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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00:50:29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도서명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발행일 2019년 5월 20일
저자 위근우
출판사 시대의창
ISBN 9788959406975
#교보문고

1. 개요2. 목차3. 작가의 주장
3.1. 괄호 속의 불의와 침묵 선호3.2. 가짜 뉴스에서 가짜 논의로3.3. 기타 주장
4. 비판5. 둘러보기

1. 개요

2010년대 후반에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다양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페미니즘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평론한 온라인 에세이의 모음. 정확히 말하자면, 본서는 2017년에서 2019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ize》, 《경향신문》, 개인 SNS 상에 썼던 글들 중에서 42편을 모아서 다듬고 후기를 덧붙여서 묶어 낸 결과물이다. 본서에는 저자 위근우가 어떤 글쓰기 스타일을 갖고 있는지, 어떤 관점을 추구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 이라는 얼핏 반직관적인 제목의 의미는 서론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저자가 어떤 논쟁적인 주제에 뛰어들 때 "관점이 다른 거지 뭐" 라는 식으로 좋게좋게 넘어가려 하기보다는, 명확하게 쟁점을 부각시키고 "내 생각이 당신의 생각보다 더 타당하다" 는 어필을 하는 데 충실하려 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저자의 전작인 《프로불편러 일기》 의 인식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전에 저자는 "프로불편러야말로 공적 논쟁의 주체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여기서는 공적 논쟁에서는 가차없이 논박하고 질타하며 상대방을 탈탈 털어버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비평의 성실성"이라고 부르며, 상대방이 틀렸다면서 주저 없이 싸움을 걸고 싸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것을 회피함으로써 '강요된 화해' 만을 반복했고, 그 결과 십중팔구는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서는 SNS에서 유래한 글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매우 직설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화법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SNS식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본서의 몇몇 표현들이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몇몇 지점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례로 저자는 1부 말미에서 일베저장소에 대한 사회구조적 분석이 일베 이용자 개개인이 져야 할 도의적 책임을 면책시킨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런 분석이 "사회적 '우쭈쭈쭈'"(p.105)일 뿐이라는 비유까지 동원했다. 사실, 이런 표현들은 저자가 다듬지 않은 언어생활을 한다는 인상을 주며 SNS 상에서 그런 언어를 쓰는 것 까지야 백보 양보하여 괜찮다고는 해도 엄연히 정식 출판을 한 서적에서 문구 수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자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설령 그런 사회구조적 분석이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해도, 이는 그 의표는 전달하기는 하되 분석가 당사자들에게는 불필요하게 부당한 비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1] 표현을 다듬고자 했다면 "또 다른 맹점에 빠진다", "이조차도 한계를 갖는다" 같은 다듬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에 대한 설명은 위근우 문서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지만,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2008년에 《매거진T》(이후 《텐아시아》)에 입사한 후, 《ize》 취재팀장으로 재직하였던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저술한 다른 책들로는 《웹툰의 시대》, 《프로불편러 일기》, 《젊은 만화가에게 묻다》 등이 있다. 도서명에서 보듯이 저자는 웹툰이라는 매체를 매우 관심 있게 팔로우업하는 것으로 보인다.

2. 목차


여기서 2장의 "《디스패치》 '팩트주의'의 저널리즘적 맹점" 의 경우, 원 출처가 따로 있다. 원본은 조덕제 성추행 사건에 관련하여 당시 디스패치가 "성추행이 아니라 연기였다" 며 특종을 냈고, 이에 남초 커뮤니티들이 환호하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시작하자, 한국여성민우회에서 긴급 토론회를 열고 저자를 초청했으며, 이에 저자가 토론회에 참석하여 발표한 발제문이다. 해당 기사의 원래 출처는 이곳이지만 기사는 삭제되어 있으며, 그 대신에 이 쪽에서 당시의 전문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사건, 1심에서는 무죄, 2심에서는 징역 1년 + 집행유예 2년 + 치료 40시간의 선고가 내려졌으며, 3심에서 최종적으로 이 형량이 확정되었다. 본서에 따르면, 디스패치2018년 11월 16일에 문제의 기사를 내린 뒤 장문의 사과문을 올렸다고 한다.

3. 작가의 주장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저자가 본서의 부제에서부터 언급하는 "괄호 속의 불의" 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저자가 왜 가짜 뉴스보다 가짜 논의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더불어 본서를 다 읽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을 몇 가지 거론한 뒤, 본서를 읽고 생각할 만한 점이 무엇인지 약간 나열해 보겠다.

