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8080><colcolor=#fff> 안도 모모후쿠 安藤百福 | |
이름 | 오뻭혹 (吳百福 Oh-Pek-hok)[1] →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
출생 | 1910년 3월 5일 |
일본령 대만 가의청 | |
사망 | 2007년 1월 5일 (향년 96세)[2] |
일본 오사카부 이케다시 | |
국적 | 일본령 대만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소속 | 닛신식품 |
가족 | 배우자 안도 마사코 슬하 4남 2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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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계 일본인 기업인이자 인스턴트 라면의 발명자.닛신식품(日清食品)을 창업하고 1958년에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멘을 만들었으며 1971년에 서양 사람들이 라면을 컵안에 넣고 포크로 부숴 먹는 것을 보고 최초의 컵라면인 컵누들을 만들어 일본을 넘어 세계의 음식문화에 혁명을 일으켰다.
BBC에서도 인스턴트 라면의 영원한 삶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의 업적을 다루었다.
2. 생애
대만일치시기인 1910년에 타이완의 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부모가 일찍 사망해 조부가 키웠다. 출생명은 구레 모모후쿠(呉百福, 대만어 : 고펙혹).
아버지가 물려준 자산을 바탕으로 그는 일본으로 넘어간 뒤 1934년 리츠메이칸대학 전문부[4] 경제과를 졸업한 후 면 가게를 차렸지만 전후 상황이라 돈 대신 빚을 벌었고, 이로 인해 안도의 삶은 험난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군용기 엔진 부품 제조를 하는 군수공장 경영에도 종사했지만 일본에서 3등 시민 취급을 받던 대만 출신이다 보니 횡령 누명을 쓰고 45일간 구속되어 헌병으로부터 고문을 받기도 했으며, 이 후유증으로 심각한 내장 질환이 생겨 두 차례 개복 수술을 받기도 했다.
후술하는 문단에 보면 매일 점심에 라면을 먹었다고 나오는데 정확히는 고문 후유증으로 톤지루 같은 무거운 국물을 먹을 수 없어서 자신이 개발한 치킨맛 컵누들을 국 대신 먹었던 것이다.
1957년, 아내가 튀김을 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밀가루 면을 기름에 튀겨 만들기 시작했다.[5] 이것이 우리가 아는 꼬불꼬불한 라면의 시작이 된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치킨라멘의 탄생기다. 덕분에 안도는 1년 만에 성공하였고 그는 지금의 '라면'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 되었다.
허나 "기적의 프로젝트 X 컵라면의 탄생: 82억개의 기적" 편에 따르면 몇년 안 가 수많은 복제상품이 등장해 어려움에 처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컵라면인 컵누들을 개발했다. 미국 수출을 시도하다가 미국 가정에서는 면을 끓이기도 애매하고 담을 용기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개발 과정에서 끓이는 것이 아니라 끓는 물에 익을 수 있도록 면의 형태를 구성하고 고급감을 주기 위해 익으면 빨갛게 변하는 새우를 찾아내고 생산하기 쉬우면서 들고 먹을 수 있는 용기를 개발하고 기존 봉지라면의 3배에 달하는 가격대를 유지하면서 단순한 라면이 아니라 편리함과 시간을 판다는 컨셉을 유지하는 등 어려운 개발 난이도와 초기의 비인기를 극복해냈다.
상기 도서를 보면 본인은 갈구기만 하고(...) 직원들이 하루종일 라면 시제품을 시식하느라 집에서는 밥도 못 먹는다거나 화력이 부족하다고 산소통을 직접 연결한다거나 하는 짓을 해야 했지만.
엄청 장수했는데 라면을 만들고 나선 매일 점심마다 라면을 먹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확히는 국 대신 라면을 먹었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 국 종류 중 좀 헤비한 국물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개발한 라면을 국처럼 먹었던 것.
이런 이유로 신제품 출시 전에도 점심에 식사를 겸해 신제품을 시식해 보면서 자연스레 맛과 품질을 향상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인스턴트 라면 개발자답게 라면을 좋아한 모양.
