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Carlismo스페인의 왕당파 중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차남으로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의 혈통을 옹립하려고 한 전통주의 사상. 카를로스주의의 지지자들은 카를로스파 또는 카를리스타(Carlista)라고 한다.
2. 역사
카를로스파의 일방적인 주장은 현재의 스페인 왕실이 엄밀히 말해 보르본 왕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이사벨 2세(1830~1904)는 사촌오빠인 보르본 가문의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결혼했으나 정략결혼인 탓에 부부관계는 좋지 않았고 결국 여왕이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엄한 남자[1]에게서 아들을 봤다는 것이며 그 아들이 훗날 알폰소 12세로 왕위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보르본 가문을 계승했기 때문에 여전히 보르본 왕조로 불린다. 애초에 알폰소 12세의 친부가 누군지 알 방법도 없다.[2]여하튼 알폰소 12세의 사생아 의혹은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대립하는 '카를로스파'와 부르봉 왕조의 현 수장의 가문인 부르봉앙주 가문과 대립하는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에서 두고두고 써먹게 된다.(...)
사실 이 계승권 문제는 당시에도 꽤나 민감한 문제였다. 선왕인 페르난도 7세가 살리카법을 폐지하여 이사벨 2세가 즉위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으나 여왕의 삼촌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자칭 카를로스 5세)는 살리카법을 내세워 여자인 이사벨 2세의 계승권을 문제삼으면서 알폰소 12세가 보르본 왕조가 아닌 사생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보다는 남계인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며 본인, 아들, 손자 3대가 무려 3번에 걸쳐 카를로스파 전쟁을 주도한 일도 있었으며 그 후손들인 보르보네파르마 가문[3]의 왕위 요구자인 카를로스 우고(Carlos Hugo de Borbón-Parma 1930~2010)와 식스토 엔리케(Don Sixto Enrique de Borbón-Parma, 1940년생)는 여전히 스페인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4] 물론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로 100년 동안 저런 건 아니고 카를로스파가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를 넘어 종교적 보수주의, 지역별 자치 문제 등을 둘러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말년에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누구의 혈통을 지명하느냐가 당시 스페인 정가의 최대 관심사였는데[5] 결국 프랑코는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의 후손 카를로스 우고 대신 이사벨 2세의 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손을 들어주어 현재의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복고되었다.
3. 좌파 카를로스주의
카를로스파 정통파 계열은 되려 극좌 성향을 띄고 있는데 전술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체제에 반대하던 일부 반(反) 프랑코 성향 왕당파들이 원래부터 좌파 성향이었던 마리아 테레사 공주[6]의 영향으로 인해 좌경화한 결과다. 따라서 왕실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성향의 좌파 인사들은 카를로스파 정통파 측이 현 스페인 왕실에 맞서서 왕위를 요구하는 것을 지지하기도 한다.자세히 설명하자면 위에서 말했듯이 카를로스 우고와 카를로스파 세력이 프랑코에게 접근해도 대답이 영 미적지근하자 아버지 부르봉파르마의 하비에르의 영향도 받았고[7] 본인의 성향과 친하게 지냈던 주변의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과 자기 여동생[8]의 영향과 맞물려 이전까지는 골수 가톨릭 전통주의를 유지했던 카를로스주의 운동의 반을 끌고 나가 사회주의 좌익 정당으로 바꾸어 버렸다.
스페인 내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카를로스파 진영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우파에 속했지만 종교적 전통주의만큼 카를로스파에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안방 거점인 바스크-나바라 일대의 지방 자치, 즉 정치적 전통주의였으며 이들이 원했던 전통적 자치주의는 가치관에서도 전통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좌파들 못지 않게 미워했다.[9][10] 프랑코파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스페인 우익들 중에 가장 조직화되어 있고 무장 봉기의 전통이 깊었던 카를로스파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지방 자치 전통을 뭉개 버리고 외부 자본들을 끌여들여 스페인 북부의 전통 공동체를 해체했으며, 말년에 가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하여 가톨릭 교회와도 척을 지기 시작하니 더이상 프랑코와 같은 배를 타고 있다가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아예 말라 죽어 버리겠다고 판단한 카를로스 우고 쪽에서 아예 극좌향을 선택했다.
현재 카를로스주의 정당은 이 카를로스 우고가 세웠으며 자생적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스페인 제2의 극좌 정당인 좌파연합(Izquierda Unida)이 세워질 때 스페인 공산당, 생태주의 정당들과 함께 합당의 주축 중 하나였던 카를리스타 당(Partido Carlista)과 이 좌파 왕족 형님[11]을 보고 복장이 뒤집어진 나머지 가족들이 또 분열하여 세운 극우파 카를로스파 전통주의 교단(Comunión Tradicionalista Carlista)이 있다.
