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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2:31:23

지미 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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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윈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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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67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4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5 MLB 올스타전 로고.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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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974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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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 등번호 18번
C J 하트먼
(1962~1963)
지미 윈
(1963)
조 모건
(1965~1971)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 / 애스트로스 등번호 24번
데이브 아들레시
(1963)
지미 윈
(1964~1973)
클로드 오스틴
(1974)
제이슨 레인
(2002~2005)
영구결번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23번
클로드 오스틴
(1968~1973)
지미 윈
(1974~1975)
테드 마르티네즈
(1977~1979)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24번
프레스턴 한나
(1975)
지미 윈
(1976)
미키 말러
(1977~1979)
뉴욕 양키스 등번호 24번
오토 벨레즈
(1975~1976)
지미 윈
(1977)
마이크 토레즈
(1977)
밀워키 브루어스 등번호 8번
잭 헤이드먼
(1976~1977)
지미 윈
(1977)
앤디 에체바렌
(1978)
}}} ||
파일:휴스턴-지미윈.jpg
<colbgcolor=#002d62><colcolor=#ffffff> 휴스턴 애스트로스 No. 24
제임스 셔먼 "지미" 윈
James Sherman "Jimmy" Wynn
출생 1942년 3월 12일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사망 2020년 3월 26일 (향년 78세)
텍사스 주 휴스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태프트 고등학교 - 센트럴 주립대학교
신체 178cm / 72kg
포지션 중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2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CIN)
소속팀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애스트로스 (1963~197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4~1975)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76)
뉴욕 양키스 (1977)
밀워키 브루어스 (1977)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
3.1. 사망
4. 플레이 스타일5. 이모저모6. 연도별 기록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야구 선수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창단 초기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팀의 타선을 이끌었다.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중견수. 다만 휴스턴 말년 시기에는 우익수로 자주 출장했다. 별명은 The Toy Cannon(장난감 대포). 운동선수치고는 꽤나 작은 신장(175cm/73kg)으로 장타를 마구 쏘아올리는 모습이 마치 장난감이 공을 쏘는 것 같다 하여 붙여졌다.[1]

통산 성적은 15시즌 .250/.366/.436, OPS 0.806, 순장타율 .186, BB/K 0.86, wRC+ 130, 1665안타 291홈런 964타점 225도루. 타율과 출루율을 보면 알겠지만, 통산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1할이 넘을 정도로 눈야구에 능했던 타자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MiLB 시절

오하이오신시내티 출신으로, 태프트 고등학교 졸업 후 1962년 신시내티 레즈와 아마추어 자유계약을 맺으며 마이너 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마이너에서는 주로 3루수로 출장하며 타율 .296, 14홈런 81타점 20도루라는 이제 갓 계약한 신인 선수치고는 호성적을 남겼다. 거기에 100개가 넘는 볼넷을 얻어내며 이때부터 눈야구가 이미 완성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이후 윈은 1962년 11월 26일 치러진 룰5 드래프트에서 당시 창단 후 첫 시즌을 보냈던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의 부름을 받고 레즈에서 콜트 포티파이브즈로 이적해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무대를 밟게 된다.

