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
발행일 | 2019년 5월 20일 |
저자 | 위근우 |
출판사 | 시대의창 |
ISBN | 9788959406975 |
#교보문고 |
1. 개요
2010년대 후반에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다양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페미니즘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평론한 온라인 에세이의 모음. 정확히 말하자면, 본서는 2017년에서 2019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ize》, 《경향신문》, 개인 SNS 상에 썼던 글들 중에서 42편을 모아서 다듬고 후기를 덧붙여서 묶어 낸 결과물이다. 본서에는 저자 위근우가 어떤 글쓰기 스타일을 갖고 있는지, 어떤 관점을 추구하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 이라는 얼핏 반직관적인 제목의 의미는 서론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저자가 어떤 논쟁적인 주제에 뛰어들 때 "관점이 다른 거지 뭐" 라는 식으로 좋게좋게 넘어가려 하기보다는, 명확하게 쟁점을 부각시키고 "내 생각이 당신의 생각보다 더 타당하다" 는 어필을 하는 데 충실하려 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저자의 전작인 《프로불편러 일기》 의 인식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전에 저자는 "프로불편러야말로 공적 논쟁의 주체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여기서는 공적 논쟁에서는 가차없이 논박하고 질타하며 상대방을 탈탈 털어버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비평의 성실성"이라고 부르며, 상대방이 틀렸다면서 주저 없이 싸움을 걸고 싸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것을 회피함으로써 '강요된 화해' 만을 반복했고, 그 결과 십중팔구는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서는 SNS에서 유래한 글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매우 직설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화법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SNS식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본서의 몇몇 표현들이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몇몇 지점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례로 저자는 1부 말미에서 일베저장소에 대한 사회구조적 분석이 일베 이용자 개개인이 져야 할 도의적 책임을 면책시킨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런 분석이 "사회적 '우쭈쭈쭈'"(p.105)일 뿐이라는 비유까지 동원했다. 사실, 이런 표현들은 저자가 다듬지 않은 언어생활을 한다는 인상을 주며 SNS 상에서 그런 언어를 쓰는 것 까지야 백보 양보하여 괜찮다고는 해도 엄연히 정식 출판을 한 서적에서 문구 수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자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설령 그런 사회구조적 분석이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해도, 이는 그 의표는 전달하기는 하되 분석가 당사자들에게는 불필요하게 부당한 비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1] 표현을 다듬고자 했다면 "또 다른 맹점에 빠진다", "이조차도 한계를 갖는다" 같은 다듬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에 대한 설명은 위근우 문서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지만,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2008년에 《매거진T》(이후 《텐아시아》)에 입사한 후, 《ize》 취재팀장으로 재직하였던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저술한 다른 책들로는 《웹툰의 시대》, 《프로불편러 일기》, 《젊은 만화가에게 묻다》 등이 있다. 도서명에서 보듯이 저자는 웹툰이라는 매체를 매우 관심 있게 팔로우업하는 것으로 보인다.
2. 목차
- 프롤로그
- 1장: 그 이퀄리즘은 틀렸다
- 페미니스트 선언은 실천이다
- 백래시로서의 여성혐오와 괄호 안의 불의
- 〈며느라기〉, 명절 연휴엔 모두들 이 만화를 함께 읽어봅시다
- 영혼도 웃음도 남기지 않은 시사 풍자 개그맨 황현희의 퇴행
- 유아인은 어쩌다
- '마녀사냥'이라는 레토릭
- 명예남성과 개념녀의 문제 그리고 남성 페미니스트의 오만
- 〈피의 연대기〉, 이토록 질기고 귀한 연대
- 아이린에 분노하는 한국 남성이란 부족
- 수지의 용기 그리고 변명 뒤에 숨은 남자들
- 그 남자들은 페미니스트 시장 후보 벽보에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 지하철 페미니즘 광고는 시민의 권리다
- 탈코르셋 시대의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두 작품, 〈여신강림〉과 〈화장 지워주는 남자〉
- 한국 남성들의 반발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어떻게 밀리언셀러가 됐을까
- 여자 친구 불법 촬영 인증과 20대 남성들의 상실감 타령
- 2장: 가짜 논의와 공론장의 적들
- '지식 셀럽'과 방송의 위험한 공모
- 그건 정말 사표였을까
- 언론의 1일 1이택광에 대하여
