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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fff><tablebgcolor=#ffffff> | 주식회사 한국일보사 株式會社 韓國日報社 HANKOOK ILBO |
<colbgcolor=#62bd48><colcolor=#ffffff>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설립 | 1977년 12월 14일 ,([age(1977-12-14)]주년), | |
창간 | 1954년 6월 9일 ,([age(1954-06-09)]주년), | |
본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7 ,(남대문로5가 6-1),[1] | |
대표자 | 이성철 | |
임원진 | 회장 승명호 발행·편집인 · 대표이사 사장 이성철 경영지원실장 · 인쇄인 · 전무 권동형 | |
업종명 | 신문 발행업 | |
상장 여부 | 비상장 기업 | |
기업 규모 | 중견 기업 | |
임직원 | 360명 (2019년 12월) | |
매출액 | 1,158억 7,517만 2,079원 (2022년 연간) | |
영업 이익 | 39억 9,522만 1,754원 (2022년 연간) | |
순손실 | 9억 3,751만 613원 (2022년 연간) | |
그룹 | 동화그룹 | |
최대 주주 | 엠파크홀딩스 (주) (지분 89.86%)[2] | |
사이트 | <colbgcolor=#62bd48><colcolor=#ffffff> 홈페이지 | |
소셜 미디어 | | | | | | | | |
유튜브 | 링크 | |
구독자 | 21만 명[A] | |
조회수 | 134,271,857회[A] | |
가입일 | 2011년 2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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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white><colcolor=black> 2002년 3월 18일 ~ 2015년 6월 8일[5] |
2015년 6월 9일~ |
"세상을 보는 균형"
"누구도 신문을 이용할 수 없다"
한국일보 창업주, 백상 장기영의 창간사
한국일보 창업주, 백상 장기영의 창간사
동화그룹 산하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창업주 장기영이 1954년에 태양신문을 인수한 뒤 제호를 한국일보로 바꾸면서 1954년 6월 9일 창간했다. 온라인 웹사이트는 한국일보닷컴(www.hankookilbo.com)이다. 계열사로는 코리아타임스(www.koreatimes.co.kr)가 있다.
1960~8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트로이카로 꼽히던 메이저 신문이었고[6][7], 언론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에게는 한때 꽤나 네임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잘 나갈 때 국내 신문업계 최초로 시행한 시도들이 꽤 많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발행부수가 200만부에 달했던 4개의 신문사 중 하나였으나,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급격히 사세가 기울었다. 단적인 예로 1996년에 발행부수 212만 부라고 자랑하던 신문이 2020년 현재 기준 발행부수 22만 부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열독률 또한 0.31%에 불과한 수준.[8]
1960년부터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제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조는 민주노총 언론노조 소속.
2. 성향
일단 신문사 스스로 국내 유일의 중도 신문임을 내세우고 있다.[9] 그러나 195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전통적 보수 우파 신문이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10]만큼은 아니어도 다분히 보수 성향이 섞여 있는 신문이었다. 일례로 한국일보의 창업주이자 사장이었던 장기영이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4년에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고, 이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까지 지냈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 내내 한국일보는 친 박정희 성향으로 분류된 언론이었다.[11]재벌이나 기득권에 대한 태도 또한 조중동보다는 비판적이지만 한경오보다는 비판적이지 않은 편이고, 노동계나 북한에 대한 태도도 한경오보다는 비판적이지만 조중동보다는 비판적이지 않은 편이라고는 하는데, 그러나 사실 이것 마저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기계적 중립'을 지향하는 것에 가깝다. 보통 언론의 중립이라는 것이 '비판적 중립'이라면, 한국일보는 중도적으로 기사를 쓴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보수적 기사 하나, 진보적 기사 하나 쓰면서 양적인 균형을 맞추는 방식을 쓴다. 독특한 점은, 기자들이나 논설위원들 사이의 정치적 성향이나 논조의 차이가 매우 크고, 이것이 지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한 신문사에서 이렇게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논설위원들이 각각 다른 입장을 같은 지면에 내보낼까?'하는 지적이 있을 정도. # 실제로 내부 기자들의 기자수첩이나 논설위원들의 기명 칼럼들 사이의 논조 차이가 크고, 외부 기고 칼럼들 사이의 논조 차이도 상당하다. 심지어 포털 사이트 전용 온라인 기사와 지면에 실리는 기사의 논조나 성향이 차이날 때도 많다.[12]
2000년대 말에 들어 아래의 2013년 한국일보 사태를 비롯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잠시 비교적 중도좌파 색채를 띄었다가, 2015년 동화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된 이후 기자들의 연봉이 대폭 인상된 즈음에 경제면을 중심으로 경제신문 비슷하게 논조가 점점 보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기사 형태를 빙자한 광고성 기사나 돈을 받고 내주는 협찬 기사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후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의 문재인 정부로 교체된 뒤에는 한국일보 차원에서 나름 자체적 균형을 맞춘답시고 과거에 비해 보수적 논조의 칼럼, 사설, 기사 등이 많아졌다. 동화그룹이라는 사기업으로 인수된 영향 때문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조중동과 입장을 같이 취하는 이슈가 많아지고, 보수적인 성향을 더 많이 드러내는 기사나 칼럼 또한 과거에 비해 늘어났으며, 특히 어뷰징을 목적으로 포털 사이트 제목 낚시를 통한 조회수 장사가 많아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후 2020년대에 들어서며 사회 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 성향이 강하며 반페미니즘에 대한 비판과 이대남 담론에 대한 지적이 자주 나오는 반면 온라인 대응팀에서는 남초 커뮤니티, 또는 보수 커뮤니티발 기사에 대한 보도 또한 자주 등장한다. 한편 보수적 논조의 사설이나 칼럼, 보도 또한 쏟아지는 형편인데, 특히 경제면을 보면 동화그룹으로 인수된 것의 영향인지, 조중동이나 경제신문까지는 아니어도, 대기업이나 재벌 홍보성 기사가 상당히 많으며, 정치면이나 사회면 등에서도 보수 친화적인 제목 장사를 많이 하는 양상이 눈에 띄어 비판을 받는다. 특히 온라인 집중 정책에 따라 포털 사이트 조회수 높이기 행위와 제목 장사에 열을 올리면서, 급기야 기사에 허위로 기자 이름을 쓰는 대형사고를 치는 일까지 벌어져서, 데스킹 측면에서도 헛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해당 사건은 기사 데스킹 최고 책임자인 고위 간부가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 당시 언론비평계를 뜨겁게 달구었을 정도로 큰 사건으로 비화되었는데, 의아하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단순 구두 경고 및 단순 입장문 정도로만 처리되어 다시 큰 비판을 받았다. #
또한 겉으로는 이렇게 중도를 내세우고 있지만 어느 언론사와 비교해도 급진적 다문화주의 논조가 상당히 강한 편으로 2010년대 들어서는 단순히 친다문화적인 성향을 넘어서 단기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한테도 이민 문턱 완화, 난민 인정 확대 주장, 불법체류자 옹호와 합법화 주장, 불법체류 2세들에게 영주권 줘야한다는 주장이 담긴 기사를 주기적으로 내보낸다.
