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cc800><tablebgcolor=#fcc800>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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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 1959 · 1964 · 1999 · 2003 · 2011 · 2014 · 2015 · 2017 · 2018 · 2019 · 2020 | |
리그 우승 (22회) | 1946 · 1948 · 1951 · 1952 · 1953 · 1955 · 1959 · 1961 · 1964 · 1965 · 1966 · 1973 · 1999 · 2000 · 2003 2010 · 2011 · 2014 · 2015 · 2017 · 2020 · 2024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1회) | 1973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7 · 2009 · 2010 · 2011 · 2012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2 · 2023 · 2024 | |
시즌별 요약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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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 1군 미즈호 PayPay 돔 후쿠오카 · 2군 HAWKS 베이스볼 파크 지쿠고 · 과거 오사카 구장 · 헤이와다이 야구장 | |
지방 홈구장 키타큐슈 시민구장 · 리브와쿠 후지사키다이구장 · 헤이와리스 구장 ·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 | ||
홈 중계 채널 | 스포츠 라이브+ | |
주요 인물 | 구단주 손 마사요시 · 단장 미카사 스기히코 · 감독 고쿠보 히로키 · 선수회장 슈토 우쿄 · 주장 쿠리하라 료야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산하 e스포츠 구단 · 10.2 결전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1. 개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역대 선수들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준영구결번
- 15. 후지이 마사오
1999 시즌 '불꽃의 계투'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오래간만에 호크스가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는데 공헌한 투수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0년 10월에 요절하게 되는데, 이후 그가 사용하던 15번을 단 선수가 없어 사실상 결번처리를 했다. - 89. 오 사다하루
호크스를 강팀으로 도약시킨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감독 시절의 번호가 결번 처리되었다.
이하는 한때 준영구결번이었거나, 결번 언급이 있었던 번호들.
- 1. 아키야마 코지
역대급 선수이다보니 호크스 구단에서 당연히 아키야마의 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고사하고 아키야마가 은퇴한 그 다음 시즌인 2004 시즌에 시바하라 히로시(柴原洋)가 아키야마에게 허락을 받아 1번을 쓰고 시바하라가 은퇴한 후에는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그 번호를 물려받았다. - 9. 고쿠보 히로키
1990년대 말~2010년대에 호크스의 전성기를 이끈 3루수. 2013년부터는 일본야구 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상 트레이드로 잠시 호크스를 떠났던 2004~2006 시즌에 결번으로 처리했는데 후에 고쿠보가 호크스로 복귀하면 다시 이 번호를 쓰기로 약속했다. 결국 2012 시즌이 끝나고 고쿠보가 은퇴하면서 2013년부터 9번을 영구결번 한다고 한다.하지만 일단 공식 발표가 있어야 한다.그런데 2015 시즌부터 야나기타 유키가 이 번호를 물려받는다고 한다. 9번도 1번과 같이 팀 내 주축 선수에게 물려주는 영광의 번호로 취급할 모양. - 90. 카게우라 야스타케
실존 선수가 아니라 만화 캐릭터에게 영구결번을 준 특이한 케이스. 미즈시마 신지(水島新司)의 야구만화 '아부상(あぶさん)'의 주인공으로, 이 만화가 연재된 1973년부터 2016년까지 영구결번으로 지정돼 있었다. 만화 연재가 끝나고, 작가의 허락하에 로베르토 수아레스가 번호를 사용하며 결번이 해제되었다. 수아레스가 이적한 후는 코치로 부임한 고쿠보 히로키가 번호를 달았다.
