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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3:22:59

게르만족의 대이동

게르만 대이동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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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이동 이전
2.1. 관련 인물
3. 4세기~6세기(1차 대이동)
3.1. 게르만 족의 정체성에 관한 보론3.2. 관련 인물
4. 중세(2차 대이동)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훈족의 침공에 의해 촉발되어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야기하고, 서유럽 문화권의 형성에 기여한 1차 대이동과 노르드인들이 유럽 세계에 대격변을 가져온 2차 대이동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하면 전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다른 설명 없이 그냥 민족 대이동이라 하면 게르만족 대이동 중에서도 1차 대이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대이동 이전

파일:북유럽 청동기 시대 사회.png
청동기 시대의 게르만족
파일:1280px-Germanic_tribes_settlements_750BC-1AD.svg.png
고대 게르만족의 이동
기원전 750년 이전
기원전 750년과 기원후 1년 사이
기원후 100년까지
기원후 100년 이후

독일 지역이 이들의 주 영역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 게르만족의 원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왔다. 게르만족의 조상들은 스칸디나비아의 원주민들과 통혼 혼혈하였는데 여기서 게르만족의 주된 금발벽안의 혈통 형질을 받았다. 기원전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드 반도에서만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의 온도가 내려가자 게르만족은 대거 발트해를 남하하여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 남하를 계속하여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하여 정주하게 되었고 심지어 고트족처럼 당시에는 유목민이 놀던 초원지대였던 우크라이나까지 진출한 사례도 있었다.

기원전 120년 유틀란드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살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로마와 맞닥뜨리게 된다. 로마는 이들이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전멸하고 집정관이 연이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기원전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1] 이에 로마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사회 체제를 뒤엎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갈리아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말았다.[2]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화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탈리아로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기원전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기원전 101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느라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용병화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킴브리 전쟁 참조.
파일:Germanic_dialects_ca._AD_1.png
기원후 1년경 게르만어의 분포
북게르만어
북해 게르만어
저지 프랑크어
고지 독일어
동게르만어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게르만족과 싸웠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 그러나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 강도나우 강으로 확정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도 게르만족과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국경으로 마주하면서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3세기에는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고트족, 프랑크족, 알레마니족[3]이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동시에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조심스러운 교류가 진행되기 시작되어 게르만족은 로마 사회로 조심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고 그 속에 많은 부족들이 있었으므로 로마는 일부 게르만족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다른 일부 게르만족과는 동맹을 맺는 식의 정책을 쓰며 게르만족을 다루었다.

이 시기 게르만족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있다.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재미있는 게르만의 풍습이 하나 나오는데, 전사의 키와 힘이 순결을 유지하는 기간에 비례해서 커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 잃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도 했고, 성경험이 늦을수록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4] 그들 사이에서는 가장 오래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토이토부르크 승리의 비결 대마법사, 대현자 이런 풍습은 켈트족에게도 있어서 동정인 사람을 우대했다고 한다.

2.1. 관련 인물

3. 4세기~6세기(1차 대이동)

4세기에 들어설 무렵엔 게르만 족과 로마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진척되어 용병으로 당시 이미 상당히 와해되어버린 로마의 국방제도를 메워주기도 하고, 로마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변경지대에 대신 이주하여 그 땅을 경작하고 세금을 내기도 했다. 한편 수세기에 걸친 교류를 통해 게르만족과 로마와의 문화, 문명적 수준 차이가 점점 좁아졌다. 피터 히더의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중 2장 '세계화와 게르마니'에 의하면 4세기 들어서는 군사를 전담하는 귀족 종사단, 즉 초보적인 형태의 장교단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서 좀 더 뛰어난 자들이 부족/종족 전체를 이끄는 부족장/왕이 되었다. 즉 부족장/왕 입장에서 이들은 잠재적인 경쟁자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들 중에서 본인의 위치에 도전하려는 것이 보이거나, 그런 것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실력과 인망이 빼어나게 좋았던 경우 내분이 있었으며 심하게는 내전도 있었다. 로마가 이들 간의 갈등관계를 이용해서 같은 게르만 부족/종족 내 디바이드 앤 룰을 성공시킨 사례도 더러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저 귀족 종사단은 부족장/왕이 되기 위한 일종의 예비 인재풀이라서, 여러 부족/종족을 한꺼번에 통제하는 부족장/왕이 상설직이 아니라 이전의 아르미니우스나 옆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와 같은 특출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거했던 나머지, 이들이 죽고 나서 이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던 일은 없어졌다. 지도자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나이가 충분히 차 있으면서 리더십이 되면 성공적으로 세습하는 것이고, 리더십이 없거나 나이가 너무 어리면 귀족 종사단 중 실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이 새로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5] 즉 일가 내 세습이 정착되지는 않았다 해도 부족장 내지 왕 자리는 예전과 달리 상설직으로 정착되었어서 정치적으로 훨씬 더 안정되었고 결집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발전한 게르만족은 로마에게는 종전보다 훨씬 강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렇게 되니 귀족 종사단과 그 밑의 평민과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종전에 비해서 점점 벌어졌다고도 한다. 또한 제국과의 국경인 라인 강 혹은 다뉴브 강 한가운데에서 로마 황제들과 선상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로마 황제와 1:1로 회담을 하는 것은 제정 초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4세기 후반, 동방에서 갑자기 훈족이 나타나자 난리가 나버렸다. 갑자기 동쪽에서 훈족이 나타나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연맹왕국 비스무리한 것까지 형성하면서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휙 밀어버리자 이들이 서진하면서 주변의 여타 게르만족들을 도미노 쓰러뜨리듯 밀어버렸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게르만족의 대이동 또는 민족 대이동이다.

