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和歌山毒物カレー事件본 사건을 다룬 KBS 9뉴스 보도 내용[1]
1998년 7월 25일 일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에서 열린 여름 축제에서 만든 카레를 먹은 사람들이 복통과 구토를 호소하면서 병원에 실려갔고 그 중 4명이 사망한 사건. 처음에는 식중독 사고라고 판단했지만 조사 결과 독극물인 아비소산[2]이 검출되어 경찰이 본 사건을 살인이라고 보고 주부 하야시 마스미(林真須美)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일본인들은 카레라이스를 즐겨먹는 편이지만 이 사건 때문에 식품 회사들이 카레의 광고를 자숙하는 등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이 일어났고 와카야마 지역 학교에서는 아직도 급식에 카레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2. 전개
와카야마시의 자치회가 주최한 여름 축제에서 주민들이 만든 카레에 맹독성 아비소산이 주입되어 이것을 먹은 67명 중 4명이 사망[3]하고 63명이 급성 아비소산 중독에 걸렸다.경찰은 주변 인물의 소행으로 보고 조사를 펼치던 중 현장 근처에 사는 주부의 주변에서 비소산 중독 증세가 일어나고 거액의 보험금이 그 주부와 남편 부부에게 들어간 것으로 드러나 보험 사기와 살인 혐의로 주부를 기소했다.
당시 자신을 취재하려고 집앞에 몰린 기자들을 향해 호스로 물을 뿌리던 모습. 심지어 밤에도 이러고 나와 기자들에게 물을 퍼부었다. 매스컴을 도발하는 이 모습은 화제를 모으면서 일본 TV 와이드쇼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용의자는 당시 37세였던 하야시 마스미인데 전업은 보험판매원이었다. 당초엔 하야시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으나 당일 오후 12시 20분부터 1시까지 혼자 카레 냄비를 지켜보았다는 증언, 신체 주변에서 발견된 아비소산과 카레에 주입된 아비소산이 동일하다는 것, 사건 당일 주민들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재현하는 등 증거를 모아 하야시 마스미 외에 다른 범인이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당초 용의자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변호인 측도 무죄임을 주장했으나 와카야마 지법은 2002년 12월 '동기는 인정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비소산을 주입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피고인 뿐'이라고 고하며 사형을 구형했고 2009년 5월 18일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무죄를 호소하면서 재심을 요구 중이다.
3. 용의자에 대해
일본 네티즌들이 해당 사건을 풍자하기 위해 만든 합성짤. '청산 카레 비소맛'이라고 적혀 있다. 원본은 오츠카식품의 '본카레'(ボンカレー).
용의자 하야시 마스미는 1983년에 이혼 경험이 두 번 있었던 남자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신혼 시절부터 폭력을 휘둘렀다.
최초 두 부부는 집세 3만 엔짜리 값싼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하야시가 가정부, 화장품 판매원 등 갖은 일을 하면서 1984년 대출이 낀 신축 주택을 3500만 엔에 구매했다.
이후 하야시는 큰 돈을 손에 쥐었는데 방법은 바로 보험사기였다. 1995년에 120평 집을 7천만 엔에 구입했고 그해 10월 모친이 백혈병으로 생긴 뇌출혈로 사망하자 보험금 1억 4천만 엔을 얻었으며 1998년 초엔 고급 리조트 맨션의 제일 비싸다는 최상층을 구입하기로 계약하고 한 달 뒤 보험금을 노려 지인에게 아비소산이 들어간 우동을 먹게 했으며 다섯 달이 지나 이 사건을 꾸몄다는 것이다. 하야시가 보험사기로 손에 넣은 돈은 총 약 1억 6천만 엔이라고 추정되는데 함께 사기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남편은 2005년 만기 출소했다.
하야시는 평소 주민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 사건 당일 축제에서 카레를 만들고 있을 때 아무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은 하야시가 이처럼 무시받은 원한이 사무쳐서 사건을 꾸몄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이 사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에서 판단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판결에서는 부정되었다.
