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페미니즘 리부트: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
발행일 | 2017년 8월 1일 |
저자 | 손희정[1] |
출판사 | 도서출판 나무연필 |
ISBN | 9791187890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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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 및 저자 소개
본서는 영화학 박사학위가 있는 문화비평 연구자의 입장에서 2010년대에 국내 저널들 및 단행본에 게재했던 주요 문헌들을 일정하게 모은 선집이다. 전반적으로 정동(affekt)에 입각한 문화비평의 인식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전반부 1부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일반적 주제의 논문들로, 그리고 후반부 2부는 페미니즘 비평을 활용하여 대중매체를 분석한 논문들로 묶여 있다. 1부의 마지막인 5장에서는 나무위키에 대한 서술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따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본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감정의 인클로저" 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빈번히 신자유주의적 사회 시스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정동을 구획화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국내의 경우 이런 경향은 IMF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정동을 관리하는 목적이 혐오의 강화와 분노의 약화에 있다고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이런 사회 속을 살아가는 개인은 탈정치화, 파편화, 원자화되어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에 빠진다고 제안한다.
저자의 소개를 하자면, 저자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력이 있으며, 이후로는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소속이다. 서문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자는 "그저 영화 덕후일 뿐이며, 좀 더 공부한 덕후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의 정치" 라고 한다. 저자는 영화평론 분야의 경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으며, 페미니즘 분야에서도 활발한 출간 및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 및 공저서로서,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 《페미니스트 모먼트》, 《대한민국 넷페미史》, 《그럼에도 페미니즘》 등이 있다.
본서의 출간 배경으로서, 서문에서 저자는 페미니즘 이슈들 속에서 활동하는 한 페미니스트의 분투의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고 회고한다. 2년 동안의 투쟁 속에서 저자는 스스로가 흔들리고 갈등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지금/여기의 페미니즘에 대한 일종의 에스노그라피"(p.5)라고 표현한다. 영화학 전공자로서 저자는 우리 사회와 시대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쓰이고 소통되고 감정을 만들어내는지" 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 문화비평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와 같은 문예평론 분야 인사들이 사회과학적 분석과 해석을 하기 위해 뛰어드는 계기는 대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영화나 TV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제작 동기는 그 사회가 처한 전반적인 사회규범과 풍조, 혹은 이념으로부터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야기는 매체화되지만 어떤 이야기는 도리어 숨겨지고 말소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씬이 어떻게 연출되고 묘사되는지의 미시적인 수준에서조차 드러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매체들에 대한 대중적 인기와 반응 역시 사회구조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 있으며, 이 호응은 다시 새로운 매체화의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새롭게 나타난 매체의 성향은 대중의 정치화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매체와 사회 사이의 관계를 비평하려던 일군의 평론가들은 결국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이론적 조망을 탐색했고, 그 결과 질 들뢰즈(G.Deleuze)와 같은 사상가들의 조망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저자 역시 비평이 해야 할 책무로서, 어떤 매체가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사회화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코미디 프로그램과 같은 가벼운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재미있다" 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본질적' 인 재미의 요소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내지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재미의 기준을 규정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합치되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 연결고리를 폭로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명시한 하나의 사례를 들면, "못생긴 여자를 놀리는 개그는 왜 웃긴가?" 가 있다. 이는 단순히 그런 개그가 우스운 요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외모지상주의적 사회라는 구조적 압력이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 2017년 9월 22일에 있었던 《문화/과학》 제21회 북클럽의 주제는 바로 본서였으며, 저자 손희정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박차민정,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원옥이 토론자로, 협성대학교의 박자영 교수가 사회자로 초빙되었다. 여기서 손희정은 "페미니즘은 사이다가 아니라 복잡한 사유의 과정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 안에서 펴내게 된 책" 이라고 설명하였으며, 2015년 경에 남성 청년들이 "헬조선" 이라는 키워드로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을 때 자신들만의 언어를 찾지 못했던 여성들은 이듬해 "여성혐오" 라는 키워드를 찾았다면서, 신자유주의의 '인클로저' 를 통해 고립된 개인들이 느끼는 막막함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추동하였으리라고 제시했다.
본서에서 저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생활의 특징들을 드러낸다. 예컨대, 저자는 자신의 논문들에서도 즐겨 활용해 왔던 몇몇 단어들, 즉 '기실(其實)', '착종(錯綜)', '전유(專有)', '노정(露呈)' 등의 단어들을 극단적으로 자주 활용한다. 이 한자어들은 각각 '실제 상황', '뒤섞임', '독차지', '드러냄' 으로 순화 가능하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책머리에
- 1부: 젠더의 시선으로 본 동시대의 풍광
- 1장: 혐오의 시대: 혐오는 어떻게 이 시대의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손희정, 2015c)
- 2장: 페미니즘 리부트: 한국영화를 통해 본 포스트페미니즘과 그 이후 (손희정, 2015d)
- 3장: 젠더전(戰)과 '퓨리오숙'들의 탄생: 2010년대 중반, 파퓰러 페미니즘에 대한 소고 (손희정, 2016a)
- 4장: '느낀다'라는 전쟁: 미디어-정동 이론의 구축, 그리고 젠더적 시선 기입하기 (손희정, 2016c)
- 5장: 어용 시민의 탄생: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반지성주의 (손희정, 2017)
- 2부: 지금 여기를 조망하는 페미니즘 비평
- 6장: 천공(穿孔)의 상상력과 영화-구멍: 근대적 인식과 영화가 놓친 세계, 그 구멍에 관하여 (손희정, 2015a)
- 7장: 우리 시대 이방인의 두 얼굴: JTBC 〈비정상회담〉을 경유하여 (손희정, 2015b)
- 8장: 집, 정주와 변주의 공간: 교환가치로 착취되는 우리 시대 집의 풍경과 가능성 (손희정, 2011)
- 9장: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 (손희정, 2016b)
위에서 언급했지만 본서는 9건의 학술문헌들을 모아 엮은 선집이므로, 각 장의 내용을 인용할 때에는 본서를 재인용하기보다는 그 원본이 되는 자료의 서지정보를 직접 인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해당 정보를 APA 양식에 따라서 시간순으로 대략 배열하자면 아래와 같으며, 이제부터 각 장을 거론할 때에는 위에서 표기한 바와 같은 내주 인용 스타일을 따르기로 하겠다.
손희정. (2011). 집, 정주와 변주의 공간. 대중서사연구, 17(1), 41-70. 손희정. (2015). 천공의 상상력과 '영화-구멍'. 문강형준 편저, 인문무크지 해시태그 Vol.1: #구멍 (pp.70-101). 북노마드. 손희정. (2015). 우리 시대의 이방인 재현과 자유주의적 호모내셔널리티. 문화과학, 81, 364-386. 손희정. (2015). 혐오의 시대-2015 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여/성이론, 32, 12-42. 손희정. (2015). 페미니즘 리부트: 한국영화를 통해 본 포스트페미니즘과 그 이후. 문화과학, 83, 14-47. 손희정. (2016). 젠더戰과 퓨리오-숙들의 탄생. 여/성이론, 34, 35-59. 손희정. (2016). 기억의 젠더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최근 대중 ‘위안부’서사를 중심으로. 문학동네, 23, 1-17. 손희정. (2016). 느낀다라는 전쟁: 미디어-정동이론의 구축과 젠더. 민족문학사연구, 62, 341-365. 손희정. (2017). 어용 시민의 탄생: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반지성주의. 말과활, 14, 특집호. |
본서의 1장의 원본인 손희정(2015c)의 논문은 《문화과학》 에서 "페미니즘 2.0" 이라는 기획을 내걸고 펴낸 83호의 총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뉴스레터 DBpia Report에 따르면, 이 논문은 2016년 최다 이용된 상위 3만 편의 국내논문 가운데서도 1,302회 이용됨으로써 43위를 차지했다. DBpia 측에서는 2015년 이후로 페미니즘 관련 문헌들이 매우 높은 이용량을 보이고 있다고 하며, 실제로 동년 자료를 보면 이 문헌 외에도 다수의 페미니즘 관련 논문들이 이용량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링크
9장의 경우 저자가 《씨네21》 에 영화 〈귀향〉 을 비판한 것과 관련하여 권명아(2016)가 반론을 펼친 것[2]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권명아(2016)는 저자의 비평에 대해 엘리트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대중이 갖고 있는 위안부에 대한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계몽주의적으로 대중을 훈계하려 했으며, 이는 지식인 특유의 엘리트주의의 소산이라고 지적했던 바 있었다. 저자는 이 비판에 납득할 수는 없지만,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라는 점을 인정하여, 조목조목 재반론하는 길보다는 기존의 논의를 확장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본서의 9장 1번 미주에서 밝힌 바 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감정이 구획화되고 파편화됨으로써 정치적 동력을 상실한 상태에 처해 있다.
