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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関, ruby=かん)][ruby(釜, ruby=ふ)][ruby(連, ruby=れん)][ruby(絡, ruby=らく)][ruby(船, ruby=せん)] | Kanfu Train Ferry |
関釜連絡船 (釜關連絡船) Kanfu Train Ferry / 부관연락선 (관부연락선[1]) (폐지) | |
객선 도쿠주마루(徳寿丸) | |
노선 정보 | |
분류 | 철도 연락선 |
기점 | 시모노세키역 |
종점 | 부산잔교역 |
개업일 | 1905년 9월 11일 |
폐업일 | 1945년 6월 |
소유자 | 산요기선(山陽汽船)→철도원(鉄道院) |
운영자 | |
노선 제원 | |
항로거리 | 240.0km |
1930년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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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5년 9월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가 개설한 조선 부산항과 일본 시모노세키항 연결 해운 노선. 부관/관부는 각각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경부선 부산잔교역과 산요 본선 시모노세키역을 연결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연락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일본 입장에서 경부선은 산요 본선과 도카이도 본선 연장이었고, 따라서 경성역 방면은 하행이었다. 일본 수도였던 도쿄 방면이 상행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연락선에서 내려 열차를 갈아탔는데 경성역행이 하행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에 괴리감을 느낀 증언이 남아 있다.
조선과 일본의 철도 궤간이 표준궤와 협궤로 달랐기 때문에 선박 내에 철도차량을 적재할 수 있는 별도의 궤도가 없이 환적하는 방식이었다.
1945년 6월 공습과 어뢰/기뢰 공격이 잦아지자 정기 항로로서는 휴항하였고, 일제가 패망한 후 몇년간 비정기적으로 운행하며 귀환동포를 조선으로, 히키아게샤를 일본열도로 나르는 역할을 했다.[2] 이것도 돌아올 사람이 대충 돌아오고 갈 사람은 다 간 1940년대 후반이 되면 사실상 이것으로 역사는 끝난다.
두 도시를 잇는 노선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인 1970년 6월부터 부관훼리/관부페리로 부산 ~ 시모노세키 항로가 복구되어 지금도 운항되고 있다. 부관훼리는 일반 카 페리 노선 운항 중이므로 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부관연락선이 그 전신격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적/물적 수송 대동맥 중 하나로 식민지 시기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해운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운항 목적
일제의 조선 침탈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이 항로는 일본 ~ 조선 ~ 만주로 이어지는 대륙 침탈 기지 중계 노선으로서 국가 정책적/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노선이었다.통계에 의하면[3] 노선이 개설된 1905년 총 수송객 수가 39,956명인데 이것이 점차 늘어나 1910년대 말 40만명을 넘고, 1930년대 후반 100만명을 넘어서며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징용/징병하는 1940년대가 되면서 200만, 많게는 300만 가까운 인원을 수송하게 된다. 40년간 약 3천만 달하는 인원을 수송하는 명실상부한 조선과 일본 간 대동맥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다른 해운노선도 많았지만, 통계자료 차이는 있으나 조선과 일본 간을 도항한 약 8,90% 인원이 왕복했다. 물론 물류 수송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한 노선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인 경우는 유학생, 사업가, 노동자 등이었으며 노동자인 경우 값싸고 힘이 세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았다. 전시 체제가 가동되던 1930년대 말~ 패망시기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인 경우는 대부분 이주 정책으로 온 농민들이 많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싼 값으로 토지를 불하받아 자영농이 되었다.
자매품으로 하코다테 본선 하코다테역과 도호쿠 본선 아오모리역을 이었던 세이칸 연락선, 소야 본선 왓카나이역과 가라후토 동선 오토마리역을 이었던 치하쿠 연락선이 있었다. 치하쿠 연락선은 부관연락선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폐지, 세이칸 연락선은 현재 세이칸 터널로 대체되었다.