-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라는 말에 대해
- 슈뢰딩거의 탁현민
- 불편함의 변증법, 프로불편러가 상대방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 〈까칠남녀〉와 정영진, 잘못된 조합
- 《디스패치》 '팩트주의'의 저널리즘적 맹점
- 〈까칠남녀〉 은하선의 하차와 교육방송 EBS의 자기 부정
- 폭로의 정치학에 대하여
- 윤서인 만화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강신주, 채사장, 그리고 상식의 문제들
- 황교익의 독선과 포퓰리즘 인문학의 한계
- TV 토론 프로그램은 어떻게 가짜 논의에 오염되는가
- 3장: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기
- 〈개콘〉 '대통형',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 〈아빠본색〉과 〈인생술집〉, 솔직함은 면죄부가 아니다
- 홍상수의 한심한 남자들
- 우리에게는 유바비처럼 스위트한 남자 롤 모델이 필요하다
- 퇴행하는 TV 예능 세상에서 기획자 송은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 〈나의 아저씨〉, 모두를 위한 지옥에도 불평등은 있다
- 〈안녕하세요〉, 폐지가 답이다
- 소니코리아여, 플스 4는 당신들 광고보다 더 위대하다
- 장애인 차별에 공모한 MBC 예능 투톱, 〈나 혼자 산다〉와 〈전지적 참견 시점〉
- 백종원이라는 알파메일과 징벌 서사의 정당화
- 〈계룡선녀전〉과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웹툰 원작 드라마에 한국 남자 패치가 붙으면
- 〈언더 더 씨〉 논란과 애도의 윤리
- '과도한 PC함'이라는 허수아비
여기서 2장의 "《디스패치》 '팩트주의'의 저널리즘적 맹점" 의 경우, 원 출처가 따로 있다. 원본은 조덕제 성추행 사건에 관련하여 당시 디스패치가 "성추행이 아니라 연기였다" 며 특종을 냈고, 이에 남초 커뮤니티들이 환호하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시작하자, 한국여성민우회에서 긴급 토론회를 열고 저자를 초청했으며, 이에 저자가 토론회에 참석하여 발표한 발제문이다. 해당 기사의 원래 출처는 이곳이지만 기사는 삭제되어 있으며, 그 대신에 이 쪽에서 당시의 전문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사건, 1심에서는 무죄, 2심에서는 징역 1년 + 집행유예 2년 + 치료 40시간의 선고가 내려졌으며, 3심에서 최종적으로 이 형량이 확정되었다. 본서에 따르면, 디스패치는 2018년 11월 16일에 문제의 기사를 내린 뒤 장문의 사과문을 올렸다고 한다.
3. 작가의 주장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저자가 본서의 부제에서부터 언급하는 "괄호 속의 불의" 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저자가 왜 가짜 뉴스보다 가짜 논의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더불어 본서를 다 읽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을 몇 가지 거론한 뒤, 본서를 읽고 생각할 만한 점이 무엇인지 약간 나열해 보겠다.- 1. 그 이퀄리즘은 틀렸다
한국 남성들은 괄호 속에 자신의 불의를 숨김으로써 지배 권력에 야합하지만, 그러면서도 페미니즘에 훈수를 둘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비문명화된 상태에 있을 뿐이며, 여성들은 그들의 훈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국 남성들이 주장하는 상실감이나 역차별 등의 문제 역시, 자신이 부당하게 누리던 권력을 빼앗기게 되자 나타나는 징징거림일 뿐이다.
- 2. 가짜 논의와 공론장의 적들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너무 많은 가짜 전문가들이 가짜 권위를 업고 가짜 주장들을 생산해내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명백히 차별적이고 혐오적이며 책임지지 못할 주장들조차 토론회와 같은 공론장에 아무 제지도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올바른 공론을 위해서는 모든 참여자가 평등해야 하며, 따라서 약자들은 그 공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특별히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 3.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기
소설, 드라마나 예능 등의 TV 프로그램, 웹툰, 광고, 매체비평 등은 가볍게 넘기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 이런 매체들은 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반영하며 한편으로는 영속화하지만, 구조적 균열을 내는 목소리들은 침묵시킨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는 아직 더 많은 올바름이 필요하며, PC가 과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작가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사회에는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으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논변들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 이런 논변들은 공론장 또는 균형 있는 논의라는 미명 하에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므로, 속히 이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 이에 대해 대중문화는 표현의 자유 또는 과도한 PC함을 내세우지만, 불의에 침묵하고 영합하는 반동적인 목소리일 뿐이다.
