받을 생각도, 받아 들일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가치에 대한 가장 중대한 주장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행복을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에게 지불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PLAYBOY INTERVIEW: AYN RAND / Playboy, March 1964
모든 부족주의자들은 나름대로 반개념주의자들이지만, 반개념주의적 정신성을 가진 사람들이 다 부족주의자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고독한 늑대들이다(이 경우 늑대란 그들의 약탈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늑대들의 대다수는 좌절한 부족주의자들, 즉 부족(혹은 그들과 가장 직접적으로 가까운 환경에 속한 사람들)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규칙을 지키고 살기에는 믿을 만하지 않고, 부족의 권력을 얻고자 경쟁하기에는 너무 조악하게 모사꾼적이다. 지각적 정신성은 인간에게 생존방법을 제공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성을 가진 사람은 혼자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을 경우, 지적 방랑자가 되어 떠돌아다니면서 절충주의적으로 남의 지식을 재탕해 먹는 사람이 되거나 이것저것 선택해 중간에 매매하는 아류, 혹은 남의 지식을 슬쩍하는 사람이 되어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가로채어 앗아오는 존재가 된다. 이 경우 그의 행동에는 단 하나 변치 않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표류하는 것,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건 하여간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에서 어떤 이론적인 구조물들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그것들을 가지고 요술을 부리는 따위의 재주는 피울 수 있지만, 윤리분야에서만은 깊고 깊은 공포감과 그 자신에 대한 무력감으로 가득차고 만다. 윤리학은 하나의 개념적인 원칙이다. 즉 일련의 가치기준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원칙들을 파악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과 행동(일련의 기초적인 도덕적 계율을 시행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조차도)에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부족적인 고독한 늑대에게는 그 자신이 직접 파악한 가치라는 것이 없다. 그는 이 점이야말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숨겨야 할 부분이라고 느끼는데, 실은 이 점이 그에게는 가장 숨기기 어려운 문제이다. 순간순간, 또 해를 거듭하면서 변덕에만 이끌려 살아왔기 때문에, 직접 선택한 가치에 평생을 바치며 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변덕 덕택에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것에 익숙해져 있다. 즉 그의 변덕들은 그로 하여금 어떤 것에 대해서든, 또 그 누구에게든 영원히 관여하는 것을 자동적으로 피하게 만든 것이다. 개인적인 가치 없이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감각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 부족적 늑대는 철저한 무도덕주의자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을 알아챌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징후는 바로 그가 어떤 종류의 기준에 의해서도 그 자신이나 자신의 행동, 혹은 그 자신의 일을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덕목에의 관련이 요청된다. 이를테면 "나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다"라든가, 심지어 남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들 부류의 생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나는 좋은 사람이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 속에 내포된 가치기준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러한 예들은 한 개인의 가치는 노력해서 얻어져야 한다는 하나의 핵심적인 도덕적 원칙을 함축하고 있다.

무도덕주의자가 자신을 평가하는 함축적인 유형(그가 이것을 밝히거나 인정한 예는 거의 없다)은 "나는 나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자아 없는 이기주의, 1972, 아인 랜드
세 살에서 다섯 살 가량의 나이가 지나면(즉 정신적 발달의 지각적 단계가 지나면) 이것은 자존심이나 자기존중을 표현하는 셈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것(즉 어떤 텅빈 진공상태, 어떤 개인적인 가치나 덕도 성취할 수 없는 무력감을 고백하는 정지된 정신성)을 표현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유형을 심리적 주관주의와 혼돈하지 마라. 심리적 주관주의자는 비록 그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밝히거나 그러한 가치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심오하게 일관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 실천적인 면에서 (비록 지독한 심리인식론적 어려움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것들에 충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도덕주의자는 주관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모든 평가를 함에 있어, 그 함축적 유형은 "내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은 좋은 것이야"라거나 "내가 그것을 했으니 그것은 옳은 것이야", 혹은 "'내'가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라니까 그것은 진실이야"라는 식이 된다. 이러한 말에서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성적 불안에 의해 내몰린 못 쓰게 된 한 척의 배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형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예를 들어보자면, 케케묵은 진부한 글귀를 개작해놓고는 자신이 쓴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새롭다고 느끼는 작가, 자기가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가 낸 흘림무늬는 원숭이가 꼬리로 만들어낸 무늬보다 더 낫다고 느끼는 비객관주의적인 예술가, 자기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을 고용하는 사업가, 인종주의가 만일 (그가 선택한) 소수에 의해 행해졌을 경우는 좋지만 다수에 의해 행해졌을 때는 나쁘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들, 그리고 기타 이와 같은 이중적 가치기준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도덕성을 그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것들로 대체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가장에 불과하다. "나는 나기 때문에 선한 거야"라는 말을 무도덕주의자 자신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에 내포된 함축적인 정책은 바로 그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도 결코 밝힐 수 없는 확신("나는 조금도 선하지 않은 인간이다")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자아 없는 이기주의, 1972, 아인 랜드
사랑가치에 대한 반응이다. 무도덕주의자의 실제적인 자기평가는, '그 자신이기 때문에 사랑받고자 하는', 다시 말하면 아무 이유 없이 사랑 (그러나 그 말이 갖고 있는 이성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받고자 하는 비정상적인 욕구 속에 드러난다. 제임스 타가트는 그러한 욕구의 본성을 밝히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혹은 지니고 있는, 혹은 말하고 생각하는 어떤 것 때문에 사랑 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 받고 싶을 뿐이지, 나 자신의 육체나, 정신이나, 말이나, 일이나, 행동 때문에 사랑 받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지성인들의 파업}) 그러나 그의 아내가 이렇게 물으면 그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지요?"

실제로 일례를 들어보겠다. 몇 년 전 나는 나이든 여류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매우 똑똑했지만, 마음이 괴롭고, 세상에 대해 적대적이고, 고독하고 매우 불행한 상태에서 신비주의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사랑이나 우정에 대한 그녀의 관점은 제임스 타가트의 것과 유사했다. <파운틴헤드 The Fountainhead>라는 책이 출판되었을 때, 나는 그 책을 출판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노라고 고용인들을 협박했던 편집자, 아치발드 오그덴에게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그녀에게 얘기했다. 그녀는 특별히 회의적이고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이한테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그이가 그것을 해준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이는 그게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렇게 한 것뿐이잖아요." 나는 크게 경악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만일 그이가 그것이 아무 가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정심에서 나를 위해 그 책을 출판해주려고 싸웠다면 그의 행동이 더 나은 것이었을 거라고, 그 편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나는 그녀로부터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를 당혹시켜 왔던 그와 유사한 현상은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사해설자들이 종종 정치가들에게 그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앞세우라고, 또 그의 정적(政敵)들과 타협하라고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도 별볼일 없는 사기꾼 공무원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명망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권고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만일 그 정치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타협을 함으로써 그는 오히려 국가를 배신하는 셈이 될 것이다. 만일 그의 정적들의 생각이 그르다면, 그는 나라에 해를 끼치는 셈이 될 것이다. 그가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는 단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자신의 관점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그 자신에게 최대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으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다시 말하면 실재에서 비롯된 원칙들에서 그 관점들을 끌어내는 개념적 의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지각적 의식에 의존할 경우, 사상이 사람에게 개인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기란 불가능해진다. 즉 사상은 독선적인 선택의 문제이고, 어떤 당면한 목적에 이르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인간은 어떤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공직에 선출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선출되기 위해 특정한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가 선출되어야 하는 것일까? 지각적 정신성은 결코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장기적 목표라는 개념은 그들의 능력 밖에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정치가들이나 시사해설가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정신성이 정당하고도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시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것이 오늘날 문화의 이지적인 상태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흥미'에 생각이나 원칙을 종속시킨다면, 그의 개인적인 흥미는 무엇이며 그는 어떤 방법으로 그 흥미들을 결정하는 것일까? 만일 정당한 국가의 행정이라는 일의 목표가 그 자신에게 아무런 개인적 흥미도 주지 않을 경우, 정치가는 얼마나 무감각하고 자아 없는 고된 일에 자신을 던져 넣고 마는 것일까(혹은 변호사의 경우, 정의가 그에게 아무런 개인적 흥미거리가 되지 못한다면, 혹은 앞서 예로 든 여자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작가의 경우 그가 쓴 책의 객관적인 가치가 그에게 아무런 개인적 흥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또 얼마나 마찬가지의 처지가 될 것인가?). 그러나 지각적 정신성은 가치나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남이 해놓은 것을 간접적으로 취할 뿐이다. 즉 그들은 남의 것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집어들고는 예견된 행동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사람들 모두가 부족적인 고독한 늑대는 아니다. 물론 그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심리인식론적 심연에서 빠져나온 충실하고도 당혹한 부족주의자들인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반개념적 정신성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에 대해(그리고 '자신이기 때문에 사랑 받아야' 한다는 데 대해) 강조를 하면서도, 그 고독한 부족적 늑대에게는 자아도, 개인적 흥미도 없고 오로지 순간적인 변덕이 있을 뿐이다. 그는 그 자신의 당면한 감각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인식하고 있지 않다.

그가 정신적인(즉 이지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또 그가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진부함, 그 천박함, 그 남에게서 빌려온 객담에 충격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자아 없는 이기주의, 1972, 아인 랜드
고독한 부족적 늑대는 그의 '자아'가 그의 행동과 일, 추구하는 바, 생각들과 유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외부적인 힘(사회, 혹은 현실, 혹은 물리적인 세계)이 어떤 식으로건 그에 강요한 것들이라고 느낀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는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어떤 속성을 결여한 실체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때 한 가지, 즉 그의 '자아'는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어떤 것이다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에게 자아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자아란 곧 그의 정신, 실재를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고독한 부족적 늑대에게 있어 '실재'란 의미 없는 용어이다.

인생이란 사람들과 사물들이 어떻게든 그에 대항해서 음모를 벌이는 것이라는 느낌이 그의 형이상학을 구성하고 있다. 그는 그것들의 시체더미 위로 걸어갈 것이다. 그 자신을 주장하기 위해서? 천만에. 바로 소멸된 자아가 남긴 괴로운 내적 공허를 숨기거나 채우기 위해서이다.

바로 위에서 묘사한 그가 이기주의의 상징인 양 주창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에 대한 대표적인 음울한 농담이다. 이것이 그가 약탈을 하게끔 부추긴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능력 밖에 있음을 알고 있는 인물됨을 가장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그에게 심어준다. 이기주의란 심오하게 철학적이면서 개념적인 위업이다. 고독한 부족적 늑대를 이기주의의 이미지인 양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정신적 작용이 지각적 본성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부족주의자들은 도덕성이 절대적으로 사회적 현상이며, 부족(그것이 어떤 부족이건)에의 집착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계속 주장한다. 그러나 부족의 순종적인 일원들은 그 부족에서 쫓겨난 늑대 같은 형제들보다 하나도 더 나을 것이 없으며, 그들만큼이나 완전히 무도덕적이다. 그들의 가치기준이란 "우리는 선량합니다. 우리니까요"라는 식이다.

자아를 포기하거나 위축시키는 것은 모든 지각적 정신성(그것이 부족주의자이건 고독한 늑대이건)의 현저한 특성이다. 그들은 모두 자립을 두려워한다.

그들 모두는 오직 자아(즉 개념적 의식)만이 행할 수 있는 책임을 두려워하며, 실제로 이기적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수호할 두 가지 행위, 즉 판단과 선택을 피하고자 한다. 그들은 이성(이는 결단을 통해 발휘된다)을 두려워하며, 그 자신들의 자동적인 감정을 믿고, 친구들(이는 선택의 문제이다)보다는 친지들(이는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다)을, 외부인들(새로운 인물들)보다는 부족(주어진 사람들)을, 원칙(그들이 머리로 이해한 것)보다는 명령(그들이 그저 외우면 되는 것)을 선호한다.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울부짖도록 허용하는 모든 결정론적인 이론, 모든 생각을 환영한다.

이타주의의 도덕성이 왜 부족주의적 현상인가는 분명하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지도자를 따라 한 부족에 붙어살면서, 다른 부족들에 맞서 보호를 받지 않는 한 물리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타주의가 문명시대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물리적인 연유에서가 아니라 심리인식론적인 이유에서이다. 자승자박된, 지각적 정신성을 가진 사람들은 부족적인 지도력, 현실에 맞서 그를 보호해주는 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자기희생의 원칙은 그들을 조금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아라든가, 개인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생하라는 요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이지적 고결, 진실에 대한 사랑, 개인적으로 선택한 가치, 혹은 어떤 사상에의 열정적인 헌신 같은 것에 대해 티끌만큼도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이기주의'를 금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해야 하는 것이 곧 고독한 부족적 늑대의 야수성, 아무런 생각 없는 변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들(이타주의의 이론가들)은 그보다는 더 잘 알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존 듀이, B. F. 스키너도, 존 롤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말살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 생각 없는 야수성이 아니라 이성과 이지, 능력과 장점, 자신감과 자긍심이라는 것을.
자아 없는 이기주의, 1972, 아인 랜드

2.6. 형이상학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무력하게 반항하며, 또 그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수동적인 체념으로 받아들이고, 이 두 가지 면에 대한 만성적 죄책감과 자기회의 속에 빠져,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려고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 충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적 전제가 무엇인지, 또 그러한 충고에 부응하며 살아가고자 시도할 경우 요구되는 철학적 전제들은 무엇인지에 주목하라. 사람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곧 인간에게 선택권, 즉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그 자신의 행동과 성격(예를 들어 용기가 있고 없고 하는 등의)을 포함, 그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반면, 만일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그에게 선택권이 부여되지 않은 것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모든 철학체계의 근저에 놓인 근본적 형이상학적 문제, 즉 존재의 최우위성, 혹은 의식의 최우위성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존재의(실재의) 최우위성이란 존재는 존재한다, 즉 세계는 의식으로부터(어떤 의식으로부터건) 독립적이라는 공식을 말한다. 이는 곧 사물은 눈에 보이는 바 그것이라는 것, 사물은 어떤 특정한 성격, 즉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인식론적 귀결은 의식은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는 능력이라는 것, 또 인간은 자기 외부의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실재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공식이 된다. 이러한 공식을 거부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정반대가 성립된다. 즉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란 없으며, 세계란 의식(그것이 인간의 의식이건, 성스러운 의식이건, 혹은 그 둘다이건)의 산물일 따름이라는 의식의 최우위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따른 인식론적 귀결은 인간은 내면(그 자신의 의식의 내면이건, 혹은 다른 더 우월한 의식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내면이건)을 들여다봄으로써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미의 역전이 일어나는 이유는 개인의 내면상황과 외부세계, 즉 인식자와 인식되는 것간의 차이를 완전히 파악할 능력이 없었거나,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즉 그로써 의식과 존재는 하나의 불분명한 일괄거래(package dealing)로 뒤섞이고 만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구분능력이 인간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식 속에도 함축되어 있지만, 개념적으로 파악해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관찰된 바에 따르면, 어린 아기나 야만인들은 그것을 (어쩌면 아주 초보적으로는 얼핏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 보통사람들 중에도 그것을 이해하려고 선택하거나,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지해서, 혹은 (그리고) 의도적으로 일종의 마구잡이 식의 인식론적 불가지론을 따르면서 어떤 때는 존재의 최우위성을 어렴풋이 인식하다가도 또 다른 때는 그것을 거부하는 탓에 그저 이리저리 왔다갔다할 뿐이고 그 결과 그들의 지적 범위, 즉 추상적인 것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축소시키게 된다. 오늘날 비록 신비한 주술을 외움으로써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 없다면 이 세계는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라는 논의를 타당하다고 받아들인다.

존재는 존재한다는 공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 즉 이 세계 전체가 창조될 수도, 또 소멸될 수도 없다는 것, 즉 이 세계는 어느 날 존재하게 되었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세계를 이루는 근본요소가 원자건, 양자와 전자건, 혹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에너지 형태이건, 그것은 의식이나 의지나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법칙(Law of Identity)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우주를 떠다니는 먼지입자 하나에서 은하계의 형성과 생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내에 있는 요소들의 모든 무수한 형태와 운동, 조합 및 용해는 그 요소들의 정체성에 의해 결정된다. 자연은 형이상학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즉 자연의 본성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것 대 인간이 만든 것, 1973, 아인 랜드
판단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식의(그 이성적 능력의) 한 속성인데, 이는 존재를 인지하느냐 아니면 존재를 피하느냐 하는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 즉 존재하는 사물들 속성의(정체성의) 특성을 알아낸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을 알아내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만 인간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물들이 어떻게 그 자신의 필요에 맞게 배치될 수 있는가(그것이 그의 생존방법이다)를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연적 요소들의 조합을 재배치하는 것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창조적 힘이다. 그것은 거대하고도 영광스러운 힘이며, '창조적'이라는 개념이 유일하게 의미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 그러한 힘을 의미할 수도 없다). '창조'란 자연적 요소들을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식으로 재배치해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이것은 과학적인 것이건 심미적인 것이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에 해당된다. 즉 인간의 상상력이란 그가 실제로 본 것들을 재배치하는 능력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자연과 관련해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가장 간단히, 그리고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바로 "자연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다. 이 경우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인간의 목적에 맞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배한다'는 말은 인간이 자연적 요소들의 속성을 알아내어, 그에 따라 그 요소들을 사용하지 않는 한 자연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2백 년 전, 인간은 23만 8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그것이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달에 있는 우주비행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떤 자연현상을 알아냄으로써 특정한 목소리의 진동을 포착해 전달하고, 다시 지구 위에서 그것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덕택이다. 그러한 지식과 장비가 아니었다면 수세기에 걸쳐 아무리 소망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발을 굴러도 그것이 10마일 밖에까지 들리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물리학과 관련해서는 그러한 점이 (함축적으로) 이해되고 (다소간) 수용되고 있다(따라서 그 분야는 발전했다). 그러나 인간을 다루는 과학, 즉 인문과학과 관련되어서는 그것이 이해되지도 수용되지도 않았고 사실은 목청껏 거부되고 있다(따라서 그 분야는 썩어가는 야만주의가 되고 있다). 거의 만장일치로 인간은 '비자연적' 현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인간은 그 신비한(신성한) 자질인 정신('영혼')으로 말미암아 자연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실체로 간주되거나, 혹은 그 신비한('악마적인') 자질인 정신으로 말미암아 자연('생태학')의 적이 되는 자연에도 못 미치는(subnatural) 실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론의 목적은 인간을 정체성의 법칙에서 면제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하고 그의 정신도 존재한다. 그 둘 모두가 자연의 일부이며, 그 둘 모두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존재가 무생물체의 존재와 전혀 모순관계에 놓여 있지 않듯, 판단이라는 속성도 정체성이라는 사실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무생물체가 지니고 있지 않은 자발적인 행동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의식은 다른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인식(사고)영역에서의 자발적인 행동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육체의 성격에 맞춰서만 동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 의식의 성격(정체성)에 맞춰서만 그 자신의 정신적 행동을 촉발시키고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해갈 수 있다. 그의 판단은 그의 인식과정에 국한되어 있다. 그는 실재요소들을 확인할(그리고 그 재배치를 고려할)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그 요소들을 바꿀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 의식의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인식능력을 사용할 힘은 있으나 그 본성을 바꾸거나 그 본성의 그릇된 사용에 따른 결과를 피할 힘이 없다. 인간은 실재의 인지를 늦추고 피하고 타락, 혹은 전복시킬 수는 있지만, 그에 뒤따르는 실존적, 심리적 재난을 피할 수는 없다(인식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느냐 여부가 곧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고, 그 가치는 다시 인간의 감정과 성격을 결정짓는다. 인간이 자생적 영혼의 존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인간의 판단력 그 자체는 자연과 모순될 게 없지만, 사람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과 인간이 만든 대상, 제도, 과정, 혹은 행동규율간의 결정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많은 모순들이 초래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들의 경우 우리는 그것들을 수용해야 한다.