중도신문이랍시고 진중권식 양비론을 펴다 보니, 한경오도 조중동도 하지 않는 특이한 논평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이재명 피습 사건에서는 이재명이 서울대병원으로 전원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러기로 한 가족의 결정을 공격까지 할 일이냐고 평하기도 했다.[13]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관해서는, 논설위원 칼럼에서는 내란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기자회견에서는 이재명에게 '당신이 과연 대통령감인지 국민들이 불안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정치부보다는 사회부 쪽이 강한 신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과거 한국일보가 한창 잘 나가던 과거 1970~80년대 시절만 해도 정치부나 경제부 기자보다는 사회부 기자야말로 진짜 실력있는 기자라는 의식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일보 출신의 사회부 기자들이 여러 다른 신생 신문으로 이직을 하며 중간 간부로서 기틀을 잡으면서 이런 평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23년 현재도 각 언론사의 50대 후반의 고위 간부급 기자나 60대 초반 퇴직자들 중에 한국일보 출신들이 꽤 있다.
ChatGPT 열풍에 힘입어 여러 AI 관련 기사를 내고 있는데, GPT를 포함한 AI기술에 부정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다. # # # #
2.1. 미디어오늘과 언론노조의 비평
한국일보가 YTN 인수 추진을 공식화한 이후, 평소 윤석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칼럼을 지면에 기고하던 이충재 주필을 퇴직시킨 뒤 고문직으로 발령내고 칼럼 연재 또한 중단시키는 일이 벌어졌는데[14] 이에 대해 편집국의 한 기자가 "당연히 주변에서 YTN 인수 때문에 회사가 눈엣가시인 사람들 걸러내는 것 아니냐고 우려할 수 있다고 본다. 논조의 친정부화, 친기업화 우려가 일부 구성원들 사이에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2022년 12월 12일, 한국일보 노조의 민주언론실천위원회가 정진황 뉴스룸 국장을 인터뷰하여 사내 소식지에 게재했는데 민실위는 "최근 몇 달 사이 (한국일보) 기사의 논조가 우경화, 친정부화됐다"고 지적하자 정진황 국장은 "비판의 방식이나 수준은 신문 신뢰도와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기분 나쁜' 기사보단 '아픈' 비판 기사를 쓰도록 지시한 부분이 '대통령은 조지지 마라'는 식으로 왜곡된 게 아닌가 싶다"고 해명했다. #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는 발제 단계에서부터 압박이 들어오고, 우여곡절 끝에 출고가 되더라도 온라인 제목을 수정하라는 지시에 시달린다', '기자들 사이에선 적어도 당분간은 현 정부와 각을 세우는 기획이나 기사를 쓰기 힘들어진 게 아니냐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다', '기사가 수정되는 과정, 제목, 지면 배치, 편집의 방향성에서 달라진 기류를 체감하고 있다'는 내용의 내부 고발이 터져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3. 사시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
공존·통합·사람
4. 사옥
▲ 한국일보 구 사옥(종로구 중학동 14, 현 트윈트리타워) |
건축학적으로 보면 1969년 6월에 준공한 한국일보 사옥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걸작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한국일보가 경영악화로 2007년 건물을 매각했고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철거되어 건축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15] 저 건물이 있던 시절에는 커다란 크기의 한국일보 사기(社旗)가 게양되기도 하였는데 초대형급이라 바람에 날려도 쉽사리 휘날리지 않는 크기였다. 나중에는 사기와 함께 같은 크기의 태극기도 게양하였다. 허나 저 건물이 철거된 후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폐기 처분되었는지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동십자각 사거리에는 별관 사옥이 있었는데 이 건물에는 작은 크기의 한국일보 사기가 게양되었다. 별관 자리에는 트윈트리타워 A동이, 본관 자리에는 트윈트리타워 B동이 들어서 있다.
이후 한국일보는 한진그룹 본사 건물에 세들어 살았다. 철거된 구 사옥 부지에 새 건물이 다 지어졌는데 김수근 만큼은 못해도 나름 건축에 신경쓴 건물인 듯하다. # 그런데 한국일보가 이 건물에 들어갈 권리가 있었는데 포기했다.[16] 그리고 2015년 5월부터 남대문 근처 와이즈타워[17]를 임대해 쓰고 있다. 2017년 말에 서소문동에 있는 정안빌딩 구매 계약을 진행했다. 2018년 기사를 보면 2020년 6월경 신사옥으로 이전할 것 같다고 되어 있으나 계약이 잘 안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2020년 12월 현재도 와이즈타워를 그대로 쓰고 있다가 2023년 12월 새사옥이 첫 삽을 떴다! 용산에 터잡았다. 2027년에 완공 예정. 기사
5. 사가
작사는 박목월, 작곡은 나운영이 맡았으며, 1969년 9월 10일에 제정되었다. (1절) 찬란한 자유의 새벽을 나는 / 신념의 불사조 한국일보 곧고도 바른 붓끝으로 / 오늘의 역사를 증언하라 아아 생생한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서 / 시민의 눈이 되라 빛이 되라 (2절) 세기의 물결을 힘차게 가르는 / 꿋꿋한 길잡이 한국일보 공정한 여론의 횃불을 들어 / 명랑한 사회의 불씨가 되라 아아 밝고도 구김없는 필진을 펴서 / 시민의 벗이 되라 빛이 되라 |
6. 지배 구조
주주명 | 보유주식수 | 지분율 |
엠파크홀딩스(주)[18] | 6,107,144 | 100.00% |
총계 | 6,107,144 | 100.00% |
출처: 2021년 감사보고서 |
2020년 8월 5일 엠파크홀딩스와 동화기업의 주식교환으로 엠파크홀딩스가 100%의 주식을 가진 종속회사가 된다고 공시했다. 그 후 10월 30일자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7. 역대 제호
한국일보 제호 변천사1954년 창간 이후 1998년 가로쓰기 전환 전까지는 서예가 이미경이 쓴 제호를 상당 기간 동안 써왔다. 1954년 창간 시부터 한글 제호를 썼다. 1998년 3월 16일 가로쓰기 실시와 동시에 쓴 제호는 국민대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전승규 교수가 디자인하였으며[19], 이 제호를 2001년 부분 변경을 거쳐 사용하고 2002년 3월 18일부터 헤드라인 계열 서체로 바꾸어 상당 기간을 쓰다가 2015년 동화기업 인수 이후 6월 9일에 정사각형 배열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8. 홈페이지
한국일보 홈페이지 역사는 우여곡절을 지녔다. 1996년 1월 16일에 본사 뉴미디어국이 개설한 '코리아링크(www.korealink.co.kr)'가 그 뿌리였다. 이후 1998년에 'www.hankookilbo.co.kr', 1999년 2월 15일에 'www.hk.co.kr'로 각각 바뀌었다가, 2000년 2월 뉴미디어본부가 'HK미디어'로 분사되고 5월에 사명을 '한국아이닷컴'으로 바꾸면서 도메인도 같은 이름(www.hankooki.com)으로 바뀌었다.그러나 장재구 전 회장의 지분매각으로 관계가 꼬여서 한국아이닷컴을 운영하는 (주)인터넷한국일보 측이 본사와의 뉴스콘텐츠 공급 계약을 해지하여 본사 측은 2014년 5월 19일부터 한국일보닷컴(www.hankookilbo.com)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해 7월에 본사는 (주)인터넷한국일보를 상대로 '한국일보' 상호를 쓰지 못하도록 가처분 소송을 내 12월 11일부로 서울지법이 한국일보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인터넷한국일보 측은 상호명을 2015년 1월부터 '한국미디어네트워크'로 바꾸어야 했다.
