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포비아 페미니즘 |
발행일 | 2017년 9월 30일 |
저자 | 박가분 |
출판사 | 도서출판 인간사랑 |
ISBN | 9788974183707 |
#교보문고 |
1. 소개 및 출간 배경
포비아 페미니즘은 저자 박가분이 리얼뉴스에 기고해 왔던 칼럼들을 정리하여 출판한 서적이다. 이 책에서는 국내외 페미니스트들이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명분에 매몰되어, 대중의 공포를 비생산적으로 증폭킨다고 주장하며, 이를 막지 못한 진보진영의 자성을 촉구한다. 저자는 이전에 2016년에 《혐오의 미러링》 을 통해 메갈리아와 워마드,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여성운동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저자는 서문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온라인 영역에서 오프라인 영역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예상 독자층은 젠더 이슈에서 길을 잃은 젊은 독자층으로 설정하였으며, 페미니스트와는 서로간에 논쟁이 성립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독자층에서 제외하였다. 저술 동기는 저자에 따르면 《혐오의 미러링》 출간 이후로도 변함이 없는 진보진영의 모습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저자는 미러링이라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웹상의 혐오발언에 대해 진보측이 주목해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도리어 진보 학자들과 논객들이 이를 정당화하면서 어떤 비판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교보문고 소개에 따르면, "무엇이 진보진영과 언론 그리고 여성계 일각으로 하여금 메갈리아발(發) 혐오발언과 낙인 프레임에 대한 정당화에 집착하게 만들었는지" 를 다루는, 더 적극적인 비판을 펼쳐야 했다고.
사실 본서는 일차적으로는 페미니즘보다는 현대 한국/영미권 진보진영에 대한 평론에 가깝다는 인상을 많이 풍긴다. 1장의 서술로 미루어 보건대, 페미니즘 비판은 본서의 최종적 목표가 아니며, 본서는 그보다는 국내 진보진영의 자성과 노선 변경을 촉구하고 있는 (그리고 이를 위해 첫 시작으로서 페미니즘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도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의견이 같다면 성찰하면 되고, 다르다면 얼마든지 비판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에서 지적하듯이, 이 책의 비판을 여성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와의 소통을 비관하는 저자나, 비판에 대해 역으로 도덕적 비난을 돌려주는 페미니스트나, 서로 소통이 줄어 간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고심해야 할 문제이다.
참고로, (아마 출판사측의 귀책이 반 정도 될 것 같지만) 본서는 유독 오타가 굉장히 많다. '페미니즘' 같은 핵심 단어조차도 때로는 '페미니스즘'(…)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기도 하며, 심지어 179페이지에서는 소단락 제목에서조차 '중식이밴드' 를 '중식의 밴드' 로 잘못 표기하기도 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들어가며: 페미니즘은 더 이상 백지수표가 아니다
- 1장: 정치적 올바름은 정말로 올바를까
- 정치적 올바름에 지친 유권자들
- 버니 샌더스와 진보의 위기
-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진보의 도피처: 정체성 정치
- 2장: 포비아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 강남역 사건과 공포 상업주의
- 낙인의 언어로 사용되는 미소지니
- 공포정치와 포비아 페미니즘
-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왜 젠더혐오 발언에 취약할까?
- 3장: 멈춰서 생각하기: 젠더 이슈에 대한 팩트체크
- 로리타 컨셉은 정말로 아동성범죄를 부추기는가?
- 한국의 가사노동과 성별 임금격차에 숨겨진 진실
- UNDP와 WEF의 성평등 순위
- 4장: 포비아 페미니즘의 결과
- 정의로운(?) 검열과 공론장의 사유화
- 셀레브리티 페미니즘과 전체주의적 여론형성
- 페미니즘의 혐오 마케팅
- 인터넷과 일상의 피해사례
- 5장: 페미니즘의 통념에 도전하기
- 가부장제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 유리천장과 유리바닥
- 페미니즘 신화: 여성은 항상 약자이고, 피해자이고, 비폭력적인가?
- 남녀는 대립하는 관계일까?
- 나가며: 페미니즘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젊은 세대
여기서 3~4장은 국내 페미니스트들의 사건사고 동향으로서 《혐오의 미러링》 과도 내용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존재하며, 서정범 교수 무고 사건처럼 나무위키에 이미 잘 정리되어 있는 주제도 있다. 더불어 5장은 상당수가 《소모되는 남자》 의 중심 내용에 의존하고 있다. 읽다 보면 로이 바우마이스터(R.F.Baumeister)를 5장의 공저자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본 문서에서는 r.1 기준으로 서로 심하게 겹치는 부분은 구체적인 설명은 피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하다면 해당 도서의 문서로 갈 것.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작금의 페미니즘은 각종 범죄 현황과 남성 폭력, 임금격차, 가사분담, 성격차 등에 있어서 왜곡된 통계 해석으로 대중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 이처럼, 페미니스트들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건설적 제안을 내놓기보다는 단지 공포를 확대 재생산하는 파괴적인 악영향만을 끼치고 있다.
