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FFF,#1F2023> | 오뚜기 회장 | }}} |
{{{#!wiki style="color:#FFFFFF; margin: -0px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초대 함태호 (1971~2010) | 제2대 함영준 (2010~ ) |
<colbgcolor=#dc2c34><colcolor=#ffffff> 오뚜기 초대 회장 함태호 咸泰浩|Ham Tae-ho | |
출생 | 1930년[1] 6월 15일 |
함경남도 원산시[2] | |
사망 | 2016년 9월 12일 (향년 86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강릉 함씨[3] |
호 | 풍림(豊林) |
직업 | 기업인 |
병역 | 대한민국 육군 소령 전역 |
학력 | 경기고등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경제학 / 학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4]) |
부모 | 아버지 함형준, 어머니 이덕발 |
형제자매 | 큰 남동생 함승호(1934 ~ 2017) 작은 남동생 함창호(1938년생) 여동생 4명[5] |
배우자 | 박보옥(1935 ~ 2008) |
자녀 | 장녀 함영림 장남 함영준 차녀 함영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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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람을 비정규직으로는 쓰지 마라"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오뚜기의 창립자이다.2. 일생
1930년에 함경남도 원산에서 부유한 집안의 함형준[6]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에도 명문이던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 18세의 나이로 군에 자원입대해, 전쟁 최전선에서 7년간 군생활을 하며 소대장을 역임하는 등 군생활을 하였지만 여동생들은 모두 북한에 있게 되어 이산가족이 된다. 후에 1956년 소령으로 군생활을 마치며 전역 후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교 졸업 후 아버지와 함께 조흥화학공업에서 일하다가 40세가 되던 1969년 풍림상사 창업과 함께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카레를 선보였고, 창업 2년만인 1971년에는 토마토 케첩을, 이듬해에는 마요네즈를 대한민국에 처음 소개했다.대한민국 토종 기업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다국적 기업과 맞서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 미국의 CPC인터내셔널[7]과 세계 최대 케첩 회사인 미국의 하인즈가 1980년과 1987년에 '한국크노르'와 '서울하인즈'로 각각 국내에 진출, 10년 넘게 오뚜기와 전쟁을 치렀지만 모두 고배를 마시고 발길을 돌렸다. 당시 함태호 회장은 "우리 시장을 지켜 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싸웠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11년 국민 식생활 개선을 통해 국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2016년 9월 12일 오후 2시 37분,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장에는 그의 도움을 받은 심장병 어린이들이 문상을 왔다.
3. 경영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대한민국 최초로 2단계 고산도 식초 발효 공법에 의한 2배 식초, 3배 식초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오뚜기는 뛰어난 발효 기술력을 입증받았고 사과식초, 포도식초, 현미식초 등 식초의 다양화를 이뤄내기도 했다.연구개발뿐만 아니라 품질 관리에도 정성을 쏟았다. 함태호 회장은 ISO 인증 취득이나 HACCP 인증 획득보다 더 중요한 것은 'ISO와 HACCP 체제로 품질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항상 주장했다. 맛과 품질만큼은 철저히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살아생전 그는 매주 금요 시식에 직접 참가하여 시식 평가를 하고, 의견을 교환할 정도다. 이는 오뚜기가 국내 식품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1등 제품을 보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고객을 위한 맞춤형 상품 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게 바로 오뚜기 3분요리 시리즈다. 카레와 짜장을 필두로 각종 요리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 먹을 수 있도록 해서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배려가 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단돈 1000원으로 짜장 또는 카레를 먹을 수 있는 건 3분요리밖에 없다.
함태호 회장은 루트세일(Route Sale)과 같은 새로운 영업방식과 마케팅을 도입하는 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루트세일은 영업사원이 거래처를 직접 방문, 제품에 대한 소개와 진열을 통해 점주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영업방법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었고, 소비자들이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여건도 제공했다. 혁신적 마케팅 기법인 시식판매 및 판매여사원 제도 역시 함태호 회장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그는 움직이는 차량광고, 제품박스를 통한 광고 등을 도입하기도 했다.
2010년 아들 함영준 오뚜기 회장에게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4. 밝혀진 선행
"저는 경훈 군이 더욱 건강해지고 잘 하는 수영도, 공부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서 멋진 청년으로 자란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8]
심장병 어린이를 후원하던 중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 중
함태호 회장은 기업이 일정 궤도에 올라서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하였다. 장학사업과 학술연구 지원사업 시행을 위해 1996년에 오뚜기 재단을 설립하여 2016년까지 687명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식품산업의 실질적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대상으로 오뚜기 학술상도 매년 시상하고 있다.심장병 어린이를 후원하던 중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 중
기부도 엄청나게 했는데, 1992년 7월부터 한국심장재단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후원하였으며, 11개 관계사도 동참하여 매월 23명의 심장병 어린이들의 수술비를 지원하고 있다. 2016년 7월 기준 4,242명의 어린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공했다.
함태호 명예회장은 식품산업을 선도하는 선구자로서 2005년 해외 신시장 개척 공로를 인정받아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오뚜기학술상을 제정하여 연 2회 한국 식품과학회와 한국식품 영양과학회를 통해 식품산업발전과 인류 식생활 향상에 기여한 공로가 큰 식품관련 교수와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오뚜기학술상을 시상했다.
2015년 11월 당시 주가 933억 원 상당의 개인 주식 13,500주를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에 기부했다.
역도선수 장미란을 후원하면서 후원 사실이 밝혀지길 극구 사양했다. # 장미란은 후원자를 떠나 할아버지 같은 분이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7년 4월 9일 방송에서 함태호 명예회장의 선행을 소재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5.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기업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6. 관련 문서
[1] 족보상 1931년.[2] 조상 대대로 살았던 곳은 함경남도 영흥군이다.[3] 동원군파(東原君派) 51세손 ○호(○浩) 항렬.(족보)[4] 석사 학위 논문: 新製品 開發에 關한 硏究 (1967)[5] 여동생들은 모두 북한에 있다.[6] 원래 이북에서 건어물 유통을 하다가 분단이 되자 월남하여 거래하면서 만난 상인들과 사업을 차렸다.[7] '베스트푸드' 브랜드로 리본표 마요네즈를 생산했다.[8] 이 편지도 다정다감하고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보여주기식 선행과 다르게 모든 아이의 특기와 취미를 알고 그들에 맞춘 1:1 답장을 하였다고 한다. 거기에 연배가 많은 이가 흔히 하는 낮춤말도 쓰지 않았다. 하긴 대기업 회장이 낮춤말을 쓰는 것은 아무리 손아랫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비상식적으로 보이는건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