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1b5b40><tablebgcolor=#1b5b40> | 김종필 관련 문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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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내 박영옥 · 형 김종락 · 형 김종익 | ||
역대 선거 | 제13대 대통령 선거 | ||
사건사고 | 사건사고 및 논란 · 5.16 군사정변 · 4대 의혹 사건 | ||
기타 | 중앙정보부 · 3당 합당 · DJP연합 · 삼김시대 · 신민주공화당 · 자유민주연합 · 청구동계 · 몽니 | }}}}}}}}} |
1. 개요
김종필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다. 정계에 몸담은 기간만 40년이 넘은지라 민주당계 정당, 보수정당을 가리지 않고 여러 정계인사들과 인연이 있다. 현재 보수여당인 국민의힘에도 JP와 직/간접적인 정치적 인맥이 있는 인사들이 많고, 더불어민주당에도 DJP연합과 국민의 정부 내각에서 일했던 인사들이 많다. 삼김이 2000년대 전반기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던 만큼, 현재의 한국 정치판 역시 이들의 영향력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2. 목록
2.1. 청구동계
김종필의 정치계파를 일컫는 말로 유래는 김종필의 자택이 서울특별시 중구 청구동에 있어서 붙어졌다. 3김의 계파 중 가장 세가 약하고 상징성이 떨어지는데, 애초에 YS와 DJ의 계파가 각각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불린 이유는 군사정권 시절 이들의 정치적 활동이 그들의 자택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1] 그러나 JP는 박정희 정부 시절 정권의 2인자로 중앙정치에서 자유롭게 활동했고, 신군부 집권 이후에도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 정치와는 발을 때고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상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계파의 형성은 민주공화당 총재였던 김종필의 당내 계파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정권의 실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내에서 JP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한창 60~70년대에는 민주공화당 내 정치세력이 친김종필 vs 반김종필로 갈릴 정도로 세가 커졌고 박정희 역시 JP의 권력을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뒤이어 집권한 신군부에 의해 민주공화당이 강제 해산되면서 김종필계는 와해되었다. 나아가 JP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고, 이 후 미국으로 떠나 6~7년간 칩거하며 국내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김종필이 없는 동안 남은 민주공화계 의원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활동했고, 제12대 총선에서 25석을 얻으며 계파의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실현되고, 이에 맞춰 귀국한 김종필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한국국민당 세력도 JP가 창당한 신민주공화당으로 합류했고 이 시기부터 공화계라는 기존 민정계와 구별된 계파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JP의 공화계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지역 기반을 다져나갔고, 이 결과 제13대 대선에서는 지역별로 정당 지지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주의 색깔을 띄었다. 민정계는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TK), 통일민주당은 경상남도와 부산광역시(PK), 평화민주당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전라북도(호남), JP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은 충청도에서 1위를 거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공화계는 민정계, 민주계와 손잡고 민주자유당 내 계파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JP는 YS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공화계 인사들 역시 김영삼을 지지했지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YS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 JP는 결국 3년 뒤인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기에 이른다.
1995년 JP는 민자당을 탈당한 공화계 의원들과 일부 민정계 의원들과 함께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 시기부터 현재의 명칭인 청구동계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민주공화당 색깔이 많이 옅어졌지만, 지역색은 더욱 뚜렷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52석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1997년 대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연정을 맺고 DJP연합을 결성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JP는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며 연립정권의 한 축에 서게 되지만, 집권 중반기부터 내각제 개헌 등을 문제로 DJ와 갈등을 빚다 결국 4년만인 2001년 연정을 파기하였다. 세가 급격히 약해진 자민련과 청구동계는 2000년 총선에서 의석이 17석으로 줄어버렸고,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충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참패했으며 16대 대선에서는 이전의 선거와 다르게 캐스팅보트 역할도 하지 못하며 점차 쇠락해갔다.[2]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련이 참패하며 청구동계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수장인 JP가 정계를 은퇴했고, 남은 인사들은 2년 뒤 자민련 해체 과정에서 국민중심당과 한나라당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이 후 자유선진당과 선진통일당으로 꾸준히 독자계파를 이어오던 청구동계는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과 합당하며 완전 소멸되고 만다. 이러한 계파의 약한 파워 때문에 민주당계 정당과 보수정당의 양대 뿌리가 된 양김의 계파에 비해 JP의 계파는 정치사에서 그리 부각되지 않고 있다.[3]
청구동계 인사로는 정진석, 이완구, 심대평, 정우택, 김학원, 함석재 등이 있다.
