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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중산헌무왕(中山獻武王) 원영 | 元英 | |
시호 | 헌무왕(獻武王) |
작위 | 광무백(廣武伯) → 상산후(常山侯) → 중산왕(中山王) |
성 | 탁발(拓跋) → 원(元) |
휘 | 영(英) |
자 | 호아(虎兒) |
생몰 | ? ~ 510년 12월 9일 |
출신 | 하남군(河南郡) 낙양현(洛陽縣) |
부친 | 원정(元楨) |
형제자매 | 5남 2녀 |
자녀 | 6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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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의 황족. 경목황제 탁발황의 손자. 남안혜왕 원정의 아들. 중산문장왕 원희, 도창공혜공 원유, 동평문정왕 원략, 북평경공 원찬, 무읍왕 원흠의 부친.2. 생애
2.1. 효문제 재위기
탁발영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피리 불기에도 능숙했고, 의술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있었다. 효문제 탁발굉 재위기에, 그는 평북장군(平北將軍)•무천진도대장(武川鎮都大將)•가 위공(假魏公)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독양익녕3주제군사(都督梁益寧三州諸軍事)•안남장군(安南將軍)•영 호서융교위(領護西戎校尉)•구지진도대장(仇池鎮都大將)•양주자사(梁州刺史)로 승진하였다.태화 19년(495년) 정월, 효문제가 30만 대군을 일으켜 남벌을 시행할 때, 탁발영은 양한별도대장(梁漢別道都將)으로 임명되었다.
태화 19년(495년) 2월, 효문제의 대군이 종리(鐘離)에 이르자, 효문제는 탁발영에게 조서를 내려,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서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이때 탁발영은 지금 대군이 직접 출정하여 동남쪽의 세력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자신이 한중(漢中)을 도모할 기회를 엿볼 수 있다며, 한중으로 진격하는 것을 허락해달라 상주하였고, 효문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효문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탁발영은 군대를 거느리고 저수(沮水)로 나아갔다. 그러자 남제의 양(梁)주자사 소의(蕭懿)는 장수 윤소조(尹紹祖)와 양계군(梁季群) 등을 보내,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험난한 산지에 진지를 세워 다섯 곳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저수를 사이에 두고 진영을 구축하였다. 탁발영은 이에 계책을 세우며 말했다.
"저들의 장수는 하찮은 자들이며, 서로 복종하지 않고, 병력은 많지만 상하 질서가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만약 정예 병사를 선택하여 한 진영을 집중 공격하면, 저들은 서로 구원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한 군대를 무찌르면 나머지 네 개의 진영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병사를 선발하여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였고, 예상대로 적들은 서로 구원하지 못하였다. 곧이어 한 곳을 격파하자, 나머지 네 개의 진영도 모두 무너졌다. 탁발영은 적장 양계군을 생포하고, 3,000명 이상을 참수하였으며, 7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백마수(白馬戍)를 수비하던 남제의 장수는 윤소조 등의 패전 소식을 전해듣고 그날 밤 도망쳐 패주하였다. 탁발영은 승세를 타고 남정(南鄭)까지 진격하였으며, 한천(漢川)의 백성들은 그를 신과 같이 여기며 앞다투어 귀순하였다.양주(梁州)의 백성 이천건(李天乾) 등이 탁발영에게 와서 항복하자, 탁발영은 그들을 국가의 귀빈처럼 예우하였다. 이천건 등은 자신의 집이 남정(南鄭) 서쪽에 있다며 군대를 보내 맞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탁발영은 부대를 보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한편, 이 소식을 입수한 소의 또한 장수 강수(姜脩)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탁발영이 보낸 부대를 추격하여 기습하게 하였고, 밤에 교전이 발생하면서 양측에 다소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강수는 이후 여러 차례 패배하였고, 다시 소의에게 군사를 요청하였다. 소의는 병력을 추가로 보내 그를 지원하였으며, 결국 맞이하러 간 부대는 급박한 상황을 탁발영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탁발영은 기병 1,000기를 이끌고 신속히 구원하러 나섰다. 그러나 탁발영이 도착하기 전에 적은 이미 퇴각하였다. 탁발영은 그들이 성으로 들어갈까 두려워 통군(統軍) 원발(元拔)을 보내 적의 후방을 추격하게 하고, 자신은 적의 앞길을 차단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그 결과 적군은 전부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소의는 다시 군대를 보냈는데, 탁발영은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병력은 이미 지쳐 있었다. 심지어 병사들이 적군에 비하면 적은 수에 겁을 먹고 모두 도망가고 싶어 하였다. 이에 탁발영은 천천히 기병을 이끌고 평온한 태도로 행동하며, 고지에 올라 적을 바라보며 동서로 손짓을 하여 마치 명령을 내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후에 군대를 정렬시키고 전진하였다. 이를 본 적군은 매복이 있는 줄 알고 퇴각하였고, 탁발영은 그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이어서 탁발영은 남정(南鄭)을 포위하였다. 이때 그는 삼군을 엄격히 통제하여 아무런 침범도 없게 하였고, 멀고 가까운 지역 모두에서 조세를 거두어 물자를 공급하였다.
