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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01:13:38

오다기리 조

오다기리 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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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 아카데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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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남우조연상
제27회
(2004년)
제28회
(2005년)
제29회
(2006년)
사토 코이치
(바람의 검, 신선조)
오다기리 조
(피와 뼈)
츠츠미 신이치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

역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파일:키네마준보.png
남우주연상
제78회
(2005년)
제79회
(2006년)
제80회
(2007년)
기타노 다케시
(피와 뼈)
오다기리 조
(메종 드 히미코 /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 시노비 /스크랩 헤븐)
와타나베 켄
(내일의 기억)
남우조연상
제77회
(2004년)
제78회
(2005년)
제79회
(2006년)
오오모리 나오
(아카메 48폭포)
오다기리 조
(피와 뼈)
츠츠미 신이치
(플라이, 대디, 플라이 / 올웨이즈 - 3번가의 석양)

엘란도르상 신인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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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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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1956년 이케우치 준코, 이시하라 유지로, 카와구치 히로시, 쿠사나기 고지로, 시라카와 유미, 스기타 히로코, 타카쿠라 켄
1957년 단 레이코, 에하라 신지로, 키타자와 노리코, 나카다이 타츠야, 시라카와 유미, 모리 미키, 츠구바 히사코, 카와사키 케이조
1958년 아사오카 루리코, 카노 준코, 아사오카 루리코, 쿠와노 미유키, 오오조라 마유미, 사토 마코토, 치노 카쿠코
1959년 혼고 코지로, 호시 테루미, 미즈키 조, 나카타니 이치로, 나츠키 요스케, 시미즈 마유미, 야마모토 토요조 }}}}}}}}}
196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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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1960년 아카기 케이이치로, 후지마키 준, 호시 유리코, 카와구치 토모코, 마츠카타 히로키, 미카미 신이치로, 요시다 테루오
1961년 이와시타 시마, 카야마 유조, 미타 요시코, 타미야 지로, 야마자키 츠토무, 요시나가 사유리
1962년 바이쇼 치에코, 하마 미에, 하마다 미츠오, 스가타 미치코, 치바 신이치, 야마모토 케이
1963년 이즈미 마사코, 카가 마리코, 키타오오지 킨야, 나카가와 유키, 나카오 미에, 타카다 미와, 타카하시 코지
1964년 후지무라 시호, 혼마 치요코, 마츠모토 하쿠오, 카토 고, 카야마 요시코, 마츠바라 치에코, 요시무라 지츠코
1965년 에나미 쿄코, 후지 스미코, 나이토 요코, 오가와 마유미, 타케와키 무가, 와타리 테츠야
1966년 구리주카 아사히, 구로사와 토시오, 오오하라 레이코, 야마구치 타카시, 야마모토 요코, 오오쿠스 미치요
1967년 아즈사 에이코, 쿠리하라 코마키, 나카야마 진, 오가와 토모코, 사카이 와카코, 스기 료타로
1968년 이쿠타 에츠코, 미네기시 토오루, 나카야마 마리, 오카 미츠코, 타카하시 에츠시, 타니 하야토
1969년 아츠미 마리, 오키 마사야, 오자키 나나, 타이치 키와코, 타카하시 노리코, 타치바나 마스미 }}}}}}}}}
197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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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1970년 하라다 다이지로, 모리타 겐사쿠, 나츠 준코, 오카다 유스케, 오카모토 노부토, 사카이 마사아키, 사토 오리에, 타케하라 에이코, 우메다 토모코, 와타세 츠네히코, 야나미 에이코
