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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3:01:41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산가족 상봉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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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1983년 방송 KBS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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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휴전협정 ~ 1970년대2.2. 1985년 첫 상봉2.3. 2000 남북정상회담~2010년2.4. 2014년 이후2.5. 2018년2.6. 2020년대 이후의 상황
3. 북한의 상황4. 역대 남북 이산가족 대면상봉5. 역대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6. 교류 추이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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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레와 같은 폭탄이 떨어지던 날
굉음 속에 엄마 잃고
누이의 고사리손 우습게 놓쳐 버렸다
술에 절은 아버지는 누이를 만난다며
봄볕 좋은 날 서둘러 가시고
홀로 억지로 붙인 이 목숨
이제사 너를 만난다니
구차히 살아온 보람이 아니겠느냐
예닐곱 먹던 젖떼기와 헤어지기 전날
비석치기하다 자빠트린 것이
팔십 평생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보자마자 이마에 흉터부터 보자 했다
고사리 같던 손은 고목나무가 되고
포동포동하던 젖살은 그 옛날에 빠지고 없어
여기 폭삭 늙어 뵈는 할머니가 내 누이라 하네
유독 매서운 겨울을 지나
애달픈 아리랑 고개를 넘어
이제야 왔구나 이제야 만나는구나
기가 차서 두 손만 썩썩 비빈다
이북은 여그보다 춥담서
오래전에 사둔 장갑 손에 찌워주고
어떻게 핏줄은 낳고 살았는가
낯선 조카들을 보니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헤어지지 맙시다 다신 헤어지지 맙시다
다 늙은 것이 애마냥 옷고름을 적신다
죽지 말고 기다리라고
내년 지 생일날 꼭 다시 보잠서
살아만 있으라고

-고호,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
소감이요?
심정이요?
그걸 말로 할 수 있갔소?[1]

이보시오,
처자식 남겨두고 내려온 세월이
육십이 년이요 육십이년.
새파랄 때 내려와
팔십일곱 되었소

소감이요?
심정이요?
말로 못 하지
표현 못 하지
이별한 그 세월은
가슴에
여기 가슴에

울어도 못 풀지
죽어도 못 풀지
당신 같으면
말로 할 수 있갔소?

-제페토, <소회>(출전: 그 쇳물 쓰지 마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45년의 남북분단과 1950년의 6.25 전쟁 이후 남한북한에서 따로 떨어져 연락도 안되고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있던 가족 및 친지들이 서로 만나고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1985년부터 2018년까지 총 21차례 대면상봉과 7차례 화상 상봉을 통해 각각 20,761명과 3,748명의 이산가족이 만났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이 2020년대에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다보니 이산가족이 현재진행형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분단과정에서 한국 전쟁 당시 생긴 실향민들 대부분이 고령화되어 만나보지도 못한채 생이별 속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2. 역사

2.1. 휴전협정 ~ 1970년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대한민국북한은 어떠한 교류나 방문도 없이 대치해왔으며 이후 북한은 테러를 시도하고 무장공비를 보내는 등 대남도발을 자행했고, 대한민국에서도 반공 성향이나 감정이 깊어져 제대로 된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1964 도쿄 올림픽북한 육상 국가대표 신금단(1938~)과 서울에 거주하던 아버지 신문준(1915~1983)이 10분간 만난 적이 있다.[2] 이것이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나 남북 간 정식 합의는 되지 않은 비공식 상봉이다.

그러던 와중 대한적십자사가 1971년 6.25 전쟁과 남북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실태를 확인하고자 '천만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제창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의 본회담을 개최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73년 6.23선언을 하였으나 북한과의 교류 단절 상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2.2. 1985년 첫 상봉

1983년에 KBS에서 방영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 1984년에 남한 수해에 대해 북한에서 구호물자 제공 제의 이후 급물살을 타면서, 1985년에 가서야 서울평양 간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 고향방문단은 남북 합쳐 100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한 행사로 이 중에서 65명이 상봉에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의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남북관계가 또다시 얼어붙으면서 2차 행사는 제대로 논의도 못 해보고 종료되었다.

