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창기 : 서양기술과 전통극의 융합
토머스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1896년 11월이었다. 상자 속에서 전개되는 영상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는 키네틱스코프를 상영한 것이 일본영화사의 시발이 된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97년 2월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관객 뒤쪽에서 앞쪽 스크린을 향해 영상을 투사하는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장치가 수입되어 공개되었다. 이어 3월에는 키네토스코프를 개량한 비타스코프가 사용되었다. 1800년대 후반의 일본사회에 있어서 영화는 최첨단 서양문화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영화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최대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일본근대문학자들이 영화감독을 맡거나 자신의 원작을 영화에 제공하거나 했던 것은 그러한 조류의 한 단면이다.일본인이 최초로 촬영한 영화는 1898년 도쿄의 어느 사진관에서 근무하던 사람에 의해 제작된 단편영화인데, 일본 전통예술요소가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는 것들이었다. [1] 그러한 경향은 몇 년간 지속되었는데 크게 신파극(新派劇) 계통의 현대극과 일본의 전통적인 가부키(歌舞技) 계통의 시대극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현대극에서는 주로 세속적 멜로물이, 시대극에서는 무사(사무라이)물이 주를 이루었다. 사무라이 중에서는 권세가도 있지만 몰락하여 일본열도를 떠돌며 날강도짓을 일삼는 낭인도 있었다. 시대극의 주인공이 된 것은 주로 후자인 낭인들이었다. 시대극은 내용에 따라 관료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수사극', 《추신구라》로 대표되는 '복수극', 낭인들의 방랑을 그린 '유랑극'의 세 가지로 나뉜다. 이 가운데 일반 대중에게 인기 있었던 것은 낭인들이 나오는 '유랑극'이었다. 그러나 그 표현기법은 유치한 단계로서 촬영기를 고정시킨 채 무대극을 그대로 복사하는 정도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2. 1920년대~1930년대
2.1. 대중예술로서의 발전
일본영화가 무대극의 복사단계를 벗어나 본격적인 대중예술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닛카쓰'(日活)가 발족한 데 이어 1920년에 '쇼치쿠'(松竹) 키네마사가 설립되어 영화산업의 주축을 이루게 되면서부터였다. 닛카쓰는 주로 모자의 이별이나 신분의 차이가 있는 남녀간의 사랑, 정조를 잃는 소녀의 타락 등 눈물을 유도하는 멜로드라마가 중심이었다. 반면 쇼치쿠는 명랑하고 활발한 도시풍의 현대극이나 소시민적 행복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쇼치쿠를 대표하는 감독으로는 단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27년 《참회의 칼》로 데뷔한 이래 소시민의 소박한 행복을 그려 일본적 리얼리즘을 확립한 일본의 대표적인 감독 중의 한 사람이 된다. 오즈 감독의 영화에는 몇 가지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다타미 위의 사물을 부감으로 촬영하는 다타미 쇼트, 이동 촬영이나 카메라의 이동을 극단적으로 피하고 고정된 카메라로 찍는 롱 테이크, 인물과 배경을 조화있게 배치하는 예술성, 안정감있는 정적인 구도, 자연스러운 컷의 연결 등이다. 이러한 기법은 초기의 《육체미》(1928), 《회사원 생활》(1929), 《대학은 나왔지만》(1929), 《낙제는 하였지만》(1930)에서 모색되다 《맥추》(1951), 《도쿄 이야기》(1953), 《도쿄 모색》(1957), 《부초》(1959), 《화창한 가을날》(1961), 《꽁치의 맛》(1962)에서 확립되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고수된다.
2.2. 경향영화의 대두
1923년의 관동대지진, 그리고 그 후의 경제공황은 이른바 경향영화(傾向映畵)라는 사회적인 풍조의 영화를 출현시켰는데 정부의 엄격한 검열로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1931년에는 일본 최초의 발성(토키)영화인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 감독의 《마담과 아내》가 제작되었다. 토키영화시대의 개막 이후 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나루세 미키오 등의 감독이 등장했고, 변사 대신 배우가 본격적인 직업으로 대두되었으며 순수문학을 영화로 만든 문예영화가 유행했다.2.3. 3대 영화사 정립
1937년에는 '도호'(東宝)영화사가 새로이 출범하여 '닛카쓰', '쇼치쿠'와 더불어 3사 정립시대가 열렸다. 원래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 극장으로 출발한 도호는 사진활동연구소(약칭 PCL)[2]를 합병하여 본격적으로 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닛카쓰, 쇼치쿠, 도호 3대 영화사의 정립으로 일본영화계는 첫 황금기를 맞이한다.3. 1940년대~1950년대
3.1. 전쟁과 영화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중국 침략전쟁을 도발하고(1937), 이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1941), 일본영화는 정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 들어가[3] 침략전을 합리화하고 전의를 고취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이와 같은 암흑기를 통해서도 패전 후 크게 빛을 보게 되는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 惠介)가 신진감독으로 등장하였다.《라쇼몽》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국제적인 명망을 얻게 된 구로사와 감독은 《삶》(1952)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기노시타 감독은 일본의 토속적인 소재를 발굴하여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대표적으로 《나라야마부시코》(1958)이 있다.