1971년 미개최
1972년 이케 레이코, 콘도 마사오미, 사카키바라 루미, 타카하시 케이코, 미후네 시로, 야마구치 카린, 요시자와 쿄코
1973년 우츠노미야 마사요, 스기모토 미키, 시가키 타로, 마츠자카 케이코, 무라노 타케노리, 야마모토 센, 타나카 마리, 후지오카 히로시, 혼다 미치코, 마키 히로코
1974년 아사다 미요코, 코즈에 히토미, 시마다 요코, 세키네 세츠코, 니시나 아키코, 하기와라 켄이치, 미우라 토모카즈, 모모이 카오리, 다이몬 마사아키, 타카하시 요코, 나카지마 유타카
1975년 아키요시 쿠미코, 쿠사카리 마사오, 이케가미 키미코, 단 후미, 시호미 에츠코, 나카무라 마사토시, 하기오 미도리
1976년 히가시 테루미, 오카다 나나, 오오타케 시노부, 다나카 겐, 카타히라 나기사, 네즈 진파치, 미츠바야시 쿄코, 카츠노 히로시, 사오토메 아이, 타키가와 유미
1977년 아사지 요코, 이와키 코이치, 에토 준, 하라다 미에코, 마야 쿄코
1978년 아라이 하루미, 아사노 유코, 이노우에 준이치, 시미즈 켄타로, 나츠키 요코, 타케시타 케이코, 타케다 테츠야, 나가시마 에이코
1979년 쿠니히로 토미유키, 나가시마 토시유키, 후지 마리코, 모리시타 아이코, 유리 치카코 }}}}}}}}}
198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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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1980년 쿠마가이 마미, 코테가와 유코, 시바타 쿄헤이, 마츠다이라 켄, 미야우치 준
1981년 카네다 켄이치, 칸자키 아이, 키시모토 카요코, 타키타 사카에, 히구치 카나코
1982년 카가 다케시, 사나다 히로유키, 다나카 유코, 나츠메 마사코, 후루오야 마사토
1983년 카자마 모리오, 콘노 미사코, 나카이 키이치, 나토리 유코, 류 다이스케
1984년 사토 코이치, 토키토 사부로, 나카이 키에, 하라다 토모요, 야쿠쇼 코지
1985년 이시하라 마리코, 에노키 타카아키, 와타나베 토루, 후지타니 미와코
1986년 키쿠치 모모코, 킷카와 코지, 사와구치 야스코, 야나기사와 신고
1987년 사이토 유키, 진나이 타카노리, 나카야마 미호, 야스다 나루미, 와타나베 켄
1988년 고쿠쇼 사유리, 토미타 야스코, 고토 쿠미코, 미나미노 요코, 나카무라 토오루
1989년 아소 유미, 오가타 나오토, 타카시마 마사히로, 미카미 히로시, 와카무라 마유미 }}}}}}}}}
199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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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1990년 이모리 미유키, 스즈키 호나미, 미나미 카호, 모토키 마사히로, 야나기바 토시로
1991년 쿠도 유키, 타카시마 마사노부, 나카지마 토모코, 노무라 히로노부, 마키세 리호
1992년 이시다 히카리, 센도 노부코, 와쿠이 에미, 나가세 마사토시, 요시오카 히데타카, 다나카 미노루
1993년 카토 마사야, 시미즈 미사, 아카이 히데카즈, 유키 나에, 카라사와 토시아키
1994년 사쿠라이 사치코, 와시오 이사코, 스미다 유키, 츠츠이 미치타카, 하기와라 마사토, 무라타 타케히로
1995년 야마구치 토모코, 스즈키 안즈, 하다 미치코, 키시타니 고로, 토요카와 에츠시, 기무라 타쿠야
1996년 토키와 타카코(대상), 츠루타 마유, 잇시키 사에, 나가사와 토시야, 타카하시 카츠노리, 시이나 킷페이
1997년 마츠 다카코(대상), 이이지마 나오코, 세토 아사카, 카미카와 타카야, 니시무라 마사히코
1998년 칸노 미호(대상), 키무라 요시노, 다나카 미사토, 아사노 타다노부, 우치노 세이요
1999년 마츠시마 나나코(대상), 카시와바라 타카시, 카네코 켄, 사카이 미키, 후카다 쿄코 }}}}}}}}}
200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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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2000년 나카타니 미키(대상), 이케우치 히로유키, 이시이 마사노리, 카토 하루히코, 나카무라 슌스케
2001년 이토 히데아키, 쿠보즈카 요스케, 오이카와 미츠히로, 이케와키 치즈루, 카토 아이, 야다 아키코
