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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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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소속 우완 투수 정대현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903001257840B5.jpg
대학 선수 시절 (출처: 포토로)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914124823494A3.jpg
국가대표 시절 (출처: 포토로)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본인의 말로는 중학교 시절엔 불같은 강속구 투수였으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사이드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군산상고 재학 중이던 1996년에 봉황대기에서 차승 백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결승에 올라온 김수경의 인천고를 꺾고 군산상고를 우승시켰다. 그리고 2000년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아마추어 신분으로 시드니 올림픽 드림팀에 합류하여 미국전 2게임에 선발로 등판, 비록 편파 판정으로 승리를 따내진 못했지만, 각각 7이닝 무실점과 6⅔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여 '미국 킬러'란 별명이 붙었으며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단, 정대현은 이 때 병역특례(예술체육요원)를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제2국민역 판정을 받은 뒤였다.[1]

3. SK 와이번스

{{{#fff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1번}}}
강병규
(2000)
정대현
(2001)
제춘모
(2002)
{{{#fff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21번}}}
조규제
(2001)
정대현
(2002~2011)
백인식
(2012)
파일:1487428789_daehyun.jpg
569이닝 32승 22패 99세이브 76홀드 ERA 1.93

3.1. 2001~2007 시즌

파일:external/www.sksports.net/Large_200107312315346184_510.jpg

입단 초기 시절.
경희대 졸업 후 2001년 계약금 4억 7,000만 원에 SK 와이번스에 입단하여 주로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원래는 옛 연고 지역 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의 고졸 2차 우선지명된 것으로, 쌍방울 해체 후 선수단과 지명권을 인수한 SK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2]

입단 초기엔 '패스트볼이 너무 느리다.', '언더 보기가 귀한 국제 무대에서나 통하지 국내에서의 경쟁력은 없다', '선발로 뛰기에는 너무 단조롭다.'는 평도 많았고 출전 기회도 적었지만, 투구시 팔 각도를 조금 위로 올려 고치는 등 피나는 노력 끝에 2004년부터 불펜중간 계투 보직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2007년에 팀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입단 첫 해부터 1군 무대에서 뛰며 담금질하긴 했지만 첫 해는 신인답게 적은 기회와 함께 부진한 편이었다. 이 해가 정대현 커리어에서 가장 부진한 2016년을 포함해 유일하게 ERA+가 100을 못 넘는 시즌이다.(87.2)[3] 그러나 두번째 시즌부터 빠르게 적응해 1군 레귤러로 들어갔다. 2002년까지는 선발 유망주로써의 가능성도 여겨지며 가비지 이닝을 소화하거나 2군에서 선발로 몇 경기 나오긴 했는데[4], 상술한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단기전이던 올림픽 때 드러나지 않던 꾸준한 로테이션을 돌기에는 무리라 판단되어 2003년부터는 셋업맨으로 불펜으로 전향했다.

2004년부터 마무리로 전향한 정대현은 제 기량을 완전히 펼쳤으나, 2005년은 부상 문제로 적은 경기밖에 뛰지 못하며 2006년에 다시 셋업맨으로 돌아갔다가 마무리로 재전향하여 ERA 1.94를 기록한다. 이 시기 우규민과 함께 언더-사이드암 불펜 투수로 정상급의 기량을 날렸다.

그리고 2007년,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은 많은 불펜 투수들 가운데 정대현을 주전 마무리 투수로 세우고 용병을 선발 투수(레이번, 로마노)로만 뽑는 결단을 내렸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어 78⅓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0.92에 27세이브를 세우며 SK의 수호신으로 자리잡게 된다. 참고로 국내 프로야구 역사에서 0점대 평균자책20세이브 이상을 한 시즌에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선동열과 정대현, 유동훈, 오승환까지 4명뿐이다. 2007년 이래 SK의 불펜진 운용을 벌떼야구라고 지칭한 데에서 나온 별명이 바로 여왕벌.

꽤 이닝이 많아 보이는데, 이 시기 마무리 투수들은 좀 이닝 소화가 많았다. 오승환, 우규민 등의 투수들도 70이닝을 넘겼으니...

3.2. 2008 시즌

2008년에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언더핸드 투수의 특성 탓인지 몸 상태가 나빠진 까닭에 블론세이브 수도 치솟고, 특히 올림픽 직전인 7월엔 7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등 여러모로 망가진 상태였지만, 미국전 등을 의식해 우려 속에서 베이징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파일:/image/003/2008/08/13/NISI20080813_0007970645_web.jpg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경기에서는 원래 주력 마무리로 낙점됐으나 방어율 99.9라는 전설의 사진만 남기고 사라진 한기주, 배탈로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던 오승환을 대신해 중요한 고비에 등판해 상대 팀의 추격을 끊고 승기를 되돌리는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국제전에 강한 면모를 다시금 선보였다.

그리고 아마 최강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8.1이닝 최고의 호투를 펼치고 심판의 오심으로 강민호와 함께 내려간 류현진을 구원하여 등판[5]했고 놀랍게도 실실 웃으면서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올라와서 야구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김경문 감독도 놀랐다고. 9회 1사 만루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상대 타자는 쿠바 타선의 중심 타자인 율리에스키 구리엘.