3.2. 일본영화의 황금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뒤 일본영화는 연합군 사령부의 검열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한 침체기를 지나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에는 기노시타 게스케에 의해 첫 컬러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가 제작되었다. 또한 비극에 처한 여인의 슬픔과 분노를 그린 미조구치 겐지의 《사이카쿠 일대녀》, 《우게쓰 이야기》와 독일 표현주의적 작품을 만들어 일본영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 貞之助)의 《지옥문》 등이 해외영화제에서 잇달아 입상하자 일본영화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제15회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공동 수상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 1962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의 《하라키리》 같은 사무라이 영화들이 세계적으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일본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이유는
-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일본영화는 주로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무대로 했기 때문에 기모노와 사무라이의 등장이 필연적이었다. 그러한 것이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부추겼던 것이다.
- 당시 유럽의 국제영화제의 비평가 사이에서는 작가주의를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는 빛을 보지 못했던 할리우드의 B급 감독에서부터 동양의 신인 감독이 공평하게 작가주의 감독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풍조에서 독자적이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을 추구해 왔던 미조구치 감독은 뛰어난 수준에 달하는 감독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일부 감독과 다이에이(大映)의 제작자 나가타 마사이치(永田 雅一)처럼 아예 국제영화제 수상을 목표로 하여 어떻게든 서양인들의 흥미를 끄는 작품을 많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옥문》(1953)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나가타는 동남아시아를 시장으로 삼기 위해 미조구치에게 홍콩과의 합작영화인 《양귀비》를 제작케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본 내수적으로는 이시하라 신타로 형제의 소설/영화 등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일본식 청춘영화 역시 위의 영화들과 함께 일본영화의 리즈 시절을 견인한 장르로서, 이 일본식 청춘영화들은 이후 한국의 청춘영화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4. 1960년대
4.1. 텔레비전의 보급과 영화산업의 사양화, 쇼치쿠 누벨바그와 ATG의 등장
그러나 일본영화는 1953년부터 실시된 텔레비전 방송에 밀려 차차 퇴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959년의 황태자의 결혼과 1964 도쿄 올림픽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한 가정이 많았고 텔레비전의 보급 확대는 영화산업의 사양화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생계가 끊긴 영화계 종사자 및 일본 영화계에 입문하려던 지망자들 중 일부는 텔레비전 보급으로 활성화가 시작된 애니메이션계로 방향을 돌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카츠마타 토모하루와 토미노 요시유키가 있다.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각 영화사는 계속해서 영화사업을 위해 분발했다. 도시 대학생이나 샐러리맨의 밝고도 소시민적인 세계를 영화화한 도호, 지방출신 주인공의 성공담 중심의 다이에이, 인정미 넘치는 도쿄 서민들의 삶을 주로 제작한 쇼치쿠, 전통적인 지방도시를 그린 도에이, 국제적 항구도시나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골을 주무대로 한 닛카쓰와 같은 제작회사의 분발이 그것이다.
한편 1960년대는 쇼치쿠의 조감독이었던 오시마 나기사의 등장으로 영화의 누벨바그, 즉 새로운 물결이 인 시기이기도 했다. 오시마는 학창시절부터 좌익 사상에 눈을 떴고 전후 학생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한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작품을 감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를 쇼치쿠 누벨바그라 부른다.
