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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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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석어당 德壽宮 昔御堂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 1904년 (중건) |
<colbgcolor=#e3ba62> 석어당[1] |
[clearfix]
1. 개요
덕수궁의 주거 건물이다.2. 이름과 현판
'석어(昔御)' 뜻은 '옛날(昔)에 임금(御)이 머물던 곳'이다.<colbgcolor=#e3ba62> 석어당 2층(왼쪽)과 1층(오른쪽)에 걸린 현판[2] |
3. 역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불탔다. 1년 뒤인 1593년(선조 26년) 한양 수복 후 환도[4]한 선조는 지낼 곳이 없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렀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부르다가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이후 광해군은 계모[5] 소성대비(인목왕후)와 이복여동생 정명공주를 이 궁에 유폐시켰고, 이름도 서궁(西宮)으로 바꾸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인조가 소성대비를 만나러 이 곳에 왔으며, 소성대비에게 인정받은 뒤 서궁에 있는 선조가 머물던 전각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궁의 이름도 경운궁으로 환원했다.
그러나 인조는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운궁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을 사실상 해체했다. 하지만 정릉동 행궁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선조가 사용했던 건물 2채를 남겼다.#
<colbgcolor=#e3ba62> 경운궁에 많은 관심을 보인 영조 |
<colbgcolor=#e3ba62> 경운궁을 중건한 고종황제 |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즉조당을 달리 부르던 명칭 '석어당'을, 현재 자리(즉조당 동남쪽)에 있는 2층 건물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그 직후인 듯 하다. 그 근거로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당시 고종이 ‘환궁할 당시 경운궁에는 즉조당 하나 뿐이었다’고 발언했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7] 석어당이 별도로 존재했으면 같이 언급을 했을텐데 안한 걸로 보아, 환궁 당시까지 석어당 명칭은 즉조당의 별호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저 2층 전각이 경운궁 대공사 때 처음 지은 것인지, 아니면 선조 때부터 남아있던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앞에 썼듯, 인조 때 남긴 건물이 즉조당 외에도 1채 더 있었다는 점#, 건물 양식이 민가에 가까운 점, 그리고 옛날에 왕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 이름을 굳이 새 건물에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볼 때, 정릉행궁 시절부터 존재했던 건물인 듯 하다. 1904년(광무 8년) 4월 27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서는 '인목대비가 머물던 전각'이라 했다.
환궁 후 고종은 정식 침전 함녕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석어당에서 머물렀다. 1899년(광무 3년) 1월에는 고종의 친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1주기를 맞아 망곡례[8]를 석어당의 행각에서 행했다.#
1904년(광무 8년) 앞서 언급한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예전 모습 그대로 재건했다. 1933년 일제의 궁궐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덕수궁의 건물이 헐렸을 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을 2세트 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1층의 경우 초익공 양식의 공포를 두었으나 2층에는 공포가 없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다. 용두, 잡상, 취두를 일체 올리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 뒷면 외관은 앞면과 꽤 차이가 있다. 기단부터 다른데 지형의 특성 상 뒷면 기단은 장대석 1벌대이다. 그리고 뒤에서 볼 때 기준으로 2, 3, 5, 7, 8칸에 각각 가퇴를 설치했고 가퇴의 측면에는 4벌의 계단을 두어 출입가능하게 했다. 또한 양 가퇴 사이에 쪽마루를 설치했고 마루의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11]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으로 동쪽에 2개, 서쪽에 9개이다. 난간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빈 공간이 있는데 이 앞에 댓돌이나 계단이 없다. 원래 그런 건 아니었고 나중에 사라진 것.
- 바깥 면의 창호를 살펴보면, 정면 기준 2, 3, 6, 7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 창호는 정(井)자 살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2층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로 되어있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뒷 툇간으로 나가는 문짝은 아(亞)자 살로 화려하게 만들었고, 동온돌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의 경우 정(井)자 살이다.