안도 모모후쿠는 자신의 건강은 매일 하는 골프[6]와 라면 덕분이라고 얘기했다. 물론 "라면보단 운동 때문이겠지"라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뒤집어 말하면 적절한 운동도 하고 다른 음식도 같이 먹으면 라면도 그렇게 유해한 식품이 아니란 이야기.[7][8] 매일 하루 한 끼에 라면을 포함해 먹으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96세로 장수했다.
2006년에는 세계라면협회(IRMA)에서 2년마다 한 번씩 개최하는 세계라면총회가 한국에서 열렸기에 참석차 잠깐 방한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한국에서 라면에 김치나 계란을 넣어먹는 모습을 보고 "역시 한국인들은 음식을 건강하게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라면을 좋은 음식과 섞어 먹으면 균형잡힌 식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 예로 한국인이 라면을 먹을 때 같이 먹는 김치를 꼽은 것이다.[9]
방한 당시 밝힌 소감으로는 앞으로 라면이 첨가물과 건더기에 영양이 가득한 음식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얘기했으며 세계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강에 더 좋은 라면을 만들자는 "서울선언문"을 총회에서 채택하기로 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라면 퀄리티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남은 인생을 라면의 표준화에 바치고 싶다고 밝혔다.#
2007년 1월 5일 이른 아침에 38°c 고열이 발생해서 시립이케다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그날 저녁 급성 심근경색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6세. 2007년 2월 27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장례식이 회사장으로 치러졌다.
3. 사후
사십구재가 거의 국장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로 치러졌으며 전 총리 및 일본의 많은 거물급 인사들이 참석했었다.2008년 4월 8일, 세계 각국의 즉석면 메이커가 참가하는 제 6회 세계 라멘 서밋이 오사카에서 개최되는 것을 기념하여 인스턴트 라면 발명기념관의 전면 확장에 안도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은 컵누들의 용기를 본떠서 만든 받침대에 서 있는 모습에 오른손에는 치킨라멘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세워졌다.
안도가 창업한 닛신식품은 2008년 10월 1일부로 지주사로 전환되어 닛신식품 홀딩스로 상호를 바꾸고 동시에 새로운 회사로서 (주)닛신식품이 창립되었다.[10]
또한, 같은 해에 닛신식품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것을 계기로 다음 50년을 향하여 기업 프로젝트인 백부사[11]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는 사회복지활동에 열심이었던 안도의 의지를 이어 이후 50년간 사회 공헌활동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안도 마사코와의 혼인으로 둔 차남(실제로는 4남이나 안도가 둘째 아내와 낳은 자녀들을 버려서 차남이 되었다.) 안도 고키(1947~)가 사장직을 이어받았다. 안도 고키는 '수성경영을 지키려면 공격하라'라는 경영학 저서를 지었다. 원래는 첫째 아내와 낳은 장남 안도 히로토시(1930~2007)가 전무를 거쳐 사장이 되었었으나 경영 방침을 두고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아 대립하다가 끝내 사장직을 던져버려서 안도가 다시 직접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가 나중에 차남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생몰년대에서 보이듯 히로토시와 고키는 나이차가 많이 났다.
4. 어록
식족세평 (食足世平)
먹는 것이 풍요로워질 때,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식창위세 (食創為世)
먹거리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다.
먹는 것이 풍요로워질 때,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식창위세 (食創為世)
먹거리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다.
5. 기타
- 한국 라면사 초기 삼양식품이 라면을 생산하기 위해 일본 닛신식품에 찾아가 기술을 팔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삼양은 당시 닛신식품의 라이벌인 묘조식품에게 부탁했는데 전후 한국의 사정을 들은 묘조(明星) 사장이 흔쾌히 기술을 원조하면서 삼양라면을 만들게 된다. 물론 완전히 공짜는 아니고 묘조식품에서 라면공장 설비 2대를 사 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통 큰 결단이긴 했다. 묘조 사장은 비서실장도 모르는 기술들을 이전해 주고 삼양에 직접 기술자를 보내 주기도 했다.[12] 참고로 묘조는 2000년대에 지분 싸움이 벌어지자 백기사를 자처한 닛신식품이 2006년 완전히 인수해 증시 상장도 폐지했고 지금은 닛신의 산하 브랜드로 남아 있다.