시작부터 한복판에 스트라이크 2개를 꽂아넣어서 한국에서 야구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의 99%를 식겁하게 했다. 허구연 해설도 순간 긴장.[6] 그리고 제 3구째에 아악~! 뜨블프레이! 뜨블프레이! 병살로 경기를 매조지하여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파일:구리엘병살.gif
당시 병살을 잡아내는 장면.
허구연: "고의 카볼 투슌데"[7]
한광섭: "저 오다가 정말 직각으로 하나 떨어져주면 좋은데요, 자 투나씽!"
등의 멘트 때문에 DC 야구 갤러리에서는 고의 카볼러, 직각으로 불린다.

그 후 귀국해서 리그에서는 또 고전했다. 07 우규민을 보는 듯한 블론질을 일삼았을 정도. 정말로 국제전에선 남다른 면모를 보이는 듯. 2008 시즌 성적은 방어율 2.67에 4승 3패 20세이브, 블론세이브가 7개나 되는 부진한 성적이었으나 한국시리즈에서는 올림픽 당시로 돌아간 듯이 맹활약했다. 특히 3차전에서 역시 올림픽 때와 마찬가지로 9회 1사 만루의 상황에 등판, 그 해 타율, 출루율 1위, 최다 안타를 기록한 김현수를 상대로 그 또한 병살을 잡고 승리를 따내어 당시 언론에서는 올림픽에서 중요한 찬스에서 활약한 두 선수가 명암이 엇갈렸다고 평했다.[8]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 후에 맞은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초라한 성적을 내는 바람에 팀은 아시아시리즈 등정에 실패했다. 이건 대만 퉁이전에서 앞서 선발로 나왔다가 난타당하며 회생불능으로 불을 질러놓은 채병용의 탓이 크지만, 정대현의 구위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것도 사실.

3.3. 2009 시즌

2009년 각 구단 감독들의 새해 덕담을 다룬 기사에서 김성근 감독이 "올해는 정대현이 세이브왕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팔꿈치 부상이란 악재로 장기간 결장했다. 정대현이 없는 사이 마무리 공백은 이승호가 메웠다. 다행히도 빠르게 복귀에 성공해 이승호 앞에서 셋업맨으로 주로 뛰었고, 시즌 후반기 이승호가 구위저하로 부진에 빠지자 클로저로 돌아가는 등, 보직을 오가면서 불펜의 중추로 맹활약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6경기 52.2이닝 2승 3패 10세이브 13홀드 방어율 1.20. 심지어 피홈런이 적어서 FIP는 그 2007년보다도 미세하게 낮다.[9]

3.4. 2010 시즌

2009 시즌 종료 후 무릎 수술에 들어갔고 재활에 전념하다가 2010년 5월 7일 부로 1군에 복귀했다. 6월 10일, 김광현이 대 삼성전에서 아웃카운트 하나 남겨놓고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최형우에게 내준 안타 하나 때문에 이루지 못한 후[10] 인터뷰에 "오늘 너무 수고했다. 개인적인 소견은 신명철에게 힘을 빼고 승부했어야 했다. 다음 기회에 꼭 이루길 바란다. 수고했고 덕분에 잘 쉬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2010년 7월 20일, 복귀 이후 이어졌던 26경기 무실점 기록이 송지만에게 3루 강습 안타를 맞고 깨졌다. 이후 송지만에게 교회오빠라는 별명이 생겼다. 부상 위험 때문에 작은 이승호가 마무리를 맡았기 때문에 이 해에는 주로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1⅔이닝 2피안타 1피홈런 3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5.40,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3.5. 2011 시즌

파일:정대현 2011.jpg
SK 와이번스에서의 마지막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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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렸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4. 롯데 자이언츠

{{{#000000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8번}}}
김근호
(2011)
<colbgcolor=#000000> 정대현
(2012~2016)
노경은
(2016~2018)
{{{#000000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8번}}}
고원준
(2016)
정대현
(2016)
안태경
(2017)
{{{#000000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1번}}}
강승현
(2016)
정대현
(2017)
김대우
(2018~)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80901000947600077011.jpg
157.1이닝 14승 7패 7세이브 45홀드 ERA 3.20

2011년 12월 13일 롯데 자이언츠와 4년 총액 36억에 전격 계약을 맺었다.# 정대현이 미국에서 귀국한지 2시간만에 계약이 성사되었다. 보상 선수로는 임경완의 보상선수로 픽했던 임훈이 20일만에 SK로 되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정대현을 임경완과 트레이드한 셈이 되었다.

SK 시절의 21번은 송승준이 쓰고 있어서 38번을 선택했다. 원래 11, 21, 31, 38, 41번을 선호했는데 21번은 상술한 이유로, 11번은 영구결번이라서, 41번은 볼티모어에 입단하면 받을 번호라 롯데에서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배제했고 31번은 손아섭이 달고 있어 38번을 고른 것. 원래 38번은 양대원이 쓰려고 했던 번호였으나 양보해서 달 수 있었다.