3. 출신 선수들[1]
3.1. 투수
- 벳쇼 아키라 (1942 - 1943[2], 1946 - 1948)
난카이 초창기를 대표하는 투수로, 1년차인 1942년을 빼면 매 시즌 300이닝 이상을 소화하고 1947년 시즌에는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기록인 47완투(55경기 50선발, 448.1이닝)을 소화하며 30승을 기록한 팀의 대들보격 투수였다. 하지만 벳쇼 빼내기 사건으로 알려진 이적 소동을 일으키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고 이를 둘러싼 분쟁은 일본프로야구가 현재의 양대리그 체제로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요미우리에 이적한 뒤로는 벳쇼 다케히코로 개명하고 요미우리에서도 대투수로 활약한다. - 미나가와 무츠오 (1954 - 1971)
통산 221승을 거두며 호크스 프랜차이즈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 언더핸드 투수. 임팩트는 후배 스기우라 타다시에 밀리기도 했지만, 스기우라보다 훨씬 꾸준하고 긴 선수생명을 보여주며 장기간 난카이의 선발진을 떠받쳤다. 1968년에는 언더핸드 투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통산 200승을 기록했으며 이는 야마다 히사시 등장 이전까지 언더핸드 투수 사상 최다승 기록이었다. 같은 해 기록한 31승은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후의 단일시즌 30승 기록이기도 하다. 2005년에 69세의 나이로 패혈증으로 별세했다. 별세 이후 같은해에 요네자와시 시민영예상, 수상했으며, 이듬해에는 야마가타현 시민영예상을 수상했고 2011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 김영덕 (1956 - 1963)
통산 7승 9패 방어율 3.57을 기록했다. 은퇴 후 스카우터로 일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실업야구에서 활약하고 지도자 생활도 이어갔다. - 미우라 키요히로 (1957 - 1972)
상술할 미나가와, 하술할 스기우라와 함께 60년대 퍼시픽 리그의 절대강자 시절 선발진을 떠받들었던 오른손 투수. 선수생활 말년(1973~1975)에는 라이온즈로 이적해 선수생활을 했다. 은퇴 후 1977년에 라이온즈에서 2군 코치, 1978년에는 스카우터를 지낸 걸 끝으로 개인사업을 했다. 2016년에 폐렴으로 인해 77세의 나이로 별세. - 모리나카 치카라 (1958 - 1966)
항목의 인물들인 미나가와, 미우라, 스기우라와 함께 60년대 난카이의 황금 선발진을 구축했던 오른손 투수. 2008년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사족으로 한 평생 독신이었다. - 스기우라 타다시 (1958 - 1970)
이나오 카즈히사와 더불어 단 둘만이 갖고 있는 일본시리즈 내리 4승을 혼자서 독식한 투수이자 1959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잠수함 투수 중 하나로 꼽힌다 - 조 스탠카 (1960 - 1965)
진 바키, 궈타이위엔, 궈위안즈와 함께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중 단 4명뿐인 100승 투수 중 하나. - 에모토 타케노리 (1972 - 1975)
난카이에서 유명해졌지만[3] 밑에 나오는 에나츠 유타카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 선수생활은 한신 시절이 훨씬 길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한신 OB로 간주되고 있다. 1973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4]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플레이오프[5] 5차전(10월 24일)에서 9회초 2점으로 앞서갔다가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대타 도긴 히데타카의 홈런으로 한큐에서 1점을 내준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출진해 한큐에서 승부수로 내보낸 대타 타카이 야스히로를[6] 헛스윙 삼진으로 아웃시켜 난카이 호크스의 마지막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7] - 장명부 (1973 - 1976)
아래의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난카이의 3루수이던 토미타 마사루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노무라 카츠야 감독 하에서 선발 요원으로 성장했지만 1976년 시즌 종료 후 아래의 김기태(재일교포)와 맞트레이드되어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한다. - 야마우치 신이치 (1973 - 1983)
밑에 있는 야마우치 카즈히로, 야마우치 다카노리와 더불어 동일한 시기에 난카이에서 뛰었는데, 심지어 등번호도 위에서부터 18-19-20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이 셋 모두 당시 난카이의 주축 선발로 뛰었다. - 에나츠 유타카 (1976 - 1977)
난카이에서 노무라 카츠야의 권유로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여 통산 201승 193세이브를 올린다. 소속한 팀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우승청부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 김기태(재일교포) (1977 - 1984)
일본명 가네시로 모토야스. 장명부와의 맞트레이드로 난카이에 이적했다. 에나츠와 비슷한 테크로 선발투수에서 구원투수로 전향했다. - 야마우치 카즈히로[8] (1981 - 1990)
- 야마우치 타카노리 (1981 - 1992)
- 김신부 (1982 - 1985)
