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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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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 (북단)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남단)
개통
1978년 11월 21일 (구 행주대교)[1]
1995년 5월 19일 (행주대교)
2000년 12월 16일 (신행주대교)
시공 관리
벽산건설[2] 서울특별시
길이 / 폭
길이 1460m, 폭 14.5m (편도 각 3차선)
구조형식
프레스트레스트 케이블[3] 사장교
(PC[4] Cable-stayed girder Bridge)
프레스트레스트 콘크리트 합성상형교
(PC box girder Bridge)

1. 개요2. 역사
2.1. 구 행주대교2.2. 신 행주대교
3. 교통 연계4. 과적 기준5. 경유 시내버스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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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행주대교(幸州大橋, Haengjudaegyo (Bridge))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을 잇는 한강의 다리로, 39번 국도78번 지방도 상의 다리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최서단에 있는 다리이다. 행주대교 남단은 올림픽대로김포한강로의 기종점이기도 하다. 총 연장은 1.460km이다.

2. 역사

2.1. 구 행주대교

1978년 11월 21일 행주대교를 포함한
1978년 11월에 교량 폭 10m, 왕복 2차로의 규모로 최초 준공되었다. 이 때는 고양이나 김포나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고 당연히 시로 승격되지 않고 군으로 남아있을 만큼 논밭만 있는 허허벌판에 가까웠던 데다가 자가용 수도 별로 많지 않아 차선이 2개 밖에 없어도 충분히 교통량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자가용 자동차가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차츰차츰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2차선 도로만으로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힘들어졌고 거기에 더해 1989년에 주변 지역에 일산신도시, 중동신도시신도시가 들어설 계획이 세워지면서 교통량 감당이 힘들 게 뻔했다. 이에 교통망 구축을 위하여 1980년대에 행주대교 신교량 부설계획이 수립된다. 신교량은 각각 3차로의 동일한 규모의 교량 두 개가 건설 계획되어 고양군[5]과 서울특별시에서 각각 한 교량씩 담당하여 건설하였다.

파일:6000094291_20080919.jpg

신 행주대교와 2차 신교량까지 준공되고 난 후 옛 교량은 차량통행이 차단되고 인도교로 한동안 사용되었다. 이후 구교량의 노후화에 따른 통행안전 문제로 입구에 콘크리트 블럭으로 담을 쌓아(현재 콘크리트 블럭은 없지만 철망으로 막아둔 상태) 교량 통행을 완전 차단하였다. 2011년에는 배가 다닐 수 있도록 교량의 일부가 철거되었으며, 이후 예산문제로 방치되고 있다가 고양시에서 자전거 및 보행자 전용 다리로 변화시킨다고 한다.

폐쇄 직전 제한속도는 60km/h였다.[6]

2.2. 신 행주대교

최초에 고양시에서 서울특별시 방면으로 시공된 1차 신교량(신행주대교)은 상판을 지지하는 케이블을 콘크리트로 둘러싼 콘크리트 사장교 형태로 1987년 착공하여 1992년 12월 완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2년 7월 31일 시공업체인 벽산건설의 부실시공으로 교량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오히려 수도권 일대의 교통난을 악화시켰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에 창선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에도 개탄하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지만 2년여 뒤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전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이 사고가 발생하였을 당시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이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었을 때였던 데다[7] 건설 중인 교량이 붕괴된 사고였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없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너무나 쉽게 잊힌 사고였다.
파일:attachment/44444_1.jpg
우측의 구교량과 주탑과 상판이 모두 붕괴된 1차 신교량의 모습

결국 과다하중을 일으키는 콘크리트 사장교 형태 대신 케이블 사장교로 설계 변경 및 재시공하여 1995년 5월 총 3차선의 규모로 개통하여 구교량과 함께 사용되었다. 기존 구교량의 왕복 2차선 도로에서 확장되어 총 왕복 5차선의 도로폭을 가지게 되었는데, 신교량의 경우 고양→서울 방면이 서쪽의 두개 차로를 차지하고, 서울→고양 방면의 화물차량 전용차로 1개를 내주었으며, 구 교량의 차로 2개는 협소한 교량 규모와 노후화의 이유로 서울→고양 방면 승용차 전용차로로 전환하였다.
파일:attachment/484841.jpg
행주대교 남단에서 바라본 신교량(좌측 두 교량)과 구교량(가장 우측)이 함께 있던 모습

1996년부터는 1차 신교량과 구교량 사이에 서울특별시에서 고양시 방면의 2차 신교량(제2신행주대교)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2000년 12월 16일 같은 3차선의 규모로 개통되었다. 1차 준공된 신교량과 똑같은 규모였으나 1차 신교량에서의 주탑과 케이블로 지지하는 사장교의 형태가 아닌 일반 교량의 형태로 시공되었다.

