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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녀디 야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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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헝가리의 잡지 물트코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1위2위3위4위5위
마차시 1세 무명용사 어틸러 요제프 라코치 페렌츠 2세 센트죄르지 얼베르트
6위7위8위9위
민트센티 요제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라슬로 1세 코슈트 러요시 쾨뢰시 초마 샨도르
9위10위
후녀디 야노시 퍼프 라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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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슈테판 3세 카롤 1세 미하이 에미네스쿠 미하이 2세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이온 안토네스쿠 미르체아 엘리아데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콘스탄틴 브랑쿠시 나디아 코마네치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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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블라드 3세 조지 비칼리 헨리 코안더 게오르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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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니콜라에 이오르가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제오르제 에네스쿠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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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비스타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페트레 투테아 코르넬리우 코포수 아우렐 블라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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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시 1세 미르체아 1세 티투 마이오레스쿠 토마 카라지우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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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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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언어별 표기3. 행적
3.1. 바르나 전투(1444.11.10)3.2. 오스만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1454)3.3. 벨그라드 공방전(1456)3.4. 죽음(1456)
4. 대중매체에서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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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몰년도: 1407(?) ~ 1456. 8. 11.

에르데이 총독,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섭정이자 장군으로서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헝가리 최후의 명군 마차시 1세의 아버지이다. 남작 가문에서 시작해 백작[1]까지 올라간 중세 기준으론 가장 모범적인 성공신화를 일군 인물이기도 하다.

2. 언어별 표기

헝가리어Hunyadi János(후녀디 야노시)[2]
크로아티아어Janko Hunjadi(얀코 후냐디)
루마니아어Ioan de Hunedoara(이오안 데 후네도아라)
영어John Hunyadi(존 후냐디)

3. 행적

본래 왈라키아 출신으로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를 섬기던 그의 아버지 보이크(Voyk)가 에르데이의 후녀디 성(Vajdahunyadi vár)[3]을 하사받게 되면서 남작이 되고 '후녀디'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아버지 후녀디 보이크(Hunyadi Voyk)에 관해 밝혀진 공식적인 기록은 현재까진 여기까지다. 비록 남작으로 하급 귀족에 불과하였으나 비슷한 계층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였으며 다른 영주들에 비교하여 재산도 그렇게 꿀리지 않았다.#

파일:external/icons.wunderground.com/1848.jpg
부다페스트의 영웅광장(Hősök tere)에 있는 후녀디 야노시의 동상

후녀디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계기는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세르비아 공국을 침공하면서였다. 당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가신 관계에 있던 세르비아 공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돕기 위해 폴란드 왕국의 국왕으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이기도 했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에르데이의 총독(1446~1452)이었던 후녀디 야노시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1443년 9월에 대오스만 십자군을 일으켰다.

후녀디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밀어붙여 소피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렸지만 오스만군의 저항과 보급선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퇴각했다. 그 와중에도 추격해오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무라트 2세의 처남을 포로로 잡아 휴전을 이끌어냈다. 결국 퇴각하기는 하였으나 이 전쟁으로 헝가리와 후녀디의 위신은 크게 상승했고 무라트 2세는 세르비아의 중립을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영토를 반환했다.

3.1. 바르나 전투(1444.11.10)

이듬해 추기경 체자레니는 망하기 직전이었던 동로마 제국가톨릭의 수위를 인정한 동서교회 통합까지 받아들이며 요청한 대오스만 동맹 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폴란드 왕국, 부르고뉴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왈라키아 공국도 참전하였다.[4] 1444년 9월 20일, 연합군은 도나우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전 원정이 끝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된 원정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였고, 바르나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 끝에 퇴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르나 십자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을 상당히 밀어붙였기 때문에[5] 오스만 또한 공세를 지속하지 않았다.