2.2. 박정희
이 후 1961년, JP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정변의 실행을 계획했고,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4]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박정희는 실권을 장악했고, 김종필은 정권의 2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5.16이 일어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JP는 박정희 정부에서 초대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를 지냈고 민주공화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그러나 공화당 내 친김종필 세력의 위세가 커지면서 박정희의 견제를 받게 되고, 3선 개헌 과정에서는 박정희에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0월 유신 이후에도 국무총리 자리를 유지하며 버텼지만, 결국 공화당 내 세력견제를 못 이기고 1975년 국무총리를 사직하게 된다.[5]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 민주공화당 총재 자리에 올랐지만, 뒤이어 12.12 군사반란이 터지고 공화당이 해체되면서 정계를 잠시 은퇴하게 되었다.
이렇듯 박정희 정부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박정희와의 사이는 다소 미묘하다. 특히 3선 개헌과 10월 유신 이후에는 박정희와 정치적으로 한 배에 탔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후 JP는 여러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양면적인 평을 더러 내린 바 있다.
2.3. 김대중
박정희 정부 시절만 해도 두 사람은 정권의 실세와 야당 인사로서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DJ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과 납치까지 당했고 이를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화 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JP가 국무총리를 하고 있었는데, DJ가 풀려난 이후 JP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일본 총리와 회담을 하며 뒷수습을 했다.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이 찾아오며 삼김으로 묶이게 되었고, 정치적인 단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신군부가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면서 DJ는 사형선고를 받고 JP는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JP와 DJ 모두 복권되었고 이듬 해 제13대 국회부터 의회는 이른바 1노 3김 체제로 움직였다. 그러던 1990년, JP와 YS가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하면서 같은 편이 되고 14대 대선 당시 JP는 YS를 적극적으로 푸쉬하여 DJ를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JP는 YS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며 결국 YS과 결별하게 된다.
JP가 자민련을 창당했던 1995년,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복귀했다. 이듬 해 총선에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여당인 신한국당에 저항하는 야당으로 공조관계를 시작했는데, YS가 자민련에서 의원들을 신한국당으로 빼가자 DJ와 JP는 함께 규탄집회를 열기도 했다. 같은 해 하반기 재보궐선거부터 정책공조와 단일화 후보를 출마시키며 점차 정치적으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김종필과 함께 DJP연합을 결성했다. JP는 내각제 개헌과 박정희기념관 설립 등 2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DJ와의 연립정부 구성을 받아들였다.[6] 김대중은 본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회창을 1.5%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며 4수 도전 끝에 꿈을 이루게 된다. JP가 단일화에 참여하면서 김대중은 충청권과 TK에서 어느 정도 고른 득표를 기록할 수 있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JP는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2년여간 국정을 수행했다. 그러나 집권 2년차인 1999년부터 내각제 개헌 등을 이유로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DJP공조를 유지하기 위해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은 자민련으로 보내며 교섭단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여기에 민주국민당까지 참여시켰다. 그렇게 삐걱거리던 DJP연합은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동의안에 자민련이 가담하면서 공식적으로 붕괴되었고 DJ와 JP는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7] 다만 공조가 파기된 이후에도 JP는 DJ에 대해 그리 공격적인 비판은 하지 않았다.[8]
김종필은 김대중에 대해 대부분 호평을 하였고, 역사와 국가관에 있어 선을 잘 지키는 노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또한 JP는 DJP공조 당시 DJ가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에 대해 연신 부정하며 "그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용공분자도 아니다"라고 답했다.[9] 2009년 DJ의 서거 당시 직접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2.4. 김영삼
5.16 군사정변이 터진 뒤 JP는 YS를 찾아가 민주공화당에 입당할 것을 권했다. YS는 자유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기를 들고 민주당으로 이적한 상태였다. 그러나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라며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고, 단호한 태도를 본 JP는 YS를 공화당으로 영입하는 계획을 포기했다.
