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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社會大衆黨,ruby=しゃかいたいしゅうとう)] | 사회대중당 | |
한국어 번역 명칭 | 사회대중당 |
창당일 | 1932년 7월 24일 |
해산일 | 1940년 7월 6일 |
이념 | 사회민주주의[A] 반자본주의[A] 반공주의[A] 반파시즘 (1938년 이전)[A] 전체주의 (1938년 이후)[A]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1938년 이전)[6] 제3의 위치 (1938년 이후) |
주요 정치인 | 아베 이소오 가타야마 데쓰 등 |
전신 | 전국노농대중당(全國勞農大衆黨) 사회민중당(社會民衆黨) 전국대중당(全國大衆黨) 노농당(勞農黨) |
후신 | 대정익찬회 (공식) 일본사회당 (전후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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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시절에 존재한 무산정당. 전쟁 전 일본의 주요 무산정당들을 통합하여 창당되었다.2. 역사
1920년대 당시 정부의 탄압[7]과 좌파와 우파의 분열, 그리고 재분열로 사분오열[8]되었던 일본의 제도권 무산운동은 대공황으로 밀어닥친 자본주의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입지확장에 실패하자, 단일대오를 꾸려야한다는 중간파의 주도로 좌파내 용공파와 우파내 국가사회주의파를 갈라치고 그 나머지를 규합하여 유일한 제도권 좌익정당으로써 창당되었다.이 합동과정에서 무산운동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노동농민당의 주류였으며 후일 노농파[9]라고 불리는 좌파는 당 주류에서 밀려나 37년의 인민전선사건(人民戦線事件)으로 관짝에 못이 박혔고, 사대당의 창당을 주도했던 중간파와 우파가 당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양 정파는 반공주의 노선에 대해서는 이해가 같았으나, 이념적으로 반공주의기는 했지만 의회주의를 불신했던 중간파는 육군 통제파와 혁신관료의 성장에 주목하여 이들을 사회혁신의 전위로 끌여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체제의 현상유지를 전제로 한 혁신을 지지했던 우파는 의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매진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안갯속 정국에서 제도권 정치를 벗어나지 못한 우파의 노선은 군을 끌여들여서라도 사회를 변혁하자는 중간파의 친군적 혁신노선에 대항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인텔리층이 주류였던 중간파는 당 매체를 쉽게 장악하고 당의 이론적 입장을 완전히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간파가 당을 이념적으로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중당 시절부터 노조에 지지기반을 두었던 우파는 이를 등에 업어 당내의 일정한 지분을 보장받으면서 자기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의회주의를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군을 내세우던 사대당은 1937년 총선에서 기성정치에 대한 반감 덕택에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과 함께 주요 제3당으로 부상한다. 그런데 이 총선 후 등장한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력전 수행을 목적으로 경제통제를 시도하는 한편 혁신정치를 표방하며 일국일당운동에 불을 붙였다. 친군을 주장한 중간파와 체제유지를 주장한 우파 모두 중일전쟁과 제국주의적 침략에는 적극적으로 찬동하였으나, 기존부터 의회주의에 회의적이었던 중간파는 고노에의 독재정당 창립시도, 이른바 고노에신당운동에 적극적으로 부화뇌동하면서 다른 혁신세력들, 특히 나카노 세이고의 파시스트 정당인 동방회(東方会)와 합동하여 반의회주의적 혁신세력의 결집을 시도한다. 그러나 체제유지, 의회주의 노선을 지켜온 우파는 이 시도에 비토를 놓아 좌절시켰고, 이 사태를 계기로 사대당 내 중간파와 우파의 분열은 겉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다.
이 분열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1940년 2월의 이른바 반군연설(反軍演説) 사건이었다. 당시 입헌민정당 중의원 의원이었던 사이토 다카오가 중일전쟁을 비판한 것이 제국의회 내 친군파를 자극하여 사이토 의원을 의회에서 제명시켰던 일이다. 살기등등한 군부의 기세로 대놓고 반대표는 던질 수가 없어 다만 투표에 기권하는 것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했고, 아예 결석하는 것은 가장 강한 반군 의사표명으로 비춰졌다. 그런데 여기서 사이토의 제명을 가장 적극적으로 선동하고 친군을 내세운 것이 바로 아소 히사시, 가와카미 조타로,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을 위시한 사대당의 중간파이며, 여기에 반해 아베 이소오, 가타야마 데쓰, 니시오 스에히로, 미즈타니 조사부로, 마츠모토 지이치로, 요네쿠보 미츠스케 등 우파 지도부는 전원 결석 및 기권함으로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군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결석 및 기권을 트집잡은 중간파는 우파가 비애국적이라는 이유로 사대당에서 제명시켜버리고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반년도 지나지 않아 7월, 고노에가 이른바 "정치신체제"를 부르짖으며 총리 복귀 초읽기에 들어가자, 정치신체제에 참여하겠다는 명목으로 당을 해산시켰다.
이 정치신체제는 이후 대정익찬회로 현실화되었으며, 사대당 중간파 출신이 익찬회의 창립 간부진에 대거 합류하면서 보수파의 우려를 샀으며, 대정익찬회가 빨갱이라는 인식에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1941년에 들어서면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관념우파의 반격으로 대정익찬회가 사실상 정치적 거세를 당하면서 사대당 출신 간부들의 위상도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특히 1942년의 이른바 익찬선거에서는 단순히 사대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추천을 거부당하거나 아예 출마를 포기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수모를 겪으면서 사대당 중간파는 좌파와 우파의 뒤를 따라 사라지게 된다.
전후의 일본사회당은 사대당의 후신격으로, 그 좌파, 중간파, 우파가 합작하여 창당되었다. 그러나 중간파 천하였던 전전의 사대당 시절과는 달리, 전후의 일본사회당 내에서의 중간파는 좌파와 우파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뿐만 아니라 공직추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그야말로 동네북으로 전락하였고, 우파는 가타야마 내각 - 아시다 내각 시기의 실패와 쇼와전공 사건 등으로 몰락했다. 자연스레 전후 일본사회당의 헤게모니는 그동안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투쟁을 하다가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고초를 겪은 사대당 좌파와 그 후계로 넘어갔으며, 여기에 반발한 잔존 중간파와 우파는 이른바 우사당 그리고 사회당 재통일 이후엔 재분열하여 민사당을 창당하면서 떨어져나가게 된다.
3. 같이 보기
[A] Yoshimi, Yoshiaki. "社会大衆党(しゃかいたいしゅうとう)とは". kotobank.jp (in Japanese). Retrieved February 15, 2020. (from Encyclopedia Nipponica)[A] [A] [A] [A] [6] 당대 일본 제국 주요 무산 계급 운동 중에서 가장 온건하고 친체제적(친내셔널리즘, 친제국주의적)이였고, 따라서 당시 일본 제국 기준에서 온건 좌파(穏健左派)로 여겨졌다.[7] 당시 공산당은 아예 불법이었고 노동농민당(1926~1928)같은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도 2년만에 강제 해산당하는 등 심한 탄압을 당했다.[8] 가령 1930년 당시 전국민중당/일본대중당/사회민중당/신노농당 등 4개 정당으로 분열되었었다.[9] 일본공산당의 주류파였던 강좌파와 일본 자본주의 발전단계 논쟁을 벌였으며, 메이지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모든 반부르주아 기층 민중을 결합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