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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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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승상(丞相)
성씨(陸)
(遜), 의(議)
백언(伯言)
생몰기간 183년 ~ 245년 2월[1]
고향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승상 재임기간 244년 ~ 245년 2월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손가와의 화친2.3. 번성 공방전2.4. 칠백리 촉영을 불사르다, 이릉대전2.5. 외교와 내정2.6. 석정 전투2.7. 건업에서2.8. 4차 합비 공방전2.9. 형주에서 보여준 지략2.10. 손권과의 말년2.11. 최후2.12. 사후
3. 삼국지연의4. 기타
4.1. 이궁지쟁에서의 책임소재 문제
5. 육손과 관련된 설화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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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손권 휘하의 장수. 본명은 육의(陸議).[2] 는 백언(伯言).[3] 양주 오군 오현 사람. 아내는 손씨, 아들은 육연육항, 동생은 육모.

이릉대전에서 이름을 떨치고, 손권에게 군사와 정치 양쪽에서 중용되었으나, 말년에는 총기를 잃어버린 손권에게 간언하다 핍박받고 분사하였다. 주유 이상으로 공적이 큰 인물로[4], 삼국지에서 신하의 신분으로서 단독 열전이 실린 사람은 제갈량과 이 육손 뿐이다.[5]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육씨는 오의 사성이라 불리는 강동의 유력한 호족으로 육손은 그 방계로 태어났다. 육씨세공에 따르면 육손의 조부 육우는 배움에 정진하여 성문교위 직책을 맡았다. 육손의 아버지 육준은 육가 집안을 이루고 관직은 구강도위까지 이르렀다.

육손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당조부인 여강태수 육강의 임지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집안의 대표이던 육강이 원술의 군량 요청을 거절하여 당시 원술의 휘하에서 일하던 손책에게 공격을 당하니, 그는 아들인 육적과 육손 등 육씨 일족을 모두 오현으로 피난시켰다. 결국 196년육강이 손책과의 싸움에서 져서 죽자[6] 그의 뒤를 이을 육적이 너무 어렸던 덕에 육손이 육적을 대신해 집안을 관리했다.[7]

손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뒤를 이은 손권이 권력을 잡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3년, 육손은 21세의 나이에 손권 아래의 막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서조령사를 거쳐 해창현의 둔전교위로 임명되어 해창현의 정무를 관리했다. 육손은 해창현에 큰 한재가 닥쳤을 때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유하고 감독하여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육손은 손권에게 오군, 회계군, 단양군의 숲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소집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육손은 새로 수집한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전부터 회계의 문제거리였던 산적의 우두머리 반림을 토벌하고 남은 무리의 항복을 받아내니 육손이 이끄는 병사는 2천 명까지 그 수가 늘었다.

<하제전>에 따르면 216년, 파양의 백성 우돌이 조조의 인수를 받고 백성들을 변화시켜 도적으로 만들었으며, 능양현, 시안현, 경현이 모두 우돌과 서로 호응했다. 하제와 육손은 우돌을 토벌하여 무찔러서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두려워하며 복종했다. 단양의 세 현은 모두 투항했으며, 정예 병사를 총 8천 명 얻었다.

육손은 정위교위로 임명되었고, 군대를 이포(利浦)에 주둔시켰다. 하제는 안동장군에 임명되고, 산음후로 봉해졌으며, 밖으로 나가 장강가에 주둔하여 부주 상류 지역으로부터 환까지 지휘하게 되었다.

2.2. 손가와의 화친

육손이 이렇게 공을 세웠으나, 과거에 있었던 육강의 죽음 때문에 육씨와 손씨 가문과의 사이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호족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성이 절실했던 손권은, 회유책으로 자신의 조카(손책의 딸) 손씨를 육손과 맺어주며 화친을 청하였다.[8]

그 후 손권이 육손에게 정치 문제에 관하여 여러 번 그의 의견을 구했는데, 그 중에서 육손은 산월을 물리쳐 그들의 세력을 흡수할 것을 제안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육손을 장하우부독으로 임명했다. 단양군에 비잔이라는 자가 조조로부터 인수를 받아 산월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육손이 진압을 하러갔지만, 그의 군대는 비잔의 군대에 비하면 택도 없이 열세였다. 하지만 육손은 꾀를 내어 군기를 늘리고 군고와 호각을 배치시켜 놓으며, 밤에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며 허장성세하니, 지레 겁을 먹은 비잔의 무리는 순식간에 격파되어 흩어졌다.[9]

육손은 동방의 세 군에서 사람을 뽑아 강인한 사람은 병사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고 약한 사람은 민호에 편입시키니, 결국에는 수만 명을 얻게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던 환란은 전부 소멸되었으며, 군대가 지나간 곳은 안정되었다. 육손은 돌아와 무호에 주둔했다.

이와 같은 육손의 활약을 지켜보았던 회계태수 순우식은 질투심에 표를 올려 육손이 임의대로 백성들을 취하여 관할 지역을 소란스럽게 한다고 말을 꾸몄으나, 육손은 오히려 도성에서 손권과 대담할 때, 순우식은 훌륭한 관리라며 그를 칭찬했다. 손권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이유를 묻자, 육손은 이는 백성을 위한 일이었음을 설파하였다. 손권은 육손의 변론에 대하여 진실로 훌륭한 행위라며 맞장구를 쳤고, 더하여 범인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며 그를 칭찬했다.

2.3. 번성 공방전

219년, 여몽관우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하여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오자, 육손은 그를 만나 관우와 국경 맞대며 지키는 판에 여기와서 뭐하는 짓이냐며 따졌다. 이에 여몽은, 그대의 말이 맞으나 내가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었다. 육손은 여몽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려 관우를 방심하게 만들어 형주를 얻을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몽의 본심 또한 이와 같았으나 그는 짐짓 정색하며, 관우는 용맹하며 신의와 은혜로 형주를 다스리고 있기에 무리라고 대답하고는 곧 자리를 빠져나와 손권에게 갔다.

여몽을 접대한 손권은 그에게 여몽의 자리를 대신할 후임으로 누구를 삼았으면 좋겠냐고 묻자, 여몽은 재능이 뛰어나지만 아직 명성이 퍼지지 않은 육손을 추천하였다. 손권은 육손을 편장군 우부독에 봉하였고, 국경으로 보내어 여몽을 대신하게 했다. 손권은 여몽을 소환해 들이라는 격문을 노출시키고, 은밀히 같이 계획을 도모하였다.

육구에 도착한 육손은 우선 관우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전에 저는 그대가 적군의 동태를 관찰하고 나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군대를 지휘해 가볍게 일어나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의 공적은 위대합니다!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그대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습니다. 최근 재능없는 이 사람이 임명을 받아 서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풍채를 앙모하여, 좋은 대우와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우금 등이 당신의 포로가 되자,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그대를 존경하고 찬탄하였으며, 장군의 공훈은 세상에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옛날 진문공(晉文公)이 성복(城濮)의 싸움에 참가시킨 군대나 회음후(한신)이 조나라를 공격한 계략일지라도 그대를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서황 등이 적은 수의 기병을 진지에 주둔시켜 그대의 동향을 엿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조는 교활한 적입니다. 그는 실패한 분노 때문에 어려움을 생각지 않고 아마 은밀히 병사를 늘려 그 뜻을 이루려고 할 것입니다. 비록 그의 군대는 강하지 않을지라도 용맹하고 강인한 장수는 여전히 있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항상 적을 경시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고인의 용병술에 의지하여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욱 경계하시고, 장군이 다방면으로 방침을 만들어 완전하게 승리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서생으로 재능이 소원하고 학문이 얕으며 행동은 더딘데, 감당하지 못할 직무를 맡게 되었으니 위엄과 덕행이 있는 당신과 이웃이 되어 기쁘고, 저의 마음을 전부 기울이고 싶습니다. 비록 당신의 계책에 부합되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워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관심을 얻게 된다면 이런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관우는 육손의 편지를 살펴보고 그가 겸손하게 몸을 낮춰 스스로 의탁하려는 뜻이 있고, 매우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다시 경계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관우가 과연 믿고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이를 정탐한 육손은 상황을 손권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관우를 잡을 수 있는 요령을 진술했다. 손권은 몰래 서쪽으로 군사를 파견하고, 육손과 여몽을 선봉 부대가 되도록 하여 공안과 남군을 신속하게 점령하도록 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공을 세운 육손은 의도태수, 무변장군, 화정후로 봉해졌다. 또한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가 겁을 먹고 도망가니 이민족과 관리가 모두 항복하였고, 육손은 금, 은, 동의 관인을 위에 청하여 이들에게 포상으로 줬다.