탁발영이 남정을 포위하기 전, 소의는 군주(軍主) 범결(範潔)에게 3,000여 명을 이끌고 요족을 토벌하라고 보냈다. 범결은 대군이 남정(南鄭)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 성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에 탁발영은 통군(統軍) 이평적(李平敵)과 이철기(李鐵騎) 등에게 파서(巴西)와 진수(晉壽)의 토착민을 징집해 범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보냈다. 범결은 죽기를 각오하고 결전을 벌여 이평적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탁발영은 범결의 군대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린 후, 기병을 이용해 기습하여 적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후 탁발영은 남정을 90여 일 동안 포위하고 공격했으며, 이기지 못한 전투가 없었다.
태화 19년(495년) 4월, 효문제가 남벌에 실패하여 회군하면서 탁발영에게도 철수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에 탁발영은 먼저 노약자를 보내고, 자신은 정예 병사를 이끌고 후방에 남았다. 그는 사자를 보내 소의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나, 소의는 이것이 속임수라고 생각하고, 탁발영이 철수한 다음 날까지도 성문을 굳게 닫아 열지 않았다. 이틀 후, 소의는 그제서야 장수를 보내 탁발영을 추격하게 하였다. 탁발영은 몸소 후방을 지키며 병사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적과 맞서 싸웠고, 적군은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탁발영이 4일 밤낮 동안 적의 공격을 막아내니, 적이 마침내 퇴각하였고, 결국 탁발영의 군대는 전부 제나라 영역을 무사히 벗어났다.
이때 산저족(山氐族)이 반란을 일으켜 탁발영의 귀로를 차단하였다. 탁발영은 군사를 이끌고 맹렬히 싸우며 전진하였고, 전투 중에 흘러온 화살에 맞았으나,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는 이 공로로 안남대장군(安南大將軍)으로 승진하였고, 광무백(廣武伯)에 봉해졌다. 이후 탁발영은 구지(仇池)에 머무르며 양주(梁州)를 계속해서 통치하였고, 큰 위엄과 은혜를 베풀었다는 명성이 높았다.
태화 20년(496년) 정월, 효문제가 조서를 내려 황족의 성씨인 탁발씨를 원(元)씨로 바꾸게 하였다.
태화 20년(496년) 8월, 원영이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태화 21년(497년) 9월, 효문제가 한양(漢陽)을 정벌할 때, 원영을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임명하고, 전장군(前將軍) 직위를 더해주었다. 이후 대종정(大宗正)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상서(尚書)로 전임되었으며, 본래 직위인 좌위장군으로서 형주(荊州)를 진수하였다.
태화 23년(499년) 정월, 남제의 태위 진현달(陳顯達) 등이 형주를 침략하였을 때, 원영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결국 당시 병을 앓고 있던 효문제는 아픈 몸을 이끌고 친정하는 수밖에 없었고, 효문제가 남양(南陽)에 이르자, 원영의 관직과 작위는 박탈되었다.
2.2. 선무제 재위기
태화 23년(499년) 5월, 효문제가 붕어하고 선무제 원각이 즉위하자, 원영은 서주(徐州)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 다시 상서와 광무백 작위를 회복하였다.경명 원년(500년) 8월, 남제의 황제 소보권이 관군장군 진백지(陳伯之)를 보내 회남(淮南)을 침략하게 하였다. 이에 팽성왕 원협이 수춘(壽春)을 진수하게 되었고, 원영은 진남장군(鎮南將軍)으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적을 토벌하러 갔다. 그러나 원영이 도착하기 전에 진백지는 비구(肥口)에서 원협 등에게 대패하여 철수하였고, 선무제는 조서를 내려 양주(揚州)를 다스리게 하였다.