3.1. 괄호 속의 불의와 침묵 선호
"조곤조곤한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만 메갈리아의 과격한 언사는 문제라고 비판하는 남자들은 ... 이렇게 말한다. 오, 나는 너의 목소리를 경청할 생각이지만 볼륨을 조금만 줄이면 좋겠어. 아니 조금만 더. 아니 지금도 시끄러워. 그리고 목소리가 완전히 소거된 후 그는 말한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네 목소리야.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합리적 토론도 무엇도 아닌 여성들의 침묵일 뿐이다. 그것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최종 목적지다...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여기엔 침묵에 대한 선호, 결코 공격적인 요구로 구체화되지 않는 조용함에 대한 선호가 있다. 침묵하는 대상에 대해선 미안함을 안고 살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대해선 순수성을 의심한다."
- pp.100; 279-280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여기엔 침묵에 대한 선호, 결코 공격적인 요구로 구체화되지 않는 조용함에 대한 선호가 있다. 침묵하는 대상에 대해선 미안함을 안고 살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대해선 순수성을 의심한다."
- pp.100; 279-280
본서의 부제에서부터 언급된, "괄호 속의 불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이미 강준만 교수가 자신의 저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에서 진단했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저자 및 강준만 교수가 동의하는 부분은, 우리 사회에 장기간의 억압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 피억압자들이 침묵함으로써 불의가 괄호 속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나는 조곤조곤 말하는 페미니즘만 지지한다" 고 말하는 것은, 이들의 관점에서는 "나는 (지금까지 여성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차별을 받아 온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페미니즘만 지지한다" 로 독해된다.
위의 예시 문장에서 추가된 괄호가 바로 저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을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서, "억압의 역사" 에 관련된 내용을 괄호 속에 넣어서 추가했을 때 그것이 위선이 되는지 진정성이 되는지 판별하고자 한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는 사례로서 "없던 여혐도 생긴다", "잠재적 우군을 내쳤다"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여혐이 없던 사람들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실상은 불의를 괄호 속에 묶어서 지워놓고 여혐이 없는 척하고 있었던 사람들인 것이며, 잠재적 우군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실상은 불의를 괄호 속에 묶어서 지워놓았던 공모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성차별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반발하지 않고 침묵하기만을 바란다면, 그 사람들은 여혐이 없는 게 아니라 여혐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출판 전에 추가한 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괄호 속의 불의라는 표현의 요지는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인하여 '혐오의 총량' 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는 보이지 않았던 혐오의 일각이 페미니즘을 통해서 비로소 수면 위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유발 내지 생성한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적발 내지 폭로한 것이라고 보자는 얘기다. 저자는 설령 이처럼 비가시적인 혐오일지라도 그것 또한 사회 전체적인 혐오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의를 괄호 속에 가려놓은 사람들은, 따라서 피억압자들의 항의의 목소리로 인해서 혐오의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 결과로 그들은 피억압자들이 가능한 한 항의를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침묵하기를 원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항의 없이 묵묵히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피억압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선의를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강동수 소설가의 소설집 《언더 더 씨》 에서 불거진 세월호 희생자 모욕 논란을 그 사례로 든다. 강동수는 '접신한 무당' 으로 자처하는 방법으로 세월호 희생자의 입을 빌려서 '젖가슴', '즙액' 같은 선정적인 묘사를 했는데, 이것이 대외적으로는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는 그 사람 개인의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해 고인의 목소리를 함부로 도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여성들이 비판하자, 세월호에서 희생된 여고생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던 강동수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말 없는 고인 여성에게는 (목소리를 마음껏 빼앗아 쓸 수 있으므로) 웃는 얼굴로 대하지만, 자신이 듣기 거북한 목소리를 내는 살아있는 여성에게는 화난 얼굴로 대한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결과적으로 침묵하는 약자들은 강자에 대한 의존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강자로부터의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은 그 강자로부터 "나도 너희들에게 우호적이지만, 너희들이 목소리를 낸다면 너희들의 편을 들지 않겠다" 는 피드백을 받게 된다. 결국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의 기만책이라고밖에는 느껴지지 않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의 시대적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적인 피해를 입고 무거운 책임에 짓눌리면서도 날을 세우기보다는 끝까지 묵묵히 견디는 것이 가장 고결하고 고귀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3.2. 가짜 뉴스에서 가짜 논의로
"어느 정도 권위 있는 미디어 안에서 어떤 종류의 헛소리를, 굳이 하나의 의견으로서 경청해줄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결국 그 헛소리의 구심점을 만들어 주는 일이 될 뿐이다. 헛소리엔 딱 그만큼의 대우를 해 주는 것만이 공론장을 비합리성의 카오스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 p.147
- p.147
기존의 여러 진보측 논객들은 가짜 뉴스(fake news)나 탈진실(post-truth) 같은 표현들을 만들어내면서, 반동세력과 영합하는 언론매체 및 유사언론이 믿을 수 없는 '헛소리' 들을 무차별적으로 유통시킨다고 비판해 왔다. 이런 표현들은 진보 진영이 그들과 대치할 때 '거짓 대 진실' 의 흔들리지 않는 전선에 의존할 수 있게 했고, 소위 탈진실의 시대에 접어들어서 진실을 수호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뿐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진보 진영을 결집시켰다. 헌데 본서에서 저자는 가짜 뉴스가 문제인 게 아니라 가짜 논의야말로 정말로 문제라고 지적한다.