육손은 이이사정을 3천 군사와 함께 파견해 촉나라 장수 첨안진봉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이는 수군을, 사정은 보병을 지휘하여 험한 요새를 끊어 첨안을 무찌르고 진봉을 사로잡았다. 또 방릉태수 등보와 남향태수 곽목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그리고 자귀현의 호족 문포등개 등이 촉과 내통하여 오군에 대항하자, 육손은 사정을 지휘하여 그들을 토벌했다. 문포와 등개가 달아나자 촉나라에서는 이들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육손은 사람을 보내 이들을 회유했는데 문포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투항했다. 이렇게 육손이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거나, 항복을 얻어낸 사람이 수만 명이 되니 손권은 육손을 우호군, 진서장군으로 임명하고 누후로 봉했다.

《오서》에 따르면 손권은 육손의 공적과 인덕에 보답하기 위해서, 상장군에 열후(列侯)로 삼았고, 게다가 양주목(揚州牧)인 여범에게 명하해 육손을 별가종사로 벽소하고 무재로 천거하게 했다.

당시 그에게 항복한 형주의 선비들 중 관직을 받은 사람도 있고, 안배를 받지 못한 자도 있었는데, 육손은 상소를 올려 그들에게 기회를 줄 것을 청하니 손권은 그의 건의를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2.4. 칠백리 촉영을 불사르다, 이릉대전

221년 7월, 유비가 오로 침공해왔다. <선주전>에 따르면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유비는 몹시 성내며 허락하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육손), 이이, 유아 등은 형주 남군 무현,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 풍습이 무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222년,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서쪽 변방 지역으로 향해 왔다.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가절을 주어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손환 등에게 5만 명을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유비는 무협과 건평에서부터 이릉 경계까지 이어 둔영 수십 개를 세우고 금, 은, 비단, 작위, 상으로 각 소수 민족들을 회유했다. 그리고 장군 풍습을 대독으로 임명하고, 장남을 선봉으로 삼았다. 1월 유비는 이릉에 진식, 오반의 수군을 주둔시키고 2월에 유비가 친히 4만 명의 병력과 2~3천 필의 말,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를 떠나 이릉 앞쪽인 의도군 효정에 주둔했다.

유비를 대항할 때, 장군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손책 시대의 노장이고, 어떤 이는 황실의 친척이었으므로 각각 긍지를 갖고 서로 듣고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육손이 칼을 잡고 말했다.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조조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것은 강대한 적수인 것이다.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하며 함께 이 적을 무찔러야만 하는데, 서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 나는 비록 서생이지만, 주상의 명령을 받았다. 국가에서 여러분들을 굽혀 나의 명령을 받도록 한 까닭은 중임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군령(軍令)은 영원한 것이니, 범할 수 없다.

처음에 손환은 단독으로 이도에서 유비의 선봉대를 토벌하려다가 유비에게 포위되었다. 그래서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육손은 안된다고 말했다. 장수들이 말했다.
손안동(손환)은 손권의 동족인데, 그가 포위당한 것을 알고도 어찌 구하지 않습니까?
육손이 말했다.
안동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고 성은 견고하며 식량은 충분하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나의 계책이 실시되는 것을 기다리면 안동을 구하지 않아도 안동의 포위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이 때 유비의 세는 강릉 서편인 이릉과 의도군 효정까지 밀고 왔는데, 삼국지를 자세히 읽은 자들은 기억하겠지만, 주유와 조인이 싸웠을 때 이릉에서 싸웠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유비는 우선 오반을 보내 수천 명을 인솔하여 평지에 군영을 세워 도전하도록 했다. 오나라 장수들이 공격하려고 하자 육손이 말했다.
이런 행동에는 반드시 음흉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오서》에 따르면 여러 장수들은 유비를 맞받아 칠 것을 바랬지만, 육손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유비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와서 날카로운 기세가 비로소 성대하며, 또 높은 곳을 타고 험준한 곳을 지키니 섣불리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것이오. 지금 산기슭으로 행군하면 세력을 펼치지 못해 저절로 나무와 돌 사이에서 끝장나게 될 것이니, 서서히 그들이 피폐해진 것을 제압해야 할 뿐이오.
여러 장수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육손이 두려워한다고 여겨 각자 분한 마음을 품었다.

유비는 그의 계획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곧 바로 8천 명의 복병을 데리고 산골짜기에서 나갔다. 육손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오반을 공격하자는 요청을 듣지 않은 까닭은 반드시 거짓이 있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문제기>에 따르면 조비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유비는 병법을 이해하지 못하오. 어찌 7백여 리에 이르는 군영을 만들어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고원, 습지, 험한 곳을 감싸고 군대의 진영을 구축하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오. 이것은 병법에서도 금기하는 것이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비는 통상적인 이치를 어기고 자신의 집을 지키지 않고 과감히 군사를 보냈습니다. 유비가 앞뒤로 군사를 사용한 것을 살펴보면, 실패는 많았고 성공은 적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臣)은 처음에는 그가 물과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육손 수하의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유비를 공격한다면 응당 그가 처음 병사를 내었을 때 했어야만 했습니다. 현재는 그로 하여금 오나라로 5,6백 리를 들어오도록 하여 서로 대치한 지 7,8개월이나 되었으며, 많은 요충지는 모두 그가 굳게 지키고 있으므로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유비는 교활한 적이며, 매우 많은 일을 겪었고, 그의 군대가 처음 집결했을 때, 그의 생각은 조밀하고 전일하였으므로 침범할 수 없었다.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병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는 떨어졌으며, 또 새로운 계책은 없다. 적을 잡을 때는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나서 육손은 먼저 유비의 한 진영을 공격했지만 불리했다.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헛되이 병력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할 방법을 알고 있다.

육손은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화공으로 격파시키도록 명령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께 공격해 효정에 주둔하고 있던 장남, 풍습 및 호왕(胡王) 사마가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유비의 장수 두로유녕 등은 달아날 길이 없자 투항을 요청했다.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포진시켰다.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 곳으로 육박해오자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었으며, 죽은 자는 수만 명이 되었다. 유비는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역참의 관리가 직접 남아있는 물건을 지고 군악기나 개(槪)를 길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적병의 추격을 끊었다. 유비는 겨우 백제성으로 들어갔다. 그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 번에 거의 손실됐고, 병사들의 시신은 장강을 떠다녔다. 유비는 매우 부끄럽고 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육손에게 좌절과 모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가?