2002년 쿠니나카 료코, 사카구치 켄지, 다케우치 유코, 츠마부키 사토시, 후지키 나오히토, 요네쿠라 료코
2003년 오자와 유키요시, 키쿠카와 레이, 시바사키 코우, 나카마 유키에, 후지와라 타츠야
2004년 우에토 아야, 오다기리 조, 코유키, 테라지마 시노부, 나카무라 시도, 야마다 타카유키
2005년 이시하라 사토미, 이토 미사키, 나가사와 마사미, 나리미야 히로키, 야마모토 코지
2006년 이토 아츠시, 우치야마 리나, 사와지리 에리카, 하야미 모코미치, 호리키타 마키
2007년 아오이 유우, 아야세 하루카, 우에노 주리, 게키단 히토리, 타마키 히로시, 마츠야마 켄이치
2008년 아라가키 유이, 오구리 슌, 칸지야 시호리, 단 레이, 오오모리 나오
2009년 에이타, 쿠로키 메이사, 토다 에리카, 마츠다 쇼타, 미우라 하루마, 미야자키 아오이 }}}}}}}}}
201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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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2010년 에이쿠라 나나, 오카다 마사키, 시다 미라이, 타베 미카코, 마츠다 류헤이, 미즈시마 히로
2011년 키치세 미치코, 키리타니 켄타, 사토 타케루, 마츠시타 나오, 미츠시마 히카리, 무카이 오사무
2012년 코라 켄고, 이노우에 마오, , 하세가와 히로키, 요시타카 유리코
2013년 소메타니 쇼타, 오노 마치코, 마츠자카 토리, 타케이 에미, 모리야마 미라이, 마키 요코
2014년 아야노 고, 키무라 후미노, 히가시데 마사히로, 노넨 레나, 후쿠시 소타, 하시모토 아이
2015년 이케마츠 소스케, 키타가와 케이코, 사이토 타쿠미, 쿠로키 하루, 스즈키 료헤이, 니카이도 후미
2016년 에모토 타스쿠, 아리무라 카스미, 스다 마사키, 츠치야 타오, 타마야마 테츠지, 요시다 요
2017년 사카구치 켄타로, 타카하타 미츠키, 딘 후지오카, 하루, 호시노 겐, 히로세 스즈
2018년 타카하시 잇세이, 카도와키 무기, 타케우치 료마, 스기사키 하나, 무로 츠요시, 요시오카 리호
2019년 시손 쥰, 아오이 와카나, 다나카 케이, 나가노 메이, 나카무라 토모야, 마츠오카 마유 }}}}}}}}}
2020년대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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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f5f5f><colcolor=#fede58> 2020년 카미키 류노스케, 안도 사쿠라, 요코하마 류세이, 키요하라 카야, 요시자와 료, 하시모토 칸나
2021년 카쿠 켄토, 이토 사이리, 키타무라 타쿠미, 카미시라이시 모네, 쿠보타 마사타카, 하마베 미나미, 나리타 료, 모리 나나
2022년 나카노 타이가, 에구치 노리코, 야기라 유야, 카와구치 하루나, 야마다 유키, 히로세 아리스
2023년 나카가와 타이시, 아시다 마나, 마츠시타 코헤이, 키시이 유키노, 마미야 쇼타로, 나오
2024년 이소무라 하야토, 이마다 미오, 마에다 고든, 코시바 후우카, 메구로 렌, 홋타 마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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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오다기리 조
オダギリ ジョー | Joe Odagiri
파일:640odagiri.jpg
본명 [ruby(小田切, ruby=おだぎり)] [ruby(譲, ruby=じょう)] (오다기리 조, Joe Odagiri)
출생 1976년 2월 16일 ([age(1976-02-16)]세)
오카야마현 츠야마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1], O형
배우자 카시이 유우(2008.02.16 결혼 ~ 현재)
자녀 슬하 3남[2]
직업 배우(1999년~)
소속사 동규 클럽(鈍牛倶楽部)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출연 작품
3.1. 영화3.2. 드라마3.3. 그외 활동
4. 이야깃거리
4.1. 가면라이더 쿠우가
4.1.1. 주연 발탁 과정4.1.2. 경력삭제 논란4.1.3. 논란 종결
4.2. 논란 및 사건 사고
4.2.1. 코다 쿠미 사인 논란
4.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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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배우.