이 전투 뒤에 왈라키아를 통해 퇴각하던 후녀디는 블라드 2세와 그의 아들 미르체아 2세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단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직접 지휘를 맡았던 것이 후녀디였기 때문에 블라드 2세가 후녀디의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또한 당시 블라드 2세는 자신의 두 아들 블라드 3세, 라두 3세를 2년 전, 1442년에 이미 무라트 2세에게 볼모로 보낸 상황이었다.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총공격을 명해놓고 패한 후녀디 야노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후녀디 야노시를 잡아가두는 이런 제스처가 무라트 2세의 마음엔 들었는지, 블라드 3세와 라두 3세는 처형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연히 후녀디 야노시는 블라드 2세가 적과 내통했다고 이를 갈았다. 여담으로 이 사건은 훗날 블라드 2세 드라쿨의 아들, 블라드 3세 '체페슈'의 인생을 질곡으로 밀어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면서 후녀디는 당분간 어린 새 왕 라슬로 5세섭정으로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통치했다.[6] 후녀디는 바르나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고, 1448년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를 진압하기 위해 무라트 2세가 출병하자 다시 한번 원정길에 나섰다. 이때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후녀디가 세르비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후녀디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세르비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무라트 2세는 곧장 후녀디를 맞이하기 위한 병력을 나눠 세르비아로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양군은 코소보 벌판에서 마주쳐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후녀디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했고, 후퇴하던 와중에 세르비아인에게 붙잡혀 다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그의 둘째 아들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주라지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기로 약조하였다.

3.2. 오스만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1454)

이후 코소보에서의 패배로 이미 실각한 것과 다름 없던 후녀디를 되살려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무라트 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의 세르비아 침공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기세가 오른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이중가신 관계를 맺은 세르비아를 직접 통치하기로 마음먹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1년이 지난 1454년 침공을 개시하였다. 주라지는 헝가리로 도피하였고 코소보 일대는 완전히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갔다.

3.3. 벨그라드 공방전(1456)

1456년 드디어 메흐메트 2세가 10만의 대군과 300문에 달하는 대포를 이끌고 벨그라드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겁에 질린 16세의 라슬로 5세는 사냥을 핑계로 본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도망쳐 버렸고, 후녀디는 다시 한번 무대로 복귀하였다. 후녀디는 직접 발칸반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의 동맹이 되어버린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견제하기 위해, 블라드 2세의 3남이었던 블라드 3세를 지원하였다.[7]

그러나 정작 헝가리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국왕의 부재를 핑계로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교황이던 갈리스토 3세가 후녀디를 가리켜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 칭송하며 사제 카피스트라노[8]를 파견해 후녀디의 모병을 돕고 나섰다. 이렇게 후녀디는 오합지졸이긴 했으나 40,000명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고 여기에 10,000명의 정예병을 모아 오스만군에게 포위된 벨그라드로 진격하였다.

7월 14일 벨그라드 포위망에 도달한 후녀디의 군대는 도나우강을 막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벨그라드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의 우세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 끝에 21일 무너진 성벽을 향해 오스만군의 야간 기습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예니체리 부대가 성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후녀디는 돌파된 성벽 주변에 불을 질러 적의 허리를 끊고 내부에 고립된 적들을 역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징집된 농민군 중 일부가 멋대로 성 밖으로 나가 오스만군 진지를 기습한 것이다. 카피스트라노는 이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막지 못한다는걸 깨닫고 오히려 선두에 서서 돌격해버렸다. 이른 아침 넋을 놓고 있던 오스만군은 이 공격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후녀디는 기회를 포착하여 전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섰다. 이에 오스만군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전선에 나서 직접 헝가리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는 등 사기를 북돋으려 했으나, 오히려 화살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결국 오스만군은 75,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중화기를 전부 잃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고,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 부대의 몸을 던진 희생으로 겨우 탈출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때의 충격으로 메흐메트 2세는 음독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한동안 폐인으로 지냈다.

3.4. 죽음(1456)

벨그라드 공방전은 후녀디의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허무하게도 곧바로 찾아온 전염병으로 인해 야노시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후계자였던 장남 후녀디 라슬로가 세력을 이어갔지만, 헝가리의 기성 귀족들과의 권력 다툼 속에 반역죄를 선고받아 1년만에 처형당했고, 함께 갇혀있던 차남 마차시가 반란으로 풀려난 뒤, 외숙부 실라지 미하이(Szilágyi Mihály)[9]에 의해 옹립되어 마차시 1세(마티아스 코르비누스)로 즉위했다.