- 이들의 행보가 제지받지 않는 이유는, 진보진영이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명분에 천착하여 이들을 절대화하고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본서의 제목이기도 한 포비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본다. 다음으로 본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 '팩트체크' 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가 여성학 용어의 의미 남용의 사례로 들고 있는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왜 비판받고 있는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진보진영에 대해 진단하는 바를 정리한다.- 1. 정치적 올바름은 정말로 올바를까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진보 진영은 정체성 정치로 사회 문제를 환원해 옴과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 담론을 통해서 비판이 면제되는 안전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극우 선동가들이 선명한 메시지를 설파하자, 정치적 올바름에 지친 유권자들은 이를 진정성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대중이 진보를 외면하는 극우 반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진보 진영은 정체성 정치를 버리고, 다수의 정체성들을 관통할 수 있는 계급적 기반의 의제를 설정해야 하며, 이를 통해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여론을 설득해야 한다. - 2. 포비아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공포 메시지를 통해 대중을 결집시키고 동원하는 것은 오늘날 보혁을 막론하고 만연한 정치현상이 되었으며, 이는 페미니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내 페미니스트들은 'misogyny' 단어의 의미를 과용함으로써 비판을 차단하고, 남성 집단 전체를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만드는 유아적 퇴행을 보인다. 이처럼 대중을 유아화하는 공포 정치는 SNS의 또래문화를 통해 증폭되지만, 실상 인터넷은 제대로 된 공론장이 될 수도 없고, 대중은 정치적 주체가 되지도 못했다. - 3. 멈춰서 생각하기: 젠더 이슈에 대한 팩트체크
아동 성범죄, 남녀 간 임금격차, 가사노동시간 격차, 그리고 성격차지수(GGI)에 이르기까지, 많은 통계자료들이 페미니스트들에 의하여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일부 언론 매체들은 사회문제의 본질과 개선방안을 모색하기보다는 공포심을 확대 재생산하는 전형적인 포비아 페미니즘의 행태를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이 문제를 건설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남성을 비난하고 여성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보다는 실질적인 정책제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 4. 포비아 페미니즘의 결과
과거 중식이밴드나 DJ DOC의 사례에서 보듯이, 페미니스트들은 공론장을 사유화하고 자신들이 정의라는 인식에 빠져서 무제한의 문화예술 검열권을 요구해 왔다. 이들은 유명인들의 페미니즘 지지 혹은 거리두기에 일희일비하면서, 사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생각까지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파시즘적 행태를 보인다. 이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독선적 행보는 한편으로는 무제한적 자기정당화와 맞물렸고, 성평등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희생까지도 괜찮다는 주술적 착각에 빠지게 했다. - 5. 페미니즘의 통념에 도전하기
여러 쟁점들에 있어서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가부장제는 현재 해체되어 가는 취약한 제도이며, 폭력성 또한 남성이 여성보다 심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반직관적 경향에 대해서는,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지적했던 것처럼, 양성 간의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기초하는 다양한 대안적 가설들이 고려될 수 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애써 숨기려 하며, 개념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모호하게 함으로써 음모론적으로 덧붙는 다양한 억압 가설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2.2. 포비아 페미니즘?
우선 본서의 제목이기도 한 "포비아 페미니즘" 이라는 표현이 어쩌다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저자는 국내외 할 것 없이 현대의 페미니즘의 생리를 들여다 보면 공히 포비아(phobia), 즉 공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현대의 페미니즘은 공포 속에서 태어나, 공포를 먹고 자라고, 또 다른 공포를 부추긴다. 이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포비아 페미니즘이다.우선 공포의 형성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저자에 따르면, 공포는 대중을 결집하고 동원(mobilize)하는 정치적 메시지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강준만(2013)은 《증오 상업주의》 에서 제조된 증오가 우익의 방법론이라고 하였지만, 영국의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F.Furedi)는 자신의 저서 《공포 정치》(Politics of Fear)에서 공포를 통해 대중결집을 도모하는 정치 경향이 '무엇에 겁먹었는가' 의 차이만 있을 뿐 좌우가 똑같다고 하였다. 즉, 원래는 이런 공포 마케팅이 주로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졌었는데, 오늘날에는 보수고 진보고 할 것 없이 아군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공포를 자주 동원한다는 것이다.[1] 페미니즘 역시 공포 메시지를 통해서 여성들의 결집을 도모하며, 그 주요 소재는 여성 대상 폭력과 관련된 각종 통계들이다. 이 통계는 소위 '더 큰 대의' 를 명분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그 결과 언론에 의해 '제조된 공포'[2]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포비아 페미니즘은 공포를 증폭시키기 위해 그 적들의 '거대함', '만연함', '완고함' 을 강조한다. 이때 그 적은 흔히 여성혐오, 가부장제, 젠더폭력, 남성 간 연대 등이 꼽힌다. 하단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여성혐오(misogyny)를 포함한 몇몇 용어들과 여러 수사들은, 그것이 지적인 방식으로 소통되든 혹은 SNS 속 트윗이건 간에, 여성들의 공포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특히 여성혐오는 그 의미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어서, 오늘날 여성혐오는 세간에 마치 "여성들을 기분나쁘게 하는 모든 것" 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적대할 대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니, 그에 대한 공포 역시 그만큼 증폭되어 가고 있다. 엘리자베스 바댕테르(E.Badinter)가 자신의 페미니즘 비판서 《잘못된 길》(Fausse Route)에서 지적하듯이, 공포를 느끼는 자칭 '페미니스트 전사들' 은 그야말로 겁에 질린 무기력한 소녀가 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을 지켜 줄 새로운 "백기사" 로서 국가와 법에 호소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증폭된 후, SNS의 또래문화 속에서 공포는 다시 재생산된다.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기성사회로부터 모멸감을 경험하지만, 이들이 서로를 인정해 줄 또래문화를 형성할 환경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때 SNS는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또래문화를 경험할 좋은 기회가 된다. 하지만, 이들이 또래 사이에서 자기과시를 할 때 공포를 유발시키는 포비아 페미니즘의 단어들을 사용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과 연결된 수많은 또래들도 저마다 자기과시를 하면서 인정받으려 하게 되고, 그 결과 공포가 기하급수적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SNS뿐만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전반에 걸친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트페미만 그 사례가 되는 게 아니라 메갈리아나 일베저장소 역시 또래문화를 통해 탄생한 괴물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학계에서는 지금껏 사이버공간의 일탈을 구태의연하게 '신선한 가능성의 공간', '풀뿌리 민주주의', '유쾌한 시도' 같은 식으로 포장해 왔으나, 이제는 그 역기능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제 저자는 4장에서 그렇게 확산된 공포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고발한다. 이는 각각 희생양 만들기, 도덕적 검열주의, 전체주의적 독선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팽창된 공포는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고한 희생자를 만드는 것쯤은 괜찮다는 생각에 이르게 하는데, 저자는 "이 여성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라면 저 남성이 무고하게 당하는 것쯤은 괜찮다" 는 생각은 일종의 '주술적 착각' 이라고 말한다. 또한 중식이밴드와 DJ DOC의 사례에서 보듯, 이들은 공론장을 사유화한 채로 어떤 예술가가 자신들을 불편하게 할 때마다 무조건 사회적 말살을 하려고 든다. 마지막으로 메릴 스트립과 셰일린 우들리의 사례에서 보듯, 오늘날에는 연예인에게 "페미니스트입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으며, 이념과 다소 무관하게 살아가는 개인의 생각까지 간섭하고 강요하려는 독선적인 파시즘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2.3. 본서에서 제시되는 팩트체크
저자는 본서 3장에서 몇몇 쟁점들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통계자료를 반론하고 있으며, 이를 '팩트체크' 라고 부르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을 이하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3년 UN 마약범죄사무소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살해되는 7개국"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페미사이드(femicide)의 위험이 만연한 나라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 이는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당시 한국일보에서 〈페미사이드 쇼크〉 제하의 기사에서 보도했던 것에 근거한다. #관련기사
- 함께 목록에 오른 다른 국가들은 통가, 아이슬란드, 일본, 뉴질랜드, 라트비아, 홍콩이다. 살인범죄 자체의 발생빈도가 극도로 낮게 나타나는 (주로 선진국에 속하는) 국가들에서는, 성비만을 볼 경우 때로 여성 피해자가 남성 피해자보다 많아질 수 있다.
