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With Strictures on Political and Moral Subjects(英) 여성의 권리 옹호(韓)[1] |
발행일 | 1792년(원서) 2008년(역서) |
저자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Wollstonecraft) 손영미 역 |
출판사 | Thomas & Andrews(원서) 도서출판 한길사(역서) |
ISBN | 9788935652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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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정치경제학이 애덤 스미스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여성들 역시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빚지고 있다."
- 밀리센트 포셋(M.Fawcett),[2] 《여성의 권리 옹호》 출간 100주년 기념사 中
- 밀리센트 포셋(M.Fawcett),[2] 《여성의 권리 옹호》 출간 100주년 기념사 中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여성 또한 감성이 아닌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덕목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의 양성평등이 필요함을 제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서이다. 본서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쓰인 책이기 때문에,[3] 일차적으로 여성 계몽의 중요성을 납득시키고자 노력하며, 이로 인해 "여성이 훌륭한 어머니와 훌륭한 아내가 되기 위해서라도, 여성은 계몽되어야 한다" 와 같은 성 역할을 긍정하는 면모도 많이 보인다. 또한 여성 교육을 핵심 의제로 삼기는 하되, 그 외에도 모성애 이슈나 서프러제트 같은 참정권 관련 아이디어 (p.247) 등이 본서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주장하든 간에, 결국 여성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탁월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일단 이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일종의 "기승전계몽"(…)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본서는 당대의 여러 사상가들, 특히 그 중에서도 《에밀》(Émile)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인사들, 그리고 존 그레고리(J.Gregory)를 포함한 여성 교육가들의 모순을 지적한다. 즉 이들은 "모든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자유롭고 평등하다" 고 말해 놓고는, 막상 여성들에 대해서는 "여성은 인간이 아니며, 이성적이지 않고, 그저 남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일 뿐이다" 라고 말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 사상가들은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성을 갈고 닦는 것은 남성의 덕목이지만, 여성들은 그런 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서 남성의 간택을 받는 것이 '여성만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두 가지 덕목' 논리는 본서가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지점이 되었다.
본서의 예상 독자층은 허영심 많은 귀족층 여성들도 아니고, 빈곤으로 편협해지고 위축되기 쉬운 저소득층 여성들도 아닌, 가정교사나 소설가 등의 직업을 갖춘 중간 계급 여성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중간 계급이 자꾸 귀족층을 동경하고 모방하기 위해 허영심 많은 문화를 따르려 한다면서, 이들이야말로 정말로 남성들과 대등하게 이성을 추구하는 계몽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술하겠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 최악의 테크트리(?)는 백치미 → 교태 → 일시적 사랑 → 질투 → 허영심이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간드러지는 아양과 눈웃음을 동원해서 잘난 남성과의 결혼에 골인하려는 여성들이야말로 가장 한심하다. 반면, 저자가 대안적으로 내세우는 여성 최고의 테크트리는 지성미 → 탁월함 → 영원한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과는 달리, 사랑은 나이가 들고 외모가 시들면 끝내 질투로 변질되고, 질투를 보상하기 위해 허영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서는 상업적 목적으로 매우 급하게 저술되어 출간되었는데[4] 그래서인지 원고에 문법적 오류가 많고 퇴고의 흔적도 없다고 한다. 저자는 본래 1권으로 글을 마치려 했으나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3권으로 나누고자 하였고, 2권 이후부터는 상속법이나 결혼법 등 여성 관련 법제화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술했듯 갑작스런 산욕열로 인한 요절 때문에 2권 이후의 출간은 무산되고 말았다. 아무튼 본서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프랑스 혁명가이자 교육사상가인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에게 헌정되었다. 탈레랑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프랑스 무상 의무교육 제도의 근거가 되고 있는 《Rapport sur L'Insruction Publique》 라는 보고서를 제헌국회에 제출했는데, 그의 교육 제안에 소년만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저자가 정식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
국내에는 판본이 굉장히 다양하게 존재해서, 연암서가의 2014년 번역판, 한길사의 2008년 번역판, 책세상문고의 2011년 및 2018년 번역판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책세상문고는 부분부분 중요한 부분만 번역해서 펴낸 얇은 책(…)이며, 시간이 없거나 가볍게 읽기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적합하다. 정말로 진지한 문헌고찰을 원한다면 한길사 판본이 좋다. 이쪽은 본서 전체를 완역했으며, 그에 더하여 당대의 각종 사료들과 문헌들, 비평들, 논문들까지 풀 텍스트를 전부 완역해서 수록해 놓고 있다! 한길사의 경우에는 본서 제목을 《여권(女權)의 옹호》 로 정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찾을 때 다소 혼동할 수 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전 오턴 주교 탈레랑 페리고르 씨께
- 서론
- 1장: 인간의 권리와 의무
- 2장: 여성에 대한 여러 견해
- 3장: 같은 주제의 계속
- 4장: 여성 타락의 원인과 현실
- 5장: 여성을 모욕에 가까운 연민의 대상으로 그려낸 작가들에 대한 비판
- 6장: 유년기의 연상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
- 7장: 여성의 미덕으로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겸손 또는 정숙함
- 8장: 여성에게 있어 좋은 평판의 중요성이 도덕에 끼치는 해악
- 9장: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구별이 끼치는 해악
- 10장: 부모의 사랑
- 11장: 자식의 도리
- 12장: 국민 교육
- 13장: 여성의 무지에서 비롯된 우행들: 여성의 습속을 개혁함으로써 이루어질 정신적 개선의 예에 대한 결론들
저기 6장에서 연상(association)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현대적인 심리학이 나오기 이전에 인간의 정신에 대해 데이비드 하틀리(D.Hartley) 등의 사상가들이 상정하던 전근대적 이론을 가리킨다. 하틀리는 《Observations on Man》 에서 뉴턴의 에테르 이론을 활용하여 인간의 감각을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연상론은 인간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을 떠올리는 인지(cognition)~지각(perception)의 과정을 그 시대 나름대로의 추론을 통해 밝히고자 한 이론이다. 손영미 역자에 따르면 본서에서 저자가 지적한 연상론은 그보다는 데이비드 흄의 오성론(understanding)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흔히 사상가들은 남성이 이성을 자신의 덕목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그들은 여성 역시 이성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점을 누락했다.