박정희 정부가 본격적으로 들어서고 난 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하였다. YS는 DJ와 함께 야당인사로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고, 질산 테러를 당하기도 하며 여러번 생명의 위협을 겪었다. 1975년 신민당 총재 자리에 오른 김영삼은 결국 1979년 국회로부터 제명을 당했고, 이에 대한 여파로 청와대 내에서 충돌이 벌어지며 결국 10.26 사태가 터지는데 간접적으로 일조하게 된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 YS와 JP는 삼김으로 묶여 함께 정치적인 활동을 도모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JP는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YS는 가택연금을 당한다. 이 무렵 YS는 JP의 자택에 사람을 보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가입을 제안했다. YS는 삼김이 함께 신군부 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JP는 민추협 가입 제안을 거절했는데, 훗날 JP가 회고록에서 밝히길 자신이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는데 같이 일했던 신군부 인사들을 욕하는 건 남의 일 보듯 욕할 수 없는 입장이라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JP는 YS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독자출마를 택했다.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 이후 YS와 JP는 정책적인 충돌을 빚으며 갈등을 일으켰다. 김종필은 문민정부가 추진했던 조선총독부 철거, 전두환/노태우 심판 등에 반대했고 민자당 내 민주계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특히 YS가 대선 당시 자신에게 약속한 내각제 개헌을 지키지 않자 두 사람의 갈등은 더욱 극에 달했다. 결국 1995년 연초 회동에서 YS가 JP에게 민자당 대표직을 사퇴할 것을 우회적으로 제안했고, JP는 YS에게 당을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힌 뒤 곧바로 민자당을 탈당하며 YS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YS는 훗날 인터뷰에서 JP와 결별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10]
그 후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은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손잡고 문민정부를 매섭게 공격하였고,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과 연합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렇게 데면데면했던 둘의 사이는 2000년대에 들어 회복되었는데, YS와 JP는 말년까지 함께 골프 여행을 다니는 등 친분을 유지했다. 2006년에는 DJ와 노무현의 회동에 대응해 둘이 호텔에서 단독 회동을 가지고 이를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YS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악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부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JP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며 말년까지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200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97년 대선 당시 JP가 당선되기를 바랬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JP가 당선됐으면 DJ와 이회창이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본인은 JP를 DJ보다 훨씬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한다고. #
2015년 김영삼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종필이 직접 조문을 왔다.. 방명록에 남긴 글귀는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 가슴에 기억될 것.
2.5. 전두환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의 총재가 되며 차기 대권의 꿈을 꾸고 있었다.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JP를 견재하던 세력이 와해됐기 때문에, 김종필은 쉽게 공화당을 접수하고 당내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민주공화당은 강제해산되고 JP는 중앙정치에서 축출되었다. JP는 DJ, YS와 손잡고 서울의 봄을 통해 신군부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했지만 신군부는 5.17 내란으로 삼김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모두 체포하였다. DJ는 사형선고, YS는 가택연금을 시켰으며 JP는 전두환이 출동시킨 수사관들에 의해 서빙고 분실로 압송되어 40여일동안 감금생활을 당했다.