- 2020년대에도 닛신은 일본 라면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재미있는건 이 닛신이 삼양의 불닭볶음면을 대놓고 베낀 카피 제품을 내놓았다.(...) '日라면 1위' 닛신 너마저…삼양식품, 도넘은 미투 제품에 '골치'. 물론 이전에 한국 산업 전반에서 반대로 그랬다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긴 하다.
- 1985년에는 빙그레가 라면 사업에 진출할 때 닛신과 기술제휴를 했기 때문에# 후발주자임에도 맛이 상당히 좋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다지 재미를 못 보고 2003년에 라면사업에서 철수했다.
- 과거 두산동아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 본문에 등장했다. 다만 역사 과목이 아니여서 그랬는지 중일전쟁 당시 사병으로 참전했던 모모후쿠가 중국군 포로의 군장을 노획했는데 튀겨놓은 국수 형태의 전투식량을 발견해서 인스턴트 라면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와전된 내용이 서술되었다.
- 왜인지 현미경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다. 취재기자가 사진을 찍으려다 뭔가 허전하다고 옆에 있는 현미경을 소품으로 쓰자고 했다고.
- 엘비스 코스텔로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Momofuku) 앨범명을 짓기도 했다. 앨범 구상과 제작 속도 및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고.[13] 타계한 모모후쿠 본인에 대한 헌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 가정사가 꽤 복잡한데,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기 전 대만인과 두 번 결혼했었다. 첫 아내는 어릴때 집안에서 맺어준 여자로 1928년 결혼해 1930년 장남 안도 히로토시를 낳았으나 제대로 된 결혼생활은 아니었고, 두 번째 아내는 1938년 그와 대만에서 만나 연애하다 일본에 함께 건너가 2남 1녀를 두었다. 대만은 1970년대까지 일부다처제가 흔해서 이런 식으로 중혼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도가 일본인 안도 마사코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이혼한 뒤 자녀들을 데리고 대만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1945년 안도 마사코와 결혼하면서 그는 일본 국적을 얻게 되었고 성도 아내의 성을 따라 안도 모모후쿠가 되었다. 안도 마사코와는 1남 1녀를 두었다. 닛신을 승계한 차남 안도 고키는 안도 모모후쿠가 안도 마사코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한편 두 번째 아내와 일본 오사카에서 살 때 낳은 2남 1녀에게는 양육비를 지원하면서도 존재를 숨기고 살아, 두 아들은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안도 고키가 실제로는 4남인데도 공식적으로는 차남이 된 이유도 이때문. 심지어 그의 장례식 때도 딸은 경비에게 저지되어 가족석에 가지 못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2019년 기사에 의하면 딸은 고령의 나이에 대만에서 노숙자가 되어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한다.#[14]
- 2018년에는 그의 인생을 바탕으로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된 대만 아내나 그 자녀 이야기 같은 세세한 가정사는 나오지 않는다. 기타 내용은 만푸쿠 항목 참조.
