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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7:08:51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藤原泰衡
1155년(1165년)[1]~1189년 10월 14일

1. 개요2. 생애
2.1. 요시츠네 처형2.2. 오슈 후지와라 멸망과 사망
3. 평가
3.1. 통설3.2. 수정주의
4. 대중매체에서
4.1. 징기스칸 44.2. 머나먼 시공 속에서 3의 등장인물
4.2.1. 상세

1. 개요

후지와라 16세손으로 오슈 후지와라 4대 당주. 통칭 '코지로'. 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차남. 차남이지만 형 쿠니히라(國衡)가 서자였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대에 헤이케를 무너뜨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오슈 후지와라가 멸망함으로써 마지막 당주가 되었다.

2. 생애

1187년에 아버지이자 3대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가 사망하면서 당주가 된다.

2.1. 요시츠네 처형

야스히라의 아버지 히데히라는 당시 요리토모의 숙청에서 도망쳐나온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요시츠네를 받아주는 것은 요리토모에 대한 도발이었지만, 히데히라는 헤이케를 멸망시킨 요리토모가 틀림없이 오슈를 노릴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고, 앞서 헤이케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탁월한 용병술을 선보인 요시츠네를 요리토모와의 대결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2] 요리토모와의 관계 악화도 무릅쓰고 받아주었다. 히데히라는 죽기 직전까지 아들들에게 "요시츠네를 절대 요리토모에게 내주지 마라. 그를 장군으로 추대하고, 형제가 단결해 요리토모와 맞서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사실 이 무렵 야스히라는 자신의 이복형 쿠니히라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았을 뿐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무로마치 시대의 존비분맥에 보면 분지 4년(1188년) 12월에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어머니 즉 야스히라의 할머니가 야스히라에 의해 '주(誅)' 즉 살해되었고, 분지 5년(1189년) 2월 15일에는 막내동생 요리히라(頼衡)도 야스히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히데히라 사후에 오슈 후지와라 씨 내부에서 심각하게 친족간 상쟁이 벌어지고 있었음이 암시된다.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에 따르면 히데히라는 죽기 전에 자신의 부인 즉 야스히라의 생모를 쿠니히라에게 아내로 맞게 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서 히데히라 사후 야스히라는 졸지에 이복형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다. 쿠니히라와 야스히라를 의제상 부자관계로 삼아서 이렇게라도 형제가 화합하고 다툼이 없기를 바랬던 것으로 해석된다.

야스히라가 당주가 되자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넘기라는 협박을 한다. 요시츠네와 자신의 형제인[3] 처음에는 야스히라도 나름대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고 "요시츠네는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 버려서 나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모토나리와 함께 변명서를 보냈지만, 요리토모는 믿지 않았다.

쿠니히라 · 타다히라에 비해 심약한 겁쟁이였다고 전하는 야스히라는 결국 분지 5년 윤4월 30일,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요리토모의 압력에 굴복하여 요시츠네의 저택에 500여 명의 군사를 보내 요시츠네를 습격, 자살로 몰아갔다. 그리고 요시츠네의 목을 술에 담가서 요리토모가 있는 가마쿠라로 보냈다.[4] 그러나 요리토모는 "넘기라고 했지 죽이라고 한 적은 없다. 내 가신을 함부로 죽이다니 전쟁이다!"[5] 라는 태도를 보이고 오슈 후지와라 토벌령을 내렸다. 이에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보호하고 결사 항전할 것을 주장해온 타다히라와 요리히라에 반란 혐의를 뒤집어씌워 살해했다.

2.2. 오슈 후지와라 멸망과 사망

그럼에도 요리토모는 토벌에 나섰다.[6] 요리토모의 대군이 온다는 소식에 쿠니히라를 보내 2만 남짓의 군사로 아쓰카시 산에 3중 방루를 치고 맞서 싸우게 했지만 패했고 쿠니히라도 전사했다. 패전 소식에 놀라 넋을 잃고 어쩔 줄 모르다가 히라이즈미가 함락되기도 전에 히라이즈미에 불을 지르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덕분에 요리토모군이 히라이즈미에 들어왔을 때는 별로 남은 것이 없었다.