가짜 논의란 무엇인가? 본서에서 저자는 소위 '균형 잡힌 토론', '팽팽한 논쟁', '동일 인원 수의 패널 배치', '다양한 의견의 청취', '비판적인 시각의 반영' 등등을 운운하면서 시사 프로그램이나 TV 토론회 등에서 정치극단주의 및 안티페미니즘 인사가 당당하게 혐오발언을 개진하는 상황을 비판한다. 저자가 보기에, 바로 이런 것이 가짜 논의이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일견 다양한 의견들이 부딪치면서 서로가 생각을 조율하고 비상식이 상식으로 설득되어 넘어가는, 그런 그림을 원했던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혐오 레토릭이 대중에게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편협한 인사가 안티페미니즘의 떠오르는 신성이 되어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토크쇼를 하는 결과만이 초래되었다. 저자는 2장에서 정영진, 이선옥, 윤서인, 강신주, 채사장, 황교익, 그 외에도 이택광 교수 같은 방송교수나 탁현민처럼 페미니즘 진영에 논란의 아이콘이 된 사람들을 저격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토론 프로그램은 건강하고 올바른 공론의 형성을 위하여 반드시 "공적 논의를 위한 필터링"(p.194)이 있어야 한다. 이 필터링이라는 것은, 차별과 억압, 혐오, 반인권, 인류애를 무너뜨리는 모든 것을 퇴출시키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고 해서 '비상식' 적인 의견까지 들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즉,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론장에서 편협한 혐오자들이 설 자리는 없으니, 그들을 전부 끌어내려야 한다. 인권에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이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공개석상에 오를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이들에게 그런 기회는 공정한 기회 보장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퇴행시키는 프로파간다를 허용하는 신호다. 평론가들은 윤서인의 만화를 평론하면 안 된다. 평론하는 순간 그것이 '평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는 의미가 되므로, 대신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갖는 생각이다. 이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무위키 식으로 바꾸자면, 저자가 나무위키를 이용할 경우 MPOV라는 명목으로 혐오성 의견까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발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공적 논의의 장이 '가짜 논의' 로 오염되어 가는 원인을 토론의 기본 전제에서 찾는다. 모든 토론은 그 기본 전제로서, 평등한 주체들이 논거의 힘만을 가지고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는 '룰' 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각 토론에 참석하는 패널들이 정말로 '평등한 주체' 라고 할 수 있느냐며 이의를 제기한다. 예컨대 젠더갈등 문제를 소재로 하는 EBS의 〈까칠남녀〉 에서는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불평등한 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서 '남성들 말도 들어봐야 한다' 는 이유로 정영진 패널을 등판시켰고, 그 결과 수위 높은 역차별 주장들이 공영방송에서 전파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균형 잡힌 토론' 은 불가능하며, 균형을 원한다면 여성혐오적 패널들을 전부 쫓아내 버려야 한다고 믿는다. EBS는 정영진이 페미니즘에 의해 설득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끝내 그는 설득되기는커녕 안티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승승장구했으며, 도리어 페미니즘을 대변하던 은하선이 여론에 떠밀려 하차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런 일들은 처음부터 토론 참여자들 사이에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3.3. 기타 주장
-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는 왜 유독 미움을 받았나
6.13 지방선거 당시 신지예 후보의 벽보는 유난히 많은 훼손을 겪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개인적으로 벽보의 기호와 상징들의 구성을 분석해 보았다고 하는데, 정치심리 등의 분야에서도 흥미롭게 여길 만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저자가 관찰한 모든 공직 후보자들은 공통적으로 웃고 있는 얼굴을 했는데, ① if 유권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정면으로 웃을 때에는 then 치아를 넓게 드러내고 웃게 되며, or ② if 유권자를 바라보지 않고 측면으로 웃을 때에는 then 치아를 일체 드러내지 않고 웃게 된다는, 두 가지 미소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문제는 신지예 후보의 경우, 유권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치아를 일체 드러내지 않고 웃었다는 것. 저자의 해석을 요약하면, 이런 류의 미소는 남성들에게는 '권력의 도전자' 의 미소, 즉 "내가 널 잡아먹어 버리겠다" 는 의미의 건방진 미소가 되기 때문에 반발심을 부른다고 한다.
