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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00:32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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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Dongnimmun Arch,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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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면적 1,64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대한제국, 1896년 ~ 1898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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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문2.jpg
<colbgcolor=#87ceed> 독립문[1]

1. 개요2. 역사
2.1. 설치 배경2.2. 설치 이후2.3. 현대
3. 편액 글씨 관련 학설4. 사건 사고5. 독립문의 이름에서 따 온 것들
5.1.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5.2. 대한민국 육군 제1공병여단 독립문부대5.3.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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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문() 또는 서울 독립문은 외세에 대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설립한 건축물이다.

사적 제32호로,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공되었다.[2]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기념비(monument)로서 만든 것이다. 크기는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다. 디자인은 서재필이 담당했다.

흔히 청나라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협회영은문[3]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로는 영은문 철거와 독립문 건설 간에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으며 영은문을 헌 것도 독립협회가 아니다. 그리고 청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외세에 대한 자주독립 의미로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본의 도움으로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났다'는 조선총독부의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었으나, 당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는 문으로 사용되었다.[4]

현재 독립문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건립 당시의 위치(구 영은문 위치)는 아니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독립문역 사거리 중심부에 해당하며, 금화터널사직터널을 잇는 현저고가도로 공사를 위해 원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70미터 정도 들어 옮겼다.

2. 역사

2.1. 설치 배경

보통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후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하면서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라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영은문 철거와 독립문 건립 사이에는 아무런 연속성이나 관련성이 없으며 별개의 일이다. 영은문은 1895년 2월 김홍집 내각에 의해 철거되었는데 독립문을 세울 계획은 전혀 없었으며 영은문 철거 이후 그 터는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96년 들어 독립문 건립 추진 운동이 일어났고 같은해 6월에 고종이 독립문 건설 계획을 승인하면서 독립문 건설이 시작되었다.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the King has decided to erect upon the ruins of the arch outside the West Gate, a new one to be entitled Independence Arch. 독립문.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6월 20일

또한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6월 20일 사설에서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와 모든 유럽 열강들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명시해 놓았다.
This arch means independence not from China alone but from Japan from Russia and from all European powers.
독립신문 영문판 1896년 6월 20일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친일 인사들은 모두 복권되고,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서재필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의 고문[5]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2월에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이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 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 일본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6],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1896년 7월에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으로는 이완용을 정했다.[7]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독립문 건설을 위해 서재필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토대로 기본 스케치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 공사관 출신 스위스인이 설계를 했으며, 시공은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이 담당하였다.[8]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고종의 하사금으로 충당했다.

2.2. 설치 이후

파일:external/www.poongsoojiri.co.kr/db56e21e781ca1512c3ff280336ed391195357.jpg
<colbgcolor=#87ceed> 완공 직후 독립문
이후 조선인 건축사 심의석이 건축을 맡아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 부지에서 공사에 돌입했고,[9] 이후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해 동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도 이를 지지했다. 그 후 1897년 11월에 완공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다.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기가 소위 말하는 '독립문 태극기'이다.[10] 하지만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서재필이나 박영효와의 문제로 대한제국과 틀어지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독립문을 이용했다. 한편으로는 독립문이 한국 독립운동의 요소로 쓰였는데, 독립군가에 나오는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란 구절이 대표적이다.

2.3. 현대

1979년,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성산로[11]를 건설하는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와 금화터널 예정지가 독립문 부지와 간섭되자, 이를 이격시켜 고가도로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다. 1979년에 성산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했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고가가 꼭 일직선이어야만 되냐? 이 짜슥들아? 반원형으로 돌아가면 안되냐? 관광상품이란 것은 '굴만 파면 빨리 돌아갈 수 있는 길을 한국 사람들은 바로 저 독립문 때문에 멀리 돌아가기로 했단다.' 하는 안내문이 만드는 거다. 이 인간들아! 누가 독립문을 옮기냐!" 라고 강하게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독립문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독립문 고가 차도가 일산, 운정, 행신, 가좌동, 연대앞을 비롯한 수도권 서북부 지역과 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 도로라서 반발이 엄청날 게 뻔해서 복원이 어렵다. 일산신도시, 운정신도시를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 버스가 이 독립문 고가 차도를 지나갈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다.

이전하기 전까지 독립문은 순수 석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전 과정에서 내부를 열어보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임이 드러났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한글도 우에서 좌로 썼기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다.

3. 편액 글씨 관련 학설

독립문의 편액 글씨를 누가 썼는가에 대해선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이완용이 썼다는 것과 둘째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썼다는 것이다.

3.1. 이완용

'독립문 편액을 이완용이 썼다'는 설과 관련하여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은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 게재된 고정 연재물〈내 동리 명물〉에 실린 한 기사에서의 언급이다.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우에 색여잇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리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리완용이라는 달은 리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령수 후작 각하올시다. (원문)
그 위에 새겨져 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다른 이완용이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입니다. (현대어역)

한편 《이완용 평전》을 쓴 윤덕한은 독립문의 글씨가 이완용 것이 맞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00% 이완용 글씨입니다. 정동파가 중심이 돼 창립한 독립협회지요. 외부 대신 이완용은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이 되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어요. 김가진도 발기인이긴 했지만 그는 친일파였어요. 정동파가 주도한 사업에 현판 글씨를 쓰겠다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주장의 한계는 '당대 이완용이 독립문 건립에 많은 지원을 했다'는 정황 외에 어떠한 직접적 증거나 증인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남긴 한문 자료는 서예, 자서전 등 지금도 많지만 한글로 쓴 자료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필적 대조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3.2. 김가진

친일파 연구 전문가 정운현은 편액을 쓴 사람이 이완용이 아니라는 증거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자서전인 《일당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이 66세 될 적인 1923년 1월 11일 직지사에 대웅전, 천왕문 등 두 개의 편액을 쓴 건 소상히 썼음에도 독립문 글씨와 관련된 것은 한 줄도 없다.