4.1. 2012 시즌

파일:정대현-20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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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13 시즌

파일:정대현-20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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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014 시즌

파일:정대현-201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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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3일 SK전에서 100홀드를 기록하면서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100홀드-1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하였다.

4.4. 2015 시즌

2014 시즌 후 팔꿈치 수술을 받아 5월 초 복귀 예정이었는데, 실제로는 6월 말이 되어서야 실전에 투입되었다.

6월 24일 화성 히어로즈와의 퓨처스 경기에서 첫 실전 투구를 한 뒤 7월 26일 상무전까지 총 9경기 9 1/3이닝 탈삼진 6개 1실점을 기록했다.

7월 28일 1군 엔트리에 복귀하였고, 같은 날 사직 LG전에서는 7회 초 무사 1루 상황에 강영식 다음으로 등판하여 2K 퍼펙트로 이닝을 마무리하면서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

하지만 8월 2일 홈런 포함 3실점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8월 8일 한화전에선 8회에 등판해 1볼넷 2홈런 3실점[11]으로 아웃카운트 하나 잡고 강판. 조인성에게 쓰리런 홈런을 얻어맞으며 BS를 기록한 것이 이 날 재앙의 시초였다.

그 후로 8월 13일부터 9월 27일까지는 내내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그 사이 8월 15일엔 첫 승을, 9월 1일에 시즌 2승을 거뒀다. 롯데의 가을야구에 한 줄기 희망이 되었고, 실제로 극적인 가을야구 막차 티켓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이었지만, 9월 중순부터 델동님의 신묘한 운용으로 6연패를 당하면서 사실상 가을야구는 물건너갔다.

그 와중에도 방어율은 꾸준히 떨어져 2.6이 되었다. 2015 시즌 롯데 불펜이 롯데시네마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불을 많이 질렀던 만큼 롯데 팬들의 심정은 내년엔 제발 풀타임으로 밥값 좀 해 달라고. 2015년 최종 성적은 ERA 2.95 19경기 2승 1패 3홀드 3세이브 18 1/3이닝 WHIP 1.25로 경기를 많이 뛰지는 못했으나 클래스는 아직 여전함을 보여준 시즌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월 7일 발표된 프리미어 12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선발되었다. 선발된 투수중에서 유일하게 20이닝 이하의 활약만으로 선발되었다. 프리미어 12 직전의 평가전인 2015 서울 슈퍼시리즈 2차전 8회말에 등장하여 공 여덟개로 쿠바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자신이 국제용 투수라는 것을 직접 증명했다. 대회 내에서 포지션은 마무리 이현승 앞을 든든하게 틀어막는 셋업.

여담으로 쿠바 대표로 정대현의 최대 피해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이 나왔는데, 덕아웃에서 후배들이 삼진 당하는 장면을 보며 어이가 없었는지 웃기만 했다. 그리고 구리엘 본인도 11월 16일 8강전에서 정대현과 다시 만났는데, 2구만에 또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며 7년만의 해후는 막을 내렸다.

2015 시즌을 끝으로 4년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기간이 길었던 관계로 FA 재자격을 얻지 못해 시즌 후 1억 8,000만 원 삭감된 3억 2,000만 원에 연봉 계약을 했다.

4.5. 2016 시즌

일단 아프다는 이야기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롯데 팬들이 프리미어 12에서 한 활약 반만 해줘도 좋겠다고 수근대던 중 개막했고, 4월 1일 개막전에서 2:0으로 팀이 앞선 7회 1사 1루에서 등판. 견제구가 빠지면서 1루 주자 서건창이 3루로 진루했고 이택근에게 희생 플라이를 내주면서 실점했다. 이후 강영식으로 교체되었다.

4월 2일에는 밀어내기 볼넷을 주면서 패배에 공헌했다.

4월 5일 사직 홈 개막전에서는 오랜만에 솔리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7회 1사까지 완벽한 투구를 보였던 박세웅이 강영식으로 교체되었고, 강영식박정권을 1루수 땅볼로 잡아내는 듯 했으나 베이스커버가 미묘하게 늦는 바람에 출루를 허용했다. 하지만 정대현이 올라와 이닝을 종료시켰다. 박세웅손승락의 호투에 가렸지만 팀 승리의 디딤돌이 되었다.

2016 시즌 들어 특히 더 불을 지르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의외로 5월 20일 기준 홀드 7개로 공동 4위다. 문제는 이 홀드가 한두 타자 겨우 아웃카운트 잡고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에 허용한 다음 후속 투수가 잘 막아서 기록했다는 것. 승계주자가 있는 경우엔 아웃카운트를 잡고 실점하지 않은 경기가 단 두 경기에 불과하다.

5월 26일 LG전에서 선발 투수 레일리의 뒤를 이어 7회 1사후 등판하여 잘 막고 내려갔고 이후 팀이 역전하면서 첫 승을 기록했다.

