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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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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1]

1. 개요2. 시작3. 행보4. 영향5. 평가6. 출신 유명인7. 기타8. 관련 문서

1. 개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2007.6.16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노사모의 원칙은 달랑 세 줄 입니다.
"노무현과 함께 동서화합에 나선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팬클럽. 무현랑하는 사람들의 임의 준말이다.

노사모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을 지향하면서 만들어졌고 이후 시민사회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사후에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2019년 9월 23일 모든 자료를 정리하여 서버와 함께 노무현재단에 기증하면서 해체했다. 즉, 명목상으로는 더 이상 노사모라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시작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후보로 부산광역시 북구·강서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허태열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망언으로 인해 지역주의를 넘지 못하고 낙선한 노무현을 안타깝게 여겼던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인터넷을 통해서 만들어낸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지지 단체다.[2]

당시 합동 유세장에서 노무현의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의 허태열 후보가 노무현을 향해 "이번에 노무현 후보를 낙선시켜야 부산 죽이기에 골몰하는 김대중 정권이 정신차린다.", "살림살이 나아지셨다는 분들은 전라도에서 오셨나?" 등의 말을 비롯하여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여러 발언을 했고 "허황되게도, 전라도 당인 민주당에서, 영남 출신이면서 차기 대권 주자 운운하는 얼빠진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라는 망언까지 했다.

창립 초기의 구성원은 당시 정치판을 지배하고 있던 고질적인 지역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쉬움을 가졌던 386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장년층이 대부분이었는데 노무현의 직접적인 지시나 설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창립된 단체였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자발적으로 생겨난 정치인 지지 단체다.

3. 행보

파일:external/www.ohmynews.com/020331_kws_minjoo29.jpg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사모는 적극적인 선거 유세를 벌여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냈다. 노무현은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에 밀려 비주류의 위치였기 때문에 후보가 된 후에도 당내 지지를 얻지 못하고 흔들렸으며 급기야 대선 직전에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이 만들어져 정몽준으로의 후보 단일화는 요구하는 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하거나 항명하기도 했다.[3] 노사모는 단순히 열정적인 선거 유세나 지원에서 끝나지 않고 당 외곽의 거대 정치 조직으로 양적인 성장을 이루며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4] 온라인 상에서는 웹사이트 서프라이즈, 나우누리 열린광장 등지에서 이들의 선거활동이 이루어졌고 오프라인에서는 대규모 거리유세와 희망저금통 모금 등이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시민, 김원웅 등을 중심으로 개혁국민정당이라는 별도의 신당을 만들어 노무현을 지원하기도 했다.[5]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에서는 적극적인 유세와 지원으로 노무현을 단일 후보로 만들었으며 투표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투표 당일 전화와 문자를 돌리며 젊은 층들의 투표 참여를 이끌어냈다.[6]

