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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17:32:48

MBC 청룡/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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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청룡 시즌별 성적
1984 시즌 1985 시즌 1986 시즌
페넌트레이스
전기리그 성적
순위 승률
5 24 0 31 0.436
페넌트레이스
후기리그 성적
순위 승률
6 20 1 34 0.370
페넌트레이스
종합 성적
순위 승률
5 44 1 65 0.404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1.2. 선수 이동1.3. 신인 선수1.4. 기타
2. 시범 경기3. 정규 시즌
3.1. 전기리그3.2. 후기리그3.3. 여담3.4. 팀별 상대전적
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4.2. 타자
5. 수상 및 기록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1.2. 선수 이동

1984년 11월 백업 1루수 김바위와 삼미의 최홍석과의 트레이드가 있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지도 3년째 국가대표급 화려한 선수층으로 매년 우승후보로 손 꼽히던 청룡이었지만 언제나 뒷심이 부족하여 무너지는 것을 반복했다. 매년 우승권으로 평가받음에도, 그 기대에 번번이 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고 자연스레 직접적인 전력 보강보다도, 우선적으로 팀의 분위기 쇄신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또 다시 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전년도의 희생양이 김동엽 감독이었다면, 이번엔 팀 내 주장인 이해창과 최고참 이종도가 숙청 대상이 되었다.

주장 이해창은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273 6홈런 36도루 WAR 3.71), 선수협 주동문제와 연봉문제와 관련해 구단측과 사이가 꽤 깊이 벌어져 있었고 이종도는 첫 2년간은 부동의 중심타자로서 그 몫을 다했으나(82~83 평균 .308 9홈런 55타점 18도루), 서른 중반에 가까워진 나이[1]와 전년도에 1할대에 머무는 극심한 부진으로 하락세만 남았다는 판단 하에 전력 외로 분류되었다.

결국 이해창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삼성의 비운의 투수 이선희[2]와 트레이드 되었고. 이종도는 이 해부터 같은 서울연고(청룡은 잠실-OB는 동대문)를 쓰게된 OB로 1800만원에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게 된다.

이해창을 이선희로 바꾸며 탄탄한 마운드(84년 팀 방어율 1위)를 더 두텁게 만드는데 성공한 청룡의 다음 타겟은 그 두터워진 마운드를 이끌어야할 안방마님, 포수였다. 차동열과 박철영이라는 기대주들의 성장이 더디고 원년 골든글러브 포수 김용운과의 재계약이 연봉문제로 지지부진한 탓에 내야수 신언호를 포수로 다시 전환시키는 것까지 고려했는데 역시나 연봉문제로 롯데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이자 국가대표 출신의 심재원을 3월 김용운+현금 300만원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그 고민을 해결했다.

미계약상태였던 조호, 박석채, 이성수, 최정우, 편기철, 신계석 등 6명을 자유계약선수로 공시 신청했다. #

1.3. 신인 선수

안언학(중앙고-고려대, 내야수)
박흥식(신일고-한양대, 외야수)
정삼흠(명지고-고려대(중퇴)-포철, 투수)
예병준(동대문상고-농협-상무, 투수)
윤덕규(대광고-상업은행, 외야수)
유지홍(선린상고-고려대, 내야수)
최동명(신일고-경희대, 투수)[3]
채도병(충암고-인천전문대, 내야수)
김용수[4](동대문상고-중앙대-한일은행, 투수)

지난 3년과 달리 OB가 1985년부터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함으로써 기존의 2-1 지명 방식에서 1-1 지명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동전던지기 추첨으로 우선권을 정해 지명했다.

서울팜을 기반으로 한 유망한 신인들의 수급 또한 나쁘지 않았다. OB와의 주사위 싸움을 연전연승하며(4연승) 중앙고 시절 광주일고 선동열을 완봉승으로 셧아웃시킨 고려대의 안언학과 고려대의 탄탄한 투수진에 막혀 빛을 못 보다 휴학 후 실업무대에 뛰어들어 리그를 평정하다시피한 아마추어 거물, 정삼흠[5]을 지명했다. 이 밖에도 국가대표 출신의 한일은행의 김용수, 한양대의 박흥식, 상업은행의 윤덕규 등을 지명하며 이종도이해창이 빠져나간 곳을 채울 신예들을 보강한다.
곽승훈(신일고-건국대[중퇴],내야수)

1.4. 기타

지난해 6개 구단중 유일하게 재일교포 출신 선수가 없었던 청룡은 재일교포 출신이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내야수 유고웅을 영입했다. 알다시피 주니치와 청룡이 자매구단이었기 때문에 쉽게 영입할 수 있었다.