<조운전>에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에 따르면 조운을 남겨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유비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이 병사들을 이끌고 영안에 도착했는데 오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손환은 이후에 육손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나는 사실 구원받지 못한 것을 원망했었습니다. 대국이 결정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당신의 조처에는 방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비를 격파시킨 계책은 대부분 육손에게서 나왔다. 장수들은 그를 존경하여 복종했다. 손권은 이러한 상황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애초에 장수들이 지휘와 약속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소?
육손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들은 모두 국가가 대사를 이루는데 함께 할 사람들입니다. 신은 비록 재능이 낮지만 국가의 대사를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손권은 크게 웃고,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육손을 보국장군으로 봉하고, 형주목을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즉시 강릉후로 바꿔 봉했다.

또 유비가 백제성에 머물러 있자, 서성, 반장, 송겸 등은 각각 다투어 표를 올려서 유비를 반드시 붙잡을 수 있다며 다시 공격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에 대해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주연낙통과 의견을 같이하며, 조비가 대군을 집결하여 겉으로는 우리 나라를 도와 유비를 토벌하려 하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이 있으므로 결정이 되면 즉시 군대를 돌릴 것이라고 보았다. 오래지 않아, 위나라 군대는 과연 출동했고, 오나라는 삼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유비 측에서도 강주에서 영안으로 조운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고 있는 중이었고 백제성(영안)은 유비가 머물면서 상당한 요새가 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유비를 토벌하려고 해도 성과를 내기 힘들었을 것이고, 위나라에게서 뒷치기까지 당했다면 큰일났을테니 결과적으로 육손, 주연, 낙통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오록》에 따르면 유비는 위나라 군대가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그러자 육손은 답했다.
당신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만 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다.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오나라 전역에 위군의 침공에 만반의 준비를 하게 한 결과, 위군은 별 소득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오군 장수들이 어디에서 위군과 교전한 기록이 남겨진 반면, 이 시기 육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주연, 서성, 반장, 한당, 송겸, 낙통 등 이릉에서도 참전한 인물들도 이 시기에 싸운 기록이 다 온전히 있다. 유비가 패하고 나서, 편지로 한번 떠보자 이에 육손이 답장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육손은 이 시기에 백제성에서 군사를 추스리면서 오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을 유비를 견제하고 있었을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편지에 양국의 화평을 언급하는 것이나 실제로 손권측에서 먼저 이릉대전 이후 백제성에 머물던 유비측에 화해하자고 했다는 기록을 보건대 육손이 이곳의 책임자로서 양측의 화해를 주선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2.5. 외교와 내정

223년, 유비가 병사하고 아들 유선이 즉위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대로 권력의 정점에 서게되고 그동안 제갈량이 지향해왔던 정책대로 오와 촉은 다시 화친하여 동맹을 맺었다. 당시 손권은 육손을 통해 제갈량에게 오측의 외교적 활동의 의도들을 설명하게 했다. 또한 손권의 인새를 따로 새겨 육손에게 맡기고, 유선이나 제갈량에게 가는 편지와 공문서들은 육손의 관소를 반드시 거치게 함으로써, 합당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곧바로 개선한 뒤 봉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오주전>에 따르면 226년 봄, 손권은 오랜 전쟁으로 민중이 피폐해 경지가 방치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쉬도록 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때, 육손은 각지의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농지를 개간하여 확대하도록 표를 올려 명령하도록 했다. 손권은 그 의견을 칭찬하고 스스로도 실천하도록 처리하였다.

<오주전>에 따르면 226년 겨울 10월, 육손이 상소를 올려 진술하면서 은덕을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징용을 멈출 것을 권유했다. 손권은 육손의 말에 일일이 반박하였지만,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령 조문을 잘 베끼도록 하고, 낭중 저봉에게 이것을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삭제하거나 덧붙이도록 했다.

2.6. 석정 전투

228년, 손권은 파양태수 주방으로 하여금 위의 대사마 조휴를 속이도록 했다. 조휴가 주방의 거짓 항복 계책에 속아 환현으로 진입하자, 손권은 육손에게 황월을 주며 그를 대도독으로 임명해 조휴를 맞아 공격하도록 했다. 조휴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태를 알아차렸지만, 그에게 속은 일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신의 병마가 정예이면서 머릿 수가 많기도 하니 육손과 교전하기로 했다. 육손 자신은 중앙의 군대를 지휘하고, 주환전종을 좌우익으로 삼아 세 갈래 길로 함께 나아가 조휴의 복병과 과감하게 부딪혔다. 결국 조휴는 패하였고 오군은 달아나는 조휴의 병사들을 협석까지 추격했다. 이 싸움에서 오군이 죽이거나 포획한 위군은 만여 명이며, 소와 말, 노새와 나귀가 끄는 수레 1만 대를 얻었고, 조휴 군대의 물자나 기계를 거의 빼앗았다. 조휴는 돌아간 후,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

육손이 군대를 정돈하여 무창을 지날 때, 손권은 주위의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자신의 우산 덮개로 육손을 가리고 궁궐문을 드나들도록 했으며, 자신이 사용하는 상등의 진귀한 물품들을 하사하니 당시 육손과 견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 육손은 서릉으로 돌아왔다.

2.7. 건업에서

229년에는 손권이 제위에 오르면서 육손을 상대장군과 우도호로 임명한다. 229년 9월, 손권은 동쪽의 건업으로 천도하면서 태자, 황자, 상서 등은 무창에 남도록 했는데, 육손을 불러 태자 손등을 보좌하도록 하고, 동시에 형주나 예장 등 세 군의 일을 관장하며 군사나 국사를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당시 건창후 손려가 전당 앞에 투압란을 만들어 매우 정교하게 설치했다. 육손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마땅히 경전을 두루 살펴보고 스스로 새로움을 더하도록 힘써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런 놀이를 하십니까?
손려는 즉시 그것을 부수고 철거했다.

손권이 공자들 중에서 가장 친해하는 야성교위 손송이 병사들을 놀리며 훈련시키지 않았다. 육손은 이 일에 대해서 그의 수하 관리들의 머리를 깎는 형벌에 처했다. 또 남양의 사경유이의 형벌을 우선하고 예절을 뒤에 한다는 견해를 칭찬하자, 육손은 사경을 질책하며 예절이 형벌보다 앞선 지 매우 오래되었다고 말했다. 육손은 비록 몸은 궁궐 밖에 있었을지라도 마음만은 국사에 있었다. 그는 현재의 법이 너무 엄하고 상세하여 평민들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하며 가벼운 형벌의 경우에는 한고조진평의 경우처럼 조그만한 과실은 용서해주고 다시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줘야한다고 상소를 올려 당시의 일에 관해 진술했다.

<전종전>에 따르면 손권이 주애와 이주를 포위하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전종에게 물었다. 전종은 이렇게 말했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역은 바다가 장애물이 되어 그 사이를 끊어놓고, 물과 풍토에는 독기가 있는데, 병사들과 백성들이 그곳을 드나들면 반드시 질병을 낳게 되고 서로 전염시켜, 우리가 얻는 것이 얼마나 많을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손권은 한쪽의 부대를 파견하여 이주와 주애를 취하려고 하면서 모두 육손에게 자문을 구했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臣)이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은 유리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 리를 가서 땅을 탈취하여도 풍파는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고, 백성들은 수토(水土)가 바뀌어 반드시 질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손권은 이주를 정벌하러 갔지만, 과연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충하지는 못했다.