- 하지만 2015년 이래로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일종의 '리부트' 를 겪었으며, 여성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의식화됨으로써 젠더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 이때 페미니즘 비평가의 고유한 역할은, 대중매체의 상상력을 비평함으로써 대중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힘을 얻도록 독려하는 데 있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저자가 강조하는 미디어-정동의 분석틀이 본서에서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정리하고, 페미니즘 비평의 한 사례로서 9장의 내용을 활용해 국내 매체가 일본군 위안부를 묘사하는 서사를 비평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 다음으로, 본서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었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를 정리한다. 그리고 5장에서 저자가 나무위키를 정면으로 비판한 지점을 소개하고, 그 논리와 그에 대한 자체적인 비판을 나란히 두겠다. 마지막으로는 본서에 대한 학계의 서평 몇 건을 소개한다.- 1. 혐오의 시대: 혐오는 어떻게 이 시대의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87년 체제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사람들을 주체의 자리에서 몰아냄으로써 주체화에 대한 인정 투쟁의 열망을 낳았고, 이 열망은 약자들을 배타적으로 혐오하게 했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 사람들은 타인의 주목을 받는 것을 원하게 되었고, 이것이 주체화에 대한 인정 투쟁과 맞물리면서 약자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조리돌림 문화를 낳았다. 지금과 같은 인정 투쟁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그 파국적 결말을 피하려면 먼저 인정 투쟁의 근간이 되는 정체성 담론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 2. 페미니즘 리부트: 한국영화를 통해 본 포스트페미니즘과 그 이후
1990년대에 비해 여성성의 묘사에 있어서 퇴행했다고 평가되는 2000년대에는, IMF 이후 위기에 처한 남성성을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이 스크린 위에 투영된 한국 영화계의 동향을 드러낸다. 이후 신자유주의가 장기화되면서 포스트페미니즘적 자기계발의 논리가 여성성을 재구성했으나, 이는 다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유리천장에 의해 그 설득력을 잃고 페미니즘의 리부트를 불러왔다.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그 허구적 실체를 드러내는 의의를 지니나, 한편으로는 타자배제의 욕망을 담은 편가르기의 논리에 기초한다는 시대적 한계도 안고 있다. - 3. 젠더전(戰)과 '퓨리오숙'들의 탄생: 2010년대 중반, 파퓰러 페미니즘에 대한 소고
리부트 이후 오늘날의 젠더전의 핵심에는 파퓰러 페미니즘이 있으며, 특히 트위터를 중심으로 하여 페미니즘의 기억은 보존된 채로 주기적으로 의제화되어 왔다. 2010년대 중반에 페미니즘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 계기는, 연예인 김숙과 에릭남 등의 셀러브리티 페미니즘을 통하여, 여성들의 생존의 의제가 표면화되었다는 점이다. 젠더전의 현주소를 회고하고 향후의 방향을 제시하건대, 파퓰러 페미니즘은 대중성의 재구성이라는 면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으나, 대중성 외부의 가능성을 더 고찰하고 상상할 필요가 있다. - 4. '느낀다'라는 전쟁: 미디어-정동 이론의 구축, 그리고 젠더적 시선 기입하기
이토 마모루 등의 미디어 연구자들에 따르면, 소통 과정에서 형성된 정동이 다수 사이에서 공유된다는 것이 집단감응을 통해 밝혀질 때, 개인의 경험이 전체의 경험으로 변화하는 의식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기존의 연구의 한계는 그것을 젠더의 관점에서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집단감응을 통해 형성된 공중/네이션 개념조차 결국 남성이 과잉대표되어 의미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남성편향적인 인터넷 공간에 대한 대안으로서, 저자는 사이버 공유지를 확보하여 여성들이 서로를 지원하는 자원들을 나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 5. 어용 시민의 탄생: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반지성주의
나무위키와 일베의 정신은 탈맥락화된 정보들을 자의적으로 '팩트' 로서 포장하여 유포하는 것으로, 탈권위성이라는 가능성을 지닌 반지성주의가 반동적 보수화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어준으로 표상되는 '포스트오소리티' 의 경우, 탈권위적인 풍자와 조롱을 표방하면서도 자신들이 새로운 대안적 권위로 올라서는 음모론적인 논리를 통해 호응을 받았다. 이 음모론이 인기를 끈 배경에는, 자기 자신이 불변의 피해자이자 약자라 주장하며 어떠한 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정신적으로 전혀 성장하지 못한 386세대의 현주소가 있다. - 6. 천공(穿孔)의 상상력과 영화-구멍: 근대적 인식과 영화가 놓친 세계, 그 구멍에 관하여
필름에 구멍을 뚫는다는 발상을 통하여 나타난 매체인 영화는, 정지된 이미지들을 고속으로 제시하여 그 사이의 간극들을 소멸시키고 운동성과 시간의 경과를 나타낼 수 있다. 영화가 갖는 이러한 특성은, 세계사 속의 사건들을 정리하고 감추어 인류 역사를 연속적 발전과정으로 묘사하는 근대적 역사관의 서사적 구조와도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적 삶이 영화화되기 위해 숨겨져 왔던 이 수많은 경험들과 주체들과 사건들은, '천공의 상상력' 을 발휘하는 영화를 통하여 수면 위로 떠올라 드러나게 된다. - 7. 우리 시대 이방인의 두 얼굴: JTBC 〈비정상회담〉을 경유하여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의 재현은 혐오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경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이는 전통적인 동도서기론과 궤를 달리하는 네이션의 재개념화를 불러왔다. 〈비정상회담〉 은 보편적이고 문명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남성 외국인과 그것을 동경하는 여성 소비자를 표상하며,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적이며 남성으로 젠더화된 담론적 효과를 갖는다. 수년 전의 〈미녀들의 수다〉 에 비하면, 이 프로그램은 한국 사회가 이전보다 질적으로 더 세계화되었다는 새로운 네이션을 반영하지만, 그 결과로 제3세계 외국인들을 새롭게 타자화한다. - 8. 집, 정주와 변주의 공간: 교환가치로 착취되는 우리 시대 집의 풍경과 가능성
현대 한국사회에서 주거의 장소로서의 집은 교환가치로서 재편되는 '장소상실' 을 겪고 있으며, 이는 변혁의 가능성을 품기도 하지만, 사람과 공간이 맺는 관계를 박탈하는 문제 또한 초래한다. 장소상실의 서사는 현대 한국 영화에서 노숙자 캐릭터와 은둔형 외톨이 캐릭터로 나타나는데, 이 두 삶의 유형은 사회규범적으로 바람직한 주거에서 배제되었으면서도 대안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추방자 캐릭터들이 경험하는 해방감은 지나친 낙관주의를 보여주지만, 사회규범적 정상성을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공간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 9.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존의 박유하 등의 논쟁적 접근과는 달리, 조정래 감독은 익숙하고 진부한 서사 구조를 채택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이런 인기가 대중의 정동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지적이 존재하지만, 대중의 상상력을 빈약하게 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공모하게 한다는 역기능 또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비평은 영화의 대중성과는 별개로 자신의 할 일을 해야 하며,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의 힘을 촉발시키는 영화적 상상력을 독려하기 위해 꾸준한 소통과 상호비판을 필요로 한다.
위 챕터들에서 6~8장의 경우 페미니즘과는 상대적으로 큰 관련성이 없는 장들이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는 r.1 기준으로 자세한 언급은 피할 것이다. 그러나 6장에서는 영화학의 관점에서 "무엇을 영화로 만들 것인가" 의 문제를 필름 구멍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면서 거시적 담론과 연결시킨다. 7장에서는 JTBC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비정상회담〉 을 통해서 외국인 혐오가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외국인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8장에서는 국내 여러 매체들에서 노숙자와 히키코모리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클리셰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챕터들이다.
마찬가지로, 5장에서는 비단 나무위키만을 비판의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개인 및 집단들도 함께 거론하고 있다. 일베저장소는 말할 것도 없고, 《나는 꼼수다》 와 《파파이스》 를 통해 인기를 얻은 김어준 에 대해서 음모론적 발상들이 다분한 대하드라마적 메시지를 전파하는 대안적 권위자라고 평했고, 그 외에도 박가분은 《일베의 사상》 에서 일베를 분석하여 밝혀낸 일베의 탈맥락화 전략을 활용해 《포비아 페미니즘》 에서 페미니즘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시민 은 "어용 지식인" 이라는 언어도단과도 같은 수사를 활용하여 권력비호의 의지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소위 "깨시민" 이라고 자칭하던 친문 세력에 대해서도 정청래의 발언을 인용하여 권력에 대한 감시를 멈추자고 합의했다고 비판했으며, 386세대의 경우 자신들이 언제까지나 무조건 정의로운 사회적 약자이고 무고한 피해자라는 나르시시즘적 프레임에 함몰된 데다, 이들 "아재" 들이 아직까지도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유아적인 사고에 빠져서 일체의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고 거세게 공격했다. 따라서 이런 주제의 논쟁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면 5장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2.2. 정동으로 문화 읽기: 미디어-정동 이론
정동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의 감정 정도로 여겨지는 정동이 어쩌면 사회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 및 문화연구 분야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이런 관점에 크게 공헌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사라 아메드(S.Ahmed)인데, 대표작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에서 그 핵심 논리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또 다른 저서 《The Promise of Happiness》 에 따르면, 모든 정동은 목적지향적이며, 그 목적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즉 손희정(2016c)의 예를 들면, "우리 가족은 전통적 가족질서에 가깝다. 그런데, 전통적 가족질서는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배웠다. 따라서, 나는 지금 우리 가족에 대해 행복하다" 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사회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정동으로서 연구자들이 첫손에 꼽는 사례로는 물론 혐오가 있다. 그런데, 이 혐오는 최근 들어 갑자기 뚝 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오히려 예전부터 (우에노 치즈코 등의 일각에 따르면 특히 근대화 이후부터) 줄곧 존재해 왔던 것으로 설명된다. 괄목할 만한 것은, 혐오가 갑작스럽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문제적 정동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신자유주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주체가 되려는 개인들의 열망이 주목 경쟁을 촉발하는 인터넷 환경과 만났고, 그 결과 조리돌림 문화 속에서 혐오가 발생하여 사회적 약자들의 수치심을 발생시켰으며, 이 수치심이 결과적으로 혐오를 강화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는 도식으로 설명한다.