2.2.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애스트로스 시절

파일:Jimmy Wynn Astros.jpg
콜트 포티파이브즈로 팀을 옮긴 윈은 첫 시즌인 1963년에는 내/외야를 오가며 주로 유틸리티로 활약했으나, 그다지 인상적인 성적을 남기진 못했다. 거기다 그동안 해왔던 내야 수비에 조금씩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듬해부터 아예 외야수로 전향하게 된다. 외야 전향 첫 해에는 적응이 덜 됐던 탓인지 다른 외야수들에게 밀리며 마이너 리그 강등도 당하는 등 헤매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전향 2년차이자 팀명이 애스트로스로 바뀐 1965년에 주로 3번 타자로 나서 타율 .275에 22홈런 73타점 43도루, OPS 0.841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윈은 부상으로 시즌 후반기를 날려먹은 1966년[2]과 개인사 문제로 극도의 부진을 겪었던 1971년을 제외하면 주전을 차지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매 해 평균 .263/.378/.473의 슬래시라인에 27홈런과 80타점, 21도루를 기대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애스트로스의 주포로 자리매김했다. 1967년에는 슬래시라인 .249/.331/.495에 OPS 0.826, 커리어 최다 홈런인 37홈런과 107타점, 16도루를 기록하며 애스트로스에서의 처음이자 유일한 올스타전 출장이라는 성과를 이루었고, 커리어하이였던 1969년에는 .269/.436/.507의 비율 스탯에 33홈런과 87타점, 23도루, bWAR 7.1/fWAR 6.7(NL 전체 4위)을 기록하며 커리어 유일의 5할 장타율과 OPS 0.9를 넘기는 등 맹활약했다. 당시 애스트로스의 홈구장이 극단적인 투수 친화 구장이었던 애스트로돔이었음을 감안[3]하면 놀라운 기록[4]으로, 1969 시즌 윈의 wRC+는 무려 167로 해당 시즌 NL 전체 6위에 해당하며 양대리그까지 범위를 넓혀도 전체 14위다. 덤으로 볼넷 148개(!!)를 얻어낸 덕에[5]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167에 달했다.

이렇게 다 좋았던 윈에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바로 팀이 포스트시즌과는 영 인연이 없었다는 것. 애초에 신생팀이었기에 전력이 약했던 콜트 포티파이브즈 - 애스트로스는 창단 후 1968년까지 단 한 번도 승률 5할 이상을 넘기지 못했고, 내셔널 리그가 동부/서부지구로 개편된 1969년 이후로는 그나마 전력이 나아져 5할 승률을 3번 기록하기도 했지만 최고 순위는 지구 3위에 그쳐 인연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1968년 새롭게 부임했던 해리 워커 감독과의 불화는 그에게 새로운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워커는 현역 시절 '타격의 달인(Guru)'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교타자로서 이름을 날렸고, 이 명성 덕에 타격코치와 감독으로 오랜 기간 재임했으나 가는 팀마다 독선적인 지도 방식으로 선수들과 항상 마찰을 빚었던 인물이었다.[6] 하지만 이 양반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 이미 현역 시절에도 MLB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의 출장에 반대해 파업을 공모했다는 의혹이 있었고[7]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에도 특정 인종을 차별해 라인업을 짠다는 논란을 일으키기도[8] 했는데, 이 버릇은 애스트로스에 와서도 못 고쳐서 많은 선수들과 문제를 일으켰고, 특히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이가 바로 흑인 선수였던 지미 윈조 모건이었다.

이 둘은 정확성이 강점인 교타자 유형보다는 많은 2, 3루타를 생산해내는 장타 능력과 선구안을 통한 많은 볼넷 출루가 강점이었던 전형적인 OPS 히터 유형의 선수였는데, 워커 감독은 이들을 '타율이 낮다'라는 이유로 그들의 스윙 방식을 컨택 위주로 뜯어고치려고 했고, 당연히 윈과 모건이 이를 결사 반대하자 이들을 엄청 갈궈댔다고 한다.[9] 이 시기가 정말 악몽같았는지 윈은 다저스로 이적한 이후 월터 앨스턴 감독이 '너만의 스윙을 하라'고 하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모건은 한 술 더 떠 그의 인종차별적 면까지 꼬집으며 자서전에서 '그는 팀의 흑인 선수들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고 여겼다'고 깠다.