- OECD 살인범죄 발생빈도 평균은 10만 명당 4.1명인데, 우리나라는 1.1명으로 극히 안전한 국가에 속한다. 그러나 단순 성비만을 보았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약간 더 많이 살해당하는 경향에는 큰 통계적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반면 실제로 시민들이 체감하게 되는 범죄위험은 피해자 성비가 아니라 범죄 자체의 발생빈도이다. 성비 데이터는 범죄의 발생빈도가 높은 국가에서만 범죄예방정책 집행예산을 배정하기 위한 근거로 쓰이는 것.
- 그리고 해당 데이터는 단순 살인범죄에 대한 데이터이며, 이를 통해 혐오범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데이터의 자의적 해석에 속한다.
- 대한민국 강력범죄 피해자의 84%는 여성이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 이는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당시 한겨레에서 〈언니들의 이유 있는 분노: 통계로 짚어보았습니다〉 제하의 기사에서 보도했던 것에 근거한다. #관련기사
- 강력범죄의 기준 선정은 국가마다 다른데, 대한민국 경찰청 등이 작성하는 통계에서는 살인, 방화, 강도, 성범죄의 네 가지를 강력범죄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살인, 방화, 강도는 상대적으로 발생빈도가 낮고, 성범죄는 사회적 경각심이 증가함에 따라 발생빈도가 점차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남성인 경향이 있는 폭행 및 상해는, 해외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강력범죄에서 제외되어 있다. 한국식 체계에 따라 강력범죄를 재분류하면 어떤 나라든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자료 역시, 실제로 정책입안의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피해자 성비가 아니라 범죄 자체의 발생빈도이다.
- 한국은 아동 성범죄 발생률에 있어서 세계 4위를 차지한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 이는 2012년 경향신문 보도를 토대로 하며, #관련기사 그 근거는 2010년에 수행된 여가부 연구보고서인 〈국내외 아동 성범죄 특성 분석 연구결과〉 에 근거한다.
-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 비교대상이 된 국가는 독일, 영국, 미국, 한국, 일본으로 총 5개국이며 한국은 그 중에서 4위였고, "로리" 캐릭터가 보편화된 일본은 5위를 차지했다. 수치상으로는 아동인구 10만 명 당 16.9건 수준. 즉 범죄 발생률 관련하여 선진국 4곳과 비교했을 때 5개국 중 4위라는 것은, 똑같은 왜곡 전략으로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은 아동 성범죄에 있어서 안전하기로는 세계 2위" 라고 선전할 수도 있다.
- 우려할 만한 내용은 아동 성범죄가 점차 증가 추세라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세계 4위" 라는 부분이 강조됨으로써 포비아 페미니즘의 양상을 보이는 보도이다. 특히 이 기사는 포르노 규제론에 인용됨으로써 검열만능주의를 불러일으키나, 실제로 그 영향력에 대한 학계의 합의는 아직 없는(not conclusive) 상태이다.
-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월등히 더 심하게 폭력을 저지른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 부부 간의 가정폭력에 대한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 에 따르면,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 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쌍방폭력의 경향으로 나타난다. 남성의 여성 폭행이 50%, 쌍방폭행이 35%, 여성의 남성 폭행이 15% 가량 되는 비율.
- 또한 자녀학대 역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높고, 데이트 폭력의 경우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경중을 따지지 않은 데이트 폭력 전체로 보면 가해자의 남녀 성차가 무의미할 정도로 차이가 적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가 2009년 9-10월 서울지역 11개 대학 8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분석한 결과 데이트경험이 있는 여성들 중 77.8%가 정서적 폭력 문항 중 하나 이상을 경험하였다. 언어적 폭력 문항 중 하나 이상을 경험한 사람은 여성 응답자의 61.4%, 남성 응답자의 59.3%였다. 10개의 성적 폭력 문항에 대해 여성은 1인당 2.6문항, 남성은 1인당 1.5문항에 답하였다. 정서적·언어적·성적 폭력은 여성이 경험하는 비율이 더 높았으나, 신체적 폭력은 여성이 남성에게 더 많이 행사한 것으로 나왔다. 2009년 11월 25일 네이버-연합뉴스 데이트 성폭력 수준 심각-한국여성의전화 '데이트 폭력 실태 조사', 아카이브 2010년 삼육대 교수 서경현 등의 논문에 따르면[3] 남성과 여성 모두 97~98%가 심리적 가해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신체적 가해경험 역시 남학생들은 44.2%가, 여학생들은 58.4%가 가해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2014년 양승애, 서경현의 연구에서도[4] 파트너에게 신체적 가해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여학생은 58%, 남학생은 31.4%이며, 피해경험의 경우 남학생은 38.6%, 여학생은 19.3%였다.