해외로 떠나지 않고 경남 진해에서 스프링캠프를 실시했다. #

2. 시범 경기

3. 정규 시즌

3.1. 전기리그

순위 경기수 게임차 승률
전기리그
1 삼성 라이온즈 55 40 1 14 0.0 0.741
2 OB 베어스 55 29 1 25 11.0 0.537
3 해태 타이거즈 55 29 0 26 11.5 0.527
4 롯데 자이언츠 55 27 0 28 13.5 0.491
5 MBC 청룡 55 24 0 31 16.5 0.436
6 삼미 슈퍼스타즈 55 15 0 40 25.5 0.273

언론으로부터 해태나 삼미보다도 낮은 순위를 거둘것으로 예측되었던 청룡은 초반 김인식과 이광은이 4할이 넘는 타율, 김상훈은 3할 중반대로 맹타를 휘둘렀고, 김용달이 초반 3홈런으로 홈런 선두에 나서며 순위도 OB에 이어 2위로 구호대로 화끈한 야구를 펼치고 있었다. # 우승후보 OB에 1승2패를 거둔 뒤, 또다른 우승후보 삼성 원정에서 위닝시리즈, 연패 중인 최약체 삼미와의 2연전에서 재일교포 유고웅의 만루홈런으로 같은 재일교포 장명부를 무너뜨리는 등 2연승을 거두며 5승3패로 순항했다. 그러나 곧바로 디펜딩챔피언 롯데와의 홈경기 3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OB와의 홈경기에 이어 홈에서 4전 전패를 당했고 삼미의 기록적인 연패로 승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난 가운데 2위에서 5위로 곤두박질쳤다. 홈에서의 첫 승은 5번째 홈경기인 4월 19일 해태와의 경기에서 이루어졌다. # 4월 중순까지 5할에서 불안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으나 # 4월 23일과 24일 8연승을 기록하고 있던 삼성과의 홈 2연전에서 9:3, 2:0으로 패배하며 삼성의 10연승 최다연승 신기록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6] 신인 정삼흠은 방어율이 3.00이었음에도 4패에 그치며 극심한 불운에 시달리기도 했다. # 4월 30일 18연패의 삼미 원정에선 최계훈에게 완봉승을 헌납하며 0-3으로 패배, 삼미의 18연패 탈출의 제물이 되는 치욕을 당했다.[7][8] #

청룡이 급격하게 성적이 추락한 이유는 투타의 불균형과 베테랑들의 부재를 들 수 있었다. 시즌 초반 3개의 홈런으로 홈런레이스 선두에 있었던 김용달은 그 3개의 홈런 이후 단 1개의 홈런도 치지 못하며 아름다운 1주일이 되어버렸고 시즌 초 장명부에게 만루홈런을 쳤던 재일동포 유고웅은 슬럼프에 빠졌다. 김재박과 이광은, 김인식과 같은 중고참들이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물방망이 타선이 되자 투수진은 잘 던져도 패전투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9] 나중에는 타선과 함께 나락으로 빠지며 연패의 늪에 내몰렸다. 삼미전 9승2패를 기록한 걸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구단에게도 상대전적에서 우세를 가져가지 못했다. 서울 라이벌 OB전은 잠실에서 6전 전패를 포함해 8연패를 당하는 굴욕을 당했고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에게도 잠실에서 5전 전패를 당했다. 어웨이 경기에서 5할을 넘겼지만 오히려 홈에서 약했다. 전기리그 홈경기에서 8승19패로 .296 승률로 3할이 안됐다. 게다가 삼미전을 제외하면 승률이 .326으로 처참했다. 이종도와 이해창을 보내버린 결과 분위기가 좋을때 들뜨지 않게 자제시켜줄 인물과 연패로 침체되어있을때 솔선수범 나서 투지를 불러일으킬 리더가 사라졌다.

결국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자 MBC는 자존심을 버리고 이미 자신들이 83시즌이 끝나고 내친 바 있는 김동엽 전 감독을 복귀시켜 후기리그부터 이끌고 어우홍을 총감독으로 선임하며 사실상 경질시켰다. # 어우홍 감독과 계약시 내걸었던 재임 3년의 기간동안 어떤 터치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어기고 어 감독을 총감독으로 올리고 현장감독으로 김동엽 감독을 선임한다는 말같지도 않은 비열한 꼼수로 구단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며 빈축을 샀다. 이 과정에서 언론에 집중포화를 당하며 구단 매각에 대한 쓴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의식하며 MBC 청룡은 기존 문화방송국 산하의 집단에서 독립법인 (주)MBC 청룡으로 단일개체화되어 분리운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설위원이었던 박용진을 코치로 불러들였고 베테랑 외야수인 김인식이 플레잉코치가 되며 선수와 코치를 겸하게 되었다. #

