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1c1d1f> 도서명 | Female Masculinity(英) 여성의 남성성(韓) |
발행일 | 1998년(원서) 2015년(역서) |
저자 | 주디스 핼버스탬[1] (J.Halberstam) 유강은 역 |
출판사 | Duke University Press(원서) 이매진(역서) |
ISBN | 9791155310649 |
링크 | #Amazon |
[clearfix]
1. 소개 및 출간 배경
"이 장에서(그리고 이 책 전체에서) 남성적인 여자, 젠더 일탈자, 가끔 레즈비언 등이 우리가 '남성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때문에 남성성을 남성과 결부되어있는 행동에 관한 일반적인 용어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정확하지 못할 뿐더러 사실상 퇴행적이다."
- 본서, p.341
- 본서, p.341
본서는 여성이 체현하는 남성성이 분명히 실재하며 그들의 자신감의 근원도 될 수 있음을 젠더학과 퀴어 담론을 넘나들면서 구체화하는 학술서이다. 특히, 저자가 "여성과 소녀들에게 남성성을 안전한 것으로 만들려는 진지하고 명확한 시도"(p.380)라고 언급했듯이, 본서는 여성이 보이는 남성성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탈병리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남성이 여성적일 수 있듯이, 여성도 남성적일 수 있으며, 남/여성성은 특정 젠더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남성의 여성성이 여성의 남성성보다 훨씬 더 활발히 연구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여성의 남성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남성성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저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여성의 남성성이라는 것은 유독 여성학, 젠더학, 퀴어학 어느 곳에서도 관련 연구가 태부족하다고 한다. 일반인들부터가 "남성성은 남자들이나 보여주는 거지, 여자들은 그냥 중성적인 매력인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식자들도 여성적인 남성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남성적인 여성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젠더에 대한 전문가들은 남성적인 여성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문화적 페미니즘(cultural feminism)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어서, 여성성은 추앙의 대상이 되고 남성성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레즈비언 연구자들은 부치/펨 구분법을 낡은 속설이라고 생각하기에 "레즈비언들은 그런 지배적이고 일방향적인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그나마 관심을 가질 만한 쪽이 트랜스젠더 연구자들이어도 주로 MTF 사례에만 관심을 가져도 FTM 사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도 없고 연구예산도 부족한 실정이다.
저자가 8장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사회에서 남성적인 여자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서 온갖 전방위적인 사회적 압력에 노출된다. 여자아이가 조신해야 한다고, 그렇게 남자처럼 놀면 인기 없을 거라고, 소녀답게 조신하게 굴라고, 드레스와 화장과 몸매 관리에 관심을 가지라고 잔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압력에 가장 발끈하는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이다. 여성을 무조건 여성적이도록 압박하고, 그들의 남성적인 에너지와 가능성을 억누르는 것이 성차별이라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페미니스트들이 지금껏 직시하려 하지 않았던 민감한 질문을 던진다. "아니, 그런 양반들이 왜 여성이 보여주는 남성성에는 관심들이 없음?" 저자가 '직접' 지목했듯이, 문화적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페미니즘 계통에서는 남성성을 열등하고 더러운 무언가로 취급하고 여성성을 무조건 신성시하며 이상화하기 때문에, 이들은 여성이 남성성을 드러내려는 것을 억압하려는 사회적 압력에는 분노하면서도, 막상 그 여성들에게 남성성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적어도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는 모순적이거나 구차한 설명만을 하게 될 뿐이다. 이들의 이념에 있어, 여성이 남성성을 드러내는 상황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남성성은 반드시 비판의 대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의 관점에서 학문적인 문제거리다.
저자 주디스 핼버스탬(J.Halberstam), 현대 기준으로 "잭 핼버스탬" 은 그 자신부터가 이미 부치에 속하는 '남성적인 여성' 에 해당한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젠더학 및 영문학 교수로서 문화비평 저술활동을 행했다. 주요 저서로는 《Gaga Feminism》, 《In a Queer Time and Place》, 《The Queer Art of Failure》, 《The Drag King Book》 등이 있다. 서문에 따르면, 본서의 저술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뉴욕 대학교(NYU)에서도 포닥 생활을 하며 다수의 퀴어학자들과 교류했다고 한다.
본서는 가볍게 읽을 만한 글이 전혀 아니다. 전형적인 학자의 글로서, 어렵게 쓴 글은 전혀 아니지만 학계의 동료들을 예상 독자로 삼아서인지 젠더학 및 퀴어학에 대한 폭넓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역자의 글에 따르면, "현란한 개념과 분석 도구로 무장한 채 기성의 젠더 이론들을 상대로 백병전을 벌이는 학술적 탐구인 동시에 지은이 개인의 정체성과 삶을 해명하고 주장하려는 정치적 기획"(p.394)이다. 쉽게 말해, 학문적 키보드 배틀을 하는 책이다. 본서에서 저자는 기존에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 뛰어들어서 논박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변호하기도 하며, 그 논쟁의 내용은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것으로 전제하고 생략하는 경향이 다소 있다. 그래서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에는, 저자가 뭔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만, 그 비판의 대상이 어떻게 떠올라서 무엇을 주장하고 있었는지는 직접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별도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저자의 학문적 포지션과 전후상황을 이해하기가 쉽다. 물론 그런만큼 성 소수자, 특히 레즈비언이나 트랜스남성에 대해 진지한 학술적 연구와 논의를 원하는 독자라면 본서가 매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표지의 그림은 영국의 화가 세이디 리(S.Lee)의 작품 〈Raging Bull〉 이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서문
- 1장: 여성의 남성성에 관한 서론─남자 없는 남성성
- 2장: 도착된 현재주의─안드로진, 트리바드, 여자남편, 그 밖의 20세기 이전 젠더들
- 3장: '부적응자들의 작가'─존 래드클리프 홀과 도착 담론
- 4장: 레즈비언의 남성성─스톤 부치도 마음이 울적해진다
- 5장: 트랜스젠더 부치─부치/FTM 경계 전쟁과 남성성 연속체
- 6장: 부치처럼 보이다─영화 속 부치들에 관한 간략한 안내
- 7장: 드랙킹─남성성과 수행
- 8장: 성난 황소(다이크)─새로운 남성성들
서문에 따르면, 1장, 4장, 5장, 6장의 내용은 저자가 기존에 다른 문헌에서 저술했던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게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먼저 결론에 해당하는 8장을 읽은 뒤에 순서대로 읽기 시작하면 저자의 의도와 초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역사적으로 수많은 남성적인 여성들이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이를 '레즈비언' 의 익숙한 이미지로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기존 학계의 인식은 스톤 부치, FTM, 드래그 킹 등등 여성이 수행하는 젠더적 실천의 다양성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 여성의 남성성을 논의하는 것은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의미가 있으며, 향후 학계의 더 많은 전향적 관심이 요구된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저자가 말하는 여성의 남성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남성성 연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다음으로 레즈비언이 '부치(butch) 역할' 과 '펨(femme) 역할' 로 나누어진다는 생각이 이성애규범적 억압이라는 주장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반론하는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FTM(트랜스남성)과 관련하여 퀴어학계에서 논쟁이 되는 '트랜스 여행' 개념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성소수자의 젠더관(觀)에 대한 은유적인 구분을 모색한다.- 1. 여성의 남성성에 관한 서론─남자 없는 남성성
남성성은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남성의 육체와 여성의 육체 모두를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여성의 남성성 역시 존재할 수 있다. 이 연구가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남성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방법으로 분석할 것인지조차 학술적 뒷받침이 열악한 상태이다. 퀴어들의 공중화장실 이용경험은 강력하게 작용하는 젠더 이분법을 드러내며, 본서는 최소한 이를 뒤흔드는 것만이라도 목표로 하고자 한다.