1981년 드래프트 1위로 지명된 기대주였으나 1군 승격 없이 3년만에 방출된 재일교포 투수. 이후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LG 트윈스에서 뛰었다. - 요시다 토요히코 (1988 - 1998)
난카이 시절을 겪은 투수 중 가장 늦게 은퇴한 선수. 입단 후 몇 년간은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나 기량 저하로 중간계투로 전향한 뒤에는 한신-긴테쓰-라쿠텐을 거치며 저니맨 좌완 중간계투로 가늘고 긴 커리어를 보냈다. 라쿠텐 시절이던 2007년 6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입단 동기인 오미치 노리요시와 난카이 출신자로서는 마지막 대결을 펼쳤다. - 리치 고시지 (1990)
- 와카타베 켄이치 (1992 - 2002)
아이돌 그룹 HKT48 멤버 와카타베 하루카의 아버지. 2002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으나, 부상과 노쇠화로 1승밖에 못한 채 2005년에 은퇴했다. - 요시다 슈지 (1994 - 2006)
- 쿠도 키미야스 (1995 - 1999)
- 후지이 마사오 (1995 - 2000)
- 호세 누네스 (1996 - 1997)
- 사이토 가즈미 (1996 - 2010)
한때 호크스의 에이스였으나 2006년 플레이오프 패전투수가 되고[9] 그 패전의 충격이 컸는지 고질적으로 괴롭혀오던 부상에 악화되고 재활만 하다가 결국 은퇴. - 시노하라 타카유키 (1997 - 2008)
후지이, 요시다 슈지, 페드라자와 함께 철벽 계투진을 이루며 1999년 호크스의 26년만의 우승에 공헌한 좌완 중간계투. 이 해 중간계투로만 60경기에 등판해 구원승으로만 14승을 거두는 활약을 했다.[10] 이후에는 이와 같은 수준의 활약을 보이지는 못해도 수 년간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중간계투진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 로드니 페드라자 (1999 - 2002)
- 맷 랜들 (1999 - 2000)
- 스기우치 토시야 (2002 - 2011)
2005년 퍼시픽리그 MVP를 수상했다. 참고로 저 MVP는 소프트뱅크 프렌차이즈 사상 최초의 MVP 수상자다. 에이스 역할을 꾸준히 하고 요미우리로 이적.그리고 먹튀가 되었다. - 데라하라 하야토 (2002 - 2006, 2013 - 2018)
- 아라카키 나기사 (2003 - 2014)
- 브랜든 나이트 (2003 - 2004)
한국에서 히어로즈 구단에서 에이스로 유명한 나이트 맞다. - 마하라 다카히로 (2004 - 2012)
2005년부터 7년동안 180세이브를 올린 프랜차이즈 스타 마무리 투수였지만, 부상으로 2012년 한해를 공치고 난 뒤 FA로 호크스에 복귀한 데라하라 하야토의 보상선수로 오릭스 버팔로즈가 지명하는 바람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릭스로 이적하게 되었다.[11] 결국 자신을 버린 소프트뱅크의 처사에 마음이 상했는지 2014년 시즌 후에 FA 자격을 취득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오릭스에 남았지만, 2015년 시즌 부상이 도져서 결국은 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 양야오쉰 (2006 - 2013)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조별예선 1라운드 한국전 선발로 나온 대만 국적의 왼손 투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양다이강의 형이다. 현재는 CPBL 라미고 몽키스 소속의 외야수. - 모리후쿠 마사히코 (2007 - 2016)
팀을 묵묵히 지탱했던 왼손 중간계투. 좌완이면서 사이드암 스로에 가까운 투구를 하며 주로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했다. 2011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대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2대1 리드 상황, 무사 만루)에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낸 '모리후쿠의 11구'가 유명하다. 2016년 시즌 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첩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중. - 오토나리 켄지 (2007 - 2017)
- 크리스 니코스키 (2007 - 2008)
- 릭 구톰슨 (2007 - 2008)
- 제이슨 스탠드리지 (2007 - 2008, 2014 - 2015)
- D.J. 홀튼 (2008 - 2011)
이 팀에 있었던 2011년 다승왕에 등극했던 적이 있다. 201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뒤 2년 뒤 KIA 타이거즈로 오면서 한-미-일 야구를 전부 다 경험하게 되었다. - 저스틴 저마노 (2009)
- 브라이언 팔켄보그 (2009 - 2013)
- 김무영 (2009 - 2015)
- 셋츠 타다시 (2009 - 2018)
입단 후 첫 2년간은 셋업맨으로서 두 시즌 모두 70경기 넘게 등판했고, 선발로 전향한 뒤에는 2011년~2015년 5년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달성한 우완투수. 당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싱커볼러이기도 하다. 2012년에는 다승왕 타이틀과 사와무라상을 차지했다. 다만 늦은 나이에 사회인야구를 통해 데뷔하고 선발로건 구원으로건 많은 이닝을 먹어준 워크호스라 점차 기량이 저하했고, 2016년부터는 보다 젊은 선발투수들에 밀려 스팟 선발 정도로 위상이 떨어졌다.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팀이 2018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다음날 방출되었고 끝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중. - 브래드 페니 (2012)