즉, 한국일보는 www.hankookilbo.com이고, www.hankooki.com은 한국미디어네트워크가 운영하는 별도의 뉴스 사이트이며 둘은 관계가 없다.
9. 유튜브 채널
10. 역사
10.1. 창간~전성기
1954년 6월 9일 창간호
1954년 백상 장기영 창업주가 <태양신문>[20] 판권을 인수해 제호를 한국일보로 바꾸면서 1954년 6월 9일 창간했다. 이 때 한국일보의 제호는 韓國日報가 아닌 한글인 한국일보였다. 1957년에 경영난에 시달리던 HLKZ-TV의 지분을 인수하여 한국 최초의 신방겸업을 이루어내기도 했고, 1957년 미스코리아 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1958년 조석간제[21]를 실시했다. 1954년부터 언론계 최초로 견습기자 공개채용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기자를 양성했다. 그들 중에는 오인환, 심명보, 권혁승, 조세형, 이원홍, 박현태 등처럼 공직에까지 오른 인물들도 있어서 '기자 사관학교'로 이름을 날렸다.
1958년에는 최병우 기자가 대만 진먼에서 진먼 포격전을 취재하다가 순직했다. 한국 최초의 종군 순직 기자다.
1960년 <서울경제신문> 및 <소년한국일보>를 창간했다. 1962년 '신당 사회노동당' 기사 사건으로 장기영 사장, 홍유선 편집국장 등 3명이 구속되고 3일간 휴간되기도 했다. 1964년 창간한 주간지 <주간한국>의 성공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간지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2]
1968년 목조 사옥 본관에 큰불이 나 전소되고 사원 7명이 순직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날 저녁 신문을 정상적으로 발행해서 본사 건물 화재 사건을 보도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23] 1969년 구 본사 자리에 신관을 지으며 <주간여성> 및 <일간스포츠>를 창간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첫 해외지사를 세워 한국일보 미주판을 발행했다.
1977년에 창업주 장기영 사장이 별세했으며[24], 같은 해 주식회사로 법인전환했다.
1987년 6.10 민주 항쟁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인 아래 사진[25]을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가 찍었으며 이 사진은 AP선정 20세기 100대 사진에 선정되었다.[26][27]
10.2. 위기
1990년을 전후하면서 언론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대선과 1992년 대선을 거치면서, 과거 보도지침이 횡행하던 시절에 비해 언론의 자유도가 높아졌고 언론 매체의 인허가 또한 대폭 늘어난 것이다. 또한 지상파 방송인 SBS가 개국을 하는 등 언론의 무한 경쟁 체제가 확립되었다. 1990년 즈음부터 신문들은 본격적인 증면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1980년대까지만해도 일반적으로 8면에서 12면 정도 발행하던 신문들이 40면에서 많게는 80면까지 발행하기 시작한다.[28] 이때 한국일보는 5.16 군사정변으로 사라진[29] 조석간 동시 발행을 29년만에 부활시키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더 많은 신문을 찍기 위해 윤전기를 늘려야 했고 배달을 위한 지국도 늘려야 했다. 필요한 돈은 은행에서 빌렸고 빚은 무한정 늘어났다. 조석간 동시 발행은 1991년 12월 16일부터 1993년 11월 30일까지 약 2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일은 회사의 재무 상태를 급격히 나빠지게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2년에는 프랑스 패션잡지 엘르(ELLE) 한국판을 창간했다.이런 행보로 인해 회사 사정이 나빠져 가는 와중인 1993년 8월에 장강재 회장이 4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면서 본격적인 하락세를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장강재 회장 사후에 형제들이 이권 다툼을 벌인 것은 회사 분위기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다. 경영권은 장강재 회장의 장남인 장중호가 물려받을 것으로 보였으나, 당시 장중호는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다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어 승계가 어려웠다. 따라서 형제 공동 경영 체제가 되었는데, 장씨 형제 중 둘째였던 장재구가 명예회장, 넷째였던 장재국이 회장이 되었고, 막내였던 장재근이 사장이 되었다.[30]
1993년부터 활판제작 대신 CTS로 전환하고, 이듬해 소년한국일보를 독립법인으로 분리했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도 지속적인 부수 확장전략으로 열세를 만회하려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고 채무만 더욱 급속도로 불어나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한국일보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가로쓰기를 실시했다. 동년 2월에는 장재구 명예회장이 장조카였던 장중호 대주주와 손을 잡고 장재국 회장을 축출했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족 회의를 통해 다시 장재국이 회장에 복귀했다. # # 장강재 회장 시기부터 시작된 경영난으로 인해 한국일보는 1999년 기준으로 채무만 5,600억원에 달하는 부실기업이었다.
2000년 1월 1일에는 새천년을 맞아 새 출발을 한다는 의미로 1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2001년 일간스포츠를 한길무역으로 넘겼으며, 이듬해 2월에 다시 장재구와 장중호가 손을 잡아 장재국 회장과 장재근 부회장을 모두 축출해버렸으며[31], 그 과정에서 장재구 일가가 한국일보를 갖게 되었다. 장재구 회장은 사재 500억원 출연으로 채권단의 호감을 샀다. 한 편 장중호 대주주는 이후 지분을 정리하고 일간스포츠를 가지고 독립했으며 2009년까지 사장 - 회장을 역임했다.[32][33] #1 #2
2006년에 중학동 사옥을 한일건설에 매각하고 우선매수청구권(196억원 상당)을 얻었다.
2008년 10월 9일 미국 블룸버그와의 콘텐츠 제휴로 서울경제TV를 개관하였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 이윤호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 등의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개관식에 참석하여 개관을 축하했다.
2009년 포춘코리아를 창간했다. 다만 한국일보는 이 때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2011년에는 장재구 회장이 우선매수청구권을 몰래 매각했고, 후술할 한국일보 사태의 발단이 되었다.
2012년 6월 17일 20000호가 발행되어 7월 19일 기념 리셉션을 열었다.
10.3. 2013년 한국일보 사태
2013년 4월 29일 한국일보 노조가 장재구 회장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 후 2013년 6월 15일 사측이 용역업체를 동원해 기자들을 내쫓고 회사 방침에 따를 사람들만 출입을 허용함에 따라 직원과 사측이 치열하게 대치했다.한국일보의 논조 특성상 극렬한 노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이 해먹은(...) 200억에 대해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발하면서부터 회장이 인사에 개입을 했고 이는 부당인사로 이어졌다. 결국 노조가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노조는 회사의 인사 조치를 거부하면서 신문을 정상적으로 제작해왔다. 그런데 한국 언론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회장이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했다. 결국 이 때문에 일개 군소 지방지나 삼류 인터넷 뉴스 회사도 아님에도 뉴스의 상당수를 연합뉴스 등 통신사의 기사로 땜질해야 했다. 심지어 사설도 연합뉴스의 연합시론의 것을 그대로 실었다(...). 그래서 신문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
더군다나 사측의 편집국 폐쇄는 직장폐쇄로서, 엄연히 위법이다. 왜냐면, 직장폐쇄는 노조측이 파업을 할 때 이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링크 즉, 기자들이 파업하지도 않았는데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직장 폐쇄한 것은 요건부터 성립이 안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노동법상 파업의 성립 요건 자체가 사측에 상당히 유리하다. 그런 파업에 돌입도 하지 않았는데 직장 폐쇄라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노조측의 주장과 이야기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에서도 들을 수 있다. 팟캐스트1팟캐스트2
회사측에서는 SNS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일보의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은 편집국의 일선 기자들이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직장폐쇄 사태 이후 SNS에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한국일보 전·현직 기자와 논설위원 등 201명은 2013년 7월 미지급 임금채권 등을 근거로 한국일보사에 대한 회생절차 개시를 신청하였으며, 결국 장재구 회장이 경영권을 상실하고 법정관리가 시작되면서 한국일보 사태는 막을 내렸다.