1장에서 손희정(2015c)에 따르면, 87년 체제 이후로 대한민국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IMF 이후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촉진되었다. 신자유주의는 그 핵심적 특징으로서 유동성(liquidity)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모든 유의미한 노동을 무의미한 노동으로 재해석하는 가정주부화(housewifisation)를 꾀했고,[3] 그 결과 경제적 주체로 존재하는 구성원들(남성)들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 및 정치적 영역에서 주체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런 경향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실패와 불신, 그리고 일찍이 낸시 프레이저(N.Fraser)가 말했던 '좌파적 상상력의 고갈' 로 인한 '외부 없는 세계' 가 펼쳐짐으로써 마침내 개인들이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밀려난 옛 주체들은 어떠한 연대도 기획하지 못한 채로 저마다 자신들의 주체성을 확인 받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각개전투에 돌입하는 "스놉"[4] 의 처지에 놓였다. 이와 관련하여, 마사 너스바움(M.Nussbaum)과 줄리아 크리스테바(J.Kristeva)의 논의를 따라, 저자는 주체됨을 향한 노력의 양상으로서 혐오라는 정동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박권일(2014)이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에서 언급한 것처럼,[5] 인터넷 문화는 기본적으로 어떤 이해관계나 권력, 이념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단순히 주목(attention)을 받기 위한 주목 경쟁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목 경쟁은 인정 투쟁의 방법론으로서 조리돌림(shaming)이라는 문화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는 혐오의 대상들이 수치심이라는 정동을 경험하게 하여, 그 혐오의 수사를 내면화하고 무기력해지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발휘한다.[6]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혐오론자들의 인정투쟁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는 끝없는 실패가 예정된 운명이라고 한다. 약자배제적 편가르기의 논리가 포함된 혐오 정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체성의 정치학" 을 극복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손희정(2016a)은 이후 3장에서, 정동을 통해서 어떻게 개인이 정치화되고 집합행동과 사회적 변화가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저자에 따르면 파편화된 개인은 사회문화적으로 보아 현실 세계를 바꿀 힘을 상실해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이런 개인들은 철저하게 대중문화의 소비자로서만 취급되며,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가 길들이기 쉬운 먹잇감의 처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래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유해성을 미처 고찰하지 못했으며,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소비 욕망의 한 종류로서 봉사함으로써 개인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끊어놓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개인 간에 정동이 공유된다면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정치학 및 사회학, 정책학 등에서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경험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타인을 포함하는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로 인식될 때, 개인이 의식화 및 정치화되어 동원(mobilization)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손희정(2016a) 역시, 예컨대 "네가 그렇게 느끼듯이, 나도 그렇게 느낀다" 와 같이 정동을 타인과 공유하는 순간, 분절되었던 개인들이 순식간에 연대함으로써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4장에서 손희정(2016c)은 이러한 정동에 대한 개념화를 이론화하기 위해, 일본의 사회학자이자 문화비평가 이토 마모루(伊藤守)의 저서 《정동의 힘》 을 인용함으로써 미디어 비평 분야에 정동 이론을 접목시킨다. 논의의 배경은 가브리엘 타르드(J.G.Tarde)의 모방적 소통과 전파에 대한 제안과 질 들뢰즈로부터 기원한다.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흐름에서는 정동의 전파에 있어서 매체를 통한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정보가 소통되고 전파되는 과정에서, 각 개인은 자신들이 생성한 정동이라는 '잉여 정보' 를 기존의 정보에 포함시켜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개인들이 생성한 잉여 정보인 이 정동이 서로 동질적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개인들은 강력한 정치적 연대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저자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극도로 강조되는 팩트폭력, 팩트체크 등의 수사들에 회의감을 드러낸다. 물론 이런 단어들은 '속거나 선동당하지 않으려는' 비판적 사고의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긴 하다. 하지만, 국내 온라인 상에서 정보들이 전달되는 양상을 보면, 그 정보의 이용자들은 기존 정보에 더하여 '재미' 와 '혐오' 의 두 가지 정동을 생성하여 혼입시킨 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소위 "팩트주의" 라 할 수 있는 일베저장소 등의 여러 사이트들은, 그 팩트를 소비하면서 자신들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서로가 생성하여 서로에게 전파하는 잉여 정보도 함께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오픈소스나 위키위키와 같은 집단지성의 힘에 기대는 디지털 미디어 활동에 대해서도 비관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잘못된 생각은 집단지성을 통해서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더욱 재생산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저자는 정동이 본래 단절되어 있던 개인들을 정치화하는 과정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다시금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Bergson)의 순수기억(souvenir pur) 및 전체기억(memoir)에 대한 논의를 끌어온다. 손희정(2016c)은 이 문헌에서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때 크게 대두되었던 대안적 매체가 다름아닌 포스트잇과 트위터라고 하였다. 그 이전까지 오늘날의 많은 20대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형성되어 있는 고유한 기억, 즉 "순수기억" 을 갖고 있었는데, 이 사건이 벌어지고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출구에 붙기 시작하면서 이들 순수기억이 서로 동질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 결과, 동질적인 순수기억은 트리거로서의 사건에 의해 곧 전체기억으로 떠올라서 강력한 힘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저자는 "집단감응"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집단지성이라는 단어에 대응시키기 위한 새로운 표현이다. 집단지성이 다수의 지식을 의미한다면, 집단감응은 다수의 정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가 저자가 펼치는 미디어-정동 이론이라고 대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2.3. 페미니즘으로 비평하기: 위안부를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법
본서는 6장에서 9장까지 저자의 대중매체 비평 논문을 4건 모아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페미니즘의 조망이 가장 두드러지게 반영된 것이 바로 9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된 서사(narrative)를 대중이 소비하는 양상을 고찰하면서, 페미니즘 비평이 대중의 인기와 별개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탐구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페미니즘 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매체들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먼저 국내 페미니즘 분야에서 기존에 논의되던 것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도 논란이 크게 발생한 것으로는 박유하 교수의 저 유명한 문제작 《제국의 위안부》 를 들 수 있다. 손희정(2016b)에 따르면, 해당 도서는 위안부 담론이 지나치게 민족주의 운동권 진영의 영향력에 휘둘리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에의 종속,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노동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위안부 할머니들은 사실 일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인가? 진짜 문제는 일본과 조선을 관통한 가부장제적 시스템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더라도 사회적으로 욕을 먹는다는 것이다.
손희정(2016b)은 이런 논지가 매우 논쟁적이며 대중에게 비판을 심하게 받을 만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래도 위안부 담론에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는 의의는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해당 도서의 문제는, 식민화라는 역사적 현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해당 도서에서 강변하는 것처럼 조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간호근로대원 등으로 지원했다고 치더라도, 식민지 여성의 입장에서 달리 어떤 선택권이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당 도서는 가부장제의 보편성을 강조하다가 식민지 기억의 특수성을 놓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위안부 논쟁과 관련하여 2016년에 개봉한 〈귀향〉은, 그런 점에서 박유하 교수와 크게 대조되는 서사를 보인다. 이 영화는 박근혜 정부의 12.28 '불가역적 합의' 를 배경으로 하여 반일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개봉하였으며, 최종적으로 300만이라는 상당한 흥행성적을 거둘 만큼 대중의 호평을 받았던 바 있다. 물론 해당 영화를 소개하는 문서에서도 나오듯이, 평단에게는 썩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 손희정(2016b) 역시, 이 영화가 (조정래 감독의 말처럼) 비록 위안부 문제에 대한 "남성으로서의 참회" 라고는 하나,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는 그 서사와 재현이 "퇴행적" 이며 문제의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이쯤에서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다룬 두 영화가 있다고 가정하고, 아래를 읽어보자. 물론 〈귀향〉 이라는 영화 자체가 꽤나 흥행했던 만큼, 해당 영화를 봤다면 둘 중 어느 쪽이 〈귀향〉 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란히 놓인 다른 하나는 손희정(2016b)이 비교의 차원에서 모범적 사례로 거론한 다른 위안부 서사이다.