이때의 상봉은 추천을 받은 사회 유력인사들로 장기려 박사도 처음엔 포함되었다. 그러나 워낙에 대쪽같은 성격이었던 장기려 박사가 "다른 사람들과 모두 평등하게 만나는 만남이 아니라 유명인사라는 이유로 특권처럼 만나는 것이라면 만나지 않겠다"면서 북한의 납북 주장이 세계적인 신빙성을 얻을 것을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을 억지로 보내려 하자 보내면 안 돌아오겠다고 위협해서 결국 빠지게 되었다. 1996년과 1998년에 일어난 무장공비 침투사건 및 잠수함 침투사건과 1999년 1차 연평해전 등으로 남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어 긴장상태에 있었다. 다만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서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았는데 출입국이 심히 까다롭기는 해도 어쨌거나 일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출, 입국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남-북한과는 달리 북한-중국과의 인적교류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2.3. 2000 남북정상회담~2010년

2000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산가족 상봉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까지 순조롭게 이어져 그 당시까지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첫 이산가족 상봉 때는 추첨에서 떨어진 숱한 실향민이 운집하여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고개를 뺐다. 이땐 그야말로 전국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외신기자들까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다만 아사히 신문 등에선 겨우 100여 명 단위의 상봉은 너무 불안정하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표시했다. 또 이날 납북자 가족들의 시위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 때 북한의 핵 개발 재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금강산에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가 2009년 추석 때 어렵게 이루어졌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은 이후로 상봉 논의나 실행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상봉논의가 있었지만 북한이 천안함 피격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계속 미루어졌다. 2010년 10월 어렵게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어 일부 이산가족들이[3] 가족과 재회하였으나 11월 연평도 포격전이 발발하면서 결국 이산가족 상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였다. 2012년 8월에 남한북한에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경제제재 해제와 금강산 관광재개 그리고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을 문제 삼아 이산가족 상봉을 거부함으로써 그 후 오랫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부터는 화면을 통한 상봉도 이루어졌으나 2007년 11월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2.4. 2014년 이후

2010년 10월 이후 3년 4개월 넘게 이루어지지 않던 이산가족상봉이 2014년 2월 20일 이루어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이루어지는 상봉이라 당첨된 이산가족들은 휠체어와 이동침대에 의지해서라도 상봉을 하겠다며 몰려들었다. 정말 이제 못 보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지라 각자 이북의 가족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10년 전 돌아가신 선친의 유언장을 들고 온 사람과 부모의 장지와 기일을 적어오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명은 건강 악화로 정말 어쩔 수 없이 불참하게 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여담으로 14년 2월에 열린 상봉행사장에 북측가족 여성복의 경우 얇디얇은 여름용 한복 같은 것을 입고 나왔다.