- 오히려, 남성들은 여성에게서 폭력을 당할 때 자신이 폭력을 당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다. 예컨대 양승애, 서경현(2014)의 연구에서 58%의 여학생들이 가해경험이 있다고 했지만 38.6%의 남성들만이 피해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더 평화를 사랑하고 비폭력적일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보더라도 사실이 아니다. 전시의 윤간을 예로 들면, 승전국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전시 집단강간에 조력하는 경향이 있으며,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부역했던 여성 간수들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The Guardian》 에 따르면, 종전 직전의 게슈타포의 40%가 여성이었다고.
- 로리타 패션은 남성들을 나이 어린 여성에 대한 선호로 이끌고, 더 나아가 그들을 아동 성범죄자로 만든다.
- 연예인들의 로리타 화보나 패션들은 원래 처음부터 나이 어린 여성들을 선호하던 소비자층을 위한 것이지, 평범한 남성들에게 나이 어린 여성의 매력(?)을 홍보하기 위함이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매체의 영향력으로 인해 남성들의 선호 연령이 점차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 한때 논란이 되었던 "실비 키우기" 처럼 실제 아동 성범죄 상황을 묘사하지 않은 이상, 로리타 패션이나 화보는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외양을 연출하고 표현하려는 자유로운 시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페미니스트들은 미니스커트가 성범죄를 부추기는 게 아니며, 범죄의 잘못은 성범죄 가해자측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또한 여성들은 자신이 입어서 기분이 좋은 것을 입을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로리타 논란은 이에 반대되는 모순적인 입장이다.[5]
- 로리타 컨셉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남성들이 점차 '자기 자신을 로리처럼 꾸미지 않는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라는 비정상적 통념을 갖게 될 때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로리타 컨셉이 정말로 그런 통념을 부추기게 되는지는 페미니스트들도 확인해주지 않았고, 본서도 딱히 확인해주지 않는다.[6]
- 한국은 OECD 1위의 임금격차가 발생하는 나라이다.
- 우선 이 주제에 대해 반박하려는 남성들이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유독 극심한 임금격차에는 분명히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흔히 남성들이 들곤 하는) 여성들의 3D업종 기피와 이공계 기피는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저임금화에 영향을 주는 원인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어째서 한국이 압도적 1위의 임금격차를 보이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 저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연령에 따르는 여성 경력단절과 IMF 이후 가족임금(family wage) 제도의 와해가 그것이다. 국내 20대 연령층의 임금격차는 심지어 캐나다나 핀란드보다도 낮지만, 40~50대 임금격차는 세계 1위에 달할 만큼 극심한 연령 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또한 이 경력단절의 원인은 가족임금 제도 때문이지만, IMF 이후로 젊은층에게는 그것이 와해되었기에 일반화하기 어렵다.
- 이 때문에 20대 남성에게 임금격차는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곤 하는 것이다. 가족임금 제도가 남성에게도 과도한 노동과 책임을 강요함을 고려하면, 무조건적인 여혐 공포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노동구조의 솔루션이 나와야 남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 평균적인 한국 남성들과 맞벌이가정의 기혼 남성들은 가사와 육아를 여성에게만 독박을 씌움으로써 평균 가사노동시간이 OECD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 이는 2012년 오마이뉴스 기사를 토대로 하며, 그 근거는 통계청의 2009년 생활시간조사 데이터를 타국의 유관 조사들과 비교한 것이다. #관련기사
- 그러나 가사노동시간 격차는 대개 경제노동시간 격차와 함께 움직이며, 실제로 경제노동시간에 대한 데이터를 보면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2배 더 오랜 시간, 출퇴근 시간까지 합칠 경우 3배에 가까운 시간을 쏟는다는 것이 나타난다.
- 이는 물론 돈을 더 벌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성들에게 과도한 노동과 부족한 여가의 불행한 삶을 야기하기도 한다. 즉, 여성만 불행한 게 아니라, 남녀 모두가 한쪽은 가혹한 경제노동, 한쪽은 가혹한 가사노동으로 불행한, 총체적 난맥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 정리하면, (일부 언론사에서 은연중에 암시하듯이) 남성들은 정시퇴근하고 집에 와서 가사를 여성에게만 무책임하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일이 너무 많아서 야근을 하느라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 WEF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격차는 전세계 115위이다.
- 이는 불평등을 무엇으로 '측정' 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며, 그 중에서 GGI는 정책적 관심이 남녀 간의 상대적 격차효과에 맞추어져 있는 지표이다. 반면, 정반대의 결과가 얻어진 UNDP의 GII의 경우 그 국가의 전반적 소득수준과 삶의 질에 크게 의존한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실무 현장에서는 다수의 지표들을 보완하고 참고하면서 정책을 개발한다.
- GGI는 남녀 모두가 불행하거나 똑같이 행복할 때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지표다. 그 대표적 한계는 국가 간의 질적인 생활수준을 반영하지 않고, 통계에 미확인되는 가부장적 관습[7] 등이 가려지며, 고등교육 진학률 측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들어 남성들을 공격하지만, 관련기사 정작 그 공격범위에는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 역시 포함될 수 있어서, 여가부가 오히려 나서서 반박보도를 내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한다.
- 성격차는 단시간에 변화하지 않으며,[8] 건설적인 논의는 우리나라가 어느 하위지표에서 취약한가, 그것을 정책을 통해서 개선시킬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9] 그저 공포를 재확인하고 재생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 젊은 남성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과거의 가부장적 역할을 선망하지만,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인해 이것이 좌절되자 가부장제를 잃지 않기 위해 여성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 여성가족부가 주관한 2016년 〈양성평등인식조사〉 에 따르면, 20-30대 성인 남성들의 과반수가 향후 가족문화에서 가부장적 요소를 바꾸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또한 동 조사에서, 이들 중 35%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male-breadwinner model)을 거부했고, 28.1%는 여성의 독박육아를 거부했다.
- 또한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2008-2016년 기간 동안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의 감소폭은 여성에게서 -16.4%p의 감소폭으로 나타났으나, 남성에게서는 동 기간에 -24.7%p의 더 큰 감소폭으로 나타났다. 이는 남성들이 가부장제를 활용하여 결혼의 혜택을 챙겨 누리려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결과이다. 더 정확한 설명은, 가부장제는 이미 젊은층 사이에서 무너졌고, 아노미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여성들을 상대로 문화적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가설일 것이다.