작가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1. 괄호 속의 불의와 침묵 선호

"조곤조곤한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만 메갈리아의 과격한 언사는 문제라고 비판하는 남자들은 ... 이렇게 말한다. 오, 나는 너의 목소리를 경청할 생각이지만 볼륨을 조금만 줄이면 좋겠어. 아니 조금만 더. 아니 지금도 시끄러워. 그리고 목소리가 완전히 소거된 후 그는 말한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네 목소리야.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합리적 토론도 무엇도 아닌 여성들의 침묵일 뿐이다. 그것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최종 목적지다...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여기엔 침묵에 대한 선호, 결코 공격적인 요구로 구체화되지 않는 조용함에 대한 선호가 있다. 침묵하는 대상에 대해선 미안함을 안고 살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대해선 순수성을 의심한다."
- pp.100; 279-280

본서의 부제에서부터 언급된, "괄호 속의 불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이미 강준만 교수가 자신의 저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에서 진단했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저자 및 강준만 교수가 동의하는 부분은, 우리 사회에 장기간의 억압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 피억압자들이 침묵함으로써 불의가 괄호 속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나는 조곤조곤 말하는 페미니즘만 지지한다" 고 말하는 것은, 이들의 관점에서는 "나는 (지금까지 여성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차별을 받아 온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페미니즘만 지지한다" 로 독해된다.

위의 예시 문장에서 추가된 괄호가 바로 저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을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서, "억압의 역사" 에 관련된 내용을 괄호 속에 넣어서 추가했을 때 그것이 위선이 되는지 진정성이 되는지 판별하고자 한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는 사례로서 "없던 여혐도 생긴다", "잠재적 우군을 내쳤다"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여혐이 없던 사람들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실상은 불의를 괄호 속에 묶어서 지워놓고 여혐이 없는 척하고 있었던 사람들인 것이며, 잠재적 우군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실상은 불의를 괄호 속에 묶어서 지워놓았던 공모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성차별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반발하지 않고 침묵하기만을 바란다면, 그 사람들은 여혐이 없는 게 아니라 여혐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출판 전에 추가한 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괄호 속의 불의라는 표현의 요지는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인하여 '혐오의 총량' 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는 보이지 않았던 혐오의 일각이 페미니즘을 통해서 비로소 수면 위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유발 내지 생성한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적발 내지 폭로한 것이라고 보자는 얘기다. 저자는 설령 이처럼 비가시적인 혐오일지라도 그것 또한 사회 전체적인 혐오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의를 괄호 속에 가려놓은 사람들은, 따라서 피억압자들의 항의의 목소리로 인해서 혐오의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 결과로 그들은 피억압자들이 가능한 한 항의를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침묵하기를 원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항의 없이 묵묵히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피억압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선의를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강동수 소설가의 소설집 《언더 더 씨》 에서 불거진 세월호 희생자 모욕 논란을 그 사례로 든다. 강동수는 '접신한 무당' 으로 자처하는 방법으로 세월호 희생자의 입을 빌려서 '젖가슴', '즙액' 같은 선정적인 묘사를 했는데, 이것이 대외적으로는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는 그 사람 개인의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해 고인의 목소리를 함부로 도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여성들이 비판하자, 세월호에서 희생된 여고생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던 강동수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말 없는 고인 여성에게는 (목소리를 마음껏 빼앗아 쓸 수 있으므로) 웃는 얼굴로 대하지만, 자신이 듣기 거북한 목소리를 내는 살아있는 여성에게는 화난 얼굴로 대한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결과적으로 침묵하는 약자들은 강자에 대한 의존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강자로부터의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은 그 강자로부터 "나도 너희들에게 우호적이지만, 너희들이 목소리를 낸다면 너희들의 편을 들지 않겠다" 는 피드백을 받게 된다. 결국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의 기만책이라고밖에는 느껴지지 않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의 시대적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적인 피해를 입고 무거운 책임에 짓눌리면서도 날을 세우기보다는 끝까지 묵묵히 견디는 것이 가장 고결하고 고귀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3.2. 가짜 뉴스에서 가짜 논의로

"어느 정도 권위 있는 미디어 안에서 어떤 종류의 헛소리를, 굳이 하나의 의견으로서 경청해줄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결국 그 헛소리의 구심점을 만들어 주는 일이 될 뿐이다. 헛소리엔 딱 그만큼의 대우를 해 주는 것만이 공론장을 비합리성의 카오스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 p.147

기존의 여러 진보측 논객들은 가짜 뉴스(fake news)나 탈진실(post-truth) 같은 표현들을 만들어내면서, 반동세력과 영합하는 언론매체 및 유사언론이 믿을 수 없는 '헛소리' 들을 무차별적으로 유통시킨다고 비판해 왔다. 이런 표현들은 진보 진영이 그들과 대치할 때 '거짓진실' 의 흔들리지 않는 전선에 의존할 수 있게 했고, 소위 탈진실의 시대에 접어들어서 진실을 수호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뿐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진보 진영을 결집시켰다. 헌데 본서에서 저자는 가짜 뉴스가 문제인 게 아니라 가짜 논의야말로 정말로 문제라고 지적한다.

