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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7:53

벚꽃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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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attachment/진해 군항제/But.jpg
진해 군항제의 모습.
<colbgcolor=pink>【언어별 명칭】
한국어 <colbgcolor=#ffffff,#191919>벚꽃축제
영어 Cherry Blossom Festival / Hanami
일본어 [ruby(花見, ruby=はなみ)]
1. 개요2. 역사3. 한국의 벚꽃축제
3.1. 역사3.2. 한국의 주요 벚꽃축제 및 명소
4. 해외의 벚꽃축제

1. 개요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 전후로 하여 벚꽃을 주제로 하여 열리는 지역 축제.

2. 역사

일본의 하나미(花見)에서 유래되었다. 하나미라는 단어 자체는 '꽃구경'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벚꽃 구경을 뜻한다. 왜냐하면 별도의 표기가 없다면 일본에서 하나(花)라는 단어 자체가 벚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본후기(日本後紀), 弘仁3年2月12日자 기사에 따르면,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하나미는 812년 3월 28일 사가 덴노가 신천원(神泉苑)에서 개최한 '화연의 절(花宴の節)'이다.

더 유래를 파고 들면 중국 당나라 시대에 동시기 나라 시대였던 일본이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왕실에서 유교에서 좋게 봤던 매화, 복숭아꽃, 살구꽃 등을 구경하고 놀던 것이 시초이다. 그러다가 헤이안 시대에 벚꽃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당시에도 벚꽃놀이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인기 아이템이었다.
만약 세상에 벚꽃이 없었다면, 봄을 보내는 마음이란 얼마나 평안했을 것인가
(世の中にたえて桜のなかりせば春の心はのどけからまし)
-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 825년 ~ 880년), 헤이안 시대의 일본 귀족 및 시인

이후 겐지모노가타리(11세기초)에서는 이미 '하나미'라는 단어가 벚꽃 구경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미의 의미는 벚꽃을 구경하는 것으로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를 거치면서 하나미는 각 지방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였던 요시다 겐코(吉田兼好, 1283~1352)는 도연초(徒然草)라는 산문집을 남겼는데 그중 137단에 보면 자신이 체험한 하나미와 시골에서 개최되는 하나미의 다른 점을 비교하는 문구를 남겨놓았는데 이를 보아 각 지방에 하나미의 풍습이 퍼졌고 그 양태는 지방마다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로마치 시대에 하나미를 가장 좋아했던 인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꼽힌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4년(文禄3年)에 나라지방의 요시노산에서 대규모의 하나미를 개최했는데(吉野の花見) 당시 몰린 사람은 약 5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풍경은 吉野花見図屏風라는 이름의 높이 153.0cm 넓이 356.8cm에 달하는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오늘날에도 요시노산은 일본의 대표적인 벚꽃 명소로 알려져있다.

파일:yoshino.jpg
吉野花見図屏風(부분)#


그리고 에도 시대를 거치며 서민 문화로도 퍼지게 되며 이 시기에는 벚꽃 품종의 개량도 이루어져서 품종이 다변화되었고 곳곳에 하나미의 명소도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현재 도쿄 우에노 공원이 있는 장소는 에도시대 당시 '우에노 산'이라고 불렸는데 당시에도 이 산은 많은 수의 벚꽃이 식재되어 있어 하나미 명소로 유명하였다.

이 하나미 문화는 일본이 근대화 후 자국 문화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세계 곳곳에 퍼지게 된다. 단지 벚꽃이 흩날리는 모습이 미관상 좋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일본산 벚나무 품종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를 수입해와서 공원을 조성한 경우도 많다.