1961년에는 아트 시어터 길드(ATG)라는 비상업주의적인 예술작품을 제작·배급하는 독립 영화 제작사가 설립됐다. 오시마 나기사는 동료인 요시다 요시시게랑 더불어 쇼치쿠에서 퇴직, ATG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오시마는 ATG에서 재일동포 소년의 살인사건 실화를 영화화한 《교사형》(1968)을 연출했는데 '차별'이라는 문제를 화두로 내건 문제작으로서 영화사상 화제로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제작사는 자주 영화라 불리는 일본 독립 영화계에 귀중한 시금석이 된다. ATG에서 활동한 유명 감독으로는 테라야마 슈지, 와카마츠 코지, 마츠모토 토시오가 있다. ATG가 제작한 많은 작품들은 키네마 준보 베스트텐에 선정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으며 70년대는 물론 80년대 후반까지 당대 일본 최고의 예술영화 제작사였다.
한편 오즈 야스지로 조감독이었던 이마무라 쇼헤이도 이마무라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4.2. 야쿠자 영화의 전성시대
1950, 60년대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각 영화사들이 활로를 찾기 위해 '야쿠자 영화'를 양산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야쿠자영화는 시대극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를 보였다. 약간의 변화를 준 것은 등장하는 사무라이들의 헤어스타일을 바꿔 야쿠자로 만든 것 뿐이었다.하지만 여러 번의 변신을 통해 일본고유의 영화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야쿠자 범죄조직을 선한 악당과 악한 악당이라는 이분법으로 설정하여 선한 야쿠자가 악한 야쿠자의 비열한 행위를 잡아낸다는 기본 패턴이 반복되었다. 거기에 의리의 세계를 살아가는 야쿠자, 그 야쿠자에게 연모의 정을 느끼는 여인,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의와 의리를 위해 말없이 사라지는 주인공, 잔잔히 흐르는 일본의 전통가요인 엔카는 필수적 요소였다.
야쿠자 영화가 인기를 끈 것은 일본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1960년대 후반이었다. 체재에 대한 불만과 답답한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던 학생들은 야쿠자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일반 대중들 또한 급속한 경제개발과 학원사태 등, 시대적 혼란 속에서 의협심 강한 야쿠자의 활약을 삶의 활력소로 여겼던 것이다. 야쿠자 영화의 주역은 《철도원》으로 한국에서 이름이 나 있는 타카쿠라 켄이 주로 맡았다. 대표작으로는 쇼와잔협전이 있다. 그 외 츠루타 코지,스가와라 분타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수려한 용모, 무뚝뚝한 성격, 정의와 의리를 위해 미모의 여인까지도 저버리는 남자다움에 수 많은 여성들이 극장가로 몰렸다.
5. 1970년대 ~ 1980년대
5.1. 핑크영화에 의한 활로 모색
1970년대에 접어들며들면서 학생운동의 위축과 함께 야쿠자영화도 매너리즘에 빠져 그 위력을 상실해 갔다. 이러한 시기에 새로운 야쿠자영화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 후카사쿠 킨지 감독인데 그의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는 당대를 풍미했다. 기존의 야쿠자영화에 조직에 대한 반발과 배신을 둘러싼 인정사정없는 격투와 살의를 가미했다. '폭력의 미학'을 추구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후카사쿠 감독의 영항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한편, 1970년대는 일본영화사에 있어 '에로영화'(로망 포르노)가 많이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신도호'나 '오쿠라', '와카마쓰' 영화사 등은 남녀의 섹스장면을 넣은 에로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영난에 봉착한 대기업의 제작사들도 기구를 축소하고 핑크영화 제작에 나섰다. 닛카쓰는 다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기술진을 토대로 종래의 핑크영화와는 다른 고품격의 작품을 만들었다. 새로이 '로망 포르노'라는 이름을 붙여 차별화를 꾀한 것이 성공하였고 그로써 닛카쓰는 재기하게 된다. 한때 일본영화를 주름잡았던 제작사들마저 로망 포르노 영화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몰락하는 일본 영화산업의 모습을 상징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반대로 이 핑크 영화는 섹스 장면만 있으면 감독들에게 재량에 맞겼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충격적인 영화를 내놔 데뷔한 감독들도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스오 마사유키, 모리타 요시미츠, 소마이 신지가 대표적이다. 특히 소마이 신지는 일본 영화 침체계에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일본 영화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로망 포르노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AV의 등장으로 막을 내리고, 핑크 영화도 에로보다는 작가영화 위주로 노선을 변경하게 된다. 최근에는 일본 영화의 전반적인 불황과 함께 핑크 영화 수요도 급격하게 줄어들어, 작가주의 시스템도 거진 붕괴된 상태.
