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6-17 00:16:54

여성의 권리 옹호


도서명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With Strictures on Political and Moral Subjects(英)
여성의 권리 옹호(韓)[1]
발행일 1792년(원서)
2008년(역서)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Wollstonecraft)
손영미 역
출판사 Thomas & Andrews(원서)
도서출판 한길사(역서)
ISBN 9788935652914
#Amazon

1. 소개 및 출간 배경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무지에서 이성으로, 사랑에서 우정으로2.3. 루소는 틀렸다2.4. "멍청한 여성들" 의 의미?
3. 반응4. 한계점5. 둘러보기

"근대의 정치경제학이 애덤 스미스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여성들 역시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빚지고 있다."
- 밀리센트 포셋(M.Fawcett),[2] 《여성의 권리 옹호》 출간 100주년 기념사 中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여성 또한 감성이 아닌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덕목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양성평등이 필요함을 제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서이다. 본서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쓰인 책이기 때문에,[3] 일차적으로 여성 계몽의 중요성을 납득시키고자 노력하며, 이로 인해 "여성이 훌륭한 어머니와 훌륭한 아내가 되기 위해서라도, 여성은 계몽되어야 한다" 와 같은 성 역할을 긍정하는 면모도 많이 보인다. 또한 여성 교육을 핵심 의제로 삼기는 하되, 그 외에도 모성애 이슈나 서프러제트 같은 참정권 관련 아이디어 (p.247) 등이 본서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주장하든 간에, 결국 여성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탁월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일단 이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일종의 "기승전계몽"(…)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서는 당대의 여러 사상가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에밀》(Émile)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인사들, 그리고 존 그레고리(J.Gregory)를 포함한 여성 교육가들의 모순을 지적한다. 즉 이들은 "모든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자유롭고 평등하다" 고 말해 놓고는, 막상 여성들에 대해서는 "여성은 인간이 아니며, 이성적이지 않고, 그저 남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일 뿐이다" 라고 말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 사상가들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성을 갈고 닦는 것은 남성의 덕목이지만, 여성들은 그런 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서 남성의 간택을 받는 것이 '여성만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두 가지 덕목' 논리는 본서가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지점이 되었다.

본서의 예상 독자층은 허영심 많은 귀족층 여성들도 아니고, 빈곤으로 편협해지고 위축되기 쉬운 저소득층 여성들도 아닌, 가정교사나 소설가 등의 직업을 갖춘 중간 계급 여성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중간 계급이 자꾸 귀족층을 동경하고 모방하기 위해 허영심 많은 문화를 따르려 한다면서, 이들이야말로 정말로 남성들과 대등하게 이성을 추구하는 계몽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술하겠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 최악의 테크트리(?)는 백치미 → 교태 → 일시적 사랑 → 질투 → 허영심이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간드러지는 아양과 눈웃음을 동원해서 잘난 남성과의 결혼에 골인하려는 여성들이야말로 가장 한심하다. 반면, 저자가 대안적으로 내세우는 여성 최고의 테크트리는 지성미 → 탁월함 → 영원한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과는 달리, 사랑은 나이가 들고 외모가 시들면 끝내 질투로 변질되고, 질투를 보상하기 위해 허영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서는 상업적 목적으로 매우 급하게 저술되어 출간되었는데[4] 그래서인지 원고에 문법적 오류가 많고 퇴고의 흔적도 없다고 한다. 저자는 본래 1권으로 글을 마치려 했으나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3권으로 나누고자 하였고, 2권 이후부터는 상속법이나 결혼법 등 여성 관련 법제화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술했듯 갑작스런 산욕열로 인한 요절 때문에 2권 이후의 출간은 무산되고 말았다. 아무튼 본서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프랑스 혁명가이자 교육사상가인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에게 헌정되었다. 탈레랑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프랑스 무상 의무교육 제도의 근거가 되고 있는 《Rapport sur L'Insruction Publique》 라는 보고서를 제헌국회에 제출했는데, 그의 교육 제안에 소년만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저자가 정식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

