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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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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스웜 전술
, 유목민족
,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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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강점3. 한계
3.1. 부족한 식량3.2. 느린 인구 회복3.3. 공성전에 취약3.4. 낙후된 기술발전
3.4.1. 불안정한 정치3.4.2. 미약한 정체성3.4.3. 도태되는 기병
3.5. 농경 세력의 기병 확보3.6. 정주민화
4. 유목 제국 목록
4.1. 동아시아, 중앙아시아4.2.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4.3.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유목 국가4.4. 유목 제국이기도 했던 국가
5. 유목 제국으로 잘못 알려진 국가6. 관련작품7. 같이보기


遊牧帝國, Nomadic empire

1. 개요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족이라고 알려져 있다.[1]

2. 강점

기원전 8세기경부터 준가르가 멸망한 서기 18세기 무렵까지 이들은 동서양을 통틀어 최강의 무력 집단이었다.

이는 기병이라는 병종이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기병은 강한 충격력, 고기동성을 바탕으로 중세, 심지어 전쟁에 화약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근세 및 근대 초기까지도 강한 전투력을 뽐낸 무적의 병종이었다. 그런 반면 기마술의 훈련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생후 바로 기마술과 궁술(수렵), 투창술, 독도법[2] 등의 당시 전쟁과 매우 밀접했던 분야의 기술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던 유목민들의 환경이 그들을 중근세 최강의 병사로 성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유목민은 평상시에 일상 생활인 목축을 하다가도 전시 상황에는 곧바로 기병, 그것도 중근세 전투기술에 매우 능한 정예 기병으로 순식간에 전환될 수 있었다. 농사가 주업인 정주민들이 기마술과 궁술에 일부러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서 배워야 하는것과 비교하면 유목민족은 처음부터 강력한 기병 전력을 갖추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다. 전투 인원의 대부분이 숙련된 기병인 장점을 이용한 스웜 전술 같은 강력한 전법들도 창안되어 유목민족은 당대 최강이 될 수 있었다.

기병 위주의 강력한 전투력 이외에도, 유목제국의 배경이 되는 척박한 환경 자체가 방어적인 측면에서 강점으로 작용했다. 농경이 불가능한 기후나 지형적인 요건 때문에, 전근대의 정주민 국가는 근본적으로 유목민들의 활동영역을 내지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막이나 초원으로 군대를 원정보낸다는 것 자체가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는 일이었으며, 그렇게 출진한 원정군이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고 보급의 부담을 현지에 분산하는 것 또한 요원한 일이었다. 이렇듯 땅을 점유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유목제국의 발단이 되는 유목민 세력들의 인적자원을 손상시키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원정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하게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원정군을 고사시키고 목적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인 방어에 힘입어서, 전근대의 정주국가들은 양적 우위로 유목제국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유목민들을 완벽한 통제의 영역으로 들일 수 없었고, 새로운 유목제국의 탄생을 막을 수 없었다. 유목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자 시도했던 정주국가들은 대부분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원정의 후유증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은 쇠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나 전근대 시대에는 경제력이 곧 군사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인프라시설의 한계로 인해 도시라고 해 봐야 100만이 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생필품이나 마찬가지인 유목민들의 병기에 비해 정주민들의 병기는 돈 까먹는 귀신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구성원의 대부분이 병력으로 환산되는 유목민 vs 도시, 마을 거주민의 극히 일부만이 병력이 되는 정주민 국가의 국지적 대결은 유목민이 되려 물량으로 압도하는 그림이 나오기도 했다.

3. 한계

3.1. 부족한 식량

유목 제국 발전을 저해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자원, 특히 식량의 부족으로 사회 발전이 더뎠다. 유목 문서를 참조해 보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대다수 유목민족이 정주민족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이 스텝, 사막농업에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3] 일반적으로 에너지는 생산자와 최종소비자의 간격이 짧을수록 전환 효율이 높다.