- 2. 도착된 현재주의─안드로진, 트리바드, 여자남편, 그 밖의 20세기 이전 젠더들
전근대의 남성적인 여성들은 일방향적이고 삽입 위주의 성적 실천을 즐겼으며, 이는 오늘날의 상호성이나 거울상, 주고받기 등의 특징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남성적인 여성들을 검토할 때, 학자들은 너무 자주 현대주의에 의해 오도되어 레즈비언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적용하려 들게 된다. 이처럼, 소위 '순수한 레즈비어니즘의 평등한 성적 실천' 이나 '동성애의 억압으로 인해 나타나는 차선책' 이라는 잘못된 해석은 교정될 필요가 있다.
- 3. '부적응자들의 작가'─존 래드클리프 홀과 도착 담론
20세기 초엽의 성의학자들이 붙인 도착자라는 꼬리표는, 현대의 레즈비언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이질적이다. 래드클리프 홀의 도착 소설은 비평계로부터 구구한 해석이 나오기는 하나, 그저 자신의 여성성에 탈동일시하는 작가의 보수성이 반영되었을 따름이다. 이 시기에는 동질적이지 않은 다양한 남성적 여성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갔으며, 이는 다수의 소수자 정체성들의 시초로 이해되어야 한다.
- 4. 레즈비언의 남성성─스톤 부치도 마음이 울적해진다
지배성과 불가촉성, 삽입성교로 특징지어지는 스톤 부치는 레즈비어니즘 및 문화적 페미니즘에게 많은 공격을 받아 왔다. 이런 전통의 페미니스트들은 부치/펨 역할 구분을 성과학의 오도라고 주장하며, 레즈비언 섹스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기쁨으로 이상화한다. 하지만 여성의 남성성이라는 설명을 도외시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에로티시즘의 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성적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 5. 트랜스젠더 부치─부치/FTM 경계 전쟁과 남성성 연속체
흔히 부치와 FTM 사이에는 남성성의 획일적인 연속선이 존재한다고 여겨지지만, 저자는 이런 모델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랜스섹슈얼리티 담론은 여행의 수사와 은유를 통하여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저자는 이것 또한 현실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논쟁은 퀴어 진영에 잠재될 수 있는 이성애규범성과 정상성, 식민주의의 모순적인 측면을 드러내므로,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 6. 부치처럼 보이다─영화 속 부치들에 관한 간략한 안내
대중매체 속 부치의 이미지는 썩 긍정적이지 않다거나 고정관념적이라는 이유로 비평계의 많은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부치의 이미지는 늘 지배적 젠더 체계에 대한 전복적인 젠더 전시에 가까웠으며, 레즈비언과 퀴어들을 가시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부치는 톰보이즘, 포식자, 판타지, 복장도착자, 레즈페미의 시대를 거쳐, 현대에는 그 이미지가 포스트모던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추세이다.
- 7. 드랙킹─남성성과 수행
드랙킹은 젠더 표현과 무관하게 연극성과 패러디성이 강한 퍼포먼스로, 90년대 들어 크게 성장했지만 그 학술적 논의는 미진했다. 드랙킹이 백인 남성을 패러디할 때에 드러내는 남성성은 일명 킹잉, 즉 비수행적이고 자연적인 듯한 절제된 경향을 포함한다. 이들이 남성성에 동일시하는지, 수행성의 측면을 포함하는지는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남성성을 패러디하고 전유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 8. 성난 황소(다이크)─새로운 남성성들
기존 학계는 남성적인 여성의 에너지를 억압하는 사회화에는 문제의식을 품었지만, 그 남성성 자체는 병리화하여 취급했다. 여성 권투 선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남성성이 남성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기존 학계의 풍조 또한 남성들의 권력을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들의 '버티는' 남성성을 변형하고 개조하며, 우리 사회의 남성성의 이미지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받아 왔다.
위에서 보다시피 기존 학계와 그 연구동향에 대해 저자가 디스하지 않는 챕터가 없을 정도로 꼬박꼬박 비판적이다(…).
2.2. 여성의 남성성: 남성 없는 남성성
저자는 8장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여자아이들도 디폴트값(?)은 남성성으로 이해하고, 나중에 성장해서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 여성성을 액세서리처럼 부가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까지도 내놓는다. 하지만 많은 일반인들, 그리고 심지어 전문가들조차 여성이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을 걱정할 일로 생각하고 병리적인 문제로 취급해 왔다. 저자는 이런 생각의 동기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는 남성성이란 여성에게는 공유될 수 없는 배타적 권력의 하나로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컨대, 사람들은 남성들도 어머니 역할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성들은 아버지 역할을 할 수는 없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걸 뒤집어 말하면 아버지 역할을 불가침의 위치에 올려놓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물론 남성권익 운동가들을 비롯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남성성이 권력이라니? 남성성은 남성들에게 피해를 주며, 특권보다는 오히려 짐에 더 가깝지 않은가?" 이에 대해 저자는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오늘날 남성성의 핵심은 마치 권투 챔피언처럼 두들겨맞으면서 버티는 능력에 있는 것 같다고까지 말하며, 이런 남성성이 강제적으로 부여될 때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누구나 고통을 겪게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 사회의 패권적 남성성이란 '군림', '정복', '지배', '억압', '착취' 에 가까운 이미지보다는, 파상적으로 밀려드는 외적인 도전들을 견뎌내고 버틸 수 있을 것을 요구받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남성성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으며, 여성들은 남성성의 그런 가혹한 면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통해 남성성은 덜 가혹한 쪽으로 변화되고 재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남성들은 남성성의 이미지를 독점적으로 드러내고, 여성들은 그 이미지를 수용할 뿐이다" 는 일방향적 모델만을 떠올린다고.