한자 이름보다는 オダギリジョー라는 가타카나 이름이 더 자주 쓰인다. 이건 이름인 譲가 평범하게 읽을 경우 유즈루라고 읽히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해서이다.

배우 감독 가수 겸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흔히 인디밴드라고 불리는 밴드 소속.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일렉기타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좋은 연기력을 갖고 있고, 대표작으로는 메종 드 히미코, 마이웨이 등이 있다.

2. 생애

오카야마현 츠야마시 출생. 아버지 없이 성장하였기에 모친과 친분이 있던 영화관 주인과 자주 만났고 영화에 관심을 보이게 되어 영화감독이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장래 희망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오카야마 현의 사쿠요 고등학교를 특별 진학코스로 졸업한 후 코우이치 대학에 합격했으나, 꿈인 영화감독을 위해 입학을 포기했다. 대신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인 프레즈노 대학에 입학, 영화감독 코스의 수속 서류를 넣었다.

하지만 정작 입학 원서에 표기된 DRAMA(배우양성코스)를 감독양성 코스로 착각하고 지원하여, 2년간 연기 수업을 받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미국과 달리 드라마 코스에서 감독양성 코스가 포함되어있고 감독양성 코스안에서 드라마, 영화 등으로 세분화되기 때문에 미국도 일본과 동일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데뷔 당시, 온갖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고정게스트를 맡는 등 신인배우에 어울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어 많은 우려를 낳았다.

이는 배우로서 오다기리 조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오다기리 조를 보여주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데 그 덕택인지 대중에게 당찬 신인의 이미지를 어필하여 우려를 극복하고 오히려 인기를 끌게 해주었다.

중견급으로 분류되기 시작한 2005년 이후엔 도리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출연은 줄어들고 있으며 영화에 고정적으로 출연하여 TV배우에서 영화배우로 노선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있다.

데뷔작인 가면라이더 쿠우가 이후 오다기리 조의 연기 커리어가 TV배우에서 영화배우로 가버렸기 때문에[3] 일반 배우로 봐야 한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달리 특유의 패션 센스와 훤칠한 외모와 묘하게 풍기는 염세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한국 여성 팬이 많은 편이다.

배우로서 데뷔한 후 서서히 인맥을 넓혀 꿈이었던 (단편이지만) 영화 제작에 성공하였으며 TV프로그램의 각본을 두어편 맡게 되는 등 감독으로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일단 재능은 제법 있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감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많이 부족하여 정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2018년에 장편 데뷔작으로 도이치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영화 촬영을 위해 9월 6일 토에이 스튜디오에 방문했다는 트윗을 남겼다. 도이치 이야기는 베니스 영화제 베니스 데이즈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부산국제영화제도 초청받았다. 평은 미묘~평범. 호화로운 캐스팅[4]과 의미있는 주제, 아름다운 비주얼[5]에 비해 스토리와 연출이 늘어져서 수련이 필요하다는 평이 많았다.

유난히 한국과 점접이 많은 배우인데, 김기덕 감독 영화에는 두 차례나 출연한 바 있고, 그 외에도 한국영화에 조연 단역으로 꽤 나왔다. 강제규감독의 ‘마이 웨이’에서는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2021년 이시이 유야 감독, 최희서 주연의 한일 합작 영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 출연했다.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된 작품이다.