6월 3일 NC전에서 강영식이 남긴 두명의 승계주자에 점수를 허용하며 결국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결국 조원우 감독도 인내의 한계가 온 건지 다음날 바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명목은 골반 부상이지만, 성적만 보면 1군 마운드에 남는 것이 신기한 수준. 이 날 기준 평균자책점이 4.40, 승계주자 실점은 9점, 승계주자 실점율은 .600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7월 29일 이정민을 대신해 1군에 복귀했다. 수원 kt전에 6회말 2사 1, 2루 상황에 등판해서 황재균의 호수비로 분식회계 없이 넘어갔고, 8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활약을 펼쳤다. 이게 부활의 발판인지 일시적인 일인지는 미지수.

그리고 8월 4일 넥센전에서 8회에 등판하자마자 6월 19일 이후로 홈런이 없던 김하성에게 시즌 15호 홈런을 맞고 윤석민에게도 안타를 허용해 단 공 4개만 던지고 강판당했다. 그리고 8월 7일 두산전에서 9회초 등판했으나 1실점하는 등 부진했고, 이날 등판을 끝으로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12] 이후로는 1군에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그런데 이번엔 윤길현이 정대현의 포지션을 이어받아서 롯데 팬들의 속을 제대로 뒤집어놓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SK산 FA 먹튀라는 공통점이 있다.

2016년 성적은 결국 빼도박도 못하는 먹튀. 나이가 들어가면서 구위와 무브먼트가 하락하면서 볼카운트 싸움에서 밀리고, 결국 볼넷으로 출루시키거나 억지로 존에 집어넣고 맞아나가는 경우가 늘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노쇠화와 연결된 문제라는 것. 곧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나아질 가능성도 그렇게 크지 않다. 언더핸드 투수가 드물어서 '낯설다'는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국가대항전과는 달리 국내에서 정대현은 분석당할대로 당한 투수라 통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4.6. 2017 시즌

이대호가 해외 생활을 마치고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하면서 천적이던 정대현과 같은 팀 동료가 됨에 따라 주목받았다.

그러나 1월 말이 되도록 연봉 계약을 못한 것은 물론[13] 스프링캠프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1월 31일, 무려 2억이나 삭감된 연봉 1억 2000만원에 계약했고, 대만 2군 캠프에 합류했다.#

그러나 2017년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1군에 오르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롯데 불펜이 박진형-조정훈-손승락의 필승카드를 갖추었기에 특별히 올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즌이 종료된 후, 17년 간의 프로 생활을 끝내고 은퇴했다. 은퇴식을 치르지 못해 아쉽기보단 본인 스스로 2군에서 마음으로 은퇴식을 치렀기에 후회는 없다고.

5. 국가대표 경력

특이한 투구 폼의 생소함과 불펜투수로서의 확실한 실력을 갖춘 정대현은 2006년 이후 선수 선발이 다른 곳에 방점이 찍혀 있던 아시안 게임 두 번을 제외하고, A급 국가대표팀이 참여하는 모든 국제대회에 선발되었다. 2006년 이전까지 따지면 모든 국제대회까지는 아니다. KBO 리그의 정예 1군이 선발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14]까지 승선했다면 정대현은 프로 데뷔 이후, 1군 국가대표가 발탁되는 자리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기록의 소유자가 될 뻔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또한, 2017 WBC도 그의 커리어 말미와 시기가 겹치지만, 사실상 은퇴 직전에 있었던 대회였기에 정대현이 출전했을 법한 대회로 꼽히지는 않는다. 정리해보면, 정대현은 그의 프로 데뷔 이후 KBO 정예 1군이 선발된 모든 대회 중 단 네 번을 제외하고 모든 대회에서 출근 도장을 찍은 셈이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면, 국대 단골로 불리는 선수들 중 정대현만큼 많은 대회를 출장한 선수가 없다.[15]

1999 14회 인터콘티넨탈컵,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15회 인터콘티넨탈컵,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7 제2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008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5 WBSC 프리미어 12로서, 2015시즌까지 총 10개 대회이다.[16]

최상급 선발진이 출전하지 않은 대륙간컵을 제외한 시드니 올림픽부터 1회 프리미어 12까지의 정대현의 성적은 34이닝 5실점으로 평균자책점 1.32이다. 내구도의 문제가 있기에 길게 던지지는 못하지만, 궁내 체고의 싱카볼 투수로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영광의 순간들에 크게 기여한 핵심 불펜 요원이었으며 전설이 되었다.

이런 신기할 정도의 국제성적은 아무래도 정대현 자체가 좋은 투수이고(통산 방어율이 2.13인 투수다!) 별로 흔하지 않은 투구폼인 언더핸드 투수여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17]정규 시즌 때는 약점인 내구도나 체력이 드러나지만 단기 승부인 국가대표 때는 그런 면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덕도 큰 듯. 게다가 본인 성격 자체가 매우 침착하고 배짱이 두둑한데다 승부사 기질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비록 그는 은퇴했지만 2019 프리미어 12 쿠바전에 전년도에 비해 부진했지만 언더스로 투수인 박종훈을 선발로 세워 승리한 것은 그의 국가대표의 행보가 얼마나 큰 자산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5.1. 1999 인터콘티넨탈컵

정대현이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된 것은 호주에서 열린 1999년 14회 인터콘티넨탈컵(대륙간컵)으로서, 1~3학년생들 위주로 출전한 이 대회에서 정대현은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8.2이닝 10탈삼진 무실점을 비롯해, IBAF 공인 경기[18]에서 쿠바전 2이닝을 투구하며 역대 처음으로 쿠바를 이기는 데[19] 중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총 성적은 18.1이닝 3실점 21탈삼진.