물론 신지예 후보가 다문 입으로 유난히 오른쪽 입꼬리가 도드라지게 올라간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사실 이런 건방진 미소가 항상 거부당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반례로 아이돌 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속칭 '시건방춤' 이 있다. 그들 역시 똑같이 건방진 미소를 지으면서 춤을 추었지만, 그런 춤을 보고 브아걸 팬덤이 등을 돌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결국 브아걸과 신지예 후보의 유일한 차이점으로서는 그 여성의 미소가 남성의 시선으로 구성된 이성애 판타지에 부합되는가밖에는 없다고 정리한다. 브아걸은 그 판타지의 일부에 포섭되는 의미에서 건방진 미소를 지었지만, 신지예 후보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그 판타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이외의 다른 제3의 동기로는 신지예 후보의 벽보는 훼손되고 브아걸 상품은 파괴되지 않았던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후보의 썩소가 남성 판타지에 부합하지 않아 훼손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신지예 후보의 미소와 유사한 맥락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은 여성 후보 포스터에 대한 반달의 다른 예가 관측되어야 한다. 여성 후보는 신지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증명되기 힘든데, 왜냐하면 남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호감을 사서 표를 끌어모으려 만드는 선거 포스터에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지, (저자의 해석대로라면) 유권자를 도발하고 판타지를 부수게 되는 미소를 짓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 프로불편러들의 불편함이 갖는 가치
저자가 2장에서 역설하는 불편함의 변증법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소위 "권력의 두 얼굴" 중의 어두운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사회의 지배적 권력을 쥐고 있는 집단은 자신들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 의제(agenda)들은 떠오르기 전에 미리 묵살시키거나 침묵시킨다는 논증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편러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불편함이 대답 없는 외침으로 끝나기보다는 적어도 냉소나 반론이라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 냉소나 반론에 담겨 있는 더 많은 지배논리의 '실마리' 들을 찾아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로부터 비대칭적으로나마 논쟁이 시작될 수 있기에 좋은 것이라고 하였지만, 사실 이런 '실마리' 들은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의식의 체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회과학자 및 문화비평가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 운동가들 역시 반동적 메시지나 '안티' 세력의 발흥에 대해서 백래시라며 짜증으로 일관할 이유가 없게 된다. 도리어 이는 그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보물창고라고 봐야 한다. 어설프게나마 비유하자면, 그런 반동적 메시지가 담긴 냉소는 우리 사회라는 '프로그램' 이 짜여진 방식을 '해킹' 할 수 있는 '보안 취약점' 이며, 사회 운동가들은 문제가 발생한 프로그램을 개선하기 위한 '해커' 들이지만, 지배 집단에 의해 '크래커' 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 과도한 PC함인가, 엉뚱한 PC함인가
저자는 본서의 말미에서 과도한 PC함에 대한 원론적인 우려 혹은 원색적인 비아냥이 부적절하다고, 한국사회에서 혐오발언과 극우 이데올로기가 넘쳐나는 현실을 고려하면, PC함은 오히려 태부족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관점에서 한국사회는 차별과 혐오, 억압이 만연해 있는 생지옥과도 같은데, 그렇다면 그 지옥불을 끄기 위해서 동원해야 할 소방용수가 '과도하다' 고는 절대 말할 리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비판은, 아마도 당초 '과도하다' 는 표현 자체가 부적절했기 때문일 수 있다. 본서에서도 언급되는 사례인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나 '솔저:76' 같은 경우에서 PC함은 그것이 양적으로 '너무 많아서' 라기보다는 '앞뒤 설정에 맞지 않고 어색하게 제시됨으로써 작품의 전체적인 몰입감을 무너뜨리는' 문제 때문이었을 수 있다. 비판론자들은 이처럼 전후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PC요소를 강제로 삽입하려는 시도가 "PC에 대한 너무 많은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 사례들을 (개인적인 의욕의 차원에서) 과도한 PC함이라고 표현했지만, 저자의 관점에서는 "우리 사회 전체에서 PC의 총량" 이 차고 넘칠 만큼 많다는 뜻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서사적 붕괴에 대한 책임을 캐슬린 케네디 한 명에게 묻곤 하는 팬덤의 동향과도 상통한다.