3. 출연 작품

3.1. 영화

3.2. 드라마

3.3. 그외 활동

4. 이야깃거리

4.1. 가면라이더 쿠우가

4.1.1. 주연 발탁 과정

배우 양성 코스를 밟은 오다기리는 프레즈노대학과 토에이 사가 체결한 계약에 따라 일본의 배우 양성소에 들어갔다. 그 이후 몇몇 CF에 출연하며 인지도가 높아지던 상태였다.

그러던 중 오다기리는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오디션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특촬물은 가짜 영웅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라며 오디션을 거부했으나, 귀가하던 중 양성소 소속 감독에게 납치당해 강제로 오디션을 보게 된 것. 작품이 못마땅했던 오다기리는 대본을 무뚝뚝하게 읽고, “배역을 받으면 어떤 연기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성의없게 답하는 등 삐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보다못한 배우 양성소 관계자가 심사위원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한 후 오다기리 조의 목덜미를 잡아 끌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태도가 오히려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어 주인공으로 낙점된다. 가면라이더에 참여하기 싫었던 오다기리는 그대로 도피하려고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감독 타카테라 시게노리가 오다기리에게 연락한다. 그는 "난 지금까지의 가면라이더를 철저하게 부숴버리고 싶다. 나랑 같이 부숴버리자."라고 오다기리를 설득했고, 여기에 감화된 오다기리는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주인공 역에 응했다. 그는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 각본 수정에도 참여하는 등, 스태프들과 같이 작품을 만들어나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했다.

특촬물 장르 특성상 시청층이 넓지 않았으나,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오다기리는 국민배우로서 발돋움했다. 오다기리의 사례는 특촬물 주연 배우 = 라이징 스타로 가는 디딤돌이란 공식을 굳어지게 하는데 일조했다.

4.1.2. 경력삭제 논란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경우, 오다기리 조의 데뷔작으로 매우 유명한 작품이지만 소속사를 옮기며 갱신된 홈페이지의 프로필 란에는 가면라이더 쿠우가가 빠져 있고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가면라이더(히어로)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미묘한 여론이 형성 되었으며 이것이 확대해석 되어 상당한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소속사를 옮기기 전의 데뷔작 목록엔 가면라이더 쿠우가가 최상단에 위치했으나, 소속사를 옮긴 후엔 TV쪽의 기록이 대거 삭제 되었으며 쿠우가 역시 삭제 되었다. 이는 옮긴 소속사가 오다기리 조를 TV 배우가 아닌, 영화배우로서 등록하고 관리하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경우, 밀레니엄 라이더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원작자의 추모도 겸한 추모작이라 더더욱 문제가 되었으며 쇼와 라이더 때 부터 팬이었던 골수팬들 중 일부는 "주연 배우의 문제발언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주연을 바꾸어 리메이크해달라"라는 항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오다기리 조는 여러가지 다큐멘터리나 인터뷰로 오해를 풀었지만, 워낙 크게 터진 일이라 아직도 여러 음모론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말 잘라먹기 신공'과 '왜곡'으로 인해 일이 커져버렸다는 것. 그러나 비평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위의 발언들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주장이고 그 때 실제로 어떤 발언을 했는지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만 알 일이다. 어쨌거나 실제로 본인이 말한 것과 똑같은 발언을 했더라도 경솔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설상가상, 헤이세이 가면라이더 10주년 기념작인 가면라이더 디케이드에 쿠우가 역으로 재등장한다는 소문이 돌자 소속사에서 참가계획이 없다는 성명을 내었고, 제작위원회도 설사 출연하게 된다 해도 그를 감당할 여건이 아니다(이젠 너무 비싸니까)라는 식의 코멘트를 남겼다.