- 그들은 남성의 덕목과 여성의 덕목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여성의 여성스러움과 비합리성은 덕목이 아니라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 여성들이 실제로 무지한 모습을 많이 보이긴 하지만, 전면적인 남녀공학 교육을 유년기부터 의무적으로 받게 한다면 이는 사라질 것이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여성이 무지함보다는 이성을 추구하고, 남성의 사랑보다는 남성과의 대등한 우정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제시했는지 살펴보고, 루소의 《에밀》 을 저자가 어떤 이유로 비판했는지를 확인하며, 저자에게 가해지는 "여성을 멍청하다고 비난했다" 는 흔한 비판이 본서의 메시지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1. 인간의 권리와 의무
인간의 탁월함은 이성과 지혜, 덕성을 통해서 얻어지지만, 인간은 권력에 대한 맹목적 복종으로 인하여 타락되고 가려지게 된다. 인간 사회는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조금씩 평등해져 왔으며, 이제는 권력자들도 예전처럼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루소는 오늘날의 세태를 비판하려다 보니, 거꾸로 가장 평등치 못했던 원시 자연 상태를 가장 좋은 상태라고 잘못 찬미하였다.
- 2. 여성에 대한 여러 견해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과는 다른 덕목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으며, 여성들에게 유순함과 순수함으로 남성의 사랑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여성들이 의존적이어야 한다거나, 유순해야 한다다거나, 미모를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는 그들에게 권력에 대한 맹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남성들의 입에 발린 찬미는 여성들에게 탁월함을 파괴하며, 여성들은 그런 찬미 없이도 남성과 대등한 우정을 나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 3. 같은 주제의 계속
여성들은 자신의 유능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자랑하며, 자기 자신을 계발하기보다는 남성들의 사랑을 얻으려는 데에만 골몰한다. 이들은 남성 권력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권력은 나약한 인간부터 타락시키며, 마침내 그 사람의 가정과 삶을 파괴한다. 반면 계몽된 중류층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덕목을 추구함으로써 남편의 존경을 얻고 자녀와 가정도 살리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 4. 여성 타락의 원인과 현실
여성이 가진 권력은 귀족이나 권력자들이 지닌 권력과 같아서, 자기 재능이나 노력으로 얻은 존경이 아니기에 그 정신을 필히 타락하게 만든다. 남성들은 여성스러움이라는 권력을 일견 추앙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무기력한 존재에 대한 경멸일 뿐,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집 밖에서건 안에서건 모든 여성에게 이성과 덕목은 필수적이며, 여성은 이를 통해서 상호존중의 부부관계와 성숙한 육아를 실천할 수 있다.
- 5. 여성을 모욕에 가까운 연민의 대상으로 그려낸 작가들에 대한 비판
루소, 포다이스, 그레고리 같은 남성 저술가들과 여기에 영합하는 일부 여성들은 여성의 타락을 정당화하는 논변들을 퍼뜨리고 있다. 이들은 여성에게 순수함과 교태, 예의범절을 갖출 것을 요구하지만, 그렇게 칭송을 받는 삶보다 이성을 계발하는 삶이 더 바람직하다. 체스터필드 경은 인생에 대한 냉소와 인간에 대한 의심이 교육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삶에 대한 지혜는 직접 경험하며 얻는 것이다.
- 6. 유년기의 연상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
여성들은 유년기부터 받아 온 습관적 연상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나이가 들어서도 이성이 아니라 몸치장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여성들은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바람둥이 같은 유형의 남성들만을 추구하지만, 이성적이고 계몽된 남성에게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성을 계발한 여성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우정을 바탕으로 한 고귀한 부부관계를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 7. 여성의 미덕으로서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겸손 또는 정숙함
정숙함은 남녀 모두가 추구해야 할 덕목으로, 겸허함, 수줍음, 얌전함, 순결함 등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성을 통해 자연히 깨우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성들은 여성의 정숙함을 악용하려 하며, 상대방을 멸시하는 기사도 정신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정숙함과 양립 불가능하다. 여성들이 정숙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동성의 친구들이나 심지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도 정숙한 몸가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8. 여성에게 있어 좋은 평판의 중요성이 도덕에 끼치는 해악
여성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사회적 평판은 피상적이고도 표면적인 격식과 의무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가장 하찮은 수준의 도덕에 불과하다. 특히 그 중에서 여성들에게만 유달리 강조하는 평판으로 육체적 순결이 있으며, 이를 잃은 여성은 전적인 타락을 한 것처럼 잘못 비난받는다. 그러나 서로의 도덕성과 정숙함을 촉진할 책임은 남녀 모두에게 부여된 신성한 의무이며, 남녀 중 누구도 이 책임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 9.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구별이 끼치는 해악
우리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에 있어, 특히 재산과 신분의 불평등은 여성들이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데 더 큰 피해를 끼친다. 여성들은 도덕적이기 위해 남성보다 더 힘들게 노력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여성의 삶을 법과 제도로 보장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이 깨우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더 나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을 갖춘 남성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 10. 부모의 사랑
진정으로 자녀를 잘 가르치고 모범적인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도 또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독립적인 정신이 반드시 요구된다. 그러나 타락한 정신의 여성들은 자녀가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변덕스러운 육아를 함으로써 끝내 자녀를 망친다. 부모자녀 간의 애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돌보고 아끼는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다.
- 11. 자식의 도리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은 권위로 억지로 윽박질러서 복종시킬 문제가 아니며, 이는 부모로서 저열하고 나태한 자세이다. 부모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태도로 자녀를 설득시켜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심과 효도를 받아야 하며, 이는 부모로서의 의무이다. 무지몽매한 육아는 아들보다 딸에게 더 큰 피해를 끼치며, 그렇게 자란 딸들은 바로잡기도 힘들거니와 훗날 남편과 가족들도 괴롭게 만든다.