이런 감독의 간섭과 가정사(이혼 문제)까지 겹치며 1970~1971년 윈은 하락세를 걸었다. 다행히 워커 감독이 경질된 1972년부터는 다시 예년의 모습을 찾는 데 성공했고, 1973년에는 타순 변동[10]의 영향으로 좀 주춤했으나 여전한 출루 능력을 보이며 중심 타자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2.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파일:Jimmy Wynn Dodgers.jpg
그렇게 애스트로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남는 듯 했던 윈이지만, 1973년 시즌이 끝난 뒤인 12월 6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윈을 트레이드로 영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대급부는 선발 요원 클로드 오스틴과 유망주 데이비드 컬페퍼. 이 영입은 사실 다저스가 하루 전날(5일)에 진행한 트레이드의 영향이었는데, 당시 리그 세이브 1위를 기록하며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마무리 투수 마이크 마셜을 영입하기 위해 주전 중견수였던 윌리 데이비스[11]를 엑스포스로 트레이드해버려 중견수 자리가 비어버렸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때마침 에이스 제리 로이스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한 탓에 선발진에 구멍이 났던 애스트로스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윈의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다저스의 완승으로 끝나고 만다. 애스트로스가 영입한 투수 중 클로드 오스틴은 좀 던지나 싶더니 8월에 투수 유망주[12]를 대가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됐고, 데이비드 컬페퍼는 계속 마이너 리그에서만 뛰다 1976년에 방출됐다.

반면 다저스로 옮긴 윈은 1974년 자신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며 애스트로돔 뺨치는 투수 친화구장인 다저 스타디움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기록한다. 특유의 눈야구는 여전했으며(108볼넷), 장타력 또한 32홈런에 5할에 육박하는 장타율(.497)을 기록하면서 스티브 가비, 데이비 롭스, 론 세이, 빌 버크너[13] 등의 동료들과 함께 다저스의 타선을 이끌었다. 1974년 NL 올해의 재기선수상도 윈의 몫. 더군다나 약체에 예나 지금이나 비인기 팀이었던 애스트로스와 다르게 다저스는 전국구 인기 팀에 매년 지구 우승을 노릴 수 있는 강팀. 덕분에 휴스턴에 있는 동안 1번밖에 못 나가봤던 올스타전에도 이적하자마자, 그것도 베스트 9에 선발되었고, 생애 첫 포스트시즌 무대도 밟는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본인의 활약은 좋지 못했다. 팀은 NLCS에서 동부지구 우승팀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누르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만 롤리 핑거스레지 잭슨, 캣피시 헌터가 버티고 있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1승 4패로 패퇴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지미 윈의 처음이자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험(...).

이후 맞이한 1975년, 윈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시즌 도중 중견수에서 좌익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한 특유의 눈야구를 과시하며 4할 출루율을 달성했다. 올스타전에 2년 연속으로 선발 출장한 것은 덤. 하지만 홈런 수는 32개에서 18개로 급감했고, 타율도 .270 근방에서 왔다갔다 하던 것이 .250 언저리로 떨어졌다. 더구나 윈의 나이는 33세. 언제 기량이 하락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가 된 데다 부상도 있는 윈을 다저스는 더 이상 안고 갈 뜻이 없었고, 결국 1975년 시즌 종료 후 더 젋고 유망한 외야수[14]를 얻기 위해 윈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한다. 이 때 지미 윈과 함께 다저스에서 브레이브스로 건너간 선수 중 한 명이 바로 훗날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어 7년 간 이어온 비밀번호를 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제리 로이스터.

2.4.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시절

파일:Jimmy Wynn Braves.jpg
어쨌든 돌고 돌아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로 돌아온 지미 윈은 다시금 부활의 날갯짓을 펴기 위해 절치부심하지만, 브레이브스는 행크 애런이 있던 시절의 그 팀이 아닌 동부지구 최약체 팀으로 전락해 있었고, 윈 본인 또한 커리어 최악급의 타율(.207)과 장타율(.367)을 기록하며 깊은 부진에 빠진다. 그 와중에도 눈야구만큼은 살아있어서 127볼넷으로 리그 최다 볼넷을 골라나갔지만, 이러나 저러나 브레이브스가 윈에게 기대하던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15]

2.5. 뉴욕 양키스 시절

파일:Jimmy Wynn Yankees.jpg
그런 그를 1976년 시즌 종료 후 데려간 팀은 12년 만에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빅 레드 머신'을 앞세운 신시내티 레즈에 밀려 준우승해 독이 바짝 올라있던 뉴욕 양키스. 양키스는 지명타자 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아메리칸 리그 소속팀인 만큼 윈이 수비 부담을 덜어낸다면 예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그에게 지명타자 역할을 맡긴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자 윈은 그런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첫 12경기에서 .294/.442/.471의 스탯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이전의 폼을 찾는 듯 했다.