다만, 오다기리 본인은 이러한 발언들과 동시에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스탭들은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라는 발언도 하고 있다. 이치죠 카오루 경감 역의 카츠라야마 신고는 『HYPER HOBBY PLUS vol.5』(2008년)의 인터뷰에서 오다기리를 포함한 쿠우가 관계자들과 아직까지도 교류가 있다고 밝혔으며, 2008년 8월에 열린 쿠우가 동창회에도 오다기리가 출석하였다. 또한 2009년 11월에 극중 여동생인 고다이 미노리 역의 치자키 와카나가 결혼했을 때에 축하 스피치를 하기도 했다.

운 다그바 제바 역을 맡았던 배우 우라이 켄지도 인터뷰에서 오다기리는 지금도 쿠우가 출연진들에게 먼저 연락하고 동창회를 연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프로듀서 타카데라 시게노리와도 아직까지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이며, 타카데라가 카도카와로 이적하고 나서 만든 대마신 카논 최종화에 우정출연 하기도 했다.

4.1.3. 논란 종결

2015년 10월 30일에 타카데라 PD가 진행하는 '타카데라 시게노리의 괴수 라디오'에 오다기리 죠가 게스트로 출연하여, 처음으로 본인의 입으로 직접 쿠우가 흑역사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관련 기사) 우선 이 루머의 발단이 된 필모그래피 삭제건에 대해서는 '엄밀히 말하면 데뷔작도 아니기 때문에[27] 특별취급 할 수가 없고, 쿠우가를 적게 되면 다른 작품도 적을게 많아져서 부득이하게 삭제했다'고 해명.

또한 이 방송에서 쿠우가 오디션을 보기 1년 전에 구급전대 고고파이브의 오디션도 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타카데라가 쿠우가의 주역으로 오다기리를 캐스팅한 후, 전대 쪽 프로듀서가 괜찮은 녀석 들어왔냐고 묻자[28] 타카데라는 자신만만하게 굉장한 녀석이 들어왔다며 오다기리의 프로필을 보여줬다. 그 순간 전대 프로듀서의 표정이 굳으며 이 녀석 작년에 고고파이브 오디션장에서 깽판 부리고 간 녀석이라고 타카데라에게 알려준 후, "히어로같은거 싫다고 한 녀석인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걱정을 했다고.

당시 신인이었던 오다기리는 '리얼한 연기'를 하고 싶어서 연기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히어로물같은 과장된 연기는 하기 싫어했고 당연히 고고파이브 오디션도 건성으로 봤다. 오디션 과제 중에 '나만의 변신포즈와 변신구호'를 보여달라는 과제가 있었는데, 오다기리는 스탭들 앞에서 대놓고 '전 변신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거부, 그 태도에 스탭들은 격분했고 보다 못한 매니저가 오디션장에서 목덜미를 붙잡고 끌고 나갔다고 한다.[29] 다음해 쿠우가 오디션장에서도 오다기리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고, 그 불성실하고 의욕없는 모습에 스탭들 모두가 학을 떼고 반대했지만 타카데라만은 그의 이런 틀에 박히지 않은 모습에 끌렸다고 한다. 오다기리로서도 당연히 떨어졌겠거니 했는데 합격해버렸고, 이후 타카데라와 만났을 때 타카데라의 "히어로물을 부숴버리고 싶다"라는 열변에 공감하여 출연해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막상 오다기리는 스탭들의 우려와 달리 굉장히 성실하게 고다이 유스케를 연기했다. 때로는 스탭들이 각본 회의를 하는 자리에 슬그머니 들어가서 회의에 참가하여 다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등, 타카데라와 스탭들과도 굉장히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타카데라에 의하면 오디션 때에도 오다기리는 '저글링 가능합니까?[30]'라는 질문에 가능하다고 바로 대답하는 등, 기본적으로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모두 받아들여 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정말로 싫었다면 중간에 도망칠 수도 있었을텐데 배우로써 1년간 활동이 속박되는 히어로물의 출연을 결정해 준 것만으로도 오다기리의 프로로서의 자세에 감탄했다고.

