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메이스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뉴욕 자이언츠 등번호 14번 | ||||
러디 루퍼 (1950) | → | 윌리 메이스 (1951) | → | 데이비 윌리엄스 (1951) | |
뉴욕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번호 24번 | |||||
잭 맥과이어 (1950~1951) | → | 윌리 메이스 (1951~1952) | → | 마리오 피콘 (1952) | |
마리오 피콘 (1952) | → | 윌리 메이스 (1954~1972) | → | 영구결번 | |
뉴욕 메츠 등번호 24번 | |||||
짐 뷰챔프 (1972) | → | 윌리 메이스 (1972~1979) | → | 켈빈 토브 (1990) | |
로빈슨 카노 (2019~2020, 2022) | → | 영구결번 | → |
<colbgcolor=#000000><colcolor=#fd5a1e>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No. 24 | 뉴욕 메츠 No. 24 | |
윌리 메이스 Willie Mays | ||
본명 | 윌리 하워드 메이스 주니어 Willie Howard Mays Jr. | |
출생 | 1931년 5월 6일 | |
앨라배마 주 웨스트필드 | ||
사망 | 2024년 6월 18일 (향년 93세) | |
캘리포니아 주 팔로 알토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페어필드 인더스트리알 고등학교 | |
신체 | 178cm | 77kg | |
포지션 | 중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50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NYG) | |
소속팀 | 버밍햄 블랙 바론스 (1948)[1] 뉴욕-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51~1972)[2] 뉴욕 메츠 (1972~1973) | |
지도자 | 뉴욕 메츠 코치 (1974~1979) | |
기록 | 30-30 클럽 2회 (1956, 1957) 한 경기 4홈런 (196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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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illie could do everything from the day he joined the Giants. He could do all the things you look for in a player better than anybody I ever saw. He never had to be taught a thing. The only other player who could do it all was Joe DiMaggio.
"(뉴욕) 자이언츠에 온 그날부터,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명의 선수에게 요구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본 다른 어떤 선수보다 잘할 수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 하나도 가르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다 잘할 수 있었던 다른 선수는 조 디마지오 뿐이었다."[3]
레오 듀로셔[4], 1979년 신문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 볼드체로 강조된 부분은 해당 기사의 제목이다. ##[5]
"(뉴욕) 자이언츠에 온 그날부터,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명의 선수에게 요구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본 다른 어떤 선수보다 잘할 수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 하나도 가르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다 잘할 수 있었던 다른 선수는 조 디마지오 뿐이었다."[3]
레오 듀로셔[4], 1979년 신문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 볼드체로 강조된 부분은 해당 기사의 제목이다. ##[5]
미국의 전 야구 선수.
2. 기록
그는 660홈런/3,283안타-13년 연속 300루타[6]을 기록하고, 12년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을 차지했다.[7] 또한, 주루는 시대 대비 최상위권인 338도루를 기록했고, 이를 증명하듯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시즌 도루 성공률 1위를 5회 기록했다.[8][9] 나중 얘기지만 메이스는 호세 칸세코가 40-40을 달성했을 때, 이게 그렇게 대단한 기록이라면 나도 몇번 해둘 걸 그랬다면서 강한 자신감을 보인 바 있다.통산 성적은 22 시즌 2,992경기 12,497타석/10,881타수 .302/.384/.557 .941OPS/156OPS+ 660홈런 3,283안타 523이루타 2,062득점 1,903타점 338도루 순장타율 .256 1,464BB/1,526K 154wRC+/.409wOBA 156.2bWAR/149.9fWAR.[10] 여기에 시즌 bWAR 1위를 무려 10번이나 기록했다.[11][야수]
3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8인 중 1명이고[13] 이들 중 유일한 통산 3할 선수다. 500홈런 - 3,000안타를 기록한 선수들 중에서[14] 통산 3할 타율을 기루한 선수는 오직 행크 애런과 미겔 카브레라, 윌리 메이스뿐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도루 300개 이상 기록한 선수는 윌리 메이스뿐.[15]
11번의 30홈런-6번의 40홈런-2번의 50홈런을 기록했다.[16]
메이스는 최초의 골드 글러브 10회 + 3,000안타 달성자이면서도[17] 마이크 슈미트, 켄 그리피 주니어와 함께 골드 글러브 10회 + 500홈런을 달성한 셋뿐인 선수다.[18] 즉, 역사상 유일한 3,000안타+500홈런+골드 글러브 10회 달성자가 바로 메이스다. 여기에 더해 메이스는 피삼진과 2루타, 타점을 제외한 모든 지표에서 최소 1회 이상 리그 1위를 달성했다.[19] 이쯤 되면 다시 한번 Willie could do everything.[20]
통산 성적 및 기록들
3. 수상 경력
수상 내역 |
월드 시리즈 우승 (1954) 올스타 24회 (1954-1973) 내셔널 리그 MVP 2회 (1954, 1965) 내셔널 리그 골드 글러브 12회 (1957-1968) 내셔널 리그 신인왕 (1951) 내셔널 리그 홈런 1위 4회 (1955, 1962, 1964, 1965) 내셔널 리그 타율 1위 (1954) 내셔널 리그 도루 1위 4회 (1956-1959) |
4. 선수 경력
니그로리그에서 처음 경력을 쌓기 시작한 후, 마침 재키 로빈슨에 의해 인종차별의 벽이 무너지자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특히 레드삭스의 경우 입단시키기를 희망했지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감독 조 크로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21][22] 이후, 뉴욕 양키스 역시 인종차별주의자 스카우트의 허위보고로 영입에 실패했고, 브루클린 다저스도 니그로리그 출신 명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그를 추천했지만, 역시 거부. 결국 뉴욕 자이언츠로 가게 되었다.그리고 자이언츠 프랜차이즈에서 전설이 되었다. 선수 시절의 메이스는 22시즌을 뛰면서 13년 연속 bWAR 7.5를 넘길 정도로 늘 꾸준했고, bWAR 10을 6번 넘길 정도로[23] 늘 최고였다.