<전종전>에 따르면 군대가 출동한 지 1년이 지나자, 병사들 가운데 질병 때문에 죽은 자가 10분의 8,9는 되었다. 손권은 매우 후회했다. 이후에 그는 전종과 이 일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전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때 신하들 가운데 간언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신은 그들이 충성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33년, 공손연이 맹약을 위반하자, 손권은 가서 정벌하려고 했다.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대한 적은 우리 경내에 있고, 변방 지역에 있는 자들은 아직 귀의하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배를 타고 원정한다면 반드시 적에게 엿볼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며, 만일 통일 대업을 완성할 수 있다면, 공손연은 토벌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복종할 것입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2.8. 4차 합비 공방전

<오주전>에 따르면 234년 여름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 등을 파견해 강하, 면구에 주둔하도록 하고, 손소장승 등에게는 광릉, 회양으로 진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대군을 인솔하여 합비 신성을 포위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갈량, 손권과의 연계가 이루어져 촉의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나서고 사마의와 대치한다.

<전예전>에 따르면 정동장군 만총이 제군을 이끌고 이를 구원하려 했다. 전예가 말했다,
적이 모든 부대로 대거 출군한 것은 대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공성하도록 내버려두어 그 예기를 꺾어야 마땅하고 그들과 창끝으로 싸워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성이 함락되지 않아 적군은 필시 피로하고 나태해질 것이니 연후에 적을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만약 적이 우리의 그런 계책을 알아챈다면 필시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전예가 즉시 이런 의견을 상소하자 조예가 이에 따랐고 때마침 적이 도주하였다.

<명제기>에 따르면 234년 6월, 정동장군 만총이 군대를 인솔하여 나아가 이들을 방어했다. 만총은 신성의 수비를 철거하고 적군을 수춘까지 유인하려 했는데, 조예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령 손권이 신성으로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니 수비를 굳게 하면 내가 장차 직접 가서 그들을 정벌할 것이지만, 내가 도착할 때면 손권은 아마도 도주했을 것이오!

<만총전>에 따르면 손권은 직접 인솔하는 병력이 10만 명이라고 부르며 합비의 신성에 도착했다. 만총은 급히 달려가서 수십 명의 장사를 소집하여 소나무를 베어 거(炬)를 만들고, 삼씨 기름을 흐르게 하여 바람 방향에 실어 불을 놓아서 성을 공격하는 적의 무기를 불태웠으며, 화살을 쏴 손권의 조카 손태를 죽였다. 그 결과 적군이 물러났다.

<명제기>에 따르면 234년 가을 7월 19일, 조예는 직접 임금이 타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정벌하러 갔다. 손권은 신성을 공격했지만, 장군 장영 등이 성을 지키며 힘을 다해서 싸워 막았다. 조예의 군대는 합비성으로부터 거의 수백 리쯤 떨어져 있었으며, 손권은 도주하고 육의(육손)와 손소 등도 퇴각하였다.

2.9. 형주에서 보여준 지략

236년[10], 손권은 북쪽을 정벌하려고 육손과 제갈근에게 양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육손은 신임하는 한편을 파견하여 손권에게로 가서 전쟁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그런데 한편은 돌아오는 길에 면중에서 적을 만나 체포되었다. 제갈근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웠으므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상(손권)은 이미 돌아갔고, 적군은 한편을 붙잡아 우리의 실정을 전부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강물이 말랐으니 응당 급히 떠나야만 합니다.
육손은 이 편지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사람들을 재촉하여 순무와 콩을 심도록 하였으며 장수들과 평상시처럼 바둑을 두고 활쏘기 놀이를 했다. 제갈근이 말했다.
백언(육손)은 지략이 많으니,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직접 와서 육손을 만났다. 육손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미 요충지를 지키고 있고, 우리 병사들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병사들을 안정시키고 다양하게 변하는 계책을 편후에 물러나야 합니다. 지금 곧바로 후퇴함을 나타낸다면, 적군은 당연히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가까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은밀히 제갈근과 계획을 세워, 제갈근은 배를 감독하게 하고, 육손은 병마를 타고 양양성으로 향하였다. 적들은 본래 육손을 꺼렸으므로 황급히 성으로 되돌아갔다. 제갈근은 배를 이끌고 나오고, 육손은 천천히 대오를 정돈하면서 세력을 과장되게 나타내고 배를 따라 걸었으므로 적군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대군이 백위에 도착하자, 육손은 사냥하러 간다고 말하고서 은밀히 장군 주준(周峻)과 장량(張梁) 등을 파견해 강하군의 신시, 안육, 석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석양의 시장이 한창 시끄러울 때, 주준 등이 엄습해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버리고 성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성문이 닫혀 있자, 적군은 직접 자기 백성들을 죽인 연후에 성문을 열었다. 오나라 군대가 머리를 베거나 생포한 자는 모두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생포된 자들은 모두 구호를 받았으며, 사병들로 하여금 침범하거나 속이지 못하도록 했다. 가족들을 데리고 투항해온 자들에게는 사람을 시켜 다방면으로 돌보도록 했다. 만일 처자식을 잃었다면, 즉시 옷과 식량을 공급하여 두텁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는데, 간혹 감동하고 앙모하여 서로 손을 잡고 되돌아오는 자도 있었다. 이웃 지역의 백성들도 귀의했는데, 강하공조 조탁, 익양비장 배생과 이민족 왕 매이 등은 모두 수하의 무리들을 인솔하여 육손에게 와서 귀의했다. 육손은 재물과 비단을 기울여 이들을 돌아보고 보살폈다.

또 위나라 강하태수 녹식은 병마를 관리하는 권한을 쥐고 항상 오나라의 변방 지역을 소란스럽게 하면서, 위나라 노장 문빙의 아들 문휴와 오랜 기간 화합하지 못했다. 육손은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자, 즉시 녹석에게 거짓으로 회신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과 문휴가 오랫동안 불화로 틈이 벌어져 있으며 귀의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비밀리에 당신에게서 온 편지를 조정에 바치고 표를 올려 인마를 모아 영접하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몰래 신속하게 준비를 끝내고 다시 귀의할 시간을 알려 주십시오.
육손은 편지를 변방 지역에 놓도록 했다. 녹식의 병사가 편지를 주워 녹식에게 보여주었다. 녹식은 두려웠으므로 직접 처자식을 호송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녹식의 관리와 병사들은 그에게 귀의하지 않았으므로 면직되었다.

2.10. 손권과의 말년

<오주전>에 따르면 236년 겨울 10월, 파양의 도적 팽단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주전>에 따르면 237년 봄 1월, 호종고옹이 효와 충은 병행할 수 없다고 해서 손권은 부모가 죽었을 때 근무지를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든다. 그런데 이후 맹종은 모친상을 당해 달려나가 상을 치른 후 스스로 무창에 돌아와 감옥에 갇혀 형을 받기를 청했는데, 육손이 평소 그의 행동에 대해 서술하고 부탁하자 손권도 결국 그의 직위를 한 단계 강등만 시키는 선에 끝내 앞으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오주전>에 따르면 237년 2월, 육손이 팽단 등을 토벌하여 그 해에 모두 격파시켰다.

237년, 중랑장 주지(周祗)가 파양에서 병사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손권은 이 일을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은, 이 군의 백성들은 쉽게 동요하고 안정시키기 어려우므로, 소집에 응하도록 할 수 없다면 아마도 도적으로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지는 병사를 모집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 군의 백성 오거 등은 과연 도적이 되어 주지를 살해하고 여러 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예장군과 여릉군의 옛날부터 있던 사악한 백성들은 함께 오거에게 호응하여 도적이 되었다. 육손은 이 소식을 들은 즉시 토벌에 나서 격파시켰다. 오거 등은 서로 이어서 항복했다. 육손은 정예 병사 8천여 명을 얻었고, 세 군을 평정시켰다.