같은 크기의 땅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각 단계에서 50%의 에너지 비효율이 발생한다고 가정하면 정주민은 50%, 유목민은 25%의 에너지만 얻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목초지의 풀보다 논밭의 곡식 쪽의 에너지 생산량(탄수화물)이 월등하다.[4] 욕구계층이론과 같은 심리학만 봐도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배고픔 등의 기초적 생리욕구가 달성되어야 보다 상위적 가치를 가진 것들(학문, 지식, 문화, 국민의식 등)이 발전하게 되는데, 목축을 기반으로 한 유목민들은 정주민에 비해 그럴 여지가 상당히 적었다.

3.2. 느린 인구 회복

흑사병이 유라시아를 한번 휩쓸어버렸을 때, 정주세계는 인구가 대폭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빠르게 복구했다. 하지만 유목세계는 한번 줄어든 인구를 복구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이 걸렸고, 이것이 화약의 시대와 겹치면서, 빠르게 발전하는 정주세계를 따라잡을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흑사병이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서 퍼져나갔고 결국 실크로드 무역이 박살나 버리고 말았다.

3.3. 공성전에 취약

평원과 초원에서만 지내고, 주기적인 이동생활을 하며 기병 위주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보니 전통적으로 기병의 역할이 크게 제한되는 공성전과 산악전, 해상전에 약했다. 특히 정복 전쟁에서는 공성전에 약하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다만 이 문제는 점령 지역을 통해 공성 무기를 들여오거나 우수한 기동력으로 보급선을 끊는 식으로 어찌저찌 해결할 수 있었다. 숱한 유목제국이 있었지만 정주민의 성을 무너뜨린 예는 아주 많다. 몽골 역시 이슬람 기술자를 동원해 회회포로 공성전을 수행한 바 있다.

3.4. 낙후된 기술발전

유목 제국은 정주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보존할 수단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대량의 문서는 필연적으로 부피와 무게를 차지하므로 유목민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때문에 유목민의 지식 전달은 구전으로 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방법으로는 지식 생산의 한계가 있다.[5]

3.4.1. 불안정한 정치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세련된 교육학, 정치학 같은 과학,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는 학문이 없었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는데, 이는 국가의 운영에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몽골 제국은 과격한 환경주의자[6]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문명을 부수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다녔다. 이는 정치학, 경제학에 지식이 있었다면 '인구는 국력'이라는 기초적 상식 아래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유교의 '장자 상속'이니 중세 유럽의 '살리카 법'이니 하는 것들은 문화를 쌓아올린 정주민들이 권력의 계승 과정에서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 한정된 힘의 최대 집중화 방법에 대해 최대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유목민족의 대부분은 힘있는 자가 최고인 '약육강식'부터 해서 균등 분배 같은 부족 단위로는 합리적일지 몰라도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형편없는 권력 계승 방법을 버리지 못하였다. 약육강식의 부족제 때문에 왕위를 둘러싼 세력다툼이 걸핏하면 일어나 정치가 안정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내분이 발생하여 이는 유목제국이 자멸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3.4.2. 미약한 정체성

또한 학문적, 사상적 발전에서도 뒤쳐졌다. 물론 이들에게도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주민들의 문화가 '거대 제국'의 유지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였던 것과는 달리 유목민들의 문화는 소규모 집단의 경영에 특화된 문화였기 때문에 유목민들만의 지식으로는 유목 '제국'을 통치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피정복민의 문화와 지식을 이용해야 하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이게 역으로 동화작용을 일으켜버린 것이다. 정주민들의 잉여 생산물은 정주민 지배계층에게는 다소 당연한 것이었으나, 매번 척박하게 살던 유목민들에게는 아닌 밤중에 떨어진 엄청난 부와 재보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문화적으로 불리한 유목민들은 금세 정주민의 문화와 재력에 편승하여 유목민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이는 바로 드러났는데, 원래 유목민들이 대부분 본래 믿던 텡그리 신앙이란 것은 거의 구전설화, 민속신앙 수준으로 빈약했기에 어딜 정복하든 정복지의 종교에 바로 동화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빠르게 잃는데에 일조했다. 근대에 종교가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에 일반적인 문화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단걸 감안하면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7]