- 12. 국민 교육
국민 교육의 혁신은 국가가 직접 남녀공학 공립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서, 남녀와 빈부의 구분 없는 의무교육제로 보장해야 한다. 그 목적은 학생들이 가족애를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애를 갖춤으로써 마침내 인류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하는 데 있다. 남녀를 동일하게 교육하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하며, 개인적 강인함과 사회구조적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이롭다.
- 13. 여성의 무지에서 비롯된 우행들: 여성의 습속을 개혁함으로써 이루어질 정신적 개선의 예에 대한 결론들
여성들만이 유독 많이 저지르는 무지한 행동과 습속들이 있는데, 점술을 믿는 것과 낭만적 소설, 옷치장, 값싼 동정, 자녀 방임이 그것이다. 여성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이성을 기르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들이 이성을 계발한다면 무지한 모습도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며, 남성들 역시 여성들을 계몽시켜서 더 밝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2.2. 무지에서 이성으로, 사랑에서 우정으로
"남자들은 여성의 열등함을 지나치게 키워 온 나머지 이제 여성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여성에게 능력을 계발하고 미덕을 쌓을 기회를 준 다음, 여성의 정신이 얼마나 열등한지 따져보게 하라."
- p.78
- p.78
18세기 남성들의 논리는 여성을 대등하게 이성을 지닌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무지 몽매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었다. 먼 훗날의 비슷한 책인 《여성의 종속》 에서도 바뀌지 않은 점이라면, 이들 남성들은 단순히 기술적(descriptive)인 의미에서 '여성들은 그러하다' 라고 묘사한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규정적(prescriptive)인 의미에서 '여성들은 그래야 한다' 고까지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여성들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로서 남는 것이 규범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남성은 유식하고 합리적이며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한 덕목이라면, 여성은 반대로 조금이라도 더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인 상태로서 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남성들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남성에게 한없이 의존하고, 아기자기하고, 교태를 부리며, 매사에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유순하고, 아무리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끝까지 인내하며, 수동적이고, 신체적으로 병약하며, 아는 것이 없어야 했다. 요컨대 백치미 + 헤타레 + 병약 + 요망(…) 속성을 지닌 여성들일수록 남성들에게 환영 받기 쉬웠다. 그들은 여성들이 이런 면모를 갈고 닦아서, 잘난 남성들의 마음을 홀려 결혼에 골인한 뒤 애 낳고 잘 기르는 것이 가장 큰 대의요 덕목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모든 여성들의 궁극적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찬미를 진정한 애정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는 이성을 갖춘 드높은 존재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다. 저자는 이런 여성관이 기본적으로 "아이나 동물의 재롱을 볼 때 갖게 되는 느낌과 비슷하다"(p.64)고 말한다.
여성들의 유순함과 인내심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이 고귀하기는 하지만, 만일 그 유순함이 의존성과 나약함 때문에 나타난다면, 만일 그 인내심이 채찍을 맞아도 항의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에 나타난다면, 그런 유순함과 인내심은 덕목이 아니라 비참함을 가리는 가식에 불과하다. 즉,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참기만 하는 건 미덕이 아니다"(pp.76-77). 게다가 이런 여성들이 과연 자신의 남편을 제대로 내조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을까? 18세기 남성들은 아내가 순해야 집안 만사가 잘 돌아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자기 주장을 펼치지 않는 여성은 집안을 불행과 악행으로 물들인다는 것이다. 10장과 11장에서 저자가 강조하듯이, 이런 여성은 자녀를 권위주의적인 강압으로 키우거나 헬리콥터 부모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뿐이다. 권위주의 루트를 탄 어머니는 자녀에게 효도하라며 갑질을 일삼게 될 뿐이고, 헬리콥터 루트를 탄 어머니는 자녀를 눈치만 보는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겸손함 내지 정숙함, 영어로는 'modesty' 에 대응되는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개념은 "자기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고고한 의식과 결코 모순되지는 않지만 허영심이나 건방짐과는 거리가 먼 올바른 자기인식을 갖게 해 주는 소박한 성품과, 정숙함에서 나오는 순결한 정신"(p.211)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비하와 같은 '겸허함' 과도 다르고, 무지에 기초하는 '수줍음' 과도 다르며, 예의범절 및 격식에 기초하는 '얌전함' 과도 다르고, 신체적 성관계 여부에만 치중하는 '순결함' 과도 다르다. 오히려, 정숙함이라는 개념은 지금껏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요구되었을 뿐, 남녀 모두가 덕목으로 삼기에 적절한 좋은 가치인 것이다. 헌데 여성만 정숙해야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이 정숙함을 추구하는 것이 본인들에게 손해가 되도록 만들었다. 정숙하지 못한 남성들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가꾸고 계몽되는 것에 무관심한 대다수 무지몽매한 여성들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온갖 악행들을 저지른다. 잠시 이미지 하나를 떠올려 보자. 꽤나 여성스럽고 두껍게 화장을 해 놓고서, 그저 밍크코트를 두른 채 백화점 직원들에게 마구 갑질을 일삼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저자 당시에도 이런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고, 본서에서 저자는 이런 여성들을 매우 극혐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성이 계발되지 않은 소위 '세련된 숙녀' 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 공연히 하인들을 괴롭히고 집에서 군림하며 자신의 허영심을 끝없이 채워 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들의 지식은 상식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감정은 비틀렸으며 까다롭고, 감성은 유치하면서도 예민하고,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어 줄 이성적 판단력은 결여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저자는 심지어 본서 4장에서 이런 여성들을 타락한 여성들이라고까지 말한다.