4. 비판
- 비평의 '진정한' 성실성 : 남이 틀렸다고 말할 용기 vs. 내가 틀렸다고 말할 용기
사실, 본서가 갖는 가장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한계의 지점은 바로 본서의 서문에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저자는 '비평의 성실성' 이라는 표현을 만들면서, 우리에게는 상대방이 틀렸다고 말할 용기가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그러한가? 사실 우리는 그런 용기를 갖는 것보다는, 타인의 비판에 직면했을 때 내가 틀렸다고 고백할 용기를 갖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남이 틀렸다며 펜을 칼 삼아서 매섭게 비판하는 것은, 사실 어지간한 범인(凡人)들이나 소인배들도 할 수 있는 범속한 활동이다. 당장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사이다라며 인기를 끌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틀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진정 어떤 경지에 오른 군자, 신사, 교양 있는 시민, 사회의 어른, 오피니언 리더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단 1%라도 전제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공적 논쟁에 임할 때 "당신이 틀렸다" 면서 용기 있게(?) 도전하던 바로 그 태도부터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용기야말로 진정으로 사람들의 지지와 신뢰와 응원을 받는다. - "이성적인 대화 따위 해 봤자 안 돼"? : 진보 진영을 향한 저자의 위험한 유혹"이제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그걸 기어코 함께 가지 않겠다고 버팅기는 이들에게 '너의 이유는 뭐니' 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우선은 앞으로 밀든 아예 뒤로 자빠뜨려 버리든, 네가 징징대도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는 걸 '이해시키는 것' 이 우선이지 않을까."- p.104
일반적으로 진보진영은 계몽주의를 지지하며, 보수주의 자를 계몽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논어에서 말하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저자는 일종의 비관론적 계몽주의, 즉 자기 편을 계몽된 존재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대편을 계몽이 불가능/불필요하다고 비관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본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며, 공적 토론에 임하는 사람의 글로서나, 진보 인사가 자신의 사상을 펼치는 글로서나 다분히 문제적인 영향력을 초래한다.[2]
저자는 63페이지에서 남성들을 비합리주의자로 섣불리 전제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하고,[3] 134페이지에서는 인간이란 반성하고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불행히도 이는 도덕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저자는 언제 그런 소리를 했냐는 듯이 본서 전체에서 '미개한 남성 부족사회' 이미지를 너무나 손쉽고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최태섭과도 유사하게, 저자가 상상하는 남성들은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 와 같은, 이성적인 설득이 안 통하고 마냥 귀 막고 눈 가리고 빽빽거리는, 본서의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을 빌리자면 "징징대고 있는"(p.104)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국내 페미니즘 도서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일그러진 남성관이다. 현실의 '놀라게 하면 안 된다던' 저 와오라니 부족조차도 자기네 관광 웹 페이지를 운영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전향적으로 계몽되고 빠르게 개화되는지에 대해 놀랄 만큼 낙관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히려 저자야말로 인류학적 부족사회에 대해 다분히 고정관념적이고 (근대 제국주의적 수준의) 언PC한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저자는 이미 54페이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저자에 따르면, "흔히 남성의 무지는 권력에서 온다고 한다. 맞다. 하지만 무지를 벗어난 남성의 지성과 윤리도 사실 권력에서 온다. 그걸 잊어선 안 된다."(p.54) 하지만 저자는 그걸 잊었다. 저자는 자신이 54페이지에서 우연히 열어 보였던 가능성이 무엇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들은 그 권력을 통해 무지로 일관하며 살 수도 있지만, 마음을 열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권력을 선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남성들에게 설득은 불필요한가?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남성들은 "그래 잘해 봐라, 너만 손해지" 라는 대답 이상으로 거창한 대답을 소화할 능력이 없는가? 만일, 조금씩이나마 남성들이 열정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페미니즘을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설득이 필요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런 지적 호기심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거슬린다면, 이는 그것이 남성들에게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있음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인가?)