여기서 남성성이 남녀 모두의 젠더 실천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자는 동료 젠더학자인 주디스 버틀러(J.Butler)가 제창한 유명한 개념,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을 빌려온다. 이에 대한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버틀러의 텍스트를 여기서 전부 독해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저자와 버틀러 외에도 이브 세지윅(E.K.Sedgwick)[2]과 같은 논객들이 1990년대 들어서 이런 류의 주장을 많이 펼쳐 왔음을 생각한다면, 저자가 트렌디한 접근법으로 낡은 접근법을 비판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 이전까지 젠더 연구자들 사이에서 남성성(masculinity)의 이미지는 그저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스티븐 시걸 정도에 머물러 있었고, 고작 이런 인물들의 매체 속 행적을 분석하면서 남성성을 추적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학계에서도 이것이 한계가 있으며 여성이 수행하는 남성성의 젠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인정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에 가까웠다고 한다.
어째서 학계는 여성의 남성성에 이토록 껄끄러워하고 마뜩찮아했던 것인가? 저자는 1장에서 젠더학계가 드러내는 남성성 연구 풍조의 실태를 고발한다. 예컨대 폴 스미스(P.Smith)라는 인물은 "모든 생물학적 남성은 남성에게만 주어진 권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 권력은 남성성이다" 라고 말하면서 남성성을 만악의 근원으로 악마화했고, 논문집 《Boys: Masculinities in Contemporary Culture》 에서 그는 심지어 "남성 권력의 진정한 전복과 해체를 위해서는 생물학적 남성들의 지배적 남성성에만 집중해야 한다" 고 더 적나라하게 주장했다. 다시 말해, 폴 스미스는 모든 여성들이 모든 남성들의 가해행위 속의 불변하는 피해자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저자는 이런 그의 입장에 대해 가부장제를 비판하기 위해 남성성을 대신 '후려치는' 의도가 있다고 지적했다. 가부장제가 남성성에 권력을 부여한다면 남성성이 아니라 가부장제가 문제인 것인데, 왜 남성성을 문제시한다는 말인가? 연구자들은 남성성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연구할지에 대해서 생산적이지 못한 습관에 머물렀다. 자신이 문제시하고 병리화한 대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남성성은 남성의 전유물일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실상, 다양한 대안적 남성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익숙한 담론 속의 비판만을 반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의 사실상 매 챕터마다 위 문단의 비판을 반복하다시피 한 저자는(…) 7장에 이르러서 드래그 킹(drag king)을 들어서 남성성의 자연화된 수행성을 비판한다. 여기서 드래그 킹이란 "분명한 남자 의상을 차려 입으며 이런 차림으로 연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p.329)이다. 이들은 패러디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진심을 다해 남성을 따라하는 '남성모방자' 들과는 달라지며, 성적 지향과 무관하고 자신의 젠더적 표현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드래그 부치(drag butch)와도 달라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드래그 킹은 레즈비언 진영과 긴장 관계에 있는데, 이는 남성의 젠더 수행성을 자연화하여, "남성성=자연물, 여성성=인공물" 로 취급하는 주류 사회 풍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성성도 수행이 가능한 젠더 실천이며, 이에 딸려오는 남성성 특유의 수행불안(performance anxiety)도 존재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 예를 들자면 발기부전에 대한 공포가 그것이라고.
이처럼 남성성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굳이 '수행성' 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지므로, 이런 남성성의 비수행성은 그것이 패러디될 때 드래그 퀸(drag queen)들의 유머러스한 무대와는 달라지게 된다. 여성성을 패러디하는 드래그 퀸들은 클럽이나 쇼에서 과장되고 발랄하며 호들갑스러운 행동을 보여준다. 여기서 드래그 킹들은 예외다. 이 사람들은 심지어 무대공포증(?)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뻣뻣하고 무감동하며 절제된 행동을 하게 된다.[3] 드래그 퀸이었다면 요란스레 박수를 치면서 반응할 일도, 드래그 킹들은 그저 묵직한 태도로 버티고 서서 한 번 가볍게 눈썹만 으쓱해 보이는 게 전부다. 저자는 드래그 퀸들이 과장된 여성성의 인상을 드러내는 캠핑(camping)을 시도한다면, 드래그 킹들은 억제성과 절제성, 진지함이 주가 되는 킹잉(kinging)을 시도한다고 정리했다. 이 킹잉이라는 용어는 저자가 직접 고안한 것인데, 킹잉을 통해 젠더 연구자들은 여성들이 패권적 남성성을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킹잉은 여성의 눈에 비친 남성의 모습인 것이다.
저자는 만일 드래그 킹 공연을 보고자 한다면 허쉬 바(Herche Bar)라는 곳과 클럽 카사노바(Club Casanova)라는 곳을 고려할 수 있다고 한다. 허쉬 바는 흑인 및 라틴계 위주라면 클럽 카사노바는 백인 위주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두 곳을 대조하면서 백인의 남성성과 흑인의 남성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컨대, 허쉬 바의 드래그 킹은 좀 더 부치에 가깝고, 흑인 남성의 섹시한 행동을 차용한다면, 클럽 카사노바는 절제의 느낌이 훨씬 강하고 직업적 특성을 활용한 패러디가 많다고 한다. 특히 백인 남성 정치인을 패러디하는 경우가 많다고. 인종 간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대조한다면, 저자가 '진짜 부치'(butch realness)라고 구분한 유형은 그들이 유색인종이었기에 특히나 남성성의 가시화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백인 남성을 연기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들은 눈에 띄는 행동적 이미지가 딱히 없어서 곤란하다. 하지만 흑인 남성을 연기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그저 춤추고 랩 하는 행동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남성성이 백인, 즉 권력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남성성의 징후를 드러내는 수행성은 감소한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대 문화가 지배적 남성성을 자연화했기 때문에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이미 그 자체로 남성이라는 암묵적인 디폴트값이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지금까지 언급된 드래그 킹들도 그렇지만, 하단에 언급하게 될 부치, 그리고 남성적인 말괄량이 소녀를 의미하는 톰보이(tomboy) 등의 사례들은 공히 젠더 이분법의 체계를 뒤흔드는 존재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젠더 이분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 저자는 공중화장실 이용을 들어서 이들의 삶의 고충을 예시화한다. 많은 부치들이나 적어도 '남성적인 외모의 여성' 들은 화장실 이용에 늘 어려움을 겪고, 때로는 오인 신고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여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이게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퀴어 문헌들을 보면 사방에서 이 화장실 이야기가 나온다고. 흥미로운 것은 FTM과 MTF가 화장실 이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MTF 트랜스여성들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지만 폭행당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반면, FTM 트랜스남성들은 발각의 위험보다는 폭행당할 위험을 더 두려워한다고 한다. 물론 남성들은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이 희박하기 때문에 실제로 FTM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남성들'(…)이나 '집단 구타를 하는 남성들' 을 목격할 일은 거의 없지만, 이런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기존의 화장실에 대한 공간학적 분석들은 주로 남자화장실만을 주제로 해서, 여자화장실의 공간학적 분석이 따로 요청되기 때문. 저자에 따르면, 여자화장실은 유달리 이용자의 여성성을 '심사' 하는 공간이며, 따라서 젠더 이분법을 재교육하고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사회화 기능은 말하자면 "가정 바깥에 있는 가정의 공간"(p.55)이라고도 할 정도라고. 하지만 이런 '심사' 를 경험하는 부치들만이 겪는 좌절과 불안, 각종 해프닝은 유독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게 저자의 탄식이다.