5.2. 일본 애니메이션의 태동
1980년대에는 메이저 영화사들의 경영 악화, 젊은층들의 타 장르(스포츠, 음악 등) 선호, 비디오의 보급 등으로 일본영화계는 침체 일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일본영화인의 저변은 확대되었다. 다양한 직종의 다양한 인물이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일본영화는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가령 CF감독 출신인 이치가와 준(市川準) 감독의 《BU·SU》(1987), 소설가 출신인 오사베 히데오(長部日出雄) 감독의 《꿈의 축제》(1989), 1997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화제를 불러 모은 코미디언 출신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그 남자 흉폭하다》(1989) 등을 들 수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소재나 참신한 주제의 작품이 많이 제작되어, 1980년에는 '절망의 시대'임과 동시에 '기회의 시대'라는 양면성을 띠게 되었다.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등장으로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마녀 배달부 키키》(1989) 등은 애니메이션이 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른들까지 공유할 수 있는 예술임을 보여주고 있다. 에콜로지(ecology)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실사영화에서는 촬영하기 힘든 '비행'장면을 자주 넣어 유토피아적인 감각을 만들어내었다. 미야자키라는 거장의 출연에는 데즈카 오사무와 같은 걸출한 만화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철완 아톰>이나 <밀림의 왕자 레오> 등과 같은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메시지성 강한 만화작품을 선보였는데 그로 인해 구축된 두터운 만화 애호가가 그대로 애니메이션 관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5.3. 구로사와 아키라의 저력
또한 1980년대에는 1960년대에 눈부신 활약을 하다 1970년대에 침체기를 맞이한 감독들이 재기하기 시작했다. 가령 구로사와 아키라와 같은 거장은《카게무샤》(1980), 《란》(1985)과 같은 스팩터클 대서사시를 다시 만들어 냈다. 구로사와 같은 노장이 노익장을 발휘하는 가운데 이타미 주조와 같은 신인 감독들의 활약도 엿보였다.1984년에 데뷔한 《장례식》이 성공하면서 이타미 주조 감독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키네마 준보(キネマ旬報) 베스트 원, 일본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마이니치 콩쿠르, 블루 리본상 등 4대 타이틀의 감독상을 석권했다. 어두운 이미지를 주는 영화제목과는 달리 배우출신인 상주가 우왕자왕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마치는 것을 코믹하게 다룬 영화이다. 이어서 서부극 《셰인》을 연상시키는 1985년의 《담뽀뽀》도 뉴욕, 파리 등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배우는 마츠다 유사쿠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카도카와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대작영화를 통해 등장했는데 주로 액션영화의 금욕적이면서도 이중인격의 살인자를 잘 연기해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 스즈키 세이준의 《아지랑이좌》(1981)에서는 특정한 직업 없이 건성으로 사는 부유층 젊은이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연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직접 액션영화 《아! 호만스》(1986)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989년에 41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자 일본의 젊은 영화 팬들은 제임스 딘의 죽음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일이라고들 했다.
6. 1990년대~2020년대
6.1. 국제영화제에서의 주목
1990년대 일본경제는 장기적인 불황에 돌입하게 된다. 끝이 없어보이는 불황, 고베 대지진, 옴진리교와 같은 신흥종교단체의 무차별 살인사건 계획 사건, 급증하는 불법체류자의 문제와 같은 어두운 사건이 많은 시기였다. 영화계도 그 여파는 있었다. 대형 배급, 제작회사가 도산하여 문화사업을 포기하는가 하면 영화관수도 감소일로를 걷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냉혹한 현실 속에서서도 회복의 조짐을 보이는 좋은 일도 있었다.그 시발점이 된 것이 195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 시절처럼 국제영화제에서 일본영화가 다시금 주목받은 일이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 昌平) 감독의 《우나기》가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카와세 나오미 감독의 《움트는 주작》이 신인 감독상을,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HANA-BI》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50년대에 일본영화가 해외의 주목을 받은 것은 '작품성'과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오리엔탈리즘'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1990년대의 주목은 순수히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런 것이 영화제에서 성과를 얻기 전에 이미 《철도원》이나 《원더풀 라이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오야마 신지(青山 真治) 등 신세대 인디감독이 잇따라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고, 스오 마사유키의 《쉘 위 댄스》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어 해외에서의 일본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부터는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코지, 미야케 쇼, 마리코 테츠야, 세타 나츠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가타야마 신조 같은 젊은 신인 감독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 개최된 제76회 칸 영화제에서는 야쿠쇼 코지가 남우주연상을 수상,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인 괴물(2023년 영화)이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개최된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작품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2024년에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장편 애니메이션상, 고지라-1.0이 시각효과상을 수상하였다.