10.4. 2014년 이후
2014년 2월 24일 삼화제분에 인수될 뻔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다시 인수 절차가 진행되었고, 9월 18일 동화기업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되었다.법정관리 상태이긴 하지만, 장재구 회장으로부터 벗어난 이후 신문 발행은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회생절차 직전 구성원들 몰래 인터넷한국일보(현 한국미디어네트워크) 지분 50%를 매각하면서(...) 인터넷한국일보와 한국일보는 남남이 되었고, 한국일보는 결국 온라인 부문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세한 사정은 여기에. 이와 함께 온라인 부문(한국일보닷컴)에 크게 투자하며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전 한국일보의 명성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 새 사옥의 첫 삽을 떴다. 기사 2014년 11월 3일 동화기업과 M&A를 체결했으며, 2015년 1월 9일 동화기업에 인수되었다. 같은 해 6월 9일부로 기존의 "▶◀" 로고를 버리고 새 로고를 만들었다.
2018년 7월 장자연 사건 진술조서 전문을 단독 공개하였다.
11. 자매지
- The Korea Times(코리아타임스) 홈페이지
2020년 현재 자매지는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스 뿐이다. 코리아타임스는 원래 1950년에 친일파 김활란에 의해 세워진 신문이었으나 1954년에 장기영이 인수하였다.
한국일보사는 2013년 이전까지 서울경제신문, 주간여성, 소년한국일보, 서울경제TV, 주간한국, 엘르, 톱모델, 프리미어, 일간스포츠, 스포츠한국, 학생과학[34] 등을 발행한 바 있으나 이들은 현재는 한국일보사와 관계가 없다. 한국일보 사태 당시 한국일보 본지는 장기영 가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나머지 계열사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간한국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시사주간지였으나 2013년에 스포츠한국 등과 함께 인터넷한국일보(현 한국미디어네트워크)로 넘어가서 한국일보와는 무관하다. 일간스포츠는 장기영의 장손 장중호가 맡아 2003년 독립했으나 2005년 중앙그룹, 2022년 KG그룹 등으로 주인이 수 차례 바뀌었다. 서울경제는 장기영의 3남 장재민이 지배하고 있는 등 옛 계열사들은 각자 도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일보와 함께 동화그룹의 미디어 계열사로 있는 것은 코리아타임스 뿐이다. 인사/행정 부서를 공유하고 같은 해에 각사에 입사한 기자는 동기로 치는 등 실제 그룹 계열사로 기능하는 중이다.
1971년부터 소년한국일보에서 만화출판업을 겸하여 합동출판사와 함께 1982년 결별시까지 독점에서 양대산맥을 이룬 적이 있었다. 소년한국일보를 통해 데뷔하거나 활동한 만화가로는 신영식, 박기정, 엄희자, 길창덕, 김수정, 허영만, 박봉성, 김동화, 이원복, 임웅순 화백 등이 있었다.
12. 기획특집 · 연재
13. 논란 및 사건사고
- 1997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인 간첩을 체포하여 구속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서울 서초동 르네상스 오피스텔에 있는 무기 중개상 포산기술산업 사무실에 안기부 수사관이 들이닥친 것은 97년 4월21일이었다. 수사관들은 이 회사 사장인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곽(한국명 곽00·57)씨 등을 연행하고 관련 자료를 압수해 갔다. 이 날 저녁 <한국일보> 법조팀 이00 기자는 법원 당직실에 우연히 들렀다가 무기 중개상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된 사실을 알았다. 이어 서울지검 공안부가 영장을 청구했고, 안기부 수사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법원 주위를 서성이는 것을 알고 큰 사건이 터졌구나 싶어 급히 1보를 송고했다. 이때는 이미 가판과 지방판이 마감된 다음이었다. 때문에 이 기사는 다음날 서울 시내판에만 실렸다. 그 바람에 안기부와 기무사는 이 기사가 나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국방부 기자실은 낙종한 매체의 기자들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국군 기무사의 관계자가 급히 달려와 ‘국방부 군수국 소속 김00 공군 중령(47)이 공중조기경보기 입찰 정보가 담긴 합동전략목표기획서(JSOP) 등 방위력개선사업과 관련한 군사 기밀을 빼내 제임스 곽씨에게 전달했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 기밀 유출 사건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한국일보>는 ‘제임스 곽씨가 빼낸 정보는 미국 리튼사의 아시아 담당 지사장 도널드 래클리프씨에게 전달되었다’며 다시 특종 보도를 했다. 이후 래클리프씨가 미국 정보기관에 이 정보를 전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4월30일자 <조선일보>가 여기에 불을 지폈다. <조선일보>는 래클리프씨가 수사 착수 직후 미8군 영내로 달아났으며, 미군은 래클리프씨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직후 주한미군 관계자가 국방부 기자실로 달려왔다. 기자회견을 자청한 그는 “래클리프씨는 8군 영내에 있는 드래곤 힐이라는 여관(lodge)에 묵고 있다. 드래곤 힐은 현역뿐만 아니라 예비역도 묵을 수 있는 곳인데, 래클리프씨는 예비역 공군 소령이다. 래클리프씨는 드래곤 힐이 서울 시내 호텔보다 값이 싸기 때문에 이용한 것이다. 주한미군이 신병 인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날 미8군은 래클리프씨에게 드래곤 힐 이용 기간 연장을 불허했다. 동시에 한국 수사기관에 ‘오늘 중으로 래클리프씨가 8군 기지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 날 오후 2시30분쯤 사전 구속 영장을 확보한 안기부는 미8군 기지를 나오는 래클리프씨를 붙잡아 구속했다. 93년 안기부는 일본 후지 텔레비전의 시노하라 기자가 군 기밀을 빼내 일본 무관에게 유출한 혐의를 잡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한 바 있다. 반면 미국의 연방 검찰은 96년 미국 해군의 군사 기밀을 한국 무관에게 전달한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씨를 붙잡아 간첩죄로 기소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이때부터 미국인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느냐가 관심사가 되었다. 미국의 CNN 방송은 한국이 이번 사건을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다룰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4월 초 미국의 코언 국방장관은 패트리어트 구매를 은근히 강요했다가 한국 언론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산 적이 있다. 한·미 간에 형성된 ‘한랭 전선’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미묘해진 것이다. 미국이 한국인의 반미 감정을 고려해 래클리프씨의 사법 처리를 한국에 넘기자, 기무사 또한 5월 초에 갖기로 한 수사 발표를 취소하는 등 신중하게 대응했다. 대신 국방부 군수국장을 보직 해임 하는 등 군사 기밀 유출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미국은 자기네 군사 기밀이 유출될 경우 매우 엄격하게 대응한다. 반면 한국은 시노하라 기자 사건 때처럼 군사 기밀 유출죄만 적용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과연 미국 정보기관은 래클리프씨 등으로부터 한국의 군사 기밀을 입수했을까. 이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가 간첩죄를 적용할지 관심을 끌고 있다.[37] 결국 1997년 7월 11일,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전.현직 한국군 장교들로부터 군사기밀을 빼내 수집해온 미국 방위산업체 중역인 도널드 래클리프씨(62)에 대한 한국검찰의 구형이 이뤄졌다. 구형량은 징역 5년. `리튼 가이던스 앤드 컨트롤시스템'社 극동아시아지역 사업담당 이사인 래클리프씨는 94년 7월부터 최근까지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면서 2,3급 군사기밀 수십종을 탐지, 수집한 혐의로 4월 30일 안기부에 의해 구속됐다.