경명 2년(501년) 11월, 원영이 수도 낙양으로 돌아와 상표하여 말했다.
"신이 듣건대, 혼란을 수습하고 멸망해가는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상도(常道)입니다. 군대를 일으키고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기회를 잡아 적을 제압하기 위함입니다. 보잘것없는 소보권(蕭寶卷)은 하늘의 법칙을 돌아보지 않고, 산과 강을 믿고 의지하며 감히 중국(中國)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지금 요사스런 역적은 여러 차례 패배하고도 여전히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오행(五行)을 능멸하고 삼정(三正)을 소홀히 여깁니다. 가혹한 형벌을 마음대로 행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해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蕭衍)은 동쪽으로 말릉(秣陵)을 정벌하며, 군대를 일으켜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을 따라 내려오며 겨우 한 성만을 지키고 있을 뿐, 더 이상의 방어 수단은 없습니다. 이는 곧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며,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기입니다. 일이 마치 구르는 공처럼 쉽게 풀릴 것이고, 이치는 마치 길가의 풀을 줍는 것처럼 명백합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도 무엇을 더 기다리겠습니까?
신이 직접 3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면음(沔陰)으로 진격하여, 양양(襄陽)의 성을 점령하고 흑수(黑水)의 길을 차단하기를 청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혼미하고 잔인한 군신(君臣)은 서로 잡아먹는 형국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가 상류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위세는 멀리까지 떨치게 될 것입니다. 남쪽으로 진격하여 강릉(江陵)을 점령하는 것은 이미 가까운 일로, 그 거리가 500리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삼초(三楚)의 땅을 단번에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이며, 민촉(岷蜀)으로 이어지는 길도 자연히 차단될 것입니다. 또한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두 주에 명을 내려, 모두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강을 따라 적의 배를 불태워 남김없이 소멸시키겠습니다. 그러면 건업(建業)은 궁지에 몰리게 되어 마치 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듯 될 것입니다. 또, 사치(士治)의 군대가 다시 일어날 것이고, 손호(孫皓)가 두 번 포로로 잡힌 것처럼, 제(齊)의 문물과 통일된 질서가 자리 잡고, 천하가 하나로 통합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부디 임금으로서의 판단을 내려주시고, 조금만 더 경청하여 독단적인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의심이나 논의를 하지 말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을 삼키고, 천하를 통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소는 묵살되고 답이 없었다. 원영이 다시 상주하여 말했다.신이 직접 3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면음(沔陰)으로 진격하여, 양양(襄陽)의 성을 점령하고 흑수(黑水)의 길을 차단하기를 청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혼미하고 잔인한 군신(君臣)은 서로 잡아먹는 형국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가 상류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위세는 멀리까지 떨치게 될 것입니다. 남쪽으로 진격하여 강릉(江陵)을 점령하는 것은 이미 가까운 일로, 그 거리가 500리가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삼초(三楚)의 땅을 단번에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이며, 민촉(岷蜀)으로 이어지는 길도 자연히 차단될 것입니다. 또한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두 주에 명을 내려, 모두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강을 따라 적의 배를 불태워 남김없이 소멸시키겠습니다. 그러면 건업(建業)은 궁지에 몰리게 되어 마치 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듯 될 것입니다. 또, 사치(士治)의 군대가 다시 일어날 것이고, 손호(孫皓)가 두 번 포로로 잡힌 것처럼, 제(齊)의 문물과 통일된 질서가 자리 잡고, 천하가 하나로 통합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부디 임금으로서의 판단을 내려주시고, 조금만 더 경청하여 독단적인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의심이나 논의를 하지 말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을 삼키고, 천하를 통일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빈틈을 타고 약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신속하게 행동하는 데 달려 있으며, 위기에 처한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은 기대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소보권은 도리를 어지럽히고, 혈육끼리 서로 적대하고 있습니다. 변방 수비대가 세 갈래로 서 있으나, 누구를 따를지 알 수 없습니다. 의양(義陽)은 고립되어 있고, 천자의 영토와 가깝습니다. 외부로부터는 식량이나 지원을 받을 기약이 없고, 내부에는 병력과 물자의 저장도 확고하지 못합니다. 이는 불 속에 빠진 새와 같아 장작을 치울 수 없고, 머리를 내민 도적이니 도끼로 내려찍는 것을 늦출 수 없습니다. 만약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강우(江右) 지역은 경략(經略)의 기초가 될 것이나, 실패한다면 단지 이후의 작전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안정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위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현재 예주자사(豫州刺史) 사마열(司馬悅)은 이미 전투 준비를 갖추고 출정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동예주자사(東豫州刺史) 전익종(田益宗)은 삼관(三關)을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에게 절도(節度)를 맡길 것을 청합니다."