5.2. 2000 시드니 올림픽

파일:PqafY1M.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타수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자책점 4구 삼진
2 2 49 13⅓ 1.35 0 0 0 0 9 2 2 2 11
이런 대륙간컵에서의 호투를 기반으로 정대현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된 상태였지만, 아직 대학생 신분인 유일한 아마추어 선수로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선발된다. 정대현은 미국과의 예선전과 준결승전 2경기에 모두 미국 선발 로이 오스왈트 상대로 선발로 등판해 7이닝 5탈삼진 6피안타 무실점, 6.1이닝 3피안타 6탈삼진 2자책을 기록하며 호투했으나, 두 경기 모두 결국 패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투는 불펜진 소모를 최소화함으로써 한국이 남자종목 구기종목 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기여로 작용했다.

5.3. 2002 인터콘티넨탈컵

2002년, 정대현은 아마와 프로가 섞인[20] 15회 인터콘티넨탈컵 대표팀에 선발된다. 쿠바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정대현은 도미니카와의 예선전에서 9이닝 11탈삼진 1실점으로 완투를 하기도 하면서 호투했으나, 아쉽게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7회 투런홈런을 맞아 6이닝 2실점을 함으로서 우승을 하지는 못했다. 최종 성적은 20.2이닝 3실점 24탈삼진.

5.4.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파일:external/post.phinf.naver.net/mug_obj_148642929200059079.jpg
2006년 제 1회 WBC에 선발된 정대현은 예선 1라운드 중국전 1이닝 무실점 2탈삼진, 예선 2라운드 멕시코전 1이닝 무실점 3탈삼진, 미국전 1.1이닝 2실점 1탈삼진으로, 널널한 중국전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권 팀인 일본이나 대만전에서는 기용되지 않았다. 미국전에서는 9회초에 켄 그리피 주니어에게 적시타,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희생 땅볼을 내주면서 2실점 했다. 최종 성적은 3.1이닝 2실점 6탈삼진.

5.5.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파일:200712022305341101_1.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자책점 4구 삼진 상세
2 0 1⅔ 0.00 0 0 0 1 1 0 0 0 2
2007년, 아시아 야구 연맹에 배정된 1장의 베이징 올림픽 본선 진출티켓이 걸려있었던 12월 대만에서 열린 2007 제2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국대표팀에 2007시즌 SK의 첫 우승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정대현은 국가대표 마무리로 선발되었다. 이전까지는 언더핸드의 낯섬을 무기로 미국이나 중남미팀을 상대로 등판하는데 역할이 한정되었지만, 리그에서도 인정받은 안정감으로 이 대회부터는 동아시아 팀과의 경기에도 등판하기 시작했다. 필리핀과의 경기는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대만전에서 9회말 0.2이닝 무실점으로 경기를 매조지했고, 일본전에서 9회초 등판해 1.0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한국은 결국 2위로 올림픽 진출에 일단 실패했다. 최종 성적은 1.2이닝 무실점.

5.6. 2008 베이징 올림픽

파일:/image/001/2008/08/16/PYH2008081605050001300_P2.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피홈런 자책점 사구 삼진 상세
3 0 4 2.25 0 0 0 2 2 1 1 1 0 7
2008년 3월초에 3장의 출전권을 두고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국가대표팀에도 팀의 마무리로서 참가하였다. 한때, 오른쪽 팔꿈치와 왼쪽 무릎 통증을 호소하면서 실전에 한동안 나서지 못해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부호가 붙었다. 하지만, 디미디어 티렉스싱농 불스와의 평가전에서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멕시코전에서 9회초 등판해 1.0이닝 무실점 삼자범퇴 마무리, 대만전에서 1점차 8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등판해 9회 2사 1,2루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1.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팀의 마무리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최종 성적은 2.1이닝 무실점.