데뷔 첫 해부터 51년도에 타/출/장 .274/.356/.472, OPS .828, 조정 OPS 120, 20홈런, 68타점, 57볼넷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신인왕(Rookie of the Year, RoY)을 차지했다.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다. 1951년엔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했고 20세의 메이스는 힘겨워했다. 데뷔 후 첫 7경기에서 32타석/26타수 1안타(1홈런)[24] 6BB/3K .373OPS라는 심각한 성적을 기록하던 메이스는 감독에게 자신을 마이너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감독의 격려로 정신을 차리고 활약했다. 시즌 8월 중순까지 다저스에 13.5경기 뒤처졌던 자이언츠는 1951년 내셔널 리그 타이 브레이커에서 바비 톰슨의 '세계에 울려퍼진 한방'으로 극적인 뒤집기 우승을 차지했는데 톰슨이 홈런을 친 순간 대기타석에는 메이스가 있었다.
그런데 1952년부터 군 복무를 하느라 단 3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 했고, 이 점 때문에 누적 기록과 최초의 500홈런-3,000안타 달성에 실패하고 두번째로 밀리는 등 상당한 손해를 봤다.[25]
군 복무를 마친 메이스는 54년부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돌아오자마자 .345/.411/.667, OPS 1.078, 조정 OPS 175, 41홈런, 110타점, 66BB/57K, bWAR 10.6[26]으로 압도적인 성적을 낸 것. 타율, 장타율, OPS, 조정 OPS 그리고 3루타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당연히 올스타에도 들어갔으며 이해 리그 MVP를 차지했다.
전성기인 54~66년도의 성적을 요약하면 13년간 연평균 타/출/장 .315/.390/.601, OPS .992, 조정 OPS 166, 40홈런, 109타점, 73볼넷, 69삼진, 21도루, bWAR 9.5[27]!. 이 성적은 참고로 커리어하이 한 시즌만 기록해도 매우 훌륭한 선수 취급을 받고, 약 5년 정도 기록해도 명예의 전당급 확정에 역대급 임팩트로 고평가를 받는데[28] 메이스는 이걸 13년 연평균 성적으로 올렸다. 3할을 넘게 치는 타자가 장타율 6할에 40홈런을 치는 파워를 지녔고 볼넷이 삼진보다 많을 정도로 선구안도 좋은 데다가 도루왕을 4번이나 차지할 정도의 준족에 수비 WAR도 1.3을 찍을 정도로 수비를 잘 했다.[29][30] 거기다 메이저 최악의 투고타저 시기에 13년 연평균으로 이런 성적을 올렸다! 이러니 메이저리그 올 타임 넘버 원 5툴 플레이어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1961년 4월 30일에 메이스는 밀워키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1경기 4홈런 8타점을 쳤다.[31]
1962년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자이언츠는 다저스에 1경기가 뒤처쳐 있었다(지면 우승 실패). 최종전에서 메이스는 1-1로 맞선 8회말에 결승 솔로홈런을 쳤다. 그리고 다저스가 세인트루이스에게 0-1로 패하면서 3전 2선승제의 타이브레이커 시리즈가 열렸다. 메이스는 1차전에서 샌디 코팩스를 상대로 1회 투런홈런을 치며 코팩스를 칼같이 강판시키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32] 3차전에서도 메이스는 2-4로 뒤진 9회초 1사 만루에서 4득점의 시발점이 된 적시타를 때려냈다. 1951년의 재림이었다.