3.4.3. 도태되는 기병

유목민 입장에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로 정주민이 기술발전과 혁신을 이루고, 그 결과로 다양한[8] 무기가 발전할수록 병사 개인의 숙련도가 적게 필요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병력은 어쨌든 오랜 유목 생활, 고도의 기병훈련을 해야 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정주민이 가진 화승총병, 포병은 어지간한 신참도 1~2년 정도, 혹은 그보다 더 짧은 기간동안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면[9] 곧 바로 유의미한 전투병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극단적 예시를 들면 중세의 역전노장의 기사가 논산훈련소 갓 나와서 K2 소총을 든 신병과 1대1로 싸운다고 하면 기사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하건 접근 해보기도 전에 말과 함께 벌집이 되어 나뒹굴 것이다. 이는 초탄이 빗나가면 해볼만 했던 머스킷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십, 수백명의 보병이 전열을 짜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과거에 명성을 떨쳤던 기병들은 제대로 접근조차 못 한 채 학살 당하기 일쑤였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인구수와 정비례한다. 목축도 농업처럼 발전 해오긴 했지만 애당초 목축이나 유목 따위가 인구부양력이 적은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당연히 농업에 비하면 부양 가능한 인구가 태생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농업의 발전으로 정주국가의 인구는 수십배가 늘어나는 동안 유목민의 인구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저울은 정주민측에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져버렸다. 과거에는 100명의 유목민 기병이 사망자 10명을 내고 2000명의 정주민 보병을 죽였다. 그런데 다음 날, 유목민 기병은 10명 보충되었는데, 정주민 보병은 5000명 보충되었다. 이미 머릿수에서부터 승부가 난 셈이었다. 거기에 더해 정주민 보병은 1년의, 혹은 그보다 짧은 시간의 전투 훈련만 해도 되지만, 유목민 기병은 수년에 걸친 전투 훈련을 해야하는 상황. 그렇다고 정주민에게 기병이 없느냐면 그것도 아니라 정주민의 경제력으로 작정하고 투자하면 물량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나마 유목민에게 남았던 개개인의 전투력마저 기술의 발전으로 상쇄 되었다. 정주민 보병들은 먼 거리에서 조준한 채 방아쇠를 당기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맞기만 하면 한방에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초창기의 총기는 불발도 심하고 한번 쏘면 장전에 시간이 걸리므로 그 틈을 노려볼 수라도 있었다. 하지만 총기는 빠르게 발전하여 기관총의 등장 이후로는 오히려 1개 분대 가량의 정주민 보병에게 수백명의 유목민 기병대가 학살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통적인 기병대는 전장에서 완전히 퇴출 되는 마당에 유목민 군대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나마 기병들에게 남는 자리는 동부전선이나 러시아 내전 같은 드넓은 전장에서 빠른 기동이 필요할 때 정도였다. 그마저도 자동차의 발전으로 기존의 기병 부대는 빠르게 차량화/기계화 사단으로 대체 되었다. 석유만 넣으면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와는 다르게 살아 있는 생명체인 말은 단점이 너무 많았을 뿐더러 순수한 성능마저도 비교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주역으로 등장한 냉전기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유목제국들은 이미 19세기에도 더이상 전쟁사의 주역으로 서지 못 하고 변방으로 전락 했다. 한 때 온 중국이 국력을 총동원 하여 방어 해야 했던 몽골마저도 20세기엔 한낱 지방 군벌에게 몽골 전체가 정복되었다.