그것은 바뀔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 인간이 만든 것의 경우 그 어느 것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판단이 가해져야 하고, 그리고 나서 수용되거나 거부되어지고, 필요에 따라 손질이 가해져야 한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도, 또 완벽하지도 않다. 인간은 지식의 미비로 인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고, 거짓말하고 속일 수도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천재성이나 감수성, 독창성의 산물일 수도 있고 어리석음이나 거짓, 악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옳고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혹은 그 중간의 어디쯤일 수도 있다). 자연은 인간의 판단이 옳다는 어떤 자동적인 보장도 인간에게 해준 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인간 각자가 그 자신의 능력과 정직이 허용하는 최대한에서 답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무엇이 그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그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은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들의 판단이 실재사실에 부합되는지 모순되는지 여부에 의해 판단의 참·거짓을 결정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형이상학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옳고 그른 것의 기준일 뿐이며, 그에 의거해 (이성적) 인간은 자신의 목표와 가치, 선택을 판단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은 그저 존재하고 있고, 존재했으며,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인간이 만든 그 어느 것도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선택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에 반항한다는 것은 존재를 거부하기 위한 아무 쓸모없는 시도에 빠져드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식을 거부하는 시도에 그대로 빠져드는 것이다. 존재를 긍정할 때 인간은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그릇된 선택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로소 용기가 생겨난다.

자연현상, 즉 인간의 참여 없이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다르게 일어날 수도, 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인간행동을 포함한 모든 현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것은 얼마든지 다르게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땅에서 일어나는 홍수는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물을 모아두기 위한 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만일 건설업자들이 잘못 계산해서 댐이 무너진다면 그 재난의 근원은 형이상학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 인해 그 결과가 더 심화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시정하려면, 인간은 홍수의 원인과 가능성을 연구함으로써 자연에 복종해야 하고, 더 나은 홍수방지 시설을 짓기 위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나 존재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쓰잘데 없다고 선언하는 것, 기억하는 한 매년 한 차례씩 홍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년에 반드시 홍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으니 자연은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 원래 댐 설치자들이 댐이 튼튼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을 볼 때 인간의 지식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것 등은 의식과 존재의 관계에 대한 원초적 혼돈상태로 인간을 몰고 가는 것이고, 그로써 사람들에게서 평정과 용기(그 외의 많은 것들도)를 앗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바로 현대철학이 2백여 년 동안 선언해온 바인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것 대 인간이 만든 것, 1973, 아인 랜드
인간정신에 대한 철학자들의 공격핵심은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과 인간이 만든 것 사이의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에 바쳐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혼란은 해묵은 실수(이 점에 있어서는 일련의 플라토닉한 면을 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책임이 있다)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고의적이고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해져 가고 있다.

존재의 최우위성(실재의 절대성 인식)이라는 공식에 의거한 철학체계가 인간의 정체성과 권리를 깨닫게 해주었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의식의 최우위성(즉 자연은 인간이 원하는 바대로의 것이라는 외견상 과대망상적인 생각)에 의거한 철학체계는 인간에게는 정체성이 없다는 견해로 이어진다. 즉 인간은 무한히 탄력적이며, 신축성이 있고, 사용할 수도, 혹은 폐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라.

인간정신에 대한 철학자들의 공격핵심은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과 인간이 만든 것 사이의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에 바쳐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혼란은 해묵은 실수(이 점에 있어서는 일련의 플라토닉한 면을 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책임이 있다)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고의적이고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해져 가고 있다.
철학교수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일괄거래방식은 다음과 같다. 이 우주에 '필연'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한 교수는 이 나라에 반드시 50개 주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이를테면 48개나 49개의 주가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태양계에도 꼭 9개의 혹성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즉 10개나 11개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없으니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는 셈이라고 그는 선언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깎아 내리는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을 마치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인 양 속이고는, 인간의 지식부족을 언급할 뿐인 개념들, 이를테면 '기회'니 '우연'이니 하는 것을 자연에 갖다붙이고는 그 두 가지 요소를 함께 뒤섞어 반대로 뒤집는 것이다. "인간은 예측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연도 예측 불가능하다." 하는 주장에서 시작된 논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진다. "자연은 판단력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자유롭지만, 인간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지배된다. 정복당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다."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실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허무한 학구적 얘기라고 믿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그 문제가 그들 자신의 삶에서 야기시키는 결과를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이러한 문제로 만들어진 일괄거래가 그들을 괴롭히는 불확실성과 조용한 절망, 그들 내면의 회색빛 절망의 일부라고 얘기한다면 그들은 그 말을 부정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내면적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성찰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일괄거래로 인한 결과 중 하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의식의 성격이나 기능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 사람이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무엇이 인간의 잘못이며, 무엇이 인간의 잘못이 아닌지에 대해 결과적으로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 의식은 특정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암묵적 전제에 의거해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의식에 대한 상반된 두 개의 감정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일련의 전능한 힘을 지니고 있어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의식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아무 문제 없다. 오직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는 감정과 그와 정반대 되는 감정[그들은 아무 선택권도 통제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 의식은 날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들은 그들 두개골 속에 들어 있는 이해 불가능한 미스테리(의식:역주)의 희생자들이며 알 수 없는 적(의식:역주)의 포로이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의해 내몰린 절망적인 자동인형들이라는 생각("나도 어쩔 수 없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확실성의 영향으로 인해 절름발이가 된다.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생각할 때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질문은 "그것을 하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가"가 아니라 "과연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이다. 이때 그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내가 그러한 능력을 타고났을까?"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작곡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작곡가가 될 수 있는 신비한 재능을 나는 갖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의식의 최우위성이라는 전제를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어두운 의식의 미로를 더듬으며 절망적인 탐색을 시작할 때 그를 움직이고 있는 전제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그러나 그의 탐색은 절망적이다. 존재와의 관계 없이는 인간의식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 즉시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불안하게 비틀거리게 된다. 어떤 조그만 성공에도 그의 불안은 가중된다. 그는 왜 자신이 성공하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다시 그러한 성공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인지 반문한다. 조그만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큰 충격을 받는다. 그 실패는 자신이 그 신비로운 재능을 결여한 증거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실수를 할 경우, 그는 자신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라고 묻는 대신에 "나한테 무슨 잘못된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묻는다. 그는 절대로 오지 않는 자동적이고도 전능한 영감을 고대한다.

시선을 내면에, 점점 커가는 심술궂은 자기회의에 못박고 이런 암울한 투쟁을 몇 년간 계속하는 가운데 존재는 표류해 그의 정신적 시야의 변방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결국 그는 포기하게 된다.

작곡가 대신 어떤 다른 직업, 목표, 욕망(과학자, 사업가, 리포터, 지배인이 되고 싶다든지, 부자가 되고 싶다든지, 친구를 찾고 싶다든지, 몸무게를 빼고 싶다든지)을 대신 넣어 생각해보아도 패턴은 마찬가지이다. 그 희생자의 패턴 중 몇몇은 가짜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믿을 만한(특히 예술에서의) 이지가 '타고난 재능'이라는 신화에 의해 방해받고, 저지되고, 밟혀져왔던가.

그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 채, 그들 중 몇몇은 '실재를 다시 쓰기' 위해, 즉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시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오로지 행복만을 경험하는 세계(고통도, 좌절도, 병마도 없는 세계)를 꿈꾸고는 왜 그들이 지상에서 그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을 잃어버렸는지 의아해 한다.
형이상학적인 것 대 인간이 만든 것, 1973, 아인 랜드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용감하고 정직하고 야망에 찬 존재가 되는 세계에 살게 된다면 그들 자신도 그러한 덕목들을 갖게 되겠지만, 현재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죽게 된다는 생각을 두려워한 나머지 삶이라는 과업을 떠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에 전지全知함을 부여하고는 전통이 자연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즉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믿어온 생각이라면, 그 생각은 틀림없이 옳겠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단 사람들의 생각에뿐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에까지 전능함과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는,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이라고 느끼는 한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전제하에 거기 내포된 문제들의 진위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의 비이성과 그들의 맹목적인 감정(편견이나 미신, 질투 등)에 야합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그 문제에 있어 무력한)에게 전가시킨다.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비난을 대신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그 자신들이 알 도리가 없는 것을 모른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알게 된 어떤 것을 어제는 몰랐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도록 전세계를 하룻밤 새에 손쉽게 바꾸어놓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낀다.

그래도 몇 명 정도는 자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또 그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원시적 정글의 상황에 놓여 있다. 판단력이야말로 인간을 그 무엇과도 구분되게 만드는(그 능력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눈에조차) 것이며, 정체성의 법칙을 떠나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만든 것 중 그 어느 것도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없지만,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행동은 꼭 그렇게 이행되었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행되고 나면 실재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인간성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 경우, 그가 꼭 그러한 성격을 선택했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일단 그 어떤 성격이 형성되고 나면, 그것은 사실이고 그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된다(인간의 판단은 인간에게 그 자신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그러나 완전히 무한하다고 할 수는 없는 자유를 준다).

인간적인 근원을 갖고 있는 사물들은 (물리적인 것이건 심리적인 것이건)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들과는 구분되는 이른바 '인간이 만든 것'이라 칭해질 수도 있다. 고층빌딩은 인간이 만든 사실이요, 산은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사실이다. 우리는 마천루를 변경시키거나 폭파시킬 수 있지만(우리가 산을 변형시키거나 폭파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그 건물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거기 없다거나 눈에 보이는 그것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인 양 가장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의 원칙이 인간의 행동과 성격에도 적용된다. 갑이라는 사람이 반드시 가치 없는 부랑배가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가 그런 인물이 되기로 선택한 이상 그는 가치 없는 부랑배이며 그렇게 취급받아야 마땅하다. 그가 마치 부랑배가 아닌 양 취급해주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사람이 반드시 영웅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 그렇게 되기로 선택한 이상 그는 영웅적인 성취자이며 그렇게 취급받아야 마땅하다.

그를 달리 취급하는 것은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천루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짓고 나서, 마치 그것이 산인 것처럼, 즉 '그냥 생겨난' 것,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단순히 모순적이라기보다 나쁜 것이다.

판단력은 두 가지 결정적인 측면에서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제공해준다. 첫째,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것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건 이지적인 것이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둘째, 그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성격으로 인해 한 인간의 판단력은 다른 사람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변경 불가능한 기본적 구성요소들이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는 판단하는 의식의 속성이 '인간'이라는 실체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그 어느 것도 한 인간으로 하여금 사고하게 강요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자극이나 장애, 보상이나 벌을 주거나, 마약이나 곤봉으로 그의 두뇌를 망가뜨려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마음이 작용하도록 명령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 개인만이 갖는 신성한 권위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복종시킬 수도 지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본성에는 '복종'(이는 인간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이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인간의 경우, 자연의 나머지 부분에 적용될 수 있는 견지를 포함한 어떤 견지에서건 자신의 정신이 '지배'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을 의미한다. 자연물은 인간의 목적에 맞게 변조될 수 있지만, 인간 그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킨다"는 말은 과학이나 기술에서와 같이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주어진 것을 재배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사람이 자연에 대해 반항할 수 없으며,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자연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받아들인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고, '변화시킨다'는 것은 강요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의 정신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정신을 어떤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정신이 지시하는 대로 나름대로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들이고, 그 선택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따르거나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변화'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지식이다. 즉 인간에 관련해서 볼 때, 그들의 정신이 능동적일 경우에는 설득의 과정으로서 지식이 사용되지만, 그 정신이 수동적일 경우 우리는 그들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악(그 외에 다른 악은 없다)을 말없이 체념하며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어떤 무시무시한 독재자의 감옥에 갇혀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것 대 인간이 만든 것, 1973, 아인 랜드
인간을 강압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자연을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을 폭력에 의해 지배하며, 기도나 주술, 제물로써 자연에게 호소하려 하는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인간사회에서도 그러한 행태가 성공한 예는 없다. 그런데도 현대의 철학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종용했던 것처럼 바로 그러한 일을 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에 대해서는 수동적이고 신비로우며 '생태학적' 복종을 하도록, 또 인간에 대해서는 잔학한 힘으로 지배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의 법칙을 부정함으로써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체성과 생존을 위한 필요요건들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택에 그들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오래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성이 그의 생존의 도구라는 사실을, 또 인간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을 가지고 생존해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의 근원은 바로 이지(理智)라는 사실을 회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지는 실재 사실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장기적으로(개념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존재의 최우위성이란 공식에 따르면, 이지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속성이다. 그러나 의식의 최우위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는 이지가 설 자리가 없다. 그 경우 이지란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 이지는 인정도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뻔뻔스럽게 과시해대는 비이성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속에서 체계적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의 문화가 얼마나 의식의 최우위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서 다음을 주시해보라. 정치면에서 보자면, 사람들은 선거에서 무자비하고도 절대적일 만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을 주장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이기거나 질 것이라고 기대하고는, 패자는 완전히 무시한 채(때로 패자가 옳은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승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에 경제, 즉 생산영역에서의 경우, 그들은 실재의 절대성, 즉 사람은 생산하거나 생산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의 절대성을 회피하고는 패자를 편들면서 승자를 파괴해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인간의 결정은 절대적인 반면, 실재의 요구는 그렇지 않다.

그러한 경향, 즉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것과 인간이 만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일괄거래식 경향은 평등주의 운동과 그것을 철학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의 이론 A Theory of Justice}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음험하고 사악한 이론은 인간의 본성과 정신을 가장 저질적 인간의 욕망(질투를 포함한)에뿐 아니라 가장 저급한 비존재의 욕망(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느꼈을지도 모르는 감정)에 복종시키라고 종용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두뇌를 결여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일생의 선택을 하도록 요구한다.

하나의 두뇌가 그 자신의 본성과 힘의 변형을 투사할 수 없다는 사실, 즉 한 천재가 그 자신을 바보의 상태로 투사시켜 볼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 바보가 그 자신을 천재의 상태로 투사시켜 볼 수 없다는 사실, 천재와 바보의 필요와 욕망이 같지 않다는 사실, 한 천재가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바보의 수준으로 전락되었을 경우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죽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 반대로 천재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진 바보는 컴퓨터 양면에 낙서를 하면서 굶어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정체성의 법칙을 내던져버린(따라서 실재를 내던져버린)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원인들에 개의치 않고 '평등한 귀결'을 주장하며 변덕과 총의 힘으로 형이상학적 사실을 바꾸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설교되고, 권유되고, 요구되고 있는 바이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지적, 혹은 도덕적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무지, 혼돈, 절망에 호소함으로써 그것을 피하려는 도덕적 비겁자들, 잠자코 입다물고는 싸움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그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점점 더 큰 죄의식에 찬 공포를 느끼는 그 도덕적 비겁자들은 평등주의자들의 잔학성을 앞장서서 도와주고 있는 셈이며, 결국 알코올 중독자 단체가 도와주고자 애쓰는 폐인과 같은 꼴로 마감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품위 있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바로 존 롤스의 책이 제기한 원칙과 싸우는 것, 즉 도덕적 견지에서 완강하게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점진적 고문에 의해 의지를 말살시키려는 제의를 마치 문명적 견해인 양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그 악은 맞서 싸우기에 너무 엄청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위스키 잔에 빠뜨리기에는 그것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켜라.
형이상학적인 것 대 인간이 만든 것, 1973, 아인 랜드

3.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모든 재산이 사적으로 소유되는 재산권을 포함하여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 제도이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은 인간 관계에서 물리적 힘의 추방을 수반한다 : 기본적으로, 권리는 오직 힘으로만 위반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체적 힘의 사용을 시작할 수 없다. 그러한 사회에서 정부의 유일한 기능은 인간의 권리, 즉 인간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자기방어라는 인간 권리의 대리인처럼 행동하는 정부는 보복용으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폭력을 먼저 사용한 자들에 대해서만 보복을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객관적인 통제하에 있는 보복용 무력 사용 수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 관계가 자발적이다. 인간은 그들 자신의 판단, 신념 및 이해관계가 지시하는 대로 자유롭게 협력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수도 있으며, 서로 타협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단지 이성이라는 수단, 즉 토론, 설득, 계약상 동의의 수단에 의해서, 그리고 서로 도움이 되는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서로 타협할 수 있다. 서로 동의 할 수 있는 권리는 어느 사회에서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것은 동의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다.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고 시행 할 수 있는 권리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가장 가치 있는 속성인 창조적인 정신에 대해서 항상 개방되어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와 집단주의에 극히 중요한 차이점이다.
“WHAT IS CAPITALISM?”
내가 "자본주의"라고 말할 때, 나는 완전하고 순수하며 통제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은 자유 방임주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같은 이유로, 국가와 경제의 분리를 의미한다.
“THE OBJECTIVIST ETHICS”
Every movement that seeks to enslave a country, every dictatorship or potential dictatorship, needs some minority group as a scapegoat which it can blame for the nation's troubles and use as a justification of its own demand for dictatorial powers. In Soviet Russia, the scapegoat was the bourgeoisie; in Nazi Germany, it was the Jewish people; in America, it is the businessmen.