2.4. 여성혐오 용어 의미의 확산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개념을 새로 창조하거나 기존 개념을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확장하는 것을 일종의 설명이나 논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설명도 논증도 아니다."
- p.99
- p.99
저자는 본서 5장과 다른 몇몇 부분들에서, 여성계의 현학적인 용어들이 의미상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용어의 "one-size-fits-all" 경향은 당초 여러 젠더 문제들이 상호연결된 것임을 의식함에서 출발했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여성학자 및 문화연구 이론가들은 "이런 자의적인 개념의 남용"(p.97)을 현학적으로 포장하지만, 정작 그 속은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먼저 어떤 용어의 과용은 원래 그 용어가 지적하려 했던 문제의식을 모호하게 한다는 것, 그리고 문제가 갖는 여러 층위의 성질을 희석하고 대안적 설명을 막는다는 것이다. 합의되지 않은 비유, 논리적 비약, 모호한 용어를 포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사회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지적 우월감뿐이다.
저자는 여기서 여성혐오(misogyny)라는 용어의 의미의 과포화를 사례로 들고 있다. 당초 사전적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미움과 멸시를 의미하던 이 단어는, 우에노 치즈코에 의하여 여성에 대한 호불호를 모두 포괄하는 타자화로 확대되었고,[10] 오늘날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 측의 모든 불쾌한 태도"(p.95)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확대는 정당한 반론이나 문제제기를 펼치는 사람들, 여성주의의 메시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전부 적대시하는 섬멸전을 가정한다. 저자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미소지니 프레임 아래서 모든 사회적 갈등의 문제는 사회 혹은 남성들이 나를 '미워한다' 는 유아적인 수준에서 사고된다"(p.97). 즉, 어떤 개념을 잘못 적용할 때, 사회현상을 잘못 해석할 때, 주장에 맹점이 있을 때 이를 지적하면, "내가 여성이라서 미워서 그래!" 라는 유아적인 방어를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예시화하기 위해서, 저자는 대표적인 논문으로 윤김지영(2016)의 것을 들고 있다.[11] 이 문헌의 요지는 "여성혐오가 사회 전반에 너무 강하게 퍼져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혐오인 줄도 모르고 거짓 평온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평온한 사회보다 시끄러운 사회가 더 건강한 법이다" 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윤김지영(2016)은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Balibar)의 논변을 빌려온다. 물론 발리바르의 원뜻은, "공연히 사회의 안정과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지 마라" 라고
하지만 그 통찰에도 불구하고, 이 두 문헌에서는 인식되지 않은 폭력이 단순히 폭력의 부재인지 아니면 부재처럼 보일 정도로 극단적인 폭력인지 구분하는 법까지는 독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제를 다소 삐딱하게 바라볼 여지가 생기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뭐시기 혐오' 를 하는 초(超)극단적 폭력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어쩌다 한두 명의 정신질환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인식하고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폭력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혐오가 그렇게까지 강하다면 결국 "그러는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라는 반문이 돌아올 여지가 생긴다. 이는 진실을 은폐하는 배후세력(PTB)을 상정하는 음모론에 대해 흔히 쓰이는 반론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존재증명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으며, 별도의 흥미로운 각주가 달려 있다. 이를 하단에 전체 옮겨본다.)
- [ 접기 클릭 ]
- > "...가장 평온해 보이는 가족과 연인, 친구 관계에서부터,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공적 관계로서의 직장에서조차 여성혐오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억압의 기제이자 현실운용원리인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의 스펙트럼이 이토록 방대한 것이 이 개념의 실패와 비효율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들은 이미 남성 중심적으로 개편된 일상성과 정상성에서 수혜를 누리는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21) 왜냐하면 고질적 폭력의 양태로서의 여성혐오에 대한 기민성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특혜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둔감성의 특혜를 누려온 이들에게는 여성혐오의 기제가 관습과 전통, 상식의 이름으로 철저히 내면화되었으며, 이러한 구조 속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지평을 굳이 헤집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다시 말해, 여성혐오 개념의 방대한 스펙트럼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아우른다는 것은 이미 이 사회가 여성혐오를 현실의 운용원리로 채택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일 뿐이다."
21) 심사위원께서 이 부분의 논증력이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필자가 강조하고자 한 부분은 현실의 기저로서 작동하고 있는 여성혐오가 문명이라는 남성 중심적 가치체계의 전수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여성혐오의 만연성은 결국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회의 문명성 자체가 여성혐오를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기에 여성혐오를 문제적인 것으로 감각해내는 것을 오히려 병적인 민감성으로 치부하게 함을 날카롭게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잘 알다시피, 합리성의 체계인 철학도 남근이성중심적 인식론의 결정판이며 인권선언의 최초 형태도 여성 배제적 선언이었으며 가족의 미풍양속 역시 가부장제의 공고화 원리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여성혐오적이지 않는 영역을 찾아낸다는 것이 오히려 지난한 작업이 된다.
- 윤김지영(2016), p.212
2.5.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 진보진영을 위하여
사실 이 단락의 내용이야말로 저자의 메시지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본서는 단순히 페미니즘 외부로부터의 비판서라기보다는, 진보진영 전반의 동향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비판서의 성격을 갖는다. 바꿔 말하자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니까 뒤늦게 관심을 갖고 비판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이미 진보진영에 대해서 일관되게 갖고 있던 기존의 문제의식을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징후' 와 연결했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저자가 기존에 사용하던 분석 틀이 이미 존재하므로, 그 솔루션도 구체적이게 되는 것. 아무튼 본서에 따르면, 상기된 페미니즘의 '한계점' 들은 그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토양에서 자연히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하의 내용은 본서의 1장의 내용을 편의상 뒤로 빼 놓은 것인데, 1장이 없었더라면 본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흔한 대증요법에 그쳤을 것이다.저자는 현대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로서 정체성 정치에 지나치게 집착함을 들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미국 리버럴들은 충격에 빠져서 "왜 여성들은...", "왜 무슬림들은...", "왜 성 소수자들은..." 과 같은 다양한 정체성 정치 논리들을 끌어다가 설명하려 애썼다. 또한 국내 진보세력 역시, 지난날 민주노동당처럼 계급적 기반을 갖춘 세력은 소멸했으며, 모든 진보정당들이 계급적 기반 대신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진보정당이 계급을 버리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정당, 혹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오타쿠화(化)된 정당" 의 길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작금의 한국 진보정당들은 후자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정체성 정치에 골몰한 정치세력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첫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우울증적일 정도의 애착을 갖게 되고, 그것이 공격받으면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이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세력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만들고, 그 결과 반동적으로 보수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정체성 정치는 현실의 사회문제의 복잡성을 환원하여, 그들 자신을 구조맹이자 맥락맹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이 평소 목놓아 외치던 것과는 달리, "사회문제 전반을 특정 정체성의 문제에 결부시키는 순간, 개개인의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모순과 사회구조의 문제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p.84)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사회문제는 개인의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등을 '가로지르며' 더 복잡한 다차원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데, 정체성 정치는 그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깔끔하게 하나의 정체성 여부로 끌고 가려 한다는 얘기다.