개통 당시 제한속도는 60km/h이었다. 이후 2002년 서울경찰청 일반 도로(한강교)70km/h 상향 대상에 포함되었다. 동시에 서강/원효/성수/올림픽대교도 70km/h 상향 대상에 포함되었고 이후 2014년에 개통된 구리암사대교도 70km/h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서울시 전역 일반 도로 안전속도 5030 정책으로(2020년 8월 말~2020년 12월 20일까지 모든 시설물이 교체됨) 2020년 11월 네이버 거리뷰에 60km/h로 하향된 것을 알 수 있다.

3. 교통 연계

행주대교 자체가 39번 국도의 일부분으로 지정되어 있다. 북단으로 나오면 곧바로 행주고가사거리로 연결되는데, 여기서 고가차도로 진입하면 그대로 호국로를 따라 우회해 화정동으로 진입하고, 고가차도 하단으로 빠진 후 직진하면 행신로로 진입해 능곡동으로 이어진다. 우회전하면 舊 행주내리 마을과 KTX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 그리고 행주산성으로 이어지며, 자유로와 재접속하는 교차로도 있기 때문에 실수로 행주대교IC를 지나쳤다면 이 교차로를 이용해도 된다.

남단으로 내려오면 곧바로 개화IC를 통해 올림픽대로와 연결되는데, 개화IC 램프에 78번 국가지원지방도 방향 진출램프도 합쳐져 있는데다 개화IC 램프를 지나서 얼마 가지도 않고는 곧바로 39번 국도, 48번 국도와 연결되는 고촌IC 연결램프가 등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행선지가 꼬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는 개화동로와 48번 국도가 연계되는 이름없는 교차로의 구조 변경이 한 가지 원인으로, 본래 이 교차로는 많이 찌그러진 트럼펫형 입체교차로였으나 김포한강로 개통으로 개화IC의 구조가 이리저리 뜯어고쳐져야 하는 상황이 왔고, 이 때문에 개화IC에서 개화동로 김포공항 방향으로 진입하는 램프가 길어지게 되면서 부지가 더 필요해진 탓에 이 이름없는 교차로의 행주대교→48번 국도 방향 램프를 철거하게 된 것이다. 그 대신 개화IC 진입램프를 지나친 위치에 곧바로 고촌IC방향 램프를 신설해서 이를 대체했고, 여기에 그렇게 뜯어고친 개화IC지만 행주대교→김포한강로 방향 접속램프 개설이 어려워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행주대교 방향에서 78번 국지도로 접속해 김포한강로로 간접 접속할 수 있게 추가 램프를 또 내다보니 이런식으로 램프가 복잡하게 꼬였다. 여튼 이 구간에서 올림픽대로로 진입하지 않을 경우 개화IC 램프와 연결된 78번 국지도 방향 램프로 나가면 아라김포 여객터미널 방향으로 이어져 전호IC를 통해 김포한강로로 들어갈 수 있으며, 고촌IC 연결램프를 통해 39번 국도로 진입하면 부천/인천 방향으로, 고촌IC 연결램프를 통해 48번 국도로 진입하면 김포 방향으로, 어디로도 들어가지 않으면 김포국제공항 방면으로 이어진다.

다리 북쪽의 덕양산행주산성이 있다. 자전거 동호인들이 한강을 달리다 행주대교를 건너 행주산성 근방에서 국수를 먹고 오는 것을 하나의 코스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행주대교 북단에서 행주산성 주변에서 자전거 동호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가양대교의 정체를 피하기 위해서 이 다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자유로를 거쳐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자유로IC서울문산고속도로 남고양IC북로JC - 흥도IC 경로를 이용하려고 하거나 진출한 차량들로 인해 정체가 발생한다.

4. 과적 기준

한강을 건너는 다른 다리에 비해 행주대교는 과적 기준이 빡빡하다. 국도 상의 다리라 화물차가 많이 다닐 법한 상황임도 불구하고 행주대교는 화물차가 많이 건너지 않는데, 과적 기준 때문에 그렇다. 한강을 건너는 다른 다리는 총중량 40톤(10% 초과 허용 44톤)까지 통과할 수 있는 반면 행주대교는 총중량 30톤(5%만 초과 허용해 32톤) 이하여야만 통과할 수 있다. 화물차는 무조건 행주대교 검문소로 진입하여 계량대에 올라 총중량 검사를 시행한 이후 다리에 진입할 수 있다. 실제로 행주대교 진입 전에 "총중량 32톤 제한, 4.5톤 이상 화물차 무조건 검문소 진입"이라 적힌 도로교통표지판이 붙어 있다.