- 드라마 철인왕후에서는 김소용이 라면을 만듬에 따라, 약간의 타임 패러독스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1] 대만어 독음. 관화로는 우바이푸(Wú Băifú). 한국 한자음으로 오백복, 일본 한자음으로 구레 모모후쿠[2] 라면 개발 이후 매일 점심은 무조건 라면을 먹었음에도 무려 96세까지 장수했다. 본인의 장수 비결로 골프와 라면을 들기도 했다.[3] 결혼을 3번 했다. 첫 아내와 1남(안도 히로토시)을, 두 번째 아내와 2남 1녀를 낳았으며 남은 1남 1녀가 세 번째 아내 마사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번째 아내 슬하의 자녀들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공식적인 자녀는 2남 1녀로 되어 있다. 첫 아내와 낳은 안도 히로토시는 장남으로 인정했지만 마사코와 낳은 안도 고키를 4남이 아닌 차남으로 인정했다.[4] 1949년 신학제 개편 이전의 구제 교육 체제에서는 구제중학교의 수업 연한이 현재의 신제중학교 + 신제고등학교가 통합된 기간이었고 구제중학교를 졸업해도 구제대학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제대학의 예과,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고등상업학교, 고등사범학교, 의학전문학교, 대학 부설 전문부 등)를 졸업해야만 구제대학 본과(학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즉 이 당시의 '고등학교'와 '전문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이 아니라 대학 예과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안도가 졸업한 리츠메이칸대학 전문부 역시 구제대학이 아니라 구제전문학교급에 해당했으므로 학사 학위가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이 당시는 대학 진학률은커녕 중학교 진학률조차 낮은 때였기 때문에 구제전문학교만 나와도 대단히 고학력자에 속했다.[5] 덴뿌라를 튀기니 덴뿌라의 수분이 다 날아가게 되는 것을 보고 이에 착안해서 밀가루 면을 튀겨서 보존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렸다.[6] 방한했을 때도 골프를 빠지지 않고 쳤는데, 오전 7시에 일어나 8홀 라운딩을 돌았다고 한다. 이때가 96세였다.[7] 한국의 한 독성학자(Toxicology. 독물학이라고도 한다.)는(라면이 된장보다 몸에 좋다고 주장한 최석영 교수로 추정) 오히려 라면이 다른 식품보다 건강에 덜 해롭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8] 사실 단순히 몸에 좋은 음식이라는 표현 자체에 무리가 있다. 식재료 및 완성된 음식은 인체에 필요 및 불필요한 성분을 복합적으로 갖추고 있는데 그 성분의 상호간의 조합 및 섭취하는 사람의 신체 상태와의 상성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고 약과 독 사이 어느 지점에 위치할 수도 있기에 단순히 특정한 음식을 보고 몸에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는건 무리가 있다. 강황과 포화지방과 염분이 듬뿍 들어간 카레가 그 좋은 예.[9] 다만 김치의 경우는 마냥 좋지는 않은게 안 그래도 라면은 나트륨이 많은데 김치 역시도 마찬가지다. 국물을 싹 빼고 먹으면 좀 더 낫다. 면도 꼬들꼬들해진다. 그나마 김치의 비타민이나 섬유질 등을 같이 먹으니 그 점에는 좋다고 할 수 있다. 계란의 경우는 라면의 부족한 단백질 보충하니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다.[10] 기존 회사를 지주사로 전환하고 같은 회사를 신설 법인으로 세우는 사례는 여럿 있다. 롯데도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롯데제과 법인을 롯데지주로 변경하고, 새로 법인을 하나 더 만들어 그 신설 법인에 롯데제과라는 이름을 붙였다.[11] 햐쿠후쿠시, 百福士. 이름부터 모모후쿠의 이름이다.[12] 사장이 이렇게까지 해준 이유는 1년 전 이탈리아의 '파스타 리치'에게 파스타 기술을 무상으로 받은 은혜를 자신도 남에게 갚았다는 설, 당시 닛신이 주도한 일본 즉석 라멘 업계의 특허 분쟁에 질렸다는 설, 전쟁의 이익을 봤기 때문에 민간외교의 일환으로 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거론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사장 본인만이 알 것이다.[13] 이 앨범은 2008년 연초에 녹음해 4월 22일에 발매했다.[14] 다만 주간문춘 본문을 보면 모모후쿠는 대만으로 간 딸 미와에게 몇십년 동안 빌딩 구매대금 등 억대에 달하는 거액의 지원과 택시 기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닛산 자동차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즉, 지원을 할 만큼은 해 준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