한 나라를 노예화하고자 하는 모든 운동, 모든 독재 또는 잠재적 독재는, 그 나라의 문제들에 대하여 자신이 비난할 수 있는 어떤 소수 집단을 희생양으로서 필요로 하며 또 그것을 독재적 권력을 향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정당화의 수단으로서 이용한다. 소련에서, 희생양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그것은 유대인들이었다. 미국에서, 그것은 기업가들이다.
― 아인 랜드, "자본주의: 미지의 이상" 中
애덤 스미스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대부분 '공공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면에서 이를 옹호하였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진정한 근간이 된다는 점은 간과해왔다. 따라서 급기야 칸트 이후 개인의 자유란 필요악인 것처럼 취급되었다고 랜드는 주장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는 원래 '신중함'이라는 무도덕성과 탐욕이라는 사악함을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고상한 사회사업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미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가 의거하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요소는 최소화시키면서 오히려 그 사회적인 결과만을 강조하는 꼴이라는 것이 랜드의 생각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 사회적인 효과로 인해 도덕적 우선권을 갖는 것으로 그릇되게 홍보하는 반면, 자본주의가 지닌 고유의 미덕, 즉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점점 더 양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아인 랜드는 자본주의란 재산권을 포함한 모든 개인권을 인정하는 데 의거하고 있는 제도라고 정의한다. 이는 자본주의에 따른 결과('공공의 이익')와는 관계없이, 자본주의가 과연 어떤 기본적인 것에 의거하고 있는가를 얘기하려 한 것이다. 개인주의 및 개인의 독립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본주의는 결코 그 목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정의란 인간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고 각 개인이 받아 마땅한 것을 그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 비로소 이러한 정의가 가능하며, 자유로운 개인은 그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공의 이익'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결과일 뿐 자본주의를 평가하는 최우위의 요소는 아닌 것이다. 물론 다른 모든 사회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도 경쟁이라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은 개인의 자유라는 단 하나의 공통된 근저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따라서 그녀에 따르면 '자유방임(laissez faire) 자본주의'라는 말은 의미의 중복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곧 자유방임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다른 사회체제는 인간정신의 모든 본질적인 면과 서로 충동하지만, 자본주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의 이성적인 사회적 욕구에 맞물려 있는 '도덕적' 사회체제라는게 그녀의 정의다. 즉 요약하자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특성과 필요를 인지하고, 이성과 사실에 의거해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제도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녀의 정치 견해는 종종 보수주의자 또는 리버테리언으로 분류되지만, 그녀는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3.1. 고전적 자유주의자


아인 랜드의 철학은 고전적 자유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그녀의 철학과 고전주의의 공통점은 세가지로 예를 들 수 있다.
  1. 개인주의
  2. 시장자유
  3. 중앙집권에 대한 의심

랜드는 사유재산 보호를 위한 자본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유지상주의무정부주의라 규정하고 정부가 없으면 사유재산을 지킬 수 없으므로 "객관"이 서지않는 최악의 사상이라 생각하였다.

다만 그녀의 주장은 자유지상주의무정부주의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녀의 철학은 작은 규모의 정부 공동체가 존재하는 최소국가론(야경국가, 미나키즘)에 가깝다 볼 수 있지만 그녀는 최소국가론의 구상자인 노직의 견해를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유재산이 지켜질 수 있는 아나코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3.2. 신용과 시장, 케인스학파 비판

비록 야만인이지만, 만일 그가 똑똑한 인간이라면 겉핥기식 지식 정도는 습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용'과 '시장'이다.

그는 사람들이 수표라고 불리는 종이조각을 보이기만 하면 먹을 것, 옷,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것들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고층빌딩과 공장들이 대단한 부자들의 지시에 따라 지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부자들의 경리들은 회계원장을 여러 개 놓고 여기서 저기로 마술 같은 숫자들을 옮긴다는 것에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는 속도야말로 그 모든 비밀의 열쇠라고 결론짓는다. 즉 그 수표들이 충분히 빠른 속도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계속 옮겨가는 한, 사람들은 모두 일하고 생산하고 번성할 것이라고 말이다. 만일 그 야만인이 자신이 발견한 것을 글로써 발표할 경우, 그는 자기보다 한 발 앞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인물이 그 점을 예견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야만인은 백화점들이 훌륭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왜 그런 거죠?" 하고 그는 매장감독에게 묻는다. "우리에겐 시장이 충분치가 않거든요." 매장감독의 설명이다. "시장이라니, 그게 뭔데요?" "글쎄요" 그의 새로운 선생은 대답한다. "소비할 사람들을 위해 물건이 만들어지죠. 세상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소비자들인데, 우리에겐 충분한 소비자가 없는 겁니다." "그래요?" 하고 그 야만인은 되묻는다. 그의 눈빛은 새로운 섬광으로 반짝이고 있다. 다음날 그는 거대한 교육재단에서 수표 한 장을 입수한다. 그는 비행기를 세내어 타고 갔다가 잠시 후 완전히 벌거벗은 맨발의 부족 전체를 대동하고 다시 돌아온다. "저 사람들이 소비에 얼마나 능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매장감독에게 얘기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살던 곳에는 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곧 당신은 봉급을 올려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백화점은 이내 파산하게 된다.

그 딱한 야만인은 오늘날까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비자보호 운동'이라는 말을 마술주문처럼 노래하는 롬니(Romney) 주지사, 소비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던 용사 네이더(Nader), 그리고 소비자봉사에 관련된 공식들을 암송하던 대기업의 우두머리들, 그리고 국회에 앉아 있는 우두머리들, 백악관에 있는 우두머리들, 그리고 유럽의 모든 정부에 속한 우두머리들,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교수들이 바로 그들이다.

어쩌면 그러한 야만인의 정신상태가 거의 1백여 년 동안 서구문명을 지배해왔다고 우리가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지도 모른다.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 1974, 아인 랜드
당장의 순간 너머를 보는 것, 즉 원인을 찾고 결과를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도록 훈련받은 현대인들은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인식방법인 양 발전시켜왔다.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형편없는 작은 구멍가게 주인을 보고 그들은 야만인처럼, 소비자의 부족이 그 실패의 원인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그가 팔고 있는 물건, 혹은 그 물건들이 어디서 오는가의 문제는 그 상황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그 물건은 여기에 있고, 항상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가 경제의 동력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는 우리의 물건에 대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신용, 즉 우리의 저축을 소비자들에게 베풀기로 하자고 그들은 충고한다.

하지만 실제로, 소비자들로서의 소비자들이란 그 누구의 시장의 일부도 아니다. 소비자들로서의 그들은 경제와는 무관하다. 날 때부터 소비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고, 생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칭호인 것이다. 생산자들(생산품이나 서비스를 위해 생산품, 혹은 서비스를 거래하는 사람들)만이 시장을 형성한다.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그들은 시장의 '공급'을 대변하고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수요'를 대변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는 똑같은 사람들이 그 둘 모두에 속한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전제가 잊혀지거나 무시되고, 혹은 회피될 때 당신은 오늘날과 같은 경제상황을 맞게 된다.

성공적인 생산자는 많은 사람들, 이를테면 자기자녀들에게 소비자로서의 구매력을 위임한다. 잘 꾸려가는 농장 하나에 기대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가? 보다 원시적인 시대에는 노동력, 즉 생산력을 얻기 위해 농부가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곤 했다. 당신은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나 많은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가? 만일 그러한 비생산적인 사람의 수가 무한히 늘어난다면, 수요가 공급보다 커진다면, 그리하여 만일 수요가 오늘날에서와 같이 요구로 바뀐다면, 당신은 당신의 종자를 다 써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지금 계속되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한 일을 야기시킬 수 있는 기관은 이 나라에 단 하나, 즉 정부밖에 없다. 이때 그들을 돕는 것이 바로 일종의 눈속임 역할을 하는 이타주의라는 사악한 원칙이다. 이타주의의 분명한 수혜자들, 즉 사회복지의 수혜자들은 정부국가 정책의 희생자들이자 겉치례용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야만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또다른 개념, 즉 '신용'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다면 어떤 정부도 이타주의로 용하게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원시공동체에서의 종자, 혹은 비축의 기능을 이해한다면, 그와 똑같은 원칙을 복합적인 산업경제에 적용시켜 보라.

부란 생산은 되었으되 소비되지 않은 재화를 가리킨다. 물물교환 시대라면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어떻게 다룰까? 아주 성공적인 신발 제조업자가 자신의 생산을 늘리고 싶다고 해보자. 그의 부는 신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는 소비자로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자신이 만든 신발을 교환한다. 그러나 생산을 늘리고 싶을 경우, 그는 아주 많은 신발을 모아서는 새로운 공장을 짓기 위한 자재와 기계, 노동력과 교환할 것이고, 또다른 많은 신발을 모아서는 더 많은 신발을 생산하기 위한 가죽, 그리고 자기 밑에 고용할 노동력을 얻는 데 사용할 것이다. 화폐가 생겨나면서 이러한 거래는 더욱 손쉬워지겠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거래의 속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재화와 용역에 대해서 실재實在하는 물리적 재화의 형태(이 경우에는 신발)로 지불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자신의 계획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물리적 재화와 용역은 실재해야 하고, 거래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가 필요로 하는 물리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따라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면, 지폐(혹은 금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를 교환하는 것은 이 경우 거래하는 쌍방 모두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재화를 한꺼번에 소비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비축한다면(자신의 생산을 늘리고 싶어서건, 아니면 그가 화폐의 형태로 가지고 있는 비축에 의거해서 살고 싶어서건) 그 어떤 경우에건 그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돈을 주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연속적인 생산과정(그것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비축된 재화가 흘러들어가 지속적인 생산을 촉진할 수 있는 연료로 사용되어야 한다)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연속적 흐름이 바로 '투자자본', 즉 산업의 종자인 것이다. 따라서 부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줄 경우, 그가 그들에게 빌려주는 것은 그 자신이 소비하지 않은 재화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투자'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다. 자연이 시간의 선납을 요구할 때 어떻게 사람이 생산을 시작하는가 하고 당신이 궁금해왔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을 가능케 하는 축복된 과정인 것이다.

즉 성공적인 사람은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재화를 유망한 초심자(혹은 평판이 좋은 생산자)에게 빌려준다. 이때 이자는 그 부자가 떠안는 위험부담에 대한 대가이다. 농장이건 공장이건, 인간의 성공을 보장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투자가 실패할 경우, 그것은 생산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 채 그 재화가 소비되고 말았다는 뜻이 되고, 따라서 그 부자는 돈을 잃게 된다. 만일 그 투자가 성공하게 되면, 생산자는 그 부자의 투자를 통해 이윤을 낸 셈이므로 새로 만든 재화, 즉 자신의 이윤에서 이자를 지불하게 된다.

이 경우 이러한 과정이 생산의 필요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데만 적용될 뿐, 소비의 필요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 무엇보다 주목하라. 아울러 그러한 과정이 어떻게 흐르느냐가 사람들의 감정이나 희망과 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산력에 대한 투자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것이 바로 '신용'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적용이 가능한 가운데, '신용'이란 어떤 생산적인 사람(혹은 그룹)이 빌렸다가 미래에 생산을 해낸 후에 다시 지불하게 되는 돈, 즉 소비되지 않은 재화를 의미한다. 심지어 자동차 구입처럼 소비를 목적으로 신용차입 기간을 연장할 때조차도 생산적인 기록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앞날이 확실해야 한다. 신용은 야만인이 믿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를 마구 뒤엎고 소비를 생산의 근원으로 변모시키는 요술종이 조각이 아닌 것이다.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 1974, 아인 랜드
소비는 생산의 최종적 원인일 뿐, 결코 가장 유효한 원인은 아니다. 생산의 가장 유효한 원인은 비축인데, 이는 소비의 정반대를 대변한다고 얘기할 수 있다. 비축은 소비되지 않은 재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비는 생산의 맨 마지막 단계이면서, 생산적인 과정에 관한 한 막다른 길이기도 하다. 너무 미약하게 생산하기 때문에 버는 것을 다 소비에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은 아주 절약하며 간신히 제몫 하나 버텨나가지만 미래의 생산을 위해 기여하는 바는 아무 것도 없다. 반면에 조촐하게 저축하고 있는 사람들과 큰 재산을 투자하는 백만장자들(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모든 사람들)은 바로 미래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생산을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사람은, 그가 복지정책의 수혜자이건 돈많은 한량이건, 남들에게 기생하는 인간인 것이다.

산업경제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다. 시간, 활동, 신용의 계산, 그리고 맞물려 얽힌 계약에 의거한 교환의 길고 긴 연속 등이 그에 포함된다. 이러한 복합성이 그 체계의 커다란 가치이자, 다치기 쉬운 근원이 된다. 그 취약성은 심리인식론적인 것이다. 어떤 인간의 정신도, 어떤 컴퓨터도, 그 어떤 기획가도 그 복합성을 미세한 부분까지 다 포착할 수 없다. 그 복합성을 지배하는 원칙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추상적 능력의 중요한 업적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들의 통합능력의 개념적 연결고리들이 부서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국가나 세계의 경제는 고사하고 그들 고향도시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을 위축시키는 반개념적인 오늘날의 교육으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들을 당장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들, 이를테면 그들의 수표나 그들의 집주인, 그리고 모퉁이의 식료품가게 등과의 관계 속에서 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화폐란 실재하는, 그러나 소비되지 않은 재화를 의미한다는 개념이 손실됨으로써 그들은 현실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가장 끔찍한 손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체계의 복합성은 일련의 미심쩍은 인물들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슬쩍 가려주는 역할을 때로 하게 된다. 일은 하지 않는데 대부를 받아 호화롭게 사는 사기꾼들에 관해 모두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데서 대부를 받아 그 빌린 돈을 갚고, 그 돈은 또다른 데서 대부를 받아 갚는 등의 방식으로 운영해나간다. 그러한 책략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 궁극적으로 그는 그 책략에 덜미를 잡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은 안다. 하지만 그 사기꾼이 다름 아닌 정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는 생산적인 사업체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그 기능(경찰, 군대, 법원이 그에 해당된다)과 관련해, 정부는 생산적인 경제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기능 이외의 일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정부는 파괴자가 되고 만다.

생산자들이 내는 세금을 제외하면, 정부는 아무런 수입원도 갖고 있지 않다. 현실로 인해 가해진 제약에서 잠시나마 자유롭게 벗어나기 위해 정부는 개인사기꾼이 꿈도 꿀 수 없는 규모로 신용 원추게임을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오늘 당신으로부터 돈을 빌리는데, 그 돈은 내일 당신에게서 빌릴 돈으로 갚을 것이며, 그 돈은 또 모레 당신에게서 빌릴 돈으로 갚을 것이라는 식이다. '부채조달'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정부가 재화와 자금 사이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정부는 지폐를 발행하고, 그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재화에 대한 보관증(인환권)으로 사용되지만, 어떤 재화, 금, 또는 그 무엇도 그 지폐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재화를 건네주는 대가로 지불되는 약속어음이지만, 미래에 당신이 생산하는 것에서 당신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에든 가 있을 수 있고, 아무 데도 없을 수도 있다. 우선 그것은 이타주의적 구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겉치레 속임수를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위축되는 생산에 가해진 점점 커져가는 막다른 골목, 즉 보조를 받는 소비체계(생산은 안하고 소비만 하는 '복지'계층의 사람들)를 세우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 돈은 다른 사람들의 돈으로 행세하는 압력단체들을 보조하는 데 쓰이게 된다. 즉 그들의 투표권을 사들이는 데, 관료들과 그 친구들의 변덕에 따라 고안된 모든 프로젝트에 재정지원을 하는 데, 그 프로젝트의 실패를 메우는 데, 또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등등에 쓰이게 되는 것이다. 복지수혜자들이 생산자들이 지게 되는 최악의 짐은 아니다. 최악의 짐은 바로 관료들, 즉 생산을 통제하는 힘을 갖고 있는 정부 공직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생산을 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생산을 점점더 어렵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생산자들이 생산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그들 중 대다수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생산자들을 복지수혜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한 무너져가는 사업체를 회생시키기 위해 다른 사업체를 휘청거리게 만들면서, 정부는 빚을 조작하고, 손실을 바꿔치기 하고, 대부에 대부를 거듭해가고, 미래와 미래의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어감에 따라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확대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 그 과정은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게 되는데, 외국에 대한 원조, 외국정부에 대한 부실(지불이 되지 않은)여신, 다른 복지국가(복지수혜국)들에 대한 보조, 국제연합에 대한 보조, 세계은행에 대한 보조, 외국생산자들에 대한 보조, 그리고 외국소비자들이 우리의 재화를 소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용 등을 위해 모든 자금을 소요하는 반면, 그 모든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하고 있는 미국인 생산자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지고, 그들의 자산은 이 지상의 전염병 발원지에 사는 족장이 다 차지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중동 원유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창조해온 부까지도 그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 1974, 아인 랜드

당신은 이러한 광적인 지출이 현재의 생산수준에서 모두 지불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나쁘다.

정부가 바로 이 나라의 종자를 먹어치우고 있는 것이다. 산업생산의 종자들, 이를테면 투자자본, 즉 생산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비축분을 말이다.

이 비축은 종이가 아니라 실재 재화였다. 개인신용의 모든 복잡성 아래서 이런저런 형태로, 이런저런 장소 그 어딘가에서 실재 재화가 그 재정적 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경제는 계속 지속되어 왔다. 그것은 보호막이 깨진 지 한참 후에도 계속되어 왔지만, 오늘날 그 재화는 거의 다 바닥나고 말았다.

먹을 빵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종이조각은 당신을 먹여 살리지 못할 것이다. 돈주고 살 강철보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종이조각이 공장을 지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가죽도 기계도 연료도 없는데, 종이조각이 신발을 만들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예견할 수 없는 갖가지 상품의 부족으로 인해 오늘날의 경제가 곤란해졌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당신은 들어왔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앞으로 다가올 일의 전조이다.