여성들은 왜 이런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은가?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눈앞의 달콤한 쾌락에 매혹된 나머지 깨우치고자 하는 동기가 부족하다. 여성들이 이성을 추구하고 인격 도야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찬미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찬미로부터 오는 쾌락은 심지어 여성들의 삶의 목표인 것처럼 교육되어 왔으니, 여성들은 그걸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러하니 자연히 자기수양과 덕목의 계발 역시 요원해지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라는 힘을 대대로 물려받아 온 여성은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천부의 권리를 포기해 왔고, 평등에서 얻을 수 있는 건전한 기쁨을 획득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짧은 순간 여왕 대접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p.109). 이들은 가장 아름다울 시기에는 덧없고 공허한 여왕 대접을 받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득을 챙기며 어떠한 덕목도 계발하지 않다가, 훗날 아름다움을 잃게 되면 경멸받게 된다. 저자는 이것이 '자기 노력으로 얻어낸 특별대우' 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들이 타락하는 메커니즘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런 달콤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남성의 사랑이다. 여성들은 남성의 눈에 들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온갖 교태와 아양과 애교와 요망함을 총동원하려 애를 쓴다. 하지만 이렇게 얻어진 남성의 사랑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그 여성을 귀히 여기는 게 아니라, 단지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그리고 "들판에 핀 화사한 꽃들과 동일시"(p.107)하는 수준의 보호본능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변하지 않지만 외모는 시들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사랑' 의 불꽃은 오래가지 않아 사그라들고 만다. 그때부터 이제 아내의 불안이 시작된다. 내가 남편에게 내쳐지면 어떡하지, 남편이 나를 두고 다른 젊은 여자와 놀아나면 어쩌지, 남편이 성생활에 관심이 없어지면 어찌해야 하지, 이런 식의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이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사랑에 너무 '올인' 한 결과로, 중년 여성들은 다른 여성을 경쟁자로 여겨 질투하거나, 자기 자신을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로 치장하기 위해 허영심을 부린다.
이 때문에 저자는 여성들에게 남성에게 사랑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존중받을 생각을 하라고 말한다. 즉 저자가 이해하는 최상의 부부관계는, 덧없이 식어 없어질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애정과 상호존중에 기초한 우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저자에 따르면, 우정은 "부드러운 신뢰와 진실한 존경의 마음"(p.136)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성 없는 여성들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의 비현실적인 낭만 속에서 방황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자신을 시혜적으로 돌보아 주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그 남편과 대등하게 서서 그가 자신에게 경탄하게 하며 하나의 탁월한 영혼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정도의 우정을 영위하려면 여성이 이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밖에서 직업여성으로 뛰든, 안에서 가정주부나 어머니로서 살아가든, 뭘 해도 정말 똑소리 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며,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모범적으로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여성들을 계몽시키기 위해서 교육의 힘을 강조한다. 본서의 저술동기 자체가 프랑스의 국민교육 법안에 여성들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 만큼, 본서 12장에서 저자는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을 실시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밑그림을 그려 낸다. 저자는 기숙학교(공교육)와 가정교사(사교육) 제도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데, 기숙학교에서는 사적인 가족애를 배울 수 없고, 가정교사는 공적인 인간애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양쪽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남녀공학 국영 교육기관을 설립하되, 연령별로 학생들을 분리시키고, 성별이나 빈부에 따라서는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함께 섞으며, 모두 동일한 교칙을 적용함이 옳다고 말한다. 특히 저연령층은 아예 수업료를 면제하는 의무교육 시스템으로 운영해야 한다. 즉, 탈레랑의 국민교육 아이디어는 그런 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하다. 거기에 여성이 빠졌을 뿐.
저자에 따르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하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도움이 된다. 여성들이 어리석고 사악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남성 또한 상대방과 진정한 인간애로 교감할 수 없으며, 단순히 성적인 접촉에 기초하는 야만적인 관계만을 영위하게 된다. 특히 계몽되고 이성적인 남성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어리석을 경우 가정을 지키기가 훨씬 어렵게 되는데, 이는 아내들이 그들에게 재능과 영특함을 기대하는 이성적인 남편의 기대치를 충족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남녀공학 제도는 소년들에게 그들이 소녀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도덕적인지에 대한 많은 경험을 심어줄 수 있고, 이성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좋은 경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2.3. 루소는 틀렸다
"난 루소를 자주 인용하고 그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부러워하지만, 그 부러움은 항상 분노로 바뀌고, 그의 관능적인 명상을 적은 유려한 문장들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미소 짓다가도 그가 여성의 미덕을 모욕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치미는 울화로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는 논리적이어야 할 때 감정에 휩싸이고, 그의 생각은 오성을 밝혀주는 대신 상상력에 불을 붙인다. 그가 지닌 장점들조차도 그를 더욱 나쁜 길로 이끌었다. 정열적인 체질과 발랄한 상상력을 타고난 그는 여자를 정말 좋아했고, 일찍부터 아주 음란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꿈을 꾸면서도 논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착각하고, 거기서 나온 잘못된 결론을 마음 속에 간직한다."
- pp.63; 163; 164
...그는 논리적이어야 할 때 감정에 휩싸이고, 그의 생각은 오성을 밝혀주는 대신 상상력에 불을 붙인다. 그가 지닌 장점들조차도 그를 더욱 나쁜 길로 이끌었다. 정열적인 체질과 발랄한 상상력을 타고난 그는 여자를 정말 좋아했고, 일찍부터 아주 음란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꿈을 꾸면서도 논리적인 생각을 한다고 착각하고, 거기서 나온 잘못된 결론을 마음 속에 간직한다."
- pp.63; 163; 164
본서의 5장에서는 루소의 《에밀》 을 중심으로 하여 당대의 몇몇 사상가들의 자기계발서 및 이에 영합하는 여성들의 소위 '조언' 을 비판하고 있다.[5] 물론 그 중에서도 공격의 핵심이 되는 타깃은 바로 장 자크 루소다. 《에밀》 은 동명의 이름을 지닌 가상의 소년을 상정하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학 작품인데, 루소는 이 에밀과 결혼시키기 위한 가상의 소녀로서 '소피' 라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문제는, 루소가 소피를 묘사할 때 저자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여성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이 간단히 말해서 "유치한 결론"(p.148)이라고 생각한다.
