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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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劉群(? ~ 352)
서진 및 후조의 인물. 자는 공도(公度). 기주(冀州) 중산국(中山國) 위창현(魏昌縣) 출신. 서진의 광무후(廣武侯) 유곤의 아들.
2. 생애
병주자사에 임명된 아버지 유곤을 따라 진양(晉陽)으로 들어가 편군장군에 임명되었다. 유곤은 청렴하고 신실한 성격에 결단력이 있어 휘하의 병사들이 그를 믿고 따랐으며, 유곤이 한(漢)의 침공에 맞서 싸울 때 종군하였다. 이후 그는 광무후 세자로 세워졌다.건흥 4년(316년) 12월, 유곤이 진양을 잃고 계(薊)에 자리잡고 있던 선비족 단부의 단필제에게 의지하자, 유군도 아버지와 함께 단부로 들어갔다.
건무 2년(318년) 정월, 단부의 대인 단질육권이 사망하고 그 아들이 어려, 숙부인 단섭복진(段涉復辰)이 세력을 장악하였다. 단필제는 일단 형 단질육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에 참가하기 위해 계에서 나와 요서(遼西)로 급히 달려갔다. 이때 유군도 단필제를 수행해 장례식에 참가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단필제를 따라나섰는데, 단말배의 헛소문에 넘어간 단섭복진이 단필제가 대인 자리를 빼앗기 위해 오는 줄로만 알고 군대를 일으켜 경로를 막았다. 단말배가 그 틈을 타서 단섭복진을 습격해 살해하고 선우를 자칭하며 단필제를 공격하니, 단필제는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계로 도망쳤고 유군은 단말배에게 사로잡혔다.
단말배는 유군과 유곤을 이용해 단필제를 제거할 모략을 꾸미고, 포로로 잡힌 유군을 예우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이후 유곤을 유주자사로 삼은 뒤, 유군으로 하여금 내응하여 단필제를 함께 도모하자는 내용의 서신을 쓰게 하여 이를 은밀히 유곤에게 보냈다. 그러나 단말배의 밀정은 도중에 순찰돌던 단필제의 기병에게 붙잡혀 서신을 탈취당하였다. 단필제는 계의 정북소성(征北小城)을 지키고 있던 유곤을 소환해 유군의 서신을 보여주었고, 본래 유곤을 신임하고 있었기에 대강의 해명을 들은 후 다시 정북소성으로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때 단필제의 동생인 단숙군(段叔軍)이 나서서 반대하자, 다시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유곤을 그대로 억류시켰다.
한편, 자리를 비운 아버지 대신 정북소성을 지키던 유곤의 서자 유준(劉浚)은 단필제를 만나러 간 유곤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생겨 좌장사 양교(楊橋) 등과 의논한 끝에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이에 단필제는 정북소성을 공격해 무너뜨린 후, 유곤의 배신을 확신하여 그를 목졸라 죽이고, 유준을 포함한 그 아들과 조카 4명을 모두 붙잡아 주살하였다. 유곤의 부하인 노심, 최열(崔悅) 등은 유곤의 잔당을 수습해 요서의 단말배에게 달아났고, 그곳에 있던 유군을 맹주로 받들었다.
태녕 3년(325년) 12월, 요서공 단말배가 죽고 그 동생 단아(段牙)가 뒤를 이었는데, 단아가 모용부와 화친하여 도읍인 영지(令支)를 떠나는 결정을 내리자 부족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단질육권의 손자인 단요(段遼)가 부족원들을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단아를 죽였다. 이후 스스로 단부의 수령 자리에 오른 단요는 유군을 좌장사로 삼고, 노심을 우장사로 삼아 보좌케 하였다.
함강 4년(338년) 3월, 후조와 전연이 연합하여 전연의 연왕(燕王) 모용황의 군대가 단요의 동생 단난(段蘭)을 전사시킨 후 영지 이북의 여러 성채를 휩쓸었고, 후조의 천왕 석호의 군대가 금대(金臺)에 주둔하였다. 이에 단부의 어양(漁陽), 상곡(上谷), 대군(代郡)의 태수와 재상들이 일제히 항복하여 성 40여 개가 후조에 넘어가니, 단요는 감히 싸울 생각도 못하고 밀운산(密雲山)으로 달아났다. 결국, 유군, 노심, 최열 등도 성의 창고를 봉인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천왕 석호는 유군을 예우하여 중서령에 임명하였다가 얼마 뒤에 진주(秦州)자사로 삼았다.
태녕 원년(349년) 11월, 의양왕 석감이 황제로 즉위하자 유군을 상서좌복야로 삼았다. 그러나 유군은 후조 조정의 현직을 지내면서도 노심, 최열 등과 마찬가지로 항상 갈족을 섬기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영흥 원년(350년) 정월, 대장군 염민이 난을 일으켜 후조의 황제 석감과 황족들을 몰살하고 염위를 건국하였다.
영흥 원년(350년) 정월, 신흥왕 석지가 양국(襄國)에서 후조의 황제로 새로 즉위하고, 석독(石瀆)의 장하도(張賀度), 여양(黎陽)의 단근(段勤), 번양(繁陽)의 유국(劉國)과 근돈(靳豚)에게 명해 염위의 수도인 업(鄴)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염민은 유군을 행대도독(行台都督)으로 삼고 장하도 토벌에 종군하게 하였다. 유군은 염민을 따라 창정(蒼亭)에서 장하도 등을 대파해 적군 28,000여 명을 사살하고, 패퇴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음안(陰安)에서 다시 격파해 근돈을 참수하고 그 무리를 모두 사로잡았다.
영흥 3년(352년) 4월, 전연의 연왕 모용준이 보국장군 모용각을 파견해 양국에서의 패전 이후로 세력이 위축되어 있던 염위를 정벌하게 하였다. 염민은 유군, 대장군 동윤(董閏), 거기장군 장온(張溫)과 함께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나와 안희(安喜)에 진을 쳤다가 전연군이 다가오자 상산(常山)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전연군의 진군 속도는 예상 외로 빨라 염대(廉臺)에서 뒤를 따라잡혔으나, 염민의 용맹함 덕에 염위군은 전연군을 상대로 10번 싸워 10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에 모용각은 참군 고개의 조언을 참고하여 활 잘 쏘는 병사 5,000명을 선발하고, 말들을 쇠사슬로 이어서 방진을 구축한 상태로 전진하면서 염민을 평지로 유인하였다. 모용각의 계책에 걸려들어 방진 내부로 들어가 겹겹이 포위당한 염민은 적군 수백 명을 죽여 가까스로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염민이 20리 정도 도망쳤을 때 타고있던 천리마 주룡(硃龍)이 화살을 맞고 죽는 바람에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모용각이 염위군을 공격하니, 황제 염민을 잃은 염위군은 궤멸당했고 유군은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