영화 A - 일본 군인들이 악마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며, 여성 주인공에게 만행을 저지른다. 개인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는 부재하며, 아버지와 오빠의 모습 역시 무능하게 그려진다. - 두들겨맞는 여성의 나신이 적나라한 구도로 화면에 담기고, 강간당하는 '처녀' 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린다. 등장하는 여성의 몸은 '유린당한 몸' 으로서 스크린에 가감없이 노출된다. - 위안부 피해자 여성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서로에 대한 끈끈한 자매애를 통해 의지를 잃지 않는다. 이들의 성취는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분위기로 그려진다. - 등장인물의 위대함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묘사된다: 여성A가 위안소를 성공적으로 탈출했으나, 뒤처져 있는 여성B를 위하여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위안소로 되돌아오는 장면 - 등장인물의 상처와 한은 위안부 소녀상, 천도굿, 평화의 나비라는 상징적 장치로 치유된다. 이는 국가의 부재와 무능한 남성 개인을 대체한다. |
영화 B - 일본인 개개인의 만행은 전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으며, 소학교, 군표, 국가보상금 등의 식민지 제도 및 사회가 유지되는 양상에 포커싱한다. - 직접적으로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포함하지 않으며, 그 대신 생존 여성의 일상적 고통과 한탄에 초점을 맞춘다. 즉, 등장 여성은 스스로가 '유린당한 몸' 이라고 여기지만, 카메라는 그녀를 유린당한 몸으로서 비추지 않는다. - 위안부 피해자 여성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당당히 재합류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의 성취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평범한 삶을 영위하려는 주체성으로 그려진다. - 등장인물의 위대함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묘사된다: 여성A가 입 안이 헐어 있는 여성B를 위해 귀한 월병을 꼭꼭 씹어서 나누어주는 장면 - 등장인물의 상처와 한은 생존 여성과 사망한 혼령이 서로 일상적으로 접촉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을 통해서 다루어진다. |
손희정(2016b)이 9장에서 소개한 영화 줄거리 묘사에 따르면, 영화 A는 조정래 감독의 〈귀향〉 이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그다지 잘 쓴 서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함께 놓인 영화 B는 유보라 작가의 KBS 광복70주년 특집드라마 〈눈길〉 이다. 양쪽 모두 제작진이 여성의 역사적 고통에 대해 성찰하고 사죄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귀향〉 이 아닌 〈눈길〉 을 잘 만든 서사라고 평가하고 있다.[7]
먼저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어째서 〈귀향〉 이 문제가 많은 서사를 갖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 영화는 "사실적 묘사" 라는 미명하에 강간 씬의 선정성을 극대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비단 손희정 외에도 많은 영화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강간 피해자나 성매매 여성, 성노예 등의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는 달리 이는 절대로 필수적인 장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생존 여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성폭력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의 사회적 고립과 배척, 그리고 자신의 신세한탄에 있다. 〈귀향〉 은 이 점을 놓쳤고, 가히 포르노에 비견할 만한 강간 씬은 관객성을 남성으로 과잉젠더화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손희정(2016b)은 영화감독 미하엘 하네케(M.Haneke)를 인용하면서[8] "폭력에 대한 페티시" 라는 표현과 "볼거리가 된 폭력" 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또한 〈귀향〉 은 그 고통의 기억을 어떻게 다루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게으른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는 그 기억이 영매의 신접을 통해서만 소환된다는 타자화가 나타나는데, 손희정(2016b)은 그 결과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지금 여기' 를 살아가는 현실의 여성들과 유리되고 단절됨으로써,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평한다. 사실, 저자는 이런 서사적 "진부함" 이 일반 대중에게는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치유의 방식이고,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서사이기 때문에 채택되었으며, 그만큼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빈곤한 상상력에서 기원하며, 상상력의 빈곤은 관객들의 상상력마저 빈곤하게 하고, 담론을 망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영속화하는 유해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당초 저자가 《씨네21》 에서 비판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
그렇다면 〈눈길〉 은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어째서 잘 만든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저자는 이 특집드라마가 위안부 문제의 아픔을 조명하기 위해서 강간 그 자체가 아닌 여성의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고립감과 정신적 고통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앞서 비판했던 것과 같은 적나라하고 일견 관음증적이기까지 한 범죄 장면이 없다는 것. 게다가, 〈귀향〉 이 굿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그 고통을 죽은 사람의 기억으로 한정시킨 반면, 〈눈길〉 은 망자와 할머니들이 여전히 교류하고 공감함으로써 그것이 "지나간 기억" 이 아니라 여전히 이승에 상존하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임을 드러냈다. 또한 〈귀향〉 은 일본군 개개인의 악마적인 학대와 폭력을 힘주어 묘사한 반면, 〈눈길〉 은 개인이 겪은 문제가 일부 악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과 사회구조 차원의 문제 때문임을 암시했다. 저자가 이와 관련하여 극찬한 두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위안부 여성들이 공적 기록물을 남기기 위해 다급히 옷을 갈아입고 겉으로만 그럴싸한 "간호근로대원" 자격으로 사진을 찍는 장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수물품(위안부 여성)의 처분" 을 담담히 논의하는 일본 군인들의 대화가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9] 들여다 보여지는 장면이라고 한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위안부 여성들을 진혼곡으로 우리 사회에 소환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이 스스로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었음을 보여줄 것인가의 차이는 제작진의 상상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귀향〉 은 이런 서사적 구조에 깊게 골몰하지 않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서사를 제시함으로서 대중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있었지만, 〈눈길〉 은 서사 수준에서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지금껏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서사를 새롭게 제시하는 열정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귀향〉 을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지의 저자의 비평은 《씨네21》 에서 적지 않은 반감과 반발을 불러왔고,[10] 특히 권명아(2016)는 "엘리트 의식에 빠진 지식인의 계몽주의적 사고가 아니냐" 고 강하게 비판했다. 영화평론가가 뭇 대중의 정동을 읽지 못한 채 자기만의 현학적 세계에 빠져서 '대중 혐오' 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권명아(2016)는 이와 관련하여 대중의 정동에 대해서 '부대낌' 이라는 표현을 동원했는데, 일반 대중이 이런 통속적인 위안부 영화를 보면서 '부대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자체로도 이 영화가 분명히 유의미한 가치를 갖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본서의 9장에서 손희정(2016b)은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평론이 일반 대중의 코드와 달라질 때 페미니즘 비평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손희정(2016b)에 따르면, 80년대에 관객성에 대한 연구와 페미니즘을 활용한 문화 연구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페미니즘 비평이 대중 정동과 괴리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대해서 저자는 두 가지를 들어서 재반론을 시도한다. 첫째로, 비평이 탐지하지 못하는 대중적 인기가 과연 비평에 있어 얼마나 유의미하겠느냐는 것이다. 둘째로, 대중적 인기가 크다고 해서 비평가들이 비판하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권명아(2016)가 지적했던 '뭇 대중의 부대끼는 정동' 에 대해서도 그것이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비평은 그와 별개로 제 몫을 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이 영화에 얽힌 비평의 역할은, 영화의 진부한 재현,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정동,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습관, 이 모든 것들을 회고적으로 되짚어보고 배움을 얻으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의 표현을 일부 윤색하여 빌리자면, "영화 한 편으로 혁명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한 편만으로도 대중의 상상력을 망치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비평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한다. 《제국의 위안부》 의 박유하 교수 역시 그러했고, 권명아(2016) 역시 절대적인 주장은 되지 못한다. 특히 박유하 교수의 경우, 페미니즘의 관점은 언제나 무턱대고 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이 늘 가부장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 비평은 가부장제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가 근대의 가부장제와 서로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따라서 무조건 가부장제만을 부각시키는 박유하 교수의 메시지는,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을 이용한 변명에 불과"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페미니즘 비평이 여러 장의 조각보와 같아서, 개별적으로는 온전할 수 없고, 원래 서로 활발한 비평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맞추어 가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실상 문예평론의 분야에서도 동료평가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4. 페미니즘 '리부트'?