루소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들은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인생의 목표를 포기함이 마땅하며, 남성에게 평생 종속되는 삶을 살기 위해 연약해지려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벌써 엄청난 성차별적 발언인데, 루소는 이것이 심지어 자연의 섭리라고까지 했다. 루소는 남녀가 이처럼 다르므로 남녀가 서로 다른 일을 해야 하며, 여성만의 목표에 맞는 교육을 받고, 여성에게 어울리는 활동을 하며, 신체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는, 여성이 루소가 인식하는 그런 모습이 된 원인은 원래 그렇게 타고나서가 아니라 세상이 여성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며, 그 중 일부가 그에 영합하여 "자기를 얽맨 쇠사슬을 껴안고 애완견처럼 애교를 부리는"(p.150) 모습을 보이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루소가 그런 여성을 보면 역시 여성은 천성적으로 복종을 잘 한다며 무릎을 친다는 것(…).
저자가 보기에 루소의 《에밀》 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독자들이 그에게 설득되는 이유는 단지 루소가 갖고 있는 유려한 문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루소가 '소피' 를 묘사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반론을 전방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아래에서 보듯이 현대 기준에서 이런 주장은 어지간한 일반인 관점에서도 "꼴통"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 루소 : "소녀들은 특별히 더 엄중한 통제를 가하여 철저히 복종시켜야 한다"
루소는 여성들이 천성적으로 더 방탕하고 경박하며 바람기 심하고 변덕스러우므로 이를 가능한 한 억눌러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성은 천성적으로 의존적이기에, 남성이 복종을 요구하면 군말없이 따를 것이라고도 했다. 더 나아가, 루소는 여성에게 자유를 주면 안 되는 이유로, 여성들은 무엇을 주면 지나치게 탐닉하고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으며, 통제받는 삶을 살아야만 착하고 유순한 성격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야 남성들의 허물과 결점과 불의까지 묵묵히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저자는 여성이 갑자기 자유를 얻으면 그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반론한다. 저자에 따르면, "노예나 폭도들 역시 해방된 순간에는 그런 식으로 극단적인 행동에 빠져든다"(p.151). 또한 여성에게만 인내와 유순함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며, 덕목으로서의 진정 고귀한 유순함은 이성을 계발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 루소 : "남편이 밖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려면 아내가 안에서 유순해야 한다"
이 유순함에 더하여, 루소는 설령 여성이 화가 났더라도 그 화를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는 식의 '교활한 술수' 가 가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저자는 이에 대해서, 모욕을 참아넘기는 아내는 훗날 반드시 더 큰 모욕을 받으며, 그것은 자연의 섭리도 아니고, 단순히 참는 것은 잘해봐야 불의에 대한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반론한다. 또한 화가 났는데도 그 화를 감추고 남편에게 안기는 아내는 혼외정사를 할 때도 그것을 더욱 잘 숨길 수 있을 것이므로, 자신의 감정을 감춘다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데 있어서 절대 좋은 것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 루소 : "소녀들에게는 남자 홀리는 기술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
루소는 이 주장을 하면서, 여성이 남성의 마음을 홀리고 농락하는 등의 각종 술수와 교태, 그리고 상대방의 기분을 파악하는 눈치야말로 여성을 남성과 대등한 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남성이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해도, 여성은 그런 남성의 혼을 빼 놓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평등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술수와 교태는 탁월한 정신과 양립할 수 없으며, 남성이 설령 육체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 한들 여성이 참된 지식과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불필요하지는 않다고 하였다. 또한 눈치 있게 말하는 행위는 도리어 남성들의 사회생활에서 정말 많이 발견되어, 남성들과 대화하다 보면 오히려 진솔하게 하는 말을 찾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 루소 : "여성은 종교적 권위에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루소는 소녀들이 종교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항상 자신이 무엇을 보아야 할지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즉, 루소는 여성에게 깊이 있는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했으며, 그들은 그저 단순히 성직자가 그렇다면 그런 줄로만 알면 된다고 하였다. - 그러나 저자는 이처럼 여성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고 믿는' 신앙을 길러주는 것이 과연 탁월한 남성과의 대화에 어울릴 만큼의 지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반론한다. 이런 여성들은 조금이라도 생각이란 걸 시작하게 되면 곧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게 될 뿐이라고.
- 루소 : "여성은 남성의 쾌락을 지배하는 권력을 갖고 있다"
루소는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망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만 부부관계를 허락한다면 그만큼 남성이 몸이 달아올라서(…) 아내를 오래 사랑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 저자는 여성이 남성의 사랑에 '올인' 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다. 사랑은 덧없고 잠깐일 뿐이며, 여성의 외모가 시들면 남성의 성적 욕망 역시 잠잠해질 것인데, 어째서 여성들은 그 잠깐의 사랑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쳐서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하는가? 설령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정결하고 현명한' 여성의 행실이라고 불러 주어야 하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지적인 남편을 충분히 내조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아내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게 저자의 제안이다.
- 루소 : "여성은 천성적으로 인형놀이를 좋아한다"
이것은 3장에서 나온다. 현대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며, 대표적으로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Sommers)가 있다. - 루소가 여아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루소보다 훨씬 더 여아들을 많이 접해 보았을 저자의 관점에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으며, 실제로 여아들이 보고 듣는 것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억눌린 생활 속에서 장난거리가 없는 무료한 소녀들이나 인형을 좋아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에 밖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에 수치심을 갖지 않았던 명랑한 소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뛰어난 지성을 지녔다. 하지만 여성다움을 추구하는 미련한 여성들은 여성다움에 자기 자신을 끼워맞추기 위한 가식만 늘어갈 뿐이라고.