2.3. 부치 & 펨 구분은 허구인가?
우선 질문 하나를 던지면서 이 단락을 시작해 보자. 레즈비언끼리 섹스를 할 때,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남성적" 역할을 맡는 부치 측, 그리고 순응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적" 역할을 맡는 펨 측의 역할이 나뉜다는 생각은 사실일까? 만일 여기에 대해서 "NO" 라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저자의 맹렬한 비판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레즈비언들이 부치/펨 역할로 나뉜다는 통념은 오해입니다" 라고 강변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PC하지 않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젠더학자이자 퀴어 논객으로서 당당히 장판파를 친다(…). "당장 부치들이 세상에 뻔히 있는데 왜 부치들 말은 안 들음?"저자는 2장과 4장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레즈비언" 이라는 관념이 대단히 현대주의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나 현대에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및 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화적 페미니즘이 득세함에 따라, "남성들의 섹스는 전투와 정복, 침입과 관통을 표상하지만, 우리 여성들의 섹스는 평등과 평화, 호혜성과 친밀감, 존중을 표상한다" 는 생각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소위 말하는 "바닐라 섹스", 즉 여성 둘이 누워서, 한없이 친근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서로를 어루만지고 키스하면서 손으로 애무하는 섹스만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레즈비언이라는 아이디어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이미지의 일반화에 단호하게 거부한다. 세상에는 자기 파트너를 맹렬하게 침대에 내던진 뒤 그녀의 두 다리를 당당히 열어젖혀야 직성이 풀리는(…) 상남자 레즈비언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2장에서 19세기의 이런 여성들의 특징으로 밴대질(tribadism)[4] 및 여자남편(female husband)의 성적 실천을 거론했다.
특히 저자의 어조는 4장에서 더욱 거세지는데, 여기서는 이런 남성적인 레즈비언들 중에서도 더더욱 마초스럽다고 할 수 있는 하위 유형인 "스톤 부치"(stone butch)를 들고 있다. 스톤 부치의 가장 큰 특징은 불가촉성(untouchability)이다. 즉, 이들은 "남자처럼 상대의 손길을 거부하는 여자들"(p.165)이다. 섹스 중에 있어 봉쇄적이고 경직된 자세를 유지하며, 펨 파트너에게 일방적으로 애무를 가하여 그녀 혼자 보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펨 쪽에서 자기 몸을 만지는 것은 어떤 경우에든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허리에 딜도를 차고서 남성처럼 올라타는 것까지도 불사한다. 또한, 자신의 지배성이나 통제력이 훼손되었다고 느끼면 성적 자괴감을 느낀다. 쉽게 말해, 이건 뭐 몸만 여성일 뿐 멘탈리티는 완전히 마초남인 셈. 그 중에서도 정말 빈틈 하나 없는 고압적인 섹스를 추구하는 부치들은 아예 '화강암 부치' 라고까지도 불리는 모양.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어쨌거나 존재해 왔다. 분명히 존재해 왔고, 자기들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바닐라 섹스' 의 이미지를 홍보하던 레즈페미들에게 이들은 눈엣가시였다. 레즈페미들은 소위 '순수한 레즈비어니즘' 의 환상을 쫓고 있었고, 레즈비언 사이의 가부장적 섹스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들 레즈페미에게 여성이란 늘 비둘기처럼 고결하고 우아하며 평등의 화신과도 같았고, 그 누구도 상대방을 대상화하지 않으며 희롱하지도 않고,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어 함께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이상적 섹스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하니, 스톤 부치들이 아무리 "이거야말로 나의 나다운 모습, 내가 행복한 성생활" 이라고 외쳐도, 그 목소리는 늘 무시되었으며, 오히려 '역겨운 역할극', '남성에 대한 선망', '남성적 역할의 동일시', '가부장제에 대한 부역행위', '젠더의 허위의식', '20세기 성과학의 거짓말의 희생자', '여성이 저지르는 자기혐오' 같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건 너무 복잡한 설명이다. 여성도 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단지 이것 하나만 인정한다면, 스톤 부치는 그저 여성이 나타내는 남성성의 승화로 간단히 설명 가능한 것이었다.
섹슈얼리티 이론의 역사에서 이 논쟁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섹스 전쟁(sex wars)과도 무관치 않다. 성부정주의를 구성하던 문화적 페미니즘과 레즈페미 진영은 한편으로는 부치/펨 역할 척결론의 모체가 되었다. 레즈페미들은 "여성들끼리 나누는 성적 관계에서는 권력이 자동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통념"(p.177)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평등을 위한 그들의 노력은 섹스 자체에서 에로티시즘을 말소시키는 사태를 낳았다.[5] 여기서 잠시 주의를 주자면, 어떤 레즈비언 커플들은 실제로 권력에 있어서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기도 하고, 특히나 백인 중산층 여성끼리 교제할수록 그런 경향이 크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예컨대 멕시코계 문화권의 유색인종 레즈비언 커플은 아주 자연스럽게 부치/펨 역할을 나누어서 섹스를 즐긴다. 모든 인류의 섹슈얼리티를 지배 vs. 평등으로 재단하려는 것 자체가 지극히 백인중심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이런 '잘나신' 백인 여성들이 유색인종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부치/펨 구분법을 부정하는 것은 심지어 인종차별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평등을 중시하는 레즈페미들에게 있어서 스톤 부치는 동네북 취급이었다. 예컨대 쉴라 제프리스(S.Jeffreys)는 스톤 부치에 대해 "내면화된 레즈비언 혐오(lesbophobia)" 이자 자기혐오라고 공격했으며, 문화적 페미니즘 계통의 레즈페미 줄리아 페넬로페(J.Penelope)는 부치/펨 모델에 대해 '1950년대의 향수에 젖은 우익 세력의 반동' 이라고 규정했다. 레즈페미 저널 《Wicce》 에 실린 빅토리아 브라운워스(V.Brownworth)의 인터뷰 글은 부치를 여성혐오자, 펨을 피해자, 역할극을 포기한 레즈비언을 해방된 여성이자 혁명가로 묘사했으며, 마침내는 여성운동을 통해 레즈비언들의 역할 구분도 철폐되리라 낙관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인터뷰 방식이라는 것이 내담자를 정답을 향해 몰아가는 식이었다는 점(…). 오드리 로드(A.Lorde)는 부치/펨 역할극이 경직된 규칙을 지닌 이상한 무대에 오르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독 백인과 흑인이 만나면 흑인 쪽이 무조건 스톤 역할을 강요받고, 그것은 흑인 쪽의 욕망이 해소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억압이라고 하였다. 이 입장에 따르면 부치/펨 구분법이야말로 인종차별이 되는 셈이다.