메이저리그 통산 119승의 이력을 가진 거물 우완 투수였지만 일본에선 단 한 경기, 64구만 던지고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등판을 거부. 끝내 방출되었다. 마쓰자카만 아니었어도 호크스 역대 최악의 투수 먹튀였을 선수. - 오카지마 히데키 (2012, 2014)
- 이가라시 료타 (2013 - 2018)
- 데니스 사파테 (2014 - 2021)
2017년 54세이브를 거두며 NPB 단일시즌 최다세이브 기록을 세운 외국인 클로저. 일본프로야구 외국인선수 역대 최다 세이브(234) 기록도 갖고 있을 정도로 꾸준했다. 다만 2017년 시즌+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20억엔 규모의 대형 계약을 맺은 뒤에는 어깨 부상으로 드러눕고 트윗질에 전념하는 먹튀의 말년을 보냈다. 마쓰자카 다이스케 (2015 - 2017)
호크스 역사상, 아니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먹튀. 정말로 유니폼 판 것 이외엔 3년간 한 것도 없으면서 12억엔을 먹었다.- 아리엘 미란다 (2018 - 2019)
2021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 그 투수 맞다. 일본 데뷔 첫해 좋은 성적을 남기며 우승에 일조했으나 2019년 불안한 제구력으로 애매한 성적을 남기고 중신 브라더스로 이적. 1년뛰고 두산 베어스로 왔다. - 맷 무어 (2020)
2020년 입단하여 정규 시즌 15경기 85이닝 6승 3패 평균자책점 2.65 탈삼진 98개 볼넷 26개의 성적을 기록했고 2020년 일본시리즈 3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7이닝 무실점 노히트의 빼어난 경기를 펼치며 팀의 11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일조를 하였고 2021년 1월 3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년 3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3.2. 포수
- 노무라 카츠야 (1954 - 1977)
현역 시절에는 난카이의 감독-4번 타자-포수로 팀을 이끌었지만 구단과의 불화로 선수생활 말년에는 이팀 저팀 떠돌아다녀야 했다. 선수로서나 감독으로서나 레전드. 일본프로야구 통산 안타, 홈런, 타점 2위.콩라인 - 카가와 노부유키 (1980 - 1989)
나미쇼 고등학교(현 오사카체대 부속 나미쇼교교, 과거의 학교명은 나니와상고였으며 장훈옹의 모교이기도 하다.) 시절 동료인 우시지마 가즈히코와[12] 함께 배터리를 이루어서 팀을 코시엔 준우승으로 이끈 스타 출신 선수. 고교시절부터 육중한 체형으로 유명했으며 비슷한 체형의 미즈시마 신지의 만화이자 그 만화 주인공인 야마다 타로의 별명을 딴 "도카벤"이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난카이 호크스 입단 후엔 자기관리를 못해 고도비만이 되면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 결국 1989년 후쿠오카로 이전한 첫 시즌 후에 전력외통보를 받으며 초라하게 은퇴했다. 그 후에도 고도비만을 주체하지 못한 끝에 결국 2014년 심근경색으로 사망. - 요시나가 코이치로 (1988 - 2000)
후쿠오카 돔 이전 초기 고쿠보도, 조지마도, 마쓰나카도 없던 시기를 대표했던 왼손 슬러거 포수. 일본에서는 독보적인 사이즈로 여겨지던 후쿠오카 돔에서도 장타를 양산하는 것으로 이름높았다. 1997년에는 3-4-5 비율스탯에 29홈런을 치기도 했는데, 홈런을 친 한 경기가 노 게임 선언으로 무효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3할-30홈런에 안타깝게 이르지 못한 에피소드가 있다. 아래의 조지마가 성장한 이후로는 수비력의 문제를 지적받으며 1루수, 지명타자 등으로 주로 뛰었지만, 아무튼 중심타자진의 일원으로서 1999년 호크스의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2년뒤 아베 신노스케를 받쳐줄 백업포수를 구하고 있던 요미우리로 옮기고 2003년 시즌 도중 은퇴해버렸다. - 조지마 겐지 (1995 - 2005)
- 마토바 나오키 (2000 - 2009)
- 호소카와 토오루 (2011 - 2016)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FA이적한 후 일본시리즈 3회 우승에 공헌을 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비형 포수. 2016년 시즌 구단의 은퇴권고에 자유계약선수의 길을 선택한 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3.3. 내야수
- 츠루오카 카즈토 (1939, 1946 - 1952, 감독재직 1946 - 1968)
과거 난카이 시절 23년 간 팀을 이끌던 명장. 선수 생활도 난카이에서만 한 진정한 호크스맨. - 이이다 토쿠지 (1947 - 1956)
키누가사 사치오 이전 일본프로야구 연속경기 출장 기록(1246경기)을 갖고 있던 1루수로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경기인 156경기(1956)를 출장한 선수이기도 하다. 타점왕 2회를 차지한 좋은 타격을 갖춘 1루수였지만, 통산 390도루에 고쿠테츠 이적 1년차에는 40도루로 도루왕도 한 번 차지한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력도 갖고 있던 다재다능한 선수. 말년은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보냈고 1966년에는 스왈로즈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의 프로야구 감독이 되기도 했다. 2년간 5위만 찍고 고쿠테츠 감독에서 해임된 뒤 1968년 난카이의 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최하위만 한 번 기록하고 바로 해임. - 키즈카 추스케 (1948 - 1956)