이에 선무제가 직침(直寢) 양령(羊靈)을 군사(軍司)로 파견하였다. 원영은 군공(軍功)으로 인해 이부상서(吏部尚書)에 임명되었으며, 작위는 상산후(常山侯)로 진봉되었다.어느 날, 원영이 상주하여 말했다.
"신이 학령(學令)을 조사해보니, 각 주와 군의 학생들은 3년에 한 번씩 배운 경서를 시험 보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한 뒤, 그다음에야 사자를 파견하여 군에 가서 연습과 시험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명하신 폐하께서는 도(道)를 숭상하여 성균(成均)의 기풍을 드러내시고, 의(義)를 품어 교육의 아름다움을 빛내셨습니다. 그래서 태학(太學)의 건물은 오랫동안 지방에 두셨고, 사문(四門)의 교육은 지금 막 경전(京瀍)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육을 받고, 여러 해 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학생들 중에 뛰어난 자들은 마땅히 위궐(魏闕, 조정)에서 시험을 보아야 하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백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각 군에 가서 시험을 치르게 하여 그들의 성적을 평가하고, 우열을 가리는 것이 옳습니다. 최근에 황도(皇都)가 이전되고, 강남과 양주(江揚)가 아직 통일되지 않아서, 향교(鄉校)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된 시험을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좋은 품성과 나쁜 품성이 구별되지 않고, 모두 학문을 배우는 자리에서 같은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치 난초와 쑥이 같은 정원에서 자라는 것과 같고, 품격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은 글방에서 교육받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외재(外宰)과 경관(京官)의 선발과 평가가 거의 끝났으니, 사문(四門)의 박사 중 오경(五經)에 능통한 자들을 보내어 따로 시험을 진행하게 하고, 규정에 따라 우열을 가려 승진시키거나 강등시키기를 요청합니다."
선무제가 조서로 답했다."학업이 쇠퇴하여 폐기된 지 오래되었으니, 한 명의 사자만으로는 이를 장려할 수 없다. 따로 조서를 내려야 할 것이다."
경명 4년(503년) 10월,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원영을 사지절(使持節)•가 진남장군(假鎮南將軍)•도독징의양제군사(都督徵義陽諸軍事)로 삼고 의양(義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소량의 무제 소연이 임명한 사주자사(司州刺史) 채도공(蔡道恭)은 원영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효기장군 양유(楊由)에게 성 바깥의 주민 3,000여 호를 이끌고 성 서남쪽 10리 떨어진 현수산(賢首山)의 능선에 세 개의 목책 진영을 세워 안팎의 방어 체제를 갖추도록 지시하였다. 이윽고 원영의 군대가 이르자, 양유는 물소를 풀어 북위군 진영으로 돌격시켰고, 뒤이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원영은 물소 무리를 피하기 위해 잠시 군대를 후퇴시켰다가, 다시 군사를 나누어 양유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그날 밤, 책민(柵民) 임마구(任馬駒)가 양유를 참수하고 원영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삼군은 양식을 공급받고, 항복한 백성들은 안정을 찾았다.
경명 4년(503년) 11월, 원영이 소량의 장군 오자양(吳子陽)과 싸워 백사(白沙)에서 그를 패퇴시켰다.