JP는 풀려났지만 정치활동을 금지당했고, 이 후 미국으로 망명해 7년여간 외유를 했다. 전두환은 집권 이후 박정희 정부를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세력으로 규정하고 박정희의 추도식을 금지시키는 등 구 공화계 인사들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JP는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으며,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에나 귀국해 정계에 복귀했다. 다만 5공 시절 그닥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JP의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도 꽤나 많다. 양김과 5공의 갈등이 민주주의 vs 군부독재의 개념이었다면, JP와 전두환은 군부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었던 셈이다.
JP는 1988년 양김과 함께 5공 청문회를 주도해 전두환을 법정 증언대에 세웠고, 1995년 문민정부의 전노 구속 당시에도 표면적으로만 반대 의사를 표시했을 뿐 적극적으로 반대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이 후에도 말년까지 전두환과는 떨떠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200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27주기 추모식 때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 박정희의 추도식을 마구 막았다. 박정희의 은혜를 얻고 출세한 사람이 그런 짓을 하고도 오늘 이 자리에 안 보인다"며 디스하기도 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노태우의 계파였던 민정계 중 일부 인사들은 1995년 자유민주연합 창당 당시 JP 세력에 합류하기도 했다. 두 세력 모두 YS와 민주계의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
2.6. 노무현
두 사람의 정치적 노선은 극과 극이었고, 특히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청산을 외치는 노무현은 김종필과 연합할래야 할 수 없는 사이였다. JP는 노무현에 대해 양면적인 평가를 한 적이 있는데, 노무현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간미가 있다고 말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중립을 지켜 음지에서 노무현을 도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1] JP는 노무현이 너무 다혈질이고 순진한 탓에 정치적인 정적을 많이 만들었다며 비평했고 참여정부의 정책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반대 입장이었다.
다만 JP는 노무현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비판은 거의 하지 않았고, 자민련 총재 시절 야3당 대화가 있을 때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노무현에게 열린우리당에 빨리 입당하라고 권유한 것도 JP라고 한다. # 2004년 탄핵 소추안이 발의됐을 때는 JP 본인은 탄핵에 반대하며 표결에 불참했지만, 자민련 의원들이 찬성 투표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고 결국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탄핵 역풍을 맞아 자민련은 결국 4석으로 몰락하고 JP 본인도 10선에 실패하며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다.
2.7. 이회창
국민의 정부 시절 한나라당은 자민련에서 끊임없이 의원을 빼갔고, 김종필의 국무총리 인준안을 6개월 넘게 지연시켰다. 특히 2000년 총선 정국에서 두 사람의 갈등은 극에 달했는데, 17석을 얻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데 실패한 JP가 이회창과의 회동에서 교섭단체 구성 조건을 완화할 수 있도록 국회법을 개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JP의 주장에 따르면 회동에서 이회창은 JP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막상 기자들과의 브리핑에서는 그런 얘기 자체를 안 했다며 불쾌해했고 이에 JP가 이회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응수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시즌이 시작되고, 한나라당은 JP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용썼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의원 빼가기와 국무총리 시절 인준안 거부, 2000년 총선에서의 갈등으로 한나라당과 반목하고 있었던 JP는 끝내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고 중립을 지켰다.[12] 더군다나 JP-이회창 공조가 결렬되면서 자민련 의원들 일부가 한나라당으로 이적했기 때문에, 이 때까지도 의원 빼가기는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JP가 이회창에게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은 되지 못했다. 결국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패배했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JP는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이 갑작스럽게 출마를 선언하자 "인간이 잘못됐다"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8년 이회창은 정계복귀 이후 JP의 구 충청권 세력 일부를 흡수하여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게 된다. 구 자민련 인사들 상당수가 이회창 세력에 참여하였고 청구동계의 대표 정치인이었던 심대평이 이회창과 함께 창당을 주도했다.