둘째.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내 동리 명물〉에 실린 독립문 관련 글의 신뢰도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 글은 정식 취재 기사가 아닌 당시 교북동에 살던 한 주민의 이야기를 실은 것이라 근거가 부족한 면이 있다.

셋째. 독립문 편액은 한글, 한자 할 것 없이 이완용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완용의 친필 서체는 주로 해서체이고 획이 날카로운 반면, 독립문 편액은 글씨 획의 끝이 뭉텅하여 선이 굵고 힘찬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손자인 김자동[12]은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서 김가진이 쓴 글이라고 주장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서대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 ~ 1922)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 ~ 1991)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중앙SUNDAY 기사에서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이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금마문, 폄우사, 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김가진이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황제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했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했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했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했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독립문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김가진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4. 사건 사고

파일:인공치하 독립문.jpg 파일:북한군 독립문.jpg
북한군 서울 점령 당시 독립문에 걸린 선전 문구 1.4 후퇴 이후 서울을 재점령한 북한군이 영은문 주춧돌에 인공기를 부착하는 모습

5. 독립문의 이름에서 따 온 것들

5.1.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

구 평안섬유공업, 현 평안엘앤씨에서 1971년에 PAT(Pyong-An Textile의 약어)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사용한 내의 브랜드명이다. PAT로 바꾼 이후에도 한참 동안 독립문 PAT라고 친숙한 브랜드명을 함께 사용했다. 지금은 코뿔소 모양 상표를 쓰고 있다. 창업주 일가는 고향이 평안도독립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다. 평안섬유공업, 독립문이라는 이름도 이 경력으로 인해 쓰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당시에 "여성용 빤쓰는 독립문표, 남성용 빤쓰는 쌍방울표"라는 화장실 유머도 있었다.

5.2. 대한민국 육군 제1공병여단 독립문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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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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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7. 관련 문서


[1] 독립문 바로 앞 두 개의 돌기둥은 영은문 주초다.[2] 문화재청 공식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1898년 1월 건축이다[3] 조선의 국왕이 직접 나가 명나라 칙사를 맞이하던 곳이다.[4]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 발간한 달력의 그림이 국내진공작전을 실현해 독립문을 통해 개선하는 모습이고,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가 나오는 것 등이 그 예시다.[5] 이 시기의 중추원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6] 이 과정에서 로마노프 - 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었다.[7] 이 시기의 이완용은 고종에 의해 촉망받는 신진 관료로, 미국 공사관 주재 경험을 갖춰 친미파로 간주되었으며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해서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았다.[8] 사바틴, 사바찐 등으로 불리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건축가가 독립문 설계에 참여하였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나 실제로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치된 의견이 없다. 첫째로, 서재필의 구술 회고록에서 서재필은 사바틴이라는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독일 공사관 출신의 스위스인이 설계한 것이고, 다만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뿐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둘째로, 독립문의 설계도나 공사허가증 등 어떤 1차적 공식사료에도 사바틴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라는 사료는 조선총독부가 한참 뒤에 간행한 경성역사서에 처음 등장할 뿐이며 그 사료가 사바틴을 독립문의 설계자로 특정한 근거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몇몇 친러 학자들이 독립문의 설계자는 사바틴이라고 주장하는 선전을 피운 사례가 있으나, 실제로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라는 어떤 구체적인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사바틴이 '스위스 혈통일 수도 있으니' '서재필이 스위스계 혈통이 약간 섞인 사바틴을 스위스인으로 헷갈렸을 수도 있다'는 식의 영양가 없는 추측만이 발표되었을 뿐이다. 반면 문화재청은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이 없다.#[9] 독립문 앞에 있는 기묘한 돌기둥이 영은문의 주초로, 이후 이 주초는 사적 제 33호로 등록되어 있다.[10] '독립문 태극기'의 경우 3.1 운동 당시 민중들이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서 경성 주민들의 경우 독립문으로 가서 조각된 태극기를 보고 도안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11] 이 때 성산대교모래내고가도로가 같이 건설되었다.[12]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13] 전농련. 한총련 소속.[14] 독립문 외형의 모티브가 된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도 옆에 문이 있고 일반 관람객들이 계단으로 꼭대기에 올라 갈 수 있다.[15] 참고로 이 학교를 운영하는 법인의 이름이 '왕희학원'이다.[16] 사실 1959년 ~ 1984년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Dogribmun이 아니라 Doglibmun으로 쓰는 것이 맞았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받침 뒤의 ㄹ은 r이 아니라 l로 쓴다는 조항이 있다. 다만 저 조항이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표지판에 Dogribmun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