[38] 래클리프씨는 자신에 대한 한국 수사기관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美8군 영내로 도피했다가 결국 자진출두했고 美국무부는 그에 대해 영사적 지원조치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하는등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39][40][41][42][43][44][45][46][47] 결국 당시 대한민국 국가정보기관 사상 최초로 미국인 간첩이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간첩행위로 체포되어 구속된다.[48][49][50][51] 1996년에 미국 해군정보국(ONI) 군무원 로버트 김이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FBI에 체포되자 안기부 측은 미국인 무기 중개상 도널드 래클리프를 1997년 군 기밀유출 혐의로 체포했다. 그 뒤 안기부가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 측에 "로버트 김에게 감형 조치를 내리면 래클리프를 풀어줄 수 있다"는 주한 미국대사 대리인 리처드 크리스텐슨은 "그 사람은 간첩 아니니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법원은 래클리프에게 징역 2년 및 집행유예 4년으로 감형하고 체포 3개월 만에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전해진다.#
- 2013년 10월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 당사자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황교안 서울지검 북부지청 형사5부장 시절 삼성그룹 임원들이 연루된 성매매 사건을 수사하면서 삼성 측으로부터 15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수수했다'는 떡값의혹을 보도하였고 이어 '삼성 X파일 사건'에 연루된 삼성 관계자들이 무혐의 처분을 받는 데도 일조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황교안 법무장관은 한국일보에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후 2014년 7월 법원은 "기사의 근거로 삼은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은 불분명하고 일관성이 없어서 믿기 곤란하다"며 기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추가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며 "한국일보는 황교안 장관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고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고 판결했다. # 이후 2016년 한국일보는 항소심까지 일부 패소한 후 대법원 상고를 취하하며 결국 정정보도를 하고 황교안 총리에게 사과했다. 특히 핵심 증인인 김용철 변호사가 잇달아 ‘너무 오래된 사건이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고, 증언을 해도 명예훼손이나 위증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한국일보는 김용철 변호사 진술 외에 기사 내용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일보가 가짜뉴스 오보를 낸것으로 인정하는 셈이 됐다. #
- 김광수 기자 내로남불 기사 논란이 일어났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韓中 국방 핫라인 가동도 초읽기라고 좋게 기사를 쓴 김광수 기자가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중 외교에 대해 핫라인? 수화기 안 들면 그만이라고 정반대 논조로 기사를 쓴 일이다. 물론 2017년 기사에서 2015년에 한중 핫라인이 개설됐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결국 박근혜 정부가 사드를 설치했다는 언급은 하는데 겨우 2년 전에 좋게 기사를 쓴 인물과 동일인물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게다가 명백한 조롱성 서술("아빠가 기껏 사다 준 네발 자전거를 창고에 처박아 놓고는 두발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비겠다는 철부지 아이와 영락없이 닮았다.")은 좀... 논란이 되자 제목을 한중 핫라인 개설, 갈 길이 멀다.로 고치고 문제의 구절도 없앴지만 이미 변경 전 제목과 내용이 알려지고 아카이브로 박제된지 오래다. 한국일보치고는 논조가 너무 적나라해서 일부에서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중국 갔다가 맞은 것에 대한 시위 아니었겠냐고 분석했다.
- 2020년 2월 코로나 사태 당시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사는 집에 딱지를 붙이는 등 차별적 행태를 보이는 것에 대해 기사를 썼는데 기사 내용과 직접 연관이 없는 사진을 써서 논란이 일어났다. 그 후 한국일보는 경위를 설명하면서 사과를 하고 사진을 교체했다.#
- 2020년 3월 한국의 코로나 진단 키트와 관련하여 미국 하원에서 있었던 내용을 보도하였는데, 마크 그린 의원이 했던 발언을 그대로 믿고 그게 실제 FDA의 입장인 줄 알고 <미국 FDA "한국 코로나 키트, 비상용으로도 적절치 않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52] 심지어 기사의 작성자로 출고한 기자의 이름 조차 허위였다. 기사는 데스크가 써놓고, 정작 기자 작성자 바이라인에는 기사를 쓰지도 않은 엉뚱한 사람 이름을 써 넣었던 것. 논란이 된 후 한국일보는 해당 기사에 대해 사실확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 후 기사는 수정되고 추가 취재 내용이 반영되었다.#
- 2020년 7월 3일 "불가능한 코로나 퇴치위해 하루 검사비만 20억 쓰는게 맞을까"라는 제목으로 방지환 중앙감염병병원운영센터 센터장과의 인터뷰를 근거로 일본의 방역 상황을 본받을 필요도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국가별 인구통계학적 차이를 보정하고 보면 검사를 적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 일본의 사망률이 오히려 최저수준이라는 이야기다. 감염자 근절에 방점을 찍는 K방역도 좋지만 현재 사망률이 낮은 J방역에서도 참고할 부분이 있는 상황이다.'라고 썼다. 실제로 서울대의대 코로나19 과학위원회가 6월 26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인구표준화 사망률(age-standardized mortality rate)은 일본(0.1명) 한국(0.3명) 오스트리아(2.7명) 순서로 낮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대응 문서에 나오듯이 일본의 방역 상황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도저히 더 나은 점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사람들의 비판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 기사는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한국일보 트위터 및 페이스북에서도 모두 내려갔으며 일부 포털 사이트에서도 언론사의 요청으로 인해 내려갔다.
- 김학의에 대해 백서(?)를 통해 쓴다고 하면서 협박용 동영상이라고 하며 금전갈등 윤중천 구속시키려 경찰 제보. 윤중천 조카, 종편에 CD 5억 판매 협상 성폭행 피해 '고백 동영상' 제작한 일당 김학의 근무지 전화해 20억 갈취 시도라고 주장하며 김학의가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해해줄 여지가 전혀 없는 주장일 뿐이다. "애초 윤중천과 어울려 다니며 윤중천이 제공하는 접대를 받은 김학의가 잘못한 것이다."[53] 이미 이전에도 한국일보에서 보도를 통해 김학의가 성접대를 받았다는 것을 보도한 바가 있는데도 이러는 것이다. # 실제로 이후편에서는 윤중천이 김학의에 아주 제대로 공을 들였음을 보도하고# 여성단체의 김학의 성접대 사건에 대한 대가 관계가 있었다고 자발적 성접대로 결론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들도 보도한다.# 폭력도 있지만 여성을 우호적으로 대하거나 이득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 괜히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설명이 나온게 아니다.