2008년 시즌 중 전 시즌과 달리 부상 등으로 인해 한참 부진하던 정대현이 과연 제대로 된 활약을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즌 활약은 좋았던 한기주와 오승환이 대회에서는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결국 정대현이 마무리 투수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이 결승에서 쿠바와 맞붙었을 때 선발이었던 류현진이 8회까지 잘 던지고 9회까지 올라왔으나 1사 만루 상황을 만들었다. 이때 만루가 되는 볼넷에 포수 강민호가 볼판정에 항의하자 퇴장 명령이 떨어졌다. 문제는 올라올 포수가 없었던 것인데, 부상을 안고 있던 진갑용이 올라오면서 김경문 감독에게 정대현을 마무리로 추천했다고 한다. 김경문은 당시 윤석민을 올리려 했는데 왜인지 진갑용 말대로 정대현을 올렸다고. 윤석민은 당시 매우 긴장하고 있었는데, 진갑용이 보기에 정대현은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21] 정근우가 훗날 스톡킹에서 밝히길 정대현은 강민호가 퇴장당했을 때 불펜 망에 매달려 나 좀 내보내 달라고~ 라고 외칠 정도로 자신이 나가서 막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막겠다고 자신있게 나가는 모습을 통해 엄청난 강심장과 승부사 기질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구연: 고의 씽볼 투데…(한광섭: 네!)
한광섭: 자 오다 정말 직각으로 하나 떨어져 주면 좋은데요. (투수 투구동작) 자, 투나씽[22]!
(타자 타격)
한광섭(허구연): 유격수! (아악!) 잡았어요! (뜨블프레이! 뜨블프레이!) 어! 1루로-!!(고엥민! 고엥민-!!) 아아악-!![23]
허구연: 아아앆-!! 우승이에요~! 증대여~~!
허구연: 하으아아아아아아!!! 샤우팅이라기 보다는 비명, 거의 혼절하셨다[24]
한광섭(허구연): 대한민국~! (예~!) 우승입니다~! (예~! 우승이에요!) 베이징 올림픽 야구 우승! 대한민국!!
-MBC 중계진의 우승 순간 멘트
그리고 정대현은 병살로 쿠바 타선을 잠재우고 한국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완성했다. 이때 직각갑이라는 별명을 획득했으며, 허구연의 발음 때문에 궁체싱이라는 별명도 획득했다.

이 장면은 단순히 금메달 순간이라는 의미를 넘어 한국 야구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장면으로써 아직까지도 전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한국 야구사 최고의 명장면이며 정대현은 영원히 남을 그 명장면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기별 성적은 예선 미국전 중계로 2.2이닝 1실점, 예선 일본전 0.2이닝 무실점 마무리, 결승전 쿠바전 0.2이닝 무실점 마무리로, 최종 성적은 4.0이닝 1실점 7탈삼진.

5.7.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파일:/image/001/2009/03/08/PYH2009030806740001300_P2.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피홈런 자책점 사구 삼진 상세
3 0 1⅔ 0.00 0 0 1 0 2 0 0 0 2 0
2009년 제 2회 WBC에도 출전한 정대현은 예선 1라운드 중국전 0.2이닝 무실점, 예선 2라운드 멕시코전에서 0.2이닝 무실점 1탈삼진, 준결승 베네수엘라전 0.1이닝 무실점 1탈삼진으로 불펜의 핵심요원중 하나로서 활약하였다. 최종 성적은 1.2이닝 무실점 2탈삼진.

5.8.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파일:external/imgnews.naver.com/NISI20101116_0003689860_web.jpg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KBO가 늘상 방점을 두던 선수 선발 기준을 소홀히 한건 아니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의 부진을 씻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고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으로도 동기부여가 확실히 되던 선수들과 그 선발기준 대상자는 아니지만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들을 선발하였고, 정대현 또한 포함되었다. 무릎 수술을 받고 7월에야 복귀한 정대현은, 공 8개로 타자들을 그야말로 농락하면서 파키스탄전에서 1이닝 무실점했고, 준결승 중국전에 마무리로 등판해서 0.1이닝 무실점을 함으로서, 딱 두 경기만 등판하고 금메달 포상금 2억과 함께 추가적인 연금포인트를 획득했다.[25] 최종 성적은 1.1이닝 무실점.

5.9.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파일:/image/311/2013/02/28/1362056637692_59_20130228222104.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피홈런 자책점 사구 삼진 상세
2 0 1⅓ 0.00 0 0 0 0 0 0 0 0 1 1
2013년 제 3회 WBC에서는 본선 1라운드 네덜란드전에서 0.2이닝 무실점, 호주전에서 0.2이닝 무실점 1탈삼진으로 본선 1라운드 3경기 중 2경기에 나왔으나, 팀의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더이상 등판할 기회가 없었다. 최종 성적은 1.1이닝 무실점 1탈삼진.

5.10. 2015 WBSC 프리미어 12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33669_46801_2144_99_20151106085907.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자책점 4구 삼진 상세
5 0 5 0.00 0 0 0 0 1 0 0 2 5 ##
커리어 사상 마지막 대표팀. 2015년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에도 당연스럽게 선발된 정대현은 어느새 국가대표팀에서 최고참이 되었다. 팔꿈치 수술과 재활로 인해 시즌 중에는 딱히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국가대표 체질인지 평가전을 겸한 서울 슈퍼시리즈에서 베이징 기억이 남아있는 쿠바 대표팀을 괴롭히며(....) 건재함을 알렸다.