1965년에는 .317/.398/.645, OPS 1.043/조정 OPS 185 52홈런 112타점 76BB/71K bWAR는 무려 11.2를 기록했다. 이해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그러니 당연히 OPS도 1위), 조정 OPS 1위, 홈런 1위, 루타 1위(360루타)를 차지하며 생애 2번째 MVP에 선정된다. 사실 1964년에도 11.0의 bWAR을 기록했는데 MVP는 겨우 6위였다. 메이스는 1954년(23세)과 1965년(34세)에 리그 MVP에 올랐는데, 그 차이가 무려 11년에 달한다. 사실 메이스는 1957년부터 1966년까지 10년간 단 한 번도 MVP 투표에서 6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또 메이스가 1955년과 1965년에 달성한 2번의 50홈런 사이의 10년이라는 간격 또한 역사상 가장 큰 것이다. 1966년 8월 메이스는 535호 홈런을 치며 지미 폭스를 제치고 루스에 이은 홈런 역대 2위에 올랐다. 1969년 9월에는 루스에 이은 역대 2번째 600홈런 타자(2,557경기/9,514타수)가 됐으며, 1972년 648개 지점에서 애런의 추월이 일어나기 전까지 루스 바로 다음 자리를 지켰다.
여기에 빼어난 수비 솜씨로 중견수 수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전력상 더 강하다고 평가받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상대로 보여준 일명 '바로 그 수비'(The Catch).
영상을 저렇게만 보면 실감이 안날 수 있겠지만, 당시 구장은 뉴욕 시절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즈이다. 폴로 그라운즈의 구조가 어떻냐면...
이렇게 생겨먹은 구장[33]의 센터 가장 깊은 곳으로 날아간 타구였기 때문에 평균적인 외야수가 정상수비를 하는 데 저 정도 타구면
아직도 외야에서 믿기지 않는 호수비가 나올 때마다 해설자들은 늘 윌리 메이스를 언급한다. 수비까지 잘하다니 정말로 Willie could do everything.
메이스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36살을 넘기며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말년엔 정든 자이언츠를 떠나 찰리 윌리엄스와 5만 달러를 상대로 젊은 날을 보냈던 뉴욕에 창단된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어서 활동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가 메이스를 뉴욕으로 보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가 적자를 보며 메이스의 연금을 보장하기 어려웠고 메츠의 구단주가 과거 뉴욕 자이언츠 시절 현지 팬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메이스를 다시 뉴욕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었고 전성기를 지났지만 이런 이해 관계와 추억이 합쳐지며 메이스는 뉴욕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 때문인지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오히려 1973년 월드 시리즈에서 평범한 플라이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등 안 좋은 모습[36]을 보여 미국에서는 은퇴 시기를 놓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스포츠맨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가 36살부터 은퇴하는 42세까지 남긴 성적은 타/출/장 .272/.374/.458 17홈런 57타점 64볼넷 79삼진 fWAR 3.9 bWAR 3.85. 사실 지금 와서 보면 40 언저리 나이에 저정도 성적을 유지하는 메이스가 더 대단해보이는게 사실이지만,[37] 반대로 당시에는 아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 메이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고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메이스는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선수였다. 덕분에 54년도에 첫 올스타를 나간 뒤로 은퇴할 때까지 매년 올스타전에 나갔다. 특히 가장 유명한 것은 뉴욕 할렘 가 아이들과 어울려서 스틱볼을 즐기던 장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먼저 "헤이"(Hey)라고 말을 붙이며 스스럼없이 다가가 어울리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도 The Say Hey Kid.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는 희대의 호타준족이지만, 인품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그야말로 한 몸에 받았다.
5. 사망
2024년 6월 18일, 자이언츠 구단의 공식 성명을 통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 향년 93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간의 릭우드 필드[38] 스페셜 경기를 불과 2일 앞두고 별세했다.[39]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윌리 메이스 | 57 | 337 | 376 | 76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Center Field (1st)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윌리 메이스 | 156.2 | 73.7 | 115.0 |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 71.2 | 44.6 | 57.9 |
7. 평가
5툴 플레이어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선수로, 대체적으로 역대 최고의 반열에 들어가는 선수로 평가받는다. 실제로도 다수의 매체에서는 대체로 베이브 루스를 잇는 2위권의 평가를 받고 있다.단 소수지만 메이스를 최고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이는 타격만 놓고 보면 베이브 루스가 1위지만 주루를 포함하는 플레이에서는 메이스가 1위라는 논지다. 거기다가 수비까지 포함하면 중견수 메이스가 우익수 겸 1루수를 한 루스를 이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다.[40] 또한 메이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루스가 활동한 시기보다는 리그 수준이 높고 상향평준화된 시기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41] 그리고 메이스가 뛰던 1950~60년대는 전형적인 투고타저 시대로, 1953년을 제외한 1951~1973년 중 NL 평균 평균자책점이 가장 높았던 게 4.07(1954년)이었고 가장 낮았던 게 2.98(1968년)이었다. 메이스가 뛴 22년 중 4년을 제외한 18년의 NL 평균 평균자책점이 전부 3점대 이하였다.