다른 한강 다리의 과적 단속은 서울특별시청이나 특별사법경찰, 국토교통부 국토관리청에서 시행하나, 행주대교는 한강 다리 중 유일하게 군부대가 과적단속을 한다. 행주대교는 제30기계화보병사단(부대 해체 이전) → 제1군단(30사단 해체 이후)에서 과적을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교량은 과적단속이라고 표현하는데, 행주대교는 과적검문이라고 표현한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과 같이 남북한관계가 얼어붙으면 행주대교 검문소에서 행주대교를 지나는 모든 차량을 검문한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행주대교의 전 차량 검문이 2011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시행되기도 했다. 승용차도 예외 없이 검문을 받으며, 행주대교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제시해야 한다.

전술한 내용은 현재는 적용되지 않는 오래된 내용으로, 2023년 8월 기준 행주대교는 다른 한강 교량과 동일하게 40톤 제한을 적용하고 있으며, 과적단속도 일반적인 도로사업소 직원이 실시하고 있다.

5. 경유 시내버스

2019/11/22 기준 정보이며, 별도의 서술이 없는 한 전방향 경유이다.

6. 여담

구 행주대교에는 12.12 군사반란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있다.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1979년 12월 12일 밤 당시 반란군인 하나회 소속이던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하나회 회장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지시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에 있던 육군본부(현 전쟁기념관)와 국방부(현 국방부 별관)를 점령하고자 강서구 주둔지에서 한강 이북으로 건너와야 했다. 강서에서 용산으로 가려면 제1한강교잠수교제3한강교를 건너야 했는데[8] 이들 교량은 진압군 측인 장태완 소장수도경비사령부가 관할하는 지역이었고 다리 초소에 수경사 장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제30보병사단 관할 교량인 행주대교로 건너가고자 했다.

물론 수경사에서도 이 상황을 알고 있기에 장태완 사령관이 30사단장인 박희모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건너려 한다. 행주대교를 막아달라"고 요청했지만 하필이면 그 전화를 반란군의 핵심인 국군보안사령부가 전부 도청했다. 보안사 간부들은 득달같이 박희모 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박 장군이 장태완 장군과 통화한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1공수가 서울에 진입할 수 있도록 조용히 행주대교를 열어달라. 그러면 모든 일이 조용히 해결될 것이다"라고 진압군 측 요청을 무시해달라고 압박했다.

사단 사령부에서는 1공수의 강북 진입을 열어주기로 했으나 행주대교 검문소에는 이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탓인지 남단 쪽 검문소에 있던 30사단 소속의 군사경찰이 1공수와 마찰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30사단 군사경찰은 1공수 요원들에게 제압됐고 1공수는 행주대교를 건넌 뒤 용산 육본과 국방부로 가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2023년 11월에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당시 수경사령관이태신 장군(정우성 분)이 혈혈단신으로 행주대교로 가서 서울로 진입하려던 2공수여단의 행렬을 홀로 막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이는 실제가 아닌 허구이며,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이 당시 필동 수경사령부 상황실에서 작전 지시를 하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혈혈단신으로 상대 탱크 행렬을 막았던 사람은 진압군 장태완 장군이 아니라 반란군 김진영 당시 대령이었으며, 실제 탱크 행렬을 저지한 곳 역시 행주대교가 아닌 광화문 부근이다.

[1] 폐쇄 후, 대형 선박의 경인운하 통행을 위해 일부 철거되어 북단과 남단이 끊겨 있다. 또한, 연내에 완전히 철거할 예정이다. 출처[2] 새롭게 놓은 행주대교와 부실공사로 붕괴된 신행주대교를 시공하였다.[3] 본래 콘크리트 사장교로 설계되었으나 시공중 붕괴사고로 인해 교량 하중을 줄이기 위해 케이블 사장교로 설계 변경되었다.[4] Prestressed Concrete[5] 현 고양시, 참고로 고양군은 1992년 시로 승격되었다.[6] 카카오맵[7] 한국시간으로 이 사고가 있던 날 새벽에 안한봉레슬링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8] 12.12 군사반란 당시 서울시내의 자동차 횡단 가능 한강 교량은 행주대교, 제2한강교, 서울대교, 제1한강교, 잠수교, 제3한강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잠실대교, 천호대교, 광진교 등 11개에 불과했다. 이중에 한강 이남에서 용산으로 직결되는 다리는 제1한강교와 잠수교 뿐이었다. 다만 빠른 점령을 위해서는 초고속 부대 이동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동거리가 가장 짧은 제1한강교를 노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