국내에는 판본이 굉장히 다양하게 존재해서, 연암서가의 2014년 번역판, 한길사의 2008년 번역판, 책세상문고의 2011년2018년 번역판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책세상문고는 부분부분 중요한 부분만 번역해서 펴낸 얇은 책(…)이며, 시간이 없거나 가볍게 읽기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적합하다. 정말로 진지한 문헌고찰을 원한다면 한길사 판본이 좋다. 이쪽은 본서 전체를 완역했으며, 그에 더하여 당대의 각종 사료들과 문헌들, 비평들, 논문들까지 풀 텍스트를 전부 완역해서 수록해 놓고 있다! 한길사의 경우에는 본서 제목을 《여권(女權)의 옹호》 로 정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찾을 때 다소 혼동할 수 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저기 6장에서 연상(association)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현대적인 심리학이 나오기 이전에 인간의 정신에 대해 데이비드 하틀리(D.Hartley) 등의 사상가들이 상정하던 전근대적 이론을 가리킨다. 하틀리는 《Observations on Man》 에서 뉴턴의 에테르 이론을 활용하여 인간의 감각을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연상론은 인간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을 떠올리는 인지(cognition)~지각(perception)의 과정을 그 시대 나름대로의 추론을 통해 밝히고자 한 이론이다. 손영미 역자에 따르면 본서에서 저자가 지적한 연상론은 그보다는 데이비드 흄의 오성론(understanding)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여성이 무지함보다는 이성을 추구하고, 남성의 사랑보다는 남성과의 대등한 우정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제시했는지 살펴보고, 루소의 《에밀》 을 저자가 어떤 이유로 비판했는지를 확인하며, 저자에게 가해지는 "여성을 멍청하다고 비난했다" 는 흔한 비판이 본서의 메시지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2.2. 무지에서 이성으로, 사랑에서 우정으로

"남자들은 여성의 열등함을 지나치게 키워 온 나머지 이제 여성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여성에게 능력을 계발하고 미덕을 쌓을 기회를 준 다음, 여성의 정신이 얼마나 열등한지 따져보게 하라."
- p.78

18세기 남성들의 논리는 여성을 대등하게 이성을 지닌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무지 몽매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었다. 먼 훗날의 비슷한 책인 《여성의 종속》 에서도 바뀌지 않은 점이라면, 이들 남성들은 단순히 기술적(descriptive)인 의미에서 '여성들은 그러하다' 라고 묘사한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규정적(prescriptive)인 의미에서 '여성들은 그래야 한다' 고까지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여성들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로서 남는 것이 규범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남성은 유식하고 합리적이며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한 덕목이라면, 여성은 반대로 조금이라도 더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인 상태로서 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남성에게 한없이 의존하고, 아기자기하고, 교태를 부리며, 매사에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유순하고, 아무리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끝까지 인내하며, 수동적이고, 신체적으로 병약하며, 아는 것이 없어야 했다. 요컨대 백치미 + 헤타레 + 병약 + 요망(…) 속성을 지닌 여성들일수록 남성들에게 환영 받기 쉬웠다. 그들은 여성들이 이런 면모를 갈고 닦아서, 잘난 남성들의 마음을 홀려 결혼에 골인한 뒤 애 낳고 잘 기르는 것이 가장 큰 대의요 덕목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모든 여성들의 궁극적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찬미를 진정한 애정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는 이성을 갖춘 드높은 존재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다. 저자는 이런 여성관이 기본적으로 "아이나 동물의 재롱을 볼 때 갖게 되는 느낌과 비슷하다"(p.64)고 말한다.

