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8:16:52

노심(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유연 · 유화 유총 유총 유총 · 유찬
<rowcolor=#fff>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유요 유요 유요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rowcolor=#fff>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석륵 석륵
<rowcolor=#fff>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석륵 석홍 석호 석호
<rowcolor=#fff>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석호 석세 · 석준 · 석감(鑒) 석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외 모용황
<rowcolor=#fff>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모용황 모용준 모용준 모용위
<rowcolor=#fff> 29권 -2l 「전연록칠(前燕錄七)」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모용위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부홍 부건 부생 부견
<rowcolor=#fff>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부견 부견 부비 부등
<rowcolor=#fff>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수 모용수
<rowcolor=#fff>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모용수 모용보 모용성 모용희
<rowcolor=#fff>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모용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요익중 요양 요장 요흥
<rowcolor=#fff>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요흥 요흥 요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덕 모용초
<rowcolor=#fff>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66권 「하록일(夏錄一)」 67권 「하록이(夏錄二)」 68권 「하록삼(夏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혁련발발 혁련창 혁련정
<rowcolor=#fff> 69권 「하록사(夏錄四)」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궤 장실 장준
<rowcolor=#fff>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76권 「촉록일(蜀錄一)」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장현정 · 장천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특
<rowcolor=#fff> 77권 「촉록이(蜀錄二)」 78권 「촉록삼(蜀錄三)」 79권 「촉록사(蜀錄四)」 80권 「촉록오(蜀錄五)」
이류 · 이웅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여광 여소 · 여찬 여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걸복국인 · 걸복건귀 걸복치반 · 걸복모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rowcolor=#fff>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독발녹단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고 이흠
<rowcolor=#fff>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저거몽손 저거무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풍발 풍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

1. 개요

盧諶
(285 ~ 351)

서진후조의 인물. 자는 자량(子諒).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탁현(涿縣) 출신. 후한의 학자 노식의 고손자. 조위의 사공 노육의 증손자. 서진의 태위경 노정(盧珽)의 손자. 한(漢)의 동궁태사 노지의 장남.

2. 생애

총명하고 마음이 맑아 일찍이 명성을 떨쳤고, 사리에 밝고 글재주가 있었으며, 노자장자의 사상을 좋아하였다. 후한 시기부터 명망높은 가문의 위세 덕에 무제 사마염의 딸인 영양공주(滎陽公主)와 혼인하여 부마도위가 되었으나, 혼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영양공주는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유주(幽州)에서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태위연(太尉掾)에 제수받았다.

영가 5년(311년) 6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서진의 수도인 낙양이 함락당하자, 노심은 아버지 노지를 따라 양읍(陽邑)으로 이동해 진양(晉陽)의 병주자사 유곤에게 의탁하였다.

영가 6년(312년) 8월, 한(漢)의 하내왕 유찬, 하간왕 유이, 중산왕 유요 등이 진양을 쳐들어왔다. 유곤은 상산(常山)에서 군사를 징집해 맞서려 하였으나, 그 전에 태원(太原)태수 고교(高喬) 등이 진양을 들어 한군에게 투항하였다. 진양에 있던 노심도 아버지 노지와 함께 포로로 사로잡혀 항복하고 유찬의 참군으로 배속되어 진양에 머물렀다. 유곤은 상산의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진양 탈환을 시도하였지만, 금세 격파당하고 다시 상산으로 도망쳐 대왕(代王) 탁발의로와 연합하였다.

영가 6년(312년) 11월, 유곤의 패잔병과 탁발부 연합군이 분수(汾水)와 남곡(藍谷)에서 한군을 대패하고 진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유곤은 군문 앞에서 탁발의로에게 절을 올려 감사를 표한 뒤, 탁발의로가 돌아가자 양곡(陽曲)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군사를 모았다. 이때 노심이 유찬으로부터 도망쳐 유곤에게 귀순하니, 소무제 유총은 그 소식을 듣고 평양(平陽)에서 아버지 노지를 비롯한 그 일족을 멸하였다.