이는 헝가리 역사상 왕족이 아닌 사람이 헝가리의 왕이 된 첫 번째 사례였는데, 당연히 그 후녀디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다.[10] 마차시 1세도 그 후녀디의 아들답게 명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4.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 4(1370년)에서 스칸데르베그와 함께 함께 발칸 반도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며, 1400년대 초반부터 등용할 수 있다.
능력치 특기 병과 적성
정치 78 전투 86 지모 84 농업, 상업, 외교, 기동, 화공 보A 궁B 기A 수E

Europa Universalis IV에서 헝가리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4/4/4/1.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서 섭정이 될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5. 아들 마차시 후녀디는 이후 진행에 따라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6,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3/4/3/1(이벤트로 즉위한 경우 적용되지 않음). 이들 부자의 활약을 반영하듯 매우 높은 능력치가 책정되어 있다.

후스 전쟁을 다룬 오니시 코이치의 만화 소녀전쟁에서는 요한 후냐디라는 이름으로 등장. 어린 시절이며 작화상으로도 미소년이다.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부하로 등장하며 주인공인 샤르카의 연인이자 남편으로 나온다. 샤르카와의 사이에서 클라라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고, 그 딸은 소녀전쟁 본편 완결 후 연재된 외전 2편의 주인공이 된다.[11]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작품 초반부터 등장이 확정되어 있었던 인물 중 하나인데, 실제 별명인 '백색의 기사'라는 말 그대로 순백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등장하며, 오스만군을 상대로 뛰어난 지휘능력과 무력을 보여준다. 이후 세르비아 십자군이 패하면서 오스만에 맞설 유일한 희망인 주인공을 곳곳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결국 그 행적이 보답받아 헝가리 왕국에 후녀디 왕조를 개창한다. 자세한 것은 이 문서를 참조.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메흐메트가 교황이 십자군을 준비한다는 말에 누가 그 군대를 이끌수 있냐고 비웃으면서, 후냐디가 죽은 이후로 대단한 전사가 없었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5. 기타

6. 관련 문서



[1] 그의 생전 최종 실제 작위는 백작이었다. 1441년 하사받은 '에르데이의 보이보드(erdélyi vajda)'란 작위는 명예직이다. 에르데이 공국은 1570년에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성 이슈트반 왕관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2세에게 넘기면서 등장한 공국으로 이전까지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다.# #2[2] 헝가리어의 인명은 성씨가 앞에 온다. János는 세례자 요한의 헝가리어 표기이다. 영어John과 같은 뜻.[3] 현재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Hunedoara)의 코르빈 성(Castelul Corvinilor). 헝가리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뒤편에는 1896년에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 성을 모델로 만든 복사본이 있다.[4] 왈라키아 공이던 블라드 2세는 이 원정을 막으려고 지도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왈라키아 공국으로 물러났다. 이 원정에 참여한 것은 블라드 2세의 차남이었던 미르체아 2세였다.[5] 사실 기독교 군대가 거의 다 잡은 전투였다.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3세가 욕심을 부려 자신이 갔다올 동안 기다리고 있으라는 후녀디의 충고를 무시한 채 술탄을 잡으려고 전면 돌파를 하다가 역포위되어 죽는 바람에…[6] 라슬로 5세는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기도 했는데, 보헤미아 왕국 섭정은 얀 후스의 이론을 믿는 보헤미아인 귀족이었던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맡았다.[7] 가시공은 1448년 왈라키아 공에 올랐다가 후녀디에 의해 폐위된 뒤, 몰다비아 공국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다시 헝가리로 돌아와 후녀디의 부하가 되어 있었다![8] 이를 보면 그냥 얼굴마담이 아닌가 싶겠지만 엄연히 독립된 지휘권을 가졌던 사람이다. 물론 농민군이 후녀디의 명령을 어겼다는 표현을 쓰는 등 실질적으로는 후녀디가 총괄했다는 증거는 많지만. 당시 그의 나이가 70이었는데, 후술할 농민군의 돌격에서 같이 돌격하는 등 노익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카피스트라노는 벨그라드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성인으로 시성되었다.[9] 블라드 3세의 후처인 일로너의 숙부이기도 하다. 마차시 1세 즉위 수 년 뒤에 오스만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그 후 마차시의 친정 시대가 시작된다.[10]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당시의 어린 왕 라슬로 5세는 메흐메트 2세가 쳐들어오자 으로 몽진하면서 민심을 많이 잃었고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11] 역사에서 후냐디의 사생아 딸은 블라드 가시공의 첫 부인이 되기에, 클라라가 가시공의 부인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 같기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작가가 블로그에서 밝혔다. 가시공의 첫 부인은 오스만 전쟁 중 죽었다는 설이 있어서 그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