이들 레즈페미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먼저 문화적 페미니즘의 뿌리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6] 문화적 페미니즘은 1970년대 백인 여성들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세력에서 기원했으며, 그 중에서 유독 보수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섹슈얼리티를 여성성에서 분리해 남성성으로 귀속시키고, 그 대신 여성성에는 무성적인 다정함과 순수한 우애를 귀속시켰다. 이제 이들에게 남성들은 일그러지고 기괴한 욕망에 헐떡이는 짐승(…)으로 보였고, 여성들은 깨끗하고 고상한 애정과 친밀감을 갖춘 고결한 천사(……)로 보였다. 이런 날개 없는 천사들이 나누는 섹스라니,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이 어찌 세상 그 무엇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경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바로 이들 레즈페미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레즈비언 섹스야말로 페미니즘이 주는 희락의 이상이자 궁극적 목표라고 보아서, 진정한 여성해방 전사라면 남친 따위 집어치우고 레즈비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 "여성은... 쉽게 성 충동을 길들이면서 완전히 침착하고 사색적인 태도를 유지" 하지만 "남성은... 여성을 자극해서 욕망의 광란으로 이끌면서 웬만해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섹스 가방으로" 던져넣는다던 밸러리 솔라나스(V.Solanas)의 "SCUM 선언문" 은 덤.
레즈페미에서 남녀관(觀)의 영향을 받은 문화적 페미니즘은 매스 미디어가 갖는 문화적 영향력을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이들이 음란물 규제 운동이나 성적 대상화 거부 운동, 매체 검열론을 부르짖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들은 "가부장제가 존속하는 한,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이미 여성억압을 재현하고 재생산한다" 고 외쳤다. 이 맥락에서 유명한 논객들이 바로 캐서린 맥키넌(K.MacKinnon)이나 안드레아 드워킨(A.Dworkin) 등이고, 실제로 《포르노그래피》 와 같은 도서들이 출판되어서 "하드코어 포르노 속에서 여성들이 신음한다" 는 메시지가 확산되었다. 캐럴 밴스(C.Vance)에 따르면,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 우파 및 도덕주의 계통의 문화검열을 정당화했으며, 실제로 이들의 핵심 테마는 여성의 성적 순수성과 도덕주의로 자리잡았다고 평가된다고. 본질적으로 여성을 빅토리아 시대의 귀부인처럼 다루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묘사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하다고 평가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페미니즘의 가장 거대한 적인 근본주의 개신교계와도 기꺼이 손을 잡을 만큼 공통점이 많았다.
이들의 검열 활동으로 인해서 실제로 1980년대 무렵의 영화계에는 강인한 부치 캐릭터가 사실상 씨가 말랐다(…). 6장에서 저자는 미국 영화계에 출몰하는 다양한 부치 캐릭터들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6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했다. 레즈페미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레즈비언 연구자들은 부치 캐릭터의 계보에 대해서 고스란히 '반동성애의 역사' 로 취급하지만, 저자는 이들의 등장이 주류 영화계 내부에서 그 나름대로 젠더 체계를 뒤흔들기 위한 거의 유일한 전복적 실천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 톰보이
말썽쟁이, 말괄량이, 선머슴 같은 여자아이 캐릭터이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장기간 인기를 끌었으며,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 스토리의 파생형이라고. 특히 70년대의 급진적 변화 풍조 속에서, 인습적 양육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대중들도 거친 소년 같은 여자아이의 이미지를 반겼다고 한다. 이때의 한계점이라면, 이들 캐릭터에 "사실은 엄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따위의 설정이 붙는다는 것, 그리고 젠더 이분법이나 이성애규범성 등의 다른 정상성(normativity)을 흔들지는 못했으며, 이들이 자라서 어떤 성인이 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등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National Velvet〉, 〈Pat and Mike〉, 〈Foxes〉, 〈Alice Doesn't Live Here Anymore〉, 〈Paper Moon〉, 〈Little Darlings〉, 〈Time Square〉 등이 있다.
- 포식자(Predator)
미디어에 등장하는 부치 중 가장 고정관념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주로 갱스터물, 범죄 스릴러, 교도소, 수녀원, 길거리 뒷골목 등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에서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친 남성들과 함께 거친 활동에 참여하거나, 다른 약한 여성들을 가학적으로 괴롭히는 배역도 많았다. 특히 많이 보이는 클리셰로 여자 교도소의 "가학적 교도관 vs. 순진한 수감자" 캐릭터 구도가 있었다고. 이들 배역의 의의는 여성의 빈곤과 범죄 문제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는 데 있으나, 그 한계로는 남성적인 여성일수록 범죄 성향이 강하다는 암시를 주었다는 점, 그리고 70년대 이후로 소프트코어 음란물로 변질되어 갔다는 점이 있다.
대표작으로 〈Johnny Guitar〉, 〈A Touch of Evil〉, 〈Calamity Jane〉, 〈Caged〉, 〈Bad Girls Dormitory〉 등이 있다.
- 판타지 부치(Fantasy Butch)
B급 판타지 장르를 포함하여 SF, 호러, 미스터리, 성인물 등에서 등장하는 부치 캐릭터이다. 대중적으로는 〈에이리언 2〉 에서 등장한 제넷 바스퀘즈 이병 캐릭터가 가장 유명하다. 이 유형에 관련된 클리셰로, 캐럴 클로버(C.Clover)는 괴수물이나 좀비물, 재난물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여성에 대해 "마지막 소녀"(the final girl)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최후의 생존자의 특징은, 여성적 매력이 부족하고, 부치 성향이며, 동료 남성들과 대립하고, 섹스와 폭력에서 열외되며, 남성 관객들도 충분히 이입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라고.
〈에이리언 2〉 이외에도 다른 주요 작품들로 〈Chopper Chicks in Zombie Town〉, 〈The King〉, 〈Desperate Living〉 등이 있다.