여성들의 유순함과 인내심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이 고귀하기는 하지만, 만일 그 유순함이 의존성과 나약함 때문에 나타난다면, 만일 그 인내심이 채찍을 맞아도 항의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에 나타난다면, 그런 유순함과 인내심은 덕목이 아니라 비참함을 가리는 가식에 불과하다. 즉,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참기만 하는 건 미덕이 아니다"(pp.76-77). 게다가 이런 여성들이 과연 자신의 남편을 제대로 내조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을까? 18세기 남성들은 아내가 순해야 집안 만사가 잘 돌아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는 여성은 집안을 불행과 악행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10장과 11장에서 저자가 강조하듯이, 이런 여성은 자녀를 권위주의적인 강압으로 키우거나 헬리콥터 부모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뿐이다. 권위주의 루트를 탄 어머니는 자녀에게 효도하라며 갑질을 일삼게 될 뿐이고, 헬리콥터 루트를 탄 어머니는 자녀를 눈치만 보는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겸손함 내지 정숙함, 영어로는 'modesty' 에 대응되는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개념은 "자기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고고한 의식과 결코 모순되지는 않지만 허영심이나 건방짐과는 거리가 먼 올바른 자기인식을 갖게 해 주는 소박한 성품과, 정숙함에서 나오는 순결한 정신"(p.211)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비하와 같은 '겸허함' 과도 다르고, 무지에 기초하는 '수줍음' 과도 다르며, 예의범절 및 격식에 기초하는 '얌전함' 과도 다르고, 신체적 성관계 여부에만 치중하는 '순결함' 과도 다르다. 오히려, 정숙함이라는 개념은 지금껏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요구되었을 뿐, 남녀 모두가 덕목으로 삼기에 적절한 좋은 가치인 것이다. 헌데 여성만 정숙해야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이 정숙함을 추구하는 것이 본인들에게 손해가 되도록 만들었다. 정숙하지 못한 남성들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가꾸고 계몽되는 것에 무관심한 대다수 무지몽매한 여성들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온갖 악행들을 저지른다. 잠시 이미지 하나를 떠올려 보자. 꽤나 여성스럽고 두껍게 화장을 해 놓고서, 그저 밍크코트를 두른 채 백화점 직원들에게 마구 갑질을 일삼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저자 당시에도 이런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고, 본서에서 저자는 이런 여성들을 매우 극혐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성이 계발되지 않은 소위 '세련된 숙녀' 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 공연히 하인들을 괴롭히고 집에서 군림하며 자신의 허영심을 끝없이 채워 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들의 지식은 상식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감정은 비틀렸으며 까다롭고, 감성은 유치하면서도 예민하고,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어 줄 이성적 판단력은 결여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저자는 심지어 본서 4장에서 이런 여성들을 타락한 여성들이라고까지 말한다.

여성들은 왜 이런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은가?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눈앞의 달콤한 쾌락에 매혹된 나머지 깨우치고자 하는 동기가 부족하다. 여성들이 이성을 추구하고 인격 도야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찬미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찬미로부터 오는 쾌락은 심지어 여성들의 삶의 목표인 것처럼 교육되어 왔으니, 여성들은 그걸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하니 자연히 자기수양과 덕목의 계발 역시 요원해지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라는 힘을 대대로 물려받아 온 여성은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천부의 권리를 포기해 왔고, 평등에서 얻을 수 있는 건전한 기쁨을 획득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짧은 순간 여왕 대접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p.109). 이들은 가장 아름다울 시기에는 덧없고 공허한 여왕 대접을 받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득을 챙기며 어떠한 덕목도 계발하지 않다가, 훗날 아름다움을 잃게 되면 경멸받게 된다. 저자는 이것이 '자기 노력으로 얻어낸 특별대우' 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들이 타락하는 메커니즘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런 달콤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남성의 사랑이다. 여성들은 남성의 눈에 들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온갖 교태와 아양과 애교와 요망함을 총동원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이렇게 얻어진 남성의 사랑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그 여성을 귀히 여기는 게 아니라, 단지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그리고 "들판에 핀 화사한 꽃들과 동일시"(p.107)하는 수준의 보호본능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변하지 않지만 외모는 시들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사랑' 의 불꽃은 오래가지 않아 사그라들고 만다. 그때부터 이제 아내의 불안이 시작된다. 내가 남편에게 내쳐지면 어떡하지, 남편이 나를 두고 다른 젊은 여자와 놀아나면 어쩌지, 남편이 성생활에 관심이 없어지면 어찌해야 하지, 이런 식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이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사랑에 너무 '올인' 한 결과로, 중년 여성들은 다른 여성을 경쟁자로 여겨 질투하거나, 자기 자신을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치장하기 위해 허영심을 부린다.