정시 원년(504년) 3월, 패전 소식을 들은 무제는 평서장군 조경종과 후장군 왕승병(王僧炳) 등을 보내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의양을 구원하게 하였다. 왕승병은 20,000 군사를 지휘하여 착현(鑿峴)을 점령하였고, 조경종은 10,000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에 원영 또한 관군장군 원령(元逞)과 양열장군 조문경(曹文敬)을 보내 번성(樊城)을 점령하게 하여 적군에 대항하게 하였다. 이후 원영은 장병들을 지휘하여 양쪽에서 협공하며 왕승병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4,000여 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정시 원년(504년) 6월, 왕승병을 무찌른 원영은 다시 사아산(士雅山)에 진을 쌓아 조경종과 대치하였고, 여러 통군(統軍)들을 나누어 사방의 산에 매복시킨 뒤, 적에게 약한 척하며 기만하였다. 이에 소량의 장수 마선병(馬仙琕)은 10,000여 군사를 이끌고 원영의 진영을 기습하려 하였다. 이때 원영은 여러 군대에 거짓으로 북쪽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을 유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군이 평지에 도착하자, 매복해 있던 통군 부영(傅永) 등 세 군대가 나타나 마선병을 공격하였고, 적군은 곧바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원영은 진격하여 적군을 무찌르고, 2,300명의 적군을 참수하였으며, 적의 우림감군 등종년(鄧終年)을 참수하였다. 마선병은 다시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재차 결전을 시도하였으나, 원영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상황에 맞게 나누어 공격하였고, 또다시 적군을 격파하였으며, 적장 진수지(陳秀之)를 참수하였다.
정시 원년(504년) 8월, 원영의 통군 왕매노(王買奴)가 동령(東嶺) 전투에서 따로 소량군의 진영을 무찌르고, 500명의 적을 참수하였다. 채도공은 근심 끝에 죽었고, 죽은 채도공을 대신하여 주사(州事)를 담당하던 효기장군 채령은(蔡靈恩)은 성을 의지하여 계속 싸웠으며, 북위군과 백병전을 매일 벌였다. 조경종과 마선병은 성이 곧 함락될 것을 알고, 전 병력을 동원하여 결전을 벌였으나, 하루에 세 번 교전하여 모두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채령은은 궁지에 몰려 결국 항복하였고, 삼관(三關)의 수비대도 이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적의 성이 이미 함락되고, 삼관(三關)까지 다시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세를 떨치며 국경을 넓히고, 명성과 전략이 널리 떨쳤으니, 공적과 사적으로 모두 태평을 칭송하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기쁘기 그지없다. 장군은 안으로는 심사숙고하여 계획을 세우고, 밖으로는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행동하였으며, 법을 받들어 깃발을 높이 들고, 종묘의 계획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비록 방숙(方叔)이 만형(蠻荊)을 다스리고, 소호(召虎)가 회포(淮浦)를 평정한 것과 비교하더라도, 이와 견줄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신주(新州)가 처음 귀속되었으니, 마땅히 경략(經略)을 널리 펼치도록 하라. 잘 감독하여 반드시 주위를 견고히 하고, 맡길 만한 사람에게 임무를 위임한 뒤에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 효문제가 한양(漢陽)을 평정할 때, 원영은 전공을 세워 왕작을 회복할 것을 약속받았으나, 진현달에게 패배함으로 인해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 원영이 큰 공을 세워 선무제가 매우 기뻐하였고, 결국 그의 봉작을 회복시켜 중산왕(中山王)에 봉하고, 식읍 1,000호를 하사하였다.선무제는 대사(大使)와 홍로소경(鴻臚少卿) 목연길(睦延吉)을 보내어, 원영에게 사명을 전달하고 임명장을 수여하게 하였다. 원영은 채령은, 소량의 상서랑 채승협(蔡僧勰), 전군장군•의양태수 풍도요(馮道要), 유격장군 포회신(鮑懷慎), 천문(天門) 태수 왕승백(王承伯), 평북부(平北府)의 사마 종상(宗象), 평북부의 자의참군 복찬(伏粲), 급사중•녕삭장군 채도기(蔡道基), 중병참군 방수(龐脩) 등 여러 명의 인물을 포로로 삼아 보냈다. 선무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제 강남(江南)을 평정하였으니, 이들 포로는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도 된다."
원영이 낙양으로 돌아오자, 선무제는 그를 접견하고 그의 공로를 깊이 치하하였으며, 이후 식읍을 1,000호 더 추가로 하사하였다.2.2.1. 종리 전투
정시 2년(505년) 10월, 소량의 무제가 동생 소굉을 보내 비량(肥梁)을 침략하게 하였다.정시 3년(506년) 4월, 선무제는 조서로 원영을 사지절•산기상시(散騎常侍) 직책을 더하여 주고, 정남장군(征南將軍)•도독양서2주제군사(都督揚徐二道諸軍事)로 삼아 10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원영은 각지에서 상황에 맞게 처신하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비량이 결국 함락되고 마니, 선무제는 조서로 말했다.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져 비량(肥梁)을 포위하고 위협할 때, 변방 장수들이 대처를 늦추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이번 출정이 있었으니 반드시 승리와 빠른 전과를 기대했으나, 군대가 지체되었고 비량은 이미 함락되었다. 짐은 이 소식을 듣고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꼈으니, 이는 원래 계획에 어긋난 것이다. 지금 적의 군대가 구름처럼 모여 15만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 적을 공략할 것인가? 적을 완전히 소멸시킬 시기는 가까운가, 먼가? 며칠 내에 적의 진영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필승의 전략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 이에 짐은 보병교위(步兵校尉) 겸 중서사인(中書舍人) 왕운(王雲)을 보내 중요한 군사적 사항을 지시하게 하겠다."