3. 운항 선박[4]
이 외에도 부관 항로에 일시적으로 투입되었던 선박은 많으나 임시선이 아닌 정기선으로 장기취항한 선박만 목록에 넣었다. 또 운항 기간은 부관 항로만의 운항기간으로 부관항로에서 퇴역한 이후에 일본군에 징발되거나, 다른 항로에 투입되거나 한 선박도 많다. 예를 들면 게이후쿠마루(경복환)는 토야마루 침몰사고 이후 세이칸 항로의 연락선으로 투입되었고,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는 하코다테에서 선상 호텔로 사용되다가 해체되었다.선명 | 운항기간 | 총 톤수 | 길이(m) | 정원(명) | 적재량(t) | 속도(Knot) | 비고 |
이키마루(壹岐丸) | 1905.9 ~ 1931.5 | 1,680 | 79.4 | 337 | 300 | 15 | 최초 취항 선박 |
쓰시마마루(對馬丸) | 1905.11 ~ 1925.12 | 1,679 | 82.5 | 337 | 300 | 15 | 1925년 12월 17일 좌초 사고로 침몰(사상자는 없음) |
고마마루(高麗丸) | 1913.1 ~ 1932.10 | 3,029 | 102 | 603 | 930 | 16 | |
시라기마루(新羅丸) | 1913.4 ~ 1945.5 | 3,024 | 98.9 | 603 | 930 | 16 | 1945년 5월 25일 관문해협상에서 기뢰에 피침, 침몰. |
게이후쿠마루(景福丸) | 1922.5 ~ 1945.6 | 3,620 | 114.3 | 949 | 430 | 20 | |
도쿠주마루(徳壽丸) | 1922.11 ~ 1945.6 | 3,620 | 114.3 | 945 | 430 | 20 | |
쇼케이마루(昌慶丸) | 1923.3 ~ 1945.6 | 3,620 | 114.3 | 945 | 430 | 20 | 창경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창경호 침몰 사고와는 무관하다. |
콘고마루(金剛丸) | 1931.11 ~ 1945.5 | 7,082 | 134.1 | 1,746 | 3,170 | 23.2 | 1945년 5월 27일 하카타 항에서 기뢰에 피침, 침몰(사망자 1명, 부상자 4명) |
코안마루(興安丸) | 1937.1 ~ 1945.6 | 7,082 | 134.1 | 1,746 | 3,170 | 23.2 | 1945년 4월 1일 기뢰에 피침, 항행불능 |
이키마루(壹岐丸) | 1940.11 ~ 1945.6 | 3,519 | 103.8 | - | 4,617 | 17.2 | 화물선. 앞의 이키마루와는 다른 배. 1945년 4월 5일 기뢰에 피침, 항행불능 |
쓰시마마루(對馬丸) | 1941.4 ~ 1945.6 | 3,516 | 103.8 | - | 4,617 | 17.2 | 화물선. 앞의 쓰시마마루와는 다른 배. 1945년 8월 13일 청진항에서 소련 전투기/폭격기의 공습으로 격침, 침몰. |
텐잔마루(天山丸) | 1942.9 ~ 1945.6 | 7,907 | 143.4 | 2,048 | 2,223 | 23.3 | 1945년 7월 28일 미군기의 로켓 공격으로 침몰. |
콘론마루(崑崙丸) | 1943.4 ~ 1943.10 | 7,908 | 143.4 | 2,050 | 2,223 | 23.4 | 1943년 10월 5일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 28번함 SS-238 와후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 승무원과 승객 중 중의원 2명을 포함한 585명이 사망했다. 와후는 이후 일본 상선 2척을 더 격침시킨 뒤 홋카이도의 소야 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일본군의 감시망에 걸려 폭뢰공격으로 격침당했다. |
배 이름을 보면 묘한 특징이 있는데 아직 정식으로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 아닌 1900년대에는 이키, 쓰시마 섬 같은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섬들이 붙는다. 그러다가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가 본격화된 1910~1930년 사이에 취항한 선박에는 한반도 내의 왕조 이름(신라, 고려), 궁궐 이름인 경복, 덕수, 창경(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산 이름(금강산)으로 붙여지고,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이후에는 만주, 중국의 지명인 흥안, 천산, 곤륜 (다싱안링산맥, 톈산 산맥, 쿤룬 산맥)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일본열도 → 조선반도 → 만주를 포함한 대륙 으로 점차 확장되는 일제의 영역 확장 의지가 선박명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려, 신라와 같은 한반도의 역사적 국가들의 국명과, 조선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경복궁 등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궁명을, 선박 운항의 명운이 걸려있는(항해사들이 흔히 의미부여를 깊게 하는) 선박명에 부여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조선의 색깔을 지우고 일본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일제의 일방적인 결정이라고 보기에는 일관성이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부산세관[현재] 근무자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연락선의 이름은 주로 일제가 아닌 각 선박을 운항하는 해운 회사들이 자율적으로 주도하여 결정한 것이며, 그 중에는 해운업에 종사한 조선인도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선박명의 유래를 고려하면 일본 해운 회사 소속의 조선인이 선박명 결정에 참여했다는 해석은 개연적이며, 부산세관 관계자의 기록과 증언에서 이 해석이 뒷받침된다.