사실 저자와 같은 설득의 전략은 드문 것이 아니다. 대중 강연 등을 뛰는 일부 남성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남성들을 구구절절 설득하기보다는, 단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너희가 적응해야 한다' 고 알려주는 게 최선" 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남녀 간 소득격차에 관련된 유명한 논문을 쓴 어떤 연구자도 자신의 블로그에서 "역사적 수레바퀴에 깔려죽은 사마귀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 이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가 (비록 의도는 좋았다 할지라도) 과연 진정한 진보의 메시지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아니, 진보이기 이전에 이미, 이것이 정말 바람직한 설득의 전략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정말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인가? 자칫 인간 교화에 대한 불구적인 포기선언이 되는 건 아닌가? 진보진영은 이런 패배주의적 시민성 담론이 소통되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가? 설득이 아예 불가능한 게 아니라, 단순히 기존의 설득 전략이 효과적이지 못해서인 건 아닌가? 경우에 따라,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단순히 설득할 의욕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는, 만에 하나, 반동세력이 그저 설득되지 않은 채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만 도태되어 주었으면' 하는 존재여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본서의 한 구절에서 저자가 '정 알아듣지 못하면 펜스 룰도 나쁘지 않겠다' 고 말한 것은 도대체 어떤 의도인가?
- 메갈리아의 악행은 사회의 책임, 그러나 일베의 악행은 개인의 책임?
본 문서 상단에서 언급했던 저자의 '사회적 우쭈쭈쭈' 발언을 다시 떠올려 보자. 전통적으로 진보 진영에서는 사회문제를 구조가 아닌 개인으로 환원하는 미시적 분석에 더욱 부정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사회적 우쭈쭈쭈' 라는 말은 상당히 가혹한 비유이기도 하다. 예컨대 페미니즘 비평에서 어떤 묻지마 범죄를 그 범죄자 개인의 도덕적 일탈의 문제로 설명하려는 것은 "그 범죄자를 낳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이고 구조적인 병폐를 간과하고 있다" 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장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을 조현병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뭐라고 항의했는지 상기해 보자. 그런데 본서는 바로 그런 항의를 '사회적 우쭈쭈쭈' 라고 치부하고 있다.
정말로, 《시사IN》 등을 비롯한 그 분석가들은 일베 이용자 개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하기 위한 고단수의 동정론을 펼쳤던 것인가?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저 "사회와 괴리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는 사회과학 모든 분야들이 공유하는 학문적 대전제에 입각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전제 자체가 개인의 행동에 대한 개인의 책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만드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가해자를 은근슬쩍 감싸기 위해서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라고 실드를 치려 했다는 생각은 너무 나간 해석이다. 메갈이든 일베든, 악행이 있었다면 개인은 우선 마땅히 그 죗값을 치르되, 우리 사회 전체도 반성해야 할 부분은 반성하자는 게 가장 균형 잡힌 결론이다.
그러나 진영논리에 빠질 경우, 모든 사람들은 우리 편의 잘못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었던 사회적 환경의 문제' 로 해명하고, 상대편의 잘못은 '개인의 의도성 다분한 악행' 으로 자연스럽게 몰아간다. 물론 저자가 메갈리아의 악행에 대해 본서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전반적인 관점을 고려할 때 메갈-워마드 계통의 반사회적 악행에 대해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맥락을 보아야 한다' 는 윤김지영 류의 해명에 대해 반대할 가능성보다는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의문은, '일베에 대해서도 동일한 분석 수준(level of analysis)을 적용하겠다는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평가 절하하는가?' 인 것이다. 아마도 사회심리학자들은 대번에 궁극적 귀인 오류(ultimate attribution error)라는 개념을 대답 대신 제시할 것이다.