행크 애런은 오래도록 사상 최고 야수 순위 최상위권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았지만, 배리 본즈가 루스의 기록을 넘어서자 그에 대항할 성적 격으로 대두된 감이 있다. 일단 타격만 보면 모를까 수비를 합쳐 봐야 하는 야수라면 행크 애런이건 테드 윌리엄스건 외야 수비의 신 메이스의 상대가 안 된다. 선수 시절 두 사람만이 유이하게 젊을때부터 베테랑때까지 특출나게 잘하던 독보적인 흑인 선수였고, 내셔널리그라 자주 서로 타이틀 경쟁자이기도 했고, 실제로 두 사람이 흑인 외야수 선후배로 상당히 절친했기에 주목을 같이 받은 적이 많아서 그렇다. 같이 올스타만 10번을 나갔다. 단, 둘이 인터뷰할 때도 항상 메이스가 근소 우위의 포지션을 잡곤 했다. 타격이 비슷하던 시즌일지라도, 일단 둘다 전성기일때 메이스가 꾸준히 중견수였고, 애런은 좌익수였기에 이미 거기서 한 클래스 차이가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연히 메이스도 애런이 동시대에 자기 다음 자리로 위대한 선수라는 포지션은 꾸준히 인정해줬으므로[42] 애런이 부족하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또한 애런과도 마찬가지로 어니 뱅크스와 같이 시대를 관통한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들 중 하나로 모두 긍정적이고 성실한 성격과 훌륭한 성적으로 인종차별을 뚫어낸 상징적 인물이다.
또한 상술된 3,000안타-500홈런을 두번째로,[43] 300홈런-300도루/10GG-500홈런/10GG-3,000안타를 최초로 달성한 메이스는 역사상 유일한 10GG-3,000안타-500홈런 달성자이며, 이는 메이저 리그 불멸의 기록 중 하나로 남을 확률이 높다. 저 세가지 중 하나만 달성하는 것도 어려운데 모두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44]
메이스는 역대 중견수들 중에서 홈런/장타/bWAR/골드 글러브 개수 1위, 득점/타점 2위를 기록했다. 거기다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메이스는 선수생활의 95% 이상을 중견수로만 출장했기 때문에 저 성적들 대부분이 중견수로서 이룬 것이다. |
데드볼 시대의 야구 황제 타이 콥은 야구감독도 그만두고 야구계를 떠난 말년에 메이스를 향해 "야구장에 돈 주고 보러 가는 걸 안 아깝게 만드는 선수"라는 극찬을 한 적이 있다.[46] 샌디 쿠팩스는 "베이브 루스는 메이스처럼 달리지도 못했고, 수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메이스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47] 또한 올스타전, 월드 시리즈 이외엔 아메리칸 리그와 교류가 없던 시기에 동시대의 대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윌리 메이스를 보기 위해 올스타전에 참가했다고 말하면서 메이스를 보는 것이 올스타전의 취지라고 할 정도로 그를 극찬했다. 레지 잭슨은 은퇴하면서 나는 윌리 메이스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켄 그리피 주니어와 배리 본즈 역시 메이스를 목표로 하면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인기도 매우 많은 선수였다. 미국 동쪽 끝인 뉴욕에 있던 자이언츠가 지리적으로 정 반대인 서쪽 끝의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고도 인기를 유지하게 해준 공로자다.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특별히 문제될 일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인간적인 요소들이 테드 윌리엄스/배리 본즈와 메이스의 차이라고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포스트시즌에서 상당히 부진했다는 점, 우승을 한 1954년에도 타출장 .286/.444/.357이고 홈런도 못쳤다.
8. 미디어
이제 한국에서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려나 싶은데,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애니메이션이 있다. 아예 극중 이름도 윌리 메이스이며 성우도 그가 직접 맡았다. Willie Mays and the Say-Hey Kid라는 애니메이션으로 1972년 10월 14일에 미국 ABC에서 방송했으며 한국에선 야구왕과 천사라는 제목으로 1984년 5월 26일 일요일 아침 8시에 KBS1로 딱 1번 더빙 방영했기에 아는 사람이 적다!극중 야구선수 윌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죽어 맡을 사람이 없기에 친구의 외동딸인 베로니카를 맡는데, 이 아이가 윌리 아저씨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기특하지만, 어린아이라 그런지 뜻하지 않게 민폐를 끼친다. 게다가, 베로니카가 부르면 나타나는 백인 수호천사조차도 윌리를 돕는다고 하면서 결과는 엉뚱하게 만드는 골칫덩어리다. 한술 더떠, 베로니카가 키우는 이구아나도 사고뭉치라 경기장에서 데려오니 공을 먹이인지 알고 먹으려고 하는 통에 공에 붙지 않나, 베로니카가 씹던 풍선껌 때문에 공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나, 수호 천사의 엉터리 마법으로 오히려 경기를 말아먹는다. 이래놓고, 나 때문에 경기 잘되지~라며 되려 적반하장으로 뻐기는 수호 천사. 그럼에도 이런 역경을 헤치고 월드 시리즈를 우승한다! 무서운게 이런 고난을 당해도 화도 일절 안 내고 야구경기만 하는 극중 윌리 메이스. 1970년 초반에 드물게 흑인이 주연인 애니메이션이었다.