3. 한국의 벚꽃축제

중부지방은 4월 상순, 남부지방은 3월 하순에 전국 각지에서 약 200여개의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린다. 유명한 벚꽃축제로는 창원진해 군항제, 서울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 등이 있다. 보통 벚나무 일대 주변을 산책하거나 돗자리를 깔고 벚꽃 구경을 즐기며, 주최 측에서는 부스, 공연장, 푸드트럭을 설치하여 축제 기간동안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축제 기간에는 축제 지역 일대에 위치한 상권의 점포들이 할인 행사를 열기도 한다. 대표적인 가족 나들이커플 데이트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벚꽃축제는 민간사업체[1] 등에서 제공하는 기상정보를 토대로 개화 시기에 맞춰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벚꽃축제에서 벚꽃을 구경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개화 시기에 열리는 축제 개막일에 맞춰서 가는 것 보다는 벚꽃이 만개하는 축제 시기 중간~말에 가야 더욱더 화려한 벚꽃을 볼 수 있다.

모든 유명 축제가 그렇지만, 유명한 벚꽃 축제는 인파가 어마어마하다. 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이 목적이라면 축제 중심부 보다는 축제 주변 지역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좋다.

한국의 벚꽃축제가 벌어지는 공원들 역시 일본산 벚나무를 심은 경우가 많다. 일본의 소메이요시노 품종 자체가 벚꽃잎이 쉽게 날려서 장관을 연출하게 개량한 품종인데다가, 일본에서 주력해서 키우는 품종이라서 다량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 한국에서는 애국심 차원에서 제주 왕벚나무를 주력으로 심어 조성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산업적으로 수목을 기르기는 너무 오래 걸리다보니 그냥 소메이요시노가 대부분이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만만찮게 일본을 싫어하는 중국에서도 벚나무 공원들의 대부분이 소메이요시노로 조성되어 있다.

3.1. 역사

하나미 문화의 유래가 중국 유교인 것과 맥락을 같이하여, 하나미와 유래는 같되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꽃구경 문화는 동아시아에 존재하였다.

한국의 경우 신라시대부터 전래한 삼짇날 꽃을 구경하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는 화류 또는 회취로도 불리는 화전놀이라는 세시풍속이 존재하고 고려 시대에는 장미연이 열렸으며, 조선 시대의 풍류문화로 봄의 상화, 여름에 연꽃을 감상하는 피서음, 가을에 국화를 감상하는 황국음, 겨울에 매화를 감상하는 매화음이 존재했으며, 구한말에는 오얏꽃조선 왕실을 상징한다고 여겨져 사랑받았다. 다만 조선시대 봄철에는 살구꽃과 복숭아꽃을 감상하였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꽃놀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국립민속박물관, 2017년 4월) 오늘날처럼 집단적으로 벚꽃을 감상하였다는 풍습, 기록, 서화 등은 남겨져 있지 않다

한반도에서 일반 대중이 대규모로 이동해 와서 같은 장소에 운집하여 함께 벚꽃을 즐기는 의미의 벚꽃놀이가 시행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초반, 서울 우이동 지역이 최초였다. 우이동의 벚나무 숲은 본래 조선시대에 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심어진 것이며 조선시대에 우이동 벚나무 숲에서 집단적으로 꽃놀이가 수행된 적은 없다. 그러던 것이 『매일신보』 1915년 5월 7일자에는 우이동 벚꽃 명소에 대해 “우이동의 사쿠라는 3년 전 일본인이 처음 발견한 이후부터 앵화의 명승지로 경성 내외에 이름이 널리 났다.”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략 일제강점기인 1912년 정도부터 최초로 벚꽃놀이가 개시된 것이다.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도심에서 떨어진 자연적으로 벚꽃이 군집한 곳에 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교통수단을 통해 운집해 특별한 인공설비 없이 주로 벚꽃을 중심으로 주간에 음악과 술과 놀이를 곁들여 봄을 즐겼다고 한다.
재작일은 일요일이라 임시열차와 자동차의 편리가 있는 고로 무려 사오천 명 되는 내선인(內鮮人)은 혹은 기차로 창동역에서 내리어 걸어오는 사람도 있고 혹은 자동차로 오는 사람도 있고 일가족을 동반하여 마차로 나오는 사람도 있으며 각 학교 학생들은 이삼인씩 무리지어 짚신 신고 벤또 싸서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은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다가 청명한 일요일을 맞아 경성 명승지 우이동의 사쿠라꽃이 아마 잘 피었으리라 생각하고 이곳에이르러 …