3.2. 후기리그

순위 경기수 게임차 승률
후기리그
1 삼성 라이온즈 55 37 0 18 0.0 0.673
2 롯데 자이언츠 55 32 0 23 5.0 0.582
3 해태 타이거즈 55 28 1 26 9.5 0.519
4 청보 핀토스 55 24 1 30 13.5 0.444
5 OB 베어스 55 22 1 32 15.5 0.409
6 MBC 청룡 55 20 1 34 17.5 0.370

김동엽 감독의 빨간장갑 마법은 두 번 재현되지 않았다. 어우홍 체제의 코칭스태프를 물갈이하며 새로운 시작을 천명했고 후기리그 개막하기 전 합숙훈련도 가져봤지만 전반기에 보여줬던 무기력한 모습이 더 심해지며 성적은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떨어졌다. 하기룡-이길환-김봉근 등의 주축 투수진들의 릴레이 부상과 동시에 유종겸-정삼흠-이선희가 근근히 버텨주던 마운드가 후반기 들어 완전히 붕괴해버린 탓에 천하의 김동엽 감독조차 어떻게 손을 써 볼 방도가 없었다. 전반기 바닥을 기던 청룡보다 아래에 위치해 "바닥에는 더 바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삼미에서 이름만 바뀐 청보 핀토스의 진격과 맞물려 최후의 보루인 5위자리까지 함락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인 승률 .370에 6개 구단 중 최하위로 후기리그를 마감했다. 시즌 전 언론의 최약체 진단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해태에 맞대결 10연패에 7월 5일에서 7일까지는 3연전 0득점이라는 굴욕적인 기록도 쓰고 말았다. 그나마 청룡의 체면을 세운건 당시 신기록이었던 이광은의 19경기 연속 안타[10]김재박이 50개의 도루로 도루왕을 차지하며 김일권의 독주를 저지한 것 정도였다. 서울의 유일한 야구팀이었던 타이틀이 사라진 첫 해 어느새 청룡은 팬들에게 낯을 들기 부끄러운 야구팀으로 추락해버렸다. 하지만 바닥을 기는 팀석적 덕분에 신인들인 정삼흠, 김용수, 박흥식, 윤덕규가 경험치를 많이 얻어가며 후에 팀을 이끄는 주축 선수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3.3. 여담

3.4. 팀별 상대전적

MBC 청룡 1985년 팀별 상대 전적
상대 팀 승 - 무 - 패 승률 승패마진 우열
롯데 자이언츠 7 - 0 - 15 0.318 -8 절대열세
삼성 라이온즈 7 - 0 - 15 0.318 -8 절대열세
OB 베어스 9 - 0 - 13 0.409 -4 열세
해태 타이거즈 7 - 1 - 14 0.333 -7 절대열세
삼미 슈퍼스타즈 14 - 0 - 8 0.636 +6 우세
청보 핀토스
총합 44 - 1 - 65 0.404 +3 순위: 5 / 6

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49 정삼흠 41
(5위)
16 192⅔
(7위)
9 12
(4위)
5
(7위)
3.13 169
(8위)
84
(3위)
99
(6위)
18 오영일 28 13 127⅓ 8 8 1 3.53 132 54 42
34 하기룡 26 12 111 5 10
(6위)
2 2.92
(10위)
103 57 31
37 김봉근 21 12 113⅓ 2 7 0 3.34 110 32 37
47 김정수 15 9 60 2 3 0 2.70 50 40 25
41 김용수 6 0 21⅔ 1 2 2 3.74 22 7 14
11 이길환 8 7 35⅓ 1 2 0 3.31 28 18 6
14 이광권 4 1 9⅓ 0 0 0 4.82 10 3 1
29 정순명 7 6 18 0 4 0 6.00 26 7 5
7 김재박 1 0 1 0 0 0.00 0 0 0
21 차준섭 3 1 4⅓ 0 0 0 14.54 11 0 0
1 안언학 10 2 15 0 2 0 9.00 19 11 4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 유종겸 33 13 135⅓ 10
(10위)
8 1 2.99 111 57 40
36 이선희 28 18 138 5 7 2 2.28
(4위)
111 59 49

3.24의 팀방어율은 리그 4위로 평균수준은 했다. 하지만 최동원, 김시진, 선동열 만큼 리그를 주름잡는 확실한 에이스는 없었다. 신인 정삼흠은 첫 해부터 200이닝에 가까운 이닝을 소화하며 3.13의 평균자책점에 리그에서 두번째로 많은 3번의 완봉승[11] , 9승에 5세이브를 곁들이며 전천후로 활약했고 신인왕 순위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12] 준수한 평균자채점에도 불구하고 12패로 최다패 4위였는데 그보다 패배가 많았던 투수는 5.30이라는 방어율과 단일시즌 최다패인 25패로 망가진 삼미의 장명부와 똑같이 5점대 방어율의 정성만, 그리고 OB의 최일언 뿐이었다. 최일언은 2.43이라는 짠물피칭에도 불구하고 10승14패를 거뒀다. 그래도 최일언은 선발로 등판한건 9번에 불과했고 10승이라도 건졌지만 정삼흠은 16번의 선발등판이 있어 1985년 진정한 윤석민상 수상자라고 할 수도 있다. 불운했던 또다른 투수는 이선희하기룡인데 각각 2.28과 2.92라는 준수한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승수는 단 5승에 그쳤다.