<진무전>에 따르면 파양군의 백성 오거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성곽을 공격해 함락시키니, 속현들이 요동하니, 진표가 바로 경계를 건너가 토벌하니, 오거는 격파되어 패배하였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육손이 진표를 편장군에 배수하고, 봉작으로 올려 도향후로 하며, 북쪽 장갱에 주둔하였다.

<오주전>에 따르면 당초, 손권은 교사 여일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육손전>에 따르면 당시 중서전교로 있던 여일이 요직을 훔쳐 차지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위세와 복을 마음대로 만들었다. 육손은 태상 반준과 함께 마음 속으로 걱정하고 이에 관한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후에 손권이 여일을 주살하자 깊이 자책했다.

<보즐전>에 따르면 후에 중서 여일이 문서를 감사하게 되었는데, 보즐이 탄핵한 자가 많았다. 보즐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승상 고옹, 상대장군 육손, 태상 반준은 심장과 넓적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의 신하들입니다. 이 세 명의 신하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을 뿐, 어찌 감히 독자적인 세력으로 위협하여 하늘을 저버리겠습니까?
이로 미루어보아 이미 이 시점부터 손권은 육손 등 신하들을 꽤 경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주전>에 따르면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참살 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그때 사연사굉 등이 각각 마땅히 해야 할 일에 관해 진술하여 유익한 사업을 일으켜 바꿔 보려고 했다. 손권은 이 일을 육손에게 심의하도록 했다. 육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강성함은 백성들의 힘에서 나오고, 재력도 백성들에게서 나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을 안녕되게 하고 구제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다시 생각 하십시오.

<오주전>에 따르면 241년 가을 8월, 육손이 주에 성을 쌓았다.

2.11. 최후

2.11.1. 이궁지쟁

244년, 육손은 고옹을 대신하여 승상으로 임명됐다. 임명하는 조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그대는 천부적인 자질과 총명함이 있어 미덕을 빛냈으며, 상장(上將)으로 임명되어 국가를 보좌하고 재난을 제거했다. 현재 조정 안팎의 임무는 사실상 그대가 겸하고 있다. 형주목, 우도호, 무창의 일을 겸임하던 것은 옛날과 같이 하라.

하지만 이 무렵 손권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손화파와 손패파가 대립하며 싸우는 이궁지쟁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전종이 자신의 아들 전기에게 손패를 따르게 하였는데, 육손이 이를 알고는 전종을 나무랐다. 전씨 일가가 그의 말을 무시하자 육손은 다시 한 번 편지를 써서 전종에게 당신의 가정에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전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둘 사이가 틀어졌다.[11]

육손은 직접적으로 후계자 문제에 끼어들었고 이후 육손의 일가인 육윤이 손권과 양축의 대화를 유출시키면서 손권과 육손은 돌이킬 수 없이 틀어지고야 만다. 육손은 몸을 사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적자와 서자의 구분에 대해 논하면서 손화를 확실하게 태자로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손권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육손의 인척인 고담, 고승, 요신이 모두 손화파니 그러는 거 아니냐며 육손을 파면하였다.

2.11.2. 양축의 모함

그렇게 허무하게 쫓겨난 육손은 지방으로 갔는데, 이 때 여러 차례 육손에게 소식을 알리던 태자태부 오찬이 손패와 양축(竺) 등의 참언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옥사하였다. 게다가 손패파의 모함 잘 하기로 유명한 양축오찬을 참언한 것에 이어서 20가지 죄목을 대가며 육손을 모함한다.

결국 오찬과 연락을 주고받던 육손에게도 손권에 의해 추궁의 칼날이 들이밀어지게 된다. 결국 손권은 궁궐의 사자를 계속 파견하며 편지를 보내는 등 육손을 질책하였고[12] 이에 육손은 분노하고 원통해하다가 결국 홧병으로 사망했다. 이 해가 245년으로, 그의 나이 62세였고, 집안에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13]

2.12. 사후

육손의 장자 육연은 요절하여, 차남 육항이 후사를 이었다. 육손이 245년에 죽었을 때 그는 20세였으며, 건무교위로 임명되어 육손의 병사 5천 명을 인솔했다. 그는 부친의 영구를 동쪽으로 돌려보내면서 도성으로 가서 손권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정작 손권은 이 당시 양축이 육손을 고발할 때 쓴 20가지 죄목을 가지고 육항을 힐책하며 빈객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육항이 막힘없이 모든 것에 조리있게 대답하니 손권은 오히려 감탄하고 의심을 풀었다.

251년, 육항은 도성에 도착하여 질병을 치료했다. 질병에 차도가 있어 돌아가려고 하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전에 참언을 듣고 그것을 믿어 그대의 부친과의 군신 간의 대의가 돈독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그대를 등졌었소. 앞뒤로 하여 당신을 힐문했던 글은 전부 불태워 없애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하시오.

손휴가 제위에 있을 때 육손을 추증하여 시호를 소후(昭侯)라고 했다.

육항의 자식인 육기육조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오 멸망 후에도 서진을 섬겨 중용되었으나, 팔왕의 난에서 그의 명성을 질투하는 사람들의 참언에 의해 모반 혐의를 받고 일족 전원이 처형되어 육손의 자손은 단절되었다. 다행히 육손의 동생 육모의 가계는 존속되었고 자손은 동진의 중신으로까지 승진하였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의 행보는 전반기, 후반기 활약이 잘린 것을 빼고는 정사와 대부분 비슷하다. 단 정사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연의에서 육손은 신장 8척, 얼굴은 아름답고 백옥과 같다며 체구가 당당한 미남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외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냥 나관중이 주유와 비슷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뿐이다.

연의에서는 이릉대전을 다룰 때 촉나라 군대가 파죽지세로 목전에 다다르자 감택이 손권에게 "육손에게 부족한 건 경력뿐입니다."[14] 라며 육손을 추천하고, 이전에 여몽도 완벽하게 감택과 동일한 평가를 했던 걸 기억한 손권의 나라를 건 도박으로 말단 서생에서 총대장이라는 파격적인 기용을 하게 된다. 물론 무명에 가까웠던 그의 기용에 대해 장소, 고옹 등 대부분의 대신이 나라를 멸국으로 몰아갈 일이 있냐며 반대하지만, 결국 마음을 굳혔던 손권이 밀어붙여 우여곡절 끝에 기용된다.[15] 실제 정사에서는 유비가 오 침공을 시작하자 육손이 가장 먼저 선봉에 투입되었지만, 이렇게 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나오지 않고 육손을 이릉대전 후반에서야 히든카드처럼 등장시킨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불안감을 반영하듯 현장에서조차 무시당하고 특히 아직은 적절한 때가 아니라며 작전의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보이자 한당을 필두로 이릉대전에서 지휘관이 된 육손이 어리다고 깔보고 반목한다. 하지만 시간을 끄는 작전이 성공해 유비군의 행군이 길어지게 만들어 수비를 풀어헤친 뒤 단번에 몰아쳐 유비군을 전부 불태워 버리자, 그제야 한당과 장수들은 육손의 계책에 감복하고 잘못을 뉘우친다. [16]

84회에서 육손은 이릉대전으로 유비를 깨부수고 패퇴하는 유비를 추격하는 와중에 제갈량이 만든 팔진도에 갇혀서 꼼짝 못 하는 상황에 놓였지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 덕분에 간신히 빠져나간다. 위기에서 탈출한 이후에 육손은 추격을 포기하고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겠다는 방침으로 바꾼다.[17] 이러한 이야기를 넣은 의도는 죽는 거로 쓰려면 쓸 수도 있었지만 이미 주연과 반장이 실제 역사와는 달리 조운, 관흥의 복수를 받고 죽었기에 위나라의 침공을 막을 수 없으므로 육손이 여전히 살아 있어야 그 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고, 그래도 육손은 제갈량보다 한 수 아래라는 설정을 넣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사마의가 다섯 군대를 일으켜서 촉나라를 침공할 계책을 내는데, 이 다섯 군대 중의 한 갈래가 손오군이었고, 사신을 보내 촉나라의 영토 절반을 주겠으니 촉나라 침공에 동조해달라고 제안한다. 손권이 장소, 고옹 등에게 조언을 구하자 '육손에게 고견이 많으니 그의 조언을 구하십시오'라는 답변을 들었고, 팔진도에서 혼쭐이 난 육손은 '위, 오에 제갈량을 당해낼 자가 없으니 적당히 간이나 보다가 다른 네 갈래의 군사가 이긴다면 호응해서 같이 공격하고 아니라면 다시 의논합시다'라 조언한다. 결과적으로 다른 네 갈래의 군사들은 제갈량의 계책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하였고, 손권은 '다행히 육손의 조언 덕분에 촉한과 또 원수를 지는 사태를 피했다'고 말한다.