그래서 로마는 후에 여러모로 골치아픈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게 잘 먹히지 않은 게, 로마도 인력 부족이라서 이들이라도 받아들여 머릿수를 채워야 했던 안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족째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사를 군에 편입시켜 계속 인력을 충원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적, 물적 자원은 동로마 지역이 풍부한데 그 지역은 절반 이상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치 전선에 그게 투입되어야 하는지라(...). 이때 로마 병사들이나 지휘관들이 게르만족이기 때문에 이들을 막지 않았다는 것은 전형적인 편견이다.

실제로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등의 게르만계 로마인들이 라틴계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해가며 분투하기도 했다. 애초에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며,[6] 같은 게르만족이라도 전근대 시대에는 같은 부족이 아니면 그냥 남일 정도로 철저한 부족 사회였는데,[7] 당연히 그 내부에서 친(親) 로마파 부족과 반(反) 로마파 부족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일례로, 고트족은 서로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각각 서고트족동고트족으로 갈리면서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정복당한 뒤로 뒷날 훈 제국이 붕괴된 뒤에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독립하기 전까지 그들과 함께 따라다녔다. 그 결과로 카탈라우눔 전투와 같이 로마 제국의 운명이 걸린 큰 전투에서 같은 고트족끼리 칼끝을 겨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서고트는 로마 편, 동고트는 훈족 편)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라틴족 또한 로마 제국 말기의 시점에서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이전에는 하나의 라틴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이후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및 다른 문화권(이베리아 반도, 발칸반도, 북아프리카 등)으로의 팽창을 통해 라틴족은 보다 더 다양한 혈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치와 퇴폐에 빠진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게 되어 차츰 군사력이 저하되어 기강이 빠져 결국 망했다는 것은, "기존의 해석"인 동시에 틀린 해석이다. "최근의 재평가"가 아니다. 수십 년 된 얘기가 최근의 재평가인가?

로마군의 중추를 형성했던 게르만족들은 적어도 4세기까진 대부분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으로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던 상비군이었고,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과 장교들은 전반적으로 로마에 대단한 충성을 바쳤다.

당시의 로마 제국 내의 게르만족들의 삶은 이랬다. 게르만족들 중에서 귀족이거나 부유한 상인이나 지주쯤 되는 유력자의 자녀들은 로마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로 붙들려서 수도인 로마로 보내졌다.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에는 그곳으로 보내졌는데, 이 볼모 생활은 강제적으로 유폐된 생활이 아니었다. 오히려 볼모들은 사실상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간주되었고, 이곳에서 로마식 교육을 받은 후에 로마 제국고관대작으로 임용되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8][9] 때가 되어 족장의 자리를 물려받거나 가업을 잇기 위해 출신 부족의 영토로 귀국할 때에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 따로 없었다. 엄청난 액수의 퇴직금, (명목상이나마) 제국 고위 인사임을 인증해주는 직인, 부족민들에게 나누어줄 각종 로마산 선물과 줄줄이 붙은 호위병을 대동하고 온 유력자 자녀를 게르만 족이라면 너도나도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부족 내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강한 상류층에서부터 반로마 감정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10]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녀가 다니는 회사가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 회사가 복지나 위신을 세워준다면 더더욱.[11]