여기까지 보면 독자에 따라서는 저 위대한 철학자 루소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명심할 것은, 분명히 루소는 "인간의 천성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에, 교육을 통해 개인의 이성을 훈련시키자" 는 관점을 따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백번 지당한 생각이 유독 여성에 대해서까지는 닿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루소는 여성이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이며 편협한 상태로 남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남성을 보조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저자의 관점에서는, 이성적인 여성만이 이성적인 남성을 제대로 보조할 수 있다. 무지한 여성 '소피' 는 이성적인 남성 '에밀' 에게는 그저 걸리적거리고 방해만 될 뿐이며, 늘 멸시를 당하고, 그들이 남성을 보조하고자 해도 저 성경구절 말마따나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잠시 루소를 변호하자면, 루소는 《The Discourses》 와 같은 몇몇 저작들에서 한편으로는 "인구의 절반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한다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혜택이 돌아올지 아직도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다", "남성들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다면, 먼저 여성들에게 그 위대함을 가르쳐야 한다" 와 같이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단에서 다시 논의되겠지만 루소는 인간의 본성(nature)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에밀》 에서 루소가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서 해석되게 마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소가 양성평등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철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내놓고자 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상과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4. "멍청한 여성들" 의 의미?
본서에 대해 풍월 정도로 접해 보았던 페미니스트나 여성 운동가들이 흔히 제기하는 주장이, "우리 여성에 대해서 너무 나쁘게 말한다" 는 것이다. 사실 저자가 본서에서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좋게 말하는 것보다는 나쁘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본서에서 그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이 바로 마지막 장인 13장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핏대를 높이며 비판하는 "무지한 여성들"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이런 뭇 여성들이 대체로 보이는 무지한 행동 다섯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그 첫번째는 사주팔자와 최면술이다. 현대에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도 여성들은 소위 '미래를 예지한다' 는 점술가들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구름떼처럼 점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심에 반한다는 것을 먼저 지적한 뒤, 그 다음으로는 철저히 계몽주의에 입각한 비판을 시도한다. 즉, 대부분의 삶의 문제나 질병들은 개인이 갖고 있는 나쁜 버릇이나 무지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이 자기 육체에 죄를 지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너무 많은 수가 "마치 인디언들이 악마를 모시듯 신의 뜻이 독재자의 권위나 폭력인 양 맹목적으로 거기 따른다"(p.299).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심신의 병을 치료한다거나 영계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옛날의 신탁이라는 사기극을 벌이는 것과도 같다. 그런 비합리적인 걸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바보 같은 행동 첫째다.
그 두번째는 로맨스 소설이다. 저자는 이런 장르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다. 로맨스라는 것은 사랑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현실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바라게 되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다. 이런 것을 찾아다니는 여성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이에 만족하여 더 가치 있는 자기계발을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로맨스 소설은 여성들의 사고력을 증진하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할 뿐으로, 여성들은 그보다 더 양질의 수준 높은 책들을 많이 접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책으로서의 가치는 양판소 수준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안 읽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흐린 원천에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 처지"(p.302)가 될 거라고 한다.
셋째는 옷치장을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관심사는 오직 남성의 사랑을 얻을 만한 옷에만 집중된다. 여성이 옷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정신이 계발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그들은 옷 이외의 무언가에 관심 가질 만한 안목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 간의 경쟁과 질투가 나타나는데, 남성의 관심이 그들의 행복을 높여 주기 때문에, 서로들 남성의 관심을 끌고자 경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남보다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고, 더 예쁘고, 더 우아한 옷을 입음으로써 남성의 칭찬과 추앙을 받으려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넷째는 간략하게만 짚고 넘어가는 것인데, 뜻밖에도 동정심을 들고 있다. 저자의 논리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동정심이 많긴 하지만, 그것의 기초가 이성이 아니라 무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좋아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즉 무지한 사람이 불의를 접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이 바로 동정심이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성을 갖춘 여성은 똑같은 불의를 접했을 때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이성적인 여성은 정의감을 드러내고 부당함에 대해 항의할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다섯째는 자녀의 방임이다. 무지한 부모들은 자녀를 방임하면서, 자녀들 앞에서 하인을 가혹하게 모욕하거나 오만하게 행동하고, 그런 걸 보고 자라서 사나워진 자녀들을 통제하지 못해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학생들을 가혹하게 통제하고 권위주의적인 복종을 가르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 육아는 다정함과 일관성이지, 성급함과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다. 반대로 저자는 자기 자녀들을 왕자나 공주처럼 떠받드는 행동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방임이라고 여긴다. 