한국어 더빙에서 김도현이 윌리 메이스를, 베로니카는 주희, 수호천사는 황원이 맡았다.
더불어 애니 감독을 맡은 건 아서 랜킨 주니어(1924~2014)와 줄리 바스(1935~2022)로 바로 무적의 실버호크, 무적의 왕자 라이온,공룡아 불을 뿜어라나 마지막 유니콘, 반지의 제왕 애니판인 돌아온 왕이라든지, 호빗 애니메이션을 감독한 바 있다.
9. 여담
- 메이스가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상대는 18개를 내준 워렌 스판이다.
- 그의 등번호 24번은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이며, 이 등번호는 재키 로빈슨의 전 구단 영구결번 42를 뒤집은 번호인 점도 있다보니 모든 선수들이 가장 선호하는 번호 중 하나다. 배리 본즈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에 이 번호를 달았고[48], 그 외에도 그래디 사이즈모어, 켄 그리피 주니어, 리키 헨더슨, 미겔 카브레라 같은 선수들이 이 번호를 달았다.[49] 이후 2022년 8월 27일, 뉴욕 메츠에서도 그의 2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한 기자의 질문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그가 뛰었던 기간' 동안 제일 위대한 선수는 누구인 걸로 생각하냐는 질문이었으며 이에 메이스는 "저였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답변을 했었다. 당연히 이런 메이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보였던 플레이와 인성적으로 매우 뛰어난 모습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2016년 자신의 85번째 생일에는 메탈리카가 선창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홈 팬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 2017년부터 월드 시리즈 MVP에게 주어지는 상의 이름을 윌리 메이스 상으로 지정하였다. 다만 메이스의 포스트시즌 성적은 썩 좋지 못한 편인데, 우승을 한번 하긴 했으나 준우승 3번에 포스트시즌 통산 타격 기록도 .247/.323/.337에 불과하다. 1954년 월드 시리즈의 명수비 장면 이미지가 강해서 이름을 지정받은 것이 중론.
-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79년부터 1985년까지 MLB에서 영구제명 조치됐던 적이 있다. 이유는 카지노 골프장에서 안내인으로 일하고 있는 걸[50] 보위 쿤 커미셔너가 도박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에 종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자 메이스가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영구제명 조치를 취했던 것. 미키 맨틀 역시 비슷한 이유로 영구제명 조치를 당했다. 이후 후임 커미셔너인 피터 위버로스가 1985년에 영구제명 조치를 해제했다. #
- 당시 금지약물이 아니었던 암페타민 의혹이 있다. 뉴욕 메츠의 외야수였던 존 밀너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락커는 암페타민 사탕인 그리니스 창고였다고 하며 누구나 가져가서 먹을 수 있었다고. # 행크 애런 역시도 그리니스를 한 움큼씩 먹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니...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대에는 암페타민이 금지약물이 아니었기에 합법적인 행동을 한거고, 스테로이드 시대에 PED가 걸린 선수들은 규정에 명시된 금지약물을 먹은 위법적인 행동을 한 것인 만큼 이러한 논리로 PED 복용자들을 옹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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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볼린 | 후안 마리샬 | 제프 브랜틀리 | 잭 클락 | 마이크 맥코믹 | |
밥 브렌리 | 존 버켓 | 스튜 밀러 | 바비 본즈 | 올랜도 세페다 | |
랜디 모핏 | 그렉 민튼 | 케빈 미첼 | 윌 클락 | 마이크 크루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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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윌슨 | 라이언 보겔송 | 피터 맥고완 | 밥 루리 | 헌터 펜스 | |
마이크 머피 | 제레미 아펠트 | 산티아고 카시야 | 하비에르 로페즈 | 서지오 로모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윌리 메이스 | |
헌액 연도 | 1979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94.7% (1회) |
윌리 메이스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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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름 | 윌리 메이스 Willie Mays | ||||||||||||||||||||||||||||||||||||||||||||||||||||||||||||||||||||||||||||||||||||||||||||||||||||||||||||||||||||||||||||||
포지션 | 외야수 | |||||||||||||||||||||||||||||||||||||||||||||||||||||||||||||||||||||||||||||||||||||||||||||||||||||||||||||||||||||||||||||||
득표수 | 1,115,896 | }}}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1954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1954 |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1959² | 1960 |
1960² | 1961 | 1961² | 1962 |
1962²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195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 → |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 → |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