하지만 4월 마지막 경기에서 5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무려 36타석 연속 무안타라는 끝모를 부진에 빠지며 타율은 1할 중반대까지 떨어졌고, 볼넷도 4개밖에 얻어내지 못하는 등 눈야구마저 무너져버렸다. 그나마 5월 마지막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내며 지긋지긋한 무안타 행진은 일단 끊어냈지만, 그 이후로 다시 무안타 행진을 이어가며 추락하고 만다. 결국 이를 참다 못한 양키스 구단은 7월 14일 그를 방출해버린다.

양키스에서의 성적은 타출장 .143/.283/.234에 OPS 0.516, 홈런 1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성적이었다.

2.6. 밀워키 브루어스 시절

파일:Jimmy Wynn Brewers.jpg
양키스에서 버림받은 윈에게 손을 내민 구단은 같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의 밀워키 브루어스. 하지만 브루어스는 그때까지는 1980년대 초반의 강팀의 모습을 갖추기 전이었고, 이미 자신감을 잃을 대로 잃은 윈 또한 별다른 동기를 부여받지 못한 채 1할 대 타율의 부진 속에서 허덕이며 양키스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결국 시즌을 .175/.289/.237의 초라한 슬래시라인으로 마감한 윈은 브루어스에서마저 방출되며 메이저 커리어를 끝낸다.

2.7. 이후

방출 후 잠시 음료 회사에서 일하며 1년을 쉰 윈은 1979년 멕시칸 리그의 미네로스 데 코아우일라(Mineros de Coahuila)에서 1년 더 선수생활을 한 뒤 은퇴한다. 여담으로 멕시칸 리그에서 뛸 당시 이원국과 잠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3. 은퇴 후

파일:Jimmy Wynn After Retirement-Broadcaster.jpg
은퇴 후에는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린 팀이었던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인연을 이어가며 휴스턴 지역 방송국의 경기 후 리캡 담당 해설자나 지역 봉사 임원으로 활동했다. 위 사진 속 맨 오른쪽 인물이 지미 윈.

1983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에 올랐으나 단 1표도 받지 못한 채 탈락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와는 별개로 휴스턴 구단은 창단 초창기 팀 타선을 지탱했던 지미 윈의 공을 높이 사, 2005년 6월 25일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24번을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원체 휴스턴이 영구결번에 후한 구단이긴 하지만, 자신의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은 셈.

파일:Jimmy Wynn After Retirement-Astros Hall of Fame.jpg
이후 2019년에는 처음 만들어진 애스트로스 구단 자체 명예의 전당에 창립 멤버로 헌액됐다.

3.1. 사망

2020년 3월 26일, 78세 생일이 지난 지 2주 만에 30대 시절을 제외한 자신의 인생을 바친 휴스턴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 사망 원인은 따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휴스턴 구단은 그의 사망 후 '그가 올스타 선수로서 성공했던 1960~1970년대의 활약은 애스트로스 프랜차이즈의 토대를 닦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현장 안팎으로 그가 우리 구단에 행한 기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라는 성명문을 발표하며 추모했다. 기사

4. 플레이 스타일

다저스 시절 타격 영상. 영상 속 두 번째 타자가 지미 윈이다. 첫 번째 타자는 같은 팀이었던 스티브 가비.[16]
상당히 호쾌한 스윙을 자랑했던 타자로,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장타가 일품이었다. 그 악명 높은 투수친화 구장인 애스트로돔다저 스타디움에서 뛰었음에도 두 구장에서 모두 한 시즌 30홈런을 넘겼고, 통산 순장타율도 .186으로 2할에 육박하는 갭 파워를 보였다. 더구나 윈이 뛰던 당시의 리그는 투고타저 경향이 강했기에 이를 감안하면 더욱 대단한 성적. 거기에 발도 상당히 빨라서 10년 연속 두 자리 수 도루를 기록하는 등[17] 호타준족으로서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하지만 이 타자의 진정한 진가는 다름아닌 눈야구. 통산 타율은 .250으로 일견 평균보다도 조금 못해보이는 성적이지만, 통산 출루율은 .366으로 1할이 넘게 차이가 난다. 그 비결은 매 시즌 100개 남짓의 볼넷을 골라나가던 선구안으로,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가 많이 벌어질 때는 1할 5푼 정도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거포답게 삼진도 적은 편은 아니어서, 한 시즌에 세 자리수 삼진을 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한마디로 볼넷을 좀 더 많이 얻어나가는 클래식 거포 스타일이자 OPS 히터.