'바보 어깨'라 불릴 정도로 강한 어깨와 일본프로야구 역대 4위의 통산 도루(479도루)를 기록한 빠른 발로 뛰어난 수비력을 보여준 유격수. 1949-52년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 카게야마 카즈오 (1950 - 1959)
위의 1루수 이이다, 유격수 키즈카와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구성한 3루수. 선수로서건 지도자로서건 츠루오카의 후계자로 기대받았으나, 1965년 시즌 종료 후 츠루오카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한지 4일만에 급성 부신피질기능부전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다. - 코이케 켄지 (1961 - 1974)
- 켄트 해들리 (1962 - 1967)
미국 출신의 좌타 1루수로 6년간 난카이에서 최소 두 자릿수 이상 홈런을 기록했던 외국인 타자. 외국인 타자 최초 100홈런 달성자이기도 하다. 준수한 활약으로 "켄짱" 이라는 애칭까지 있었을 정도. 2005년 70세의 나이로 사망. - 후지와라 미츠루 (1969 - 1982)
- 카시와바라 준이치 (1971 - 1977)
- 카타히라 신사쿠 (1972 - 1981)
1980년 21홈런을 기록하며 활약한 후 세이부로 이적해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보냈고 1987년 다이요로 이적해 말년을 불태웠다 이후 세이부 코치-해설위원으로 일하던 중 2018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 코노 유키마사 (1974 - 1989)
- 후지모토 히로시 (1982 - 1997)
난카이 시절 말기부터 재적한 팀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으나 난카이 말기 다이에 초기의 막장분위기를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했다.[13] 체구도 좋고 타격에 소질이 있어 중심타선을 맡을 정도로 기대가 컸음도 불구하고 매년 어정쩡한 성적에 그쳐 그 시절의 나태한 팀 분위기를 대표하는 선수로 낙인찍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세이부에서 트레이드 되어 온 직후의 아키야마 코지가 팀의 중심선수인 후지모토가 경기 시작 직전까지 클럽하우스에서 다른 선수와 쇼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고 "팀이 이기려는 의지가 없다"는 분위기에 충격을 받고 절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 후 아키야마가 새로 들어오는 선수들의 리더 역할을 자처하며 팀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나선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결국 선수생활 마지막 해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트레이드 돼서 선수생활을 마쳤다. 다만 워낙 막장분위기가 길었던 팀에 소속되면서 현역시절 승부욕이 부족했고 연습을 게을리 한 것만 빼면 타격기술이나 야구센스도 괜찮았고 인간적으로는 호인이라 그러한 점을 팀에서 높게 평가한 모양. 은퇴 후에도 후쿠오카 지역 방송국의 방송해설을 거쳐 타격코치와 감독으로 호크스와의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2021 시즌이 끝나고 쿠도 키미야스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후임 감독에 내정되어 2022 시즌부터 팀을 지휘하게 됐다. 그러나 현역시절 만년 하위팀에 소속되면서 승리의 경험이 부족했던 것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고비마다 결정적인 패배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2년 만에 재계약을 하지 않는 형태로 경질됐다. 일설에 의하면 쿠도 키미야스 감독 퇴임 이후 후임으로 코쿠보 히로키를 내정하고 있었으나 쿠도 감독 마지막 해 벤치코치로서 팀 운영에 일부 개입[14]하는 방식으로 자질을 시험해 본 결과 아직 경험을 더 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코쿠보가 감독자리에 앉을 때까지 징검다리로 발탁했다고도 한다. 감독 퇴임 이후에는 구단 어드바이저에 취임하여 구단과의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 유가미타니 히로시 (1985 - 2000)
- 모리와키 히로시 (1987 - 1996)
- 토니 버나자드 (1988 - 1990)
- 하마나 치히로 (1992 - 2001)
- 고쿠보 히로키 (1994 - 2003, 2007 - 2012)
통산 2,000안타, 400홈런를 돌파했고 요미우리로 트레이드 되었던 3년 동안을 제외하면 줄곧 호크스와 함께 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전 2015 프리미어 12,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했고 2021년부터 호크스에 복귀해서 벤치코치 1년, 2군 감독 2년을 거쳐 2024년부터 호크스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 마쓰나카 노부히코 (1997 - 2015)
다이에 시절부터 팀을 대표했던 프랜차이즈 거포 타자로 2004년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적이 있다. 2015 시즌이 끝나고 팀을 나왔지만 오퍼를 전혀 받지못해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NPB 최초이자 유일한 3년 연속 시즌 120타점을 달성했다. - 이구치 타다히토 (1997 - 2004)
- 가와사키 무네노리 (2000 - 2011, 2017)
- 훌리오 줄레타 (2003 - 2006)
- 토니 바티스타 (2005)
- 혼다 유이치 (2006 - 2018)