196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켄 보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
195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신인왕 | ||||
샘 제스로 (보스턴 브레이브스) | → |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 → | 조 블랙 (브루클린 다저스) |
1957년 첫 수상 | → |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 → | 지미 피어설[AL] (보스턴 레드삭스) 윌리 메이스[NL]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958년 ~ 196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중견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바이더 핀슨 (신시내티 레즈) |
196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월리 문[LF]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윌리 메이스[CF]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행크 애런[RF] (밀워키 브레이브스)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바이더 핀슨 (신시내티 레즈)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빌 버든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96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바이더 핀슨 (신시내티 레즈)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빌 버든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963년 ~ 196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빌 버든 (피츠버그 파이리츠)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신시내티 레즈) 커트 플루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71년 첫 수상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브룩스 로빈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54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타격왕 | ||||
칼 푸릴로 (브루클린 다저스) | → |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 → | 리치 애시번 (필라델피아 필리스) |
195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 ||||
테드 클러주스키 (신시내티 레즈) | → |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 → | 듀크 스나이더 (브루클린 다저스) |
196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 ||||
올랜도 세페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행크 애런 (밀워키 브레이브스) |
1964년 ~ 196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홈런왕 | ||||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행크 애런 (밀워키 브레이브스)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행크 애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1956년 ~ 195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도루왕 | ||||
빌 브루튼 (밀워키 브레이브스) | → | 윌리 메이스 (뉴욕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모리 윌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레온 와그너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자니 칼리슨 (필라델피아 필리스) |
토니 페레즈 (신시내티 레즈)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보유 기록 | |
올스타전 통산 최다 타석/타수 | 82타석/75타수 |
올스타전 통산 최다 안타 | 23개 |
올스타전 통산 최다 3루타 | 3개 |
올스타전 통산 최다 득점 | 20득점 |
올스타전 통산 최다 도루 | 6도루 |
통산 최다 중견수 풋아웃 | 7,024회 |
통산 최다 외야수 풋아웃 | 7,095회 |
단일 경기 최다 홈런 | 4홈런 |
최다 SB% 1위 시즌 | 5시즌 |
1958년 5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신설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스탠 뮤지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프랭크 토마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
1958년 9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루 버데트 (밀워키 브레이브스)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행크 애런 (밀워키 브레이브스) 하비 해딕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
1963년 8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빌리 윌리엄스 (시카고 컵스) |