이 때문에 저자는 여성들에게 남성에게 사랑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존중받을 생각을 하라고 말한다. 즉 저자가 이해하는 최상의 부부관계는, 덧없이 식어 없어질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애정과 상호존중에 기초한 우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저자에 따르면, 우정은 "부드러운 신뢰와 진실한 존경의 마음"(p.136)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성 없는 여성들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의 비현실적인 낭만 속에서 방황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자신을 시혜적으로 돌보아 주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그 남편과 대등하게 서서 그가 자신에게 경탄하게 하며 하나의 탁월한 영혼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정도의 우정을 영위하려면 여성이 이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밖에서 직업여성으로 뛰든, 안에서 가정주부어머니로서 살아가든, 뭘 해도 정말 똑소리 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며,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모범적으로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여성들을 계몽시키기 위해서 교육의 힘을 강조한다. 본서의 저술동기 자체가 프랑스의 국민교육 법안에 여성들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 만큼, 본서 12장에서 저자는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을 실시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밑그림을 그려 낸다. 저자는 기숙학교(공교육)와 가정교사(사교육) 제도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데, 기숙학교에서는 사적인 가족애를 배울 수 없고, 가정교사는 공적인 인간애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양쪽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남녀공학 국영 교육기관을 설립하되, 연령별로 학생들을 분리시키고, 성별이나 빈부에 따라서는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섞으며, 모두 동일한 교칙을 적용함이 옳다고 말한다. 특히 저연령층은 아예 수업료를 면제하는 의무교육 시스템으로 운영해야 한다. 즉, 탈레랑의 국민교육 아이디어는 그런 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하다. 거기에 여성이 빠졌을 뿐.

저자에 따르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하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도움이 된다. 여성들이 어리석고 사악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남성 또한 상대방과 진정한 인간애로 교감할 수 없으며, 단순히 성적인 접촉에 기초하는 야만적인 관계만을 영위하게 된다. 특히 계몽되고 이성적인 남성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어리석을 경우 가정을 지키기가 훨씬 어렵게 되는데, 이는 아내들이 그들에게 재능과 영특함을 기대하는 이성적인 남편의 기대치를 충족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남녀공학 제도는 소년들에게 그들이 소녀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도덕적인지에 대한 많은 경험을 심어줄 수 있고, 이성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좋은 경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2.3. 루소는 틀렸다

"난 루소를 자주 인용하고 그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부러워하지만, 그 부러움은 항상 분노로 바뀌고, 그의 관능적인 명상을 적은 유려한 문장들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미소 짓다가도 그가 여성의 미덕을 모욕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치미는 울화로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는 논리적이어야 할 때 감정에 휩싸이고, 그의 생각은 오성을 밝혀주는 대신 상상력에 불을 붙인다. 그가 지닌 장점들조차도 그를 더욱 나쁜 길로 이끌었다. 정열적인 체질과 발랄한 상상력을 타고난 그는 여자를 정말 좋아했고, 일찍부터 아주 음란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꿈을 꾸면서도 논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착각하고, 거기서 나온 잘못된 결론을 마음 속에 간직한다."
- pp.63; 163; 164

본서의 5장에서는 루소의 《에밀》 을 중심으로 하여 당대의 몇몇 사상가들의 자기계발서 및 이에 영합하는 여성들의 소위 '조언' 을 비판하고 있다.[5] 물론 그 중에서도 공격의 핵심이 되는 타깃은 바로 장 자크 루소다. 《에밀》 은 동명의 이름을 지닌 가상의 소년을 상정하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학 작품인데, 루소는 이 에밀과 결혼시키기 위한 가상의 소녀로서 '소피' 라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문제는, 루소가 소피를 묘사할 때 저자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여성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이 간단히 말해서 "유치한 결론"(p.148)이라고 생각한다.

루소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들은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인생의 목표를 포기함이 마땅하며, 남성에게 평생 종속되는 삶을 살기 위해 연약해지려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엄청난 성차별적 발언인데, 루소는 이것이 심지어 자연의 섭리라고까지 했다. 루소는 남녀가 이처럼 다르므로 남녀가 서로 다른 일을 해야 하며, 여성만의 목표에 맞는 교육을 받고, 여성에게 어울리는 활동을 하며, 신체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는, 여성이 루소가 인식하는 그런 모습이 된 원인은 원래 그렇게 타고나서가 아니라 세상이 여성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며, 그 중 일부가 그에 영합하여 "자기를 얽맨 쇠사슬을 껴안고 애완견처럼 애교를 부리는"(p.150) 모습을 보이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루소가 그런 여성을 보면 역시 여성은 천성적으로 복종을 잘 한다며 무릎을 친다는 것(…).

