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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멤버들
왼쪽부터 드미트리 우메츠키
멤버들
왼쪽부터 니콜라이 페트로프(기타), 이고르 코필로프(베이스), 비체슬라프 부투소프(보컬,기타)
알베르트 포탑킨(드럼), 알렉세이 모길리에프스키(색소폰,피아노 등)[1]
1. 개요
"Эта музыка будет вечной (이 노래는 영원할 것이야)"
Nautilus Pompilius[2]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후반 소련-러시아의 전설적인 록 그룹이다.2. 역사
2.1. 성장기
1982년 비체슬라프 부투소프와 드미트리 우메츠키[3]가 스베틀롭스크에서 결성했다.후에 기타리스트 안드레이 사드노프와 합류하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들'이라는 이름으로 데모 앨범을 녹음했다.
또 후에 드러머 '알렉산드르 자루빈'과 합류해 레드 제플린[4]의 영향을 받아 1983년 데뷔엘범 'Переезд'[5]을 발표했다.
그외에도 스베틀롭스크에서 자잘한 공연을 했다.
1984년 록그룹 우르핀 쥬스와 스베틀롭스크 지방방송에서 신년 행사 방송을 할때 'Пыль снежная'[6]를 공개했다.[7]
소련 정부에 탄압에 방송사의 음향 엔지니어 안드레이 코마로프는 재녹음을 당국에 요청했으나 거부 당했다.
드러머인 알렉산드르 자루빈과 기타리스트 안드레이 사드노프는 음악의 자유를 제한받자 건축활동으로 전환하기로해 그룹을 탈퇴했다.
1985년 부투소프와 작곡가이자 작사가 일리야 코르밀체프 가 적극적인 협력 관계가 된다.
1985년 2월은 이들은 아파트의 작은방에서 작곡에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Невидимка'[8]라는 새 앨범을 공개하였고 3월 9일 초연 공연이 이루어졌다. 6월1일 스베틀롭스크에서 공연을 했다.
1986년 1월 11일에 러시아의 뮤지션 알렉산드르 판티킨의 생일 콘서트에 참여했다.
이 날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의 색소폰 연주자 알렉세이 모길료프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6월22일에는 스베틀롭스크의 록-클럽에서이 공연도중 마지막 곡 '작별의 편지'를 부르고 있을때 관객들이 모두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다른 록그룹의 멤버들도 올라와 다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퍼포먼스가 나중에는 나우틸루스만의 공연 문화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8월 4일 나우틸루스가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한 앨범 'Разлука'[9][10]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스베틀롭스크 지방에서만 인지도가 있었던 나우틸루스를 '러시아록의 전설'로 끌어올려놓았다. 12월 1일에는 부투소프와 우메츠키는 드러머 알베르트 포타프킨[11]을 영입했다.
1987년은 앨범 '라줄루카'가 전국적으로 흥행하며 여러 지역에서 공연 요청들이 들어왔고 1987년은 나우틸루스가 가장 바빴던 시기이다.
튜멘 공연
빠돌스크 락페스티벌[12]
7월 7일 드러머인 알베르트 포타프킨은 소련군에 징병되어 떠났고 한동안 그의 빈자리를 드럼머신이 채웠다.
9월 이후에는 드러머 자리를 블라디미르 나지모프가 대신했다.
10월 10일, 그룹은 최초로 모스크바 고르부노프 문화궁전 , 12월 10일에는 록-프로그램87에서 공연함으로 모스크바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DDT,아크바리움,키노와 같은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그룹으로 성장했다.
2.2. 첫번째 분열과 시련
그룹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그룹 내의 관계는 부정적으로 변해갔다.베이스 기타이자 최초 밴드 창립자인 드미트리 우메츠키는 작곡을 위해 콘서트들을 중단하고 작곡에 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룹은 콘서트 활동을 그만 두지 않자 드미트리 우메츠키는 1988년 2월 초에 활동을 중단하고 모스크바로 가지 않으면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부투소프에게 고했으나 부투소프와 그 외 멤버들은 콘서트 활동을 이어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리더 부투소프와 사이가 틀어진 우메츠키는 그룹을 탈퇴했다.
힘키[13]에서의 콘서트를 진행하기 위해 사운드 기술자 블라디미르 엘리자로프를 임시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등용했다.
그룹은 1988년 2월 그룹은 알렉산드르 칼랴노프[14]의 스튜디오에서 '침묵의 대공'[15] 앨범 녹음을 마쳤으나 소련 정부 산하 음악사인 멜로디야는 성장해나가는 민간 음악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하고 공장에서의 생산도 제약을 심하게 걸어 앨범은 1년간 보류되었다가 1989년에서야 생산이 되었다
리더 부투소프는 우메츠키와 기타를 대체할 인력을 결정하는데에서 그룹 멤버들과 갈등을 겪었다.[16] 그리고 그룹은 새로운 곡들이 필요했다. 부투소프는 그룹의 해체를 막기 위하여 록그룹 '우르핀 쥬스'와 연합하여 1988년 앨범 'раскол'[17]을 급하게 녹음했다.
그러나 이 앨범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좋지 않았으니 8월 러시아 국립 콘서트 홀 공연에서는 공연도중에 많은 팬들이 자리를 비우기도 하였다.
자신의 음악가적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부투소프는 11월 22일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의 해산을 발표하고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져 음악생활을 이어갔다.
2.3. 이름없는 남자
부투소프와 우메츠키는 관계를 회복하고 앨범 녹음을 이어갔다.둘의 능력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판티킨과 협업을 이어갔다.[18]
그룹은 주거지를 페테르부르크의 콜롬야기 자치구로 옮겼고 열약했더 녹음장비들을 7만5천 루블을 들여 장만했다.
유명 예술영화 감독 빅토르 티토프가 찍을 '이름없는 남자'를 위해 그룹은 녹음작업을 시작했다.
녹음작업은 12월 초에 끝났으나 또다시 시작된 부투소프와 우메츠키 사이의 관계 악화로 앨범 발매가 늦어지고 더불어 영화제작도 감감무소식이면서 결국 한참 후인 1995년에 발매되었다.
전 앨범들과 비교하면 퀄리티가 비약적으로 상승한것을 볼 수 있다.
[1] 연주 가능한 악기가 많다.[2] 러시아어 발음으로는 '나우찔루쓰 빰삘리우스'.[3] 나우틸루스 초기 멤버, 1987년에 한번, 1989년에 완전히 탈퇴했다.[4] 영국의 록밴드,1970년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하드 록과 헤비메탈의 대중화에 앞장섰다.[5] 이동,이주 등[6] 눈의 먼지[7] 그러나 당시에는 락은 불건전 음악이었기에 방송사의 정식판 비디오는 지워져 버렸고 저질 해적판 VHS비디오가 복사됐다.[8] 지금까지도 리메이크 되고있는 '작별의 편지'도 이 앨범에 속해있었다.[9] 이별/발음은 '라줄루까'[10] 이때부터 나우틸루스는 검열을 피하기위해 하나의 앨범에 여러가지 장르의 노래들을 담았다.[11] 포타프킨은 나우틸루스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영입 요청을 받았지만 둘 다 기회를 저버리기 아까워서 결국 두 록 그룹에 참여했다.[12] 사실 음반보다는 라이브가 훨 나았다 카더라[13] 모스크바 인근의 위성도시다.[14] 러시아의 사운드 엔지니어이자 작곡가[15] 대부분 전 앨범들의 리메이크곡들이다.[16] 결론은 유명 기타리스트 '예고르 벨킨'을 등용했다.[17] 분열이라는 뜻[18] 우메츠키는 판티킨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