건흥 3년(315년) 2월, 사공에 임명된 유곤이 노심을 주부(主薄)로 삼았다가 종사중랑으로 옮겼다. 유곤의 처는 노심의 이모였기에, 유곤은 노심을 매우 아끼는 동시에 그 재능과 명성을 중히 여겼다.

건흥 4년(316년) 12월, 유곤의 장사 이홍(李弘)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로 인해 한의 정동대장군 석륵이 공격해오자, 유곤은 대패하여 단부단필제에게 도주하였다. 노심 또한 유곤을 따라서 단부로 도망쳐 별가에 임명되었다.

대흥 원년(318년) 5월, 단필제가 유곤을 의심하여 이내 살해하니, 노심과 최열(崔悅) 등은 남은 유곤의 군사를 이끌고 단필제와 대립하던 요서(遼西)의 단말배에게 귀순하였다. 이때 유곤의 아들 유군(劉群)도 단말배에게 도망쳤고, 노심 등 유곤의 잔당은 죽은 유곤을 대신해 유군을 섬겼다. 또, 노심은 동진에 사자를 보내 유곤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상표하고, 그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런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원제 사마예가 유곤의 명예를 회복시켜 태위, 시중으로 추증해주고, '민공(愍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동진 조정은 여러 차례 요서로 사자를 파견해 노심을 초빙하고 산기시랑, 중서시랑에 임명하였으나, 단말배가 번번이 가로막아 강남으로 가지는 못하였다.

태녕 3년(325년) 12월, 요서공 단말배가 죽고 그 동생 단아(段牙)가 뒤를 이었는데, 단아가 모용부와 화친하여 도읍인 영지(令支)를 떠나는 결정을 내리자 부족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단질육권의 손자인 단요(段遼)가 부족원들을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단아를 죽였다. 이후 스스로 단부의 수령 자리에 오른 단요는 유군을 좌장사로 삼고, 노심을 우장사로 삼아 보좌케 하였다.

함강 4년(338년) 3월, 후조전연이 연합하여 전연의 연왕(燕王) 모용황의 군대가 단요의 동생 단난(段蘭)을 전사시킨 후 영지 이북의 여러 성채를 휩쓸었고, 후조의 천왕 석호의 군대가 금대(金臺)에 주둔하였다. 이에 단부의 어양(漁陽), 상곡(上谷), 대군(代郡)의 태수와 재상들이 일제히 항복하여 성 40여 개가 후조에 넘어가니, 단요는 감히 싸울 생각도 못하고 밀운산(密雲山)으로 달아났다. 결국, 유군, 노심, 최열 등도 성의 창고를 봉인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건무 4년(338년) 5월, 천왕 석호를 따라 후조의 수도인 업(鄴)으로 이주하여 중서시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후조 조정에서 중용받아 국자좨주, 산기상시, 시중을 역임하였다.

건무 6년(340년) 10월, 중알자 신편(申扁)이 천왕 석호와 태자 석선(石宣)의 총애를 받아 조정의 기밀을 감독하게 되었다. 석호는 이미 여색에 빠져 정무를 아예 돌보지 않았고 석선도 항상 사냥을 즐기느라 바빴기에, 신편은 인사권과 형벌권을 전부 쥐고 관리들을 좌지우지 하였다. 다만, 노심, 왕모, 정계(鄭系), 최약(崔約) 등 관직이 9경에 이르는 자는 신편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노심은 후조 조정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음에도 항상 갈족 휘하에 머무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해 아들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진(晉)의 사공 종사중랑이라고만 칭하라."
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태녕 원년(349년) 11월, 11월, 의양왕 석감이 즉위하고 노심을 중서감으로 삼았다.

청룡 원년(350년) 정월, 대장군 염민이 난을 일으켜 후조의 황제 석감과 황족들을 몰살하고 염위를 건국하였다.

영흥 원년(350년) 11월, 염민이 100,000 대군을 일으켜 양국(襄國)에서 새로 후조의 황제로 즉위한 석지를 치자, 노심도 이에 종군하였다.

영흥 2년(351년) 3월, 염위의 대군이 양국에서 대패하여 궤멸당하고 염민은 기병 10여 명과 함께 겨우 업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염위의 장수와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고, 노심 역시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 향년 6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