이런 어머니들 치고 자기 하녀들이나 하인들까지 왕자나 공주처럼 대하는 법은 없으며, 이는 무지에 기초하는 애정이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무지한 어머니들은 자녀를 책임감 있게 기르기보다는 그저 몸단장만 하거나 남성들의 눈에만 들기 위해 애쓰는 경향이 있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다섯 가지 비판을 통해 볼 때, 저자는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소위 '혐오적' 인 시각을 갖고 있는가? 사실, 전혀 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본서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본서는 서문에서부터 마지막 대목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여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성의 미개함은 그들이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므로, 비웃음을 받을 이유 또한 없다" 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 저자는 "여성들은 허영과 외모 가꾸기에 찌들어, 교태를 부리며 어떻게든 좋은 남성과 결혼에 골인하는 데 목을 매고 있다" 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결론은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비합리적이다" 가 아닌, "여성들을 그렇게 만드는 사회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를 향한다. 따라서 저자가 여성들을 멍청하다고 비난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본서의 메시지에 대한 오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반응
남성들이 하얀 가발을 쓰고 다니던 그 옛날 그 시절에 출간된 본서는, 과연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을까? 저자의 전기 작가 재닛 토드(J.Todd)에 따르면, 출간 이후 처음 5년 동안 3,000부, 이후 극히 적은 부가 팔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한동안 본서는 아예 역사 속에서 잊혀져야 했다. 그러나 출간 직후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고, 초창기 미국 도서관마다 비치되어 있었던 등 서구 세계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는 등, 일반 대중과는 달리 지식인 계층에게는 출간 당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물론 본서가 당대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크게 달라지는 점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으므로, 심지어는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 고드윈조차도 본서에 대해서 "우리가 아니라 훗날의 평가를 기다리겠다" 고 기약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고드윈의 이 발언 때문에 조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한 일.한길사 판본의 손영미 역자에 따르면, 본서는 그나마 그 지식인 계층에게도 매우 극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부정적인 반응의 경우, 토머스 테일러(T.Taylor), 메리 헤이스(M.Hayes), 리처드 폴웰(R.Polwhele), 벤저민 실리먼(B.Silliman) 등이 저자를 조롱하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테일러의 경우 아주 펄펄 뛰면서 저자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비난을 퍼부었다고. 물론 지식인들 중에는 긍정적인 반응도 적지 않아서, 당장 저자의 남편인 윌리엄 고드윈을 비롯하여 조지 엘리엇, 엠마 골드만, 로버트 사우디(R.Southey) 등이 저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결국 그 정도뿐, 19세기 들어서 그대로 잊히는가 싶던 본서는 대서양 건너편에서 다시 부활했다. 1840년대 이래로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세네카 폴스 회합을 주도했던 엘리자베스 스탠턴(E.C.Stanton) 등이 저술한 《History of Woman Suffrage》(1881)에서 처음으로 본서가 등장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본서를 가리켜서 '고결한 정신과 진정으로 순수한 지혜의 말' 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렇게 제1물결 페미니즘에게 빛을 보는가 싶던 본서는, 20세기 초반에 서구 지성세계를 정신분석학이 지배하면서 다시 폄하의 대상이 되었고, 저자는 손쉽게 병리화되었다. 그 이후로 1974년에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코브(R.Cobb)가 저자에 대해 신랄하게 조롱하는 서평을 쓰는 등,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본서의 존재를 깨달은 서구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작가들이 꾸준히 저자를 지지해 주었으며, 그 사례로는 버지니아 울프, 앨리스 웩슬러(A.Wexler), 에이드리언 리치(A.Rich) 등이 있다.
한길사 판본의 뒤편에 실린 비평 자료들은 학계의 관점에서 본서를 평론하는 다양한 단행본들과 핸드북, 논문들의 풀 텍스트를 완역해 놓고 있다. 역자의 고생을 고려해서라도(…) 여기에 각각의 자료들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엠마 라우션부시클러프(E.Rauschenbusch-Clough)[6] : 저자의 교육관은 상당히 사회주의적이며, 엘리트주의 교육관에 반대하는 성질을 갖는다. 본서는 전통적 가족 체계를 공격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이를 고상하게 만들어주는 조언이라 할 수 있다. 즉, 저자는 모성을 축소시키는 게 아니라 모성을 위대하게 만들고자 한다.
- 캐럴린 코즈마이어(C.Korsmeyer)[7] : 당시에는 여성이 비합리적 존재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당시의 페미니즘은 여성을 비합리적이게 만든 것이 바로 교육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해야 했다. 현대에도 스티븐 골드버그(S.Goldberg) 같은 사람들은 여성은 비이성적이라 주장하므로,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본서는 아직 유효하다.
- 레지나 제인스(R.M.Janes)[8] : 본서에 대한 초기 반응은 흔히 알려져 있는 것보다 의외로 훨씬 호의적이었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본서에 대해 오히려 침묵했고, 진짜 가혹한 비난은 6년 후인 1798년 이후에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안티페미니즘 측에서는 여성 해방의 '끔찍한' 결과물이라며 본서를 비난하려 했고, 페미니즘 측은 그쪽대로 여성 해방에 대한 백래시의 스토리텔링을 해야 했기에 이런 호의적 태도에 관심이 없었다.
- 엘리사 구럴닉(E.S.Guralnick)[9] : 본서는 페미니즘 서적이기에 앞서서 급진적인 성격을 갖는 정치철학 서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는 여성 권리의 옹호를 위해서는 먼저 정치학적인 급진성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모이라 퍼거슨(M.Ferguson) & 재닛 토드(J.Todd)[10] : 본서는 영국에서 발흥한 계몽주의적 조류와, 고학력 여성들로 구성된 블루스타킹스(Bluestockings) 사상가들의 출현, 그리고 프랑스의 국민교육 논의, 루소의 《에밀》 출간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본서는 합리주의와 기독교 낙관주의를 융합하여 대응하고 있다.
- 미치 마이어스(M.Myers)[11] : 본서는 당시 치열했던 "개혁이냐 파멸이냐" 의 종교적 논쟁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도덕학자들과 에세이스트들의 수많은 문헌들이 실제로 여성 교육의 혁신을 요구하고 있을 때였다. 본서는 여성의 종교적으로 이상적인 자리를 가사노동으로 한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여성을 그리려 하였다.
- 메리 푸비(M.Poovey)[12] : 본서는 저자 자신이 스스로의 여성성, 감정, 욕망, 육체성을 부정하면서 쓰여졌기 때문에, 본서에서 저자가 여성들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저자 본인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과도 같다. 이처럼 여성의 한계에 대한 저자의 부정은 저자 개인의 좌절된 지적 욕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 그리고 여성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기 위해 중성적 화자를 취하는 데에서도, 저자가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감지될 수 있다.