3.5. 농경 세력의 기병 확보

또한 정주민이 작정하고 기병을 키우면 그 기술력과 생산력 때문에 유목민들은 또 한계를 겪게 된다. 단적인 예로 흉노에 시달리던 전한한무제 때에 이르러 수십만의 보병에 목초지를 증가시켜 10만 단위의 기병을 흉노와의 전쟁에 투입하여 정면으로 승부를 벌인 끝에 선우의 권력을 파괴해 유목민족들을 분열시켰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공포의 기병대장으로 알려진 조아킴 뮈라와 그 기병은 정주민족의 국가 프랑스에서 나온 군대이며, 역대 최강의 기병대 중 하나로 알려진 윙드 후사르 역시 정주농경 국가인 폴란드의 정예기병이었다. 당장 말에게 먹일 사료도 없어서 방목하며 키운 유목민과 달리 정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남은 잉여 작물이나 여물도 있었고, 또는 아예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해 재배한 귀리 같은 것도 있었다. 당연히 풀만 먹인 말과 사료를 먹인 말의 체격 차이는 안 봐도 비디오였고 때문에 유목민은 일시적인 동원력으론 정주민에게 앞설지 몰라도 정주민이 유목민의 씨를 말려버릴 작정으로 나갔다면 기병 전력에서도 현저히 밀리게 된다.

물론 유목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것도 약간 편견인데, 유목민들이라고 가난해서 중장기병을 키우지 못하는 건 아니다. 거란족이나 몽골 제국의 중장기병들 역시 무시무시한 명성을 떨쳤다. 본인들의 생산력이 낮아도 부유한 남의 자산을 털면 되기 때문이다.[10][11] 그리고 애초에 유목민은 목초지만 가지고 있다면 먹일 사료를 구할 필요도 없이 거친 환경에 방목만 해서 키워도 말 사육이 가능하다. 즉, 정주민 국가에 비해 말을 육성하는 돈이 훨씬 적게 든다는 것. 게다가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말을 사육하는 방식은 거세한 뒤에 거친 자연환경에서 키우는 방식인데, 이 방법으로 키울 시에 전쟁에서 말이 배고픔을 이겨내는 법도 터득하며, 심지어 사람과 같이 매복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엄밀히 따지면 유목제국의 주력인 기병들은 대체로 무장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경기병 위주로 군제가 편성 된 건 사실이다. 중장기병은 충돌력이 월등히 강하지만 기동에서의 민첩성이 떨어지는 탓에 넓은 초원에서의 작전 활동을 다른 부대와 원활하게 연계하기가 난감했고, 갑옷과 마갑을 만들기 위한 철의 확보도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의 여진족이나 고구려처럼 철강 확보가 용이한 지역에 자리 잡았으면 모를까 철강과 그외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목민족도 우호적인 농경정주민족과 활발히 교역을 해야했다.[12] 또 단순한 소규모 약탈이 아닌 대규모 물자 확보를 위해 타국을 압박하려면 유목민족도 여러 부족이 대대적인 통합을 해야만 했다.[13] 유목민족에게 목축에 대한 비용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낮은 건 맞으나 농경민족이 유목민에 대해 대대적인 군사적 반격을 하기 위해 여러 조건이 필요한 것처럼 유목민족이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철갑으로 중무장까지 하려면 마찬가지로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정주민 국가들 중에서도 중앙집권이 자리잡아 효율적인 군 동원이 가능한 경우에 한하며, 유목제국 등이 평상시의 군사력에선 윗문단에서 정주민 국가들의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무기의 발달을 보듯이 19세기 이전까지는 정주민 국가들을 압도하는건 맞으며 19세기 이후부터는 역전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철도 같은 발명품이 나타나며 정주민이 유목민 지역에 반영구적인 정착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정주민 제국의 원정대가 보급품이 떨어져 집에 가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존버 전략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3.6. 정주민화

유목 제국들은 저마다 문화나 민족의 구성등에서 차이가 있긴 했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후기로 갈수록 유목민 비율이 줄어들고 정주민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정주하며 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유목보다 훨씬 덜 위험하고 안정적이면서 돈도 많이 벌기 때문.

쉽게 말해 힘이 약하면 망하고, 힘이 강하면 농경지대를 정복해 정착해버린다. 약하든 강하든 결국 유목생활을 청산한다는 것. 기본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내재된 우호적인 환경에서 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다.