다만 이는 꼭 게르만족들에게만 한 정책은 아니고, 유대인이나, 켈트족, 아랍인 등의 여러 비(非) 라틴계, 비 그리스계 민족들에게 두루두루 실행된 정책이었으므로, 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이 정책의 혜택을 받고 출세하여 로마에 충성한 이민족 출신자에 대한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유대인 출신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의 피가 반쯤 섞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시대를 잘 타서 아예 황제로 즉위하기까지 한 아랍인 장군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 그 수가 매우 많다. 먼 훗날 서로마가 멸망한 후 동로마 시대에는 심지어 게르만족(고트족) 출신 로마 황제도 1명 나왔다. 테오도시우스 2세도 아버지는 로마인, 어머니는 프랑크인인 혼혈아였다.

용병이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건 로마 제국의 재정이 엄청나게 취약해져 로마군 중 부족 단위로 편제되어 싸우는 단위들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지, 게르만족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제국에 인력을 공급해주고 제국을 경모했던 게르만족이 아니었더라면, 제국의 서부 경계는 이미 3세기에 붕괴했을 것이 분명하다.[12]

즉, 처음에 게르만족이 로마에 들어왔을 때는 "내 밥그릇"이 아니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게르만족이 로마에 정착해 군역도 하고 농경도 하며 살아가는 사이 게르만=로마, 다시 말해 게르만족 입장에선 "내 밥그릇"이 된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내 것이 아니라면 빼앗으려 들거나 아니면 그게 망하거나 말거나 나한테 피해 없다면 내버려두고 말지만 그게 곧 내 것이 된다면 더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어 관리하려고 들게 된다. 이것과 마찬가지인 상식적 논리이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이제 자기와 동일시된 로마 제국을 즉, 자기 밥그릇을 지키지 않고 망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게르만족 입장에서 로마 제국이란 맨 처음 이주해 들어갈 당시 초창기에는 느그 나라남의 나라였겠지만 시간이 지나 이젠 지켜야 될 나의 조국, 내 나라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틴족으로 구성된 군단병들이 라틴족에서 게르만족으로 변화되면서 엄격한 기강과 국가에 충성을 보이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전통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냥 "틀린 얘기"다. 군단병의 구성 다수가 "이탈리아인"이 아니게 된 시기는 이미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부족 단위로 고용되는 게르만족이 무시할 수 없게 통제 불가능이 되는 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에서부터의 일이다.

후기 로마군의 전술 변화는 게르만족이 로마군의 주력취급을 받으면서 로마인들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보이기가 어려운 게 결코 아니라, 역으로 "로마군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게르만족이 보여줬고, 이에 대한 대응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게르만족이 야만적이고 무식해서가 아니다.

사치에 퇴폐에 빠져 서로마가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다가 무너졌다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오류로, 역사와는 무관한 얘기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의 영토인 유럽, 아프리카 각지에 게르만족들이 각자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대표적인 왕국들은 아래와 같다.
파일:Byzantine_476A.D.png
476년 말의 유럽
서로마 각지에 정착하고 나서도 6세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주화, 직함 등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제국의 권위를 일정 부분 빌렸었다. 이 정도가 가장 약했던, 즉 반대로 독립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반달 왕국이었는데, 동서로마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이겼으며(특히 468년의 소위 Cape Bon 전투에서 1천 척도 넘는 동서로마 합동 해군을 꺾었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또한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장 물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및 달마티아의 오도아케르 정권 및 동고트 왕국은 그 반대였는데, 구 서로마의 중심지라 현지의 구 서로마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더욱 강했고, 또한 게르만 국가들 중 가장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탓에 동로마 정부의 비위를 완전히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로마와의 결전이 임박했거나 혹은 이미 전쟁 중이었던 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차이가 확 드러난다. 반달의 겔리메르는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폐위된 힐데릭을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둘 다 거절하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항변하여 당신이나 나나 같은 군주라는 독자의식을 드러냈으나, 동고트의 토틸라와 테이아는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차마 당장 침략해온 적군의 수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할 수는 없으니) 명목상으로 제국의 산하 종족 혹은 세력으로서 조약/동맹(foedus)을 제국과 최초로 맺었던, 즉 동고트 왕국이 세워지던 493년 당시의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주화에 꼬박꼬박 넣어서 발행했다. [13]