프로입단 전에는 유틸리티였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사실상 전업 2루수로 자리잡았다. 통산 342도루에서 볼 수 있듯이 주루능력 하나는 리그 탑급이었던 선수였다. - 로베르토 페타지니 (2010)
- 이범호 (2010)
- 알렉스 카브레라 (2011 - 2012)
- 윌리 모 페냐 (2012 - 2013)
- 이대호 (2014 - 2015)
- 카일 젠슨 (2017)
- 우치카와 세이이치 (2010~2020)
3.4. 외야수
- 히로세 요시노리 (1955 - 1977)
한큐 브레이브스의 '세계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의 뒤로 일본프로야구 통산 도루 2위(596도루)를 기록한 리드오프.콩라인사실 선수생활은 이쪽이 먼저였고, 일본시리즈 우승 등의 영광도 여러 차례 차지한데다 후쿠모토의 롤모델도 이쪽이었지만 왠지 인지도가 떨어져서인지(...) '음지의 도루왕'이라는 비운의 별명이 이후에 붙여졌다. 심지어 후쿠모토의 통산 도루기록 갱신도 히로세가 현역에서 은퇴하기도 전에 이루어졌을 정도... 이쪽도 츠루오카 카즈토처럼 선수, 코치, 감독 생활을 모두 호크스에서 보냈다. 그러나 선수 은퇴 후 바로 오른 감독으로서는 재임기간(1978~1980) 동안 5위 이하만 찍으며 호크스의 20년 비밀번호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했다. - 오사와 케이지 (1956 - 1964)
선수 생활은 난카이에서 했지만, 그보다는 닛폰햄 파이터즈의 장기집권 감독으로 더 유명했다. 이쪽도 별명은 '오야붕' - 카도타 히로미츠 (1970 - 1988, 1991 - 1992)
40대에 홈런왕을 차지한 '불혹의 거포'. 일본프로야구 통산 홈런, 타점 3위에 랭크되어 있는 강타자로 그 위에는 오 사다하루와 노무라 카츠야 밖에 없다.일본프로야구 통산 홈런, 타점 2, 3위를 배출한 무시무시한 팀이다. - 아라이 히로마사 (1975 - 1985)
재일교포로 한국명 박종률. 호크스의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중반까지 리드오프를 맡았던 선수다. 빠른 발에 통산 2,000 안타를 기록할 만큼 컨택트 능력이 좋았다. 현재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최고의 타격코치로 손꼽힌다. 훗날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타격코치로 재직했을 때 스즈키 이치로를 지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쿠보데라 유지 (1977 - 1984)
외야수, 2루수, 유격수 등으로 활약하며 암흑기였던 호크스를 지탱한 선수. 무궁한 성장이 기대되던 선수였으나 1985년 1월 급성 심부전으로 죽고 말았다. - 고원부 (1981 - 1985)
이후 빙그레 이글스에서 한국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재일교포 타격왕이 된 선수. - 야마모토 카즈노리 (1983 - 1995)
일명 카즈 야마모토.[15] 사사키 마코토와 더불어 80년대 중반 ~ 90년대 초반의 호크스 타선을 대표하던 강타자로, 번트를 대지 않는 2번타자[16]로 유명했다. 2번의 방출과[17] 난청을 딛고 스타로 거듭난 근성의 사나이로, 1994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시즌 중반까지 이 해 일본 최초의 200안타를 달성하며 화제를 일으킨 스즈키 이치로와 수위타자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 사사키 마코토 (1984 - 1993)
19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당시 에이스였던 무라타 카츠요시와 더불어 아키야마 코지, 와타나베 토미오 등이 엮인 3:3 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른바 세기의 트레이드의 주인공. - 히로나가 야스타카 (1986 - 1994)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통산 제1호 홈런을 날렸던 선수로, 현역 시절엔 나름의 장타력은 가진 덕에 다이에 초창기에 준주전으로 나섰으나 컨택 난조 등으로 끝내 주전으로 도약하진 못한 채 다이에, 야쿠르트, 오릭스 3구단에서 대타를 전전하며 통산 183안타, 34홈런에 그쳤던 타자였다. 다만 그 34홈런이 상술한 다이에 제1호 홈런을 비롯해 헤이세이 시대 퍼시픽리그 제1호 홈런과 역대 최초 개막전 데뷔타석 첫 홈런[18], 일본프로야구 통산 6만호 홈런, 퍼시픽리그 통산 3만호 홈런, 1998년 치바 롯데의 연패 신기록(17연패)을 결정짓는 대타 끝내기 만루홈런 등 여러모로 굵직굵직한 한 방을 터트려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야구팬들에게 '기억보다 기록에 남는 사나이'로 회고된다. - 오미치 노리요시 (1988 - 2006)
난카이 호크스의 유니폼을 입은 경험이 있는 최후의 현역 선수. 아울러 팀이 다이에의 팀 인수로부터 소프트뱅크로의 매각 때까지 15년간 뛴 호크스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은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했다. 극단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는 타격폼으로도 유명했다. - 무라마츠 아리히토 (1991 - 2003, 2009 - 2010)
- 아키야마 코지 (1994 - 2002)