당신은 경제학자들이 오늘날의 문제점들로 인해 당황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왜 인플레이션이 경기후퇴를 동반하는지(그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케인즈식 원칙에 역행하는 것이다)를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거기에다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갖다 붙였다.

그들의 이론은 화폐가 실재하는 재화를 나타내는 한에서만 기능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금공급이 인플레이션 되는 어떤 특정단계에 이르면, 정부가 나라의 투자자본을 잠식해 들어가고, 그로써 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전체 유형자산 가치는 1968년 달러기준으로 3조 1천억 달러로 추산된다. 만일 정부가 소비를 계속해나간다면, 그 엄청난 부도 당신을 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그 기막힌 마천루들과, 거대한 공장들, 비옥한 농장들이 남을지도 모르지만, 연료, 전기, 운송수단, 강철, 종이, 내년의 추수를 위한 종자는 남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시기가 오면 정부는 그 자신이 그 동안 함축적으로 어떤 전제에서 행동해왔는가를 분명하게 밝힐 것이다. 즉 정부의 유일한 '자본'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그때가 되면 당신들이 더 이상 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정부가 떠맡아 반(半)산업적 생산을 향한 내리막길에서 당신이 일하도록 만들 것이다. 기술에너지에 대한 유일한 대체물은 바로 노예들의 육체노동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파산이 독재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우리가 독일이나 러시아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만일 누구라도 정부의 계획이 인간생존의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체주의가 반세기 계속된 후에 소비에트 러시아가 미국의 밀과 미국의 '노하우'를 구걸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앞으로 한동안 독재가 이 나라를 통치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내전의 막다른 혼란은 가능하다.

다가오는 경제적 파멸을 앞둔 이와 같은 시기에 지식인들은 평등주의 사상을 강연하고 있다. 정부지출의 삭감이 꼭 필요한 이때에 그들은 더 많은 복지계획을 요구한다. 생산력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절실한 이때 그들은 무능한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한다. 국가가 자본의 축적을 필요로 하는 이때에 그들은 부자들의 부를 빨아들이라고 요구한다.

국가에 더 많은 비축이 필요한 이때에 그들은 '소득의 재분배'를 요구한다. 그들은 더 많은 일자리와 더 적은 이윤을(더 많은 일자리와 더 적은 수의 공장)을 요구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요구하면서도 연료, 기름, 석탄 등 오염은 용납할 수 없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자리와 공장, 혹은 생산자는 어찌되건 상관없이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재화를 공짜로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케인스 경제학의 결과는 모든 산업국가의 멸망이지만, 그들은 그 이론의 근본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려 들지 않는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나치독일, 중국, 마르크시스트 칠레, 사회주의 영국의 예들이 그들 주위에 늘어가고 있지만, 그들은 보고 배우려 들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촉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생산이며, 기아의 위협은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무제한의 풍요를 생산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생산했던 유일한 경제제도가 무엇인가를 지식인들은 알고 있지만, 마치 그런 것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점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려 들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지식인으로서의 리더십이라는 임무를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거의 소용없다.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도 왜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미래에 도대체 희망이 있는 것일까? 물론 희망은 있다. 이 나라에는 아직 한 가지 자산이 남아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국민들의 생산력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그 능력이 자유롭게 발휘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바로 그만큼 우리는 파멸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룻밤 사이에 그 이상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이름만은 밝혀야 한다. 우리는 입으로는 솔직함과 진실을 떠들면서도 모든 정치분파에 속한 잰 체하는 저 지식인들이 실제로는 감추려고 그토록 애썼던 그 비밀을 이 나라에 밝혀야만 한다. 즉 그 기적 같은 생산적 제도의 이름은 바로 자본주의라고.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 1974, 아인 랜드

4. 기타 견해

아인 랜드의 그 외 다양한 생각을 알고 싶다면 이 곳을 추천한다. 엄청나게 방대하게 정리되어 있다.

4.1. 이데올로기

객관주의자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주의자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지지 못한 철학적 기반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없으면 멸망 할 운명이 된다.

정치는 세가지 철학적 분야를 기반으로 한다. 즉 형이상학, ​​인식론윤리 -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론과 인간의 존재와의 관계에 기반한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만 일관된 정치 이론을 수립하고 실제로 그것을 달성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기반이 없는 정치에 몰두하려 할 때, 결과는 오늘날에는 "보수주의"라고 느슨하게 규정된 무능력하고, 무용지물, 모순과 피상적인 것의 당혹스러운 이념이 된다.
The Objectivist Newsletter, Jan. 1962, 1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는 쓸데없고 무력하고 문화적으로도 죽었습니다. 그들은 제공 할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적 표준을 파괴하고, 사고를 붕괴시키고, 자본주의를 불신하고, 절망과 독재로의 이 나라의 분명한 붕괴를 가속화하는데 도움을 줄겁니다.
Capitalism: The Unknown Ideal, 199
파일:external/www.azquotes.com/quote-there-is-no-difference-between-communism-and-socialism-except-in-the-means-of-achieving-ayn-rand-57-17-77.jpg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외에는 차이점이 없다 -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으로, 사회주의자들은 투표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 살해와 자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모두에게 모두를 희생하자는 식의 집단주의적 이상이 그들의 도덕적 이상이라면, 그들은 그 이상을 지금 이 지상에서 실천에 옮기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작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작용할 수도 없다는 논의로 그들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이타주의 또한 작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추구하던 바를 멈추고 이타주의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하지는 못했다. 오로지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이성뿐이었지만, 그들은 사방으로부터 이성은 도덕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도덕성은 이성의 영역 밖에 놓여 있고, 어떠한 이성적 도덕성도 결코 정의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도 사회주의 경제이론들 속에 내재된 오류와 모순들은 계속해서 폭로되고 반박되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들을 말릴 수 없었고,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성인들과 소위 말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작용하게 하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는 어떻게든이라는 모든 비이성적인 마술적 수단에 의해 해결되었다.

정치적 자유로 향하던 흐름을 뒤엎고, 절대국가와 전제주의적 국가통치의 원칙들(국가가 원하는 대로 시민들의 삶을 통치할 권리가 있다는)을 회생시킨 것은 대재벌들도, 노조도 아닌 지성인들이었다. 이번에는 그것이 '신성한 왕의 권한'이 아닌 신성한 대중의 권한이라는 이름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그 기본원칙은 마찬가지였다. 즉 누가 국가라는 기계의 통제권을 장악했건, 총부리를 들이대고 그 사람의 도덕적 원칙을 강요할 수 있는 권리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다룰 수 있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강요 아니면 설득이 바로 그것이다. 논리를 통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총에 의지하게 마련이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그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꿈을 얻었다. 그들은 그 꿈을 20세기로 옮겨와서 세 배나 키워갔고, 더구나 질이 더 떨어지는 수많은 복사본을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형태와 변용 속에 사회주의를 집어넣어 사회주의의 본성(소비에트 러시아와 나치독일, 사회주의 영국)에 대해 아무런 오해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지성인들이 가장 아껴온 전통의 붕괴였다. 한 정치적 모델로서의 집단주의를 파괴시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아직도 습관적으로 사회적으로 타협하느라고, 혹은 태만한 탓에 사회주의 슬로건들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제 더이상 도덕적 십자군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흉측하고 끔찍한 현실이며, 현대 지성인들의 죄의식 중 일부는 그들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냈다는 인식에 의거한다. 그들은 한때 그들이 고매한 실험이라고 환영했던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소비에트 러시아)을 스스로 목격했다. 그들은 나치독일을 보았고 '나치'가 곧 '국가사회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가해진 최악의 충격, 가장 큰 환멸은 사회주의 영국이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문자 그대로의 꿈, 피를 뿌리지 않는 사회주의, 삶의 의미와 미래였다. 그 경우 몰수를 위해 무력이 사용되었을 뿐 살인을 위해서는 무력이 사용되지 않았고, 생산품은 빼앗겼으되 인명은 빼앗기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살해당하지 않은, 그러나 스스로를 자살로 몰아넣은 국가가 있었다. 대다수의 현대 지성인들은, 심지어 그들 중 가장 회피적인 사람들조차 이제 사회주의(혹은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경제적 집단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그들의 피상적인 집단주의 옹호는 스스로 자본주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그것만큼이나 맥없고 무능하며 회피적이다. 열기와 도덕적 열렬함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간 것이다. 때로 러시아는 진짜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느니, 모든 것은 스탈린 잘못이라느니, 혹은 사회주의는 영국에서 한번도 진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느니, 혹은 그들이 옹호한 것은 어떻든 뭔가 다른 것이었다느니 하는 등의 자유주의자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여러분들은 버텨줄 다리가 없는 사람들, "내 무리들 같았으면 그것을 더 잘 해냈을 텐데." 하는 막연한 희망을 보잘것없게 밝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믿음과 힘 : 현대세계의 파괴자들, 1960, 아인 랜드
우리 시대의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정치적 문제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또는 자유 대 국가주의입니다.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는 원래 의미를 잃어 버렸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도록 확장 될 수 있는 "보수주의"와 "리버럴"의 안개가 짙어 정의되지 않은 용어로 침묵하고, 억압되고, 피하고, 숨겨졌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기록에서 나온 것처럼 "리버럴"의 목표는 한번에 한 단계씩 정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단일의 구체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를 통해 이 나라를 복지 국가로 밀입국시키는 것이 었습니다. 이러한 단계를 원칙으로 요약 할 수 있으며, 방향을 식별하거나 기본 사안을 명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가주의론은 표결이나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느린 썩음에 의한 것이죠. - 회피와 인식 론적 부패의 긴 과정에 의해, 공평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 "보수 주의자"의 목표는 그 과정을 늦추는 것이었다.)
Capitalism: The Unknown Ideal
1930년대에 "리버럴들"은 광범 한 사회 개혁의 십자군 정신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계획된 사회를 주장하고, 추상적인 원칙에 관해 이야기했으며, 주로 사회주의적인 성격의 이론을 제창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들이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의 권력이 끝내는 일시적인 수단 일 뿐이라는 "상대방의 보증", 즉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물질적인 필요에 이르는 해방이라는 "고귀한 목적"을 상대방에게 확신시키고있었습니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리버럴" 진영에서 말하는 계획된 사회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프로그램, 이론, 원칙, 추상화 및 "고귀한 목적"은 더이상 유행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리버럴"은 사회 전체 또는 경제 전체와 같은 대규모 문제에 대한 정치적 우려를 비웃는다. 그들은 비용, 상황 또는 결과에 관계없이 단일, 구체적 범위, 즉각적인 프로젝트 및 요구 사항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상 주의적"인 "실용 주의적"이 아닌, "실용 주의적"은 "스탠스"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름받을 때 가장 좋아하는 형용사이다. 그들은 정치 철학에 호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들은 "태그", "레이블", "신화", "환상"과 같은 정치 개념을 비난하며 자신의 견해를 "분류"(즉, 식별)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합니다. 그들은 호전적으로 반 이론적이며 - 지적 성향의 퇴색 된 맨틀로 여전히 어깨에 매달려 있습니다 - 그들은 지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이전의 "이상주의"의 유일한 남은 것은 때를 쓰며 요구할 때 상점에서 산 "인도 주의적" 슬로건을 피곤하고 냉소적이며 의식적으로 인용하는 것입니다.

냉소, 불확실성 및 공포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여전히 지배적인 문화의 휘장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적 도구에 녹슬지 않고 오랜 세월을 통해 더 밝고 밝아 진 유일한 것은 권력에 대한 정욕입니다 - 독재적이고, 국가주의적이며, 전체주의 정부의 힘입니다.
Capitalism: The Unknown Ideal
Above all, do not join the wrong ideological groups or movements, in order to “do something.” By “ideological” (in this context), I mean groups or movements proclaiming some vaguely generalized, undefined (and, usually, contradictory) political goals. (E.g., the Conservative Party, that subordinates reason to faith, and substitutes theocracy for capitalism; or the “libertarian” hippies, who subordinate reason to whims, and substitute anarchism for capitalism.) To join such groups means to reverse the philosophical hierarchy and to sell out fundamental principles for the sake of some superficial political action which is bound to fail. It means that you help the defeat of your ideas and the victory of your enemies.

무엇보다도, 단지 '무언가를 하기위해서' 그릇된 집단이나 정치운동에 참가하지마라. '이념에 의한것', 애매모호하게 정의되지도 않은 (보통 뒤집히고 모순된)정치적 신념들을 부르짖는 집단들이다(이성보단 맹신을 위에두고 자본주의보다 종교를 대신하는 보수정당들, 아니면 변덕스럽고 자본주의보다 아나키즘을 대신하는 리버테리언 히피들) .이런 집단들에 참가하는 것은 본디 철학의 범주에 벗어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정치운동으로 현실을 팔아먹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당신의 사상을 져버리고 적들의 승리를 돕는 것밖에 되지않는다.』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아인 랜드 회고록, 1권 7장 中

아인 랜드는 자유지상주의 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자신의 철학이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더불어 자유지상주의를 '우익 히피들'라 부르며 혐오하였다. [9]

4.2. 인종차별

인종 차별주의는 가장 수준 낮고, 가장 조잡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집단주의이다. 그것은 인간의 유전적 계보에 도덕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지적이고 특징적인 성격이 그의 내부 몸의 화학에 의해 생산되고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은 자신의 성격과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상들의 집합체의 성격과 행동에 의해 심판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인종 차별주의는 사람의 마음의 내용이 유전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신념, 가치관 및 성격은 출생하기 전에 자신이 통제 할 수없는 신체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철학과 과학에 의해 철저히 논박 된 타고난 아이디어 (또는 유전 된 지식)에 대한 원시인의 버전이다. 인종 차별주의는 야만인에 대한 교리이다.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구별하는 심적 상태에 적절한 집산주의 또는 축산 농장 버전이지만,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구분되지 않는다.

결정론의 모든 형태와 마찬가지로, 인종 차별은 인간을 다른 모든 생물 종과 구별하는 특정한 속성, 즉 이성적인 교수진을 무효로 만든다.인종 차별은 사람의 삶의 두 가지면을 부정한다. 이성과 선택, 또는 정신과 도덕성을 화학적 예정으로 대체한다.
The Virtue of Selfishness, 126
하지만 아랍인을 야만스럽다고 하고, 흑인 노예무역을 합리화하고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정당화하는 등 인종차별과 모순된 발언을 하였다.

4.3. 기성질서

사회적으로, 폭정의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불확정한, 비공식적인 지배자 계층(이들은 공무원들이 가장 총애하는 무리들이다)에 의해 확산된다. 절대군주 시대에, 최악의 불법을 저지른 것은 바로 왕이 총애하는 자들이었다. 심지어 왕조차도 대중의 분노로부터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정의로운 척이라도 해야 할 필요를 느낀 나머지 최소한의 자제를 했지만, 그의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총애의 수혜자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권력의 특권을 휘둘렀던 것이다. 서로 마구 빼앗고, 슬쩍 눈감아 주고, 아첨하고, 등뒤에서 배반하면서 출세에 혈안이 되어 있는 왕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권력을 위한 권력을 옹호하는 최악의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어떤 정치체제에서건 이는 진실이다. 절대군주제건, 전체주의적 독재체제건, 아니면 혼합경제체제건 관계없이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나라의 지적인 분야에서 정치권력의 최악의 모습의 하나를 본다. 즉 총신들, 비공식적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 정부의 권력을 지니지만 정부와 같은 책임은 지지 않는 사적인 그룹에 의한 통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교대로 당번을 서면서 서로 교환하는 그룹이고, 종종 내부적으로 불화를 겪기도 하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똘똘 뭉쳐 있다. 금전적 총애을 얻기 위해 서로 싸우지만, 그들이 정확히 얼마를 받는지, 그들의 정확한 신분은 무엇인지는 그 구성원들에게도, 그들의 경쟁자들에게도, 혹은 수백 명의 국희의원들과 수천 명의 관료들(그들은 이제 이 끔찍한 괴물 같은 존재들 때문에 당황하고 겁을 먹고 있다) 중에서 그들의 특별한 후원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객관적인 규칙을 결여한 다른 모든 게임에서 그러하듯이, 이 경우에도 성공과 권력은 소리 높여 짖는 자들(언론 에이전트들)과 허세부리는 사람들에 달려 있다.

배타적인 무리는 지적 분야, 특히 예술분야에서는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서로서로 견제하는 역할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에 그러한 배타적인 무리에 속하지 않는 비순응자도 그 분야에 들어가 어떤 한 파벌의 도움 없이도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배타적인 무리들은 하나의 기성질서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기성질서 확립하기, 1972, 아인 랜드
'기성질서'라는 말은 약 10년 전까지는 별로 사용되지도, 들려오지도 않던 말이었다. 그 말이 처음 생겨난 곳은 영국인데,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어떤 활동분야를 선점하는 상류가문들에 대해 이 말이 적용되었다. 영국의 귀족은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신분이므로, 이러한 귀족제는 미국의 정치체제에서는 철폐, 금지되어 있다. 귀족이란 어떤 특정지역 거주자들의 비자발적인 봉사로 아무 수고 않고 수입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왕이 어떤 특정개인에게 부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자, 이제 그와 똑같은 정책이 미국에서도 진행중이다. 이 경우 특권이란 영구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 동안 뭉칫돈으로 수여되며, 특정영토 안의 농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시민들에게 비자발적인 봉사를 부과한다. 그러나 미국내의 그 특권이 영국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정책의 성격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지적 기성질서의 특성을 살펴 보라. 그것은 1백 년 정도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유행했던 근본전제들(칸트의 신비주의와 마르크스의 집단주의, 거리 모퉁이 복음주의자의 이타주의)을 도그마로 신봉하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세 차례의 끔찍한 독재(소비에트 러시아, 나치독일, 공산중국에서의) 이외에도, 폭력과 절망이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하게 진행된 사회주의 실험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지성인들은 자신들의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 도그마를 수정하도록 촉구받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부자를 거부하는 것은 대담하고, 이상적이며,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은 태도라 생각한다. 그들은 여전히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면서도, 정부 돈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의 '격려'체제가 장악하고 있을 때 유명했던 나이든 '지도자들' 수준에서 지적인 기성질서는 모두 얼어붙어 있다. 학교를 조종함으로써,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도그마를 영속시키고 반대의견을 점차적으로 침묵시켰던 것이다.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반대자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하잘것없는 일을 놓고 벌이는 트집잡기식 반대에 불과할 뿐, 결코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이러한 반대는 교리에 도전하지 않는 한 심지어 가톨릭 교회에도 허용되어 왔고, 공산주의 교의에 도전하지 않는 한 소비에트 기관들의 '자아비판' 시간에도 허용되어 온 것들이다. 근본전제들에 도전하지 않는 반대란 그 전제들을 강화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철학의 붕괴와 정부권력의 성장이 기성체제를 에워싸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것도 특히 이러한 면에서이다.