특히, 이러한 왕국들 중 가장 성공한 것은 프랑크 왕국인데 짧은 이동거리와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는 클로비스가 다른 게르만 국가에 비해서 일찍부터 선수를 쳤던 로마 가톨릭 개종, 지정학적으로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직접적으로 간섭하거나 여차하면 침략하기 힘들 정도로 적당히 멀되[14] 브리튼 섬(로만 브리튼 이후·앵글로색슨 7왕국)처럼 너무 멀지는 않았던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3.1. 게르만 족의 정체성에 관한 보론

위에도 나와있듯, 로마제국에 복종했던 게르만 족은 자신을 로마인이라 여기며 로마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그러지 않고 로마의 땅을 갈라먹는 것에만 집중했던 부족들 역시 로마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 긴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게르만족이 과연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학계의 오랜 떡밥 중 하나이다.

과거 19세기, 범게르만주의가 절정에 이르렀을 시기에는 이 시기의 게르만족을 소위 'Volk'라는 하나의 혈연적, 집단적 유기체 비스무리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 시기 서진에 참여한 게르만족들이 모두 동일한 문화와 언어, 관습과 정체성을 공유했다는 이론이 유행했다. 이들에 따르면 이 시기 게르만족이 로마인에게서 정체성 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논거였으며, '게르만족의 (문화적, 언어적) 순수성'이라는 것에 거의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이 중에서도 언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었다. 이는 브리티니아와 북부 갈리아의 켈트족이 '브리티니아' 또는 '켈트'로써 단일한 정체성을 이루고 있었다는 당대 일부 영국 학계의 입장을 베낀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 역시 영국 민족주의에서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이어진 고고학적, 문헌학적 연구는 그들의 민족주의적 환상을 산산히 깨부쉈다. 이 새로운 학자들에 따르면 이시기 동서고트, 반달, 프랑크족과 같은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는 '우리와 같은 게르만족'이라는 관념이 별로 없었다. 이러한 이론은 곧 켈트족이나 이후 비슷한 시기에 서서히 서진을 시작할 슬라브족에게도 적용되는 사실로서[15], 우리가 편의상 부르는 '게르만'이나 '켈트', '슬라브'와 같은 정체성은 현대 학문의 기준으로는 성립하는 것일지언정, 당시 사람들에게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이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렇게 같은 민족집단끼리 부족을 나눠 서로 정체성을 가르는 이 시기의 관습은 국경 너머의 이민족들을 일종의 디바이드 앤 룰을 통해 지배했던 로마의 소위 정치질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위의 주장 또한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당연히 고대 게르만인들이 스스로를 게르만족으로 규정하며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 개념의 민족주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문헌적 기록과 연구로 볼때 게르만 부족들 간에 유대감이나 동질감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 또한 사실은 아니다. 부족이 달라도 말이 통하는 게르만족들 사이에 막연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부족들간에 끊임없는 전쟁으로 게르만족들 가운데서도 서로 적대감이 동시에 형성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기원전부터 중세 전기까지 게르만 부족들이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항쟁을 치루면서 서로에 대한 유대감과 적대감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 누적되어 왔다. 시대와 부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이러한 감정과 정서를 일반화하는 것은 어렵다. 킴브리 전쟁, 토이토부르크숲의 전투, 아드리아노플 전투, 훈족과의 항쟁, 게르만족의 대이동, 프랑스왕국과 주변 게르만 부족들간의 전투 등에서 여러 게르만 부족이 연합하면서도 동시에 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서로 격렬한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에도 훈족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게르만부족들이 연합하는 와중에도 연합한 부족간의 갈등으로 동맹이 깨져 재갈길을 가게 되는 경우도 수시로 있었다. 하지만 서로 갈등을 한다고 해서 서로 간의 동질의식이 없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물론 이것은 현대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삼국 시대에도 삼국이 서로 항쟁하였고 적대감이 형성되었지만, 삼국통일기에 나타난 삼한일통이라는 기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삼국 백성들 사이에 중국이나 왜 등 타민족에 대한 동질적 의식이 분명히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후 학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집단이라고 수용하고 정체성을 결정지었던 기준이 혈통적, 생물학적 유사성이나 문화적 유사성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즉. 같은 게르만족보다는 이민족일지언정 자신에게 잘 대해주고 땅도 주고 자식 교육도 시켜주는 로마가 당대 게르만 부족민들에게는 훨씬 친근하고 충성을 느끼는 상대였다.