1993년 시즌 후 위의 사사키 마코토가 포함된 이른바 세기의 트레이드로 세이부에서 다이에로 이적. 그 후 9시즌 동안 뛰면서 리그 우승 2회, 일본시리즈 우승 1회에 공헌했고, 2009 ~ 2014년까지 소프트뱅크 감독으로 리그 우승 3회, 일본시리즈 우승 2회를 달성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케빈 미첼 (1995)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왕, 타점왕, MVP를 수상한 경력이 있는 거물급 용병. 일본으로 오기 직전 해에도 타율 .326, 30홈런을 기록했었다. 그러나 지랄맞은 성질 때문에 어떤 팀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의 여파로 94년 시즌이 중단되고 95년 시즌도 개막이 불투명해지자 다이에 호크스와 계약했다. 개막전의 일본 무대 데뷔 첫 타석에서 만루홈런을 날리면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무릎부상을 치료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수뇌부와 갈등을 겪으며 태업설이 돌기도 했고 결국 8월에 무단으로 귀국하자 다이에에서 바로 잘라버린다. 일본에서의 성적은 37경기 출전 타율 .300, 8홈런, 28타점. 마이크 그린웰보다는 임팩트가 덜하지만 일본야구 용병 사상 최악의 먹튀 중의 하나로 당시 다이에 호크스의 무모한 돈지랄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일본으로 온 것이 기량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파업 사태가 일단락된 뒤 메이저리그에 복귀했고, 99년까지 메이저리거로 뛰었다. - 시바하라 히로시 (1996 - 2011)
- 토니 미첼 (2001)
놀랍게도 상술한 케빈 미첼의 사촌 동생.(...) 이쪽은 구단이랑 다투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조용히 1할대의 타율을 찍고 1년만에 퇴출되었다.형제먹튀그래도 거액의 계약으로 데려온 사촌형과 달리 독립리그에서 데려왔기 때문에 연봉이 1500만엔으로 저렴하기는 했고, 공갈포긴 했어도 10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 페드로 발데스 (2001 - 2004)
- 타무라 히토시 (2007 - 2012)
- 후쿠다 슈헤이 (2007 - 2019)
- 요시무라 유키 (2013 - 2018)
요코하마에서 고졸 4년차에 26홈런을 기록한 것을 시작해 4년간 중심타선을 책임지며[19] 시즌 30홈런까지 기록했던 거포 유망주. 그러나 공갈포 성향이 강했고[20], 공인구 교체의 직격탄까지 맞으면서 20대 중후반에 이미 한물 간 퇴물취급을 받으며 소프트뱅크로 트레이드됐다. 소프트뱅크에서도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2018년을 끝으로 방출. 2019년에는 네덜란드 프로야구에 진출했다가 2020년 류큐 블루오션[21]에 입단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 블라디미르 발렌틴 (2020 - 2021)
- 하세가와 유야 (2007 - 2021)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무라카미 마사노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사상 최초의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이다. 난카이 호크스 입단후 꽤 촉망받는 신인이었으며, 그 자질을 높게 평가해서 1년차 시즌인 1963년 시즌 후에 미국 야구 배워오라고 샌프란시스코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 야구 유학을 보냈는데 거기서 꽤 쓸만한 활약을 해서 자이언츠 구단이 메이저리그로 콜업을 해버렸다(...) 중간 계투로 2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통산 6승 1패, 방어율 3.43의 성적을 남겼다. 여기에 고무된 자이언츠 구단은 무라카미를 더 데리고 있고 싶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난카이 호크스와 계약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 심지어는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있던 시절에도 여전히 일본에서는 난카이 소속 선수로 등록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중계약(...) 여차하면 난카이 구단과 자이언츠 구단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나 애초에 난카이 구단이 무라카미를 보낸 것도 자기 팀 소속 선수로서 야구유학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고, 마이너리그에서의 활약에 고무된 자이언츠 구단이 멋대로 메이저리그까지 콜업을 해버린 것이다. 양 쪽이 서로의 제도에 대해서 무지하고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1960년대니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결국 원 소속구단인 난카이 구단의 무라카미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었고 난카이 구단은 돈들여서 야구유학 보낸 유망주를 써먹지도 못할까봐 부랴부랴 무라카미를 귀국시켰고, 이렇게 사상 최초의 아시아출신 메이저리거는 불과 2년만에 짧은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감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18년간 3개구단에서 뛰면서 통산 103승 82패 30세이브, 방어율 3.64의 성적을 올렸다. - 죠지마 켄지 (시애틀 매리너스→일본 복귀 후 한신 타이거즈)
- 이구치 타다히토 (시카고 화이트삭스→필라델피아 필리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필라델피아 필리스→일본 복귀 후 치바 롯데 마린즈)
- 와다 츠요시 (볼티모어 오리올스[22]→시카고 컵스→복귀)
- 가와사키 무네노리 (시애틀 매리너스→토론토 블루제이스→시카고 컵스)
- 이대호 (시애틀 매리너스→한국복귀 후 롯데 자이언츠)
- 센가 코다이(뉴욕 메츠)