4. 매체에서 등장
-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스페인의 중점 중 하나가 카를로스파 루트다. 스페인(Hearts of Iron IV) 문서 참조.
5. 같이 보기
[1] 프란시스코 세라노이다 공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설일 뿐이다.[2] 물론 유전자 검사를 하면 당연히 해결될 문제지만 지금의 스페인 보르본 왕가가 알폰소 12세의 직계후손이니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스페인 왕가의 공식 입장대로 알폰소 12세가 카디스 공작의 아들이 맞아도 그 검사를 하는 그 자체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3]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름 대공가가 아니라 그 가문의 본가를 의미한다.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 가문은 본가와 대판 싸워 절연까지 했던 이력 때문에 공식적으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을 칭하고 있다.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에서 스페인 왕위를 주장하는 것은 보르본 왕조의 카를로스파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보르본 왕조의 분가였던 보르보네파르마 가문(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차남 필리포 1세의 후손들)에서 데려온 것이다. 더 가까운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에서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도 수장의 자리를 두고 카스트로계와 칼라브리아계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고 무엇보다 스페인 국왕이 프랑스 국왕을 겸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처럼 스페인 국왕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 즉 양시칠리아 국왕을 겸하는 것 역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빈 조약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4] 식스토 엔리케의 조카이자 카를로스 우고의 아들 카를로스 하비에르(Carlos Javier de Bourbon de Parme, 1970년생)는 2016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카를리스타의 정당한 상속자는 맞으나 펠리페 6세와의 왕조 분쟁을 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밝혔다. 지지자들 때문에 카를리스타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것이지 사실상 스페인 왕위 계승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고 공식 선언한 것과 같다.[5] 심지어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까지 거론되었고 실제로 제안까지 했으나 오토 대공 측에서 독재자인 프랑코와 엮이기 싫어 거절했다.[6] 이 사람은 소련에 망명했던 스페인 공산당의 정신적 지주인 돌로레스 이바루리와 친분을 맺고 교류하기도 했다.[7] 반독 레지스탕스 출신이다. 본인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바 있다.[8] 現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와 10촌 지간인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테레사 공녀로 사실상 카를로스파 좌경화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이기도 하다.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코 생전에 모스크바로 가서 스페인 공산당의 원로 대모 격인 돌로레스 이바루리와도 면담하기도 해서 빨갱이 공주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만큼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오빠 카를로스 우고가 카를로스주의 운동을 급진 좌파 운동으로 전환할 때 힘을 보탰다고 한다. 2020년 3월 27일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으로 사망했다.[9] 내전 전후로 나온 카를로스파 단체들의 선전물들을 보면 '성 베드로의 가장 충실한 아들인 스페인을 어지럽히는 유대 볼셰비키 자본주의자들을 척결하여...'라는 식의 주장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떻게 유대인이 자본가이면서도 볼셰비키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반동주의자들 눈에는 다들 근대성을 옹호하는 파괴적인 대도시 산업주의 향촌파괴도당들에 불과했다.[10] 유럽사(+유럽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서구사)에서 흔히 '혁명의 세기'라고 불리는 19세기 중순 ~ 20세기 중엽, 그 중에서도 전반부인 19세기 중후반 ~ 20세기 초반의 정치구도는 '양자갈등에 가까운 현대의 보혁갈등'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세력구도로 짜인 다자간 갈등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이 시기까지만 해도 기독교(주로 가톨릭)+왕당파+전통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보수파의 위치에 있었고, 자본주의자들은 이들 보수 왕당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혁신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에 비하면 보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자본가> 같은 신기한 개념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자본가든 공산주의자든 가톨릭 왕당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놈들이었기 때문이며 이것 때문에 자본주의 세력을 양쪽에서 협공 중이던 극좌 사회주의 세력과 극우 왕당파 세력의 합작도 종종 발생했다. 특히 공상적 사회주의 계열 세력은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전통주의자들이 지키려고 하는 전통적 공동체와도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었다.[11] 사실 사회주의 군주라는 개념은 믈라도로시가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믈라도로시는 원래 독일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단체이자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제정복고 단체였지만 점점 소련에 의해 좌경화되더니 공산주의 소련도 러시아의 역사라고 인정하면서 소비에트 제국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로마노프 가문의 몇몇 유력인사들도 이들을 지지했지만 그 중 키릴 대공은 좌경화되던 믈라도로시를 보고 손절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등으로 활동하다가 소련이 열강으로 등극하자 자연스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