진보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이처럼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호하려 애쓰게 되며,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노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정당화된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마" 의 요구인데, 저자가 보기에는 성숙한 시민들의 사회문제 해결 솔루션이 아니라, 그저 유아적으로 퇴행하여 문화적 인정투쟁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진보언론에서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칼럼이 실렸을 때, 예전 같았으면 반론 칼럼을 싣거나 입장을 표명하거나 했겠지만, 현대에는 대개 "나 기분 나빠졌어, 사과해" 같은 반응이나, 잘해봐야 보이콧 같은 집단적 위력과시 중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PC운동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첫째, 우리 편에 대한 막연한 도덕적 우월감을 갖게 하여, 남들에게는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정작 남들을 존중하지는 않는 오만함을 보이게 만든다. 즉, 우리는 시시때때로 공격을 받고 있는 '가엾은 피해자' 들일 뿐이니, 우리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단말마의 절규" 가 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최후의 저항" 이 되지만, 너희 도덕적이지 못한 가해자들은 아무리 조심하려고 애를 써도 우리의 검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올바름은 이를 어긴 사회적 강자들을 설득과 합의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결국 이들이 추구하는 진보나 개혁은 상대편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계몽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상대방이 황당해하면 그것 역시 피해자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니, 결국 해 줄 말은 "감수성을 키우세요", "공부하세요" 밖에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5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서 패배하기라도 하면 이 '잔학무도한 가해자들' 이 또 어떤 가해를 저지를지 모르니, 권력을 잡았을 때 최대한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키자는 한탕주의적 마인드가 나타난다.
이런 문제들로 인하여, 그 결과 현대 진보진영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대의 아래에서 모든 비판이 면책되는 정치적 "안전 공간" 을 형성하고, 약자들은 언제나 진실하며 선하다는 언더도그마를 절대화하고 말았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진보세력에게 피해자성은 곧 훈장과도 같은 것이고, 과거와 같았던 약자들의 단결이나 사회적 책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게 되었으며, 고상한 도덕적 대의가 있는 이상 그 담론은 견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즉, 진보측은 현재의 PC 담론이 "정치를 가장한 탈정치이고, 현학을 가장한 반지성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p.11).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금지와 오류의 묵인, 워마드 등을 제지하지 않는 이유 등은 전부 그 사례 내지는 징후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극우 선동가들이 판을 치는 시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진보진영은 극우 선동가들과 "적대적 공생" 을 한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일 것인데, 트럼프의 정책과 행보가 대중의 지지를 얻을 때 리버럴들은 대중을 '계몽' 하면 될 일이라고 간단히 치부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중에게는 가식적인 위선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극우 포퓰리즘의 인기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저자가 보기에는 버니 샌더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PC에 지쳤다" 면서 정치적 올바름의 한계를 정확히 읽어냈다는 것. 유권자들이 보기에 트럼프는 부도덕한 막말꾼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성 있는 위악자처럼 느껴지게 되었으며, 이는 그 대척점에 진보진영이 자청해서 자리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진보진영의 운동가들도 트럼프 같은 "올바르지 못한" 선동가가 필요하고, 트럼프 같은 선동가들도 PC운동가들 덕택에 인기를 누린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적대적 공생의 실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할 것인가? 우선,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첫 걸음으로서, 오늘날 폭주하고 있는 메갈리아나 워마드 같은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가감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 다음으로, 저자는 정체성 정치 역시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여, 저자는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부의 재분배와 같이 계급적 이익에 기반한 정책이 더 호소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는, 마침내 진보정당들이 그 계급적 기반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대중정당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시한다. 특정 계급이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만이 지지하는 정당이 아닌, (극소수 지배자들을 제외한) 모든 대중과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비전과 정책들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여성계의 반응
예상했을 수도 있겠지만 학계에서 소통되는 서평은 없다(…). 대신 거론할 만한 것들이 몇 가지 발견되는데, 우선 《노동자연대》[12] 에서 최미진(2017)의 서평을 투고한 적이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따르면, 본서는 여성계 일각의 문제점을 잘 통찰했으며, 그 원인을 '정체성 정치가 계급 문제를 흐리게 하고 파편화시킨다' 는 점을 잘 포착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몇몇 한계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저자의 '계급' 이라는 용어는 불분명하며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도 차이가 있어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진보진영에 대한 진단 역시 동의하기는 어렵다. 둘째,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항상 동일한 반사회적 혐오사이트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며, 미러링을 한다는 점만 같을 뿐 그 사회적 배경은 서로 엄연히 다르다. 셋째, 《소모되는 남자》 에서부터 기원하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더 낮은 지위를 '선택' 하고 '선호' 한다는 생각은, 사회적으로 명백히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희석시키는 주장일 뿐이다. 넷째,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반대한다" 거나 "나중에 논의하자" 는 정치인들의 차별옹호적 코멘트를 긍정하거나 불가피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그 밖에, 본서에 대한 반응은 아니지만, 이미 1994년에 유사한 논지의 문헌이 존재한다. 류숙렬(1994)[13]은 두 페이지의 짧은 칼럼에서, 박가분 씨가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경향을 이미 '빅팀 페미니즘' 으로 정리하고, 여성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을 '파워 페미니즘' 으로 설정하여,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본서에서도 자주 인용한 바 있는 나오미 울프(N.Wolf)가 《Fire with Fire》 라는 신간에서 '무력한 희생자 여성' 구도를 세우는 페미니즘을 비판한 것에 대한 호응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를 서로 비교하자면, 빅팀 페미니즘은 도덕적으로 경직되어 있다면, 파워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추구를 긍정한다. 또한, 빅팀 페미니즘은 비판과 고발이 눈물과 비극의 비장미로 서사화되지만, 파워 페미니즘은 비판과 고발을 웃음과 장난의 해학으로 서사화한다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파워 페미니즘이 여성들이 기존 제도의 비극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기존 제도를 가지고 얼마든지 장난을 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프레임화함으로써, 더 많은 여성들을 참여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페미니즘 문헌들에서 간접적으로 본서를 언급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손희정(2017)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다. 여기서는 미디어-정동 이론을 활용하여, 본서가 팩트체크를 한다고 하였지만, 정작 그 '팩트' 가 소비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혐오 정동이 집단감응을 일으키며 확산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함께, 손희정(2017)은 《일베의 사상》 에서 저자가 일베 이용자들이 탈맥락화를 하는 경향을 잘 그려냈지만, 이번에는 저자 자신이 젠더문제에서 탈맥락화를 시도한다고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손희정(2017)은 대중 사이에서 저자가 상당한 평론적 권위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저자는 차라리 (대중에게 흔히 백과사전처럼 여겨지곤 하는) 나무위키에 가깝다고 정리했다.