본서의 제목이 《페미니즘 리부트》 인 것처럼, 저자는 2015년 이후로 영화 전공자로서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대한민국 넷페미史》 와 같은 다른 도서들을 찾아보면, 그 이전에도 국내의 페미니즘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실제로 발흥기를 거쳤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관점에서 2010년대 중반 이후의 페미니즘은 리부트라고 할 만한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손희정(2015d)의 이 문헌은 여성계에서 크게 공감대를 얻어, 예컨대 김보명(2018)과 같은 후속 논문들을 보면[11] 세부적인 각론에서는 표현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연구자들이 간명하게 "리부트" 로 통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그렇다면 어째서 리부트되었다는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하다. 저자 손희정(2015d)은 이와 관련하여, 영화계에서 리부트(reboot)란 "기존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몇몇 기본적인 설정들을 유지하면서 작품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하는 것"(p.47)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이 용어를 두 가지 이유에서 고안했다고 설명한다. 첫째로,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의 계보와 비교할 때 2015년 이래의 페미니즘은 분명히 그 양상이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소비 지향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의 소위 '포스트페미니즘' 문화 속에서 나타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즉, 그 시절과는 달리, 2010년대의 페미니즘은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경영을 하라는 사회적 풍조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 둘째로, 저자는 대중문화의 판매와 소비에 있어서 페미니즘이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리부트' 라는 대중문화 용어를 활용하여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를 더 이어 가면 어째서 현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리부트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도 도출된다. 저자는 2000년대 이후부터 신자유주의적 여성성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제안한다.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자신의 가치를 높여라, 그래야만 자기실현과 사회적 성공이 가능하다" 는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결과 소비지향적이고 탈정치적인 여성상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2000년대 중엽부터 2010년대 초엽까지의 영화들을 살펴보더라도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첫째는 야오이 코드를 통해 여성들을 영화산업의 소비자로 타깃팅하는 경향,[12] 그 둘째는 메이크오버 필름(makeover film)을 통해서 여성들을 자기계발의 대상으로 타깃팅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13] 하지만 2015년 이래로는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여성성이 유리천장과 같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지점이 있더라" 라는 이 괴리감이 일시에 폭발했다는 것이다.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따라서 태생적으로 신자유주의가 2030 젊은 세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드러내며, 자기계발 수사 역시 그 실체가 없는 허구라는 것을 폭로했다는 문화적 의의를 갖는다는 게 손희정(2015d)의 논변이다. 페미니즘이 리부트됨으로써 결국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어진 현실을 정당화하는 힘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저자는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의제가 여전히 '동일노동 동일임금' 과 같은 리버럴 페미니즘의 주요 의제들에 머물러 있으며, 기존의 사회구조를 전복하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3장에서 손희정(2016a)는 페미니즘의 리부트에 있어서 대중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언급한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리부트되는 이면에는 현대적인 파퓰러 페미니즘(popular feminism)이 존재했고, 이는 다시 ①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여성들의 생존에 대한 염려와 ② 엠마 왓슨이나 김숙 등의 셀러브리티 페미니즘이 ③ 트위터를 바탕으로 한 대안매체 상의 잠재적 기억의 네트워크와 결합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 여기서 파퓰러 페미니즘이란 대중문화를 통해 통속화된 페미니즘을 말하는데, 강단 엘리트 페미니즘과는 대척점에 있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중매체를 여성의 적으로 상정하려는 움직임에도 반대한다. 이들은 여성운동이 대중매체를 도구적으로 잘 선용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국내에는 일찍이 저 양귀자나 공지영의 행보에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14] 그런데 90년대의 국내 페미니즘 중흥기에는 "페미니즘이 대중문화를 선용"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면,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대중문화가 페미니즘을 재생산"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들이 트위터 등을 통하여 의식화되고 소위 말하는 '페미니스트 전사'(…)로 거듭난다는 얘기다.
트위터와 같은 대안매체들이 페미니즘의 리부트에 기여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 손희정(2016a)은 트위터의 잠재적 기억의 네트워크라는 특징에서 찾고 있다. 트위터에서 개인의 기억과 젠더 의제들은 지속적으로 기억되고, 환기되며, 서로 묶이고, 상호작용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짧고 휘발성 강한 것들로서 오래 노출되지 못하지만, 그 기억만큼은 잠재적으로 남아있다가, 각각의 타임라인 속 트윗들이 향후 비슷한 의제가 떠오르면 다시 환기됨으로써 그 명맥을 이어간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트위터를 등에 업은 페미니즘은 "잊혔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의 귀환"(p.103)을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트위터는 삶의 기억을 잠재적으로 보존하기 때문에, 트페미들이 다시금 페미니즘을 잊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향후 비슷한 젠더 이슈가 터져나오면 곧바로 다시 재의식화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할 수 있다.
2장에서 손희정(2015d)은 리부트된 페미니즘의 한계를 두 가지 거론한다. 첫째, 저자는 비록 신자유주의의 메시지가 실패하기는 했어도, 그 각자도생의 가치관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타자배제적 성향의 페미니즘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둘째, 여성들은 스스로를 "현명한 소비자" 로 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의 언어와 인식론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삶의 양식은 소비중심적 생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소비자성을 극복하지 못한 여성들이 예컨대 여성시대 등의 집단을 형성하면서, 이들의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적 여성성을 구조적으로 혁파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한 3장에서 손희정(2016a)은, 리부트된 페미니즘이 파퓰러 페미니즘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그것이 쉽사리 소비욕망으로 환원되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다시금 봉사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이를 정동으로서 해석함으로써 그 정치화의 힘을 획득하고 대중성 너머의 연대의 길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2.5. 나무위키에 대한 관점
이제 본격적으로 나무위키에 대한 본서의 비판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나무위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① 앞서 소개했던 이토 마모루의 미디어-정동 이론, 그리고 ② 이제 소개하게 될 모리모토 안리(森本あんり)의 《반지성주의》 도서에서 제안하는 논변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을 통해, 저자는 첫째로 나무위키의 이용자들이 갖고 있는 "팩트" 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위험한 정동이 증대될 수 있다는 것과, 둘째로 나무위키가 본래 갖고 있던 탈권위적인 반지성주의가 그 긍정적 가능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신자유주의적 환경 속에서 급격하게 보수화되었다는 것을 차례로 지적한다.우선 저자가 소위 팩트체크 활동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거나 낙관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상단의 서술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으리라 보인다. 저자는 미디어-정동 이론의 관점에서,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결국 다수의 지식들이 소통되고 수집될 때 그 사용자들 사이에 감응하는 정동까지 함께 습득시킨다고 우려한다. 나무위키뿐만 아니라 위키위키라는 시스템 자체가 갖는 한계는, 사용자들이 남초일 경우 이들이 저마다 갖고 있던 "순수기억" 으로서의 혐오 정동이 집단감응을 일으키면서 사회적인 파괴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선동당하지 않겠다" 고 다짐하는 네티즌들에 의해 추앙 받고 있는데, 이들이 나무위키에서 추구하는 팩트의 '박제' 는 역시나 재미와 혐오의 두 가지 정동을 그 잉여 정보로서 함께 전달하고 있으며,[15] 이 때문에 나무위키의 어떤 '팩트' 들은 이용자들의 혐오 정동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4장에서의 손희정(2016c)의 지적이다. 이용자들이 이를 인지한다면 또 모르겠는데, 나무위키는 대중적으로 백과사전과 같은 권위를 누린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저자가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정확한 맥락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5장에서 나무위키가 일베저장소와 마찬가지로 젠더 문제를 다룰 때 탈맥락화와 탈진실(post-truth)의 함정에 자주 빠진다고 설명한다. 즉, 이용자들이 "팩트체크 들어간다" 라고 일베에 게시물을 올리거나 나무위키에 기여할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그 사건이 존재하던 맥락으로부터 이탈시켜서 새로운 맥락으로 사실들을 재구성해 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모리모토 안리가 《반지성주의》 에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을 비판할 때 분석했던 현상인데, 손희정(2017)은 이를 가져와서 "나무위키 이용자들과 일베 이용자들 역시 이런 탈맥락화의 경향은 똑같이 나타난다" 면서, 따라서 이들도 반지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반지성주의를 모리모토 안리의 관점에서 정의함으로써, 모리모토와 손희정은 공히 반지성주의의 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 관점에서는 반지성주의가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하고(손희정의 표현에 따르면 "반권위주의적 반지성주의"), 때로는 역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손희정의 표현에 따르면 "반동적인 반지성주의"). 그러나 양쪽 모두 핵심적인 것은 강력한 탈권위성이 그 중핵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위키위키 자체가 권위 있는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라 다수의 비/준전문가들이 협업함으로써 더 정확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주목 받은 형식인 데다, 나무위키는 과거 리그베다 위키에서 결별하는 과정에서도 "탈권위주의적 공동체주의" 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는 것이 손희정(2017)의 분석이다. 즉, 나무위키는 콘텐츠 생산에 있어서 평범한 유저들의 잡학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다 병신이다" 를 선언하는 일베저장소 역시 드러내는 특징인데, 이들 역시 기존 권위에 대해 저항적인 성격을 갖는다. 단, 일베가 저항하는 권위는 대개 전라도나 김대중, 5.18 민주화운동 같은, 권위적이긴 하지만 아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은 권위라는 차이는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손희정(2017)은 이런 탈권위주의를 바탕으로 어떤 가능성을 펼쳐 보일 수 있었던 반지성주의가 나무위키와 일베저장소에서 반동적으로 변화하였음을 지적한다. 이 두 웹 사이트에서 보이던 탈권위성의 이면에는 "나도 너만큼 똑똑하고 알 것은 다 안다" 는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는데,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이 나르시시즘을 뒷받침해 줄 만큼 충분한 사회적 자원을 제공할 턱이 없었고, 그래서 네티즌들은 자신의 '똑똑함' 을 내세울 만큼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정보적 우위를 드러내기 위한 피난처로서 보수주의적인 이념에 의지하게 되었고,[16]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써 또 다른 (기득권적인) 권위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반지성주의는 반동적으로 열화된 형태라는 것이다.
2.5.1. 비판
손희정(2017)이 나무위키를 분석하는 단락은 마치 나무위키는 학술적으로 공격하기에 늘 만만하고 편한 주제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놀랍도록 간편한 전제를 따르고 있다. 물론 트위터 등의 매체들만 보더라도, 자신의 지적 역량을 품 안 드는 방법으로 뽐내기 위해 나무위키를 조롱하는 경향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엄연히 학계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소통되는 문헌이 취하는 접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외부자 중심적이고 피상적이며, 사전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형태로서 '동기화된' 기본 전제(basic assumption)들을 너무 많이 깔고 들어간다. 그 위에 아무리 좋은 이론적 논리의 연쇄가 제시되더라도, 이것은 학술적으로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나무위키는 본서에서 거칠게 정리하는 것처럼 간단히 취급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지적인 고민을 필요로 하는 웹 사이트이기 때문이다.본서의 나무위키에 대한 서술은 실제 나무위키 이용자들이 경험하는 것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 대목들이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여기 인용하여 각주로 지적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는 나무위키가 백과사전을 표방하고 있지만 오류가 많고,[17] 특히나 어떤 항목에 있어서는 정보의 기술이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을 나열하고 있다는[18]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나무위키는 팩트 = 정보임을 자처하지만,[19] 처음부터 남초 커뮤니티 기반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20] 일베나 오유, 루리웹 등의 다른 남초 커뮤니티들과 '해석의 입장'을 놓고 반목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고,[21] 그 덕분에 외부적인 위상이 여타 커뮤니티와 달라진다."