이에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걸작. "요시츠네는 아버지가 보호하신 거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거든요? 대대로 살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신세라 제 꼴이 말이 아닌데 늦게라도 요시츠네를 잡아 보낸 공을 생각하셔서 고케닌으로 받아주시든지, 그것도 안 되면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세요." 당연하게도 요리토모는 야스히라의 목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북쪽으로 달아난 야스히라는 히나이 군의 니에 요새에서 가신 가와타 모리츠구(河田守繼, ? ~ 1189)의 배반으로 피살되었다. 요리토모는 야스히라의 목을 자신에게 가져온 가와타에 대해서도 "자기 주인을 배신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며 처형했다.

이와테 현의 주손지 곤지키도(金色堂)에[7] 그의 목이 안치되어 있다. 기존에는 동생 타다히라의 목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50년 조사를 통해 야스히라의 목으로 밝혀졌다. 목에는 양미간과 후두부 쪽에 지름 약 1.5cm 되는 작은 구멍이 18cm의 길이로 두개골을 관통한 상처 자국이 확인되었는데, 《아즈마카가미》에서 야스히라의 수급에 길이 여덟 치 되는 대못을 박아서 효수했다[8]고 기록한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추정 나이는 20~30세로서 이를 통해 1165년생 설이 유력해졌다. 당시 백여 개의 연꽃 씨앗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연못에 심자 8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개화하였다.

3. 평가

3.1. 통설

한때의 목숨을 아껴서 숨는 것은 쥐새끼 같았고, 달아나는 것은 사자 닮은 개새끼 같았다.
아즈마카가미

일본사에 있어 그의 위상은 딱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팬들의 공적. 요리토모에게 쫓긴 요시츠네는 연고가 있는 히라이즈미(平泉)에 몸을 의지했는데, 히데히라 사후 당주를 계승한 야스히라가 요리토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코로모 강에서 요시츠네를 기습해 목을 쳤다. 요리토모의 침공으로부터 히라이즈미를 지키기 위해 반대하는 동생을 죽이면서까지 둔 무리수였지만 결국 가마쿠라의 대군 앞에 히라이즈미는 무너지고 본인은 가신에 배신당해 죽었다.

또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가문을 분열시켜 끝내 말아먹은 호부견자라는 혹평도 강하다. 일본의 대중매체, 그 중에서도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대체로 영명하고 냉철한 명군인 아버지와 대조되는 무능하고 못난 암군이라는 인식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1993년작 불타오르다에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된 모습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2005년작 요시츠네에서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요시츠네를 습격해 죽이는 못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다케다 신겐 - 다케다 카츠요리 부자 또는 사이토 도산 - 사이토 요시타츠 부자, 쵸소카베 모토치카 - 쵸소카베 모리치카 부자를 대하는 인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3.2. 수정주의

야스히라의 졸렬한 행적은 가마쿠라 막부가 남긴 역사서《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야스히라 본인이 요리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리토모 공의 답을 히나이 군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배신당해 죽은 니에 요새가 있는 곳도 히나이 군이었다. 히라이즈미가 거느린 17만 기의 군사는 대부분 반농반사(半農半事)의 형태로서 수확기라서 농촌으로 돌아가 있던 상태에서 공격을 당해 제대로 군사를 모을 준비가 되지 못했으며, 요시츠네를 죽인 척 하고 실제로는 숨어서 요시츠네와 함께 가마쿠라군에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무턱대고 용렬한 지도자로만 몰기는 곤란한 부분도 있다.[9]