예선 도미니카전 8회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 1탈삼진, 예선 멕시코전 8회말 1사에 등판해 1.1이닝 무실점, 8강전 쿠바전 8회말 1사에 등판해 율리에스키 구리엘로부터 베이징에서의 그 코스로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한걸 포함해 1.1이닝 무실점 2탈삼진, 준결승전 일본전 9회말 등판해 0.2이닝 무실점 1탈삼진, 결승전 미국전 8회 1사에 등판해 0.2이닝 무실점 1탈삼진으로 최고참이자 불펜의 핵심 요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우승에 이바지하였다.

이 대회에서 정대현 스스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준결승에서 한국이 4-3으로 역전에 성공한 9회 말에 올라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였던 야마다 테츠토를 상대로 바깥쪽으로 걸치는 제구로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하며 삼진을 빼앗아 반격의 예봉을 꺾어버렸다.[26] 그 해 트리플 쓰리를 달성한 야마다가 공격을 풀어주기를 바랬던 일본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27] 이어 쓰쓰고 요시토모에게는 날카로운 타구를 허용했으나 1루수 박병호가 공을 잘 막아내며 땅볼로 처리했고, 그 뒤 나카타 쇼의 살짝 먹힌 타구가 중전 안타가 되어 출루를 허용하자 이현승으로 교체되었다.[28] 그리고 이현승이 후속타자를 잘 막아 결승에 진출했고, 이후 결승에서 미국에게 8-0 완승을 하며 우승하게 된다. 최종 성적은 5이닝 무실점 5탈삼진.

6. 연도별 주요 성적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정대현의 역대 KBO 기록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승률 4사구 탈삼진 WHIP ERA+ sWAR
2001 SK 18 0 0 0 0 16⅔ 5.40 19 2 - 11 20 1.74 87.2 0.31
2002 24 1 0 0 0 42 3.21 37 3 1.000 11 30 1.12 130.9 1.13
2003 37 4 3 2 8 51 2.29 33 4 0.571 20 34 0.98 181.8 1.61
2004 52 2 3 2 16 69⅓ 2.34 62 2 0.400 19 50 1.10 180.0 2.66
2005 20 1 0 3 6 24⅓ 0.37 10 0 1.000 6 18 0.66 1116.7 1.46
2006 59 8 4 15 11 74⅓ 1.94 55 3 0.667 26 52 1.05 181.5 2.89
2007 60 3 2 27
(3위)
3 78⅓ 0.92 50 3 0.600 32 65 0.95 414.5 3.74
2008 49 4 3 20
(4위)
0 60⅔ 2.67 51 4 0.571 25 50 1.20 151.9 2.03
2009 56 2 3 10 13
(4위)
52⅔ 1.20 40 1 0.400 21 43 1.08 395.5 2.65
2010 49 4 1 4 8 45 1.40 31 1 0.800 8 47 0.84 324.8 2.39
2011 53 3 3 16
(5위)
11 54⅔ 1.48 43 1 0.500 28 39 1.24 277.0 2.26
<rowcolor=#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승률 4사구 탈삼진 WHIP ERA+ sWAR
2012 롯데 24 2 0 1 5 28⅓ 0.64 12 0 1.000 8 26 0.67 603.3 1.53
2013 58 5 4 1 16
(5위)
51⅓ 3.33 56 3 0.556 29 34 1.50 131.2 1.16
2014 60 4 2 2 13 42 4.07 40 2 0.667 19 27 1.26 133.9 1.34
2015 19 2 1 3 3 18⅓ 2.95 16 3 0.667 9 17 1.26 171.1 0.70
2016 24 1 0 0 8 17⅓ 5.19 24 3 1.000 13 7 2.14 100.6 0.24
2017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6시즌)
662 46 29 106 121 726⅓ 2.21 579 35 0.613 285 559 1.12 199.1 28.10