능력이 좀 오락가락하는 편으로 유비, 아니 촉나라의 총력을 열세인 입장에서 박살낸건 두말할 것도 없고 제갈량의 라이벌 사마의와는 전투에서 이기는(...) 흠좀무한 모습을 보이는데, 정작 그 뒤의 듣보잡 위군 장수에게 자신의 전략이 들통나는 어설픔도 보여준다.

연의에서는 이궁지쟁을 언급하지 않아 만년의 손권과의 불화와 그로 인한 죽음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냥 곱게 죽은 채로 아들 육항이 이어서 등장하는 걸로 끝. 한편으로는 육손의 오나라 조정에서의 정치인적인 측면이 연의에서 통째로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연의의 내용을 주로 다루는 2차 매체들에서 육손의 이미지는 '손권의 측근이자 영웅이며 파당을 조직한 정치인'으로서의 모습보다는 '명석한 신세대 참모'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4. 기타

삼국지연의에서 백면서생처럼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릉대전 때 이미 38세의 중년이었다.[18] 다만 정사를 봐도 휘하 장수들에게 애송이 취급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물론 그것은 어려서라기보다는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유는 육손보다도 더 젊어서 손권군을 지휘했는데, 육손보다 군무 경험과 세력 내의 입지[19]면에서 훨씬 유리했기에 잡음 없이 군을 지휘했던 것이다.

육손은 장인 손책과 8살 차이로, 손씨와는 꽤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였을 것이다. 어차피 정략 결혼 했을것이라 상관 없겠지만....

육손은 여몽과 더불어 관우를 제거했고, 결과적으로 장비유비까지 죽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상 도원종언의 진주인공. 특히 이릉대전에서 그가 촉한에 입힌 피해는 매우 컸는데 촉한의 젊은 인재들이 대거 이릉대전에서 죽어버렸고 제갈량은 북벌 당시 인재난으로 고생했으며 이는 마속의 기용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실패로 이어졌다.

육손의 도독 후임이라 할 수 있는 주연의 무덤에서 승상의 모습을 그려넣은 칠기가 나왔는데, 이게 육손의 모습을 묘사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제갈량과 더불어 유이하게 신하의 신분으로 단독 열전이 있는 인물이다. 보통 창작물에서 비중이 가장 높은 주유가 정사에서는 노숙, 여몽이랑 세트취급이고, 반대로 주유의 하위호환 취급인 육손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 물론 창작물에서도 육손이 지략과 카리스마가 주유에 약간 못 미칠 뿐, 침착함, 무력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면에서는 주유보다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는 케이스도 많다.

육손은 손권이 황제가 될 무렵까지 육의라는 이름을 썼다가 육손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육손의 이름인 '遜'자도 사실상 '孫'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개명에는 강동 호족 육씨와 손씨 오나라의 연결을 상징하는 손권과 육손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손권과 육손 당대엔 말년에 서로가 추구하는 부분에서 삐걱거려 파탄이 나긴 했으나, 결국 육손의 아들 육항이나 그 자손들이 대체적으로 손오에 충성을 다했다는 점에선 마냥 두 사람의 안배가 실패였다고 할 수는 없는 편이다.

4.1. 이궁지쟁에서의 책임소재 문제

그의 마지막은 초라했는데 얼핏보면 토사구팽으로 여겨질 수 있다. 손책에게 격파된 이후 기울었지만 본디 오군 육씨는 강동의 4대 명문가 중 하나로 손씨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세력과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손권은 손책에게 몰락한 육씨를 다시 살려 자신의 측근으로 두어 친위세력으로 삼았지만 육씨의 수장이자 군에서는 대장군, 조정에서는 승상이었던 육손이 자신의 후계자에게 끼칠 막대한 영향력을 손권은 경계했던 것이다. 비슷한 의미로 말년의 손권장소와 같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크지만 지역 기반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문관 중신들을 홀대했다.[20]