비공식적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그룹들에 의한 통치는 마치 문화 속에 서서히 퍼져가는 독을 투입시킨 것같이 특별한 두려움을 확산시킨다. 그것은 특정한 통치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익명의 배타적 무리가 지닌 알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고, 이는 알 수 없는 적들에 대한 만성적인 두려움으로 커져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확신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돈되어 있고 불확실하지만, 체제는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영웅적인 성실을 요구한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 속에 근본적인 전제들이 들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 숨어 있는 전제들에 의해 파괴된다. 막중하고 지대한 문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아주 자잘한 예상 밖의 일상적인 양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동료가 반대할 만한 추상적인 생각(그것에 대해 사실 반대해야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을 갖고 있을 때, 어떤 교수파벌의 요구(그것에 대해 사실은 반대해야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가 막연하지만 어딘지 온당치 않게 느껴질 때, 재능 있는 강사(그는 사실 채용되어야 하는데도 채용되지 않고 있다)가 제멋대로의 태도를 보일 때, 그처럼 소소한 문제에 대해 반대를 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쓸데없이 적을 만들고, 괜히 현재의 지위와 어쩌면 자신의 삶까지 위협받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할말을 해야겠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내가 누군들 제대로 알 수 있으리요?"라는 현대 회의주의의 가장 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한 뒤에, "누구를 굳이 기분 나쁘게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사람을 마비시키는 질문을 덧붙이고는 결국 하려던 말을 멈춰버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들이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아닌지를 재빠르게 간파한다. 알 수 없는 정부 권력자들에 의해 별로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연구지원금을 받게 되고, 그 수상자들에 대해 주의깊은 존경심이 보내지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능력이 중요하지 않으니까. 결국 능력이나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진다(그리고 위의 지원금 문제는 그와 똑같은 독단적인 권력이 인간의 삶에 침입하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공정함 따위에 누가 신경쓴담?" 하는 식의 냉소적인 생각에서 시작해서 "누가 진실 따위에 연연하지?" 하는 데까지 내려온 후, 다시 "아무려면 어때?" 하는 식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잘한 타협을 하고 조금씩 모난 데를 다듬고 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부패에 굴복하고 월부로 조금씩 영혼을 팔게 되어, 결국 그들의 정신에는 두려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업면에서, 복지국가의 부상은 현상을 그대로 굳어지게 하고, 수입 전前에 세금을 내는 시대의 대규모 법인의 권력을 영속시킴으로써 세금에 짓눌린 새로운 세대들이 아예 그들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게 한다. 그와 유사한 과정이 지식인들의 복지상황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그 두 분야에서의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만일 기업체 간부나 대학 학장, 잡지사 편집장과 얘기를 해보면, 당신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별한 현대적 특질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마음속에 "안전하게 행동해, 괜히 적 만들지 말고. 누구한테냐고? 그야 물론 모든 사람에 대해서이지"라고 녹음기가 속삭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나올 때마다 자동적으로 똑똑 흘러내리거나 튀어 오르듯이 회피하고, 부드럽고 애매하고 온화한 태도를 취하며,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하게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심리적으로는 가장 두려워하면서, 실존적으로는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상대는 누구일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재능과 진실이라는 두 개의 무기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 이를테면 잠재적인 천재성과 순수하고 철저한 성실함을 지닌 젊은이, 초심자, 즉 출중하고 고독한 인간이다. 그들은 "그 사람은 속하지 않아"(무엇에 속한다는 것일까?)라고 말하면서 그자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그 자신들이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가 자신들을 처치해버릴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출중하고 고독한 인간은 그들이 쳐놓은 보호용 바리케이드 너머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능과 성실에 맞서 농간을 부리는 체제에서는 지능과 성실이라는 자신의 미덕으로 인해 오히려 지장을 받는다.

얼마나 많은 조숙하고 예민한 젊은이들이 해독제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나이를 먹기도 전에, 그들 주변에 산재해 있는 악을 느끼고는 절망적으로 분노에 찬 당혹감 속에서 결국 포기를 하고, 얼마나 많은 그들이 자신들의 정신을 바보로 만들면서 굴복을 하고 마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 개혁가들이 오늘날 존재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기득권층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고,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검열을 확립함으로써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딛지 않는 한, 능력 있는 몇몇 사람들은 언제나 이 모든 현실을 뚫고 나가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치르는 노력과 투쟁, 인내의 대가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대단히 예외적인 사람들만이 그러한 희생을 치를 수 있다. 오늘날 독창성, 성실, 자립은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만이 택하는 순교로 향하는 길이 되었다. 그들이 굳이 그 어려운 길을 택하는 이유는, 그 길 이외의 대안이 더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를 이루는 대가로 그들에게 그처럼 큰 어려움을 겪게 하는 사회는 대단히 문제가 많은 사회이다.

다음은 몇 개의 공공 '특별배당'이 나이든 교수들에게 넘어가도 해가 될 것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인도주의적인' 국회의원들(그리고 그들의 선거구민들)을 고려하기 위한 것이다. 겹겹이 에워싸인 평범주의의 통치하에 무시되는 것은 바로 점잖은 보통사람들의 도덕적 성격이다. 천재는 끝까지 싸울 수 있고, 또 싸울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싸울 수도 없고, 또 싸우지도 않는다.
기성질서 확립하기, 1972, 아인 랜드

4.4. 교육

교육의 유일한 목적은 학생에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개발하고 현실을 다루기 위해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훈련은 이론적, 즉 개념적입니다. 그는 사고하고, 이해하고, 통합하고, 증명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합니다. 그는 과거에 발견 된 지식의 필수 요소를 배워야하며, 자신의 노력으로 지식을 습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Return of the Primitive: The Anti-Industrial Revolution, 88
'기회공평의 원칙'이란 혼합경제의 어수선한 작은 임시방편이자 말의 자유를 위한 어줍지 않은 대용물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집단주의 경향을 늦춰주는 최소 단위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기성체제가 방송전파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막아왔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국가적인 위기시에 일시적인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제 교육 전반에서도 기회공평의 원칙이 호소되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원칙은 정부의 소유권과 지적 자유의 결합을 꿈꾸고 있는 사회주의적 감상의 전형적인 산물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 적용되었을 경우, 기회공평의 원칙은 이견이 분분한 쟁점이 있을 경우 그 모든 견해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방송파를 소유하는 것은 국민'이므로 '국민'의 모든 분파가 그들 공동의 자산에 대해 똑같은 접근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공평의 원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그것이 공평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데 있다. 혼합경제의 다른 모든 산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흐릿하고 막연한 근사치이며, 따라서 압력집단간 싸움의 도구이다. 어떤 것이 쟁점인지 아닌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어떤 주어진 논쟁에서 각기 다른 입장을 과연 누가 대변하도록 할 것인가? 만일 서로 다른 견해가 난무한다면, 과연 그 중 어느 쪽에 발표권을 주고 어느 쪽은 침묵을 지키도록 해야 할까? 과연 누가 '국민'이며 누가 국민이 아닌 것일까?

그 '기회공평'이란 그룹에만 해당될 뿐, 개인의 견해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뉴욕에 있는 한 텔레비전 방송국은, 그들은 '심각하게 상반되는 견해들'에 대해서 동등한 시간을 할애할 책임이 있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어떤 견해가 심각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심각이라는 기준은 그 견해의 질에 의거한 것일까, 아니면 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달린 것일까? 우리가 실제로 목격할 수 있듯이 분명 후자가 정답일 것이다. 텔레비전 사설에 대한 답신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 논쟁그룹에 참가했던 어떤 그룹의 대표자가 그 답신자이기 때문이다.

기회공평의 원칙(공공소유의 신화와 마찬가지로)은 감상적인 사회주의자들, 즉 악랄한 사회주의자들인 공산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과는 차별되게 힘과 자유를 결합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환상이다. 사람들(즉 '대중')은 본질적으로 모두 한마음이며, 반대그룹들은 거의 없거니와, 있다 하더라도 쉽게 화해하게 될 것이고, 단일한 다수의지가 지배하게 될 것이며, 간혹 불공평이 행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고집스런 개인들(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어쨌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다)에 대해서만 행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곧 그들이 지닌 환상인 것이다(방송파가 왜 개인자산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내 책 {자본주의: 그 미지의 세계(Capitalism: The Unknown World)}에 실린 글 [방송전파의 자산위치(The Property Status of Airwaves)]를 참조하라).

실제로 기회공평의 원칙은 '중도파'적 태도(그런데 그 '중앙'이 천천히 움직여, 움직일 수 없이 좌파로 다가서고 있는 참이다)라는 위험한 궤도로 이어졌다. 중도파적 태도란 주저, 타협,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유의 전통의 남은 찌꺼기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을 뿐 기성체제에 의해 조종되며, '공평'에 입바른 아첨을 함으로써, 또 너무 명명백백한 '불공평'에 붙들릴까 두려워함으로써, 그리고 겉치레(이를테면 극단적이면서도 실제로 심각하게 반대 되는 견해를 갖고 있는 어떤 대변자들에게 어떤 특정 방송시간대를 할애하는 식의 겉치레)를 행함으로써 조종을 한다. 그러한 정책은 그 성격상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겉치례'는 방송시간에 관한 한 자유의 옹호자들이 갖고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방송전파보다 한 나라의 미래에 훨씬 더 중요한 분야, 한 나라의 지성, 즉 국민의 정신과 문화, 기성체제, 언론 및 궁극적으로 방송에서의 지배적인 사조를 결정짓는 분야, 다시 말해서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기회공평에 해당되는 것이 없다.
교육에서의 기회공평의 원칙, 1972, 아인 랜드
이 나라의 미래 위에 떠도는 가장 불길하고 결정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낸 비용으로,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의 대학들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어떤 사상을 선전하고 어떤 사상을 배제시킬 것인가(이 질문은 모든 공립, 혹은 준공립 교육기관에 해당된다. 여기서 '준공립'이라는 말은 형식상으로는 사립학교되, 공공기금에 의해 부분적인 보조를 받으므로 정부가 전적으로 조종하는 학교들 을 지칭하기 위해 내가 사용한 말이다).

정부는 사상의 조정자가 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정부기구들(공립, 혹은 준공립학교들)은 다른 것은 배제하고 단 하나의 견해만을 가르칠 권한이 없다.

그러한 학교들은 어느 특정 시민집단이 믿는 바만을 가르치면서 다른 집단의 믿음은 무시하고 내버려둘 권한이 없다. 그 학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똑같이 부담을 지고 있는 시민들에게 그 학교들이 불평등을 부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정부가 과학분야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사상과는 정반대 되는 것을 가르치라고 돈을 대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그 개인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인 것이다. 만일 그의 사상이 공적인 학교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제외된다면 그 개인의 권리는 더욱 심각하게 침해받는 셈이 된다. 이는 곧 그가 그릇되고 거짓이라 생각하는 것을 홍보해달라고, 그리고 자신이 진실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탄압해달라고 강제로 돈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보다 더 악랄한 불공평이 있다면, 수도 워싱턴에 사는 사람 중 누구건 예를 들어보라고 나는 도전장을 내겠다.

텔레비전과 언론이 좌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고등교육기관에서 현재 격렬해지고 있는 야만적 몽매주의와 잔혹한 옹졸함, 편견, 왜곡에 견주어보면, 텔레비전과 언론은 차라리 공평과 공정함의 모델인 것처럼 보인다.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학과와 학문은 각각 어떤 특별한 무리가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자기자신의 견해를 제외한 어떤 이론도 가르치지 못하도록 명실공히 배제한다. 사립학교의 경우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견해만을 가르치고 기타 견해들은 배제할 권리가 있지만 공립, 혹은 준공립학교들은 그렇지 못하다.

논쟁이란 우리시대의 징표이다. 수많은 학파들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길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과목(특히 인문학분야에 속하는 과목치고)이란 없을 지경이다(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과목들이 다 유효하다는 뜻은 아니고, 나는 그저 그처럼 다양한 과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학 학과들, 특히 일류대학의 학과들은 단 하나의 견해(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양한 견해들을 곁들임으로써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하고는 있지만)만을 가르치고 단순한 회피수단에 의해(이를테면 그 자신들의 견해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모두 무시하거나, 다른 견해들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가장하는 것, 혹은 반대견해는 별것 아닌 것처럼 축소시 킴으로써 근본적인 것은 건드리지 않는 등의) 그 독점을 유지해나간다.
교육에서의 기회공평의 원칙, 1972, 아인 랜드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과는 언어분석(이는 철학과 문법간의 잡종교배 결과 생겨난 실패작인데, 그 잡종교배의 후손은 노새보다 수명이 짧다)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그 직계자손격인 실용주의나 논리실증주의의 남은 찌꺼기가 그 시류에 함께 편승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다 '너그러운' 학과들의 경우는 실존주의(이는 똑같은 칸트주화의 반대면에 해당된다)라는 정반대 견해도 학과에 포함시킨다 (전자는 철학이 문법이라고 얘기하고, 후자는 철학이 느낌이라고 얘기한다).

심리학과에는 간간이 프로이트주의자들도 보이지만, B. F. 스키너가 이끄는 행동주의에 의해 지배된다(여기서는 인간이 타고난 생각에 의해 움직인다는 주장과 인간에게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주장간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학과와 경영학과가 무엇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는 다음과 같은 예에 의해 극명하게 보여진다. 어느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의 상과대학 학장이 최근 그 대학을 '매니지먼트 대학(School of Management)'이라고 바꿔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윤을 낸다는 개념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정부나 자선단체 같은 비영리 기관에서 일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사회학과는 아직 그 어느 누구도 사회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영문학과는 {더 뉴욕타임스 북 리뷰}에 의해 지배된다.

물리과학 분야에 속하는 여러 학과들의 상황은 나도 잘 모르지만, 생태학자들의 '과학적'인 글에서 저간의 사정을 보여주는 징조들은 우리도 보아왔다.

오늘날과 같은 교육정책의 결과, 대학 졸업자의 대다수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도, 또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도 정말 문맹이 되었다. 그들이 반드시 선생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견해가 존재하는지, 또 지금껏 존재한 적이 있는지를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과목(개론과목은 제외하고)을 하나도 듣지 않고 졸업하는 철학전공생들이 있다. 이론적으로 자본주의가 뭔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거니와, 자유시장 메커니즘이 뭔지 전혀 모르는 경제학과 전공생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문학전공생들도 있다(하지만 그들은 외설어휘는 완전히 습득하고 있다).

대학학과들이 서로 다르게 그 자신들의 주된 편견을 선택하는 한, 그리고 교육에 대한 더 빠르고 더 자유로운 견해를 가진 몇몇 뛰어난 생존자가 남아 있는 한 비순응자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통일성과 연방정부의 '격려'가 확산되면, 똑같은 회색 빛깔의, 둔중한, 눈 코 귀가 다 먼, 신경질적으로 정체된 독단적 주장이 확산되어 가고, 그로써 비순응자들이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간다.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대학교수직을 얻거나 유지하기가, 혹은 독립적인 정신을 가진 학생이 계속 독립적으로 남아 있기가 점점더 어려워져가고 있다.

이것은 칸트 이후 국가주권주의 철학을 주장한 세대들, 그리고 그 철학이 세운 사악한 집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즉 철학이 비이성으로 전락함에 따라 철학은 정부권력의 성장을 촉진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철학의 타락을 촉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요지의 진정제를 확산시켜 온 우리 회의주의 시대의 역설이다. "실재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 혹은 확실한 지식이란 없다. 모든 것(총부리를 제외한)은 유동적이니까." 따라서 대학 학과들의 거만한 독단은 중세 때 종교적 독단을 강요하던 자조차 시기심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역설이지만 모순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은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소?" 하고 선언함으로써 그 반대자들을 무력화시키고 그 지도자들이 멋대로 절대적인 것을 제안하게 만드는 회의주의의 불가피한 결과이자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윤을 내는 기관들은 그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건 가르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또 '그들을 구속하는 끈은 없을 것이라고' 연방정부는 반복해서 경건하게 확약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연방정부가 이제 공공기금을 가지고 도우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적인 분위기와 냉소와 아집과 시기심에 차 있으며, 퇴폐적인 도당들인 것이다.

글쎄, 여기 지적인 현상의 모든 반대자들이 기대하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끈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회공평의 원칙이다.

이른바 방송전파의 소유자는 국민이라고 주장되듯이, 만일 대학의 소유자도 국민이라면, 방송전파의 경우에서와 똑같은 이유로, 어떤 공립, 혹은 준공립대학의 어떤 학과에서도 특정 이데올로기가 독점권을 가지도록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모든 교육기관에서 모든 '중요한 견해'가 대변되어야 한다(이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라는 말로써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론적인 근거나 준거틀에 의거해서 생겨난 사상체계이다).
교육에서의 기회공평의 원칙, 1972, 아인 랜드
방송에서의 경우 기회공평의 원칙을 낳았던 것과 똑같은 배려가 교육기관에도 적용되는데, 단지 교육에서의 경우 그 적용강도가 더 치명적이고, 더 급박하고, 더 필사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교육의 경우에는 방송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순간적인 전자음과 영상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고, 젊은이들과 인간지식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회공평의 원칙이 대학과 관련해서도 작용할 것인가? 그것은 방송의 경우 그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잘(그리고 형편없이) 작용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를 돌리는 발동기로서가 아니라 전체조직의 브레이크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 독점을 한시적으로 가로막고, 그 기성체제의 인계를 늦추며, 현재상태의 정신적인 무기력을 깨뜨리고, 때때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아는 똑똑한 반대자를 위한 출구를 마련해줄 것이다.