- 2021년 8월 29일 진천군 공무원 인재개발원에 자가격리 중인 아프가니스탄인 특별기여자 소녀의 사진을 실어 논란이 됐다. 사진은 망원렌즈로 줌을 해 소녀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 아기까지 찍었다. 모자이크 처리했어도 사생활 침해인데 그마저도 않아 그대로 얼굴이 노출됐다. 신원 공개되면 자칫 아프간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신변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에도 뉴스거리를 위해 신원을 공개해버린 것이다. # 결국 다음날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며 뒤늦게 사과문을 올렸다. #
-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의 중심 인물 김만배에게 한국일보 간부(이하 A씨)가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다.[54] A씨는 2020년 5월 주택 매입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김만배로부터 1억 원을 빌렸다. 한국일보는 2023년 1월 13일 '독자와 국민께 깊이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사과문을 올린 후 A씨를 해고했다. # 검찰은 A씨가 대장동 일당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작성하거나 불리한 기사를 막아달라는 청탁을 받았다고 보고 수사에 착수, 2024년 4월 18일 A씨를 압수수색했으며 A씨는 6월 한 달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3회 출석했다.[55] 한편 A씨는 한국일보를 상대로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했으나 2024년 6월 14일 1심에서 패소했고, 결국 6월 2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전 A씨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단순히 돈을 빌린 것일 뿐 기사 청탁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며 결백을 호소했다. 또한 금전 거래가 이뤄질 당시 A씨가 논설위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기사 작성이나 편집에 관여할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A씨의 법률대리인 임성근 변호사는 "비정상적인 거래가 아니었음에도 부정한 청탁을 받은 것처럼 보도됐고 검찰 수사로 이어진 점에 대해서도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며 "회사가 본인의 소명을 귀담아듣지 않은 채 곧바로 해고 조치했고 법원에서도 사측 주장이 그대로 인정돼 명예가 훼손된 점에 대해서도 마음 아파했다"고 전했다. #
14. 자회사
15. 여담
- 중앙일보와 악연이 좀 있는데 1965년에 중앙일보가 창간될 당시 다른 신문사에서 기자들을 스카우트할때 한국일보는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어 편집국 인원 25명과 업무, 광고 분야 인원 상당수를 잃어서 사주의 경제부총리 입각과 더불어 큰 타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런 기자 빼가기는 21세기 들어와서도 한동안 이어지면서 사세 약화에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56] 또한 1995년에는 석간신문이던 중앙일보가 조간신문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때 한국일보가 "삼성의 광고를 잃어도 재벌 언론의 문제점을 비판하겠다"며 3월 25일 '재벌의 언론파괴'라는 사설을 내보내 삼성그룹 산하의 언론사이던 중앙일보와의 전면전을 펼치기도 했다.
- 1973년부터 창간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산악연맹과 공동으로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계획을 세워 1977년 고상돈의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1993년에는 창간 40주년 기념사업으로 허영호 대장을 필두로한 남극점 탐험대를 구성했는데 이 남극점 탐험대는 1994년 1월 10일(한국시간 1월 11일 아침) 당시 영국, 이탈리아, 일본 등 3개국 밖에 성공하지 못했던 남극점을 오르는데 성공했다.
- 동화그룹 계열의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는 미주한국일보와 별개 회사이며, 그쪽은 장기영 창업주의 3남 장재민(현 서울경제신문 회장)이 소유하고 있다. 미주한국일보는 미국 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 신문이다. 미주한국일보와 같은 계열이 LA의 라디오 서울이다. 멕시코에서도 한국일보멕시코를 발행하고 있으며 미주한국일보와의 로열티 계약을 통해 한국일보의 컨텐츠를 사용하지만 독립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 1977년 1월 미국의 타임-라이프 북스와 합작으로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라는 별도의 출판사를 설립하여 타임-라이프 북스 한국어판을 출간하기도 했으나, 2000년에 타임라이프가 철수하여 '한국일보멀티미디어'가 됐다가 2002년에 폐업됐다.
- 2020년부터 사주인 동화그룹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일보의 온라인 중심 체제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2020년 7월부터는 온라인 뉴스 생산을 전담하는 뉴스룸국과 신문 지면을 생산하는 신문국으로 편집국 조직을 이원화했다. 뉴스룸국에서는 신문 제작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디지털 콘텐츠 생산만을 담당하며 대다수 기자가 뉴스룸국에 속해 신문 마감 시간이 아닌 디지털 출고 일정에 맞춰 기사를 쓰고 콘텐츠를 생산한다고 한다.
- 2020년 9월 취재원과 관계에서 취재윤리를 위반한 기자에 대해 권고사직을 결정했다. 구체적인 사유는 공개하지 않았다.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는 없는 대신에 이곳에서 창간일인 1954년 6월 9일자부터 최근 판본까지의 모든 신문 지면을 볼 수 있다. 다만 확대해서 보려면 로그인을 해야 한다.
16. 관련 문헌
17. 관련 문서
18. 역대 임원
18.1. 상임고문
- 권혁승, 정태연 (1994~1998)
- 김충한, 이인호, 정달영 (1998~1999)
18.2. 명예회장
- 장재구 (1993~1997)
18.3. 회장
- 장강재 (1979~1989/1990~1993)
- 장재국 (1993~1997/1998~2002)
- 장재구 (1997~1998/2002~2013)
- 회장대리 장재근 (1998)
- 승명호 (2015~ )
18.4. 부회장
- 홍유선, 신영수 (1981~1989)
- 박병윤 (1999~2000)
- 장재근 (2000~2002)
- 이종승 (2011~2013)
18.5. 사장
- 장기영 (1954~1962/1963~1964/1967~1973)
- 남궁련 (1962~1963)
- 김종규 (1964~1967)
- 장강재 (1973~1979/1989~1990)
- 홍유선 (1979~1981)
- 장재구 (1981~1986)
- 김창열 (1986~1989)
- 장재국 (1990~1993/1999)
- 장재근 (1993~1998)
- 박병윤 (1998~1999)
- 장명수 (1999~2002)
- 윤국병 (2002)
- 신상석 (2003~2004)
- 이종승 (2004~2011/2015)
- 박진열 (2011/2013)
- 이상석 (2011~2013)
- 이준희 (2014~2015/2016~2019.12.)
- 이영성 (2020.01.~2022.11.)
- 이성철 (2022.12~ )
18.6. 수석부사장
- 김영렬 (1996~2002)
- 윤국병 (2002)
18.7. 부사장
- 오종식 (1955~1957/1958~1960)
- 성인기 (1961~1963)
- 홍유선 (1968~1973/1978~1979)
- 신영수 (1968~1973)
- 윤동현 (1968)
- 장강재 (1969~1973)
- 김평윤 (1969~1978)
- 장재국 (1979~1990)
- 장재근 (1979~1993)
- 김충한 (1983~1998)
- 문은모 (1994~1998)
- 문현석, 이성준 (1998~2002)
- 신상석, 배봉휘 (2002~2003)
- 정기상 (2003~2010)
- 이상석 (2008~2011)
- 이진희 (2013)
- 이준희 (2013~2014)
- 이영성 (2014~2019.12.)