그래도 손권이 오군 육씨와 아예 척을 질 생각은 아니었다. 육항에게 육손을 비난했던 편지를 없애라고 지시한 것도 그 예 훗날 그 편지들이 두고두고 약점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육항이 신하들을 마구 죽인 손호 시절에도 정치적으로 숙청되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는데, 만약 저 편지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손호가 어떻게든 핑계삼아 제거해 버렸을 수도 있다. 즉 저 말은 단순히 책임 회피성 찌질거림이 아니라 손권 나름대로 죽은 육손과 자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육항에게 화해를 구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육손은 충신 포지션이 아니라 가족 내지 강력한 동업자 포지션이었다.[21] 육손이 한 때 명문 호족 출신 + 손책의 사위라는 위치가 그의 능력과 더불어 오나라의 2인자 위치에 올렸지만 만약 군주가 이방원 같은 자라면 몰락이 확정인 위치였다.[22] 육손이 말년에 가지고 있는 권위는 그만큼 대단하고 위험해서 후계자가 육손을 다루기에는 육손이 너무 오버스펙이라는 것. 이런 문제 때문에 손권이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육손은 강동의 명문 호족 출신이라는 타이틀 이외에도 손책의 부마라는 지위까지 갖추고 있는 완전체인 만큼 손권 입장에서 후계자가 군주가 되기 전에 육손이 은퇴를 하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인 건 맞다. 문제는 육손이 수상으로써 전대의 승상인 고옹처럼 입을 다물었으면 모르되 태자의 뒷배로 행세하면서 손권이 키워주던 전씨 가문을 위협하는 등 세력 싸움을 했고 기어이는 손권 주위에서 시종하던 육운에게 손권의 비밀을 전해듣는 등 손권의 주변에서 손권이 하는 일 자체를 보고 받으면서 선을 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냥 넘어가기 쉬운 부분인데 육운이 육손에게 손권의 비밀 독대를 전했다는 거 자체가 오나라 조정에 있는 육씨들이 손권을 섬기기 보단 가문의 수장 육손의 행동을 더 중시했다는 것이다. 호족이나 측근세력이 선을 넘는걸 좌시하지 않았던 손권에게는 이 부분에서 육손이 먼저 선을 넘었기에 그냥 넘길수 없는 행위했다. 결국 손권은 육손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일로 손권에게 측근으로써 부적합 판정을 받고 폐기처분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실 육손의 임관부터 따지면 손권과 육손, 이 두 사람은 말년에 틀어져서 그렇지 오히려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서로 죽이 맞는 부분이 더 많았다. 서로 거의 동년배기도 했고 손권 입장에서는 육손이 자기한테 충성하겠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되는 부분이었다. 당초 손권은 형 손책의 측근인 주유나 장소의 판단에 따라서 형 손책이 내정한 후계자 자리에서 쫒겨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장소는 대놓고 손권의 동생 손익을 후계자로 밀었으며, 만약 주유가 손권에게 충성하지 않고 장소의 의견을 들었으면 손권은 손책이 내정한 후계자 자리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손권이 굳이 유비를 기용하면서 주유를 견제한 것이 아니고 장소에게 적벽의 일로 지속적으로 면박을 준게 아니다. 분명 두 사람은 유능했고 손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세력이 손권 본인보다 더 커지는 것은 경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손책의 신하로써 손책의 후계를 마음대로 정할 위치에 있던 주유와 장소를 손권이 견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주유야 처음부터 손권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손권의 권위를 세웠고, 이후 주유에 대해서 비방을 일삼는 유비를 중용한 손권을 두고 서천 정벌을 내세우면서도 단독 군벌이 웅거하기 쉬운 익주 땅에 손권의 친척 손유를 두고 자신은 다시 돌아와 손권의 신하로써 북정을 하겠다고 나선 점이나, 손씨 가문 3대를 섬긴 오래된 가신 정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사이를 푼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권이 보여준 '견제'에 대해서 최대한 숙이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장소의 경우엔 대놓고 '지금 조정에서 사대부들이 나보다 장소 당신을 섬기는데 이게 제대로 된 게 맞느냐?'라고 손권이 불만을 터뜨릴 정도로 장소가 죽을때까지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손권이 측근이나 호족들을 중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위를 넘지 못하게 단속하는 것은 손권이 죽을때까지 신경쓰던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육손이 임관한 때는 손권이 오의 주군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두 사람 모두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 젊은이었을 때였는데, 이 당시 주변에서 어차피 손오 정권의 손씨는 얼마 못 가 망할 거라고 음모를 획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정도로 손권은 초기에 권위를 세우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그걸 알고도 자기 자신과 육씨 가문의 모든 걸 한방에 손권에게 베팅한 육손은 손권에게 큰 힘이 되었다. 육손의 초반 커리어에 손권이 괜히 육손의 유능함을 칭찬하고 띄워준 것이 아닌것이다. 비록 말년에 불화가 있었지만 인생 대부분의 기간 동안 손권에게 육손은 각별했던 신하였고, 다들 형을 보고 자신에게 충성할 때 진짜 손권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 충성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육손 역시 가문의 이해득실 다 따져보고 주판알 굴려서 손권에게 충성을 바쳐서 가문의 부흥을 이끌었으니 이 결합은 상호간 윈-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신뢰 관계가 없었다면 손권이 육손에게 오나라 조정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 자리를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손을 측근으로써 신뢰하고 승상 지위를 맡긴 손권의 신뢰는 결국 좌절되었다. 중국의 중문학자, 역사학자인 이중톈의 경우 남노당쟁 때 육손의 행위에 대해서 손권은 육손을 신뢰하지 않고 적으로 여기는 동안 육손은 손권을 신뢰했고 손오와 강동 사족이 한 식구가 됐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지적하며 육손이 너무 순진했다고 평하는데, 사실 육손 같이 전장에서나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순진하리라 믿는것이 어불성설이다. 정말 그 정도의 정치적 금치산자였다면 손권이 승상을 맡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는 손권이 육손에게 과한 기대를 한 셈이고 '오의 사성' 육손은 손오와 강동 호족이 한가족 한마음이 됐다는 푸른 꿈을 꿀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다. 손권의 기대대로였으면 애초에 손권이 알아서 정할 후계에 개입하여 조정의 파당을 짓고 손권에게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손권이 택현된 것처럼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않고 손오가 이제 막 기지개를 피려는 마당에 가장 능력있고 나이가 많았던 손등이 죽은 이상 그 다음 후계자 선택은 손권이 후계자들의 능력을 판단하고 택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거기에 손권은 이런저런 이유로 황후를 세우지 않아 나이의 서열은 있을지 몰라도 손등조차 완전한 적자라고 할 수 없는 마당이었는데 하물며 손등이 죽은 이후 능력면에선 손등을 결코 넘지 못할 손화손패에겐 더할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적서를 통한 후계자 선출을 고집했다는 부분 자체가 명백히 육손 자신의 사심이 드러나는 부분인 것이다.

당초 육손이 손화의 편을 들면서 일족과 조정신료들을 규합해 파당을 지을때도, 육손이 손권의 아들들에게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적서를 논할때도 손권은 매우 그 부분을 싫어하면서도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를 조정의 파벌로부터 떼어놓는 것으로 이 일을 덮고 육손의 파당행위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지 않으려했다. 양축에게 손패를 태자로 삼겠다고 한 부분도 애초부터 양축을 손권이 신뢰하지 않아서 양축을 죽여버렸다고 나오는 마당이라 손패파의 중심축이자 손패를 부추긴 양축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손권의 음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육운이 손권보다 가주인 육손을 중시하여 손권의 일거수일투족을 육손에게 보고하는 사건이 터졌고, 이 일로 손권은 육손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때문에 손화파에 대거 붙은 육손 본인의 친인척들을 생각해 딴 생각이 있는거 아니냐고 육손에게 힐난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손권 입장에선 육씨의 친인척들은 대체 손씨를 나라의 주인으로 남는건지 육씨의 가주를 주인으로 삼는지 되묻는 일일 수 밖에 없었다. 육손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전부터 손화파에 자신의 친인척들을 배치하면서 당파를 키워왔기에 자신의 파벌과 자신이 미는 손화를 보호하기 위해서 손권의 힐난에 숙이기 보단 아예 정면으로 부딪쳤다고 봐야 하고 이 때문에 결국 파멸을 맞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손급이나 되는 거물과 오군 육씨, 육씨의 친인척 전체가 손권을 감시하면서까지 반기를 든 이 사건은 손화가 언제든지 특정 권신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었고, 오군 육씨와 오나라의 대성호족을 뒷배로 둔 손화가 남노당쟁을 거치며 총애를 잃어 결국 폐출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주군이 저 육손을 중용한 것은 치욕을 참아내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육손전의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권이 육손을 중용한 것은 저 말 그대로 육손이 치욕을 참아내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리 해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손은 끝내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저버린 셈이다. 손권은 손책 때문에 19살부터 강동의 군주가 되었고 그 자리를 능히 감당할 재주도 있었으나 사람의 마음이 본디 나약한 것은 어쩔 수 없어 주변 신하들을 온전히 믿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과하게 정을 쏟고 완벽한 손권 자신의 사람이 되어주기를 요구했다. 대체적으로 주유, 노숙, 여몽, 주연 같은 인물들은 손권의 이런 기대에 부합하여 손권의 충신으로써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육손은 오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강동의 충신, 육씨 가문의 든든한 가주일지언정 궁극적으로 손권만의 온전한 충신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파멸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삼국지 내에서 이렇게 2인자가 내부의 거대 파벌의 수장을 겸임할 경우에 좋게 끝난 사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자명하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권 입장에서는 한때 돈독했던 육손간의 관계에 회한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생애 파트에도 나오듯이 말년의 손권은 손패파의 참언을 듣고 육손을 너무 몰아붙인거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때문에 말년에는 그 아들인 육항에게 매우 온화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5. 육손과 관련된 설화

포기(蒲圻, 현 츠비 시)의 준수(雋水)에서는, 강물이 불면 황룡이 8마리의 아들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온다. 그 때마다 강물은 막히고 홍수가 일어나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포기에 부임한 육손은 사람들 때문에 이 화를 없애겠다고 결심했다.