2.8. 이명박
2.9. 박근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정치적인 대립을 하기 시작한 건 1997년 박근혜가 정계에 입문하면서부터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을 지지했는데, 김종필은 DJP연합으로 김대중 진영에 있었고 박근혜의 동생인 박지만 역시 김대중을 지지하였다.[15] 대선 이듬 해인 1998년 박근혜는 제15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고, JP의 총리 재직 시절에는 대정부질문에서 대립하기도 했다.
이 후에도 두 사람의 정치적인 관계는 계속 삐걱거렸다. 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제3지대에서 박근혜, 정몽준, 이한동 등의 정치적 연합 관계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JP-박근혜 연대는 거론도 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연대하는 일은 없었다. 이 후 박근혜가 본격적으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난 2004년, JP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3년 뒤인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도 김종필은 이명박을 지지하며 박근혜와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는 박근혜를 지지해주긴 했지만 박근혜 정부 기간동안 뚜렷한 지지 의사를 보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생전 마지막 만남은 김종필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의 빈소를 박근혜가 조문했을 때였다.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김종필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 이 인터뷰에 따르면 JP와 박근혜는 오랫동안 서로 연락도 안 주고 받는 사이라고 하며, 박근혜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어도 자기에게 찾아오진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을 형부라고 부를 정도로 정신이 안 정돈됐다는 디스는 덤.[16] 허나 이 인터뷰가 나간 뒤 김종필은 시사저널이 왜곡 보도를 했다며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했다. # 진실은 저 너머에.
2018년 JP가 타계했을 때 박근혜는 수감되어 있었는데, 빈소에 조화도 보내지 않으며 두 사람의 인연은 애매한 상태로 마감하게 되었다.
2.10. 문재인
2016년 11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대권 주자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문재인. 문자 그대로 문제야" 라며 비꼬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듬 해인 2017년 4월 홍준표를 예방했는데, 이 자리에서 "나야 뭐 마음껏 돕지. (중략) 다른 사람은 당최 어림없어. 문재인 같은 그런 얼굴이 대통령 될 수가 없는데... 세상이 우스워졌어." 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막판에는 "문재인이가 얼마 전에 한참 으스대고 있을 때 한 소리가 있어. 당선되면 김정은이 만나러 간다고. 이런 놈을 뭐를 보고선 지지를 하느냐 말이야. 김정은이가 지 할아버지라도 되나? 빌어먹을 자식!" 이라며 비속어까지 내뱉고 말았다. 같은 진영이었던 김영삼이나 보수정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김대중과 노무현에게도 호평 섞인 발언을 했었던 지라 JP의 이런 모습을 의외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17]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성명을 내고 아무리 총리를 지낸 분이고 정치원로라지만, 특정 대통령 후보를 향해서 원색적인 비난을 하고 공개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언행을 하는 건 선거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대담집 <대한민국에 묻는다> 를 통해 "정말 많은 문제를 가슴에 품고 고뇌하고 있는 제 모습을 정확하게 본 노련하고 노회한 은퇴 정치인." 이라며 반박했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언제 때 JP인데 지금도 JP냐. 구식정치를 벗어야 한다. 난 JP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라고 적었다. 끝에서는 "치는 흐르는 물과 같다. 고인 물은 흐르지 않고 썩는다. JP는 오래 전의 고인 물" 이라는 멘트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평소 화도 내지 않는 성격과 남을 향해 수위 높은 표현을 잘 쓰지 않는 문재인의 성품을 감안하면 굉장히 분노했음을 알 수 있다.[18]
하나 웃긴 점은 이 날 홍준표와의 면담에서 "나야 뭐 힘껏 도와주겠다. 꼭 대통령 돼야 되겠어!"라며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지만, 정작 투표는 하지 않았다(...?) 건강상의 이유인 듯.