4. 의문점
이 사건의 의문점이라고 꼽히는 몇 가지 사항은 이러하다.첫째, 결정적 증거는 상황증거뿐이라는 것. 둘째, 범죄심리학에서는 보험사기 같은 지적 범죄와 독극물 카레 같은 무차별 살인을 노린 사건을 동일범이 일으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첫째는 이미 상황 증거 이외에 아비소산 반응이 용의자 주변에서 검출되었고 둘째는 이미 이전 범죄에서 우동에 아비소산을 탄 전과가 있기 때문에 확실한 의문점은 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용의자가 누명을 쓴 엔자이 사건이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누명이라고 생각하는 측의 주장은 이러하다.
- 직접 증거가 0에 수렴하고 동기도 밝혀지지 않음.
- 조사관 여든 명 이상이 용의자 자택에서 증거를 찾았으나 이틀이 지나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 상황재현을 할 때 주민들은 사건 현장에 일동으로 모여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 검증했다.
- 사건 당시 용의자가 종이컵을 들고 카레 쪽에 다가갔다고 매스컴 등지에서 증언하던 남자아이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 증거라고 들고 나온 게 보통 가정에서 쓰는 '컵'이었는데, 여기에는 지문이 일절 묻지 않았다.
- 또 위 컵에 묻은 물질과 카레에 아비소산을 넣을 때 썼다고 추정하는 종이컵에 묻은 물질을 검증해 보니 서로 다른 불순물로 드러나 용의자의 변호인 측이 재판정을 요구했다.
용의자도 본인의 보험사기는 인정했지만 이 사건은 무죄라고 일관되게 전면 부정하기 때문에 엔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2015년 8월 오사카 구치소에 복역 중인 용의자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기자가 있었다는데 하야시의 말에 따르면 첫 번째 공판에서 침묵한 건 함께 보험 사기로 잡혀온 남편을 먼저 내보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남편을 먼저 보내서 남겨진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엔자이설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다는 사실은 본인도 알고 "내가 왜 카레에 독극물을 넣었다는 거야.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 집은 맨션을 지었을 거라고."라고 이야기했다.
엔자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하야시 마스미씨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는데 재판 청구서, 성명, 모임을 열면서 용의자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메인 페이지에는 "사건 당시 매스컴에서 '헤이세이의 독부(毒婦)'라고 불린 하야시 마스미씨지만 그 본모습은 아이를 생각하는 따스한 어머니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지만 도메인 만료로 삭제되었다.
5. 사건의 영향
- 매스컴 보도에서 '독이 든 카레'라는 내용을 전면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카레의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 TBS 테레비계 애니메이션 괴짜가족에서는 카레를 만들다가
실수로화학약품을 넣어 독극물이 되는 내용의 회차가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4] - 후지 테레비 '뉴스 JAPAN'에서 아나운서인 안도 아야코가 용의자라고 지목되기 전에 하야시 마스미를 인터뷰하려고 했는데 이름에 '삐-'음을 넣어서 익명으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편집 미스로 한 곳만 '삐-'음이 들어가지 않아 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 용의자가 체포되기 전에 미키 하우스[5]의 스웻트 셔츠(땀 흡수 셔츠)를 입고 있던 영상이 보도되어 의류 브랜드 회사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뉴스의 영상에서는 브랜드 로고를 모자이크 처리로 가린다.
- 여름 축제 시기였기 때문에 사건이 알려진 후 각지의 축제에서 식사의 제공이 줄어들었다.
- 사건 이후 음식물에 독극물을 넣는 모방범죄가 늘었다.
- 이 사건의 여파로 와카야마현의 초, 중, 고등학교 급식에는 카레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 한동안 남에게 카레를 대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 독이 든 카레를 먹었던 피해생존자 63명은 아직까지도 고통을 호소한다고 한다.
- 이 사건이 워낙 충격적인 탓에 사건이 발생한 1998년 올해의 한자로 毒(독)이 선정되었다.