3.2. 관련 인물

4. 중세(2차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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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인의 정착

8세기와 11세기 사이에는 북유럽에서 온 게르만족인 노르드인(바이킹)들이 전 유럽을 휘저었다. 게르만족은 원래 북유럽에서 왔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동족간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미 유럽 각지에 자리잡고 로마화,기독교화된 게르만족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북유럽의 이교도 게르만족은 애당초 동질성이 거의 없어진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절부터 민족적 동질감 따위 없었는데 하물며 수백년 지나 로마 혈통과 문화가 섞이고 기독교화된 사람들 입장에서 노르드인은 그저 흉표한 해적,야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선 바이킹들이 지배시기인 데인로(Danelaw)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에는 바이킹 지배가 두 번 있었는데, 9세기에는 웨식스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이교도 대군세로 바이킹에게 정복당하고, 11세기에는 크누트 대왕이 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덴마크, 노르웨이와 합하여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을 세웠다. 이 시기 영어는 같은 게르만계 언어라는 동질성 때문에 북게르만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북게르만계 어휘가 영어에 남아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롤로가 북쪽 해안에 정착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이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프랑스의 문화를 받아들여 프랑스화하였고, 노르만족이라 불렸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는데, 노르만족까지 바이킹으로 친다면 잉글랜드는 총 3번에 걸쳐 바이킹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노르만 족 정복자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더 나아가 노르만 족 기사들은 십자군 전쟁안티오키아 공국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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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기아인이 세운 루스 카간국

한편 동쪽으로 간 바이킹들은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하였고, 정복자 류리크의 후손들은 키예프 루스를 세웠다. 바이킹들은 더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노르망디 공국잉글랜드 정복 이후에는 앵글로색슨족 출신의 바랑인 친위대원도 늘어났다.