- 본서, pp.143-144
- 본서, pp.143-144
- 나무위키가 재미와 혐오에 입각한 팩트주의에 기반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손희정(2017)은 취소선의 사용을 혐오 정동의 사례로 문제삼고 있다. 그런데, 취소선이 정말로 "숨겨진 본래 메시지", (혐오에 입각한) "팩트" 를 전파하는 것이 맞는가? 물론 나무위키가 취소선 문화를 통해서 특유의 가볍게 즐기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외부자들의 시선에서는 취소선의 삭제가 다른 서술의 삭제보다 자유롭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22] 외부자들은 나무위키 내에서 취소선이 재미없고 산만하다는 불만이 하도 나와서 스킨에서 취소선을 숨기는 기능이 추가됐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외부자들은 또한 나무위키에 취소선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소위 "위백" 스러운) 이런 진지한 사용자들이 문자 그대로 '끊임없이' 출몰한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한다. 문제는, 취소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그 해석을 어떻게 타인에게 설득할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과거 시사인 보도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것이지만, 취소선은 "(이용자들이 유념하기를 바라는) 진짜 의중" 을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가 하면, "(지워질 것을 각오하고 무신경하게 툭툭 던지는) 개드립" 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것도 어떤 취소선은 전자에 가깝고, 어떤 취소선은 후자에 가깝다. 게다가, 본서의 설명대로라면 취소선이 삭제되는 경우에 대해서 언제, 누구에게 삭제되는 것인지 설명할 길이 마땅치 않아진다.[23]
또한, 나무위키가 팩트주의를 내세우며 혐오를 재생산한다면,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퀄리즘 문서가 토론이 처음 열린 지 얼마 못 가서 "날조" 로 판명되었던 이유는, 당시 페미위키 측 관계자였던 S모 이용자가 내세웠던 (혐오 정동이 없는) '팩트' 를 접하고 나무위키 사용자들이 납득하고 자성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입맛에 맞는 팩트만을 재맥락화하는 반지성주의적인 팩트주의가 득세하는 곳이 나무위키라면, 어떻게 이퀄리즘에 대한 잘못된 진술이 교정될 수 있었을까? 애석한 것은, 페미니스트들은 이퀄리즘의 확산 과정에는 관심들이 많으면서, 그 정보가 정반대 방향으로 교정되는 과정에는 유독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나무위키는 이퀄리즘이라는 '재미와 혐오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서술을 포기하고,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이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기반성적 서술을 채택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례로부터 어떤 희망을 발견하려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24]
- 나무위키는 허구의 객관적 이미지로 그 이용자들을 오도하고 있는가?
일단 본서의 논리에 양보하여, 나무위키가 이용자들을 실제로 오도하여 큰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이 위험은 이미 이용자들에게 충분히 안내된 문제이며, 원론적으로는 이용자 개개인이 그 위험성을 관리 및 감수하도록 되어 있다. 즉 나무위키는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된 내용이 있을 수 있음" 을 잘 보이는 곳에 명시함으로써 이용자가 자체적으로 비판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외부 검색을 통해 들어오는 이용자들도 문서 최하단에서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 이 존재함을 안내 받음으로써 자체적으로 정보를 필터링하도록 격려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나무위키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사용하는 사이트의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한 일부 이용자들에게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본서의 논리에 대입하자면, 나무위키를 가지고 섣불리 "팩트체크" 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이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본격적인 의문을 들자면, 나무위키가 객관성에 대한 "환상" 을 이용자들에게 제시한다는 것 역시 실제로 그러할지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나무위키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보여서 인기를 얻고 거대한 토털위키의 위상에 올랐다기보다는, 도리어 그것이 주관적 서술을 허용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런 인기를 얻은 것일 수 있다. (당장 이 문서의 이 단락 역시 극도로 주관적인 비판임을 상단에서 숨기지 않고 있다.) 손희정(2017)의 논리에 따르자면 어째서 늘 객관적인 한국어 위키백과는 팩트체크의 수단으로서 나무위키만큼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실제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하의 도서에서는 주관성에 대해 지식을 쉽고 친근하게 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에디터인 장경식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Q. 나무위키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나무위키가 오류에 대한 공격도 많이 받지만, 그만큼 성장한 것에는 이유도 있는 듯해서요.
"나무위키는 참 재미있는 데이터입니다. 위키백과가 나름대로 다양하고 중층적인 집필 규제를 두어 집필자의 임의적인 글쓰기를 제한하고 있다면, 나무위키에서는 그런 제재의 벽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위키에서는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를 볼 수 있고, 때로는 전하는 정보가 무엇인가보다는 그 자유로움 자체를 즐기는 듯한 글들이 많습니다. 어떤 대상에게 기존의 상식이 부여했던 본질적 가치는 나무위키의 표제어로 채택되는 순간 해체되며, 풀이는 상대적이고 다양한 관점과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됩니다.
결과적으로,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한 가지 표제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서술이 중층적으로 혹은 병렬적으로 누적됩니다. 나무위키에 누적되는 데이터는 뜻밖에도 '텍스트의 두터움' 이라는 즐거운 가치를 생성하게 됩니다. 나무위키가 오류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면 기존의 백과사전에 익숙한 분들이 가진 공고한 기준 때문일 것입니다. 나무위키가 성장한 이유는 자유로움과 텍스트의 두터움이 주는 발랄한 상상력 때문입니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263, 장경식 인터뷰 中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나무위키는 참 재미있는 데이터입니다. 위키백과가 나름대로 다양하고 중층적인 집필 규제를 두어 집필자의 임의적인 글쓰기를 제한하고 있다면, 나무위키에서는 그런 제재의 벽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위키에서는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를 볼 수 있고, 때로는 전하는 정보가 무엇인가보다는 그 자유로움 자체를 즐기는 듯한 글들이 많습니다. 어떤 대상에게 기존의 상식이 부여했던 본질적 가치는 나무위키의 표제어로 채택되는 순간 해체되며, 풀이는 상대적이고 다양한 관점과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됩니다.
결과적으로,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한 가지 표제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서술이 중층적으로 혹은 병렬적으로 누적됩니다. 나무위키에 누적되는 데이터는 뜻밖에도 '텍스트의 두터움' 이라는 즐거운 가치를 생성하게 됩니다. 나무위키가 오류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면 기존의 백과사전에 익숙한 분들이 가진 공고한 기준 때문일 것입니다. 나무위키가 성장한 이유는 자유로움과 텍스트의 두터움이 주는 발랄한 상상력 때문입니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263, 장경식 인터뷰 中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 "나무위키는 이러하다" 의 서술들에 대한 일반화 가능성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객관적인 이용자 데이터나, 혹은 명확한 개념화를 통해 뒷받침되어 있는가?
손희정(2016c)은 4장에서 지나가듯이 "나무위키의 일부 문서들" 로 논의를 한정하여 언급한다. 그런데 저자가 나무위키의 다른 많은 문서들에도 본 문헌에서 암묵적으로 합의한 전제들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나무위키 이용의 동력은 "정보 수집과 축적에 대한 광적인 집착"(p.142)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선동당할 것에 대한 불안" 이 핵심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보 수집과 축적의 동기는 꼭 그것만은 아닐 수 있다. 예컨대, 본서에 등장하는 "스포츠나 게임 등을 포괄하는 하위문화 항목"(p.142)에서는 대체 무엇에 의해 선동될 거라는 불안이 존재하는가? 나무위키의 전신인 리그베다 위키에 폭넓게 퍼져 있었던 페이소스인 "백수 니트들의 잉여짓" 이라는 분위기는 무엇이었는가? 이는 나무위키에도 아직까지 "위키질" 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남아 있다. 물론 소위 '사관' 이라고 불리곤 하는 아카이빙은 얼핏 그럴듯하지만, 이는 종종 외부 링크에 걸린 주소가 휘발되기 쉬운 정보일 경우 이를 보존하기 위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더 본질적으로는, 나무위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화로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나무위키의 이용자라 함은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어쩌다 한 번씩 구글 검색을 통해 들어와서 열람을 하는 네티즌은 나무위키의 이용자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할까? 눈팅은 열심히 하지만 편집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편집은 열심히 하지만 늘 비-젠더적인 문서들에만 기여한다면? 나무위키에 폭넓게 기여하면서 위키 전체의 젠더 관련 논조에 영향을 끼치지만, 한편으로는 외부 커뮤니티와 여타 위키들에서는 나무위키에 비판적인 서술을 남긴다면 어떨까?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나무위키는 기여자(contributor)라는 개념을 새롭게 강조하기도 했으며, 그나마 이용자의 성비와 같은 최소한의 자료에 관해서도 아직 감조차 잡고 있지 못하다. 그저 막연히 남초 사이트로 상정되고, 실제로 페미니스트들도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이는 나무위키라는 웹 페이지가 그 대표성에 있어서 남성으로만 과잉젠더화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손희정(2017)의 문헌에서 이 부분을 자의적으로라도 명확히 했다면 이는 경계 조건(boundary condition)을 갖는 제한적 설명으로서나마 유효할 수 있겠으나, 그런 진술은 확인되지 않는다.