한편 이해진(2014)[13]의 경우 조선시대 여성 성리학자였던 임윤지당과 저자의 비교를 시도한다. 여기서는 본서와 《윤지당유고》 를 서로 비교하는데, 두 문헌 모두 여성이라는 특정성 및 객체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성 및 주체로서의 지위로 도약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본서가 여성을 남성처럼 만들고자 할 때, 이는 여성의 '남성화' 라기보다는 여성의 '인간화' 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한계점
책세상문고 판본의 문수현 역자는, 역서의 뒷부분에 해제를 첨부하여 본서의 한계점 세 가지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첫째, 본서는 구체적인 정책적 목표를 제시하기보다는 단지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데 머물렀으며, 참정권과 같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도 그저 한두 줄 정도로 언급하고 그쳤다. 둘째, 본서는 중간 계급 여성들을 독자층이자 운동의 동력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메시지의 확장성이 부족하다. 물론 이들에게 귀족 여성들의 허영을 흉내내기를 그만두라고 한 것까지는 좋지만, 중류와 상류를 비교하는 와중에 중류와 하류를 비교하는 것이 누락되어, 노동자 계급이자 저소득층인 여성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셋째,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저자 역시 중간 계급 남성을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그 남성의 곁에 설 만한 자격을 갖춘 여성상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현대 페미니즘이 갖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통찰까지 얻기는 부족하다. 즉, 본서는 그저 역사적인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본서가 루소의 《에밀》 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소개했지만, 이에 대해 김용민(2004)[14]은 루소의 편에 서서 저자를 반박하고자 한다. 그는 저자가 루소에 대한 비뚤어진 애증의 마음을 지닌 채로 문맥을 무시한 인용을 빈번하게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울스턴크래프트가 루소의 철학 전반에 대해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흔적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p.118)고 평가 절하한다. 루소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 상태' 속에서의 인간의 본성이었으나,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에만 천착한다는 것이다. 김용민(2004)은 그와 더불어, 저자가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시켰을 때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탁월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증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문헌에서는, 남녀에게 동일한 내용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본서가 루소 이상으로 구체적인 교육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김용민(2004)의 문헌에 대해서 나무위키에 한하여 생각건대, 두 가지의 의문점을 떠올릴 수 있다. 첫째, 루소가 인간의 본성에, 저자가 교육을 통해 만들어가야 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에 저마다 강조점을 달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가 루소만큼 인간의 본성에 깊이 있게 이해하지 않았다고 (또는 못했다고) 해서 꼭 저자를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것은 교육을 어떻게 이해할지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의견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둘째, 저자가 본서를 저술할 당시 루소는 이미 사망한 후였으며, 본서는 루소가 아니라 탈레랑에게 헌정되었음을 고려하면, '교육의 청사진의 부재' 는 본서에 대한 부당한 공격이다. 본서는 독자인 탈레랑이 이미 교육의 청사진을 갖고 있었음을 다분히 의도하고 있다. 저자는 탈레랑에게 철학적으로 루소보다 탁월한 제2의 청사진을 제안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탈레랑 자신의 청사진을 보완해 주기 위해 본서를 저술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요컨대, 루소 이상의 철학적 가치를 갖는 교육론을 논하는 것은 애초부터 저자의 저술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강상희(2006)[15] 및 강옥순(2007)[16]의 경우, 그들의 논문에서 본서가 여성성의 가치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본서가 여성성이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성별' 의 조건에 고정되여 있음을 인정하면서, 여성의 역할에서 모성애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나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본서가 강조하는 이성의 가치는 결국 그 당시의 남성중심적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므로, 이 또한 현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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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길사 판본은 《여권의 옹호》 로 되어 있다. 본 문서에서는 모든 서지정보들을 가장 일찍 번역된 판본인 한길사 판본에 맞추되, 제목만큼은 "여성의 권리 옹호" 로 삼고 한길사 제목은 리다이렉트 처리하였다. 이는 더 많은 출판사들이 택한 번역을 따르면서, 그와 동시에 여권(旅券)과의 개념적 혼동을 방지하기 위함이다.[2] 1847년 출생의 대표적인 서프러제트 운동가.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사람이 본서 출간 100주년을 기념했다는 점에서 본서의 시간적 위치를 알 수 있다(…). 참고로 저 유명한 고전파 작곡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본서 출판 1년 전에 요절했다.[3] 굳이 분류하자면, 많은 식자들이 지적하듯이 "일단은 리버럴 페미니즘에 속하면서도, 리버럴 페미니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이 너무 많다". 이는 그런 분류가 나타나기 이전에 효시로서 나타난 사상서이기 때문일 것이다.[4] 최소 6주설(…)이 있으며 이쪽이 다수설이다. 그 외에도 3개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5] 함께 비판하는 문헌으로는 제임스 포다이스(J.Fordyce)의 설교집 《Sermons to Young Women》, 존 그레고리의 《A Father's Legacy to His Daughters》, 체스터필드 경(Lord Chesterfield)의 《Letters to His Son》 이 있으며, 그 외에도 피오치(Piozzi) 부인, 스틸(de Stael) 남작 부인, 장리(Genlis) 백작 부인의 서간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코멘트를 남기고 있다.[6] Rauschenbusch-Clough, E. (1898). A study of Mary Wollstonecraft and the right of woman. London.[7] Korsmeyer, C. (1976). Reason and morals in the early feminist movement: Mary Wollstonecraft. In C. Gould, & M. Wartofsky (Eds.), Woman and philosophy: Toward a theory of liberation. New York.[8] Janes, R. M. (1978). On the reception of Mary Wollstonecraft's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 The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39(2), 298.[9] Guralnick, E. S. (1977). Studies in Burke and his time. Texas Tech Press.[10] Ferguson, M., & Todd, J. (1984). Mary Wollstonecraft. Boston: Twayne Press.[11] Myers, M. (1978). Mary Wollstonecraft's letters written in Sweden: Toward romantic autobiography. Studies in Eighteenth-Century culture, 8, 165-185.[12] Poovey, M. (1985). The proper lady and the woman writer: Ideology as style in the works of Mary Wollstonecraft, Mary Shelley, and Jane Austen. University of Chicago Press.[13] 이해진 (2014). '여성'에서 '인간'으로, 주체를 향한 열망: 임윤지당과 울스턴크래프트 비교 연구. 한국여성학, 30(2), 89-125.[14] 김용민 (2004).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페미니즘 재조명: 루소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43(2), 108-135.[15] 강상희 (2006).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교육론 연구. 교육철학, 36, 99-115.[16] Kang, O. (2007). Wollstonecraft's vindication and revolutionary enthusiasm: The progress of those glorious principles. 영미어문학, 85, 93-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