다만 주 포지션이 중견수였던 것에 비해 수비 스탯은 영 좋지 못한데, 애스트로스 시절의 수비 스탯을 살펴보면 우익수로 전향한 막바지인 1973년을 제외하면 죄다 0에 수렴하거나 음수를 기록했다(...). 더구나 선수 생활 말미에는 어깨 부상까지 당하며 송구 능력도 크게 저하됐다. 하지만 천연잔디다저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쓰는 다저스로 이적하고 난 후에는 중견수 자리에서도 준수한 수비 스탯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냥 애스트로돔 특유의 광활한 외야와 인조잔디 때문에 수비 스탯이 나쁘게 나왔다고 봐야 할 듯. 참고로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 친화구장이긴 하지만 외야 수비 난이도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다저 스타디움 문서 참조.

상술했듯 타자에게 불리한 구장에서 주로 뛴 탓에 성적에서 손해를 본 것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명예의 전당 헌액에 실패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과소평가 받은 선수로 꼽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명예의 전당 헌액은 어려웠을 것이, 비율 스탯은 타율을 제외하면 투고타저를 감안했을 때 훌륭한 편이지만 통산 2000안타/300홈런/1000타점 모두 약간씩 모자라 달성하지 못하는 등 누적 스탯이 상당히 빈약하기 때문. 설사 타자 친화구장에서 뛰었다고 가정하고 누적 스탯을 조금 더한다 하더라도 명예의 전당 입성을 위한 마지노선인 2500안타나 400홈런 등의 마일스톤 달성도 간당간당한 판이라... 거기에 이미 명전 투표 첫 해에 광탈한지라 현재로서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헌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5. 이모저모

6. 연도별 기록

파일:MLB 로고.svg 지미 윈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3 HOU 70 286 61 10 5 4 31 27 4 30 53 .244 .319 .372 .691 0.0 0.3
1964 67 248 49 7 0 5 19 18 5 24 58 .224 .301 .324 .625 -0.3 0.0
1965 157 663 155 30 7 22 90 73 43 84 126 .275 .371 .470 .841 6.4 7.4
1966 105 468 107 21 1 18 62 62 13 41 81 .256 .321 .440 .761 2.9 3.4
1967 158 683 148 29 3 37 102 107 16 74 137 .249 .331 .495 .826 4.9 5.3
1968 156 646 146 23 5 26 85 67 11 90 131 .269 .376 .474 .850 5.3 5.5
1969 149 653 133 17 1 33 113 87 23 148 142 .269 .436 .507 .943 6.7 7.1
1970 157 668 156 32 2 27 82 88 24 106 96 .282 .394 .493 .886 4.3 4.9
1971 123 466 82 16 0 7 38 45 10 56 63 .203 .302 .295 .596 0.1 -0.6
1972 145 652 148 29 3 24 117 90 17 103 99 .273 .389 .470 .860 5.2 5.5
1973 139 581 106 14 5 20 90 55 14 91 102 .220 .347 .395 .742 3.3 2.8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4 LAD 150 656 145 17 4 32 104 108 18 108 104 .271 .387 .497 .884 7.4 7.7
1975 130 529 102 16 0 18 80 58 7 110 77 .248 .403 .417 .820 4.7 5.0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6 ATL 148 584 93 19 1 17 75 66 16 127 111 .207 .377 .367 .744 2.5 2.6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7 NYY/MIL 66 228 34 5 2 1 17 13 4 32 47 .175 .289 .237 .527 -0.9 -0.8
MLB 통산
(15시즌)
1920 8011 1665 285 39 291 1105 964 225 1224 1427 .250 .366 .436 .802 52.8 55.8