4.2. 타자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7 심재원 76 189 .206 39 3 0 3 15 14 4
22 차동열 64 151 .219 33 2 0 4 20 13 1
24 박철영 14 21 .190 4 2 0 0 2 1 0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7 김재박 100 377
(8위)
.313
(6위)
118
(4위)
15 3 3 36 54 50
(1위)
9 김상훈 98 360 .300
(10위)
108
(10위)
23
(3위)
4
(6위)
5 51
(8위)
33 4
4 김인식 110
(1위)
404
(1위)
.275 111
(9위)
14 0 2 16 48 17
(7위)
26 유고웅 89 228 .193 44 6 0 4 15 26 7
25 유지홍 60 130 .215 28 4 0 0 13 9 3
47 김정수 32 91 .220 20 3 2 1 7 4 0
3 김용달 71 142 .232 33 9 0 3 14 15 3
6 김경표 40 51 .157 8 1 0 0 3 3 1
16 유성용 2 2 .000 0 0 0 0 0 0 0
14 이강권 1 1 .000 0 0 0 0 0 0 0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33 이광은 87 326 .279 91 11 3 6 39 38 20
(6위)
8 송영운 79 198 .278 55 6 1 0 19 16 4
20 박흥식 79 210 .238 50 8 5
(3위)
0 9 18 4
32 신언호 107
(7위)
371
(9위)
.226 84 11 0 1 28 23 6
12 김문영 58 94 .223 21 3 0 1 8 7 2
17 윤덕규 25 47 .170 8 0 1 1 3 6 2
1 안언학 42 94 .181 17 2 0 1 6 7 0
5 최홍석 37 76 .145 11 3 0 2 7 2 0
15 김영균 25 52 .154 8 1 0 0 6 2 0
10 김봉기 28 9 .111 1 0 0 0 0 6 1

팀내 최다홈런이 8개를 친 김상훈일 정도로 장타력 빈곤이 심했다. 여길 보면 나오는데 OPS .800을 넘긴 청룡 선수는 전무했다. 여길 보면 타격 WAR 총합은 9.16으로 꼴찌이며 5위였던 롯데가 거의 2배인 18.04이니 리그 최하급의 타격 생산성을 기록했다. 삼성의 타격 WAR은 29.97이다. 6개 구단중 유일한 300점대 득점대인 345득점을 기록했으며 홈구장이 잠실임을 감안해도 팀 홈런 37개로 이 부분 5위 67개의 OB보다 30개나 적었다. 팀타율도 .246로 꼴찌, 출루율도 .313으로 꼴찌, 장타율도 .322로 꼴찌로 트리블 콤보를 했다. 최악의 물방망이니 팀성적이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었다. 김재박의 도루 1위도 팀성적을 끌어올리는데엔 역부족이었다. 얼마나 장타가 안나오면 뛰었을지 외야수 신언호는 WAR -1.41로 전체 WAR 꼴찌를 차지했다.

5. 수상 및 기록


[1] 2020년대 초반인 현 시점에서 이 연령대는 한창 뛸 나이지만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었던 1980년대 중반에는 이미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였다.[2] 프로야구 개막전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허용한 그 이선희가 맞다.[3] 1962년생 우완 사이드암 스로 투수로 MBC의 지명을 거부하고 상업은행에 입단하여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1992년 5월 백혈병으로 요절했다.[4] 앞서 1983년 지명 때 지명한 덕에 다른 선수들과 달리 지명 대상에서는 빠졌다.[5] 안언학과는 동기였다.[6] 기존 기록은 OB의 9연승이었는데 1982년 5월8일~6월12일, 84년4월17일~4월28일 두 차례 있었다.[7] 삼미의 1985년 4월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4월 전패를 당할뻔한걸 MBC 청룡이 모면하게 해준 셈이다.[8] 그리고 35년 후, 청룡의 후예와 같이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원년 대전팀이 자신들의 뒤를 이어 대전팀이 된 독수리군단의 18연패 탈출의 제물이 되는 개망신을 당했다.[9] 정삼흠의 승운이 정말 나빴다.[10] 이 기록도 시즌 막판 신인왕을 수상한 금지어에 의하여 20경기로 갱신되었다.[11] 1위는 4회의 최동원이다.[12] 신인왕은 금지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