또한 야스히라가 죽은 뒤에 히라이즈미 잔당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야스히라를 섬기던 유리 하치로(由利八郞, ? ~ 1190)라는 무사가 포로로 잡혔는데, 요리토모가 "야스히라는 오슈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어서 만만한 상대가 아닐 줄 알았는데, 변변한 노토(가신단. 朗黨)가 없어서 가와타 지로 한 사람에게 죽었다. 두 구니(國)를 다스리며 17만 기(騎)를 거느리고도 20일 만에 일족이 모두 망해버렸으니, 어떤 인간이었는지 말할 것도 없다."며 비웃자 유리 하치로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사마노카미(左馬頭)[10]께서는 가이도(海道)의 15개 구니를 거느리셨지만 헤이지(平治)의 난에서 겨우 하루 만에 몰락했고, 수십만 기의 우두머리셨지만 오사다 타다무네(長田忠致, ? ~ 1190) 한 사람에게 죽었습니다.[11] 그때와 지금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야스히라는 두 주(州)의 용사들만 거느렸어도 (수십 개 구니를 동원했던) 요리토모 공을 며칠은 괴롭혔으니, 이 정도면 마냥 무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문이 막힌 요리토모는 그를 가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 1164 ~ 1205)에게 보내 죄를 사면하게 했다.[12]

4. 대중매체에서

4.1. 징기스칸 4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군주로 나오지만, 상당한 고난이도. 일단 본인의 능력치는 정치 43, 전투 42, 지모 37, 특기 건설, 병과 적성 보병 C, 궁병 C, 기병 C, 수군 E로 능력치가 많이 낮다.[1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가까이 있다! 물론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무사시보 벤케이가 있어서 생각보다 쉬워보이지만, 고증을 반영(?)하여 요시츠네와 벤케이의 충성도가 매우 낮다. 특히 요시츠네가 배신을 한다면 더욱 문제인데, 요리토모와 형제관계에 있어서 요시츠네는 요리토모에게 붙잡힌다면, 바로 투항하고, 벤케이는 요시츠네에게 배반 권유을 받으면, 바로 요시츠네에게 등용당한다. 가능한다면 연회를 열어서 요시츠네의 충성도을 올리자. 위치도 별로 좋은편이 아니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고려, 남송, (플레이어)한테는 그저 요시츠네, 벤케이 셔틀. 단, 플레이어라면 요시츠네와 벤케이의 압도적 능력치를 이용해, 시작하자마자 연회로 둘의 충성도를 올린 뒤 바로 가마쿠라에 침공해서 1~2군단이 출격할 뿐인 적을 격퇴하고 마구 약탈을 해대는 방법으로 가마쿠라의 씨를 말리고 시작하는 방법이 있어서 생각보다 막장 플레이는 아니다. 시작위치가 히말라야 산속인 토번같은 나라에 비하면야...

얼굴 일러스트는 전작 원조비사의 호조 요시토키[14] 얼굴을 리터칭했다. 다만 원조비사 요시토키 얼굴은 노회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드러나는데 리터칭된 얼굴은 그냥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으로 바뀌었다.

4.2. 머나먼 시공 속에서 3의 등장인물

머나먼 시공 속에서 시리즈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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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나모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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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토아키후미후지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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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이미나모토노
모토미
아베노
야스츠구
3아리카와
마사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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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노에무사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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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原 泰衡(ふじわら の やすひら)

머나먼 시공 속에서 3의 등장인물. 담당 성우는 토리우미 코우스케.

4.2.1. 상세

22세. 신장 180cm, 혈액형은 B형. 속성은 수. 상징물은 사가리후지[15]. 이미지 컬러는 금/흑.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만 이자요이키에서 히라이즈미가 추가되면서 추가되었다.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아들로, 미나모토노 쿠로 요시츠네의 친우. 시로가네의 주인으로, 기억을 잃은 그를 주워 '시로가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또한 옛날 쿠로가 주워온 개를 쿠가네라는 이름을 붙이고 키우고 있다.[16]

냉정하고 이성적인 청년. 눈매도 날카롭고 항상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며, 무녀(카스가 노조미)에게는 일단 정중하게 대하고는 있지만 딱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 알게 되는 그의 실상은 츤데레. 그가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히라이즈미 루트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음양술에 조예가 깊다. 입고 있는 의상은 시로가네와 색깔만 다르고 똑같은 디자인인데, 커플룩(...)이 아니라 히라이즈미 군의 유니폼이라고 한다.