육손은 철로 배를 만들고 50명의 용사를 뽑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훈련시켰다. 여름에 강물이 불면 여지없이 황룡이 아들들을 데리고 준수에 파도를 일으켜왔다. 육손은 배를 타고 황룡과 아들들을 쫒아 3척의 설화검(雪花剣)을 휘둘러 자식 용의 몸통을 잘라냈다. 50명의 용사들도 칼과 창을 휘두르며 맹활약해 나머지 7마리를 물리쳤다.

황룡은 분노해 육손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육손과 용사들은 주춤하지 않고 용기있게 싸웠다. 황룡이 탈진한 것을 가늠한 육손은 황룡의 등에 올라타고 그 이마에 검을 찔러넣었다. 황룡은 상처를 입고 달아났다. 육손은 즉시 병사들에 강의 흐름을 원활하게 갖추도록 명령했고, 이후 강은 다시 홍수를 일으키지 않았다.사람들은 육손에게 감사하고 준수의 이름을 육수(陸水)로 바꿨다.
육손이 형주로 여몽 대신 부임해왔을 때, 촉은 아직 무명이였던 육손을 경계하지 않았으나, 마량만은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고 진언해 관우는 취임 축하 사절로 관평을 파견하여 육손이 어떤 인물인지 확인하러 갔다.

관평이 육손에게 와서 보면 병영 안은 지저분하고, 칼과 창에 녹이 슬고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육손은 심심한 듯 옆에 놓여있는 큰 항아리에서 개구리를 꺼내 개구리의 이마에 붉은색을 발라 방에 놓아주었다. 이마를 붉게 하고 뛰어다니는 개구리들을 보고, 병사들은 박장대소했다.

연회가 시작 되어도 붉은색을 계속 칠하던 육손이 관평에게, "당신의 아버지는 전쟁 뿐, 이런 즐거움도 모르지요. 인생 즐길 때 즐기지 않으면. 이 개구리들을 보십시오. 재미있죠?"라고 말했다. 형주에 돌아간 관평이 이 일을 관우에게 전하고, 관우는 안심했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이마가 붉은 개구리들이 있다고 한다.
육손은 14,5세 때 스승에 대해서 주먹을 쓰는 무술을 배우고 고향에서는 견줄 자가 없는 솜씨가 되었다. 그렇기에 스승조차 가볍게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육씨 가문 친족의 잔치에서 무술의 얘기가 나왔을 때 육손의 스승이 "강한 자는 얼마든지 있지만 진정한 달인이 되려면 노인이 될 때까지 수련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을 들은 육손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육손의 무술 솜씨를 묻던 스승이 "이 나이까지 무술 수업을 했지만 아직 상대의 공격을 당한 적은 없다" 라고 대답한 것을 듣고 육손은 몰래 스승의 배후로 가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스승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피하고 "교만을 없애지 않으면 더 이상은 늘지 않는다"라고 육손을 타일렀다. 육손은 부끄러워 용서를 빌었다. 이 건으로 육손은 겸손을 배우고 더욱 실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출처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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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강실록(建康實錄)에 기록되었다.[2] 위서와 촉서에는 육의로 기록되어 있지만 오서에는 시기를 불문하고 육손으로 기록되어 있다.[3] 말을 진중히 한다는 의미다. 성과 함께 잘 발음하면 육백원이라는 발음이다.[4] 어찌 보면 수명이 중요한 게 주유도 정말 대단하지만 육손만큼 장수하지 못해서 실적에서는 육손에 못 미친다.[5] 다만 육손의 경우는 아들 육항의 열전이 같이 실려있다. 제갈량의 경우는 외아들인 제갈첨의 단독 열전이 없어서 배송지가 실어놓은 주석으로 실려있다.[6] 즉, 친인척이 손책한테 죽은 것이다. 그런데 육손은 훗날 손권의 밑에 들어가고 손책의 딸과 결혼까지 한 게 아이러니다.[7] 주목할 점은 육손도 육적보다 고작 5살 많았을 뿐 이 때 나이는 성년도 되지 않은 14세였다는 점이다.[8] 참고로 위에도 써놨지만 육강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손책(과 이를 지시한 원술)이다. 원수의 딸과 결혼한 셈이다.[9] 삼국지 연의를 본 사람이면 익숙할 것인데, 바로 조조와 유비의 한중전투중에 제갈량이 쓴 전략이다.[10] <육손전>에는 236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오주전>에서는 234년의 전투만 기록되어 있다. 아마 육손전에서 오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자치통감》은 이 일을 234년의 기록으로 본다.[11] 결국 후일 손패는 손권의 실망과 노여움을 사 자결하고 손패파 주요인물 대부분이 처형당하면서 전씨 일가도 정말로 몰락했다. 전종은 그렇게 되기 전에 죽었지만 말이다.[12] 황제의 편지는 받을 때 특정한 예를 표하는 귀찮은 절차가 있다. 그런데 이걸 스팸메일마냥 난사했으니(...)[13] 여담으로, 양축은 육윤에게 역관광당해 손권에게 살해된다.[14] 연의에서는 이릉대전 당시 육손이 나이가 어리다고 묘사되는데 정사에서 그때 육손은 만 38세였고 현대라면 비교적 젊지만 당시에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여몽보다 불과 5살 어리고, 제갈량보다 2살 어릴 뿐이다. 손가의 숙장들을 제치고 지휘관이 되기에는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정사에서 그때 육손이 어렸다는 기술은 없다.[15] 정사에서는 딱히 그런 언급은 없다. 육손은 연의에서 75회에서 처음 등장했을 땐 경력없는 어린 서생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정사에서는 20여 년의 군경력을 지녔던 인물이다. 게다가 정사에서 육손은 유력 호족 오의 사성 출신이었고 손책의 사위였기 때문에 무시당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릉대전이 일어날 당시 육손의 나이는 38~39세로 30대 후반이었다. 이 정도 나이대에 유력가문 출신이면 절대로 경력이 없을 수가 없다.[16] 정사에서는 이릉대전에서 육손을 갈구던 장수들의 이름들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한당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악역이 떠맡아진 것이다.[17] 결국 예상대로 위군이 동오를 침공하려고 했지만 육손이 손을 써둔 덕분에 막을 수 있었다고 간략하게 언급된다. 정말 지나가듯 언급되는 구절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이릉 대전 이후 위군의 침공을 막아낸 건 주연과 반장의 몫이었지만 연의에서는 이 둘이 이릉에서 사망하고 그 공을 육손이 몽땅 차지한 게 된 셈이다.[18] 육손은 183년생으로 182년생인 손권보다 한 살, 181년생인 제갈량보다 두 살 어릴 뿐이다.[19] 손책과는 형제 같은 동서이자 거병 동지이니 손견의 숙장들과 교우관계가 있었을 것이다.[20] 장소는 서주에서 피난을 내려와 정착한 팽성 장씨다. 4대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오군 장씨가 아니다.[21] 같은 시대 조위조조-순욱과 비슷한 관계인 것.[22] 실제로 이방원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2인자였던 정도전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정변공신이자 외척인 민씨 4형제를 모조리 숙청하기도 했다. 물론 하륜은 살아남았지만 이 사람은 욕받이이기도 해서 말이다.[23] 조조-순욱, 조비/조예-사마의, 원소-전풍, 여포-진궁 등 전부 1인자의 숙청이나 2인자의 반란, 혹은 불화 끝에 공멸로 끝났다. 1인자-2인자 간의 사이가 성공적으로 끝난 유비-제갈량이나 손책/손권-주유의 경우에는 2인자가 세력 내부에 존재하는 파벌의 수장이 아니었으며 1인자의 친위 인사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