서부전선 포격 사건의 남북협상(8.25 합의)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약속했고 그 결과, 2015년 10월 20일부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20일 상봉은 3시 30분부터 5시 30분(북한시간 5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상봉 행사에는 남측 상봉단 96가족 389명과 북측 96가족 141명이 참가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산가족의 연령이 대부분 80대나 90대 최대는 100세 이상 최고령의 노인들이라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여서 이들이 생전에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불명이다.[4]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해도 최고령인 1세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됨에 따라 이제는 2세대나 3세대들을 통해서나 만나야 하겠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의 존재조차 아는 이들도 없거나 드문 편이기도 하다. 특히 1세대의 자녀나 손자녀 세대인 2세대, 3세대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 겪었던 1세대들과는 달리 전쟁 경험도 없고 헤어진 가족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세대들에 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고 해도 서로 모르거나 어색해하는 경우도 있다. 2017년 현재 북한에서는 2016년 집단 탈북한 중국의 북한식당 종업원 12명과 북송을 주장하는 탈북자 김련희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이들의 송환 없이는 더 이상의 이산가족 상봉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5. 2018년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 서명된 판문점 선언에서 이번 8월 15일을 기념하여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자고 하였으며, 2018년 6월 남북 적십자회담에서 광복절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로 했다. 2018년 8월 20일~26일 이산가족 상봉이 나흘동안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진행된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평양선언에서 명시되어 있듯이 남북은 빠른 시일 내에 금강산 또는 개성시에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남북한관계가 순풍을 타고 있는 가운데 양국간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고 규모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근본적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면생사 확인, 서신 교환, 상설면회소, 화상 상봉과 당국간 협조(동의) 아래에 재북가족 및 친척들을 위해 송금할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할 예정이였다. 또한 10월에 남북 적십자회담이 개최될 예정이였으나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 이후로 다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이산가족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2.6. 2020년대 이후의 상황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산가족들이 점차 고령화되면서 이산가족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일단 2대, 3대의 가족들도 이산가족이기는 하나, 헤어지는 슬픔을 직접 겪은 이산가족 1세대와는 달리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어도 1세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고자란 2세대[5]는 이산가족 출신이라고는 인식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이산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한 안에서도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촌수가 먼 친척과의 교류가 줄어드는 마당에, 촌수로는 멀어도 4촌 이내인 친척이라고 해도 북한에 있고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니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2020년대 시점까지 생존한 이산가족 1세대들은 80~90살이 넘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고, 이는 6.25 당시 복잡한 전쟁통에 어린 나이에 헤어진 것이다. 특히 1.4후퇴때 아군이 다시 북진할수 있을거라 생각하여 가족중 일부는 피난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흥남 철수작전처럼 이 때의 헤어짐이 곧 평생의 이별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산가족들이 많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산가족 2세대, 3세대들은 자신의 조부모나 부모 중 실향민이 계셨구나/계시는구나 하는 인식 정도만 있을 뿐이지, 북한에 있는 다른 친척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만나보겠다는 생각은 거의 없고 이들이 이산가족상봉 자리에 나오는 것도 1세대의 유지를 받들어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해주러 나오는 정도이다. 아울러 70년 이상 동안 왕래 한 번 없었던 이들을 한 가족, 한 일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1세대와 1세대, 또는 1세대가 자신의 자손 및 친족을 찾아서 만나는 것이 거의 100%이고, 1세대 당사자들이 타계하면 교류는 대부분 끝난다. 아랫세대끼리는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남남이 되는 것이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 등록 현황에 따르면 2023년 12월 말 기준, 전체 이산가족 신청자 13만3984명 중 9만4391(70.4%)명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는 3만9593명(29.6%)으로 이중 1세대인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 수는 2만5890명(65.3%)이다. 휴전으로부터 71년이 지난 2024년 기준으로는 부모-자식 간 1세대 상봉은 불가능해진 것과 다름없고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해 형제자매 간 1세대가 유아기나 아동기에 헤어졌다고 하더라도 최소 70대 후반이 되었을 상황이다.[6]

한편 북한이탈주민들이 증가하고 이들 중 가족은 북한에 있고 본인만 남한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아서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게 되면서 기존의 이산가족 상봉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아직까지 이런 형태의 이산가족 상봉은 추진되거나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탈북민들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생각해보면 기존의 이산가족 상봉보다 훨씬 더 추진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이탈주민들의 경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직접 만나는건 불가능해도 브로커를 통해 전화통화 정도는 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것도 엄연히 남북간 정치적 행사이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나서는 추가적인 이산가족 만남을 기대하긴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국 vs 서방과의 신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국제정세상 그런 이벤트는 하기 어려워졌다. 금강산에서 진행하는 것은 대기자가 너무 많은데 인원이 제한되어 한계가 있으니 제3국을 통한 비공식적인 상봉도 과거 통일부에서 비용을 지원했으나 이제는 이조차 가능하지 않다. 우리 정부가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추진한 바 있으나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결국 불발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 2023년 이후 북한 정권이 대한민국을 같은 민족이 아닌 적대 국가로 규정하면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존립 근거 자체가 사실상 무너져버린 상황이다. 김정은의 논리에 따르면 이제 북한의 이산가족들에게 있어서 남한의 이산가족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 적대 국가의 국민, 즉 유사시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

3. 북한의 상황

북한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들에게 상봉 몇 달 전부터 좋은 음식을 먹이고 건강 검진을 하여 양호한 상태로 유지한다는 말이 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센 북한 입장에선 초췌한 꼴을 보이기 싫은 건 당연지사일지도. 또한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에 지명되는 대상자들은 상봉 전에 사상훈련을 받게 되며, 이는 실제로 몇십년만에 겨우 만난 북측 가족이 하라는 가족 얘기는 안하고 자기네들 체제의 우수성 등을 설파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남측 가족의 증언에서 나타난다. 또한 상봉 시에 남측에서 받은 물건 같은 것도 전부 수거해가고 게다가 상봉 후에도 얼마 동안은 감시를 받는다고 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참가자를 내세워 우리측 보도를 반박하는 취지의 발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했다. 돈이나 물품을 선물로 건네주면 당국에서 뺏어 간다고 말해 북측가족들이 반발하면서 언쟁이 벌어지는 목격담 등을 언급하며 왜 상봉을 대결마당으로 만들어 놓나며 다음에 또 해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였다. #