1965년 8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신시내티 레즈) |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후안 마리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 니그로리그 소속 팀[2] 1953년 메이스는 군복무로 경기에 뛸 수 없었고 팀은 1958년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이전했다.[3] 하지만 디마지오의 통산 WAR은 메이스의 절반에 불과하다.[4] 윌리 메이스가 뉴욕 자이언츠에 데뷔했던 시기부터 5년간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았던 감독.[5] 이중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윌리 메이스에 대해 말할 때 야구계에서 계속 인용되곤 한다. 참고로 레오 듀로셔 감독은 윌리 메이스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던 신인 시절에도 "윌리가 요리만 할 수 있다면, 난 그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인터뷰도 남겼을만큼 감독-선수 관계를 넘어 윌리 메이스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한 팬이었으며, 디마지오는 메이스가 데뷔한 해에 은퇴한 선수로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고 오히려 듀로서가 선수생활하던 시기에 전성기를 시작했던 선수다.[6] 루 게릭과 메이스만 가진 기록.[7]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함께 아직도 깨지지 않은 외야수 최다 골드 글러브 기록 공동 보유자이다. 그것도 그가 한창 선수 생활을 하며 뛰어난 수비 능력을 이미 인정받던 중에 골드 글러브가 생긴 거라 더 일찍 생겼으면 당연히 더 많이 수상했을 것이라 평가된다. 이건 야만없도 아닌 게 그는 골드글러브 제도가 생기기 전에 MVP제도만 있어서 내셔널리그 MVP를 받았다. 그러니 골드글러브가 있었으면 당연히 받았을 수 밖에 없다.[8] 많은 야구팬들은 메이스가 시대만 잘 탔더라면 배리 본즈만이 기록한 400홈런 - 400도루도 달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500홈런-500도루도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사실 350-350도 본즈만이 유일한 기록이고 가장 가까운 선수가 메이스다.[9] 참고로 윌리 메이스의 도루 성공률은 76.644퍼센트로서, 행크 애런의 76.677퍼센트보다도 낮다. 그러나 메이스의 도루 성공률은 세이버매트릭스 관점에서 봐도 충분히 생산적인 도루 성공률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도루에 목을 맬 정도로 높은 수준은 아니었고, 메이스는 애초에 도루를 할 시간에 장타를 더 때려내는 성격이었다.[10] bWAR은 역대 5위, fWAR은 역대 3위.[11] 루스도 1위를 10번 해서 동률이고 이 둘 다음으로는 7번씩 한 로저스 혼스비, 월터 존슨, 사이 영이 있다.[야수] 야수들만 포함한 시즌 1위 횟수는 11회이고 동률로는 루스, 본즈, 혼스비, 호너스 와그너가 있다.[13] 1호 가입자.[14] 메이스와 행크 애런, 에디 머레이, 라파엘 팔메이로, 알렉스 로드리게스, 알버트 푸홀스, 미겔 카브레라.[15] 메이스는 338도루, 행크 애런은 240도루, 미겔 카브레라는 40도루.[16] 35홈런은 10번.[17] 메이스: 12GG+3,283안타, 알 칼라인: 10GG+3,007안타, 로베르토 클레멘테: 12GG+3,000안타, 스즈키 이치로: 10GG+3,089안타.[18] 메이스: 12GG+660홈런, 슈미트: 10GG+548홈런, 그리피: 10GG+630홈런. 최초의 달성자이기도 하다.[19] 당연히 피삼진 1위는 안 하는 게 이득이므로 타점왕과 2루타왕만 못 해봤다고 보면 된다. 2루타왕은 못 해봤지만 상술했듯이 통산 2루타는 523개나 된다.[20] 사실 윌리 메이스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배리 본즈도 홈런과 도루는 달성했는데 안타가 2,935개라서 아깝게 달성 못 한 경우이다. 게다가 도핑 전력이 있어 그나마도 인정을 못 받는다.[21] 그래서 밤비노의 저주는 허구라고 해도 인종차별의 저주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왜냐면, 보스턴은 이런 식으로 재키 로빈슨도 놓쳤다. 재키 로빈슨이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있을 때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확성기로 '저 깜둥이 새X들을 당장 내보내지 못해?!'라며 크게 소리쳤고 로빈슨을 비롯한 흑인 선수들은 전부 도망쳐야 했다. 레드삭스 구단은 이 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가 50년 뒤인 1995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흑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950년대말 전성기를 연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보스턴은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늦은 팀이고, 그들의 라이벌 양키스는 상대적으로 빠른 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22] 역시 보스턴과 함께 오랫동안 우승을 못하기로 유명했던 시카고 컵스도 메이저리그 초기 흑인 선수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그럼 어니 뱅크스는 어떻게 들어왔지? 그래서 이것도 인종차별의 저주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23] 9를 넘긴 건 9번.[24] 이 1홈런은 워렌 스판에게 얻었다.[25] 사실 34경기에 출장한 21살 때 OPS는 .736(OPS+ 102로 거의 평균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테드 윌리엄스보다는 큰 손해는 아니다. 그러나 복귀한 메이스가 거의 40홈런 100타점 페이스였기 때문에 루스의 홈런 기록에 도전했을 수도 있다고 볼 여지가 있고 2,000타점 달성은 거의 확실했을 것이다.[26] 놀라운 점은 수비 WAR만으로 2를 채웠다는 점이다. 그의 수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수치.[27] 공격 WAR 8.2 + 수비 WAR 1.3[28] 정확히는 데뷔 이후 딱 8년 정도 이 수준, 혹은 이보다 살짝 덜한 수준의 성적을 올렸다. 다만 트라웃은 수비력에서 메이스에 밀리는데다 내구력이 생각보다 나쁘고 에이징커브도 비교적 빨리 와서 메이스급으로 평가받지는 않는다. 동갑에 동시대에 뉴욕에서 활약한 또다른 중견수인 미키 맨틀 역시 이 정도 성적을 전성기인 1952-1964시즌의 13시즌동안 올려서 비슷하게 평가받기도 하나, 후대의 마이크 트라웃과 마찬가지로 부상이 많은 유리몸인데다 수비력+롱런 면에서 메이스에게 크게 열세이다.[29] 57년도부터 68년도까지 12년 연속 골드 글러브 수상.[30] 골드 글러브는 57년도부터 생겼음에도 저런 기록을 낸것이다. 만약 더 일찍 골드 글러브가 생겼다면 역대 외야수 골든글러브 단독 1등도 가능했을 것이다.