-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라는 말에 대해" 라는 말에 대해
저자는 본서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질문하는 남성들의 본심이 정중함보다는 무례함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질문을 빙자하여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이외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질문자에게는 최선을 다해 질문에 답하던 페미니스트 여성일지라도, 또 다른 질문자에게는 "내가 어떻게 그런 개념이나 논란까지 하나하나 다 알겠냐, 가서 알아서 찾아봐라" 며 화를 낼 수도 있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지식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차원이므로,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 경우,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 라는 저자의 말은 후자의 질문자에게는 적절하지만 전자의 질문자에게는 심히 무례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질문이 갖는 맥락적인 미묘함으로 인해서 나타난다. "알아서 공부하세요" 의 반응은, 질문을 빙자하여 은근슬쩍 무례하게 비웃는 맥락에서는 꽤나 유효한 '한 방' 이 되겠지만, 정말로 정중하게 질문하는 맥락에서는 철저히 무가치한 답변이 된다. 사실, 모든 질문자들을 퉁쳐서 무례하다고 비판하는 저자도 문제지만, 이 점에서는 일부 답변자들을 일반화해서 사이비 종교의 포교법이라며 비판하는 박가분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양쪽 모두 각각의 질문들이 갖는 미묘한 느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주제를 바꾸어 보자. 예컨대, "진화론이 정말로 충분한 근거가 있나요?", "예방주사는 부작용이 심하다던데 사실인가요?" 라는 질문이 갖는 미묘함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이성과 합리의 입장에 서 있다면,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우리는 대부분의 맥락에는 일단 자연선택이나 집단 면역 이야기를 간단하게라도 꺼내보는 게 일반적이며, 창조설이나 백신 음모론처럼 상대방이 들을 의사가 없다는 게 '확실히 보이는' 맥락의 경우에만 처음부터 냉담하게 받아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는, 모든 맥락의 질문자를 다짜고짜 창조설자 내지 백신 음모론자로 싸잡으려 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저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조차 비판하는 행태다.
그보다도, "알아서 공부하세요" 가 갖는 진짜 문제점은 실상 다른 곳에 있다. 이런 발화는 그 화자 본인의 지식적인 우위나 의사소통의 역량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상대방에게 먼저 날렸다고 해서, 그 사람이 페미니즘에 대해 상대방보다 항상 지식적 우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이효민(2019)은[4] 국내 TERF 진영이 제도권 여성학계의 기존의 지적 공헌을 전면 거부하고 젠더에 대한 독자연구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남들에게는 공부하라고 다그치지만, 정작 본인들도 딱히 공부를 하는 건 아니며, 그나마 쉴라 제프리스(S.Jeffreys) 같은 (페미니즘이라 불러 주기도 어려운) 논란 많지만 자기네 입맛에 맞는 저술가만을 선호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무지가 권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알아서 공부하세요" 라고 말하는 여성들 본인들조차 무지 상태에 빠져 있을 가능성은 본서에서 은폐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말한 바 남성들의 '몰라도 되는 힘' 은, 남녀 모두의 '자기 알고 싶은 것만 알고자 하는 경향' 앞에서 그 정치적 분석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물론 적잖은 경우 강자의 무지와 약자의 계몽이 대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자의 무지에 대항하기 위해 약자들이 독자연구에 골몰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본서에서 관련 언급은 없으나, 당장 미러링이라는 단어 자체가 메갈리아 홍보용 페이스북 계정에서 자기들끼리 만들어 낸 표현이기도 하다. 그 개념이 패러디(parody)라는 개념과 상통함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홍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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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해서는 하단의 '의문점' 단락을 볼 것.[2] 한 예로 저자는 본서에서 '여성에게는 남성을 계몽시킬 의무가 없으며, 무지에 대한 책임은 무지한 자가 지게 될 뿐' 이라고 말하지만, 비록 여성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을지 몰라도 진보 진영에게는 그것이 최소한 도덕적 당위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3] "질문하고 증명(혹은 반증)해야 할 건, 과연... (중략) ...한국 남성 부족을 현대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시민사회의 전제가 될 규범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놀람과 증오의 시선으로 다룬다 해도 그들을 쉽게 비합리주의자로 전제하는 것은 위험하다."(p.63)[4] 이효민 (2019). 페미니즘 정치학의 급진적 재구성: 한국 'TERF'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34(3), 159-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