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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琨
(271 ~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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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월석(越石)으로 기주 중산국 위창현 사람. 한나라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로 할아버지 유만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 상국의 참군, 산기상시를 하였고 아버지 유번은 청렴하고 고결하여 광록대부에까지 이르렀다.2. 생애
어렸을 때 외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활하는 안목을 얻었고 범양의 조납과 함께 웅장한 명성을 얻었다. 젊을 때부터 조적과 벗했고 나이 26세에 사예종사(司隸從事)가 되었다.당시 정로장군 석숭은 하남 금곡 간에 별려(別廬)가 있어 당시 뛰어난 사람들을 빈객으로 불러모아 날마다 시를 지었다. 유곤은 그 당시에 참여하여 시를 읊기로 꽤 약속하였다. 비서감이 조정에 참여하여 관리하니, 경사 인사들은 모두 마음을 다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숭, 구양건, 육기, 육운의 무리는 문재로써 절조를 낮추어 안정시켰고, 유곤 형제는 그 사이에 '24우'라고 불렸다. 태위 고밀왕 사마태의 속관으로 벽소되었고 빈번히 저작랑, 태학박사, 상서랑으로 옮겨갔다. 조왕 사마륜이 집권하여 유곤을 기실독으로 삼아 중랑으로 전업하였다. 사마륜의 아들 사마과는 유곤의 자형이었고 유륜의 부자 형제가 사마륜에게 위임받았다. 사마과는 황태자가 되고, 유곤은 사마과의 첨사가 되었다.
삼왕이 사마륜을 토벌하자 유곤은 관군(冠軍)으로서 가절을 받고 손수의 아들 손회와 숙위병 3만을 거느리고 성도왕 사마영을 만나 황교에서 싸우다가 대패하여 돌아오고, 분하교에서 스스로를 견고하게 하였다. 제왕 사마경이 조정에 나서자, 그의 부형은 모두 당세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소유하고, 형여를 중서랑으로 삼았으며, 상서좌승으로 전사도좌장사(轉司徒左長史)를 전하였다. 패망하여 범양왕 사마효가 허창에 진을 치자 이로 인해 사마가 되었다.
진혜제가 장안에 이르자, 동해왕 사마월이 모의하여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맞이하였다. 유곤의 아버지 유번을 회북호군, 예주자사로 삼았다. 유교가 허창에 있던 사마효를 공격하자, 유곤은 또한 여남태수로서 두육 등을 통솔하여 구하러 갔으나 미처 도착하지 못해 구원에 실패하였고, 유곤과 사마효가 모두 하북으로 도망가자, 유곤의 부모는 마침내 유교의 손에 떨어졌다. 기주자사 온선을 설득하여 자리를 사마효에게 양도하게 하고 유주에 가서 왕준에 구걸하여 팔백 명을 얻고, 사마효와 함께 동평왕 사마무를 무너뜨렸다. 유교는 남쪽으로 도주했고 다시 부모를 찾았다. 또 석초를 베고 여랑을 항복시키니 모든 군대가 장안에 영접하였다. 이 공으로 광무후(廣武侯), 식읍 2천호에 봉해졌다. 진회제 영가(永嘉) 원년(307)에 병주자사가 되고, 진위장군(振威將軍)을 더하고 영흉노중랑장이 되었다 유곤이 길에서 상소하기를 병주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상서에게 병주에 곡식 오백만 두와 오백만 필의 견직물, 오백만 근의 솜을 달라 하였다. 진민제가 즉위하자 대장군, 도독병주제군사에 임명되어 병주의 군사를 통솔했다. 315년 병주, 유주, 기주 3주의 병사를 감독하는 도독병기유삼주제군사와 사공을 제수하였으나 사공은 사양했다.
유민들을 돌보는 한편 홀로 하북을 지키면서 유총과 석륵에게 저항했다. 316년 사공부의 장사 이홍이 병주를 들어 석륵에게 항복하자 근거지가 없어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그전부터 같이 활동하던 선비족 단필제에게 달아나 맹약을 맺어 진나라 황실을 보위하기로 했고 316년 민제가 한나라에 잡혀가자 317년에 건강에 있던 진원제에 황제에 즉위할 것을 권진하였다. 318년 단필제가 유곤을 의심하고 단필제의 동생 단숙군이 부추기니 유곤을 목을 졸라 죽이고 그 조카 4명도 살해되었다. 유곤의 부하인 노심, 최열 등은 잔당을 이끌고 요서군의 단말배 휘하로 들어가고, 그곳에 있던 유곤의 세자 유군을 맹주로 받들었다.
온교가 유곤은 황실에 충성을 다하다가 집안은 무너지고 자신은 죽었으니 마땅히 상을 내리라고 상주했고, 그 몇년 후에 태위와 시중을 증직하고 시호를 민공(愍公)이라 하였다.
문장이 호방함으로 인정받았으며 영가의 난을 거친 뒤에는 시의 풍조가 비장강개한 음조를 띠었다. 애처로운 글을 잘 지었으며, 우아하고 장중하며 풍격이 다양하다는 평을 들었다. 작품으로 《유월석집(劉越石集)》 등이 있다.
예문류취에 인용된 세설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유곤이 빈성에서 호적(胡賊)들에게 포위를 당해 계책이 없었는데 저녁이 되고 유곤이 달빛이 비추는 누대에서 휘파람을 부니 호적들이 처연하게 탄식하였다. 그리고 한밤중에 호가(胡茄)를 연주하자 호적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허탈해하고 누구나 모두 고향 생각이 절절하였다. 밤이 깊어져 달이 지려고 할때 또 노래를 부르자 호적들은 포위를 풀고 사라져 버렸다. 혹은 이 일화는 유보가 겪은 일이라고도 한다.
자치통감과 세설신어에 따르면 그는 사람을 부르는 재주는 있었으나 그를 통솔하지 못하니 하루에 수천명이 귀부하고 또 그만큼이 빠져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