하지만 자발적이고 건전한 정치 활동 집단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던 노사모가 부정적인 집단으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정확히는 2002년 대선 이후 노사모 해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었다. 해체파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노사모가 존속하면 한 자리 해보겠다는 작자들로 인해 노사모가 오염될 것이라는 우려와 이익 집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으니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존속파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 세력의 필요성과 새로운 정치인 발굴에 노사모가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로 맞섰다. 결국 노사모는 존속을 선택하고 해체파는 이에 반발해 탈퇴했다.[7]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노사모 회원들은 열린우리당 창당에 가담하였고, 2004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에는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주도했다. 노사모 회원이었던 이창동 감독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입각했고, 노사모 대표였던 노혜경 씨는 국정홍보비서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게다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 확보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면서 친노세력이 더욱 확장되었고, 노사모의 활동도 이 때까지 절정을 이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말에 열린우리당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가 점점 험악해지면서[8] 지역주의에 저항을 하는 정치인들을 지지하던 노사모의 지지 대상이 역시 점차 노무현 개인으로 축소되었으며,[9] 당시 정동영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도 틀어져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노사모의 지도부. 대표적으로 밝혀지기로는 문성근, 명계남, 이상호, 정청래 등이 회원들을 이끌고 정동영의 아래로 들어갔으며, 정동영계는 박스떼기 같은 정치공작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참여정부평가포럼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병완, 안희정, 명계남 등이 실무자로 참여했으며 노무현이 직접 참석해 강연한 적도 있다. 당시 레임덕이 와서 지지도가 바닥이었던 참여정부의 정치적 위상 회복을 위한 활동이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 계획, 남상국 자살 사건, 이라크 전쟁 파병 등은 어찌 됐든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행보/결정이었고, 저 결정들에 대해 보수/진보(비노계열 등)가 모두 비판을 했었는데도 그때부터 유일하게 노 전 대통령을 두둔하던 건 노사모였고, 수 년에서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음모론이 판치고 있다. 그 일들은 이미 오래전에 노 전 대통령이 확실히 의견을 피력했었고 결정하거나 발언했었던 일들인데 아직도 노사모나 친노 세력이 계속해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도 문제다. 원래 노 전 대통령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미국의 압력이니 한나라당의 압력이니 등. 아직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암살했거나 타살했다는 설을 크게 밀고 강요하고 있으니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쟤들은 원래 허구한 날 음모론 미는 애들 아니냐'는 인식까지 붙고 덩달아 진보의 이미지까지 타격을 입는 등 비노계열 진보와의 마찰이 매우 큰 상태다. 오죽하면 비노 진보 계열에서는 NLPDR이나 종북주의자, 주사파보다 먼저 비판하는 대상이 무조건적인 극렬 친노들일 정도.

이후, 초기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해진 노사모의 구성원들이 각자 비리와 횡령 등에 가담한 일이 벌어지며 구성원들의 도덕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2007년 한국을 달구었던 바다이야기 사업에 연관된 구성원들을 물갈이하며 창립 초기의 이미지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3.1. 노무현 퇴임 이후

노무현퇴임하게 되자 창립 초기의 목적인 지역주의 타파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시민사회운동을 시작했다.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귀향해 화포천 복원 등 환경운동에 참여하면서 여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의 후임 주자인 이명박 집권 시 일어난 각종 시위와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며 정권의 견제 아닌 견제를 당하였고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공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노무현이 박연차 회장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대부분의 노사모 회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검찰에 의한 노무현 죽이기로 간주하여 항의 운동을 벌이기도 하는 등 당시 많은 인사들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접고 비판 대열에 합류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노무현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노무현이 검찰에 소환당했을 때 봉하마을 사저 앞에서 노란 비행기와 꽃을 던지며 그를 배웅했다.

검찰 소환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노무현이 사망하자 가장 먼저 봉하마을로 모여들어 노무현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것도 노사모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감정이 격앙된 일부 노사모 회원들이 다소의 격렬한 행동을 취하기도 했는데,[10] 노무현의 분향소에 온 이명박과 전두환이 보낸 화환은 부서지고 불에 탈 뻔했으며, 정동영 의원은 쫓겨나고[11]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계란 세례를 받고 끝내 조문하지 못한 채로 돌아가야 했다. 그 다음 날에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물병 세례를 맞고 돌아갔다.

그 밖에도 노회찬 등의 여러 정치 인사들이 찾아왔지만 이들의 반대에 결국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고인과 당사자들 간의 예전 관계를 들면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는 의견과 비록 정치적 입장 차이가 컸지만 그게 조문을 막을 이유는 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장례의 최고 예우를 해주겠다면서 일부 타 지역 분향소에서 분향하려는 사람들까지 전경으로 막아서자 그에 대응한 입장이라는 의견도 있다.[12] 이는 빠가 까를 만든다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다른 사람들을 푸대접한 것도 문제지만 노무현과 악연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선 라이벌이고 보수 성향 정당에 몸을 담았을 뿐인 이회창에게 계란 세례를 한 일은 노사모가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다.[13]

그러나 노무현의 사망은 이명박의 암살이라는 등 음모론을 양산하며 고인 입장에서도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발언과 행동을 보이고 있다.