[1] 정작 본인은 자신의 체격을 놀리는 별명이라 생각해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장타력을 칭찬하는 의미라는 걸 알고 나서는 자신의 자서전 제목에 이를 붙여 쓸 정도로 좋아했다.[2]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외야 뜬공을 잡으려다 펜스와 부딪혀 왼팔이 골절(!)됐다. 더구나 그 타구가 연장전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끝내기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 되어 팀도 패배했다.[3] 애스트로돔은 홈플레이트부터 좌우 펜스 폴대까지 104m, 좌/우중간 펜스까지 114m, 중앙 펜스까지 124m라는 잠실 야구장급의 광활한 그라운드와 타석부터 백스탑까지 18m라는 환상적으로 넓은 파울 지역을 자랑했다. 이후 공사를 통해 좌/우측과 중앙펜스, 백스탑까지의 거리는 각각 5m/2m/2m씩 줄어들긴 했으나 그 때는 윈이 애스트로스를 떠난 걸 넘어 은퇴한 지 수 년이 지난 1980년대(...).[4] 이 때문에 1967년 당시 윈과 2개 차이(39개)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행크 애런도 "진정한 홈런왕은 윈"이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애런이 뛰었던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애틀랜타-풀턴 카운티 스타디움은 타자 친화 구장에 가까웠기 때문.[5] 다만 삼진 역시 적지 않게 당해서(142개) BB/K는 1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6] 애스트로스에 와서도 코치인 자기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신만의 타격법을 고수했던 러스티 스타우브를 아니꼽게 봐 그를 내보내는 데 기여한다.[7] 워커 본인은 그 정도(=파업)까지는 공모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8] 이 때문에 당시 파이리츠 선수였던 돈 클렌데논은 1969년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되었을때 '인종차별주의자 감독 밑에서는 못 뛰겠다'라며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9] 사실 이는 세이버메트릭스가 활성화되기 이전 많은 OPS 히터 유형의 선수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기도 하다. 당시에야 타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타율이 제일 우선이던 시절이었기에... 거기다 워커 감독 본인부터가 현역 시절 교타자로 이름을 날린 양반이다 보니 더욱 그런 경향이 강했다.[10] 클린업에서 상위 타순으로 이동했다.[11] 이 쪽 역시 트레이드 직전인 1973년까지 3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한 참이었다.[12] 론 셀락이라는 투수로 메이저 무대조차 밟지 못했다. 카디널스 쪽에서도 어지간히 찜찜했는지 두 달 뒤인 10월에 투수 한 명(댄 라슨)을 더 보내줬다(...). 그나마 라슨은 1976년~1977년에 선발 투수로 나름 뛰긴 했다.[13] 1986년 월드 시리즈 6차전의 끝내기 실책으로 유명한 그 분 맞다. 다저스 시절에는 주로 좌익수로 활약.[14] 지금의 감독으로서의 이미지만 봐서는 상상이 안 가겠지만, 현역 시절의 베이커는 매해 20홈런-80타점을 기대할 수 있는 강타자였다.[15] 다만 세이버 스탯인 wRC+는 114로 평균 이상이었고, bWAR과 fWAR도 각각 2.6/2.5로 생각보다 자기 몫은 한 편이었다.[16] 이 두 타자가 연속 타자 홈런을 기록한 경기는 다름 아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으로, 이 경기 이후 같은 팀의 타자 2명이 올스타전에서 연속 타자 홈런을 기록하는 풍경은 2018년 올스타전이 되어서야 알렉스 브레그먼-조지 스프링어 듀오에게서 나왔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지미 윈의 옛 소속팀이던 휴스턴 애스트로스 소속.[17] 특히 1965년에는 43도루 4도루실패라는 엽기적인 도루성공률(약 91.4%)을 기록하기도 했다.[18] 윈은 이 일로 수술을 받아야 했고, 다음 시즌인 1971년을 완전히 말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