지금 유목민족들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일부, 러시아, 몽골,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주민들에게 흡수되어 사라진 상태다. 그나마 저 나라들도 유목민이 남아있거나 유목민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정도지 이미 그 나라들의 주류 세력은 도시에 사는 정주민화된 후손들로 대체되었다.

4. 유목 제국 목록

4.1.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4.2.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4.3.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유목 국가

4.4. 유목 제국이기도 했던 국가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같은 소위 근세 화약제국도 건국 초기에는 유목제국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오스만, 사파비는 양쪽 모두 처음엔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튀르크 전사 집단이 십자군 전쟁 말기의 전투적 수피즘이나 시아파 12이맘파 교리 같은 팽창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오스만 베이, 이스마일 1세 같은 카리스마적인 종교군사 지도자 중심으로 뭉친 부족연합체로 시작했고, 무굴제국도 시작은 티무르 제국의 상속권을 주장한 바부르가 이끄는 튀르크 전사집단이 막상 고향인 아프가니스탄-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서 밀려나서 인도로 남하한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세나라 모두 초창기 이후 제빠르게 정주민족들의 문화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국가기반이 관료제적 중앙집권화된 왕실 중심으로 재편성되었기 때문에 영향력은 강했지만 유목제국 자체로 보진 않는다.

오스만 제국 같으면 코스탄티니예 정복 이전 이미 부르사에디르네 양 도시에 수도를 잡았던 시절부터 아나톨리아 튀르크 유목민보다 개종과 출세를 통해 지배계층에 편입시킨 기독교계 피정복민들에게 고정적인 세수와 군사력을 징수하던 시절부터 유목제국적 정체성은 현져히 약해졌고, 오히려 제국의 전성기인 16세기쯤 되면 처음엔 핵심 기반이었던 아나톨리야 유목 부족들은 오히려 공로에 비해 대접 못받는다면서 사파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며 오히려 오스만 중앙 왕실의 위협거리가 되었다. 무굴 제국 또한 2대 황제 후마윤수르 제국에게 북인도 지배권을 빼았겼다 다시 찾아오는 과정에서 관료제, 조세제도 같은 정주민들의 통치 시스템을 확실하게 물려받았다. 사파비 제국의 경우 정식 건국 이전 사파비야 교단시절부터 백양왕조흑양 왕조니 강력한 유목제국에게 치이다가 이미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오스만제국 상대로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이며 초기 권력을 장악했던 키질바시 유목부족민들의 영향력을 떨쳐내는데 오래 걸렸으나 이또한 2대 샤 타흐마스프 1세 시절부터 점차적으로 정치개혁을 추진, 17세기쯤 되면 권력의 핵심이 오스만제국과 비슷하게 중앙 왕실에 종속된 아르메니아, 조지아, 체르케스카프카스계 기독교 출신 개종자 관료집단으로 넘어갔다.

5. 유목 제국으로 잘못 알려진 국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여진족과 그들이 세운 제국(, 동진국, )은 유목 제국으로 분류되지 않는다.[17] 그 이유는 이들이 떠돌아다니는 유량-소요형 생활을 했지만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다 다양한 생활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같은 여진/만주족이라도 부족마다 생활사가 각양각색이었는데, 기후 탓에 농사가 가능한 기간이 짧았지만, 땅이 매우 비옥했던 만주에서 농사를 짓거나 어업, 어로도 병행하면서 정착한 상태에서 제한적으로 유목을 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들을 유목 제국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분류이며, 유량생활 및 소요형 유목민(peripatetic)적인 성향이 있는 반유목민 생활(또는 반농반목), 방목어로, 일부 야생식물이나 약초들을 채집하는 것도 병행했던 수렵채집사회에 더 가깝다.[18]