저자가 보기에 루소의 《에밀》 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독자들이 그에게 설득되는 이유는 단지 루소가 갖고 있는 유려한 문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루소가 '소피' 를 묘사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반론을 전방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아래에서 보듯이 현대 기준에서 이런 주장은 어지간한 일반인 관점에서도 "꼴통"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여기까지 보면 독자에 따라서는 저 위대한 철학자 루소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명심할 것은, 분명히 루소는 "인간의 천성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에, 교육을 통해 개인의 이성을 훈련시키자" 는 관점을 따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백번 지당한 생각이 유독 여성에 대해서까지는 닿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루소는 여성이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이며 편협한 상태로 남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남성을 보조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저자의 관점에서는, 이성적인 여성만이 이성적인 남성을 제대로 보조할 수 있다. 무지한 여성 '소피' 는 이성적인 남성 '에밀' 에게는 그저 걸리적거리고 방해만 될 뿐이며, 늘 멸시를 당하고, 그들이 남성을 보조하고자 해도 저 성경구절 말마따나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잠시 루소를 변호하자면, 루소는 《The Discourses》 와 같은 몇몇 저작들에서 한편으로는 "인구의 절반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한다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혜택이 돌아올지 아직도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다", "남성들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다면, 먼저 여성들에게 그 위대함을 가르쳐야 한다" 와 같이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단에서 다시 논의되겠지만 루소는 인간의 본성(nature)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에밀》 에서 루소가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서 해석되게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소가 양성평등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철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내놓고자 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상과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4. "멍청한 여성들" 의 의미?

본서에 대해 풍월 정도로 접해 보았던 페미니스트나 여성 운동가들이 흔히 제기하는 주장이, "우리 여성에 대해서 너무 나쁘게 말한다" 는 것이다. 사실 저자가 본서에서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좋게 말하는 것보다는 나쁘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본서에서 그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이 바로 마지막 장인 13장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핏대를 높이며 비판하는 "무지한 여성들"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이런 뭇 여성들이 대체로 보이는 무지한 행동 다섯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사주팔자최면이다. 현대에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여성들은 소위 '미래를 예지한다' 는 점술가들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구름떼처럼 점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심에 반한다는 것을 먼저 지적한 뒤, 그 다음으로는 철저히 계몽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시도한다. 즉, 대부분의 삶의 문제나 질병들은 개인이 갖고 있는 나쁜 버릇이나 무지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이 자기 육체에 죄를 지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너무 많은 수가 "마치 인디언들이 악마를 모시듯 신의 뜻이 독재자의 권위나 폭력인 양 맹목적으로 거기 따른다"(p.299).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심신의 병을 치료한다거나 영계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옛날의 신탁이라는 사기극을 벌이는 것과도 같다. 그런 비합리적인 걸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바보 같은 행동 첫째다.

그 두번째는 로맨스 소설이다. 저자는 이런 장르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다. 로맨스라는 것은 사랑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현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바라게 되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다. 이런 것을 찾아다니는 여성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이에 만족하여 더 가치 있는 자기계발을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로맨스 소설은 여성들의 사고력을 증진하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할 뿐으로, 여성들은 그보다 더 양질의 수준 높은 책들을 많이 접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책으로서의 가치는 양판소 수준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안 읽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흐린 원천에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 처지"(p.302)가 될 거라고 한다.