"팩트의 소비" 라는 측면에서 본서를 공격하는 문헌은 또 있다. 강준만(2018)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은 본서에 대해 직접 비판하지는 않지만, 참고문헌에서 본서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면 본서의 논리에 그다지 설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6장의 《혐오의 미러링》 비판에서, 박가분 본인뿐만 아니라 "사이다" 나 "팩트폭력" 을 말하는 그의 지지자들이 사실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실상, 사실(fact)이라는 것도 담론의 결과물로서 얼마든지 프로파간다 용도로 사용될 수 있으며, 특히 사회문제를 개인화하고 탈구조화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강준만(2018)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소개한 손희정(2017)과도 의견을 같이 한다. 강준만 교수는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할 정도의 불균형은 없지만, 남녀 간에는 실제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 작가인 최태섭(2018)의 저서 《한국, 남자》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본서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본서의 3장과 거의 유사한 통계 데이터들을 5장에서 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본서와 유사한 통계를 가지고 정반대의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최태섭(2018)은 한국 남성들이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혐오를 조작한다고 공격하고 있다. 두 서적의 공통점은, "페미니스트들은/한국 남성들은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면서 상대방 진영의 선택편향의 행태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반면, 두 서적의 차이점은, 본서는 그 선택편향의 원인을 PC운동과 정체성 정치에서 찾는다면, 최태섭(2018)은 탈진실(post-truth) 시대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즉, 탈진실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그것만이 진실인 양 믿는 경향이 있는데, 남성들이 통계를 해석하는 것도 (그리고 그 해석을 제시하는 본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즉 최태섭은 남성들이 태도를 확증편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최태섭(2018)은 자신의 주장이 탈진실적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4. 유의점과 의문점
본서에서 제시되는 포비아 페미니즘의 논리적 구조는 비단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적 현상들에 대입이 가능하므로, "우리는 그렇지 않아" 라고 선뜻 말하기 곤란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본서의 254페이지에서 암시하는 바를 고려할 경우, 심지어 저 당당위 측 남성들의 심리조차도 "유아화된 인정투쟁" 으로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이들까지도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경쟁적으로 피해자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피해자성에 호소하는 것은 본서에서 비판하는 행태에 속한다. 본서는 정체성 정치에 입각한 공포 메시지를 배격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득세하면 우리나라도 뉴질랜드처럼 되어서 남자들 다 이민가야 한다" 는 식의 메시지에 동조하는 것도 본서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저자도 인정하듯이 사실상 현대사회에서 이런 정치 구호가 아닌 걸 찾기가 더 힘들다. 따라서 본서가 긍정하는 것은 단순히 '성차별을 호소하는 남성들의 항변' 같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젠더전(戰)의 전쟁터에서 아예 탈출하는 것이다.포비아 페미니즘에 관한 본서에서의 설명에 대해서, 나무위키 한정으로 다소간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첨언하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실제로 관련연구에 따르면,[14] 우익 권위주의 성향의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세상이 범죄가 빈발하는 "위험한 곳" 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반동적인 공포정치에는 좌우가 따로 없다는 본서의 주장과도 맞닿는 면이 있다. 그러나 공포는 개인의 수준에서는 도리어 내집단 순응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 즉, 혜화동에 실제로 나선 사람들의 동기는 공포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어쨌거나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집합적 효능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15]
사회과학 각 영역들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을 일으키는 정서는 공포가 아니라 분노라고 생각하며, 정서심리학에서는 두 정서의 차이가 "내게는 외부의 위협적 요소에 대응할 자원이 있는가?" 의 판단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정치심리학 분야에서도 사회 운동에 개인이 참여하려면 공포가 아니라 분노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16] 여성들이 공포를 느꼈다는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이들은 가부장제라는 위협요소에 대해서 대항할 자원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혜화동의 여성들은 오히려 '그런 머리 아픈 것들은 잘 모르는 보통 사람' 으로 남길 바랐을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본서의 설명을 심리학적으로 그대로 차용한다면, 이는 오히려 공포라는 정서보다는 "위협", 구체적으로는 자기위협(self-threat)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위협에 대응할 자원이 충분하기 때문에 분노를 느끼고 혜화동으로 나섰고, (그들 여성들을 결집시키는 대가로서) 또 다른 다수의 '보통 사람' 여성들은 공포를 느끼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서의 논리를 다소 다른 학문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페미니즘은 "공포를 먹고 공포를 부추기는" 게 아니라, "위협을 먹고 위협을 부추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포비아 페미니즘의 원인을 PC운동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진보진영의 집착으로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본서의 범위가 아니라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독자들은 이에 대해 "그렇다면 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은 언제부터, 어째서 PC운동과 정체성 정치를 자기네 입장에 반영하게 됐는가?" 의 의문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진보진영에서 언제부터 계급에 기반한 의제와 정책들이 힘을 잃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본서만으로는 의문이 해결되진 않는다. 가능성은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원래 진보측이 보수측에 비해서 심리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에 더 민감할 수 있다. 예컨대 《바른 마음》 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J.Haidt)의 도덕성 기반 이론(MFT; moral foundation theory)에 따르면, 리버럴들은 위해 및 돌봄(harm and caring)의 도덕성에 극도로 예민한 경향이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이라면, 저자가 지나가듯 언급했듯이 무한경쟁의 논리를 갖춘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을 인정투쟁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이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서로의 피해자성을 '과시' 하는 우울증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국내 정치지형에 있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PC운동과 정체성 정치의 기원을 파헤치는 저널리즘적인 탐구까지는 본서에 담지 않았다.