지금 노사모/친노 세력이나 네티즌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이 비노, 보수 세력이 원인이라면서 복수심을 갖고 대하는 태도 역시 그들의 심각한 배타성으로 이어졌다. 친노 계열이 심지어는 같은 진보 성향인 비노 계열, 사회민주주의 계열 등에게도 배타적이고, 후보 단일화 강요, 우리 쪽으로 흡수되어라 등의 패권주의를 휘두른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모든 노사모를 위처럼 취급하는 것은 극히 편향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 판단은 알아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패권주의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상대파에서 의도적으로 프레이밍하는 부분도 있으므로 편향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2019년 9월 23일, 노사모는 운영비와 서버를 노무현재단에 기증함으로써 공식 활동을 종료했다고 한다. 노무현재단에서 발행하는 '사람사는세상' 제 65호에 실린 노사모 입장문은 다음과 같다.
노사모 입장문

2000년 노무현의 원칙과 상식을 지키기 위해 모인 노사모는 2002년 대선 승리와 환희, 2008년 퇴임, 2009년 서거로 이어지는 통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신을 여전히 지켜내고 지향함에 시대정신의 가치를 갖고 사는 이 땅의 평범한 생활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노무현이라는 에너지로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싹이 되고 성장해서 꽃피우고 열매를 맺은 지금, 다시 싹틔울 날을 위해 그 뜨거운 에너지를 담은 씨앗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노사모"라는 이름이 아름답게 빛날 때,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빛나는 별로 남고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과 늘 함께하며 그 소임을 다한 노사모는,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 10주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노무현 대통령님과 함께 노무현 기념관으로 가고자 합니다.
생전에 "노사모" 서버가 "사람 사는 세상" 서버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노무현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어 노사모의 기록인 서버는 노무현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어 노사모의 기록인 서버는 노무현재단으로 모두 이관하여 복원 작업 중이며, 노사모의 모든 자료는 누구든 손쉽게 관련 내용을 검색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아카이브화 하여 기념관으로 옮겨집니다.
노사모의 문을 닫고 노사모 자체를 아카이브로 전환함으로써 앞으로 노사모라는 이름을 사용한 활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노사모의 마무리를 준비하던 운영위원회를 비롯한 노사모 내의 모든 조직은 해체하고 기록으로만 남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기일에 맞춘 추모 행사를 제외하고, 앞으로 그 누구도 대외적으로 "노사모"의 이름으로 단체 행동을 하거나, 대외적으로 "노사모" 이름으로 후원금 등의 모금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노사모의 많은 분들이 다른 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첫사랑 노사모는 아카이브로 남겨두고, 노무현 정신을 전파할수록 노사모는 영원히 회자 될 것입니다. 이제 모든 노사모 회원, 각자의 행위는 노사모의 대표성이 없는 각 개인의 행위임을 명백히 하는 바입니다.
2019. 9. 23
노사모

4. 영향

  1. 수많은 아류 (정치인)팬클럽의 창설
    • 노사모의 창립으로 인해 노무현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어필할 수 있었고, 이것이 대선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오자 각정당의 실세와 대표자들은 앞다투어 노사모와 비슷한 형태의 팬클럽을 창설하게 된다.[14][15]
  2. 인터넷 여론의 영향력 증가
    • 노사모의 기반이 인터넷인데다 소규모적인 활동을 인터넷으로 전개한 덕에 인터넷 여론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된다.
    • 하지만 여기에 너무 집착하거나 의식한 나머지 특정 정치인과 집단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홍보하거나 비난하는, 혹은 그러한 사람이라고 몰아가는 이른바 알바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류 정치인들의 팬덤들의 극심한 빠순이, 빠돌이 행위는 오히려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3. 직접민주주의,참여민주주의의 대두
    • 이전만 해도 대한민국 정치는 엘리트 위주의 정치였다. 즉 국민은 그냥 표를 던지는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노사모의 탄생으로 국민들이 정치에 발을 들임으로 인해 소위 직접민주주의,참여민주주의의 대두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4. 지역주의의 붕괴의 시초

5. 평가

소위 특정 정치인 지지자, 특히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정치단체를 조직하는 사례는 노사모가 최초였다. 그렇기에 이들의 활동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한민국의 정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된다.