셋째는 옷치장을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관심사는 오직 남성의 사랑을 얻을 만한 옷에만 집중된다. 여성이 옷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정신이 계발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그들은 옷 이외의 무언가에 관심 가질 만한 안목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 간의 경쟁과 질투가 나타나는데, 남성의 관심이 그들의 행복을 높여 주기 때문에, 서로들 남성의 관심을 끌고자 경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남보다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고, 더 예쁘고, 더 우아한 옷을 입음으로써 남성의 칭찬과 추앙을 받으려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넷째는 간략하게만 짚고 넘어가는 것인데, 뜻밖에도 동정심을 들고 있다. 저자의 논리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동정심이 많긴 하지만, 그것의 기초가 이성이 아니라 무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좋아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즉 무지한 사람이 불의를 접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이 바로 동정심이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성을 갖춘 여성은 똑같은 불의를 접했을 때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이성적인 여성은 정의감을 드러내고 부당함에 대해 항의할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다섯째는 자녀의 방임이다. 무지한 부모들은 자녀를 방임하면서, 자녀들 앞에서 하인을 가혹하게 모욕하거나 오만하게 행동하고, 그런 걸 보고 자라서 사나워진 자녀들을 통제하지 못해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학생들을 가혹하게 통제하고 권위주의적인 복종을 가르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 육아는 다정함과 일관성이지, 성급함과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다. 반대로 저자는 자기 자녀들을 왕자나 공주처럼 떠받드는 행동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방임이라고 여긴다. 이런 어머니들 치고 자기 하녀들이나 하인들까지 왕자나 공주처럼 대하는 법은 없으며, 이는 무지에 기초하는 애정이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무지한 어머니들은 자녀를 책임감 있게 기르기보다는 그저 몸단장만 하거나 남성들의 눈에만 들기 위해 애쓰는 경향이 있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다섯 가지 비판을 통해 볼 때, 저자는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소위 '혐오적' 인 시각을 갖고 있는가? 사실, 전혀 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본서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본서는 서문에서부터 마지막 대목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여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성의 미개함은 그들이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므로, 비웃음을 받을 이유 또한 없다" 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 저자는 "여성들은 허영과 외모 가꾸기에 찌들어, 교태를 부리며 어떻게든 좋은 남성과 결혼에 골인하는 데 목을 매고 있다" 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결론은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비합리적이다" 가 아닌, "여성들을 그렇게 만드는 사회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를 향한다. 따라서 저자가 여성들을 멍청하다고 비난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본서의 메시지에 대한 오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반응

남성들이 하얀 가발을 쓰고 다니던 그 옛날 그 시절에 출간된 본서는, 과연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을까? 저자의 전기 작가 재닛 토드(J.Todd)에 따르면, 출간 이후 처음 5년 동안 3,000부, 이후 극히 적은 부가 팔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한동안 본서는 아예 역사 속에서 잊혀져야 했다. 그러나 출간 직후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고, 초창기 미국 도서관마다 비치되어 있었던 등 서구 세계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는 등, 일반 대중과는 달리 지식인 계층에게는 출간 당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물론 본서가 당대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크게 달라지는 점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으므로, 심지어는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 고드윈조차도 본서에 대해서 "우리가 아니라 훗날의 평가를 기다리겠다" 고 기약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고드윈의 이 발언 때문에 조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

한길사 판본의 손영미 역자에 따르면, 본서는 그나마 그 지식인 계층에게도 매우 극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부정적인 반응의 경우, 토머스 테일러(T.Taylor), 메리 헤이스(M.Hayes), 리처드 폴웰(R.Polwhele), 벤저민 실리먼(B.Silliman) 등이 저자를 조롱하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테일러의 경우 아주 펄펄 뛰면서 저자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물론 지식인들 중에는 긍정적인 반응도 적지 않아서, 당장 저자의 남편인 윌리엄 고드윈을 비롯하여 조지 엘리엇, 엠마 골드만, 로버트 사우디(R.Southey) 등이 저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결국 그 정도뿐, 19세기 들어서 그대로 잊히는가 싶던 본서는 대서양 건너편에서 다시 부활했다. 1840년대 이래로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세네카 폴스 회합을 주도했던 엘리자베스 스탠턴(E.C.Stanton) 등이 저술한 《History of Woman Suffrage》(1881)에서 처음으로 본서가 등장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본서를 가리켜서 '고결한 정신과 진정으로 순수한 지혜의 말' 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제1물결 페미니즘에게 빛을 보는가 싶던 본서는, 20세기 초반에 서구 지성세계를 정신분석학이 지배하면서 다시 폄하의 대상이 되었고, 저자는 손쉽게 병리화되었다. 그 이후로 1974년에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코브(R.Cobb)가 저자에 대해 신랄하게 조롱하는 서평을 쓰는 등,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본서의 존재를 깨달은 서구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작가들이 꾸준히 저자를 지지해 주었으며, 그 사례로는 버지니아 울프, 앨리스 웩슬러(A.Wexler), 에이드리언 리치(A.Rich) 등이 있다.