공략 불가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루트가 없는거지 관련 엔딩처럼 보이는 엔딩은 존재. 시로가네 루트에서 시로가네를 차버리고(...) 야스히라를 선택하면 된다.

비중도 적고 악역이지만 얼굴, 그리고 히라이즈미 귀환 엔딩 덕분에 인기가 좋다. 항상 신작이 나오면 야스히라 공략이 탄원된다. 니코니코 동화에서 올라온 '야스히라를 공략할 수 없어'('에어맨을 쓰러뜨릴 수 없어'를 패러디)라는 동영상에 '야스히라를 공략하기 위해 코에이 주식을 사고 있다'는 발언이 나오자 동참하겠다는 코멘트 내지는 이미 동참했다는 코멘트가 속출해 '코에이 주주총회'라는 태그가 붙었을 정도. 그 인기에 편승해 캐릭터송도 4개 나왔으며, CD도 하나 냈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CG가 한 장씩 추가되고 있다. 운명의 미궁 애장판 트레져 박스 특전에서는 은근슬적 공략 캐릭터들 속에 끼어있을 정도. 프로모션 무비가 니코에 올라오자 야스히라 때문에 트레져 박스를 지른다는 코멘트가 속출했다.

그러다 2017년 비타판 이식 및 풀보이스 리메이크 판으로 발매된 머나먼 시공 속에서3 Ultimate에서 드디어 그의 연애 엔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게임 속에서 추가로 넣어 준 것은 아니고 유료 판매 DLC 루트로서 넣어 주었으며, 2,500엔이라는 흉악한 가격을 자랑한다.[17]

아리카와 마사오미 루트가 중심인 OVA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TVA에서는 등장 예정.

여담이지만 같은 회사에서 나온 진삼국무쌍 시리즈조비와 성격이나 외모가 꽤나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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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무녀의 역린을 빼앗고 시로가네를 베어버리는 등 악역을 도맡지만 원한 것은 히라이즈미의 안녕.

히라이즈미 귀환 엔딩에서는 무녀가 돌아간다며 배웅하러 오라는 쿠로의 말에 츤츤 거리다가 무녀를 배웅하러 가는 길에 아버지의 가신들에게 살해당한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눈물을 뺀 명장면으로, 캐릭터 송 중 하나인 '하얀 죽음의 잔상'은 이 엔딩을 소재로 한 노래.

원래는 CG 없이 타치에로 이루어진 엔딩이었지만 운명의 미궁에서 '시간의 결정'이라 하여 본편 및 이자요이키의 이벤트를 회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여기서 CG가 추가된다. 본편 및 이자요이키 이벤트에서의 CG 추가는 이게 유일.

Ultimate 유료 DLC로 추가된 연애 루트는 이 히라이즈미 루트를 기반으로 진행하며, 이 루트의 경우 모든 것을 알게 된 노조미가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 만악의 근원인 다키니텐이 아직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쓰러뜨려야 엔딩을 볼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시공을 거슬러 올라야 하므로 다키니텐과 노조미가 1:1로 대결해 승리해야 한다는 실로 괴악한 조건이 붙게 된다. 이후 다키니텐이 사라지고 별개의 역사가 열리는 세계에서 두 사람이 살아가는 것으로 엔딩