일단 이들의 활동은 지역주의의 붕괴의 시초가 되었는데, 실제로 이들은 친노 정치인들의 노력과 함께 당시 보수정당의 텃밭이였던 부울경에서의 민주당 지지세를 끌어올린 주역으로 꼽힌다. 애당초 이 조직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가 북구·강서구 을에서 35%로 선전했지만 낙선한 것을 계기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영남권의 2030대 청년층[16]도 상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했고, 이 노사모의 탄생은 이를 지속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19년 후에 마침내 성과를 이루게 된다.[17]

또한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전만 해도 정치는 그저 높으신 분들의 영역이고 국민은 표를 주는 수준인 소위 엘리트주의 위주의 정치였지만, 이들의 등장으로 국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위주의 정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파시즘적인 집단 문화가 좌우불문하고 판을 치게 되었고, 민주화 시대에 걸맞지 않은 흑백논리진영논리가 고스란히 이어져 나갔다. 본래 정치인은 연예인과는 엄연히 다른데, 이런 특정 정치인의 '팬'임을 자처하는 것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등의 극단적인 모습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원래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모인 조직이 오히려 새로운 진영논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점이라 할 수 있다.

6. 출신 유명인

노사모 회원으로 확인된 유명인만 적어주세요.

7. 기타

8. 관련 문서


[1] 현재는 NOT FOUND 에러만 뜬다.[2] 노사모 이후에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도 많지만 노사모처럼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3]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자적인 계파를 이끌던 노무현을 개인적으로 매우 아꼈고, 박지원 비서실장을 통해 후단협에 참가한 의원들에게 노무현을 후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며 부탁했다고 한다.[4] 이 때 노사모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이상호로, 노사모 국민경선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인터넷 필명은 '미키루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당선된 뒤 열린우리당 창당에 가담했고 전국청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5] 개혁당의 창당은 노무현의 권유였다고 한다. 2002년 여름, 유시민과 인터뷰를 하던 중 노무현이 "유 작가가 구명보트(개혁국민정당)을 준비해주세요. 이 배(새천년민주당)가 난파선이 됐을 때 올라갈 수 있는 구명보트가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민주당 외곽에서의 세력화를 제의했다고.[6] 대선 당일 무려 2000만통의 전화가 발/수신됐다. 이는 KT 창립 이래 가장 많은 량의 전화가 발/수신 된거였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캠프 기획본부장이었던 이해찬이 국무총리 시절 KT 사장과 오찬을 하다가 전해들은 얘기라고.[7] 원래 노사모는 회원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2002년 초까지만 해도 5000명 정도에 불과하던 회원 수가 2002년 대선 바람을 타고 십만 단위로 늘어난 것이다. 해체파들의 대부분은 초기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정치 욕심이 없었다.[8] 이미 2005년부터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재보선 참패와 대연정 파동 등을 계기로 청와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열린우리당 “대통령이 신이냐?”…청와대는 침묵),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역대급 참패를 기록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관계가 험악해졌다.[9] 간단히 아이돌 팬클럽을 생각하면 된다. 주체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판단의 기준을 노무현에게 일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노무현 재임 시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이들의 논조를 노 전 대통령이 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판단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 옳다고 믿는 바의 차이다.[10] 일반 조문객들이라는 주장도 있다.[11] 다음 날 오전에 조문했다.[12] 다만, 워낙 노사모가 이전부터 워낙 호전적이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다소 급하게 대응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3] 더군다나 이회창은 대선 패배 후 정계를 은퇴했기 때문에 참여정부 기간동안 일절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17대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출마 선언과 함께 정계에 복귀, 이듬 해인 2008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직에 당선되었다.[14] 보수 진영에서는 박근혜의 팬클럽이었던 박사모가 처음으로 창단된 정치인 팬클럽이었고, 이 후에도 '창사랑(이회창)', '명사랑(이명박)' 등이 생겼다. 같은 진보 진영에서는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시민광장(유시민), '행복 韓 사람들(한명숙), GT클럽(김근태) 등이 만들어졌다.[15] 단, 이 아류 팬클럽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노사모와 같은 부류로 볼수 없다는 것이 통설이다.[16]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40~50대로,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 되었다.[17] 그리고 당선자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란 점에서 더더욱 성과가 빛나게 되었다.[18]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와는 동명이인이다. 헷갈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