다만 오다기리가 딱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변신"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 무슨 소리인가 하면, 과장된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오다기리는 쇼와시절 가면라이더 스타일의 "변~~~~~신!"이라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저음으로 '변'과 '신'의 중간을 길게 늘이며 카메라 시선으로 한껏 폼을 잡는 변신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감독으로부터 변~~~신!을 해달라는 요구는 받았지만, 촬영에 들어가서는 소소한 반항심(?)으로 "변신!!"이라고 짤막하게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이 받아들여졌고, 이 짤막하고 담백한 "변신!"은 헤이세이를 거쳐 레이와까지 가면라이더 변신 스타일의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다.[31]

종합하자면 오다기리 조가 특촬 히어로를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는 가면라이더 쿠우가라는 작품, 그리고 쿠우가를 함께 만든 배우들과 스탭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상술하였듯이 작품이 끝난 후에도 당시 출연배우들과 교류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 오다기리는 타카데라의 라디오 방송에서도 여전히 타카데라 프로듀서를 "리더"라고 부르며 "나는 리더가 부탁한 일은 거절해 본 적이 없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32]

다만 아쉽게도 가면라이더 팬들이 기대했던 오다기리 조의 가면라이더 지오 출연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33]

4.2. 논란 및 사건 사고

4.2.1. 코다 쿠미 사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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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홍보 일정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차 방한한 오다기리가 해운대에 있는 한 국밥 식당을 갔는데, 그를 알아본 식당 주인이 그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기 이름인 오다기리 조가 아닌 엉뚱하게도 '코다 쿠미'라고 사인을 해줬다. 자기 이름을 써주고 그 옆에 별도로 쓴 것이 아니라 본인 사인은 전혀 없고 '코다 쿠미'라는 글자만 있었다. 코다와 오다기리는 사적인 인연도 없는 사이이다.[34]

식당 주인은 일본어를 몰라서인지 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를 발견한 식당 주인의 자식이 인터넷에 이 사진을 올리면서 일부 웹사이트에서 논란이 됐다.관련 게시물

물론 오다기리의 하이개그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2달 후 마이웨이가 개봉하면서 홍보 일정차 다시 방한한 오다기리 조는 사인 사건이 한국에서 논란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일본에서 사인을 해줄 때에도 그때 떠오르는 말이나 그림을 대신 써주기도 한다며 오해가 있었다면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 영화 홍보 일정이 끝날 무렵 본인이 식당에 찾아가 사과했다고 한다.#

한편 마이웨이 언론시사회에서는 뜬금없이 중국어로 '니하오'라고 인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됐다. 오다기리 조는 이에 대해 "난 항상 판빙빙 다음에 인사를 하게 돼있었는데, 그녀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객석에서는 '와~'하고 함성이 터져나온다. 그런 모습이 왠지 '나 한국 너무 좋아해요'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조금 비틀어서 중국어로 인사해보고 싶었다" 라고 해명했다.

사실 이러한 오다기리의 기행은 언론에 의해 너무 나쁘게 포장된 감이 크다. 일단 사인 사건의 경우는 오다기리가 평소에도 일본팬들에게 사인해줄 때 희한한 그림이나 멘트를 넣는 등 기행이 많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혐한 의혹은 '본인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에다가 '한국 언론의 반일적인 색안경'이 만들어낸 퓨전이라는 소리. 배우 본인은 한국 감독과 자주 작업을 하기도하고 한국에서 인터뷰 했을때 한국에 대해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본인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배웠다"라고 말했다.

