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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푸아뉴기니의 역사에 대한 문서.2. 전근대
1885년에 시장에 모인 파푸아뉴기니 원주민들의 모습
뉴기니 섬에는 약 4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원시인이 정착하였고, 이후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이 그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기원전 7천년경 섬 중부 고원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도 독자적으로 이룩한 것이다. 기원전 500년경 오스트로네시시아-멜라네시아인들이 해안에 정착하여 도기 제작, 돼지 사육, 어업 등이 전해졌다.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와 가까운 서뉴기니 해안지대만이 제한된 교류를 했을 뿐, 1545년 대항해시대 유럽인들이 섬에 처음 당도해 뉴기니라 명명했지만 파푸아뉴기니에 해당되는 동부는 19세기 중반까지 나머지 세계에 있어 미지의 땅이었다. 그나마 18세기 서부에 포르투갈 제국 상인들이 전해준 고구마가 점차 동부에서도 주요 작물로 수용된 것이 몇 안되는 외부의 영향이었다. 고구마는 기존 작물 타로를 대체하였고, 높은 생산력 덕에 인구 증가를 야기하였다.
3. 근현대
3.1. 식민제국들의 분할통치 : 독일령 뉴기니 / 영국령 파푸아 지역
19세기 말엽 뉴기니 섬 정세
파푸아뉴기니에 대한 첫 외세의 지배는 기존 교역로이던 서쪽이 아닌 동쪽과 남쪽에서 뻗어왔다. 19세기 중반부터 사모아에 영향력을 키우던 독일 제국은 1877년 뉴브리튼 (당시 뉴포메른) 섬 동부, 미래의 라바울 근방 마투피 섬에 정착지를 세웠다. 다만 수상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건설을 반대했기에 파푸아뉴기니 본섬에 대한 식민화는 영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영국은 1859년 호주 동북부 퀸즐랜드 식민지를 수립하고 독일의 활동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퀸즐랜드 총독 매실레이스는 대농장 확대를 원하던 지주들의 의견에 따라 1883년 산호해를 건너 포트모르즈비를 세웠다. 그리고 퀸즐랜드 주에 뉴기니 지역을 합병했다.(상단 이미지의 유니언 잭이 있는 지역) 이는 영국 당국의 승인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영국 당국은 이듬해 뉴기니 보호령을 수립하였다. 영국의 이러한 '도발'에 고무된 비스마르크는 결국 1884년 식민 정책에 수정을 가하여 민간 차원의 뉴기니 회사에 식민화를 맡겼고, 11월 3일 카이저 빌헬름란트에 독일 깃발이 올랐다.
이로써 동북부 뉴기니는 비스마르크가 추진한 몇 안되는 식민 사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뉴브리튼 섬 일대는 '비스마르크 제도'라 불리게 되었고, 뉴기니와 뉴브리튼 사이의 바다 역시 '비스마르크해'라 불리게 되었다. 영국령 뉴기니의 치소인 포트모르즈비에서 북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뉴브리튼과 마주보는 반도 끝자락에 독일령 뉴기니의 치소로써 핀츠하펜이 세워졌다. 다만 독일령 뉴기니의 본섬에 대한 식민화는 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891년 말라리아의 창궐로 독일령 뉴기니의 치소는 핀츠하펜에서 북해안의 마당으로 옮겨졌지만, 그 역시 말라리아가 창궐하자 약이 오른 독일 당국은 본섬 대신 비교적 식민화가 진척된 뉴브리튼의 헤베르트쇠헤 (비스마르크 장남 헤베르트를 기념, 현재 지명은 코코포)로 치소를 옮겼다. 그러다 1910년에 1878년에 세워진 심슨하펜 (현 라바울)으로 다시 치소를 이전하였다. 결국 1870년대의 본 정착지로 돌아온 셈이다.
3.1.1. 1차 대전기
한편 1901년 오스트레일리아가 사실상 독립하자 이듬해 영국령 뉴기니 역시 그에 이양되었다. 1차 대전의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호주에서는 2천의 오스트레일리아 해양 군사 원정대를 조직하여 독일령 뉴기니 정복에 나섰다. 당시 독일령 뉴기니에는 불과 5백의 군경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중심인 뉴포메른 (뉴브리튼) 섬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호주군은 그곳으로 향하여 9월 12일 심슨하펜 (라바울)을 무혈 점령하였다.주도를 내어주고 내륙으로 후퇴하여 방어 거점을 세우고 있던 독일군은 비타 파카 전투에서 호주군 지휘관 찰스 엘웰을 전사시켰으나 결국 패하였고, 다시 남쪽의 토마에서 항전했으나 호주군이 3일간 봉쇄에 나서자 결국 항복하였다. 본섬의 거점들 역시 9월 24일 마당을 끝으로 호주군이 무혈 접수하였고, 내륙에서 항전하던 수십여의 독일군도 11월까지 일소되었다. 일련의 뉴기니 전역에서 호주군은 39명, 독일군은 85명이 전사하였다.
3.2. 호주령 파푸아 & 뉴기니
1906년 당시 호주령 뉴기니이던 남부는 파푸아 준주가 되었다. 1914년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한 호주는 국제연합의 승인에 따라 뉴기니 영토를 위임통치하였다. 뉴기니 영토의 치소는 독일 시기와 마찬가지로 라바울이었는데 1937년 라바울 화산의 분화로 40여년만에 본섬의 핀츠하펜 부근의 라에로 이전되었다. 한편 1908년 파푸아 지사로 부임한 허버트 머레이는 사망하는 1940년까지 부임하며 거의 부왕 행세를 하였다.3.2.1. 2차 대전기
전리품으로 얻은 욱일기를 들고 기념 촬영하는 호주군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942년 초엽 뉴기니에 접근한 일본군은 우선 뉴브리튼을 점령, 라바울을 거점으로 삼고 부건빌 등을 점령하였다. 호주 당국은 북부의 뉴기니 영토를 포기하고 남부의 파푸아 준주의 방어에 전념하였다. 파푸아 준주의 포트모르즈비가 점령된다면 일본군의 호주 본토 공격에 활용될 여지가 컸다. 따라서 필리핀에서 차출된 맥아더가 포트모르즈비에 배치되었고, 일본 해군의 포트모르즈비 점령 시도는 산호해 해전으로 좌절되었다. 이는 초기 태평양 전쟁에 있어 연합군의 몇 안되는 승전이었다. 1942년 말엽 일본군은 뉴기니를 가로지르는 오웬 스탠리 산맥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육로를 통해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려 했으나, 코코다 트랙 전투에서 격퇴되었다.
그후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1943년 1월 부나-고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푸아 준주를 평정하였고, 이듬달 일본군은 뉴기니 영토 내의 호주군 전초기지 와우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그해 3월 일본군은 라에를 라바울, 부건빌과 같은 대규모 기지로 삼기 위해 7천의 증원 병력을 파견했으나 비스마르크 해 해전에서 연합군에게 패하여 1천 정도만이 당도하였다. 결국 그해 9월, 연합군은 3만을 동원하여 공세를 펼친 끝에 라에의 1만 일본군을 섬멸하고 뉴기니 동해안을 평정하였다. 1944년 봄, 마당을 점령하며 본섬에서의 일본군이 일소되자 연합군은 라바울과 부건빌 평정에 나섰다. 하지만 해군의 섬멸에도 이미 2년간 경작지 확보와 요새화에 매진한 일본군은 엄청난 지하 방어 시설과 막대한 물자를 비축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