5.1. 범인의 집에 대한 사적제재[6]
사건이 일어난 뒤 하야시 마스미의 자택의 벽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밤만 되면 침입해 "살인자", "당장 꺼져라", "악마" 등의 낙서를 인정사정없이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으며 수개월 후인 1999년 3월 26일에도 오사카에서 찾아와 낙서를 하려던 21세 여성이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발견돼 조사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18~21세로 이루어진 5명의 젊은이들 그룹 중 한 명으로, 시내를 드라이브하던 중 라디오에서 하야시네 집 낙서가 화제라는 말을 듣고 '나도 낙서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범죄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이미 장난질 수준의 감정으로 모방범죄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한 번 시작된 낙서와 장난은 계속 이어지고 또 알려지면서 범죄가 범죄를 부르게 된다. <엔자이 파일>이라는 잡지에 낙서가 있는 벽에 새로운 낙서를 덧붙인 사진이 실리고 다시 두 달여가 흐른 5월 28일에는 오사카와 히로시마에서 온 21~22세의 남자 3명이 낙서하다가 이웃의 신고로 체포되어 경범죄법상 공작물훼손 혐의로 조사받았으며 5월 26일 새벽에는 집의 서쪽에서 남쪽 통로와 현관문에 냄새 없는 노란색 액체가 뿌려졌는데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것의 정체는 중유였다.
문제는 범인이 살던 집 근처에 살 뿐 아무 죄도 없는 이웃들이 받는 민폐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낙서로 인해 흉물스러운 벽과 이를 보려고 몰려드는 구경꾼들 때문에 살 수 없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변호사를 통해 범인 부부에게 집의 낙서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비용 부담 때문에 범인 부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그대로 방치되었다. 결국 이웃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낙서가 가득한 벽을 다시 도배했다. 이렇게 낙서가 지워지고 구경꾼도 줄어들며 마을이 다시 안정을 찾아갔다.
결국 이 사건으로부터 1년 6개월 후 더욱 큰 사건이 터졌는데 2000년 2월 16일 오전 4시 30분 방화를 당했다. 근처에 있던 회사원이 발견하고 119에 신고했지만 1시간 가까이 계속된 화재로 2층짜리 목조건물은 외벽을 제외하고 182평방미터의 내부가 전부 불타 사라졌다.
1년 반 가까이 사람이 살지 않는 상태로 전기도 끊겼기 때문에 내부 원인은 아니었고 고작 몇 시간 전인 0시에 경찰이 순찰을 돌 때도 이상이 없었으니 누군가의 고의가 명백했다. 불이 난 직후 현장을 떠나는 사람 3명이 목격됐다는 증언도 나왔지만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
이웃집 사람들의 불안은 장난이 아니었다. 요미우리신문 보도에서 가까이에 살고 있던 40대 주부는 예금통장을 들고 집에서 탈출하면서 '가장 우려스러웠던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고 사건 피해자들도 "잠도 잘 수 없는 나날이 다시 계속되는 겁니까?"라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호소했다. 다음날 일간스포츠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집을 철거하기를 바랐습니다. 이제는 또 불탄 집을 보러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좋겠습니까?"라며 뜻밖의 사건에 복잡한 심경인 주부의 말을 전했다.
이를 계기로 범인의 집을 처분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이미 1999년 4월에 오사카 국세청이 범인이 체납한 소득세 등 7천만엔을 회수하기 위해 문제의 집을 압류한 상태였으며 압류 직후 피해자 모임이 신청한 가압류도 와카야마 지방재판소에서 승인되었다.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 범인 부부의 자산인 집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부지는 2번의 경매를 통해 지자체가 380만엔으로 낙찰받았다. 전술했듯 불과 몇 년 전이던 1995년 범인 부부가 구입할 때의 가격은 7천만엔이었지만 사건의 영향으로 집값이 폭락해 그때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이 되었다.
지자체는 집터에 화초를 심어 공원을 조성했다. 사건과 관련된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지역 주민들은[7] 현장을 볼 때마다 계속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고 한다.