4.3. 기타



[1] 머리가 매우 작고 다리도 길어 비율이 상당히 좋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프로필 신장 182cm인 장동건과 찍은 전신샷에서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장동건보다 작은 것을 보면 실제 키는 그보다 훨씬 작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불혹을 넘긴 나이인 만큼 젊었을 적보다 키가 줄었을 가능성도 있다.[2] 차남은 2014년에 태어나서 2015년 교액성 장폐색으로 사망했다.[3] 그 예로 출연작들을 보면 소위 예술 영화들이 꽤 많다. 그렇다고 TV드라마를 안찍은 건 아니지만.[4] 주연이 일본의 원로배우 에모토 아키라다.[5] 왕가위의 촬영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도일을 기용했다.[6] 小田切譲 (오다기리 조) 명의.[7] 바질리스크 코우가인법첩의 영화판. 원작훼손은 고사하고 스토리 전개까지 이상해서 망작.[8] 일본 원제는 그냥 '奇跡'. '공기인형'을 찍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이다.[9] 북한 인민군 병사로 카메오 출연했다. 풍산개 감독인 전재홍 감독과는 김기덕 감독의 비몽 촬영 당시 인연을 맺었는데, 전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카메오 출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마이웨이 촬영장에서 차로 6시간이나 걸리는 경기도 화성까지 가서 촬영했다고 한다. 참고로 스텝롤에 특별출연으로 언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스텝롤에는 '북한군 1'로 올라갔다.[10] 카메오로 출연. 바가지 머리를 한 그 사람 맞다.[11] 게임판에서도 동 배역의 목소리 역을 맡았다.[12] 회상 출연.[13] 8화에서는 감독, 각본도 담당.[14] 2화, 6화, 7화, 9화, 10화 출연.[15] 최종화 출연.[16] 13화, 16화, 19화, 20화 출연.[17] 최종화 출연.[18] 윤동주가 유학했던 곳으로 유명한 교토 도시샤대학의 설립자다.[19] 최종화 출연.[20] 3화부터 출연.[21] 29화, 30화 출연.[22] 5화부터 출연.[23] 1화 ~ 4화 출연.[24] 6화 ~ 9화 출연.[25] 40화부터 출연.[26] 최종화 출연.[27] 오다기리는 쿠우가 이전에도 드라마, 영화 등에 수 차례 출연했다. 물론 '주연 데뷔작'은 쿠우가이다.[28] 당시 쿠우가의 주역이 좀처럼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29] 그럼 오디션을 왜 봤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인 연기자의 경우는 작품을 고를 위치가 안 된다는 점을 보면 소속사에서 강제로 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소속사에게 있어서 신인배우란 해당 배우가 뜨기 전까진 각 드라마나 영화에 들어가는 소품정도 취급이다. 영화사나 드라마 제작사에서 배우모집 오디션을 하면 소속사 측에선 배우라는 촬영소품(요소)를 가지고 발품을 파는 식이다.[30] 이 저글링 묘기는 작중 유스케의 주특기 중 하나로 자주 등장한다. 첫 등장 시에 저글링을 했고, 최종화 마지막 장면에서도 저글링을 한다.[31] 오다기리 본인도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내가 후배들을 구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2] 실제로 상술한 오다기리가 카메오 출연한 대마신 카논은 TV도쿄 계열로 일부 지역에만 방송된 마이너 특촬물이고, 이 '괴수라디오' 역시 도쿄 일부 지역에서만 방송하는 소규모 라디오이다. 양쪽 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오다기리 조 클래스의 배우가 나올 곳은 아니다. 그런데도 타카데라가 부탁했다는 이유 하나로 출연한 것이다.[33] 누누히 말하지만, 이는 오다기리 조의 몸값이 쿠우가 당시보다 너무나 비싸진 것이 제일 크게 한 몫한 것도 있다. 조 본인이 자신의 이미지 고정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상술되어 있듯 배우는 아직도 쿠우가에 큰 애정을 갖고 있다. 그저 배우에게 있어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은 대체로 배우에게 좋은 영향보단 나쁜 영향이 많기 때문. 뭘해도 어지간해선 이미지가 고정된 캐릭터를 투영당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악의 경우가 스타트렉에서 스팍을 맡던 레너드 니모이. 평생토록 스팍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했다.[34] 다만 가면라이더 팬들 사이에서는 코다 쿠미가 쿠우가의 먼 후배 작품인 가면라이더 기츠의 오프닝을 맡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인연이 생겼다는 반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