[1] 정대현이 이 때 병역 특례를 받은 것으로 나온 기사가 몇 개 있으나 ## 다른 기사들에는 정대현이 아닌 박진만이 들어가 있다.##(같은 사람이 쓴 기사로 2008년 3월과 8월에 쓴 것인데, 앞 기사에서 이미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은 홍성흔, 원래 면제인 김수경을 병역 특례를 받은 것으로 넣었다가 지적을 받았는지 뒷 기사에서는 바로잡았다.) 참고로 박진만은 2000년 초에 아버지가 병역 면제를 브로커에게 청탁한 일로 인해 면제가 취소되었다가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정식으로 특례를 받았다. 박진만 자신은 고교 시절 유급의 원인이었던 무릎 부상 때문에 면제가 됐다고 주장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리고 있다. 그리고 정대현이 병역특례를 받은 게 맞았다면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했다는 기사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2] 역대 SK의 선수들 중 쌍방울의 마지막 유산으로 박정권이 있었으며 2019년에 박정권도 은퇴해서 이런 경우로 들어온 선수들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3] 참고로 2016년은 100.8이다.[4] 1군에서 선발로 나온 경기는 없었다.[5] 원래 코칭 스탭에서는 윤석민에게 콜했는데 진갑용이 '감독님, 대현이가 좋습니다'라고 해서 올라왔다.[6] 정작 SK 와이번스 관계자들은 심드렁했다는데, 훗날 밝힌 이유는 "대현이는 모든 공이 다 실투예요." 마무리 투수로서 절대 뛰어난 제구가 아님에도 대담한 승부를 바탕으로 좋은 성적을 올린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7] 사실 정대현이 던진 초구와 2구는 모두 슬라이더였다. 3구는 당연하다지만 싱커다. 삼진을 잡을 생각이었다면 업슛성 커브도 효과적이었겠지만, 확실한 병살을 위해 노린 듯.[8]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야구 정대현이 병살 잡는 장면의 음성을 씌운 플짤(백업본)이 나돌기도 했다. 완벽한 싱크로에 다들 감탄.[9] 2007년 2.55, 2009년 2.54[10] 최형우는 2015년 4월 4일에도 상대팀 LG의 팀 노히트 노런을 9회 1사 후 투런 홈런으로 깼다.[11] 승계주자-홍성민 2점 제외[12] 결국 이 경기가 현역 선수로서 1군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13] 등록일수 미달로 2년 연속으로 FA 자격 재취득에 실패했다.[14] 우리나라에서는 삿포로 참사로 유명한 대회. 이 대회는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였는데, 한국은 대만과 일본에 패하며 2등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진출권을 획득하지 못했다.[15] 국민타자이자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 불리며 국가대표로서 대표팀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국대 단골 이승엽도 출전한 대회 갯수만 보면 정대현에게 한수 접고 들어갈 정도이다.[16] 200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와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는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과 관련된 대회라 베이징 올림픽 하나로 묶을수도 있을 것이나, 각 대회가 열리는 기간에 텀이 있었으며, 대회마다 로스터 변경이 있었기에 별도로 기재한다.[17] 대표적인 예가 그를 상대한 구리엘이다. 베이징 올림픽의 병살로 한국에선 별 거 없는 타자 취급 받지만 쿠바에서는 특급 스타인데다, 메이저리그 망명을 상당히 늦은 나이에 택했음에도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에 2021년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수상하는 등 상당한 커리어를 쌓은 대선수이다.[18] 올림픽, 세계야구선수권, 인터콘티넨탈컵. 당연히 이때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WBSC 프리미어 12가 없었다.[19] 모든 국제대회로 확대하면 1978년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에서 6:3으로 승리한적이 있다.[20] 프로 14명, 아마 10명. 1977년 니카라과 대회 이후 첫 우승을 노리던 대회였고, 프로선수는 채병용과 같은 신인부터 송지만과 같은 리그 최고급 선수나 장원진같은 고참급까지 골고루 선발되었다.[21] 정작 진갑용김경문 감독에게 정대현을 추천하고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김경문 감독이 평소에는 본인 결정을 잘 바꾸지 않는 편이라 별 생각 없이 "대현이 공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을 뿐인데, 바로 정대현이 올라가니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싶었다고...[22] 당시 대한민국 야구는 스트라이크-볼 순서로 볼카운트를 읽었다.[23] 사실 이 부분은 허구연의 샤우팅이 워낙 커서 초반의 "유격수!" 이 부분을 제외한 한광섭의 중계는 잘 들리지 않는다…[24] 사실 이 신음소리(...)는 나름대로 멘트를 치려 했는데 목이 잠겨서 이상한 소리가 나온 것이라 한다.[25] 정대현은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20점),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90점)로 이미 최상한선을 채워 이를 일시불로 수령하지 않았다면 월정금 100만원을 받으며, 최상한선 110점을 초과한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10점) 포인트로는 일시 장려금으로 150만원을 받을 수 있다.[26] 야마다는 4년 후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양현종을 상대로 쓰리런을 치며 일본의 우승을 이끌었고, 도쿄 올림픽에서는 고우석을 상대로 3타점 2루타를 치며 일본의 결승 진출을 이끈다.[27] 경기를 중계한 일본 TBS 테레비 방송의 해설자는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유명했던 사사키 카즈히로였는데, 정대현의 투구를 서너개 지켜보더니 "컨트롤이 엄청나게 좋다"라고 말했다. 사사키가 해설 내내 한국 선수들을 한수 아래로 보는 시야를 은근히 드러낸 것에 비하면 대단한 칭찬이라 할 수 있다. 정대현이 9회말에 등판했을 때 일본의 중계진은 올림픽에서 마무리를 했었던 투수라고 바로 소개했다. 일본에서도 그만큼 잘 알려진 선수라는 것. 이와 비교되게 정대현 다음에 올라온 이현승은 잘 모르는 눈치들이었는데, 아무래도 KBO에서도 2009년 이후로 활약이 잠잠하다가 2015년 당해에 처음으로 클로저로 좋은 활약을 했고, 국제전 첫 출전인 만큼 정대현에 비하면 인지도가 한참 떨어질 수 밖에 없긴 하다.[28] 나중에 밝혀지길 일본이 1루에 대주자를 쓴 상황에서 언더핸드 우투수인 정대현은 견제능력이 떨어져서 좌완인 이현승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단, 이는 좌완 오버핸드인 이현승에 비해서 약한 거지 정대현의 견제력은 언더핸드 중 최상위권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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