- 트랜스베스타이트 부치(Transvestite)
말 그대로, 남장 여자를 소재로 하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부치다. 이 캐릭터들은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양성성을 타진하기 위해, 자신의 의상과 에로틱한 관계를 맺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등등의 다양한 이유로 남장을 한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소위 '영화제작 규정 시대' 라고 불리는 보수적 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일시적으로 위반된 젠더 역할이 최후에는 다시 질서 있게 복원되는 서사를 따랐기 때문. 여기 등장하는 부치들은 복장 자체에 관객의 관심을 끌게 하기보다는, 단순히 젠더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서 복장을 이용한다. 때때로 일부 부치들은 남성 파트너와 함께 베드씬을 찍어서 이성애규범성을 보호하기도 한다.
주요 작품으로 〈Homicidal〉, 〈1999年の夏休み〉, 〈Queen Chritina〉, 〈Orlando〉, 〈Vera〉 등이 있다.
- 간신히 부치(Barely Butch)
위에서 언급한, 레즈페미들의 문화검열이 최고조에 달하던 1980년대에 나타난 부치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보통 '자신감 있는 레즈비언의 어두운 과거' 로서 등장인물이 소위 사연 있는 여자(…)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동원되었고, 그나마도 남성성이 거의 사실상 말소된 상태로 나타났다. 이들은 남성적 성격과 취향을 갖고는 있지만 주위로부터 남성으로 오인되지는 않으며, 남성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거나 거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특히 여기서 부치는 레즈비어니즘적 신체 품평(…)의 대상이 되어, 부치의 탄탄한 잔근육 등을 훑어가는 관음증적인 카메라 워크의 대상이 된다. 저자는 이런 캐릭터들이 레즈비언의 동성애적 요소를 비가시화함으로써, 관객들이 "둘이 친한 친구인가 봐" 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사실상 여성 버전의 이성애적 버디영화 정도로 여겨지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주요 작품들로는 〈Fried Green Tomatoes〉, 〈Desert of the Heart〉, 〈Personal Best〉 등이 있다.
- 포스트모던 부치(Postmodern Butch)
1990년대 이후에 새롭게 나타난 부치 캐릭터들이다. 이들은 다시금 부치/펨 구분을 재구성하면서도 이를 주요한 서사적 장치로 활용했다. 여기서는 여성 간의 로맨스 자체보다는 영화의 예술적 측면에 더 관심을 갖거나, 성적 욕망만을 화두로 삼는 부치 캐릭터의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레즈비언적 요소는 작가의식에 덧붙은 일종의 양념처럼 취급된다. 또한 일부 작품들은 사회적 계급 문제를 공론화하거나 등장인물들의 퀴어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Your Heart Is All Mine〉, 〈Salmonberries〉, 〈Go Fish〉, 〈The Incredible True Adventures of Two Girls in Love〉, 〈Flaming Ears〉, 〈Bound〉, 〈Set It Off〉 등이 꼽힌다.
그런데 상기한 모든 부치 캐릭터들은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총이나 담배, 바지, 호전성 등 공통적인 시각적 표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 죽음을 맞거나 불명예 또는 치욕을 겪는 부정적인 서사적 운명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레즈비언 캐릭터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되었을 정도였다.[7]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존에는 늘 '성 소수자는 반드시 긍정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는 입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는 영화의 재해석의 책임을 수용자가 아닌 생산자에게 지운다는 점, 탈고정관념적 이미지라고 해서 기존의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점, 소수자의 고정관념화는 오히려 소수자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유용한 신호가 된다는 점 등을 들어서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설령 부정적인 고정관념이라고 해도 그 나름대로의 장점은 존재할 수 있다. 즉, 기존의 젠더적 정상성을 낯설게 만들고 대안적 삶의 길 및 섹슈얼리티를 가시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결국 소수자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지우는 게 중요한가, 정형적인 묘사일지라도 일단 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게 중요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정답이 없는 문제겠지만, 여기서 저자는 소수자의 가시화, 그리고 젠더 규범과 체제를 흔들기 위한 방법으로서 "일단 드러내야 한다"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전형적 이미지가 아니면서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이 붙으면 관객들은 그 캐릭터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게 되고, 레즈비언은 당초 의도와는 달리 가시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Swoon〉, 〈Poison〉, 〈The Living End〉 등에서 보듯이 심지어 성 소수자 영화감독들조차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때 부정적인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긍정적인 이미지 자체가 우리 사회의 정상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이미지는 퀴어들이 퀴어함을 촉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2.4. 트랜스 여행 논쟁과 트랜스젠더리즘
남성적인 여성 이야기를 할 때 FTM 트랜스남성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3장에서 저자는 현대적인 성전환 수술의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 다시 말해 트랜스젠더 개념이 발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FTM스러운 여성들의 이야기를 추적한다.[8] 물론 버니스 하우스먼(B.Hausman)이 지적하듯이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이 없는 이들이 자기 자신을 딱히 성전환자로 인식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성전환에 대한 '환상' 정도는 가질 수 있었으리라 보인다. 저자는 이 사람들이 "성전환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전에 남자가 되기를 바란 여자들"(p.132)로서, 복장 전환, 군대 소속, 남성 행세, 남성적 재현 등을 통해 남성에 대한 동일시에 성공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았을 리는 만무하지만, 최소한 래드클리프 홀(R.Hall)과 같은 상류층 및 부유층 여성들은 비슷한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문헌으로 남기는 '성공' 을 거둘 수는 있었다고 한다.20세기 초엽에 출몰했던 이 여성들은 특히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선에서 크게 활약했다. 남성적인 여성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곧 자기실현의 기회와도 같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투피 로더(Toupie Lowther)라는 이름의 전쟁영웅이다. 실제로 이 사람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크게 활약했다. 또 비슷한 시기의 유명한 인물로 세간에 소위 "바커 대령"(Colonel Barker)이라 알려진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은 남성 행세를 하다가 들켜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저자는 적어도 이 인물만큼은 실제로 현대적인 FTM을 연상시킨다고 평가한다. 이 사람은 말년에 남장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도 끝까지 진심으로 남성 행세를 지속했고, 법정에서는 자신이 지금 어느 때보다도 남성으로 느껴진다면서 자신을 남성으로 대우해 줄 것을 호소했으며, 자신이 남자답고자 하는 노력만큼은 누구보다도 과격하고도 절실했다는 것. 이 기록들은 성전환 수술이 불가능하던 시대에도 (꼭 현대적인 FTM 개념은 아닐지언정) 수많은 소수자 정체성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적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FTM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앞서 보았던 스톤 부치들보다도 남성성에 더욱 가까이 위치한 여성들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다시 말해, 남성성이 강한 여성은 부치, 좀 더 강하면 스톤 부치, 더욱 강하면 트랜스젠더 부치, 더 많이 강하면 FTM, 이런 식의 연속선(continuum) 개념으로 생각해도 될까? 놀랍게도, 부치 진영과 FTM 진영 사이에는 또 다른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하게 자기다움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하는 부치들의 눈에, 호르몬제와 외과적 수술에 관심을 갖는 FTM들은 마치 해부학 본질주의자처럼 비칠 수 있다. 반대로, FTM들은 부치들을 그저 '용기 없는' 트랜스젠더 후보 정도로만 대할 수 있다. 실제로 마리오 마티노(M.Martino), 마크 리스(M.Rees) 등의 인물들의 자서전적 문학에서도 FTM들은 세간으로부터 부치로 여겨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부치 자체가 여성임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들은 자기 자신이 여성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고찰한 퀴어 연구자 게일 루빈(G.S.Rubin)은 두 집단을 어떻게 구분할지에 대해서 이른바 "경계 전쟁"(p.206)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이와 관련해 제이 프로서(J.Prosser)의 《No Place Like Home》 이라는 흥미로운 문헌, 그리고 여기서 촉발된 트랜스 여행(trans journey) 논쟁을 소개한다.