2018년 6월, 김종필이 타계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조화는 보냈지만 조문은 가지 않았다.[19]
[1] 양김은 박정희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 시절까지 수시로 가택연금과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 이 때문에 외부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들은 자택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펼쳤다. 독재정권 시절 기자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를 수 없어, '상도동 간다' '동교동 간다' 라고 자신의 취재대상을 설명했다고 한다.[2] 청구동계의 세가 약해진 또 다른 원인은 바로 한나라당의 의원 빼가기 때문이었다. 특히 16대 대선을 앞두고 상당수의 자민련 의원들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으로 들어가면서 세가 급격히 약해지기도 했다. 물론 새천년민주당에서 노무현을 반대하며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자민련 출신 의원들로 겨우 매꾸긴 했지만.[3] 정확히는 JP 개인으로는 한국 정치사의 거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계파는 정치사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4] 중앙청을 점거한 후 배포하는 일명 '혁명공약문' 의 집필 및 인쇄를 JP가 했다고 한다.[5] 사퇴 당시 공식적인 사유는 건강문제라고 적었다.[6] 원래 김종필이 14대 대선 당시 김영삼에게 내새운 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YS는 집권 뒤 이 약속을 묵살했다.[7] 자민련에 있던 새천년민주당 출신 의원들도 전부 복귀했다. 다만 이한동 총리는 계속 내각 유지를 택했고 결국 자민련은 이 총리를 제명하였다.[8] JP는 한나라당과도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DJP연합의 붕괴가 한나라당에 준 실질적인 이익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JP는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며 민주당을 음지에서 지원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9] 2015년 발매한 회고록에서도 DJ는 공산주의자가 결코 아니라고 밝혔다.[10] 정확히는 자신이 청와대 회동 때 본심을 말했다면 결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했다. 다만 JP는 회고록에서 이 대목을 언급하며 YS가 본심을 말했더라도 탈당했을 것이며, 탈당의 이유가 단순 YS와의 갈등 뿐 아니라 민자당 내에서 내각제 개헌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해져 당을 떠난 것이라고 밝혔다.[11] 성명을 통해 "급진부패세력도 집권할 자격이 없지만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라며 끝내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다. 당시 노무현을 반대해 자민련으로 이적했던 이인제가 공개적으로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자 김종필이 직접 자제를 요구했을 정도다. 또한 이인제가 노무현 장인의 좌익 경력을 가지고 비방하자 "그런 걸로 비방하는 건 옳지 않다"며 오히려 이인제를 비판하기도 했다.[12] 회고록에 따르면 대선을 1달여 앞두고 당시 서청원 대표가 직접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지나간 일은 잘못했습니다" 며 간절히 부탁했지만 JP는 진심인 지 알 수 없어 그냥 묵살했다고 한다.[13] 삼김 중 YS도 이명박을 지지했다. 이 쪽은 아예 YS가 이명박을 정계에 입문시켰고, 이명박의 출판기념회에도 같이 입장할 정도로 이명박에 대한 열성직인 지지를 보여주었다.[14] 선거법상 당원이 아닌 사람이 선거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입당한 것이다.[15] 이는 박지만을 오랫동안 돌봐온 박태준이 김대중 캠프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6] 2007년 대선 출마를 앞두고 청구동에 찾아와 만났을 때도 자신을 총재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7] 당장 2016년 9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가 예방했을 때도 "얼굴이 훤하다" 라며 반갑게 웃으면서 맞아줬었고, 박지원이 자택을 찾았을 때도 옛날 이야기까지 꺼내며 훈훈한 분위기로 대화를 했었다. 참고로 추미애와 박지원은 DJP연합 당시 선거 캠프에 참여해 김대중의 당선을 도왔고, 국민의 정부 내각에서 함께 일한 경력이 있다.[18] 문재인이 이 정도 수위의 비판을 상대방에게 가한건 2018년 1월 이명박이 자신의 검찰수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 이라고 논평했을 때와(이 때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19대 대선 토론회에서 홍준표가 박연차 게이트를 거론하며 노무현이 직접 박연차에게 돈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말에 "이보세요!"라고 한 마디 한 게 전부였다.[19] 이낙연 국무총리를 대신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