4. 역대 남북 이산가족 대면상봉


총 21차례 직접적인 대면 상봉이 이루어졌다. 다만 모두 이북 북한지역인 금강산에서의 상봉이 이루어진 것만큼 다소 아쉬운면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다. 2018년 8월 26일 상봉 끝으로 이후 어떠한 만남의 상봉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20년대 이후로는 이산가족이 대부분 고령으로 사망하여 사실상 상봉이 끝난 상황이다.

5. 역대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

6. 교류 추이

연도별 남북 이산가족 교류 추이

7. 여담

프랑스 희곡 <두 한국의 통일(La réunification des deux corées)>(2013)이 바로 이 이산가족 상봉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한다. 2015년 '팝업시어터 사건'으로 국내에도 회자된 조엘 폼므라의 작품이다.[7] 제목과 달리 한국을 소재로 삼거나 남북통일을 다룬 작품이 전혀 아니며, 여러가지 사랑에 대해 다룬 옴니버스극이다. 작가는 이산가족, 특히 부부가 생이별했다가 몇십 년 만에 만나는 눈물겨운 장면을 프랑스 TV 뉴스에서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을 언급하는 장면은 단 한번뿐[8]인데도 제목이 되었다.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통일하고 싶어하는 한국을 메타포로 하여 사랑하면 통일(일치, 합일)될 수 있다는 시각을 전개하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프랑스는 물론 타국에서도 꾸준히 공연되는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고 '두 코리아의 통일'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는데[9] 작가는 한국 진출 소식에 매우 기뻐했다. 희곡집 한국어판에 한국 독자들을 위한 특별 서문을 넣을 정도.

8. 관련 문서



[1] '겠'을 '갔'으로 말하는 것은 북한에 속하게 된 평안도 일대 말투의 특징이다. 고향 사투리를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2] 치요다구 조총련 중앙본부에서 7분, 우에노역에서 3분.[3] 여기에는 민주당 우원식 의원과 그의 어머니인 김례정도 참석했는데, 그녀는 1917년생으로 당시 96세의 남측 최고령 참석자였다. 이후 2020년 9월에 10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4] 2015년 9월 기준 지난 15년 동안 이산가족이 하루 평균 12명꼴로 사망했다는 통계까지 나온 상황이다.[5] 강산에의 '라구요'가 해당 에피소드를 품은 노래이다.[6] 북한은 평균수명이 낮아서 남아 있는 이산가족의 수가 더욱 적다. 물론 대한민국의 이산가족들의 평균수명도 80세 정도인만큼, 이산가족 상봉은 1946년생이 80세가 되는 결국 2020년대 중반 이후로는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7] '팝업시어터'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센터가 주관하는 주로 젊은 아티스트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극장 외 일상적인 공간인 카페, 로비 등에서 돌발적으로 10~15분간 펼쳐지는 게릴라 공연. 2015년에는 10월 17~18일과 24~25일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연극 3팀, 무용 4팀, 음악 4팀이 참가 예정이었고 그중 연극 부문 김정 연출가가 조엘 폼므라의 <이 아이>(2006년작)중 9장을 대학로예술극장 시어터카페에서 공연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죽은 아이 에피소드가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며 주최 측이 이의를 제기했고, 이후 주최 측에 의해 남은 공연 진행을 방해받았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팝업시어터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다른 예술가들이 연대해 나머지 공연을 보이콧했다. 이 일은 당시 연극계 화두였던 검열 논란과 결부되어 연국인들의 항의 시위로 이어졌으며, 그로부터 고작 1년여 뒤 검열과 탄압 문제는 단순 의혹이나 논란이 아닌 정말 진짜였음이 밝혀졌다.(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 <두 한국의 통일> 199쪽 중 해설 각주 참조)[8] "우리가 만났을 때 완벽했어. 우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두 개의 반쪽 같았어. 멋졌지. 마치 북한과 남한이 국경을 열고 통일하는 것 같았고, 서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것 같았어. 축제였어.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아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어."(20장 중 14장 '기억'중)[9] 2016년 초연, 이후로도 종종 재공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