트랜스 여행에 대한 간략한 비유를 들어 보자. 여자나라와 남자나라가 나뉘어 있고, 양쪽 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국적이 자신을 가두고 있다고 느꼈고, 그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밖에 나와 보니, 뜻밖에도 꽤나 많은 곳에서 떠도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집이 먼발치서나마 잘 보이는 공원 벤치에서 쉬고 있었으며, 필요하다면 집에 잠시 들렀다 돌아올 수 있었다. 더 멀리 나간 어떤 이들은 여자나라 강변에서 놀고 있는 것을 편안하게 느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이 남자나라에서 놀러 온 사람처럼 보였으면 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이들은 큰 캐리어를 끌면서 몸에 옷가지들을 둘둘 걸치고 이동하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히피스럽게도 승합차 한 대만 끌고 다니며 어느 쪽에도 구애받기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이들을 예컨대 "이사 중인 거주자" 와 '"떠도는 여행자" 로 명확히 분류할 수 있을까? 먼저, "집만한 곳은 없다" 고 여기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신은 자기만의 이사의 연속선에서 특정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한때 떠돌이처럼 지내더라도, 점점 남자나라로 넘어가서 마침내 그곳에 집을 구해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반면 "이쪽저쪽을 기웃거리고 넘나드는 젠더의 자유인" 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여정의 중간 단계는 그냥 자신이 어쩌다 머무르는 곳일 뿐이다. 즉 개인은 남자나라나 여자나라에 구애받지 않으며, 머무를 곳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의미다. 거주자와 여행자의 구분은 복잡하고 두서 없는 퀴어 이론들 속에서 좋은 표지판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헨리 루빈(H.Rubin) 등의 논객들이 제시하는 소위 '트랜스섹슈얼' 과 '트랜스젠더' 의 구분이 나타난다. 트랜스섹슈얼 남성은 여성의 몸이라는 집을 버리고 떠나서 남성의 몸이라는 집에 정착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수술적 개입은 자신의 여정을 '완성' 하고 '종료' 하며, 진정한 자신의 보금자리에 도달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의료적 수술은 "성 확정 수술" 이 되며, 개인의 삶의 대업 내지는 정체성의 확립을 위한 궁극적 목표와도 같아진다. 하지만 반대로, 트랜스젠더 남성은 굳이 '생물학적 경계를 넘는' 어떤 처치나 수술이 없어도 (마치 부치처럼) 남성의 젠더에 자유롭게 동일시하고 자기만의 젠더적 실천을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수술은 젠더 실천의 목표도 아니고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며, 설령 수술을 받더라도 훗날 다시 판단을 번복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오히려 이들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경계를 넘나드는 불가해한 존재로서 '퀴어' 하게 살아갈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 가장 쉽게 정체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의료적 수술은 "성전환 수술" 이 되며, 정체성 확립을 위해 굳이 페니스를 붙일 필요까지는 없는 수준의 선택지일 뿐이다.
이상의 모델 속에서, 트랜스섹슈얼 진영과 트랜스젠더 진영 사이에는 인식론적 긴장을 피할 수 없게 된다.[9]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명확성과 완결성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모호성과 미완결성을 허용할 수 있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 한쪽은 젠더를 필요로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젠더를 없애버리려고 들게 된다. 헨리 루빈이나 리타 펠스키(R.Felski) 같은 논객들은 여기서 트랜스섹슈얼 편을 들면서, 젠더 놀이꾼(gender player)들이 젠더 개념을 장난스럽게 위협하는 동안, 그것에 생사가 걸려 있는 트랜스섹슈얼들이 그 피해를 전부 감수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퀴어 이론가들이 담론적 특권을 갖고 있다는 징후라고 하였다. 반면 본서의 저자는 이에 대해, 이들이 호명한 '놀이꾼' 들이야말로 실제로는 이성애규범성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많은 퀴어 문학에서 기존 젠더 체계와 상충하는 퀴어함은 상실감과 고독, 단절의 서사로 나타났다고 반론했다. 젠더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장난으로 다루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트랜스 여행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결국 부치와 FTM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설명이 도출된다. 먼저 젠더의 거주자들은, 부치들이 FTM에 머무르기 위해 길을 떠나서 목적지에 도달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이 사람들은 부치로서의 삶이 일종의 통과, 여행, 귀로, 낯선 곳에서 참된 집으로 향하는 여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살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그 '있어야 할 곳' 이란 바로 남성의 몸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일단 집을 떠났다면 하루빨리 다른 집에 정착하는 게 우선이다. 왜냐하면 한때의 광고 카피가 말하듯, "집 떠나면 개고생" 이기 때문이다. 반면 저자를 포함하는 젠더의 여행자들은, 부치들이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측 사이의 '중간 지대' 를 떠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과연 우리 모두가 '집에서 살고 있다' 는 전제 자체가 옳은지부터 이의를 제기한다. 많은 사람들은 안락함(homeliness)은커녕 "어중간한 불편한 영토"(p.230)에서 살아가고, 어떤 범주에 명확히 부합하는 젠더를 갖춘 사람들은 많지 않으나, 우리는 이것을 너무 자주 간과한다는 것이다. 여행자들에게 집이란 '즐거운 나의 집' 이 아니다.[10] 굳이 집이 있다고 한다면, 그 집은 오히려 "지금 내가 위치한 이곳" 이 될 것이다. 중간 지대는 개고생인 것도 아니다. 모두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라' 의 영토가 그곳에서 발견될 것이고, 여행자들은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안락함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젠더의 여행자들의 관점이 부치와 FTM 사이의 관계를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부치가 더 남성적이게 되면 스톤 부치, 더 많이 남성적이게 될수록 결국에는 FTM이 된다" 는 식의 연속선에 입각한 사고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3. 서평
국내 학계에서 소통되는 서평 중에서 본서를 다룬 것으로 우주현(2016)[11]의 문헌이 존재한다. 이 서평에서는 '위기에 처한 남성성' 담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서를 호평한다. 역자가 "여성의 남성성은 실재한다" 고 번역한 부분에 대해, 우주현(2016)은 보다 엄밀하게 번역할 경우 "여성에게는 무언가가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여성의 남성성이 실재한다는 작업을 기획해야 한다" 의 뉘앙스가 된다고 부연한다. 특히 본서의 장점으로, 기존의 퀴어학의 연구방법론이 분류법을 따를 때에는 "기존의 이항대립의 분류 방식을 해체" 할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본서의 연구방법론은 새로운 분류를 생산함으로써 더 특수하고 정교한 설명이 가능하게 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차이점을 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오히려 기존의 분류를 해체하는 효과까지도 함께 거두고 있다는 것이 이 문헌에서 바라보는 본서의 가치다.4. 둘러보기