오늘날의 학계에서 반대자들이란 신비주의, 이타주의, 집단주의의 옹호자들(그들은 지배도당들이며 보호받는 현상의 대변자들이다)이 아니라 이성, 개인주의, 자본주의의 대변자들이다(노골적으로 사악한 이론, 이를테면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대학들도 있지만 신비주의, 이타주의, 집단주의 이론의 옹호자들은 그 대학이 정부기금을 받는 한, 기회공평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갖게 될 것이다. 세금을 내는 시민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캠퍼스에서의 난동이나 모든 형태의 물 리적인 폭력은 보호되지 않겠지만 사상을 가르칠 권리는 보호될 것이다).

기회공평의 원칙은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지만, 특정한 경우에 대한 그 적용 여부는 대체로 주관적인 해석에 따르게 될 것인데, 주관적인 해석이란 종종 독단적이고 잘해야 근사치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학에서는 그러한 근사치도 없다. 그러한 근사치의 목적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지적 자유의 원칙을 보존하고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때가 되면 자유로운 사립대학에서 그 원칙이 다시 한 번 완전히 실행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기회공평의 원칙의 주요 기능은 두려움이라는 짐을 피해자에게서 보호받는 갱들에게로 옮겨가게 하고, 도덕적인 권한은 그 보호받던 갱들에게서 그 희생자에게 이전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반대자라고 해서, 알 수 없는 도당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고 전능한 정부권력자들에게 신비한 비밀의 줄이 닿아 있는 거대한 기성체제의 권한에 맞서는 순교자의 위치에 서야 할 필요는 없다. 반대자라도 인정된 권리는 보호받을 것이다. 반면에 '임자 없는' 공공기금의 사용을 허락받은 무책임한 권력에 대한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성체제의 앞에 서서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회공평의 원칙을 위해 싸우려면 지적 명료함과 객관성, 앞뒤 맥락이 맞는 훌륭한 판단이 요구된다.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등한 시간'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연관성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능력한 교수가 한 학기 동안의 강의에 걸쳐 가한 해악을 유능한 교수는 한 시간의 강의로 다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모든 과목에서 모든 견해를 망라하는 과목들로 학생들에게 부담을 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팽배한 선택주의의 와중에서는, 어떤 교수의 견해가 어떤 견해의 적절한 반대인가를 결정할 정확한 방법이 없다. 공정함에 대한 입바른 소리나 하는 겉치레 위주의 정책이 많은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고, 규모가 작은 몇몇 대학에서의 경우는 절충주의로 인해 특정한 견해를 전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교수진의 천편일률적인 사상, 독점적이고 지루한 강의(특히 일류 대학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그 일류대학들이 나머지 모든 대학들의 경향을 주도하는 법이다) 등의 극단적인 경우들이 바로 국민 지식층의 의견과, 소수 반대파 교수들, 그리고 가장 주된 피해자인 학생들의 항의를 요구하고 있다.

지적인 다양성과 이데올로기적 정반대란 오로지 본질적인 것과의 관계 하에서만 결정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그런데 그것이 요즈음은 '지나친 간소화'라고 불리고 있다)의 존재, 혹은 본질적인 것의 유효성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현대철학의 본질이다. 그 결과 최저 소득의 보장을 옹호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라고 간주되고, 선천적인 사상이론의 옹호자들은 이성의 투사로 간주되는가 하면, 히피의 부족적인 순응은 개인주의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아울러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본질과의 관계하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거나, 아예 발달시켜 본 적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선거유세(그런데 이 경우 오늘날의 대학에서 보다 본질적인 것들이 더욱 엄중하게 회피되고 있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저마다 그 자신이 어느 편을 지지하고 어느 편에 반대하는지를 은연중에 알고 있다. 공적인 인물들은 그 문제를 정확히 밝히고 싶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한 정치가들이나 교수 추종자들이 보여주는 일관성은 인간에게는 본질적인 것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치고는 참 놀라운 것이다(그것은 '단순화 되지 않은', 즉 구체에 의거한 접근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동기에 대한 한 단서가 된다).

기회공평을 위해 싸우고자 하는 학생의 첫번째 필요사항은 바로 자신이 공부하는 모든 학과의 핵심을 명확하게 아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만일 주어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단지 하나의 견해만을 제공받았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즉 여타 다른 '중요한'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그 자신의 알 권리와 충분히 알고 선택할 권리를 근거로 항의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중요성'이란 다음 두 기준들 중 하나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주어진 이론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을 발휘할 만한 성취를 이룩했는가, 아니면 그 이론이 동시대의 것인 경우,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독창적인 대답을 제공해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두 기준이다. 방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의 견해를 일일이 제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대한 역사적 사상학파가 소개된다면 기회공평의 원칙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된다(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반트러스트 공소' 기능을 하는 셈이 된다). 정부가 조종하는 학교의 징표인 일방적인 주입이 깨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교육에서의 기회공평의 원칙, 1972, 아인 랜드
정부가 개입하는(정부의 고유영역이 아닌 곳에) 모든 분야에서는 두 개의 동기(그 중 하나는 사악하고, 다른 하나는 선하다)가 똑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학교에서의 경우, 선생이나 교육관료들로 하여금 단 하나의 견해(그들을 정신적으로 해이하게 만들고, 그들의 비판적인 능력을 방해하며, 암기된 독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 이도록 만드는)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도록 촉구하는 권력욕은 사악한 동기에 해당된다. 반면에 선생의 인품은 좋은 동기에 해당된다. 즉 성실한 사람은 그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확신을 가지므로 그 확신에 따라 가르칠 뿐 그 자신이 거짓되다고 간주하는 이론들을 선전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물론 필요하다면 그 거짓되다고 생각하는 이론들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다). 사립대학에서라면 그러한 선생은 참으로 귀중한 존재겠지만, 정부가 조종하는 대학에서의 경우 그 독점적인 입장으로 인해 그 선생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만큼이나 폭군적이고 독단적인 인물로 비춰질 것이다 (모든 확신에 반대하는 자들의 제안, 즉 정직한 선생은 매순간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탄력 성 있는 실용주의자이거나 무엇이건 먹어치우는 회의적인 돼지 중 하나로 변모할 것이라 는 주장은 해답이 아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건간에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지적인 행동을 다스리거나 지지하려는 모든 시도의 결과는 악한 것이 될 것이다(이는 반대의 가능성이 지적 자유에 핵심적이라는 뜻이지, 반대 그 자체가 지적 자유의 핵심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누가 기회공평의 원칙을 강요하고자 할까? 정부의 행정부서(그것은 정부기금을 배분하며 획일성, 즉 순응성 속에서 기득권을 갖는다)는 아니다. 개인들과 단체들이 나서서 그 원칙을 호소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주권주의의 확장에 맞서 실제적인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또다른 기회이다. 이 문제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을 통합하고, 학문적인 자유주의자들(이들은 모든 반대자들을 교수진에서 몰아내자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마르쿠제주의자들과는 구분된다)의 가슴속에 아직 남아 있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잔재에 호소하는 임기응변적 움직임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그 마르쿠제주의자들의 목표도 국민이 낸 비용과 정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만일 몇몇 젊고 똑똑한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재능으로 기회공평의 움직임을 지원한다면, 생각건대 개인의 시민권을 보호한다고 여전히 간주되고 있는 법정에서 그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기회공평의 원칙을 위한 법적 판례는 방송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적인 이행, 즉 특정한 경우에서의 기성체제에 대한 도전은 각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과 헌신, 그리고 설득력에 달려 있다.

기회공평의 원칙은 대학의 자유를 조종하는 끈이 아니라, 공공기금을 배분하는 정부권력을 조종하는 끈이다. 정부권력은 이미 대학들에 대해 지독히도 악하고, 속 들여다보이게 비합헌적인 조종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정부기금과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협박 하에 보건, 교육 및 복지부서들은 특기하지 않은 숫자의 교수들은 소수 인종이나 여자로 채우라고 대학 교수진에 인종, 성별에 따른 할당량을 부과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HEW는 이것은 할당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의 능력보다 인종적 배려를 우선시하라는 요구도 아니며, 단지 한 대학(예를 들어 콜럼비아대학)이 그러한 소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똑같은 능력을 가진 교수를 '찾기 위해' 노력했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그 부류 가운데서 '찾아보았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다양한 교수응모자들의 능력을 가늠해보고 증명하라는 것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비교기준이 주어지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여성들과 소수 민족 응모자들이 누구보다도 선호되게 되었다. 그 결과 남자인데다가 소수 인종에 속하지 않는 젊은 선생들 사이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그들은 지금 가장 외설스럽게(나는 외설스럽다는 표현을 쓴다. 차별과 싸운다는 명목으로 자행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차별의 희생자들이다.

만일 신체적 조건에 의거한 각종 소수파들의 권리가 오늘날 그처럼 야단스럽게 주장되고 있다면, 지적인 소수파들의 권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유에서 전체주의적인 국가주권주의로 넘어가고 있는 혼합경제의 위험스러운 전체구조는 압력단체들의 힘에 달려 있다. 하지만 압력단체들의 전쟁은 두 개의(혹은 그 이상의) 이데올로기파들이 마치 하나의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노는 게임이다. 그러한 국가주권주의자들의 불리한 점은 그들이 최후의 순간까지(심지어는 최후의 순간 이후에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는 슬로건 밑에 숨어서 게임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하지만 똑바로 게임을 함으로써, 자유의 옹호자들은 게임에서 상대를 이길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할 적기인 것이다. 기성체제는 정치적으로건, 지적으로건, 전반적으로건, 그 자체의 구성원들에게건 현재 별로 인기가 없다. 지적 소수파를 옹호하고, 교육에서의 기회공평의 원칙을 주장하는 심각한 학생들과 더 나은 교수들의 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성공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은 슬로건을 노래하거나 캠퍼스 잔디 위에서 춤추는 것보다 훨씬더 어렵고 힘들 것이다(물론 보람도 있다).

만일 소수 학생들이 선불교, 게릴라 전쟁, 스와힐리어, 점성학 등의 주제에 관한 학과를 개설해달라고 요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지적인 소수파 학생도 예를 들어 철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학에서의 폰 미제스(von Mises), 교육에서의 몬테소리, 문학에서의 빅토르 위고 등의 주제에 대한 학과를 요구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아무리 안되도, 그러한 강의들은 그 학생들의 정신은 구할 것이고, 잘하면 문화도 구할 수 있다.

아니다, 기회공평의 원칙이 대학 교수진과 행정을 쇄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선과 타협, 사기, 인기 없는 이론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이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옹호자를 고용하는 일, '증거주의', 겉치레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창문 하나가 공기도 통하지 않고 불빛도 없는 밀폐된 방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교육에서의 기회공평의 원칙, 1972, 아인 랜드

4.5. 검열

<아인 랜드 서한>(1972년 11월 20일자)에서, 나는 닉슨 대통령이 대법원 판사로 임명한 네 사람에 대해 바라는 바를 얘기한 바 있다. 물론 그들의 견해가 정확히 어떤지를 알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거대한 책임에 부응한다면, 우리는 닉슨씨의 태만들 중 상당수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법원은 이 나라에서의 철학적 영향력의 마지막 보루이다"라고 나는 말했었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안된 오늘날, 닉슨을 용서할 아무런 지적인 근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충분하다.

일관성 없는 전제들은 일관성 없는 행동을 낳게 되어 있으므로, 작금의 대법원이 일련의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대법원은 낙태를 합법화함으로써 정의와 개인의 권한 보호에 거대한 기여를 했다. 나는 그 결정에 주어진 모든 이유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결과(즉 여자가 그 자신의 육체에 대해 갖는 권리)에는 열렬히 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음란에 관해서는 대법원이 전혀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검열에 대한 법적, 지적인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그것은 남자(혹은 여자)가 그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권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나는 소위 '골수' 음란물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나는 그것이 말할 수 없이 역겹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부류에 속하는 책이나 상영중인 영화를 한번도 읽거나 본 적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좀 덜 노골적인' 음란영화에서의 '현대적'인 감각이나 법적 사건에서 제기된 묘사들만으로도 그에 관한 어떤 견해를 갖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보통사람들의 그것과는 반대된다. 즉 나는 섹스를 악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나는 섹스가 인간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 즉 대중적인 해부학적 과시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말과 언론의 자유(즉 어떤 견해를 가져도 되고 그것을 표현해도 된다는 것)이다.

음란물 공급자들이나 그 고객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주권주의로 가는 중도에서는, 주어진 권리를 가장 흉물스럽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데서 모든 인권침해가 시작된 것에 유념해야 한다. 이 경우, 그 범법자들의 역겨운 성향 때문에, 어떤 원칙에 우리가 과연 얼마나 충실한가를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1973년 6월 21일 판결이 내려진 다섯 건의 '음란'사건에서 대법원은 5 대 4로 나뉘었다. 각 사건에서마다 다수의견은 대법원장 버거가 썼고, 거기에는 블랙먼, 파월, 렌키스트 판사(이 네 사람 모두 닉슨이 임명했다)와 화이트 판사(이 사람은 케네디가 임명했다)가 동조했다. 매사건에서마다, 소수의견은 브래논 판사가 썼는데, 거기에는 스튜어트 판사와 마샬 판사가 동참했다. 더글러스 판사는 각 사건에서마다 독자적인 반대의견을 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은 밀러 대 캘리포니아 사건과 파리 성인극장Ⅰ 대 슬레이튼 사건이다.

밀러사건은 캘리포니아에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음란서적을 선전하는 확연한 성적 자료를 집집마다 보낸 죄로 기소된 사람을 다룬 재판이다. 이 밀러재판에서 대법원장 버거는 어떤 책이 음란한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음 사항이 사실의 심문을 위한 기본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한다. 첫째, '현대의 사회기준을 적용했을 때 보통사람이' 전체적으로 그 일이 호색적인 흥미에 호소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여부에 따라, 둘째, 해당 주법州法에 의해 구체적으로 성적 행동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이 명백하게 불쾌한 방식으로 묘사되거나 그려졌는지 여부에 따라, 셋째,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심각한 문학적, 정치적, 과학적인 가치를 결여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이러한 기준들이 이제까지 대법원 판례(특히 1957년의 로스 대 미합중국 사건에서)의 근거가 되어왔다. 그로부터 9년 후, 1966년 메모아르 대 매사추세츠주 사건 심의에서 대법원은 "어떤 책이 도움이 되는 사회적 가치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혀지지 않는 한 그 책을 추방할 수 없다"는 새로운 기준을 이끌어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데, 현재의 결정은 그 새로운 기준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심각한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라는 끔찍한 기준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도덕적으로 이러한 기준들은 버거 대법원장의 나머지 결정들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집단주의(정치적 집단주의라기보다는 명확히 말하면 도덕적 집단주의)의 선언이다. 개인의 정신을 다스리기 위해(즉 개인이 무엇을 쓰고, 출간하고, 읽고 볼 것인가를 미리 처방해주기 위해) 여기에서 확립한 지적 기준은 공동체 기준을 적용하는 보통사람의 판단이다. 그런데 과연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나와 있지 않다. 이 말은 곧 그 집단의 의지가 가치판단의 근원이자 기준이며 정당화인 것처럼 당연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한 정의가 주어져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국가도 될 수 있고 도시도, 이웃도, 혹은 당신이 살고 있는 골목도 될 수 있다. 공동체 기준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역시 아무런 정의도 주어져 있지 않다. 사실 어떤 공동체의 기준이 개인의 기준과는 차별되는 그 자체의 기준으로 지켜질 수 있을 때, 혹은 지켜질 수 있다면, 그것들은 기회나 무기력, 위선, 간접성, 무관심, 두려움, 지방 사업체들의 조종, 삼류 권력추종자들의 산물이거나, 때때로 과거의 위대한 지성으로부터 물려받은 어떤 멀리 떨어진 가치를 전통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 위대한 지성도 대법원의 결정에 의해 효력이 소멸되려 하고 있다.

보통사람이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도 아무런 정의도 나와 있지 않다. 맥락에 비춰보면 그 말은 성에 관한 한 특별히 민감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감각하지도 않은 어떤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련의 부분이 있다. 하지만 성적으로 보통인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다른 어떤 인간특성의 평균적인 대변자를 찾아내는 것보다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이 얘기하는 것은 사실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보통이라고만 얘기하고 있을 뿐인데, 판단의 문제를 놓고 볼 때는 지적으로 보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능, 능력, 생각, 느낌, 취향면에서 보통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다시 말하면 타협자, 혹은 실체가 없는 인물임을 의미한다. 어떤 제안이건 보통의 인간을 확립하고자 할 경우 필연적으로 꼭대기와 맨밑, 다시 말하면 최고와 최악은 제거되고 만다. 천재의 기준과 바보의 기준은 자동적으로 제거되거나 억압, 혹은 금지되고 그 양자 모두 자신들의 견해를 보통사람들의 견해에 맞추라고 명령받게 된다. 그렇다면 보통사람에게는 왜 이같은 기막힌 특권이 주어져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아무것도 특별한 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한 개념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자체로서 정당화될 수 없는 집단주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러한 규칙은 골수음란물이나 외설(즉 다른 생각들에는 적용되지 않고 오직 성과 관련된 어떤 생각들)에만 적용된다는 것이 대법원 결정이 반복해서 주장(단지 주장할 뿐이다)하는 바이다. 대법원 판결의 계속적인 주장에 따르면, 다른 종류의 생각들은 수정헌법 제1조(언론, 신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역주)에 의해 보호되지만, 성을 다루는 생각들은 그 보호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범주(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또 논의할 것이다)간에 이처럼 선을 긋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별도로 치고라도, 이러한 구분은 여기서 논의된 하나의 판결문 안에서조차 모순적이고 타당성이 없는 권리이다.