4. 운임 및 이용
운임은 1905년 노선 개설 당시에 1등석 12엔, 2등석 7엔, 3등석 3엔 50센이었다. 이후 1942년 조정된 운임은 1등석 20엔, 2등석 10엔, 3등석 5엔.일본인들의 조선 도항에는 큰 제한이 없었으나 조선인들의 내지 도항에는 여러 차례 제한이 있었다. 일본 도항을 위해서는 도항증명서를 얻어야 했는데, 이런 도항 허가제는 일본 본토의 정치/경제 사정에 따라 여러 번 폐지되었다가 다시 생기기를 반복했다. 특히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부터 조선인, 대만인도 일단 주소지가 '내지'면 투표권을 줬기 때문에 일본 도항에 더 민감해졌다. 최종적으로 내지 도항제한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45년 3월에 이르러서였는데 이것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본 본토 내의 노동력이 부족해 더 이상 도항 제한을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언제까지나 조선인의 도항 난이도는 일제의 의도대로 흘러간 것이다.
5. 기타
- 한기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여가수였던 윤심덕이 1926년 8월 4일 이 노선의 도쿠주마루를 타고 가던 중 새벽 4시 대마도 근해를 지나던 중 애인이었던 유부남 김우진과 함께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으며, 1991년 '사의 찬미'라는 제목[6]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탔던 배도 이 부관연락선이다.
- 현재는 '칸푸훼리(関釜フェリー)'사에서 운영하는 하마유우(はまゆう)호와 부관훼리(주)에서 운항하는 성희호가 부산-시모노세키간을 운행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부관훼리 참조.
한편 1988년부터 시행했던 코레일과 JR그룹 6개사가 연계하여 판매하는 한일공동승차권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KTX(서울 - 부산) ↔ 부관페리(부산 - 시모노세키) ↔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각지로 철도가 연계되는 구조. 하지만 항공편에 비해 시간대비 가격의 메리트가 떨어지는데다 시모노세키가 후쿠오카, 오사카, 도쿄에 비해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이용률은 저조했고 결국 2015년 6월 30일자로 폐지되었다.
비슷하게 후쿠오카시-부산광역시 국제여객터미널 사이에서 카페리(뉴카멜리아)와 쾌속선(퀸비틀)이 운행되고 있다. 일본 불매운동, 코로나19 시기에 이용객이 극감하는 여파를 맞긴 했으나 양 도시 모두 꽤 규모가 있는 대도시인지라 운항은 하고 있다. 그러나 퀸비틀은 잦은 균열과 누수 문제가 있었으며, 운항사 JR 큐슈 고속선 측이 2024년 2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이 사실을 은폐한 채 운항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2024년 8월부터 무기한 운휴중이다. JR 큐슈 고속선 침수 은폐 사건 문서 참조.
- 이 노선을 배경으로 한 연극 관부연락선(연극)이 있다.
[1] 일본어로는 '칸후렌라쿠센'(かんふれんらくせん)[2] 정식 부관 노선만 다닌 것은 아니고 많은 사설노선, 밀항노선이 있었다.[3] P.31『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2007[4] P.35『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2007.[현재]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인근[6] 윤심덕이 부른 노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