페미니즘 · 젠더 도서 목록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페미니즘 · 젠더 도서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세계 여성의 권리 옹호(1792) · 여성의 종속(1869) · 제2의 성(1949) · 여성의 신비(1963) · 성의 변증법(1970) · 성 정치학(1970) · 여성, 거세당하다(1970)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1975) · 이갈리아의 딸들(1977) · 하나이지 않은 성(1977) · 공포의 권력(1980) ·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1981) · 다른 목소리로(1982) · The Man of Reason(1984) · Between Men(1985) · 가부장제의 창조(1986) · Deceptive Distinctions(1988) ·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1990) · 젠더 트러블(1990)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1991) · 백래시(1991) · 페미사이드(1992) · 유목적 주체(1994) ·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2000) · 근대성의 젠더(2003) · 혐오와 수치심(2004) · 여성혐오를 혐오한다(2010) · 나쁜 페미니스트(2014) · 젠더는 해롭다(2014)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5) ·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2018) · 나와 타자들(2018) | 대한민국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1995) · 페미니즘의 도전(2005) · 엄마의 탄생(2014) · 82년생 김지영(2016) · 여혐민국(2017) · 그럼에도 페미니즘(2017) · 양성평등에 반대한다(2017) · 페미니즘 리부트(2017) · 교차성×페미니즘(2018) · 근본없는 페미니즘(2018) · 혐오 미러링(2018) | |
세계 The Liberated Men(1974) · Refusing to Be a Man(1989) · 남성성/들(1995) · 남성 페미니스트(1998) · 여성의 남성성(1998) · 마초 패러독스(2006)· 맨박스(2016)· 테스토스테론 렉스(2017) · 인셀 테러(2023) | 대한민국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2016) · 그런 남자는 없다(2017)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2017) ·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2018) · 한국, 남자(2018) · 아빠의 페미니즘(2018)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2019) ·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2019)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페미니즘 비판서 · 비페미니즘 젠더 도서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세계 Who Stole Feminism(1994) · Professing Feminism(1994) ·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2000) · 잘못된 길(2003) · Taking Sex Differences Seriously(2005) · 548일 남장 체험(2006) · 남자다움에 관하여(2006) · 소모되는 남자(2010) | 대한민국 혐오의 미러링(2016) · 악플후기(2016-7) · 포비아 페미니즘(2017) ·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2018) · 우먼스플레인(2019) · 페미니즘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2020) ·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2021) · 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2022) · 페미니즘의 민낯(2022) ·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2023) · 페미니즘 갈등을 넘어 휴머니즘으로(2023) · 당신은 성폭행범입니다(2024) | }}}}}}}}} |
[1] 출판 이후 "잭 핼버스탬" 으로 개명하였다.[2] 이 인물이 오늘날 대중화된 용어인 여성혐오(misogyny)를 제시한 영문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이다.[3] 당장 누군가 한 남성을 여장시켜서 개그 프로그램 무대에 올렸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도 그 사람은 은근히 손목도 흐느적흐느적 흔들거나, 과장된 제스처로 몸을 움츠리거나, 공연히 눈웃음도 치고 손으로 키스를 보내는 등의 다양한 행동들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여성을 남장시켜서 무대에 올렸다고 생각해 보자. 이 여성은 남성답게 보이기 위해 도대체 뭘 해야 할까?[4] 한국어 역서에서는 이 용어를 그대로 음차하여 '트리바드', '트리바디즘' 으로 번역하였다.[5] 레즈페미 테레사 릴리언도터(T.Lilliandaughter)의 레즈비언 섹스 홍보 책자 《Common Lives, Lesbian Lives》 의 내용을 저자가 일부 인용하고 있는데, 분명 야한 대화와 야한 행동이 오가는 야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따르면) 조금도 성적인 흥분이나 상상을 유발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묘사들로 가득하다(…). 저자 왈, "이 섹스 장면은 포르노 이야기보다는 킨제이 보고서하고 더 공통점이 많다"(p.198). 여성의 신체에 대해 공정한 표현들을 고르고 고르다 보니 결과적으로 열정과 흥분이 완전히 소독된 관찰 일지(?)가 되어 버린 것.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Badinter) 역시 자신의 저서 《잘못된 길》 에서 지적하고 있다.[6] 꼭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이 아닐지라도, 예컨대 동성애 운동가들 역시 부치/펨 구분법이 이성애규범성을 강화하는 관점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7]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레즈비언 단체들에서 실제로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왜 우리 레즈비언 캐릭터들은 행복할 수 없느냐"(…)라고 한다.[8] 물론 이들도 현대적인 의미의 FTM과는 또 달라지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성으로서 여성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이 여성이라고 명확히 인식하는 다른 소수자 여성들과 공동체를 만드는 데 더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적인 FTM들의 삶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이다.[9] 계속 보다시피 막연하게 성 소수자로 묶이는 사람들 사이의 이질성 및 대립관계는 보통이 아니다. 주류 사회의 시선에서 이들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기 힘들 뿐. 퀴어 담론 내에서 부치/펨 구분법이 옹호될 수도 있지만 배격될 수도 있으며, 부치와 FTM 사이에서 부치에게 명분이 실릴 수도 있지만 FTM에게 명분이 실릴 수도 있으며, 젠더 관념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젠더 관념이 운신하는 데 방해가 되니 치워버리자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도 본서에서 퀴어 담론 자체가 내적인 모순이 많다고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은 어조로) 언급한 바 있다.[10] 예컨대 '거주자' 관점의 도린 콘도(D.Kondo)는 "경계인에게 집이란 바라마지 않는 것" 이라고 하였지만, 정반대로 '여행자' 관점의 글로리아 안잘두아(G.Anzaldua)는 "경계인에게 집은 차마 바랄 수 없는 것" 이라고 하였다.[11] 우주현 (2016). 남자 없는 남성성. 한국여성학, 32(2), 267-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