어떤 일이 '심각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혹은 과학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는 성적 요소들을 포함하는지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판사들과 배심원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정부가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및 과학적 가치를 심판하고, 그에 따라 어떤 일들을 허용, 또는 탄압할 권한을 갖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부가 그러한 권한을 갖는다는 원칙이 일단 성립되자, 그 권한에 대한 제한, 즉 언제, 어디서, 누가 그러한 권한을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조건들은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나머지는 단지 세부사항의 문제, 그리고 시간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현재의 대법원은 단지 성적인 자료들만 탄압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의 근거(즉 공동체의 의지)에 따라, 미래의 법원은 '바람직하지 않은 과학적 논의를 탄압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다른 법원에서는 정치적 논의를 탄압할 수도 있다(그로부터 1년쯤 지나면 모든 분야에서의 모든 논의가 탄압될 수 있다). 법이란 이미 확립된 전례에서 논리적 귀결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통해 기능하기 때문이다.

로스의 판례에서 '보통사람의 공동체 기준'이 세워졌다. 하지만 '도움이 되는 사회적 가치가 전혀 없는'이라는 로스의 기준은 너무 막연해서 당장은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뭐든 일련의 '사회적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전제에 견주어 현재의 법원이 검열을 향한 또다른 한 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써 정부는 이러한 분야에 속한 작품들의 가치가 심각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네 개의 특정한 지적 영역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심각한'이란 말은 심각하지 않은 기준이다. 무엇이 심각한 것인지, 누구에게 심각한 것인지, 어떤 기준에 의해 심각하다고 판단될 수 있는지 누가 결정하겠는가? 그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의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가이드라인 속에 공표된 것(즉 보통사람이 심각하다고 생각할 것) 외에는 달리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문학분야에서 궁극적인 권위자로(즉 검열관으로) 활약하는 보통사람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은가? 예술분야에서는? 정치, 혹은 과학분야에서는 어떤가? 어떤 권위자가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탄압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려 드는 것은 어떤가? 나는 어떤 포르노 영화도 이러한 전망만큼 음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분야에서건 일류의 재능을 가진 사람치고 지적 수준에 맞춰서 권위자('보통사람들'로 이루어진 권위자라면 두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세계 제일의 인물들로 구성된 권위자라 하더라도. 하기야 세계 제일의 사람들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의 명령대로 일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능 있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런 식으로는 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기꺼이 일하려는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오늘날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고는 있되, 전체적으로 경멸을 받는다는 사실의 도덕적인 아이러니에 주목하라.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들이 대중의 취향, 혹은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는 싸구려 흥행가들인 것이다. 분명히 지적 매춘은 어떤 '이기적'인 목적에서 행해졌을 경우 악이 되지만, 그 공동체의 '도덕적 순결'을 위해 희생정신으로 받아들여졌을 경우에는 숭고하다는 것이다.

다섯 개의 음란사건 심의 가운데, 또 다른 경우(미합중국 슈퍼 8mm 필름의 12,200피트 릴(Ft. Reels))에서는 버거 대법원장이 이전 판례의 논리적인 의미로 인해 생겨나는 위험을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단발적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 어떤 하나의 법규칙이 연쇄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유혹적인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셋째, 넷째, 그리고 다섯째의 '논리적'인 확대가 일어날 때까지는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 비록 맨 뒤의 합산은 맨 처음에는 아무도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 되겠지만, 매 번의 단계는 그 앞선 단계에 비추어볼 때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발달경향은 입법과정에서와 같이 사법재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선긋기'(즉 '여기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는 식의)를 야기한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법규란 하나의 원칙이므로, 아예 그 원칙을 철폐해버리지 않는 한 그 논리적인 귀결의 발달을 단절시킬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이 가능하다고 가정할 때, 밀러 판례에서는 어떤 선도 그어지지 않았다. 그 공동체의 보통사람들에 관한 기준이 분명하게 선언되어서 성적인 문제와 성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얘기한 밀러 판례에서, 버거 대법원장은 그러한 선은 그어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것들이 실제로 음란한지 여부를 결정하려 할 때 배심원들이 가상적이고 불확실한 '국가적 기준'을 고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부분은 수정헌법 제1조 중에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러면서 그는 그보다 앞선 사건에서 워렌 대법원장이 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는 '국가적 기준'이란 어디에도 없다고 믿고 있다…… 어떤 경우에건, 대법원이 그러한 기준을 밝힌 적도 없었고, 지방법원이 그러한 기준을 알아 맞추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 지방법원들이 지방적인 기준을 예측하게 될까? 실제로 증명 가능한 음란의 기준이 철학적으로 증명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한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러한 기준은 법의 견지에서 정의되거나 강요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철학체계의 공식화가 요구될 뿐 아니라, 설령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기준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정이 '증명할 수 있는 국가적인 기준' 운운할 경우, 그것은 객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을 집단적인 것으로 대체하고, 이 나라의 모든 보통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표준을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그러한 개념을 추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므로, 대법원은 범국가적으로 불가능(따라서 부적합)한 것은 지역적으로는 허용 가능하다고 결론짓고, 그 결과 터무니없는 주장을 주법(州法)으로 통과시켜 독단적인 증명할 수 없는 지역적인 기준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밀러 판결에서의 버거 대법원장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라스베가스나 뉴욕에서 괜찮은 것으로 밝혀진 대중적인 행동묘사는 메인이나 미시시피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식으로 수정헌법 제1조를 해석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헌법적으로도 정당하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어디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 자신이 읽거나 보고 싶지 않은 묘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없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묘사를 읽거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 수정헌법 제1조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음란에 대한 국가적인 기준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면서 그 판결은 다음과 같이 공언한다. "사는 주마다 그 사람들의 취향과 태도가 다른데, 이러한 다양성이 위에서 부과된 절대적인 획일성에 의해 질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한 주안에서 위에서 부과된 절대적 획일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주에 살면서 그 획일성을 따르지 않는 비순응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범국가적인 사고(思考)의 시장의 자유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주어져 있지 않다.

각주에 나와 있는 다음 주장은 심각한 법정에는 걸맞지 않는 가치 없는 것이다. "배심원들이 같은 대상에 대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헌법에 의거한 권리가 유린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로스 대 미합중국 사건에서 대법원측이 언급했던 바와 같이…… '어떤 범죄 관련 법령하에서건 각 배심원들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지극히 당연하다. 그것이 우리의 배심제도하에서 우리가 수용하고 있는 결과 중 하나인 것이다…….'" 범죄사건의 경우, 배심원들의 의무는 그 특정한 피고가 아직 정의되지 않은 범죄를 저질렀는지, 또 그와 동시에 그가 저지른 범죄가 과연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닉슨이 임명한 대법원 판사들이 검열을 전국적으로 마구 확대함으로써 검열에 한몫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닉슨이 세입의 공유라는 수단에 의해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만큼이나 허황된 것이다. 대중들이 매번 호루라기 정지신호가 울릴 때마다 연착과 탈선, 혼란을 겪으며 삐그덕거리는 지방검열 기차를 타고 있는 반면, 국가주권주의라는 고속열차는 아무 장애 없이 전속력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밀러 판결을 내린 판사들 중 네 명은 보수적이라고 간주되고 있고, 다섯 번째인 화이트 판사는 중도파로 간주된다. 반면에 더글러스 판사는 대법원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다. 하지만 밀러 판결에서의 그의 반대는 격정적인 항의와 분노의 외침에 가깝다. 그는 수정헌법 제1 조가 음란의 경우에는 함축적인 예외를 허용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나는 음란의 경우가 그 조항의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계속해서 밝혀온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음란(우리가 비록 그것을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이란 뒤죽박죽인 어떤 것이다.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그리고 적용할 수도 없는 어떤 기준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낸다는 것은 공정한 재판과 공정한 법적 수속에 헌신한 나라에서는 차마 행해질 수 없는 끔찍한 일이다."

이것만큼이나 끔찍한 것을 야기시킨 반트러스트법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더글러스 판사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반트러스트란, 뒤에 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문제의 양면 모두에 홰를 틀고 앉으려고 집으로 돌아오는 병아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검열의 문제에 관한 한 더글러스 판사는 웅변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특정판사나 배심원에게 '불쾌하다'고 느껴지는 생각에 대해 수정헌법 제1조가 벌을 주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 수정헌법 제1조는 이제까지 고안된 것 중 말과 문학의 가장 착실한 평등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검열관에게 권한을 준다는 것은 곧 자유로운 사회의 전통과 확실하고도 근본적으로 단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정헌법 제1조는 사람들에게 진정제를 나눠주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 주된 기능은 '진실한'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불쾌한' 사람들에게도 대화의 장을 열어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인은 억누르고, 정부의 권한은 드높이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불쾌함'의 기준을 사용한다는 것은 수정헌법 제1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잘라낼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대법원측이 피력한 견해에서 넌지시 암시된 바와 같이 우리 앞에 놓인 것들은 정말 쓰레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치유세나 일간신문,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상당부분 또한 그 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연사들이나 출판업자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사고가 어떤 사람들에게 '불쾌하다'는 이유로 협박을 받거나 억눌림을 당해오지 않은 이유는 수정헌법 제1조 때문(그리고 사실 오로지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와 같은 주장에 나는 그저 "아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개인 대 국가와 같은 문제들은 대법원의 다수결정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개인의 권리를 주장한 것은 다름 아닌 주요 진보주의자인 더글러스 판사인 것이다. 마치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양, 마치 사회적 관심의 단위는 집단(공동체)인 양 얘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보수주의자들이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도덕적 집단주의에 심각하게 몰입한다는 것은 아무 원인도 없이 진공상태에서 그저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적 근거를 요구한다. 파리 성인극장 슬레이튼 사건에서의 대법원의 판결은 바로 그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성인들만을 입장시키면서 소위 말하는 음란영화를 상영한 조지아주와 아틀란타에 있는 두 극장이다. 지방법원에서는 이것이 헌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조지아 대법원은 그러한 결정을 뒤집었는데, 그 이유는 골수음란물은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합중국 대법원에 상소된 문제는 음란물에 동의하는 성인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합헌적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 대법원의 다수결정은 '합헌적'이라는 것이었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결정은 비객관성을 공포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현상들 중 가장 악한 것, 즉 비객관적인 법을 명백히 지지하며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버거 대법원장이 쓴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선언되어 있다. "상업화되어 가는 음란조류를 뿌리뽑는 데 주의 법률적인 이익이 걸려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한 이익 중에는 삶의 질과 전체적인 사회환경이라는 면에서의 대중의 이익, 거대한 도시 중심에서의 상업의 풍조, 그리고 아마도 대중의 안전 그 자체가 포함되어 있다."(강조는 필자의 것임) 이러한 '합법적인' 국가의 이익이라는 견지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단일문제나 행동에는 어떤 것이 있겠는지 생각해 보라.

비클(Bickel) 교수의 글에서 인용을 하며 그 판결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사람이 자기 방에서 음란서적을 읽을 권리는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가 자신이 원하는 책이나 그림을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한다면, 이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다. 늘 읽고 보고 듣고 행해지는 것은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인간행위가 이러한 선언에서 면제될 수 있을까? 또 전체주의 독재의 옹호자들 치고 그러한 선언에 서명하지 않으려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버거는 "음란물이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과학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음란물 탄압을 반대하는 주장으로서는 이 점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어 그는 이전의 대법원 판결문에서의 인용과 진술을 엄청나게 쏟아 담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과학적 지식과 결정적인 증거가 입법의 근간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점, 국가는 존재하거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을 근거로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을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과학적인 자료'(그 말이 갖는 글자 그대로의 합당한 의미에서)란 이성적 과정에 의해 도달되는 실재에 대한 지식이다. 아울러 '결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주어진 제안의 내용이 실재적인 사실로 증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경우 국가권력에 대해 제약을 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제거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성과 현실인 것이다. 어떤 역설, 어떤 가정, 어떤 추측, 어떤 감정, 어떤 변덕이든(아무 이유나 대고 부리는 변덕이든, 아니면 아무 이유도 없이 부리는 변덕이든) 아무 것에나 근거해 입법할 권리가 이 경우 정부에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확실한 입법기준'을 입법부에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 판결문은 인정한다. "반사회적 행동과 음란물간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조지아주 입법부는 그러한 관계가 실재하고 있거나 실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로스를 판결하는 과정에서 법원은 '질서와 도덕면에서의 사회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부가 그러한 결론에 의거해 행동한 것은 합법적일 수 있음을 함축적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어떤 것이 '사회적 이익'에 대한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탄압을 충분히 정당화시킬 수 있다면, 나치의 '사회적 이익'이나 소비에트 '공동체'에 대한 위협이 될지 모른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나치나 소비에트 독재자들이 죽여버리는 것도 정당화된다.

그러한 개념이 어떠한 정부이론을 대변하건, 그것은 미국을 건국한 선조들의 이론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버거 대법원장은 그 점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그는 미국건립 이전의 인물들을 계속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의 시초부터 입법가들과 판사들은 여러 가지 증명할 수 없는 가정에 의거해 행동해왔다. 상업 및 사업관계 일에 대한 대단히 정당한 법률 밑에는 그러한 가정들이 들어 있다."

이것은 뛰어나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를 보라. 미합중국의 탄생 이전에 생겨난 세계 모든 정부의 역사를 보라. 명문화된 서류(헌법)에 기초하고, 또 그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 최초의 정부가 바로 우리의 정부였다. 우리의 헌법은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모든 다른 종류의 정부에 의해 자행된(증명할 수 없는 가정에 의거해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정부에 의해 행해진) 잔학의 역사는 이 나라 건설의 주춧돌이 된 고유의 정치이론의 가치와 타당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우리가 따라야 할 판례로서 여기 그 모든 폭정의 지긋지긋한 세월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불가해한 것처럼 보인다면, 버거의 판결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이성적 단초를 제공해줄 것이고, 법의 발전에서 갖는 판례의 역할을 극명하게 입증해 보일 것이다. 그 문장은 마치 이전 세대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모든 회피와 타협, 부당함, 권리침해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이 마치 닭들이 닭장이나 홰, 혹은 울타리에 앉으려고 깃털회오리를 불어대며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 문장이란 다음과 같다. "연방 유가증권이나 반트러스트법, 그리고 기타 다른 많은 연방법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증명할 수 없는 가정의 기본)이다. 공식적으로는 나는 '오, 정의로운 대심원장님!' 하고 말하겠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아이구, 여보게!' 하고 말하고 싶다."

버거는 계속한다. "이러한 가정을 근거로, 국회와 주입법부 모두 반트러스트법을 채택함으로써 연합할 권리를 철저하게 제한해왔고, 유가증권, 이익을 나누는 '쿠폰' 및 '거래인지'의 발간자와 취급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엇을 출간해야 하고 무엇을 출간하고 발표하면 안되는지를 명령하면서 그들의 공적인 표현을 엄격하게 통제해왔다…… 이해가 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수정헌법 제1조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제휴, 말, 출간의 권리가 재화와 돈의 시장에서는 심하게 제약되어야 하면서 음란물 시장에서는 그렇게 제약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분명히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집단적인 전제에 대해서는 물론 아무런 대답도 없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유일한 대답은 그 전제를 검토하고 거부해버린 다음, 그토록 엄청나게 파괴적인 모든 개인권과 헌법의 침해요소들을 철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다수가 결정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법 및 입법과정의 '서서히 발달하는 경향'(그 자신이 경고했던 바)은 잊은 채, 버거 대심원장은 선례를 움직일 수 없는 절대인 양 받아들이고는 이 나라가 국가주권주의의 심연으로 성큼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그 판결문은 계속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의회와 행정관들이 물리적 환경을 오염으로부터 지키고, 숲과 하천과 공원 등의 우리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경우, 현재의 공원과 야생지대를 관통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가는 새로운 고속도로의 충격같이 실제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것들을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1968년의 연방보조 고속도로법과 1966년의 운송분과법을 놓고 블랙 판사는 '우리 공원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증진시키는 시설들이 공공도로를 낸다는 이유로 청문회나 사실조사, 내각관료의 감독하에서의 정책결정도 없이 마구 제거되어서는 안된다는 이 나라 최고 입법부의 엄숙한 결정……'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의회지시가 실제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심미적인 가정들을 비롯해 사람들에게 좋은 것에 대한 증명할 수 없는 가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법령이 비합법적이라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만일 그것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면, 정부관료들의 실제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심미적인 가정들은 문학과 예술분야로 침입할 자격을 갖게 된다. 마치 버거의 결정으로 인해 정부관료들이 문학과 예술분야에 침입할 권리를 갖게 되었듯이 말이다.

법원의 판결 속에,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 이타주의의 흉측한 손길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예를 들어 수정헌법 제1조도, 혹은 '자유의지'도 국가가 청공법(靑空法, 부정증권거래 금지법:역주)을 만들어 유가증권 판매자들이 뭐라고 쓸지, 그 자신들의 상품에 대해 무엇을 발행할지를 통제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법들은 약자와 무지한 자, 남의 말을 믿는 자, 잘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자신들의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 때문에 우리들(약하지도 않고 무식하지도 않으며, 남의 말을 잘 믿지도 않으며, 잘 속아넘어가지도 않는)이 우리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보호되어야 하며, 결단력을 발휘할 권리를 빼앗겨야 하는 것이다. 권리와 자유에 대한 이타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여기 둥지로 날아오른 또 한 마리의 닭이 있다. 몇몇 사람들이 미합중국에 대고 외설-음란물 문제에 대한 '자유방임'식 시장해결책을 기다려야 한다고 얘기를 한다. 특히 도시문제, 상업문제, 환경오염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유방임에 대해 얘기할 친절한 말 한 마디도 갖고 있지 않았을 사람들에 의해' 그 문제가 해결되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 판결문에는 내가 인용하기 위해 갖고 있는 면적보다 훨씬 많은 이러한 종류의 많은 다른 닭들(마당 전체가 둥지로 돌아오는 닭들로 뒤덮여 있는 꼴이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대충 이 정도면 여러분들에게 그 판결의 성격과 스타일, 정신을 알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스튜어트 판사 및 마샬 판사와 함께 반대의견을 제기하면서, 브레넌 판사는 동의성인(consenting adults, 주로 영국에서 법적으로 남색이 허용되는 21세 이상의 남자를 지칭함:역주)에 관련된 검열은 위헌이라는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일련의 훌륭한 논지를 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 급진적으로 나가게 될까 봐 망설이며 흔들리다가 타협을 통해 "자유로운 표현의 보장과 합중국의 합법적 이익간에 더 나은 균형을 찾고자 애쓴다."