각 상점에 매점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장막과 포렴(布簾, 출입구에 길게 늘여 놓은 베의 조각)을 치고 간혹 유성기도 들리며 소나무 아래에 늙은 부부 두 사람은 술잔을 서로 권하면서 「여보 영감, 조선도 이렇게 좋은 데가 있구려」 하며 말하기 좋을 만큼 취한 사람도 있고 산골짜기 흰 돌위에 길게 흐르는 맑은 내에는 오리 한 쌍이 나란히 떠서 있는 것을 소학교 학생이 회초리를 휘두르며 쫓아가면서 꽁지를 훅훅 치면 「꽥꽥」하면서급히 헤엄쳐서 쫓겨 가는 것도 한 운치라 하겠고,

내지 기생들은 삼삼오오 이 사쿠라나무 아래에서 꽃에 취하여 샤미센을 뜯으면서 춤추는 모양을 옆에 둘러앉아서 술상을 벌이고 맥주병으로 나발을 불고 있던 사람은 「좋다∼ 잘 춘다」 하는 말에 [기생들은] 더욱 신이 나는 모양이다. 제국 국기와 만국 국기가 바람에 번득이는 아래에는 넓은 마당에서 내지 남녀들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어린 아이 시절에 유치원이나 소학교에서 하던 숨바꼭질도 하며 흉허물 없는 한 집안처럼 노는 것은 보는 사람들도 스스로 즐거운 마음이 생기는데 …
매일신보,1913년 4월 22일, 3면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조선 주민의 정치적 요구를 압살한 대신에 관제문화를 조성해 순응시키려 했으며 벚꽃축제는 그 수단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는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하여 벚꽃축제에 참여할 것을 장려하였고 이를 위하여 임시 관앵(觀櫻)열차를 운행하는 등 정책적으로 적극 협조하였다. 당시 경성의 벚꽃 명소로는 우이동 외에도 가오리(오늘날의 수유동, 가오리역 참조)도 있었다.

하지만 우이동은 도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고 그 규모도 당시 폭증하던 벚꽃놀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당시 조선으로 이주하던 일본인(재조일본인)은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조선에서도 하나미를 즐기면서 향수병을 달래려 했으나 막상 조선에는 벚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나미를 위한 일본산 벚나무의 식재를 꾸준히 관계당국에 요구하였다.
벚꽃은 일본인에 대해서 일종의 인상을 주고 벚꽃이 있는 곳은 반드시 일본인의 용기를 북돋아 벚꽃의 번식은 곧 일본인의 번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한반도에는 벚나무가 적어 우리들은 재주 방인의 증가와 함께 벚나무를 이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花見の季節」, 京城新報. 1909년 4월 25일, 2면
1911년 조선에 건너와 충청남도 등지에서 15년간 주로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한 일본인 관리의 말
"벚꽃은 일본의 대표 꽃이다 … 신주(神州)를 표상한다. 무사도를 생각하고 요시노(吉野)를 연상하며 불의명분에 맞서는 바로 국화(國華)로 보아야 한다 … 고향을 멀리 두고 조선에서 일하고 있는 모국인의 향수를 누그러뜨리고 그 땅에 친밀함을 갖게 하고 내지 연장의 싹을 키워서 안주(安住)할 생각을 굳히는 데 벚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국화이어야 한다"
豊田鉄騎, 星霧十五年, 帝國地方行政學會, 1926年, 238~239쪽.


이에 따라 일제는 과거 창경궁이었던 창경원에 벚꽃축제를 개최하여 그 규모를 확대하게 된다.

창경원에 벚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벚나무 300그루 정도였는데 이는 순종대부터였다. 이 무렵 순종은 덕수궁에서 나와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1908년 11월) 부친(고종)과 떨어져 살게 되어 매우 우울해 했다고 한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정미7조약’에 따라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고 있었고 궁내부 차관으로는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가 임명되어 있었는데 이완용, 이윤용 형제로부터 순종의 근황을 들은 고미야 미호마쓰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여 소일거리를 하면서 우울감을 달래라고 권하였던 것이 시초이고 이때부터 일본산 벚나무가 창경궁에 식재되었다. 이후 창경궁창경원으로 바뀌었다#.