[1] 괄호 안은 재적연도[2] 1944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황 악화로 프로야구 리그가 중단되었고 벳쇼도 일본군에 징집되었다.[3] 데뷔는 토에이 플라이어즈에서 했다. 그러나 별다른 활약을 못해 결국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여기서 확 각성했다.[4] 한큐-오릭스 브레이브스의 홈구장. 코베 이전 후 경륜장(문서 수정 전은 경마장으로 되어있었음) 등으로 쓰이다 2005년 철거.[5] 퍼시픽리그에서 단독으로 1973~1982년까지 실시한 전후기리그제의 첫 플레이오프였다.[6] 대타 홈런 세계 최다 기록(27개) 보유자. 대타로 활약하다가 1975년 퍼시픽리그에 지명타자제가 생기자 지명타자로 1982년 은퇴 때까지 맹활약했다.[7] 근데 에모토는 불과 이틀 전에 3차전(10월 22일)에서 선발투수로 출진해 우승한 바 있다.[8] 山内和宏. 마이니치-다이마이, 한신의 강타자 야마우치 카즈히로(山内一弘) 와는 이름의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의 투수이다[9] 끝내기 패배당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통곡하는 짤이 유명해졌다.[10] 이 해 최종 성적은 60경기 79.1이닝 14승 1패 1.25 ERA. 933의 승률을 찍으며 중간계투로 승률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이색 기록을 보였으며, 승리 수는 이 해 퍼시픽리그 다승왕인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16승에 단 두 개 뒤진 것이었다. 시즌 막판 경기에서 호크스 OB인 노장 타자 야마모토 카즈노리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지 않았다면 중간계투로 15승 무패 시즌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단 이 시기에는 홀드가 일본프로야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기록이 아니라 최우수 중간계투를 정하는 참고기록에 불과했기에 홀드가 기록되지는 않았다. 이해 최우수 중간계투는 팀 동료 후지이가 차지.[11] 아무리 부상이 있다고 해도 팀의 마무리 투수였던 선수를 그렇게 간단하게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하냐는 까임에, 프런트는 재활 때문에 2013년에도 시즌 초반에는 등판 가능성이 낮고 FA 자격 취득이 1년밖에 안 남은지라 설마 데려가겠냐는 생각에 차라리 유망주 한명을 더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전략적 선택을 했는데 정말로 데려갈 줄은 몰랐다고 답변했다(…). 스기우치 건 때도 그렇고 프런트의 병신 인증. 에라이[12] 前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부임 첫해인 2005년 팀을 3위로 이끌었지만(그리고 이것이 2015년까지의 마지막 A클래스였다!) 이듬해엔 도로 꼴찌로 처박으면서 해임당했다(...)[13] 그가 소속된 기간동안 호크스는 단 한번도 A클래스에 들어간 적이 없으며 호크스 재적 16년 동안 소속팀이 승률 5할을 넘어본 적도 단 한 번(1994년)뿐이었다.[14] 자기 전공인 공격파트에서 실질적인 감독 역할을 했다고 한다.[15] カズ山本. 다이에 말기인 1994년후반기와 1995년에 잠시 썼던 등록명이다. 은퇴 후에도 이 예명으로 연예계 활동을 했다.[16] 일본에서는 보통 1번 타자가 출루하면 2번 타자가 1번 타자의 진루를 돕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게 일반적이었으니.(대표적 예가 카와이 마사히로.)[17] 원래 야마모토는 1976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데뷔했으나, 데뷔 이후 6년간 고작 6안타 1홈런에 그치는 저성적으로 인해 결국 1982년 방출당한다. 그러나 방출 후 오사카의 배팅센터에서 아르바이트와 연습을 병행하다가 2군감독 시절부터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타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조언을 해 줬던 아나부키 요시오 당시 난카이 감독(이 해 부임)의 부름을 받아 1983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한다. 이후 비로소 실력이 만개하여 팀의 주전 외야수로 뛰게 되었고, 팀이 다이에에게 넘어가 후쿠오카로 연고이전한 후에도 중심타자로 꾸준히 뛰었다. 그러나 1995년 부상 등으로 시즌을 망쳤고, 결국 시즌오프 때 고령 등이 원인이 되어 2번째 전력외통보를 받고 호크스를 퇴단한다. 그러나 그가 신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거라 여긴 킨테츠 시절 선배인 사사키 쿄스케 당시 킨테츠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6년 다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한다. 그후 이해 프로 인생 처음으로 팬투표로 올스타전에 선출되고 잠시나마 수위타자에 오를 정도로 1년간은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이후 기량 저하로 점점 출장기회가 줄었고 결국 1999년을 끝으로 은퇴한다.[18] 여기서 중요한 건 저 세 기록을 동시에 달성한 것으로, 다이에 제1호 홈런이 헤이세이 파리그 제1호 홈런이자 역대 최초 개막전 데뷔타석 첫 홈런이 되었다.[19] 사실 2009년에는 중심타선으로 개근하긴 했지만 이 시즌부터 이미 하락세를 타면서 16홈런과 OPS 7할대 초반에 그쳤기 때문에 딱 3년 잘했다.[20] 2006년에 10볼넷 116삼진이라는 정신나간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타율이 .311인데 출루율이 .336(...) 통산 타율은 .253인데 출루율이 .311이다.[21] NPB 가맹을 목표로 하는 독립구단. 오키나와가 홈이다.[22] 계약은 했으나 부상으로 계약기간 내내 한 경기도 등판 못하고 방출. 그 후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트리플A에서 뛰다가 메이저리그로 승격하여 컵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