6.2. 재패니메이션이라는 문화권력, 애니메이션 영화계의 약진
그 중에서도 애니메이션의 해외진출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일본의 문화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까지 바꿀 수 있는 '문화권력'이 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일본애니메이션이 TV애니메이션 시장을 독점해 버렸고, 일본 애니메이션(재패니메이션)을 숭배하는 오타쿠들이 속출했으며 비디오시장을 석권했다.일본 애니메이션 전용 극장까지 출현한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에 관한 단행본과 월간지들이 경쟁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게다가 팬클럽이 결성되거나 OTAKON과 같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팬들의 국제회의도 자주 개최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나 일본문화 워크숍에 참여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한국 일부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4] 아시아와 유럽, 미국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작품성' 때문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5],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 호소다 마모루 감독 작품,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 작품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는 세계 3대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아카데미상이나 골든글로브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3. 장르편중과 실사영화계의 부진
인디영화, 장르영화, 애니메이션의 전성 등, 다양화된 영화계에 비해 배우층은 두텁지 못하다. 《우나기》, 《쉘 위 댄스》, 《로렐라이》, 《게이샤의 추억》에서 열연한, 일본의 안성기라 불리는 야쿠쇼 코지의 활약이 있긴 하지만 1970년대부터 일본 영화계를 짊어졌던 아이돌 스타는 발굴되지 못했다. 90년대에는 영화가 컨텐츠 파워에서 TV드라마와 가요계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아서, 아예 '배우'라는 직업군의 주요 무대가 TV로 완전히 바뀐 상태다. 후쿠야마 마사하루, 아베 히로시, 시바사키 코우, 나카마 유키에 등 한국에서도 이름만 대면 아는 탑배우들 모두 드라마가 메인이다. 1985년부터 일본 영화의 자국 시장 점유율이 50% 선으로 붕괴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압박으로 2002년에는 자국 시장 점유율이 27.1%까지 추락하는 몰락을 겪었다.만화 원작의 블록버스터들이 대거 제작된 2006년부터로 다시 21년 만에 자국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었으며 2012년에는 65.7%에 달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만화 원작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비중이 흥행영화 중에서 절반 가량된다. 때문에 오리지날 각본을 가진 영화의 비중이 낮은 편이다. 2018년에는 일본 영화의 자국 시장 점유율이 54.8%였다.
장르 편중에다가 '원작 재현'에만 지나치게 충실한 만화 원작 영화는 할리우드에 비해 낮은 CG 기술력과 결합하여 코스프레 영화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때문에 만화, 애니메이션과 달리 해외 시장에서 흥행하는 경우가 없다.
원로 배우 쓰가와 마사히코가 일본영화 상황을 비판하고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2017년 일본영화의 위기라 평했다. 배우 오다기리 조도 만화원작에 휘둘리는 상황에 우려를 나타냈고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 영화계의 현실을 한탄했다.
2017년 만화 원작 실사 영화들의 흥행부진으로 속편이 예정된 작품도 줄줄이 무산되고 있어 만화원작 영화화가 침체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부분의 실사영화들이 손익분기는 커녕 제작비만큼의 수익도 못 거뒀다. 그나마 흥행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은혼과 치하야후루정도 뿐이다. 2018년 상기 기사에서 언급 된 블리치도 결국 흥행에 실패했다.
[1] 참고로 중국 최초의 영화 역시 경극을 찍은 영화라 한다.[2] 1930년대 기준으로 꽤 진보적인 성향의 회사여서 가족적, 봉건적, 인맥 위주의 영화에서 탈피하여 오페레타풍의 영화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PCL을 '포크 커틀릿 라드튀김'(ポーク・カツレツ・ラード揚げ)으로 비꼬기도 했다.[3] 지금은 없어진 다이에이(大映)가 이 때 세워진 회사다. 당시의 정식 명칭도 '대일본영화제작주식회사'(大日本映畵製作株式會社)였고 다이에이는 약칭.[4]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순이 같은 것을 감안하면 일본어는 상대적으로 배우기 쉬운 외국어 중 하나다.[5]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 그의 작품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