창경원의 벚나무는 매년 보식과 증식을 계속해 1933년 경에는 2천 그루 이상이 되었다. 일제는 1918년부터 창경원에서 벚꽃놀이를 개시하였고 일부 특권층과 일본인들이 한적한 야간에 창경원에서 음주를 즐기며 밤벚꽃놀이를 즐기다가 문제가 되자 이를 일반에도 개방하자는 여론이 일어 1924년에는 야간 개원을 하여 밤벚꽃놀이까지 시작되었다.
이후 창경원의 벚꽃놀이 행사는 식민지 경성의 대표적인 오락 컨텐츠가 되었는데 1933년 조사에 따르면 창경원 벚꽃놀이 참석자수는 4월 24일~5월 1일 사이에 주야간 합쳐서 총 26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언론사가 주최하는 여행단 기획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면 1926년 4월 11일 부산일보사 및 조선민보사가 주최하는 마산, 진해 관앵 단체 여행과 운임 할인,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경성일보』 지국 주최 경성 관앵단과 운임 할인이 있었으며,1927년 4월에 진해 벚꽃 명소에는 마침 진해에서 개최하는 경상남도 창원군 외 2부 18군 물산 공진회와 겹쳐 대활기를 띠어 진해 방면으로 가는 단체만으로 2만 명을 넘을 정도였 다. 1928년 4월의 승차 인원은 216만 3006명이었는데 벚꽃 시즌을 맞이하여 각지의 관앵단을 위한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

창경원의 벚꽃놀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서 서울에 몰려들자 관광 연계 상품이 개발되었다. 1935년의 경우 벚꽃놀이를 위해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남조선」과 「북조선」에서 임시열차를 운행하였는데 무려 8,773명의 관광단이 임시열차를 이용해서 서울에 들어왔다. 또한 28일과 29일 공휴일을 이용해서 대전철도사무소 주최의 제2회 경성관광단 1,500명과 조선철도회사・경남철도회사 등의 연선으로부터 1,500명, 그 밖에 3,000명의 관광객이 입경하여 총 3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길게는 2박 3일, 짧게는 1박 2일이나 당일치기로 서울에 머물렀다. 이에 경성관광협회에서는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서울로 올라오는 각 철도사무소 주최의 경성관광단체에 대해서 「일본여관・조선여관・선사품판매점・유람버스・백화점・카페・조선요리점・내과의원・여행용품상점・사진관・조선인삼」 등의 할인권을 인쇄하야 배급했다.

또한 밤벚꽃놀이를 묘사하던 당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당시 창경원은 일탈의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일본인이 자주 눈에 띄었다고 한다.
“장안의 사람이라 생긴 사람은…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별건곤’·박우석)

또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양복 친구들이 장난을 걸 때 남성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는 기사도 보입니다.(‘별건곤’ 1930년 5월)

“창경원의 ‘밤벚꽃’은 꽃구경보다 사람구경이요…. 창경원을 휩쓸고 다니다가 좀 인적이 드문 데서 여자만 만나면 그저 ‘히야까시’(희롱)이다.”(동아일보 1935년 4월 20일)

“밤벚꽃의 짧은 시간을 흥에 겨워 뛰놀자는 풍류객(?)들이 삐루(맥주)와 월계관(정종)을 몰래 들여와 ‘부어라 먹자’ 하며 창경원이 좁다 하고 떠든다….”(동아일보 1935년 4월 12일)

“…이게 웬일인가? 창경원이면 조선 창경원일 텐데… 아무리 봐도 조선 같지 않아! 그도 그렇겠지. 입장자의 반 이상은 게다(일본인) 친구요, 나머지 반 중 반은 조선사람, 그 나머지는 양복 신사인가.”(‘별건곤’ 1930년 5월)