한 가지 제기해 볼 수 있는 의문점이라면, 여성혐오에 관련된 문헌들을 저자가 정확히 조사한 것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252페이지에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여성혐오가 가부장제와 젠더이원제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면서 "우에노도 왜 여성혐오가 젠더이원제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결과물인지에 대해 책에서 끝까지 설명하지 못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여성혐오의 개념화는 《Between Men》 에서 정립되어 있으며, 두 책 모두 상당히 명확하게 여성혐오를 이론적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브 세지윅의 책은 본서에서 인용하지 않았으며, 동성사회성에 대해서도 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부장제와 젠더 이분법은 말하자면 상관성은 있을지 몰라도, 인과성에 있어서는 사변적 수준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흔히 제시되는 개념이다. 여성혐오는 이브 세지윅의 문예비평 이론에서 출발했기에, 만일 저자가 관련문헌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여성혐오에 대한 여성학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우에노의 책을 읽었다면 세지윅의 책을 안내받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저자라면 마땅히 보여주리라 기대되는 지적 열정이 드러나지 않은 점은 다소 아쉽다.
또한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에 근대성의 역사학적 설명을 덧붙인 인물로, 여성혐오의 공시적 보편성을 주장할 뿐이지 통시적 보편성을 주장한 적은 없다. 물론 우에노가 여성혐오를 중력에 빗댄 것 때문에 국내 여성학계의 이현재(2018) 등을 비롯하여 동료 학자들의 많은 공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공시적 보편성에 대한 공격이지 통시적인 의미에서인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근대적 삶의 규범은 중력처럼 보편적이다" 라는 표현이 음모론적이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우에노의 표현 역시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를 초역사적 존재, 즉 고금을 통틀어 불변하는 상수로 묘사하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저자와는 달리, 우에노야말로 가부장제와 이성애규범성, 정상가족,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여성혐오가 모두 근대국가가 통치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뒤늦게 확립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논객이기 때문이다. 우에노는 여성혐오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비관주의자라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이지만, 여성혐오의 메커니즘에는 적어도 그 경계조건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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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이렇게 망한다!" 고 주장하고,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저렇게 망한다!" 고 주장하니, 양측이 똑같이 '두려운 미래를 막기 위해' 결집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는 것.[2] 놈 촘스키는 제조된 합의(manufactured consent)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대중매체가 여론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강조했는데, 이는 한 번도 시민 사이에 합의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마치 이미 합의한 것처럼 보도하면 정말로 합의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을 말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경우에도 언론이 공포의 확대재생산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면서 이에 빗대어 주장하는 것.[3] 서경현, 김유정, 정구철, 양승애, 김보연 (2010). 데이트 폭력에 대한 가부장/비대칭 패러다임과 성-포괄적 모델의 타당성 재고. 한국심리학회지:건강, 14(4), 781-799.[4] 양승애, 서경현 (2014). 집착성향과 대학생의 데이트폭력 간의 관계. 청소년학연구, 21(10), 315-336.[5] 첨언하자면, 본서에서는 간접적으로 언급했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이 상반되는 메시지들을 다수 품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에 가깝다. 일부 페미니즘은 설령 선정적이고 섹시한 옷차림이라도 여성이 기쁘다면 괜찮다고 보지만, 다른 페미니즘은 본서 p.143에서 소개되듯이 "포르노는 이론이요 강간은 그 실천" 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문화적 검열을 시도하기도 한다.[6] 아쉽게도 이 단락에서 본서는 팩트체크를 표방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통계자료도 인용하지 않았다.[7] ex. 여성할례, 명예살인, 부부 간 강간 등.[8] 가령, 여성 고등교육 진학률은 현존하는 중졸, 고졸 여성 어르신들을 강제로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는 이상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9] 페미니즘이 건설적인 정책제안을 내놓을 수 있다면, 저자는 "이러한 조치들을 만일 '페미니즘' 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런 종류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100% 찬성이다"(p.166)라고 말한다.[10] 저자는 이 용어가 이 시점에서 이미, 사회구조를 다룬다는 용어임에도 가해자의 정신분석학적 심층심리로 파고들어간 끝에, 극단적 환원주의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11] 윤김지영. (2016). 현실의 운용원리로서의 여성혐오. 철학연구, 115, 197-243.[12] 참고로 이 언론은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부터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의 여론을 거슬러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노동계급 여성은 노동계급 남성들과 적대하지 않으며, 도리어 이해관계가 상통하고, 여성들은 계급투쟁의 주체이지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라는 것.[13] 류숙렬 (1994). '빅팀 페미니즘'에서 '파워 페미니즘'으로. 중등우리교육, 53, 124-125.[14] Sibley, Wilson, & Duckitt, 2007.[15] 저자는 이들의 동기가 단순히 "내 화를 풀어 줘!" 의 유아적 반응에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들이 뭔가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모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상당히 '대단한' 유아화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혜화동 여성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 안국동의 태극기 집회 노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16] Frijda, Kuipers, & Schure,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