원영은 이에 전황과 계획을 상주하여 보고하였다. 정시 3년(506년) 7월, 원영은 음릉(陰陵)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소량의 장수 25명을 참수했으며, 5,000여 명의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원영은 이어서 양성(梁城)에서 적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적의 부장 42명을 참수하였으며, 적군 중 전사하거나 익사한 자가 약 50,000명에 이르렀다. 소량의 중군대장군•임천왕 소굉과 상서우복야 류담(柳惔) 등 다섯 명의 적 지휘관들은 회남을 따라 도망쳤고, 원영은 이 전투로 총 30만 석의 군량을 거두었다. 이에 선무제가 조서로 말하길
"도적을 크게 무찌르고 남해(南海)에 위세를 떨친 것을 알았으며, 강가에 더 이상 적의 흔적이 없고, 삼초(三楚) 일대가 깨끗해졌으며, 그 명성이 먼 변방까지 퍼졌으니 이제 천하가 같은 법도를 따르게 되었다. 공사(公私)가 모두 기뻐하며 위로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짐의 뜻에 부합한다. 이제 그 위세를 타고 여세를 몰아 오회(吳會)를 진격하여 남은 적을 완전히 소탕하고, 동남쪽을 차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며, 원영을 위무하였다.정시 3년(506년) 10월, 원영은 적을 추격하여 마두(馬頭)에 이르렀다. 소량의 마두 수주(戍主)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원영은 이어서 종리(鐘離)를 포위하였다.
정시 3년(506년) 11월, 무제가 우위장군 조경종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종리를 구원케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종리 전투 참고.
정시 4년(507년) 2월, 전투가 길어지자,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군대가 오래 행군하여 병사와 말이 지쳐 있고, 적의 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쉽게 공략하기 어렵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시기는 승리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10만 대군이 매일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고 있다. 장차 후일을 도모해야 하니,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우선 은밀히 준비하고 서서히 군을 정비하여, 마치 개선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 영토를 정비하고 국경을 완비하며, 위엄과 전략을 널리 펼쳐라. 장군이 좌우에 데리고 있는 초(楚) 땅의 만족은 본래 도망하기 일쑤이기에, 어떤 자들은 산과 호수로 도망치고, 어떤 자들은 제어하기 어려워 약탈을 일삼을 수 있다. 만약 사악한 무리나 교활한 도당 중에서 반드시 소탕해야 할 자들이 있다면, 곧바로 소탕하여 국경을 깨끗이 정비하라. 그러나 강하고 교활하여 험한 지형을 의지해 쉽게 제압할 수 없는 자들은 굳이 병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개선의 시기가 다소 늦어지더라도, 더 이상 세세한 것에 얽매이지 말라."
그러자 원영이 상표하여 말했다."신은 명을 받들어 죄를 벌하러 나섰으며, 도망친 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적의 상황을 평가하여 공격을 계획한 바, 2월 말에서 3월 초에 이르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달 1일부터 계속된 장마로 인해 하늘이 사람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왕자가 군대를 움직일 때는 모든 행동이 신중해야 하며, 작은 지연이나 장애로 인해 곧바로 다른 의견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신이 다시 생각해보건대, 만약 3월 이후에 하늘이 맑고 땅이 건조해지면, 공격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계속 이어져 진격이 어려워진다면, 신은 이미 소양교(邵陽橋)를 높여 적의 범람과 돌파를 막을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뜻밖에 홍수가 길어질 것을 염려하여 다리가 파손될 수 있음을 생각해, 신은 또한 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리성(鐘離城)의 강폭이 좁은 곳에 부교(浮橋)를 건설 중이며, 3월 중순까지는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날씨가 맑으면 공격을 개시하고, 비가 계속되면 포위하여 수비할 것이니, 수륙 양면의 계획을 모두 일정에 맞추어 진행할 것입니다. 참으로 바라건대, 조정에서 특별히 먼 미래를 내다본 전략을 세우시고, 조금 더 여유를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산을 쌓는 공로가 중도에 폐기되지 않도록 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이에 선무제가 조서로 답하였다."대군이 야영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사들이 지쳐 있다. 공격과 수비의 전략은 미리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니, 최근 여러 번의 상주에서 승리를 약속한 시점이 늦봄을 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후속 보고에서 다시 초여름 말로 기약하게 되었다. 그 지역은 습하고 질퍽거려 오래 머무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비록 상황상 반드시 적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은 장군의 깊은 계획이겠으나, 군대가 오래 머물면 병사들의 힘이 약해질 것이고, 이는 조정이 걱정하는 바이다. 고로, 주서(主書) 조도(曹道)를 보내 군사의 상황을 살펴보고, 그가 돌아와 모든 것을 보고하도록 하겠다."