가짜 논의란 무엇인가? 본서에서 저자는 소위 '균형 잡힌 토론', '팽팽한 논쟁', '동일 인원 수의 패널 배치', '다양한 의견의 청취', '비판적인 시각의 반영' 등등을 운운하면서 시사 프로그램이나 TV 토론회 등에서 정치극단주의안티페미니즘 인사가 당당하게 혐오발언을 개진하는 상황을 비판한다. 저자가 보기에, 바로 이런 것이 가짜 논의이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일견 다양한 의견들이 부딪치면서 서로가 생각을 조율하고 비상식이 상식으로 설득되어 넘어가는, 그런 그림을 원했던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혐오 레토릭이 대중에게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편협한 인사가 안티페미니즘의 떠오르는 신성이 되어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토크쇼를 하는 결과만이 초래되었다. 저자는 2장에서 정영진, 이선옥, 윤서인, 강신주, 채사장, 황교익, 그 외에도 이택광 교수 같은 방송교수탁현민처럼 페미니즘 진영에 논란의 아이콘이 된 사람들을 저격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토론 프로그램은 건강하고 올바른 공론의 형성을 위하여 반드시 "공적 논의를 위한 필터링"(p.194)이 있어야 한다. 이 필터링이라는 것은, 차별과 억압, 혐오, 반인권, 인류애를 무너뜨리는 모든 것을 퇴출시키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고 해서 '비상식' 적인 의견까지 들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즉,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론장에서 편협한 혐오자들이 설 자리는 없으니, 그들을 전부 끌어내려야 한다. 인권에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이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공개석상에 오를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이들에게 그런 기회는 공정한 기회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퇴행시키는 프로파간다를 허용하는 신호다. 평론가들은 윤서인의 만화를 평론하면 안 된다. 평론하는 순간 그것이 '평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는 의미가 되므로, 대신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갖는 생각이다. 이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무위키 식으로 바꾸자면, 저자가 나무위키를 이용할 경우 MPOV라는 명목으로 혐오성 의견까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발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공적 논의의 장이 '가짜 논의' 로 오염되어 가는 원인을 토론의 기본 전제에서 찾는다. 모든 토론은 그 기본 전제로서, 평등한 주체들이 논거의 힘만을 가지고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는 '룰' 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각 토론에 참석하는 패널들이 정말로 '평등한 주체' 라고 할 수 있느냐며 이의를 제기한다. 예컨대 젠더갈등 문제를 소재로 하는 EBS의 〈까칠남녀〉 에서는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불평등한 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서 '남성들 말도 들어봐야 한다' 는 이유로 정영진 패널을 등판시켰고, 그 결과 수위 높은 역차별 주장들이 공영방송에서 전파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혐오페미니즘 사이에서 '균형 잡힌 토론' 은 불가능하며, 균형을 원한다면 여성혐오적 패널들을 전부 쫓아내 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EBS는 정영진이 페미니즘에 의해 설득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끝내 그는 설득되기는커녕 안티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승승장구했으며, 도리어 페미니즘을 대변하던 은하선이 여론에 떠밀려 하차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런 일들은 처음부터 토론 참여자들 사이에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3.3. 기타 주장

4. 비판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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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해서는 하단의 '의문점' 단락을 볼 것.[2] 한 예로 저자는 본서에서 '여성에게는 남성을 계몽시킬 의무가 없으며, 무지에 대한 책임은 무지한 자가 지게 될 뿐' 이라고 말하지만, 비록 여성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을지 몰라도 진보 진영에게는 그것이 최소한 도덕적 당위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3] "질문하고 증명(혹은 반증)해야 할 건, 과연... (중략) ...한국 남성 부족을 현대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시민사회의 전제가 될 규범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놀람과 증오의 시선으로 다룬다 해도 그들을 쉽게 비합리주의자로 전제하는 것은 위험하다."(p.63)[4] 이효민 (2019). 페미니즘 정치학의 급진적 재구성: 한국 'TERF'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34(3), 159-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