<colbgcolor=#e3ba62> 대청[A] |
<colbgcolor=#e3ba62> 동온돌[A] | <colbgcolor=#e3ba62> 서온돌[A] |
<colbgcolor=#e3ba62> 석어당 2층 내부[A] | <colbgcolor=#e3ba62> 석어당 용 그림[A] |
4.1. 일제강점기 이전
현재 석어당 외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금 변형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그린 그림과 일제강점기 초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colbgcolor=#e3ba62> 《임인진연의궤》에 실린 관명전, 즉조당, 석어당의 모습. 오른쪽 밑부분의 전각이 석어당이다. |
<colbgcolor=#e3ba62>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석어당 모습[18] |
<colbgcolor=#e3ba62> 일제강점기의 석어당 모습[19] |
5. 여담
<colbgcolor=#e3ba62> 석어당 2층에서 바라 본 풍경[21] |
<colbgcolor=#e3ba62> 석어당 AR 안내 표지판 |
- 의외로,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시즌 1에, 그것도 첫 회 첫 장면에 등장했다. 결혼을 앞둔 부부들이 웨딩 촬영을 하는 배경으로 나온 것. 이혼조정위원장 역의 신구가 이들을 바라보면서 결혼과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 버추얼 스트리머 향아치가 2023년으로 타임워프한 뒤에는 이 석어당 2층에 몰래 숨어들어 불법 거주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실제 방송 배경도 석어당 2층에서 바라 본 풍경과 유사하다.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트위터.[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이는 즉조당 현판도 마찬가지이다.[4] 還都. 임금이 수도로 돌아오는 것.[5] 인목왕후는 의붓아들인 광해군보다도 9살이나 어렸다.[6] 임금이 서울로 돌아온 후 60갑자가 세 번째로 돌아왔다는 뜻. 1653년(효종 4년)이 1주갑, 1713년(숙종 39년)이 2주갑, 1773년(영조 49년)이 3주갑이다.[7] 정말 말 그대로 즉조당만 달랑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고, 제대로 된 이름과 위상을 가진 건물이 즉조당 뿐이었다는 뜻이다.[8] 빈소나 능묘를 바라보며 곡을 하는 의례.[9]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도 2층이지만, 실내는 층 구분 없이 뚫려있다.[10] 조선시대까지 석어당처럼 침루로 불리는 2층 건물이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덕궁에 있었던 경훈각의 2층인 징광루이다. 일제가 경복궁 내전을 뜯어와 창덕궁 내전으로 만들면서 징광루는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5대궁, 전국의 별궁들이 거의 전부 훼철되어서 현재 2층 전각은 석어당뿐이다.[11]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A]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A] [A] [A] [A] [17]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잔치에 관한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18]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19]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20] 지금과 모습이 달라서 윗 사진을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이전 석어당을 찍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2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트위터.[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이는 즉조당 현판도 마찬가지이다.[4] 還都. 임금이 수도로 돌아오는 것.[5] 인목왕후는 의붓아들인 광해군보다도 9살이나 어렸다.[6] 임금이 서울로 돌아온 후 60갑자가 세 번째로 돌아왔다는 뜻. 1653년(효종 4년)이 1주갑, 1713년(숙종 39년)이 2주갑, 1773년(영조 49년)이 3주갑이다.[7] 정말 말 그대로 즉조당만 달랑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고, 제대로 된 이름과 위상을 가진 건물이 즉조당 뿐이었다는 뜻이다.[8] 빈소나 능묘를 바라보며 곡을 하는 의례.[9]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도 2층이지만, 실내는 층 구분 없이 뚫려있다.[10] 조선시대까지 석어당처럼 침루로 불리는 2층 건물이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덕궁에 있었던 경훈각의 2층인 징광루이다. 일제가 경복궁 내전을 뜯어와 창덕궁 내전으로 만들면서 징광루는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5대궁, 전국의 별궁들이 거의 전부 훼철되어서 현재 2층 전각은 석어당뿐이다.[11]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A]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A] [A] [A] [A] [17]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잔치에 관한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18]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19]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20] 지금과 모습이 달라서 윗 사진을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이전 석어당을 찍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21] 사진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