18.8. 대표 보전관리인
- 고낙현 (2013~2014)
19. 역대 법정등록인
19.1. 발행인
- 장기영 (1954~1962/1963~1964/1967~1973)
- 남궁련 (1962~1963)
- 김종규 (1964~1967)
- 장강재 (1973~1981)
- 홍유선 (1981~1985)
- 장재구 (1985~1986)
- 김창열 (1986~1989)
- 장재국 (1989~1998/1999)
- 박병윤 (1998~1999)
- 장명수 (1999~2002)
- 윤국병 (2002)
- 신상석 (2003~2004)
- 이종승 (2004~2011)
- 박진열 (2011/2013)
- 이상석 (2011~2013)
- 보전관리인 고낙현 (2013~2015)
- 이준희 (2015.12.~2019.12.)
- 이영성 (2020.01.~2022.11.)
- 이성철 (2022.12.~ )
19.2. 편집인
- 장기영 (1954~1962/1963~1964/1967~1969)
- 남궁련 (1962~1963)
- 김종규 (1964~1967)
- 홍유선 (1969~1981)
- 정태연 (1981~1982)
- 권혁승 (1982~1985)
- 김성우 (1985~1986)
- 이문희 (1986~1998)
- 이성준 (1998~2000)
- 배기철 (2000~2002)
- 신상석 (2002~2004)
- 이종승 (2004~2011)
- 이진희 (2013)
- 보전관리인 고낙현 (2013~2015)
- 이준희 (2016~2018.12.)
- 이영성 (2018.12.~2022.11.)
- 이성철 (2022.12.~ )
19.3. 인쇄인
- 장기영 (1954~1969)
- 조병종 (1969~1973)
- 이기화 (1973~1987)
- 이완준 (1987~1991)
- 장재국 (1991~1993)
- 장재근 (1993~1998)
- 박병윤 (1998~1999)
- 장재국 (1999)
- 장명수 (1999~2002)
- 윤국병 (2002)
- 신상석 (2003~2004)
- 이종승 (2004~2011)
- 박진열 (2011/2013)
- 이상석 (2011~2013)
- 보전관리인 고낙현 (2013~2015)
- 이준희 (2016~2019.12.)
- 권동형 (2019.12.~ )
20. 역대 주요 간부
20.1. 주필
- 오종식 (1954~1957/1959)
- 성인기 (1962~1963)
- 홍유선 (1973~1978)
- 주효민 (1978~1980)
- 조두흠 (1986~1989)
- 이문희 (1989~1990/1996~1997)
- 오인환[60] (1990~1992)
- 정달영 (1992~1994/1999~2000)
- 김성우 (1994~1996)
- 장명수 (1998~1999)
- 노진환 (2002~2004)
- 김수종 (2004~2005)
- 임철순 (2006~2012)
- 정병진 (2012.05.~2015.01.)
- 이준희 (2015.02.~2015.12.)
- 황영식 (2016.01.~2018.04.)
- 이충재 (2020.07.~2022.11.)[61]
20.2. 논설고문
- 주효민 (1980~1983)
- 윤종현 (1983~1988)
- 조두흠 (1989~1990)
- 김성우 (1996~2000)
- 임철순, 강병태 (2012.05.~?)
- 이준희(2020~ 현재)[62]
20.3. 논설주간
- 윤종현 (1980~1983)
- 김창열 (1983~1986)
20.4. 논설위원실장
- 김서웅 (1998)
- 노진환 (2000~2002)
- 문창재 (2002~2004)
- 이준희 (2012.5 ~ ?)
- 이계성 (2015.12 ~ 2017)
- 황상진 (2017~2020)
- 이태규 (2022~ )
20.5. 논설간사
- 주효민 (1961~1963/1964~1973)
- 신영철 (1963~1964)
20.6. 편집국장
- 전홍진 (1954)
- 오종식 (1954/1959)
- 이건혁 (1954~1955)
- 임창수 (1955~1958)
- 홍승일 (1958/1959~1962)
- 김현제 (1958~1959)
- 장기영 (1962)
- 장기봉 (1962~1963)
- 홍유선 (1963~1971)
- 이원홍 (1971~1974)
- 김강환 (1974~1975)
- 김창열 (1975~1978)
- 조세형 (1978)
- 권혁승 (1978~1980/1980~1982)
- 심명보 (1980)
- 조두흠 (1982~1983)
- 김성우 (1983~1985)
- 이성표 (1985~1986)
- 이문희 (1986~1988)
- 오인환 (1988~1990)
- 정달영 (1990~1991)
- 박병윤 (1991~1993)
- 윤국병 (1993~1994)
- 이성준 (1994~1996)
- 김서웅 (1996~1998)
- 배기철 (1998~1999)
- 박무 (1999~2000) [63]
- 신상석 (2000~2002)
- 최규식 (2002~2003)
- 박진열 (2003~2004)
- 임철순 (2004~2006)
- 이진희 (2006~2007)
- 이준희 (2007~2009)
- 이종재 (2009~2011)
- 이충재 (2011~2012)
- 이영성 (2012~2013)
- 이계성 (2013~2014)
- 고재학 (2014.05.28.~2015.12.)
- 황상진 (2016.01.~2016.12.)
- 이성철 (2017.01.~2019.06.)
- 이태규 (2019.06.~2020.11.15.)
- 이영태 (2020.11.16.~2022.05.18.)