6. 관련작품

7. 같이보기


[1]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스키타이보다도 훨씬 이전에 '키메르'라고 불리는 집단이 지금의 크림반도와 카프카스 산맥 북부 부근에서 번성했다고 한다. 이 키메르족은 나중에 스키타이족의 압력 때문에 지금의 튀르키예인 소아시아 반도와 유럽으로 도주하는데, 일부 학자들이 키메르족이 훗날 서유럽의 주민인 켈트족이 된다고 추측하기도 한다.[2]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주민들보다 길을 찾고 지도를 읽는 능력이 중시되었다. 반면 정주민족의 경우 평생 태어난 곳에서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집성촌이 대표적이다.[3] 이들이 유목 민족이 된 이유 자체가 이들의 거주지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크다.[4] 사람은 풀을 소화할 수 없어 풀을 소화해 성장하는 가축을 가져다 목축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농사가 가능한 땅에서는 유목보다는 농사를 짓는 게 더 이득이다.[5] 오히려 이 문제는 요즘에는 좀 덜해졌다고 할 수 있다. DB는 한 곳에 두더라도 각각의 데이터 이용자는 가벼운 핸드폰만 지니고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 등 인구 희박 지역에서는 유선 전화 단계를 점프하고 바로 핸드폰 문화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좀 다른 얘기지만 이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현대인을 유목민에 빗대 '디지털 노마드'라고도 한다.[6] 당연히 진짜로 환경을 소중히해서 유지보수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실제로는 정주문명의 인간만이 아니라 정복한 지역의 환경도 파괴하고 다녔다. 칭기즈칸이 북중국을 정복해서 농경지를 전부 목초지로 바꾸려고 한 점이 대표적. 똑같은 평야여도 농경이 가능한 지역을 상대적으로 고위도 지역의 목초지로 바꾸는 것도 환경 파괴 행위다.[7] 유럽에 일찍 정착한 마자르족 불가르족은 몇대 안가서 기독교화 되었으며 중동에 정착한 투르크 족은 급격히 이슬람화 되었다. 한편 유목민의 본토라 할만한 몽골초원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텡그리 신앙은 소멸하고 그자리에 티벳 불교가 차지했으며 이 티벳 불교는 몽골 지역의 또다른 질서가 되었다.[8] 특히 총과 대포 등의 화약 무기류.[9] 실제로 화약무기가 보편화된 이후로 전시상황에서 소총병과의 경우, 불과 2~3주 정도의 짧은 훈련만 마치고 실전 투입이 가능하며 2차대전 때는 이보다 더 짧은 1~2주 훈련을 받은 사례도 많았다.[10] 물론 경쟁자의 것을 뺏을 수 있을 만큼의 전투력을 확보했을 때의 이야기이다.[11] 약탈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경우 만주 지방의 고품질 철광 생산지에서 나오는 철기로 무장한 중장기병으로 큰 위세를 떨쳤다. 게다가 여진족 이전에 만주지역을 장악한 정주민족인 한민족의 고구려 역시 철갑기병으로 유명했다.[12] 행여나 농경민을 약탈할 경우 교역이 꾾기는 건 당연지사.[13] 유목민족의 전투력이 무섭다 하지만 통합되지않은 단일 부족은 농경정주국가가 수월하게 제압했다.[14] 회의적 시선도 있었으나, 연구를 통해 흉노족과 로열 스키타이의 궤멸 이후 중앙아시아 곳곳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족 사이의 혼혈로 밝혀지며 유목 민족으로 인정받게 된다.[15] 북주는 왕족들이 우문부였으나 대다수 백성들은 탁발부였다. 또한 수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은 잠시 허(許)나라를 세웠다가 당나라에 무너지고 만다.[16] 키메르인들이 어느 계통의 민족인지는 불분명하나, 일단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여지며,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이들을 켈트족이탈리아어파 계통 민족들의 공통조상이라고 추정한다.[17] 물론 금나라의 경우는 유목민인 거란 유민들도 있었고, 금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동진국에도 거란 유민과 몽골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계 민족들, 그 외 다른 퉁구스계 제족들의 동군연합 형태를 띄었다.[18] 제국 건설 이전 여진족의 생활상은 옛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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