- 연결되는 문제의식으로서, 나무위키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위키를 '대체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좀 더 발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국내 사회과학계에 나무위키를 포함한 위키위키 사이트의 내용 분석(content analysis)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적절한 질적 연구방법론이나 질적 분석 소프트웨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25] 이와 같은 체계적 분석의 노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심전심 식의 방법론을 고집한다면,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설득할 힘을 얻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 정도 논리라면, 트위터 상에 만연해 있는 저 흔한 '나무위키 자료 조별발표 괴담' 이상의 신빙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특히나, 기존의 나무위키에 대한 평론은 어디까지나 나무위키가 "설명을 요하는 문제적 현상" 이라는 암묵적 합의를 갖춘 동질적 집단 내부에서 유포되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이 합의에서 벗어나는 외부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26]
문제는, 나무위키의 데이터는 위키백과에 비해서도 유독 비정형성이 큰 데이터에 속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 빅 데이터 프로세싱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어 왔지만, 이런 유형의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위키위키 분석 솔루션에 있어서는, (적어도 지난 《시사인》 보도를 참고해 보자면)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못해도 각 텍스트 수준에서 그 의미상 갖는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합의된 기준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조차도 논의된 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잘 검증된 방법론을 거치지 않고 우격다짐 식으로 어떤 연구대상을 분석한다면, 이는 학술적이고 지적인 필요에서 분석했다기보다는, 단지 (소위 더 큰 대의를 위한)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필요에 따라 그 분석을 실시했던 것이라는 '동기화의 문제' 가 제기될 수 있다.
아마도 나무위키를 설득력 있게 분석할 수 있는 질적 연구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된다면, 아래에 한 나무위키 이용자가 즉석에서 고안한 어설픈 분석방법보다 더 정교한 형태로 등장할 것이다.[27] 예컨대, 아래와 같은 텍스트 분석보다는, 어쩌면 에스노그라피 수용자 연구나 자문화기술지 같은 참여적 연구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훨씬 더 학계에 수월하게 수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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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적으로 충분히 성실한 분석이 등장한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대중화될지는 다소 회의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질적 분석 자체가 극단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데이터 분석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버전 갱신이 매우 활발하여 1,000건 이상의 사본이 존재하는 문서의 경우에는, 연구자가 직접 분석하기보다는 위키위키 고유의 분석 솔루션을 확보한 빅데이터 조사업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34] 이 경우에는 금전적 압박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나무위키에 대한 온갖 자의적 주장들이 이미 쉽사리 유통되고 환영받을 준비가 된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부담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지적 성실성을 견지할 사람들이 그나마 몇이나마 나타나 주기를 바라야 할지도 모른다.
3. 서평
우선, 본서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서평이 존재한다. 손희정과 동문이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조혜영(2017)에 따르면,[35] 본서의 가치는 동시대성에 있으며, 현실과 접촉하는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 비평을 제시했다고 호평한다. 그는 본서가 대중 사회와 거리를 두고 어디까지나 비평가로서 시대 전체를 조망하고자 노력했다고 언급한다. 또한, '페미니즘 리부트' 라는 조어 역시, 페미니즘의 급부상에 섞여 있는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포함하긴 하지만, 대중문화 영역에서 불편함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새로운 양상의 페미니즘을 잘 대변한다고 적극적인 찬사를 보낸다.다음으로, 본서에서 제시했던 "집단감응" 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평을 살펴볼 수 있다. 홍혜은(2018)은 스스로를 메갈리아와 트위터를 계기로 페미니스트가 된 저술가라고 소개하는데, 그에 따르면[36]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는 판단에도 이견이 없고, 집단감응이라는 개념에도 흥미로우나, 집단감응만이 오늘날의 페미니즘의 동력원이 되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우선 집단감응을 통해 연결되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되는 '여성들' 의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37] 여기에 대한 대답은 페미니즘적 상상력과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홍혜은(2018)은 "여성이 공포를 느낀다, 여성이 고통 받고 있다" 는 식의 수사를 통해서 집단감응을 일으켜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을 얻어내는 것이 자칫 유해할 수 있다고도 우려한다.[38]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동원하는 "안전한 공간을 원한다" 라는 수사는 "누구로부터?" 라는 질문을 요청하고, 그 결과 또 다시 피아식별을 하는 편가르기가 나타나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 홍혜은(2018)은 그보다는 페미니즘적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작금의 집단감응은 공포 정동을 핵심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본서 5장에서 손희정이 따랐던 반지성주의의 정의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천정환(2017)의 문헌에 따르면[39] 촛불시위 이후의 공론장과 대중지성을 언급할 때 많은 지식인들이 자꾸 반지성주의라는 표현을 "남용" 하여 개념적인 "인플레" 가 나타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그 결과 또 다른 "정치적 무능" 이 야기될 것이라고 비판한다(p.400). 특히, 본서는 반지성주의에 소위 '386 아재 정치' 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 결과 반지성주의의 개념화가 매우 느슨해지며 논리적으로도 정동과 지성이 구분되기 어렵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천정환(2017)은 국내 반지성주의의 중핵이 친문 세력이라는 저자의 판단에 대해서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고 회의한다(p.401). 이와 관련하여 그의 문헌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여성주의, 진영논리, 팬덤정치 같은 '정치의 한계' 를 뭉뚱그려 반지성주의라 단정하는 흐름이 커졌다. 그러나 이는 대개 대중정치에 대한 손쉬운 일반화에 가까워 보인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경계가 지식인이라 불리는 부류의 자기합리화나 오히려 '반지성' 으로 귀착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중략) ...특히 '나는 너희들이랑 다른 지성이야' 같은 암묵적 엘리티즘이 거기 끼어 있지 않은지 지성으로써 살펴야 한다."
천정환(2017), p.402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천정환(2017), p.402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천정환(2017)의 논의에 따르면, 반지성주의의 개념화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뚜렷한 합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반지성주의를 반지식인주의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다른 일부는 반합리주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컨대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R.Hofstadter)는 반지성주의를 후자로 이해했으며, 국내에서도 일베저장소의 성향을 분석하면서 최철웅(2016)은[40] 일베가 반지식인주의에 가깝다고 정리한다. 한편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연구자도 있다. 일본의 문화연구자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는, 반지성주의가 무지 상태가 아니라 "외골수의 지적 열정" 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경우, 세상에 확증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거의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지성주의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대신에 천정환(2017)은 대중의 반지성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들의 반지성주의가 더 큰 문제가 되며, 특히 인문학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부 이공계 고학력자들의 행보가 사회적으로는 더 유해하다고 주장한다.
문서 상단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문화/과학》 제21회 북클럽에서, 토론자 박차민정은 본서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혐오가 갑작스럽게 문제적 정동이 된 것이 아니라 기존 87년 체제 속의 시민권 내에 혼입되어 있었던 혐오의 정동이 현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름붙여진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국내 여성계가 시민권 획득에 골몰했다는 1장의 서술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다른 토론자 정원옥 역시 현대사회의 문제를 전부 87년 체제의 실패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명박 정부가 혐오를 일정 부분 '조장'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은지,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의 정치' 는 사실 '차이의 정치' 로 해석되어야 하는 반면 사회적 강자들의 '편의 정치' 는 '배제의 정치' 로 달리 해석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즉, 두 토론자 모두 87년 체제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 의문을 표했다.
이에 대해 손희정은 영화 전공자로서 국내 영화학의 역사에서는 87년 체제가 갖는 의미가 굉장히 크고, 이때 영화계의 권력을 잡은 386세대가 많은 산업적 파행을 일으켰다는 데서 문제의식이 출발하였다고 답변하였으며, 시민권에 대해서는 실제로 1장에서 언급한 시민권에 대한 생각은 이후 2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많이 바뀌어서, 5장에서는 박차민정과 동일한 방향으로 입장이 선회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혐오가 혐오로 이름붙여지는 과정에 대한 반론에도 동의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혐오에 대한 담론이 갑자기 폭증하게 되었는가의 질문이라고 답변했다.