한길사 판본의 뒤편에 실린 비평 자료들은 학계의 관점에서 본서를 평론하는 다양한 단행본들과 핸드북, 논문들의 풀 텍스트를 완역해 놓고 있다. 역자의 고생을 고려해서라도(…) 여기에 각각의 자료들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 이해진(2014)[13]의 경우 조선시대 여성 성리학자였던 임윤지당과 저자의 비교를 시도한다. 여기서는 본서와 《윤지당유고》 를 서로 비교하는데, 두 문헌 모두 여성이라는 특정성 및 객체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성 및 주체로서의 지위로 도약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본서가 여성을 남성처럼 만들고자 할 때, 이는 여성의 '남성화' 라기보다는 여성의 '인간화' 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한계점

책세상문고 판본의 문수현 역자는, 역서의 뒷부분에 해제를 첨부하여 본서의 한계점 세 가지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첫째, 본서는 구체적인 정책적 목표를 제시하기보다는 단지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 머물렀으며, 참정권과 같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도 그저 한두 줄 정도로 언급하고 그쳤다. 둘째, 본서는 중간 계급 여성들을 독자층이자 운동의 동력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메시지의 확장성이 부족하다. 물론 이들에게 귀족 여성들의 허영을 흉내내기를 그만두라고 한 것까지는 좋지만, 중류와 상류를 비교하는 와중에 중류와 하류를 비교하는 것이 누락되어, 노동자 계급이자 저소득층인 여성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셋째,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저자 역시 중간 계급 남성을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그 남성의 곁에 설 만한 자격을 갖춘 여성상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현대 페미니즘이 갖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통찰까지 얻기는 부족하다. 즉, 본서는 그저 역사적인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본서가 루소의 《에밀》 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소개했지만, 이에 대해 김용민(2004)[14]은 루소의 편에 서서 저자를 반박하고자 한다. 그는 저자가 루소에 대한 비뚤어진 애증의 마음을 지닌 채로 문맥을 무시한 인용을 빈번하게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울스턴크래프트가 루소의 철학 전반에 대해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흔적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p.118)고 평가 절하한다. 루소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 상태' 속에서의 인간의 본성이었으나,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에만 천착한다는 것이다. 김용민(2004)은 그와 더불어, 저자가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시켰을 때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탁월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증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문헌에서는, 남녀에게 동일한 내용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본서가 루소 이상으로 구체적인 교육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김용민(2004)의 문헌에 대해서 나무위키에 한하여 생각건대, 두 가지의 의문점을 떠올릴 수 있다. 첫째, 루소가 인간의 본성에, 저자가 교육을 통해 만들어가야 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에 저마다 강조점을 달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가 루소만큼 인간의 본성에 깊이 있게 이해하지 않았다고 (또는 못했다고) 해서 꼭 저자를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것은 교육을 어떻게 이해할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의견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둘째, 저자가 본서를 저술할 당시 루소는 이미 사망한 후였으며, 본서는 루소가 아니라 탈레랑에게 헌정되었음을 고려하면, '교육의 청사진의 부재' 는 본서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다. 본서는 독자인 탈레랑이 이미 교육의 청사진을 갖고 있었음을 다분히 의도하고 있다. 저자는 탈레랑에게 철학적으로 루소보다 탁월한 제2의 청사진을 제안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탈레랑 자신의 청사진을 보완해 주기 위해 본서를 저술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요컨대, 루소 이상의 철학적 가치를 갖는 교육론을 논하는 것은 애초부터 저자의 저술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강상희(2006)[15] 및 강옥순(2007)[16]의 경우, 그들의 논문에서 본서가 여성성의 가치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본서가 여성성이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성별' 의 조건에 고정되여 있음을 인정하면서, 여성의 역할에서 모성애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나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본서가 강조하는 이성의 가치는 결국 그 당시의 남성중심적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므로, 이 또한 현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고도 하였다.