[31] 2연타석 홈런+플라이 아웃+2연타석 홈런이라 4연타석 홈런은 아니다. 상대 팀의 행크 애런도 2홈런을 쳤지만 자이언츠는 브레이브스를 14:4로 대파했다.[32] 1이닝 3실점.[33] 어쩌다 이 모양이 됐나면, 애초에 야구가 아닌 폴로와 미식축구를 하려고 만들었기 때문. 때문에 양 옆은 100m는 커녕 90m도 안되어 펜웨이 파크의 페스키 폴 마냥 짧은데 그 뒤로부터는 부채꼴이 아니라 사각형으로 생겨먹어서는 길기만하다…[34] 실제로 이 타구는 거의 430피트 정도를 날아갔다고 하는데, 430피트면 미터법으로 환산 시 130미터이다. 이 비거리의 타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광활한 외야를 가지고 있는 잠실 야구장 중앙 펜스도 넘기며, 미국에서 윌리 메이스가 현역 시절 뛰었던 소속팀의 현재 홈구장인 오라클 파크의 우중간 128m짜리 담장도 넘긴다. 오히려 저렇게 생겨먹긴 구장이었기 때문에 워닝트랙에서 잡힌 것.[35] 역시 구장 구조 때문에 저 깊이에서는 잡혀도 2루주자가 홈까지 태그업하는 경우가 있었다.[36] 선수시절 막바지인 37세부터 그의 수비 WAR는 마이너스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메이스조차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던 셈.[37] 보통 MVP 컨텐더 커트라인을 WAR 6.0정도로 잡는데 메이스는 37세 시즌인 1968년에 fWAR 6.7, bWAR 6.3 OPS+ 153 wRC+ 160, 40세 시즌인 1971년에 fWAR 5.9 bWAR 6.3 OPS+ 160 wRC+ 157을 기록했다. 나이 30대 후반, 40대에 MVP 컨텐더급 활약을 한 것이다(...). 아울러 마지막 7년 간 WAR 27을 쌓았는데, 이는 브라이스 하퍼가 젊고 쌩쌩한 서비스타임 7년간 쌓은 WAR와 비슷한 수치다. 지금이었으면 40대에도 이런 활약을 보여주는 점에 대해 오히려 평가가 더 올랐을지도 모른다.[38] 메이스의 프로 데뷔 구단인 버밍햄 블랙 바론스의 홈구장이었다.[39] 불과 하루 전인 17일 자이언츠 구단을 통해 릭우드 필드 경기를 건강상의 이유로 직접 가지는 못하고 집에서 경기를 시청할 예정이며 경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성명을 냈지만, 결국 경기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40] 물론 투수를 포함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베이브 루스는 저 유명한 월터 존슨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왕을 했던 엄청난 투수이다. 데드볼 시대에는 투수 겸 홈런왕이라는 괴이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18년 투수로 166이닝을 던지고 평균자책점 2.22를 기록하며, 11홈런으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이 되었다. 투수 시절 포스트시즌에서도 투수로 뛰어서 팀을 우승시켰다. 따라서 투수를 포함할 시 다시 루스의 우세가 된다.[41] 흔히들 루스를 찬양할 때, 투수 기록을 첨가하며 이런 선수는 전무후무했다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당시 대타자 중 하나인 조지 시슬러도 투타 겸업을 했었고, 월터 존슨을 상대로 완봉승을 따내는 등 수준급의 투수였다. 그만큼 선수 뎁스가 얇았다는 것이다. 루스의 시대에는 흑인들이 니그로리그에서 따로 뛰었지만 메이스는 본인부터 흑인이기도 하다.[42] 서로 흑인선수로 의지한 게 매우 크긴 하다. 당시는 메이저리그의 인종차별이 굉장히 심했다. 메이스와 애런이 대스타가 되고 나서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메이저리그 내(선수, 코치, 심판 등) 은근한 차별은 물론, 종종 팬들에게 심한 인종차별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일반인이면 마음의 상처로 정신을 다칠 수도 있는 매우 악질적인 일들을 당한 적도 있었다. 애런이 루스 홈런기록을 깰 때도 단순히 루스를 동경했던 사람들 말고, 대기록 깨는 선수가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 싫어해서 괴롭히려고 하는" 협박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로저 매리스는 야구언론이 기사로 괴롭히거나 팬들이 야구장에서 욕하고 야유하는 정도 위주였지만, 애런은 그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너를 죽이겠다", "니 가족을 죽이겠다", "니가 기록 깨는 날 흑인을 아무나 죽이겠다" 등 별의별 끔찍한 협박을 다 당했다. 당시 미국 경찰들과 구단 전체도 긴장했을 정도니 애런의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그 흑인 진출 초기인 당대에 10년 이상 꾸준히 특출난 흑인 선수가 투타를 다 찾아 봐도 그들말고는 있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외로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한 세계에 단 둘뿐인 애런과 메이스의 존재는 서로에게 매우 소중했고, 서로 경쟁심보다는 열심히 격려하는 쪽을 택하곤 했다. 사실 기자들도 그런 식의 인터뷰 유도를 많이 하기도 했다.[43] 첫번째인 행크 애런이 1970년 5월 17일, 메이스가 1970년 7월 18일.[44] 2021년 3월 기준으로 메이스를 제외한 3천 안타-500홈런 기록자 5인의 골드 글러브는 머레이 3개+푸홀스 2개+애런 3개+로드리게스 2개+팔메이로 3개로 다 합쳐야 13개다. 다음 기록자가 될 것이 유력한 미겔 카브레라는 골드 글러브를 1번도 못 받았다.[45] 보통 2위지만 못해도 5위 안에는 들어간다.[46]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타이 콥이 위대한 선수라고 극찬한 흑인 선수는 윌리 메이스와 로이 캄파넬라뿐이다.[47] 샌디 코팩스는 메이스에게 정규 시즌도 그렇고 1962년 플레이오프에서도 2런을 맞고 강판당하는 등 약한 면이 있었다.[48] 자이언츠 이적 후에는 이 번호가 영구결번이라 25번으로 바꿔 달았다.[49] 이 중 켄 그리피 주니어, 리키 헨더슨은 명전을 갔고 그들의 24번 역시 영구결번이 되었다. 미겔 카브레라 역시 별 일이 없는 한 은퇴 후 명전과 영구결번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 여러모로 야구계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포진한 번호라 할 수 있겠다.[50] 주로 VIP 고객을 상대로 같이 골프를 쳐주거나 팬 서비스를 해주는 일을 했다고 보면 된다.[AL] [NL] [LF] [CF] [R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