5. 관련 문서


[1] 다만 국내에서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고대 로마사를 다룬 베스트셀러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라우시오 전투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가 출간되기 전의 국내에서는 로마사나 게르만족 역사를 비롯한 고대 서양사에 대한 지식 자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었다.[2] 왜 이들이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았느냐면,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로마에 대한 정복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한 곳에서의 정착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게르만족은 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이었고, 따라서 유랑 생활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선주민과의 무력 충돌이 있거나 말거나 정착지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전쟁은 부담되는 일이었다. 동북아시아의 사례이지만 청나라만주족도 고대 게르만족과 비슷하게 농경민 성향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중원 정복 또한 어찌보면 기존의 척박한 정착지를 떠나 기름진 새 정착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3] 알레마니족은 프랑스어에서 독일을 칭하는 알마뉴의 어원이 되었다.[4]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지하게 부연하자면, 유전이나 섭식상의 이유로 2차 성징이 빨리 나오면 성장판이 일찍 닫히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정조를 지키는 것이 고귀하다는 인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찾기 어렵지 않다.[5] 즉 세습이 어느 정도 인정되되, 절대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면에서 로마 제국과 거의 같다.[6] 예나 지금이나, 게르만족이란 인도유럽어족게르만어파 계열 언어를 쓰는 유럽계 민족들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다.[7] 이런 일은 꼭 전근대 시대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몽골도 그랬다. 칭기즈 칸이 어릴적이 그를 괴롭혔던 것은 금나라 같은 완전히 다른 나라나 타타르족 같은 적대 부족도 아닌 타이치우드 씨족 같은 가까운 씨족 집단이었다.[8] 물론 이 때 로마의 군사기술, 정치조직 등을 배워서 돌아가고 나서는 그것을 게르만 사회에 접목시켰고, 이게 세대마다 반복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게르만 사회가 로마 사회를 점점 따라잡게 되었다. 이 때는 현대의 무어의 법칙처럼 로마가 기술발전에 박차를 가해서 더 기술력 차이를 벌릴 수도 없는 전근대였다.[9] 동고트 왕국을 세운 테오도리크 대왕 역시도 이런 식으로 자랐다.[10] 동맹시 전쟁 직후 이탈리아 자체가 로마를 수도로 하여 해외 식민지를 거느리는 '본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기 이전, 라틴/이탈리아 동맹시들에서도 이와 같은 과정으로 상류층들은 로마에 포섭되어 친로마 성향이었던 반면, 로마가 각지에서 벌이고 다니는 전쟁에 그저 끌려다니던(작전권, 군령권, 외교관계 등은 동맹시에 전혀 없었고 로마가 독점했다) 일반인들은 반로마 성향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11] 물론 현대에도 설령 복지와 급여가 높은 대기업이라한들 사원 집단과 갈등이 없는 건 불가능한 이상, 소위 '대기업 로마'와 '게르만족'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었다.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 상층부에게 혜택을 베푸는 게 필요한 건 인정하였으나 가급적 비용을 줄이는 대신 일은 많이 시키고 싶어했고, 게르만족은 물론 보조금은 많이 받으면서 일은 적게 하고 싶어했다. 그래도 여기까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대립이었으나, 훈족과 아틸라가 나타나자 얘기가 약간 달라진다. 아틸라의 훈족은 게르만족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상궤를 넘어서는 인력 및 급여 착취를 저지르는 집단으로서, 훈족은 약탈물 배분에서도 대놓고 상당한 차별과 착취를 저질렀던 걸로 고고학적으로 드러난다. 즉 일만 많이 시키고 성과급은 사장 친인척한테만 몰아주는, 요즘 말로 하면 일명 X소 기업이었는데 이런 걸 당하니 많은 약탈품을 약속 받고 훈족 집단 아래 들어간 게르만족은 대단한 불만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로마는 조약으로 정해진 보조금은 해마다 약속을 어기지 않고 꼬박꼬박 납입했으며 성과가 있으면 반드시 보상했는데 아틸라는 이런걸 하지 않고 겉으로만 공정한 척 하였으나, 실제로는 약탈품은 가급적 자기가 다 먹으려고 들면서 강압적으로 부려먹기만 했던 것이었다. 게르만족이 오히려 아틸라 및 아틸라 시대 이후에 로마 제국측에 협조적이 되었던 건 이런 이유도 컸다. 겪어보니 봉급 체불에 성과급 착취, 이유 없는 구타 등이 만연한 신흥X소보다 그나마 갑질은 당할망정 대기업이 나았던 것.[12] 애초에 게르만족이 없으면 제국의 서부 경계가 위험할 이유 따윈 없었을 거라는 얘긴 근거가 없다. 모든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부족들도 많았다. 후기에 게르만족들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자국 내 게르만족의 공이 매우 컸다.[13] 움베르토 에코 편저 중세 I의 60p에는 ''왕국들'은 곧 자국의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지만 황제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제국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왕의 이름을 동전에 넣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현재의 제국 통치자를 과거의 통치자로, 예를 들어 최초로 '포이두스'(foedus)를 맺었던 황제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테이아가[16]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대체한 솔리두스 금화가 바로 그러하다.'[14] 실제로 동로마에서 가깝던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과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멸망했다.[15] 이시기 켈트족의 경우 주로 앵글로색슨 침략의 주 피해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단일한 켈트 정체성이 존재했을 것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같은 켈트족이라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소위 '로만 브리튼'인들은 같은 켈트족이지만 훨씬 호전적이고 틈만 나면 약탈을 일삼는 픽트족을 야만족이라 부르며 증오했다. 픽트족이 스스로를 바다를 건너서 온 부족(스키타이)이라며 자랑스러워했던 건 자기네 역사에 대한 자부심의 표본이겠지만, 브리튼인들이 픽트족을 스키타이의 후예로 여겼던 건 경멸과 혐오의 표현이었다. 또 4세기 후반부터 아일랜드(히베르니아)의 게일족과 스코틀랜드의 픽트족이 웨일스 해안가를 지속적으로 침략해 정착해댔는데, 이때문에 해안과 가까운 서부 웨일스는 이때부터 로마의 지배에서 반쯤 벗어나 있었으며, 웨일스의 브리튼인들과 잉글랜드에서 앵글로색슨족과 치고받는 브리튼인도 딱히 사이가 좋다거나 같은 형제로 여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브리튼인의 직계 후손인 콘월인과, 지금은 스코틀랜드에 동화되어 사라졌으나 과거 컴브리아 지방에 존재했던 컴브리아인은 웨일스인과 대비되는 독자적인 전설과 전승을 가지고 있고, 이는 브리튼인 일부가 바다를 건너 정착한 브르타뉴 지방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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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모두 이 전쟁기의 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