“술에 취한 게다(ゲタ·일본인) 친구들이 ‘꽃은 사쿠라, 사람은 무사(花は櫻 人は武士)’를 외치며 돌아다닌다. 칼이 없어서 그렇지 혹여 ‘기리스테(キリステ·무사에게 무례한 짓을 한 평민을 칼로 쳐 죽이던 일)’가 나오지 않을지….”(‘별건곤’ 1930년 5월)

“서울 사람들은 창경원에 꽃소동이 나야 봄을 깨닫고 봄에 취하는 버릇이 있다”(조선일보 1938년 4월 7일)

이 외에도 다수의 장소에 벚꽃이 식재되어 벚꽃놀이 명소가 생겼는데 가장 유명한 장소는 위의 창경원이었지만 남산 왜성대․장충단․삼청동도 벚꽃놀이 명소였으며 우이동도 전통의 명소였다(별건곤 1929년 4월호). 또한 인천 월미도,경상도 대구 달성공원ㆍ동래 온천장ㆍ신마산,충청도 청주의 앵마장(櫻馬場)ㆍ공주 금강가도(錦江街道),전라도의 광주공원ㆍ나주-순천가로,황해도 평양의 부벽루(浮碧樓)ㆍ경의선 사리원(沙里院), 강원도 춘천가도(春川街道) 등이 일제에 의해 생성된 벚꽃축제 명소였다. 진해 군항제로 유명한 진해의 벚나무 역시 일본의 강제합병 후 진해일본 제국 해군의 군항을 건설하면서 도시미화용으로 심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봄을 대표하고 봄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꽂이며 … 벚꽃이야말로 실로 봄이 갖는 최대의 자랑이며 꽃 중의 왕이다. 그러나 우리조선에는 내지처럼 많은 벚꽃의 명소가 없다. 거기에는 예부터 이 나라 사람들이 벚꽃에 대한 감상의 생각이 부족했던 원인도 있다. 벚나무는 겨우 군궁용(軍弓用)으로 썼기 때문에 경성 교외 가오리나 우이동에 식재된 이 외에는 별로 밀식된 곳도 없는 것이다 … 그런데 병합 이래 내지인의 이주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그들은 거의 그 국민성이라고도 할 만큼 벚꽃의 동경을 버리지 못하니 고국의 봄을 생각할 때도 조선에 벚꽃이 없음을 얼마나 쓸쓸하게 느꼈을까. 그 결과 백 그루 이백 그루라는 식으로 시험적으로 요시노자쿠라(吉野桜)의 이식을 시도하는 자가 나와 그 성적이 좋음이 실증되자 각지에서 다투어 이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벚꽃 명소가 곳곳에 생겨 봄에 더 많은 번창과 광명을 가져온 것이다

함경도에 들어가면 원산, 함흥, 성진, 주을 등에도 꽤 벚꽃이 심어져 북진(北鎭)의 중관(重關), 회령(會寧)에 이르기까지 거의 벚꽃이 재배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성황이다. 벚꽃과 함께 국력이 신장하여 야마토(大和) 민족의 발전을 보는 것은 기쁜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조선의 봄도 내지에 뒤지지 않는 벚꽃을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질서 있게 심어진 점에 산벚나무의 복잡함보다도 한층 경치를 좋게 하는 것이다.
亀岡栄吉(조선에 13년 이상 거주한 일본인 기자),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会, 1926年, 5~6쪽.

물론 이런 흐름에 조선인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설가 염상섭은 조선 곳곳에 퍼진 벚꽃(사쿠라)와 벚꽃놀이 풍습에 대해 이렇게 한탄하였다.##
“… 요사이 조선에서도 벚꽃놀이가 풍성풍성한 모양이다.… 조선색과 사꾸라색이 어울릴지 나는 명언(明言)할 수 없다.… 벚꽃은 조선의 하늘같이 청명한 자연색에서는 제 빛을 제 빛대로 내지 못할 것이다.… 조선의 유착한 기와집 용마름 위로나 오막살이 초가집 울타리 이로 벚꽃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암만해도 ‘식민 사꾸라’라는 것이다….”