- 정진황 (2022.05.19.~ )
[1] 2015년 5월 말 이 주소지의 와이즈빌딩(구 YTN타워) 16~18층으로 이전하였다. 원래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근처에 있었으나 구 본사 건물이 철거되고 2015년까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118 한진빌딩 신관 12층을 사용했다.[2] 동화기업 그룹의 지주회사.[A] 2023년 6월 2일 기준[A] [5] 다만 미주판과 MBN의 아침 & 매일경제 프로그램에서 해당 신문사 기사를 내보낼 때 자막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6] 물론 당시에는 동아일보가 '2위 없는 1위 신문'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명성이나 매체 영향력 면에서 단연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7] 김용철 변호사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는 동아, 경제는 조선, 사회는 한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부의 취재력이 뛰어난 신문이었다고 하며, 김 변호사 본인도 이런 이유로 사법연수원 시절 한국일보에서 전문기관 연수를 받았다고 한다.[8] '2021년 신문잡지 이용조사' 종이신문 제호별 열독률 조사.[9] 사족으로, 과거 한때 신문 업계에서는 조중동이나 한겨레-경향신문처럼 정파성이 뚜렷한 매체들을 제외한 다른 기타 신문들을 대충 전부 얼버무려서 '중도지'라고 일컫기도 했다.[10] 10월 유신 이후 정수장학회 소유 시절부터 전두환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경향신문은 이른바 독재 정권 기관지 성격의 관영 언론 취급을 받았고, 특히 1990년대에는 경향신문이 한화그룹 산하의 계열사 형태였으므로, 당연히 친재벌 보수 우파 성향 신문으로 분류되었다.[11] 조선일보 또한 박정희 정권에 영합하긴 했지만, 사실 박정희 정권 내내 가장 정부와 밀착되어 양적 성장을 이룬 신문은 한국일보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후에는 조선일보가 가장 정권에 밀착하였고, 덕분에 급격히 성장하여 가장 큰 권력의 수혜를 받게 된다.[12] 한국일보의 논조에 대해 좋게 말하면 비교적 비정파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하면 별 특색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중도라는 것은 모든 사안에 대해서 이도저도 아닌 가운데 입장을 취하는 것을 뜻하는게 아니다. 물론 한국일보도 각각의 사안이나 이슈마다 취하는 입장이 있긴 하지만, 다른 주요 신문사들보다 상대적으로 그 방식이나 표현이 덜 적나라하거나, 불분명하거나, 논조가 통일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중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13] 이재명의 극성 지지자들을 논외로 하면, 이재명이 응급상황이라면서 헬기까지 타고 서울대병원까지 간 것이 문제 없다고 두둔한 식자는 홍준표 외에는 찾기 어려우며, 의료계에서도 당사자인 서울대병원 외에는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4] 이후 이충재 고문은 한국일보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칼럼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따로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해당 뉴스레터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하기 시작했다.[15] 혹자는 이에 대해서 한국 건축계의 이중적인 태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광화문 앞의 정부중앙청사나 김수근의 한국일보 사옥이나 둘 다 고궁 앞에 위치하고 있고 수직적인 외견을 가지고 있는데 정부중앙청사에 대해선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는 반면 김수근의 한국일보 사옥에 대해선 찬양이 쏟아지기 때문이다.[16] 한국일보가 그 권리를 포기한건 아래에 나오는 한국일보 사태와도 연관이 있다.[17] 과거 YTN이 본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18] 동화기업이 동화홀딩스일 때 인적분할한 중고차부문 회사[19] 출처: <한국일보 50년사> p1097[20] 전신인 태양신문은 1949년 2월 25일에 창간되었다.[21] 하루에 신문을 아침과 저녁 두 번 발행하는 것. 아침에 발행하는 신문을 조간 신문, 저녁에 발행하는 신문을 석간 신문으로 부르고 하루에 두 번 발행하는 건 조석양간체제라고 부른다.[22] 최초의 주간지는 1922년 9월 3일 창간한 최남선의 '동명'이고 광복 후에는 1947년 8월 5일 창간한 '주간서울'이다. 이후에도 1949년 '태양신문' 일요판, 1952년 1월 12일 '주간국제', 1954년 한국일보 일요판, 1955년 12월 26일 '주간희망' 등이 창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주간지에 대한 인식이나 시장이 성숙하지 않아 모두 단명했다. '주간한국'이 발행부수 40만부를 돌파하는 대성공을 거두자 1968년 '주간중앙', '선데이 서울', '주간조선', '주간경향', 1969년 '주간여성'이 창간되어 주간지 전성기를 이룬다.[23] 1984년 간행한 한국일보30년사에서 발췌함.[24] 다만 경영은 1973년부터 그의 장남인 장강재 사장이 맡고 있었다.[25] <아!, 나의 조국> 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다.[26] 사진을 찍은 당시에는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신문에 게재되지 않았고 6개월 후에야 게재되었다. #[27] 민주화 항쟁에 관년된 사진속 인물들은 훗날 대부분 신원이 밝혀졌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은 2024년 기준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28] 이때 신문사들 간의 증면 경쟁이 어찌나 막무가내였던지, 심지어 신문 용지의 공급이 모자라서 신문을 찍지 못하는 기절초풍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29] 한국일보는 1958년에 조석간제를 실시했고 그 당시에는 조석간 동시발행하는 신문이 많았다. 5.16 군사정부가 언론통제의 일환으로 모든 신문이 조간과 석간 중 하나로만 발행할 것을 강제하면서 조석간제는 사라졌다. 이 때 그들이 했던 언론통제정책 중에는 모든 신문의 주 1회 의무 휴간도 있었다.[30] 둘째였던 장재구와 셋째였던 장재민은 미주한국일보 경영을 맡고 있어, 한국 쪽과는 거진 관계가 없었다.[31] 사실 이건 장재국 회장 쪽이 병크를 터뜨려서 그렇다. 회사 경영 상태 악화 + 외환위기 중 LA에서 원정 도박을 벌여서 민심을 잃었다고 한다.[32] 한국일보는 재무 상태 개선 목적 + 장재구 - 장중호 숙질 간의 관계 악화 등으로 인해 일간스포츠의 지분을 2005년에 아예 정리해버렸다.[33] 장중호 대표는 2004년부터 중앙일보를 끌어들여 그들의 유통망을 이용했으며, 2005년에는 아예 중앙일보가 최대주주가 되었다. 장중호 대표는 2대 주주 + 사장/회장으로 2009년까지 직접 경영했다.[34] 1995년 1월호를 끝으로 폐간.[35] 최근 사망한 인물들의 부고를 소개하는 시리즈. 주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다. 책으로도 출간.[36] 한국일보는 물론 한국 언론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작 르포. 책으로도 출간되었다.[37] 미국인 군사기밀 유출 사건 사법처리 향방 1997 시사저널[38] 로버트 金 對 도널드 래클리프 1997 연합뉴스[39] 미 무기상 래클리프 구속 미묘한 파장[40] 美언론, 간첩혐의 미국인 체포에 예민한 반응[41] 로버트 金 對 도널드 래클리프[42] 美社에 군사기밀 유출 군수중개업자 실형선[43] 일본인 시노하라 지국장 사건과 미국인 무기중개상 래클리프 사건[44] 미 무기상 군기법 위반 구속 동아일보[45] 군 기밀 유출사건 서울지검 송치 조선일보[46] 군 기밀 빼돌린 미 무기상 미 8군 영내로 달아나 조선일보[47] 군 영내 도주 미 무기상 구속 조선일보[48] 미 무기상 군기법 위반 구속 동아일보[49] 군 기밀 유출사건 서울지검 송치 조선일보[50] 군 기밀 빼돌린 미 무기상 미 8군 영내로 달아나 조선일보[51] 군 영내 도주 미 무기상 구속 조선일보[52] 사실은 마크 그린 의원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이었다.[53] 공무원들이 향응이나 접대를 받은 이후 협박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54] 이 외에 한겨레, 중앙일보, 채널A의 현직 간부도 금품을 수수했다.[55] 사망 이틀 전인 6월 27일에도 검찰에 출석해 8시간가량 조사를 받았고 7월 첫째 주에도 한 차례 검찰 출석을 앞두고 있었다.[56] 다만 동양방송이 한창 개국했을때는 한국일보에서 동양방송에게 뉴스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것도 초창기의 일.[57] 유명한 인물이 소설가 최인호이다.[58] 봉황대기 대회는 2010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가 2013년 부활했다. 2010년 고교 야구부에 참가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59] 제1회 대회인 1957년 대회부터 주최했으며, 이 때문에 미스코리아 대회 상 중에 "미스 한국일보"가 있었다. 현재는 자회사인 글로벌 E&B에서 주최한다.[60] 김영삼 정부 때 공보처장관을 역임함.[61] 퇴임 전에 했던 뉴스레터를 퇴임 후에도 개인사이트를 운영하며 이어가고 있다. #[62] 주필, 사장을 다 거쳤다.[63] 머니투데이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