조도가 원영의 진영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에도 원영은 여전히 상주하여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정시 4년(507년) 4월, 물이 불어나 북위군이 애써 지어놓은 부교가 무너졌고, 지휘관인 원영을 비롯한 여러 북위의 장수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쳤으며, 병사들은 10 중 5~6할 수몰되었다. 원영은 양주(揚州)에 도착하여, 사자를 보내어 절(節)과 관복, 초선(貂蟬)[1], 장수(章綬)[2]를 조정에 반납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기록하게 하고, 대신들에게 처분을 맡기도록 하였다. 유사(有司)는 원영이 전략을 잘못 세워 계획이 실패한 것을 조사한 후, 그에게 사형을 처할 것을 상주하였으나, 선무제는 원영의 사형을 면제하고 백성으로 강등시키는 것으로 명하였다.
2.2.2. 의양 방어전
영평 원년(508년) 9월, 조정에서 원영의 중산왕 작위를 회복시키니, 식읍은 다시 1,000호에 이르렀다. 원영은 사지절•가 정동장군(假征東將軍)•도독기주제군사(都督冀州諸軍事)로 복직되어, 조정의 명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킨 경조왕 원유(元愉)를 토벌하고, 기주(冀州)를 평정하였다.당시 북위의 영주치중(郢州治中)인 독영조(督榮祖)는 몰래 소량군을 끌어들여, 의양에서 이를 지원하였다. 삼관(三關)의 수비대는 모두 성을 점령한 후 소량에 다시 투항하였고, 북위의 영주자사(郢州刺史) 누열(婁悅)만이 성을 지키며 저항하였다. 이때 현호성(懸瓠城)의 백성 백조생(白早生) 등이 북위의 예주자사(豫州刺史) 사마열(司馬悅)을 살해하고 성을 점령하여 소량에 투항하였고, 소량의 장수 제구인(齊茍仁)이 군대를 이끌고 현호성으로 들어가 진수하였다. 이로 인해 사마열의 아들인 사마상(司馬尚)과 그의 아내 화양공주(華陽公主)도 함께 소량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북위 조정은 원영을 사지절•도독남정제군사(都督南征諸軍事)•가 정남장군(假征南將軍)으로 삼고, 여남(汝南)에서 출병할 것을 명하였다. 원영이 출발하기 전, 선무제가 그를 불러 말했다.
"누열(婁悅)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해 조화가 깨졌고, 인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데 어둡고 실수가 있었으니, 그로 인해 영주의 백성들이 적을 끌어들였고, 삼관(三關)의 수비대는 도망쳤으며, 의양(義陽)은 고립되어 절박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소. 왕은 나라의 소호(召虎)와 같아, 그 위엄과 명성은 오래전부터 떨쳐왔소. 이에 왕을 직접 대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이 혼란을 깨끗이 소탕하려는 것이오. 예전에 위청과 곽거병이 흉노를 상대하느라 평온한 해를 보내지 못했듯이, 지금 남쪽 국경이 평정되지 않은 이상, 왕도 자주 전장에 나서는 것을 거부하지 마시오."