참고자료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도 창경원 등은 벚꽃놀이의 명소로서 유명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창경원창경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식재한 벚나무를 베어 없애거나 과천 서울대공원 등 각기 다른 곳으로 이식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여의도 윤중로에 이식되어 오늘날 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의 기원이 되었다.

3.2. 한국의 주요 벚꽃축제 및 명소

4. 해외의 벚꽃축제

일본에서는 한국보다는 이른 3월 중하순에 벚꽃이 만개하기 때문에 벚꽃축제도 그 즈음에 열린다. 다만 북쪽에 위치한 도호쿠는 한국과 비슷한 4월 초중순, 삿포로 등은 한국보다 늦은 5월 초에 벚꽃축제를 연다. 또 이쪽이 기원이어서 그런지 벚꽃축제에 대한 로망 역시 국민 전반적으로 제법 높게 나타나며, 일본식 서브컬쳐에서도 툭하면 나오는 연출 클리셰 중 하나로 손꼽힌다.[5]

중국에서도 윈난성 등 각지에서 화려한 벚꽃축제가 열리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미국의 경우 1910년에 일본의 도쿄도에게서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선물받아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변에 큰 벚나무 공원이 지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국립 벚꽃 축제(National Cherry Blossom Festival)가 열린다.
포토맥 강변에 벚꽃심기를 추진한 사람은 헬렌 테프트(Helen Taft)로서 그는 다름아닌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당시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다. 우리에게 가쓰라-태프트 밀약로 유명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당시 친일본적인 정책으로 유명했기에 일본 역시 미국-일본간 우호의 상징으로 벚꽃을 기증한 것이다. 때문에 FOX NEWS같은 일부 언론은 포토맥강변에 심어진 벚꽃에 대하여 가쓰라-태프트 밀약등으로 성립된 양국간 연대를 구현하기 위하여 심어진 것("The solidarity represented by the cherry trees planted a few short years after the agreement,")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미국내에서 반일 감정이 높아져서 포토맥강변의 벚나무를 모두 벌목하자는 등의 의견이 있었고 실제 몇 그루는 당시 훼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고 단지 전쟁 중에는 벚꽃축제를 중단하는 것 정도로 대응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전쟁이 종료되어 1948년부터는 다시 벚꽃축제가 재개되어 현재까지 매년 개최되고 있다.##

호주는 남반구이기 때문에 9월에서 10월 사이에 하지만 매우 드물어서 인지도가 낮다.

[1] 한국에서의 벚꽃 개화시기 정보는 2015년 데이터까지 대한민국 기상청에서 제공하고 있었지만, 2016년 부터는 민간사업체에서 제공하고 있다. 2021년 현재 벚꽃 개화시기를 제공하고 있는 곳은 '웨더아이', '케이웨더' 등이 있다.[2] 불국사 앞에는 곁벚꽃이 핀다. 이 명소 이후에 핀다.[3] 광주광역시에서 유일하게 벚나무가 밀집한 공원이어서 매년 봄에 벚꽃놀이가 열렸으나 부지가 매각되어 농성 SK뷰 센트럴이 지어지면서 사라졌다. 광주 도시화 과정 속에서 사라진 경양방죽처럼 광주시민의 추억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그 타이틀은 운천저수지가 가져갔다. 운천저수지는 광주도시철도 2호선 공사로 2년 후에 볼 수 있다.[4] "사쿠라는 일본꽃, 벚꽃축제 미친 짓"이라며 시위하는 남성이 화제가 되었다.이를 본 누리꾼들은 반일과 벚꽃이 무슨 상관이냐며 남성의 행동이 답답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벚꽃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건데?","반일이랑 벚꽃을 엮는 건 좀 너무 갔다" 등의 의견을 남겼다. #[5] 뭣보다도 컨셉은 단순해도 벚나무 여러 그루가 모두 화려하게 피어있다는 배경이 반드시 동원되므로, 비주얼이 굉장히 받쳐주기에 그런 걸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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