[1] 당시의 사서인 아즈마카가미의 판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2] 또한 요시츠네도 엄연히 요리토모와 마찬가지로 가와치 겐지의 도료 요시토모의 아들이었으므로 그를 내세우면 요리토모와 싸울 명분을 삼기도 충분했다.[3] 쿠니히라는 야스히라의 형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가문 내 서열을 결정하던 당시 풍습에서 천첩의 아들이라 적장자가 될 수 없었다.[4] 이때 히라이즈미에서 가마쿠라까지는 2주일 정도면 가는 거리인데 가마쿠라에 요시츠네의 수급이 도착한 것이 요시츠네가 자결한 날로부터 두 달 뒤인 6월 13일의 일이라서 후대에 소소하게 떡밥이 된다. 실제로는 요시츠네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가 도망칠 시간을 번 것 아니냐는 것이다.[5] 비록 숙청 대상으로 지정하여 쫓아냈지만 요시츠네는 엄연히 요리토모의 형제이자 휘하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정 역시 요리토모가 한 수 앞을 바라보고 오슈 후지와라와 요시츠네를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함정 형식으로 야스히라에게 요시츠네를 넘기라는 서신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요리토모가 얼마나 정치 9단인지 알수 있는 부분.[6]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리토모는 조정에 야스히라를 추토하라는 선지를 내려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조정에서는 답이 없었는데, 고민하는 요리토모에게 고케닌 오오바 가게요시가 “전쟁터에서는 장군의 명령이 우선이고 천자의 조칙은 그다음이다”라는 논리를 제시하여 토벌군을 일으킬 명분으로 내세워 출정했다고 한다. 사실 정이대장군(쇼군)이 천황을 비롯한 중앙조정의 직접 명령을 받는 임시직이었던 시절에도 에미시 및 동부 오랑캐들을 토벌하는데 천황과 귀족들은 쇼군에게 엄청난 권한과 재량권을 부여하였다. 즉 이 논리대로 요리토모의 재량대로 선조치 조정에 후보고 하겠다는 논리였다.[7] 오슈 후지와라 역대 당주들의 시신이 미라 처리되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8] 예전 요리토모의 현조부인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무츠의 아베노 사다토-무네토 형제와의 전투인 전9년의 역에서 승리한 뒤, 적장이었던 아베노 사다토의 수급을 이렇게 효수했었다. 또한 이 전9년의 역에서 야스히라의 고조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츠네키요도 아베노 사다토에 가담했다가(사다토는 츠네키요의 처남이었다) 요리요시에 의해 참수되었었다. 2백여 년만에 후손이 조상들이 당했던 것과 같은 꼴을 당한 셈이다.[9] 그러나 당시 시점에서 요시츠네를 죽이면 요리토모는 명분이 없어서 오슈를 치는 것을 중단하거나 반대로 요시츠네라는 방패가 사라진 오슈 후지와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공격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 뻔한 만큼 굳이 죽인 척을 할 이유가 없었다.[10] 종5상 궁중의 말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요리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가리킨다.[11] 오사다 타다무네는 요시토모의 가신이었는데, 요시토모는 헤이지의 난에 가담했다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전술에 걸려 하루 만에 교토를 나와 동쪽으로 도망치듯 떠나 오와리(현 나고야 인근)에 있는 가신 오사다 타다무네의 집에서 묵다가 타다무네의 배신을 당해 살해됐다. 목욕 중에 갑옷도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당한 기습이라 손쓸 겨를도 없어, "나한테 목검 한 자루만 있었어도..."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요시토모의 무덤 위에는 많은 수의 목검들이(...) 쌓여 있다. 타다무네는 요시토모의 목을 베어 바친 공으로 키요모리에게 포상을 받았지만 포상이 적어 불만을 품다가 키요모리 눈 밖에 나서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다시 겐지 쪽에 붙었다. 요리토모는 관대한 척 그를 받아주었지만 헤이케를 토벌하고 난 1190년에 처형해버렸다.[12] 유리하치로도 오카와 카네토오(大河兼任, ? ~ 1190)가 일으킨 반란에 참가하지만 결국엔 죽고만다.[13] 고려 명종과 비등하다. 하지만 콘솔판에서는 능력치가 보통은 되는 수준으로 상향되었다.[14]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처남. 아버지 도키마사, 누나이자 요리토모의 부인인 마사코와 함께 요리토모 정권 성립에 기여했으며, 요리토모 사후에는 집권으로써 실권을 잡고 고토바 덴노가 일으킨 조큐의 난을 진압해 호조 가문의 실질적인 막부 지배권을 확립한 인물이다.[15] 오슈 후지와라 가의 문장이다[16] 시로가네는 은, 쿠가네는 금이라는 뜻[17] 단, 해당 게임의 트레져 박스 및 플래티넘 박스의 선예매자들에게는 이 루트를 무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코드를 동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