그는 결국 음란물은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법정이 헌법에 의해 보호받는 말과 보호받지 못하는 말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는 '음란'사건에서의 경우, 그 법정의 혼돈스럽고 모순적인 판결기록을 인용하고 있지만,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함으로써 그 문제를 슬쩍 회피하고 있다. "'음란한' 부류가 실제로 존재하건 않건, 또 그로 인해 (헌법에 의해:역자 삽입) 완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말이 실제로 존재하건 않건,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즉 음란에 관련된 부류에 대해서는 막연한 이유에 대한 공격을 지탱할 정도의 충분히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전적으로 막연한 것은 무효라는 원칙에 의거해 있다."

브레넌 판사는 막연한 법의 위험에 대해 유려하게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워렌 대심원장의 말을 인용한다. "보통 수준의 지능을 가진 사람에게 그의 심사숙고한 행동이 그 법령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는 정당한 경고를 범죄법령이 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적인 명확성의 요구가 침해당하고 있다." 하지만 브레넌 판사는 실제로 그러한 경고를 해주고 있는 반트러스트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에 따른 불확실성의 정도는 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지경이다. 비단 그것이 '책판매를…… 위험스런 직종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단적이고 엉뚱하게 그 법을 강요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음란'에 대한 판결이 이제 '개별적인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그리고 광경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한다. 그는 "각 사건을 범죄적인 동시에 합법적인 법으로 만드는 놀라운 일을 법원으로(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대법원까지 가게 되겠지만) 떠넘기려 하는 '입법부의 시도를 막기 위해'" 법정이 노력해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는 사건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진 법의 음울한 기념비격인 반트러스트라는 살아 있는 지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견해보다는 브레넌 판사의 반대의견 속에 원칙에 대한 보다 큰 존중과 그 결과에 대한 보다 큰 이해가 드러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 다수견해에 근거해서는 "국가의 명령을 받은 우리 정신의 조직화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어떤 특정한 도덕적 어조를 유지하거나 만들어내기 위해 한 국가는 그 시민들이 읽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을 지시할 수 있고, 그 경우 그와 같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는 그 시민들이 특정한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고, 혹은 어떤 특정한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명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진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더글러스 판사인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자신의 강력한 반대의견을 끝맺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사회들과는 달리, 우리의 사회는 정부가 아닌 개인이 스스로 그 자신의 취향과 믿음, 사상을 지켜나가도록 만드는 자유와 해방을 이미 준거틀 속에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수정헌법 제1조의 철학이며 대다수의 다른 나라들과 우리나라를 구분짓는 신념조항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신념조항'이 아니라 증명 가능한 이성적 확신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위의 말에 동의한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놓고 볼 때, 개인의 삶에서 사고의 결정과정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개인은 특정한 선택에 자신의 근본적인 전제들(자신이 변경시킬 수는 있되, 실제로 거의 변경시키지는 않는)을 적용함으로써 결정을 한다. 한 국가의 법은 그 지배적인 정치철학에 의해 결정되고, 광범위한 원칙들을 특정한 경우에 적용시키는 것을 임무로 하는 법원에 의해 이행된다.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근본적 전제들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판례(그런데 이는 도전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로 도전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이다.

느슨하게 표현된 법률 한 부분이 판례의 역할을 통해 얼마만큼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끔찍할 정도로 입증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미합중국 대 오리토(앞에서 얘기한 다섯 개의 음란사건들 중 하나이다) 사건에서의 대법원의 다수판결이다. 이 사건은 주와 주 사이의 통상에서 보통 운반자들이 음란물을 고의로 운송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한 남자를 다루고 있다.

주와 주 사이의 통상을 통제할 권한을 국회에 부여하고 있는 조항은 헌법의 주요 실수 중 하나이다. 다른 그 어느 것보다도, 그 조항이 헌법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왔고, 국가주권주의를 허용하는 쐐기역할을 했으며, 그로써 복지국가의 점진적인 확립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헌법을 애초에 만든 사람들은 그 조항의 오늘날 모습을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헌법조항을 쓰고 있을 당시의 그들의 목적 중 하나가 거래의 흐름을 촉진하고 주와 주 사이에 통상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면, 그 조항은 이제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도착한 셈이다. 여러분들은 이제 이 나라 안에 50개의 각기 다른 국경을 기대해도 좋다. 세관직원들이 이 주에서는 허용되어 있지만 또 다른 주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어떤 책이나 잡지를 찾으려고 당신의 짐과 주머니를 검사할 테니 말이다.

앞선 법정판결문을 인용하면서 버거 대심원장은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주와 주 사이의 통상을 통제하는 동기와 목적은 법적 판결을 내리기 위한 것인데, 그러한 법적 판단의 발휘에 대해 헌법은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법정은 그에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이 의미하는 바는 곧 법적 판단에는 어떤 원칙의 제약도 넘어선, 어떤 검토나 손익계산도 요구되지 않는, 절대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뒤 맥락을 제거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예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헌법은 입법부에서건, 혹은 다른 어떤 기관에서건 정부의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제약이기 때문이다.

"국회가 주와 주 사이의 도로가 악(그것이 물리적인 악이건, 도덕적, 혹은 경제적인 성격의 악이건)을 확산시키거나 촉진시키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관련된 조건들과 요구사항을 부과할 수 있다는 이미 잘 정착된 원칙을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마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다음과 같은 각주도 첨가되어 있다. "어떤 악이 발원(發源)한 주에서 다른 주 사람들에게로 악이나 해를 퍼뜨리거나 비도덕성과 거짓을 장려하기 위해 대리인 등과 같은 상술을 이용하는 행위를 금하거나 벌하는 정도까지는 국회는 분명 주와 주 사이의 통상을 통제할 수 있다." 여기서 비도덕, 악, 해를 거론하는데, 도대체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 다섯 개의 다수판결이 여러분들에게 허용하는 권리는 오로지 당신 방에서 읽고 보는 것(밖으로 나가면 안되는 것이다)과 각자의 마음속으로 뭐든 생각할 권리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체주의적 독재자라 할지라도 탄압할 수 없는 권리이다(소비에트 러시아에서조차 여러분은 생각할 자유는 갖는다. 비록 그 생각에 의거해 행동할 자유는 없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필사적인 항의로 목청을 높이고 반대의견을 낸 것은 더글러스 판사뿐이다. "인간의 정신을 통제할 권한을 정부에 주겠다는 생각에 우리의 모든 헌법적 자산이 총궐기하고 있다."

대법원 견해에서 보수적인 견해와 진보적인 견해 사이에 보여진 골은 기타 덜 엄숙한 글이나 전적으로 정치적인 논쟁에서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확연하다. 대법원 임무의 성격이 중요한 만큼, 대법원은 철학의 대변자가 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고 있다.

반드시 어떤 원칙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대법원 구성원들은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두 개의 정치적 진영의 생각(심지어 그 영혼의)의 전형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전형으로 뽑힌 것이 아니다. '보수적'이니 '진보적'이니 하는 등의 이름이 느슨하게 붙어 있는 막연하고, 불확실하며, 모순적인 혼란투성이의 정치적인 견해들 속에서 어떤 핵심적인 특성이나 전형적인 표본을 뽑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법원의 견해를 읽고 있노라면 그 핵심적인 전제들이 이상야릇하게 밝은 빛을 발하며 두드러지고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 추종자들의 그 모든 사소한 차이와 비일관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들이 한 정치진영, 혹은 또 다른 진영의 기본적 전제들임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러한 적들의 철학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에 대한 감각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다섯 가지 음란사건의 경우, 음란 그 자체가 주제가 아니고(사실 음란이란 주변적일 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인간 삶의 성적인 면모라는 훨씬 깊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성이란 인간성격 중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물리적인 속성도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근본적인 모든 가치의 복합적인 총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심지어 성이 가장 흉물스럽게 표현된 경우에라도)을 다루는 소송사건들이 철학의 모든 분야의 영향력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윤리학, 인식론, 정치학, 미학(미학은 그 논쟁의 가장 직접적인 희생물이다)의 영향을 보아왔다. 철학의 그 다섯 번째 분야의 경우는 어떤가? 철학의 근본 중에서도 근본에 해당되는 형이상학의 경우는? 그 영향력은 각 진영의 내적 모순 속에 들어 있으면서 그 내적 모순을 설명한다.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견해인 것이다.

그 양쪽 진영 모두 똑같은 전제(정신과 육체의 이분법)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치명적 오류의 상반된 양면을 선택한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보수주의자들은 물리적인 면에서 행동할 자유를 원했다. 그들은 정부가 나서서 생산이나 산업, 무역, 사업, 물리적인 재화, 물질적인 부를 조정하는 데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부가 인간정신, 즉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국가가 검열을 하고, 도덕적인 가치를 결정하고, 정부가 도덕성을 창조하고 강요하며, 지성을 통치하는 것을 옹호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행동할 자유를 원한다. 그들은 검열에 반대하고 정부가 나서서 사상이나 예술, 언론, 교육(그들이 '학문적 자유'에 대해 보이는 관심에 주목하라)을 통제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물리적인 생산이나 사업, 고용, 임금, 이윤, 모든 물리적 자산 등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조종하는 것은 옹호한다. 심지어 강제징발에 이를 정도로 정부가 통제하는 것도 모두 옹호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이란 이 지구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모래언덕을 쌓거나 공장을 짓는 육신이라고(그리고 그의 두개골 속에는 워싱턴의 조종을 받는 전자컴퓨터가 들어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이 세상의 가장 먼 끝까지 마음대로 배회하는 영혼이면서, 한 조각의 빵을 사기 위해서 길을 건널 때면 코에서 발 끝까지 쇠줄에 감겨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그룹 중 단연코 종교적인 것, 육신에 대한 정신의 우월을 주장하는 것, 내가 '정신 신비주의자들'이라 부르는 것을 대변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 쪽이다. 반면에 단연코 물질주의적이면서, 인간을 고깃덩어리로 간주하고, 내가 '근육 신비주의자들'이라 부르는 것을 대변하는 것은 바로 자유주의자들이다.

이것은 단순히 역설일 뿐 모순이 아니다. 각 진영은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면을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 따라서 각 진영은 그것이 경멸하는 행위에만 자유를 허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부자, 혹은 물질적 생산에 성공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비하하며, 그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듯이 간주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라. 아울러 자유주의자들이 사상을 냉소적인 사기인 양 다루고 있는 점에 주목하라. 그 양 진영 모두에게 있어 '조종'이란 물리적인 강압에 의해 다스리는 권력을 의미한다. 그 어느 진영도 자유를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식을 다스리려고 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를 장악하려고 든다.

그 전제에 관해, 그 두 진영 중 어느 쪽도 강압이 그 둘 모두의 파괴자가 될 수 있음을 파악하지 못해왔다. 보수주의자들은 그 자신들의 신비적인 도그마 속에 얼어붙은 채, 사상 면에서는 마비되고, 공포에 질려 있으며, 무기력하다. 자유주의자들은 햇빛 볼 날을 기다리며 마비되어 있고, 공포에 질려 있으며, 물질의 생산 면에서 무기력하거나 그에 적대적이다(생태학 운동을 보라).

왜 그 두 진영 모두가 물리적인 강압의 힘에 그토록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일까? 여기 {지성인들의 파업}에서 인용을 해본다. "그 원칙(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과연 어떤 인간능력을 파괴하고자 하는지 당신은 주목하고 있는가?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분열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을 부정해야 한다."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양자 모두가 인간의 정신, 즉 이성에 대한 미움이라는 면에서 서로 의기투합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믿음을 위해 이성을 거부한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감정을 위해 이성을 거부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지적인 문제들에 무기력할 정도로 무관심하게 굴거나, 아니면 아예 적극적으로 반지성적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좀더 영리하게 군다. 그들은 지성을 파괴하기 위해(그들은 '새로이 정의하기 위해서'라고 부른다) 지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을 거부하면 서로를 다룰 수 있는 수단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거칠고 물리적인 힘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다시 움츠린 아틀라스를 인용해본다. "……당신이 물질주의자니, 혹은 정신주의자니 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둘다 갈라진 인간의 반쪽에 불과하다. 그들은 완전함을 찾고자 끝없이 추구하지만, 육신의 파괴에서 영혼의 파괴로, 혹은 그 반대방향으로 오가면서…… 무엇이든 현실에 맞서는 피난처, 어떤 형태이건 정신으로부터의 도피를 찾으면서 그 완전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 양자는 같은 동전의 양면(똑같이 위조주화인 것이다)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로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그들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유사한지에 주목하라. 그 둘 모두 형이상학적으로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인식론적인 면에서는 비이성주의를, 윤리학적으로 이타주의를, 정치적으로는 국가주권주의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전통에 충실하다고 늘 주장해온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적'이라는 점을 자랑해왔다. 하지만 투쟁적인 집단주의를 제의하며 국가권력을 음란물 문제 훨씬 너머로까지 확대시키는 전반적인 원칙들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버거 대심원장, 즉 보수주의자라는 점에 주목하라. 동시에 '자유로운 사회의 전통'에 의지하며 '우리의 헌법적 유산'에 호소하는 것은 더글러스 판사, 즉 자유주의자임에 또한 주목하라.

만일 1890년에 누군가가, 사업가들을 위한 반트러스트법이 머지않아 지성인들에 대한 검열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오늘날 그것이 현실임을 알고 있다. 버거 대심원장이 자유주의자들에게 "재화와 자금시장에서는 권리가 심각하게 제약되어야 하지만, 음란물 시장에서는 그런 제약이 필요없는지"를 자유주의자들은 설명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 말은 그 자유주의자들에게 제대로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러한 검열규칙이 철폐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는 보다 노골적인 것이 될 것이다. 즉 '음란물 시장'에서라는 말이 '사고의 시장에서'라는 말로 대체될 것이니까 말이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판례가 될 것이고, 그로써 자유주의자들이 자기들이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차례가 되면 '사회적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어떤 사상을 자신들이 탄압하고 싶어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가를 빼고는.

대법원 구성원들 중 보수파는 워싱턴에 있는 제퍼슨 기념관을 어떻게 참고 바라볼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기념관의 대리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폭력에 대해서건…… 나는 영원히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
검열 : 지방검열과 특급검열, 1973, 아인 랜드

4.6. 종교

종교가 윤리 분야를 독점하고 있다 보니 합리적 인생관의 감정적 의미와 함축들을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종교는 윤리 분야를 선점하여 도덕을 인간과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으면서 우리 언어가 지닌 지고의 도덕제 개념들을 빼앗아 그것들을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이 세상 밖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하여 '고양감'은 초자연적인 것을 묵상할 때 일어나는 감정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숭배'는 인간보다 높은 존재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의 감정적 체험을, '공경'은 무릎을 꿇고 체험해야 할 신성한 종교의 감정을, '신성함'은 인간이나 속세의 관심사를 초월한 우월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의 개념들은 초자연적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실재 감정들의 이름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실속에서 그런 감정들의 근원이나 대상은 무엇인가? 그건 도덕적 이상에 헌신하는 인간의 감정 영역 전체다. 하지만 그 감정 영역은 종교에 의해 도입된 인간 비하적 요소 없이는 아무런 개념도, 용어도, 인식도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1968년 5월, 파운틴헤드 출간 25주년
플레이보이 : 당신 생각에 종교가 인간 생활에 건설적인 가치를 제공 한 적이 있나?

아인 랜드: 아니. 신앙은 인간 생활에 극히 해가된다. 그것은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철학의 초기 형태라고 기억해야한다. 우주를 설명하고, 인간의 삶과 도덕적 가치관에 대한 일관된 기준을 부여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종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철학으로, 일부 종교는 매우 가치있는 도덕적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충고 할 수있는 좋은 영향력이나 적절한 원칙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매우 모순적인 맥락이 있다.
1964년 3월,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 中.
예수기독교 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이상이다. 그는 사람들이 모방하려고 노력해야하는 것을 구체화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화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도덕한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었다. 다시 말해, 완벽한 미덕을 가진 사람은 잔인하고 그 희생을 받아 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을 위해 희생되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그 어떤 것도 저보다 더 분개하게 만들 수 없다. 이상을 희생시키려는 부적절한 태도나 부도덕한 덕행에 대한 희생의 개념. 그리고 그 상징의 이름으로 인간들은 그들의 열등을 위해 희생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상징주의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다.
1964년 3월,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 中.
종교는 철학의 원시적인 형태, 즉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공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신화의 대부분은 진리의 일부 요소에 기초를 둔 비유적이고 유화된 알레고리이며,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심오하기는 어렵다.
낭만주의 선언.

4.7. 페미니즘



안티페미니스트[10]였다. 그는 여성이 개인의 선택 의지, 공로 및 헌신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고 추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어떤 특혜나 차별 없이 여성이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는다면 그들은 남성 못지 않은 일을 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인종차별관련 견해도 동일했다.

그의 소설 중 하나인 파운틴헤드에서는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강간하지만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 나온다. 일반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페미니스트라면 치를 떨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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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그녀의 모든 인기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전문 철학자들만이 그녀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랜드에 대한 대부분의 진지한 철학적인 연구는 비학문, 비학문 학술지나 책에 실렸고 참고 문헌 기록에는 이 사실이 반영된다."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2] 단적으로 말하자면 아인 랜드는 철학에는 3명의 A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 "아인 랜드(Ayn rand)". 그녀가 다른 모든 철학/윤리학/신학/경제학자(니체, 칸트, 아담 스미스까지.)에 가한 공격들은 아래 문단을 참조하라.[3] 현대 서양철학의 주류는 영미권에서는 분석철학, 유럽권은 현상학이다.[4] 아인 랜드의 사상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이는 당연한 일로서, 아래에 적힌 것과 같이 그녀의 수많은 저작에서는 아퀴나스와 니체,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수도 없이 인용해 가면서 설명한다.[5] 그것은 결코 단순히 경제체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6] 그 대부가 바로 칸트라고 랜드는 주장한다[7] 도덕의 형이상학의 근간(Foundations of the Metaphysics of Morals)}, (ed.) R. P. Wolff, New York, Bobbs-Merrill, 1969, 16∼17쪽)[8] 미국 민주당의 리버럴리즘[9] 구체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http://aynrandlexicon.com/ayn-rand-ideas/ayn-rand-q-on-a-on-libertarianism.html 참조[10] 이는 사실 그녀의 평생 지속된 요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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