6. 사건 이후
2015년 10월 28일 용의자와 변호인이 재판결을 위한 면회 시 형무소 직원을 세워 둔 것이 위법이라는 판결이 나와 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 용의자가 승소해 오사카 지법이 나라에 120만 엔을 지불하라고 명했다.지법은 사형인은 재판 청구 면회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직원이 없어도 면회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2011년과 2013년 사이 용의자와 변호인이 열두 번 면회했을 때 직원이 옆에 서 있지 않을 것을 부탁했으나 오사카 형무소의 '사형 확정자 처우 규정'에 따라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송으로 번진 판결이다.
사건으로부터 23년 후인 2021년 6월 9일 용의자의 가족에게는 또 한 번 비극이 일어났는데 [8]하야시 마스미의 37 살 장녀가 4살짜리 작은딸을 끌어안고 간사이 국제공항의 연결 다리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자살했다.[9] 이로부터 몇 시간 전 그녀의 16살 큰딸이 병원에서 사망했고 사후 행해진 검사에서 부모에 의한 폭행이 원인이었음이 드러났다. 즉 자녀를 학대해 사망하게 한 후 자살한 것이다. 애꿎은 다른 자녀와 함께... 그녀의 남편도 목매달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 그런데 사형수인 마스미는 변호인을 통해 와카야마 지방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고 우연히도 바로 그날 재심청구는 받아들여 졌다.
하야시 마쓰미의 장녀 A는 고교 중퇴후 보호시설에서 자란 후 취업해 20 살에 부유한 지주집 가정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남자 부모는 A가 사형수의 딸임을 알고 극렬히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결혼을 강행해서 첫째 딸 B을 낳았다. 하지만 결국 첫째 딸 B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두 사람은 이혼을 했고 A는 곧 새로운 남자 C와 재혼을 했다. 하지만 재혼 후 아동상담센터에 큰딸 B가 학대를 당한다는 신고가 들어와 면담을 했다. 어머니인 A가 주로 학대했다는 주변의 증언도 있었다. 그후 재혼한 남편 C 사이에서 작은딸 D가 태어났다.
하지만 몇 년 후 비극이 일어난 그날 A는 119 응급센터에 큰딸 B가 죽어간다는 신고를 한다. 병원에 실려간 B는 구타로 인해 쇼크사했다는 사망진단이 내려진다. 향년 16세. 그 직후 A는 자동차로 간사이공항 다리로 가서 4살 짜리 작은딸 D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동반자살을 했다. A의 두 번째 남편 C도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B의 어머니인 A와 의붓아버지 C 중에 누가 B를 구타해 죽게했는 지는 세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하야시 마쓰이의 남편이자 A의 아버지인 하야시 겐지는 자신의 장녀인 A를 두둔하고 있다.
7. 미디어
휴먼버그대학교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상이 있다. 하야시 마스미는 '다나카 요시에'라는 가명으로 나왔다.
[1]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에서도 보도된 적이 있었지만 한 달 전에 일어났던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사건과 약 1주 전에 일어났던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사건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지상파 뉴스로 보도된 것은 KBS 9뉴스가 유일하다.[2] Arsenous acid, 분자식 H3AsO3의 화합물로, 아인산(Phosphorous acid, H3PO3)과 동일 구조(isostructural)의 등전자체(isoelectronic compound)이며 무수물인 삼산화비소가 통칭 비상이라고 불린다.[3] 64세 남성, 54세 남성, 16세 여성, 10세 남아[4] 이 화는 비디오판에 수록되었다. 이후 한국의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에서 괴짜가족을 수입해 왔을 때 해당 회차가 방송되었다.[5] 한국에서도 백화점 등지에서 판매하는데 주로 아동복으로 유명하다.[6] 이 문단은 스즈키 노부모토의 <가해자 가족>을 참조하였다.[7] 경제적 여유가 충분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이 사건 이후에도 떠나지 않고 계속 살고 있다.[8] 우연히도 사건 당시 용의자의 나이와 같다.[9] 이런 자살은 엄밀히 말하면 동반자살이 아니라 '살해 후 자살'이라고 불러야 한다. 4살짜리가 자살을 선택할 수 있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