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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정치/수카르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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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사3. 의원내각 목록4. 정당 이념 지형5. 공산주의자 대학살과 정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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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해체 이후, 수카르노 시대(1950년 8월 17일~1966년 3월 11일) 인도네시아의 정치사와 정치 환경을 서술하는 문서.

2. 정치사

2.1. 자유민주주의 시기

수카르노 집권기 전반은 자유민주주의(Demokrasi Liberal, Liberal Democracy) 시기로, 신생 인도네시아에서 다당제 의회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던 1950년 8월 17일부터 1959년 7월 5일[A]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는 총선을 통해 다양한 정당이 의회에 참여하였고, 처음에는 대통령 수카르노도 이와 같은 의회 정치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정당 간 논의가 길어지며 결론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지 않는 경우를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수카르노는 완전히 자유로운 서유럽식 의회 정치가 신생 인도네시아 국가에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회의 논의에서 합의가 도출되지 않고, 의견 충돌로 인한 잦은 사임과 내각 불신임으로 내각의 지속 기간이 길지 못해 정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수카르노는 자신이 조정 권한을 갖고 전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안하는, '교도'민주주의라는 체제를 구상하게 된다.

2.2. 교도민주주의 시기

집권 후기에 수카르노는 자신의 교도민주주의(Demokrasi Terpimpin, Guided Democracy) 구상을 실현시켰는데, '나사콤'(NASAKOM), 즉 민족주의(NASionalisme), 종교(Agama), 공산주의(KOMunisme)를 세 축으로 하여 대통령인 자신을 그 중심에 위치시킨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 체제에서 대통령은 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정책을 지도(교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교도민주주의 시기는 1959년 7월 5일[A]부터 1966년 3월 11일까지 지속되었다. 교도민주주의 시기 후반, 수카르노는 점점 공산당과 가까워졌으며, 1962년에는 공산당 서기장 등 공산당계 인사 2인을 입각시켰다.

3. 의원내각 목록

자유민주주의 시기와 교도민주주의 시기를 가르는 주된 체제상의 차이는, 전자 시기에는 1950년 잠정 기본법에 따라 총리 휘하 의원내각이 행정부를 구성하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의원내각제가 시행된 반면[7], 후자 시기에는 수카르노가 총리직을 겸임하여 대통령 내각이 구성되는 대통령제, 그것도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신대통령제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기 의원내각은 잦은 사퇴와 불신임으로 평균 지속 기간이 짧았다. 이하는 이 시기 대통령 수카르노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실질적으로 통치한 의원내각의 목록이다.

4. 정당 이념 지형

수카르노 시대 주요 정당들의 이념 지형을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 의석 기준 4대 거대 정당은 볼드체하였는데, 이들이 교도민주주의 시대 '나사콤'(민족주의: 국민당, 종교: 나다툴울라마, 공산주의: 공산당)을 직접적으로 대표한다.

4대 정당 중 PRRI 반란에 엮인 마슈미는 1960년 해산당했다. 마슈미의 해산 이후, 국회에서 이슬람 정당의 세는 눈에 띄게 줄었고, 상대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반사 이익을 얻게 되었다.

5. 공산주의자 대학살과 정파들

1965~1966년, 좌익 쿠데타가 실패하고 곧이어 정계 내부에서 수하르토우익권력을 장악하고 수카르노 충성파가 숙청되었으며[10], 이어서 주로 1965년 10월부터 1966년 3월까지 군 우익과 이들이 지원하는 자경단, 반공 청년단 등이 주도한 공산주의자 학살이 벌어졌다.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학살이 발생한 곳은 자바 중부와 동부, 자카르타, 발리, 그리고 수마트라아체였다. 그러나 자바, 수마트라, 소순다 열도의 다른 지역이나 칼리만탄에서도 극단적인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폭력학살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향한 것뿐만 아니라, 지역에 원래 존재하던 사회적 갈등이 폭발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람풍 등 수마트라 지역, 서칼리만탄과 남칼리만탄 등지에서는 자바인, 화교 이민자들에 대한 선주민들의 증오가 이들을 공격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몇 년 전 PRRI, 다룰 이슬람 반란을 겪은 수마트라 지역에서 선주 민족들은 자바인들을 정치적, 경제적 점령자로 인식했고, 이들에 대한 적대감의 골이 깊었다.

대학살 시기, 대략적으로 정파나 집단에 따라 구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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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관점에 따라, 수카르노가 독재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1957년 3~5월, 또는 교도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공표한 1957년 8월 17일 독립기념일 연설을 교도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수카르노는 그 후 2년간 어느 정도 이전의 틀을 유지하며 독재로 나아갔다. 1959년 7월 5일은 1955년에 선출된 제헌평의회(국회와 별개로 신헌법 제정을 위해 선출된 의회로, 국회와 마찬가지로 다당제였음)를 수카르노가 해산하고 1945년 헌법을 재부과하는 대통령령을 내려 교도민주주의 체제가 공식적으로 완성된 시점이다.[2] 나수티온은 1955년 군으로 복귀했지만, 시마투팡은 1953년 해직된 후 명예직만을 전전하며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3] 참고로 한국은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은 대표단을 보내기는 했는데, 국가원수정부수반급이 참석하지 않고 장관급이 참가해 회의는 거의 참관하는 수준에 그쳤다. 회의 도중 따로 중일 회담이 이루어졌다는 의의는 있다.[4] 처음에는 미국으로 원조를 타진했으나 거절당했다.[5] 독립전쟁 말기 네덜란드 2차 공세로 욕야카르타가 점령당하고 수카르노 등이 체포당했을 때 성립한 임시정부.[A] [7] 이것은 수탄 샤리르 내각, 아미르 샤리푸딘 내각, 모하맛 하타 내각이 구성되어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의원내각제로 운영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기 공화국 정부의 관행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참고로 가장 오래 지속된 자치국인 동인도네시아 자치국1947년부터 1950년까지 이와 비슷한 체제로 운영되었다.[8] 1차와 2차 모두 국민당에서 갈라져 나왔다. 2차는 1차의 이름만 계승했고 인적 계승 관계는 없다. 1차 인도네시아당은 원래 식민지 시대 국민당 온건파 사르토노의 정당이었다.[9] 원래 정당이 아니었고 이슬람 사회 단체였다. 오늘날 나다툴울라마는 다시 사회 단체로 돌아왔으며, 이들의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현대 정당으로 국민계몽당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나다툴울라마 자체는 어떤 정치 조직과도 무관하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기는 하다. 독립 직후 정치적으로 마슈미와 함께 행동하던 때도 있었지만, 독자 정치세력화하여 총선에 참여하기로 하고 1952년 마슈미와 결별했다.[10] 1965년 당시 수카르노는 좌경화하며 친공산당으로 기울고 있었고, 이 때문에 우익 세력과 대립해 온 수카르노 충성파가 많았다. 수카르노의 좌경화 때문에 일부는 실패한 쿠데타를 수카르노의 친위 쿠데타로도 의심했지만, 이는 근거가 희박하다. 9월 30일 운동의 진상은 간단하지 않으며, 이에 관해 여러 설이 다양한 세부 사항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11] "발리는 제주의 아픔을 안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