이에 원영이 대답하여 말했다."신에게는 한신이나 백기의 재능이 없고, 신의 지혜는 손자(孫子)나 오기(吳起)보다도 어두우나, 왕실의 장손으로서 자주 중대한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신의 전략이 얕고 짧아 규율을 잃고 군사를 잃었으니, 마땅히 초장왕이 공자 자반(子反)을 죽였듯이, 처벌받아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깊은 자비로 여러 번 기억해 주시고, 마치 종소리가 소에게까지 미치듯이 신을 사랑해 주셔서, 신으로 하여금 순백(荀伯)처럼 다시 태어나 이 밝은 시대를 살 수 있게 해주셨으므로, 맹씨(孟氏)의 공로를 추구하여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삼관(三關)과 영(郢)의 작은 적들은 진압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미 적을 멸망시킬 전략은 신의 눈앞에 있으니, 폐하께서 더 이상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선무제가 말했다."동남쪽을 차단하고, 다시 수(隨), 초(楚) 일대를 평정하는 것은 장군에게 기대하는 바이니라. 종리(鐘離)에서의 한 번의 실수로 어찌 큰 공덕이 훼손되겠소? 이제 왕이 그곳에서 삼군을 지휘하니, 짐은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소."
이후 선무제는 이미 형만(邢巒)이 백조생을 여러 번 격파한 것을 보고, 원영에게 곧장 의양으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영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여러 번 상주하여 군대를 요청하였으나, 선무제가 이를 기각하였다. 원영은 하는 수 없이 형만과 군대를 합쳐 현호성을 되찾은 후,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당초 제구인이 현호성을 점령하고 있었을 때, 소량의 녕삭장군 장도응(張道凝) 등이 군대를 이끌고 초성(楚城)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영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원영은 이들을 추격하여 장도응과 소량의 호분장랑 조고생(曹苦生)을 참수하고, 그들의 병사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영평 2년(509년) 정월, 의양에 도착한 후, 원영은 삼관(三關)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원영은 전략을 세우며 말했다.
"삼관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돕고 있다. 만약 한 관문을 점령하면 나머지 두 관문은 공격하지 않아도 자연히 평정될 것이다. 어려운 곳을 공격하기보다는 쉬운 곳을 공격하는 것이 낫고, 동관(東關)이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우니, 먼저 동관을 점령해야 한다. 이는 황석공(黃石公)이 말한 '전투는 바람이 불듯 빠르게, 공격은 강물이 터지듯 거침없이'라는 전략에 부합한다."
원영은 적이 모두 힘을 합쳐 동관을 방어할까 두려워, 장사(長史) 이화(李華)에게 다섯 개의 군단을 이끌고 서관(西關)으로 진격하게 하여 적의 병력을 분산시켰다. 그런 후에 원영은 직접 여러 군대를 이끌고 동관을 공격하였다. 이전에 마선병은 운기장군 마광(馬廣)에게 군대를 이끌고 장박(長薄)에서 원영의 군대를 막도록 하였고, 군주(軍主) 호문초(胡文超)는 따로 송현(松峴)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원영이 장박에 도착하자, 마광은 밤에 무양(武陽)으로 도망쳤고, 원영은 군대를 진격시켜 무양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 소연은 관군장군 팽옹생(彭甕生)과 표기장군 서초수(徐超秀)를 보내 무양을 지원하였고, 원영은 적의 지원군이 온다는 보고를 듣고 진군을 늦추며 말했다."그들이 이 성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내가 이미 전에 그 지형을 살펴보았는데, 쉽게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것처럼 쉽게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팽옹생 등이 무양에 들어간 후, 원영은 곧바로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어 6일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마광 등 적군은 항복하였다. 이후 원영이 황현(黃峴)으로 진격하니, 소량의 태자좌위솔 이원리(李元履)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원영은 이어 서관(西關)을 공격하였고, 소량의 사주자사 마선병도 즉시 퇴각하였다. 이는 모두 원영의 전략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원영은 적의 대장 6명, 부장 20명을 포로로 잡고, 병사 7,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쌀 40만 석과 군자재를 노획하였다. 조정으로 개선한 원영은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제수받았다.
2.3. 사망
영평 3년(510년) 10월 23일[3], 원영이 세상을 떠났다. 동원비기(東園秘器), 조복(朝服) 한 벌, 비단 700필이 주어졌으며, 사후에 사도공(司徒公)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헌무왕(獻武王)'이라 하였다. 원영에게는 일찍이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장남인 동궁선마(東宮洗馬) 원유(元攸)[4]가 요절하여 차남 원희(元熙)가 작위를 계승하였다.영평 4년(511년) 2월 6일[5], 원영의 유해가 낙양 서쪽 구릉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