이후 플로어 질문자인 이동연은 본서에서의 386세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역사적 시대로서의 '역사성을 갖는 80년대' 를 혐오의 시대로 규정해서인지, 아니면 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했던 남성 운동권 세력이 혐오 정동을 갖고 있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인지 그 초점이 분명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손희정은 본서에서 80년대 자체를 평가할 의도는 없으며, 단지 그 시절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민주화라는 성취를 이룩한 다음 90년대 사회에 제대로 익숙해지지 못하고 고착되어 버린 386세대 남성들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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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BS 까칠남녀에 반고정으로 출연해서 유명했다. 이 책이 출판되던 시점에서는 한참 까칠남녀가 진행중이었다.[2] 권명아. (2016). '대중 혐오'와 부대낌의 복잡성. 문학동네, 23, 1-9.[3]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논의로는 마리아 미즈(M.Mies)의 문헌을 참고할 것.[4] 문화 연구자들에게 있어, 스놉이란 생존이 유일한 존재양식이 된 현대 사회에서 왜곡된 인정투쟁의 공간에서의 생존에만 몰두하는 인간형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학술적 기원이 궁금하다면 알렉상드르 코제브(A.Kojeve)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5] 박권일. (2014).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넷우익이라는 보편 증상. 박권일, 김민하, 김진호 외 편저.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pp.15-62). 서울: 자음과모음.[6] 이와 관련하여 손희정(2015c)은 엄기호(2014)의 《단속사회》 에 등장하는 논리인 '편의 정치' 와 '곁의 정치' 를 언급하면서, 진보주의자나 리버럴이라 할지라도 혐오의 형식을 똑같이 공유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진보주의자들은 늘 경각심을 갖고, 트위터 상에서 조롱, 편가르기, 망신주기 등의 '편의 정치' 로서의 배타적 공동체성을 촉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훗날 그가 워마드 세력에 대해서는 반동성애 성향을 들어서 선긋기를 시도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7] 상단에서 소개한 《문화/과학》 제21회 북클럽에서, 저자는 〈아이 캔 스피크〉 를 또 다른 잘 만든 위안부 영화로 거론한 바 있다.[8] 하네케에 따르면, "폭력의 재현은 폭력 자체가 아닌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9] 즉 창문의 프레임을 통해서, 이 일본군 개개인이 부도덕한 인물이 아니라, 그들을 가두고 있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존재하고, 이 시스템 때문에 그들의 도덕성이 한계를 갖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10] 대중의 평가와 평단의 평가가 서로 크게 엇갈리는 국내 영화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디워》 및 《해운대》 등이 있다.[11] 김보명 (2018).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 경제와사회, 118, 99-138.[12] 저자는 이 무렵의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미묘한 남성 간 동성애 코드를 의도적으로 배치해서 여성 관객들의 호응을 얻으려 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그 사례로 〈왕의 남자〉 를 들고 있다.[13] 저자는 야엘 셔먼(Y.D.Sherman)의 논의를 끌어와서, 메이크오버 필름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개발을 독려하며, 여성이 무엇을 자원화하여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나아갔을 때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지를 전시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그 사례로 〈미녀는 괴로워〉, 〈써니〉, 〈댄싱 퀸〉 등, '못생긴 외모의 여성이 전환점을 거쳐서 일과 사랑을 쟁취하는' 서사구조의 영화들을 거론한다.[14] 저자에 따르면, 비판론자들은 파퓰러 페미니즘이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개혁하기보다는 단지 기존의 페미니즘의 의제 중에 한 종류를 더 추가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특히 자본주의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여성계에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파퓰러 페미니즘에 대한 더 깊은 학술적 논의를 필요로 할 경우, 저자는 《Feminism in Popular Culture》 핸드북에 기고된 Hollows & Moseley(2005)의 논의를 추천하고 있다.[15] 여기서 저자는 나무위키의 취소선 문화를 그 사례로서 제시한다. 즉 취소선이 쳐진 서술은 이용자들에게 특히나 강한 재미와 혐오의 정동을 제공한다는 것이다.[16]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젠더 문제에 이를 적용할 경우 아마도 "남성들도 손해 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왜 모르냐" 고 외치는 후기 마스큘리즘의 논리가 이에 해당될 수도 있겠다.[17] 나무위키는 처음부터 백과사전을 표방하지 않으며, 오류가 많음을 모든 문서 최하단과 나무위키:대문에 명시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문서 페이지의 가장 아래로 내려 보면 이를 경고하는 문구를 볼 수 있다.[18] 나무위키는 정보의 객관적 기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위키는 그 정체성에 있어서 객관적 정보를 기술한 모음이 아니라 각 이용자들의 주관성이 개입된 수필에 가깝다. 이를 더 짧게 줄여 말하자면, 나무위키는 "서술 시의 POV와 토론 시의 NPOV" 로 특징지어진다.[19] 나무위키 이용자들 중 실제로 팩트 = 정보임을 자신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나무위키는 공적으로 이를 정체화한 적이 없다. 물론 누군가는 그렇게 믿을 수 있겠지만, 이는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다.[20] 기반이 되는 커뮤니티가 있다면 옛날의 엔젤하이로겠지만, 현대 나무위키와 주고받는 영향력은 위키 갤러리만도 못하다. 또한 나무위키의 성비는 아무도 모르며, 설령 남성 이용자들의 가시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는 남성의 언어로 위장하는 여성들이 많을 수 있다. 《대한민국 넷페미史》 와 같은 유관 도서들에서 이런 통찰에 도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의아한 부분이다. 게다가, 나무위키는 남초 사이트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여중, 여고, 여대, 여성향 작품 관련 문서들을 갖고 있다. 결정적으로 나무위키 운영진 내에서 아무도 이러한 주장을 한적이 없다. 이것은 오히려 외부에서 나무위키를 바라보는 시선이다.[21] 나무위키는 사전식 구성을 따를 뿐 사전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지 않으며, 외부인들에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무위키:대문에 명시하기까지 했다. 위키위키라는 운영 메커니즘을 사전 그 자체와 동일시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22] 취소선 서술에 이의를 제기하는 토론이 열리면 "뭐 이런 걸로 토론까지 여느냐" 는 면박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소한 편집은 토론 없이 알아서 지워도 될 일이라는 소리다.[23] 이에 대해서는 저자도 미주 8번에서 "...취소선은 언제, 왜 사라졌을까? 여기에 취소선의 정치학이 놓여 있을지 모른다" 라는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넘어갔다.[24] 나무위키의 한계점에만 늘 주목하면서 그 가능성은 늘 무시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쩌면 나무위키를 선용할 기회를 너무 많이 잃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무위키를 선용한다' 는 표현 자체가 언어도단이라고 받아들여지게 될 수도 있겠다.[25] 다른 웹사이트의 경우 추천, 개념글, 베스트 게시판, 회원 등급제, 회원 랭킹, 별점 등의 다양한 지표들을 내용분석의 기준으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다. 위키위키라고 하더라도 예컨대 SCP 재단 등의 문예창작 위키는 별점 기능을 통해 이용자들의 선호와 호응을 정량화하고 있다. 하지만 나무위키에는 어떠한 지표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나마 문서에 별표를 매기는 기능은 로그인 이용자들을 위한 일종의 문서 주시 기능에 가깝다.[26] 이는 실제로 북미권의 많은 리버럴들이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를 설명하려다가 자주 빠지는 함정과도 비교될 수 있다. 예컨대 현대의 정치심리학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유독 진보보다는 보수의 특징이 더 많이 설명되고, 분석되고, 문제시되고, 개입을 요하는 것으로서 학술적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는 자성이 제기되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학계가 진보측은 정상화하고 보수측은 병리화했다는 것이다.[27] 예컨대 카이스트에서는 저 복잡계 연구방법론을 끌어다가 위키피디아 기여자의 기여 편중현상을 설명한 바 있다. #관련기사[28] 예컨대, 3인의 상호독립적 평가자가 취소선의 사용 유형들을 미리 설정하고, 그에 따라 사본에서 발견되는 취소선들을 분류할 수 있다.[29] 예컨대, 소개, 정의, 설명, 예시, 비교, 대조, 비판, 반론, 나무위키/특징적표현, 외부밈, 기타 등등이 가능하다.[30] 예컨대, 한국어는 미괄식이므로 문단 말미에서 가중치를, 반박의 기능을 하는 문장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등의 결정이 가능하다.[31] 예컨대, 오타수정, 위키문법 수정, 외부링크추가, 외부링크수정, 외부링크제거, 토론안내, 토론합의적용, 관리자, 기타 등등이 가능하다.[32] 예컨대, 토론 합의가 적용된 서술에는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다.[33] 이 이용자 집단은 해당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나무위키 이용자 집단을 의미하지 않음에 유의.[34] 그런 점에서, 《시사인》 보도는 비록 그 해석이 자의적이긴 했지만, 이심전심 식의 방법론에 비교한다면 더 현명한 접근이었을 수 있다.[35] 조혜영 (2017). 대중문화를 사건화하는 페미니즘 서적. 아시아여성연구, 56(2), 305-313.[36] 홍혜은 (2018). 페미니즘적 상상력과 용기를. 여/성이론, 38, 256-266.[37] 이 서평 자체가 저자의 글쓰기 습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비판을 제기할 때 극단적으로 조심스러운 표현들을 골라 사용하고 있다. 저자가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어쩌면 이 부분은 트랜스여성 등의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련된 논쟁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38] 한국의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대중을 공포로 몰아붙여서 정치적 힘을 결집하고 여성들을 의식화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비판은 (다소 다른 맥락이기는 하나) 이미 박가분 역시 《포비아 페미니즘》 에서 경고했던 바 있다. 논리의 대비를 위해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39] 천정환 (2017). 촛불항쟁 이후의 시민정치와 공론장의 변화. 역사비평, 120, 386-406.[40] 최철웅 (2016). 반지성주의와 타자 혐오. 경희대학교대학원보, 217. Available at http://www.khugnews.co.kr/wp/?p=5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