5. 둘러보기

파일:페미니즘 기호 화이트.svg페미니즘 · 젠더 도서 목록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페미니즘 · 젠더 도서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여성 픽토그램.svg 세계
여성의 권리 옹호(1792) · 여성의 종속(1869) · 제2의 성(1949) · 여성의 신비(1963) · 성의 변증법(1970) · 성 정치학(1970) · 여성, 거세당하다(1970)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1975) · 이갈리아의 딸들(1977) · 하나이지 않은 성(1977) ·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1981) · 다른 목소리로(1982) · 백래시(1991) · 페미사이드(1992) · 혐오와 수치심(2004) · 여성혐오를 혐오한다(2010) · 나쁜 페미니스트(2014)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5) ·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2018)
파일:여성 픽토그램.svg 대한민국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1995) · 82년생 김지영(2016) · 그럼에도 페미니즘(2017) · 양성평등에 반대한다(2017) · 페미니즘 리부트(2017) · 근본없는 페미니즘(2018) · 혐오 미러링(2018)
파일:남성 픽토그램.svg 세계
남성성/들(1995) · 남성 페미니스트(1998) · 여성의 남성성(1998) · 마초 패러독스(2006)· 맨박스(2016)· 테스토스테론 렉스(2017)
파일:남성 픽토그램.svg 대한민국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2016) · 그런 남자는 없다(2017)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2017) ·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2018) · 한국, 남자(2018) ·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2018)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2019)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페미니즘 비판서 · 비페미니즘 젠더 도서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세계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2000) · 잘못된 길(2003) · 548일 남장 체험(2006) · 남자다움에 관하여(2006) · 소모되는 남자(2010)
대한민국
혐오의 미러링(2016) · 악플후기(2016-7) · 포비아 페미니즘(2017) ·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2018) · 우먼스플레인(2019)
}}}}}}}}}

[1] 한길사 판본은 《여권의 옹호》 로 되어 있다. 본 문서에서는 모든 서지정보들을 가장 일찍 번역된 판본인 한길사 판본에 맞추되, 제목만큼은 "여성의 권리 옹호" 로 삼고 한길사 제목은 리다이렉트 처리하였다. 이는 더 많은 출판사들이 택한 번역을 따르면서, 그와 동시에 여권(旅券)과의 개념적 혼동을 방지하기 위함이다.[2] 1847년 출생의 대표적인 서프러제트 운동가.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사람이 본서 출간 100주년을 기념했다는 점에서 본서의 시간적 위치를 알 수 있다(…). 참고로 저 유명한 고전파 작곡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본서 출판 1년 전에 요절했다.[3] 굳이 분류하자면, 많은 식자들이 지적하듯이 "일단은 리버럴 페미니즘에 속하면서도, 리버럴 페미니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 너무 많다". 이는 그런 분류가 나타나기 이전에 효시로서 나타난 사상서이기 때문일 것이다.[4] 최소 6주설(…)이 있으며 이쪽이 다수설이다. 그 외에도 3개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5] 함께 비판하는 문헌으로는 제임스 포다이스(J.Fordyce)의 설교집 《Sermons to Young Women》, 존 그레고리의 《A Father's Legacy to His Daughters》, 체스터필드 경(Lord Chesterfield)의 《Letters to His Son》 이 있으며, 그 외에도 피오치(Piozzi) 부인, 스틸(de Stael) 남작 부인, 장리(Genlis) 백작 부인의 서간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6] Rauschenbusch-Clough, E. (1898). A study of Mary Wollstonecraft and the right of woman. London.[7] Korsmeyer, C. (1976). Reason and morals in the early feminist movement: Mary Wollstonecraft. In C. Gould, & M. Wartofsky (Eds.), Woman and philosophy: Toward a theory of liberation. New York.[8] Janes, R. M. (1978). On the reception of Mary Wollstonecraft's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The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39(2), 298.[9] Guralnick, E. S. (1977). Studies in Burke and his time. Texas Tech Press.[10] Ferguson, M., & Todd, J. (1984). Mary Wollstonecraft. Boston: Twayne Press.[11] Myers, M. (1978). Mary Wollstonecraft's letters written in Sweden: Toward romantic autobiography. Studies in Eighteenth-Century culture, 8, 165-185.[12] Poovey, M. (1985). The proper lady and the woman writer: Ideology as style in the works of Mary Wollstonecraft, Mary Shelley, and Jane Austen. University of Chicago Press.[13] 이해진 (2014). '여성'에서 '인간'으로, 주체를 향한 열망: 임윤지당과 울스턴크래프트 비교 연구. 한국여성학, 30(2), 89-125.[14] 김용민 (2004).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페미니즘 재조명: 루소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43(2), 108-135.[15] 강상희 (2006).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교육론 연구. 교육철학, 36, 99-115.[16] Kang, O. (2007). Wollstonecraft's vindication and revolutionary enthusiasm: The progress of those glorious principles. 영미어문학, 85, 93-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