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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2:10:55

이성계(태종 이방원)/극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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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극중 행적
2.1.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다2.2. 정몽주를 회유하려 노력하다2.3. 낙마, 그리고 정몽주를 잃고 아들을 버리다2.4. 조선을 건국하고, 가족은 분열되다2.5. 강씨의 죽음, 비극의 서막2.6. 아들에게 소중 을 모두 빼앗기다2.7. 방원과의 투쟁을 시작하다2.8. 아들과의 마지막 싸움2.9. 모든 것을 잃은 뒤2.10. 말년, 용서와 화해로 생을 마감하다

1. 개요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인 이성계의 극중 행적을 다룬 문서.

2. 극중 행적

2.1.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다

1388년 시점 갈대밭이 우거진 어느 땅에서 중앙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신의 아들들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다수의 병사들에게 창에 찔려 움직이지 못하고 죽게 된다.[1] 아들 이방원은 이를 눈 앞에서 보았지만 막지 못하여 비통함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는 가족의 안위에 불안해했던 이방원이 꾼 악몽이었고, 그는 장맛비가 내리던 위화도에서 셋째 아들 이방의와 넷째 아들 이방간 등과 머물면서[2] 진을 치고 대기하던 중이었다. 결국 요동 땅을 유심히 바라보다 긴 고민 끝에 결국 회군을 결정하지만, 본인보다 먼저 요동 정벌군을 이탈한 최유경에 의해 그의 회군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우왕과 최영이 서경에 있다가 개경으로 빠르게 귀환하여 수비를 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시에, 왕명을 받은 병사들이 개경과 포천에 가서 그의 가족들과 사돈인 민제의 집안을 샅샅히 뒤지는 원인이 된다.

회군을 결정되었을 때라든지 개경 공성 직전에 자신이 포천으로 보낸 조영무가 귀환해서 가족이 실종되었음을 알릴 때도 인질로 잡혀있던 방우, 방과 형제나 개경에 있던 이방원, 그리고 포천 전장(田莊)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안위가 걸렸음에도 운명을 하늘에 맡기겠다고 하며[3] 단호하게 군대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방우, 방과 형제가 돌아왔을 때는 그들에게 차분하게 동생들로부터 병장기를 받으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지만, 이후 막사를 돌아보다가 재회하여 기뻐하는 아들들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동시에 속으로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는 방원을 걱정하는 등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경을 향한 공성전이 시작되고, 가별초 심복인 조영무와 조영규가 앞장서 개경 성문을 열자, 병사들이 진격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을 따라 종군한 4명의 아들들에게, "저 병사들도 누군가의 가족임에도, 회군하라는 내 명령에 목숨을 걸었으니, 그들 앞에서 날 부끄럽게 하지 말라"고 말하며 가서 싸울 것을 명령한다.

파일:(2) 개경 함락.png


개경 시가전 끝에 왕궁까지 쳐들어오고[4], 거기서 최영이 자신들의 군사들과 홀로 대치하자 직접 나서서 최영에게 이제 다 끝났다라면서 항복을 권유하고 결국 최영이 포기하고서 자신에게 '이제 그대가 왕이 되는 건가?'라고 묻자 '그거야 하늘의 뜻'이라면서 조영규와 조영무에게 최영 장군을 모시라고 지시한 뒤 최영이 끌려나가면서 결국 왕궁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5]
서기 1388년, 우왕 14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함락시켰다. 고려의 운명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격변을 주도한 이성계의 가문은 그들의 운명을 걸고 난세의 격랑 속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 위화도 회군 후 살아남은 전주 이씨 가문

두 부인과 나머지 자식들이 무사히 개경에 온 걸 확인하자 기뻐한다. 이 때 가족들을 챙겨온 방원을 보자 다른 아들들이 탈출해 왔을 때도 하지 않았던 포옹을 해줄 정도로 반가워 한다. 이후 방원도 합류시키자는 다른 아들들 말에 방원은 손에 피 묻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중에 방원과 독대 시에도 자신 같은 길을 걷지 않기 바란다고 한다.

파일:(2) 형제 갈등-crop-tile.png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방과와 방간이 계속 싸우다가 서로의 칼을 빼들고 싸우려고 하자 대노하면서 혼찌검을 내고[6], 감히 형제를 죽이려는 것이냐며 엄하게 꾸짖고는 이 시간 이후로 자신의 핏줄에게 칼을 뽑는 녀석은 내 칼에 먼저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7] 정확히 10년 후에 무슨 이 벌어지는 지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8]

우왕이 자신이 군영에 있는 사이 자기 집을 공격했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서 우왕에 대한 거취 논의를 회군파 장수들과 하고 결국 우왕을 폐위시켜버린다. 이후 창왕을 추대하고 왕위에 옹립한 후 나름 미소를 짓는다.

그 뒤, 아들 이방원과 따로 술자리를 가지며 그 덕분에 가족들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며 아들을 칭찬한다. 그런데 방원이 서경에서 천명미상(天命靡常, 하늘의 명에는 정해진 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란 글귀를 보았다는 식으로 운을 떼면서 이성계에게 "어디까지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새 왕조를 세울 생각이신 겁니까?"고 묻자, "그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면, 하늘의 뜻이라면 그럴 것이다."라는 답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이방원은 그러면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분싸움에 얽매이지 말고 단칼에 승부하라고 말하자 뭐가 그리 급하냐고 물었고, 왜구가 백성을 유린하고 있고, 권문세족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기에 그렇다고 답하였으나, 그것이 그의 진정한 답변이 아님을 눈치챈 이성계가 다시 묻자, 이방원은 이성계가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그렇다고 답하며, 과거 동북면을 떠나 개경으로 처음 왔을 때, 역모죄로 남성들은 모두 죽고 도성에 버려졌으며, 여성들은 울부짖으며 노비로 끌려간 한 가문이 망하는 모습을 본 뒤로 두려움이 새겨졌다 말하며, 자신도 가문의 일을 돕게 해달라고 말하나 이성계는 그런 이방원의 두려움을 이해해주면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이 가는 길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길[9]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방원이 그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으며[10] 그 만의 행복을 찾기를 원한다고 말하였고, 방원은 별 수 없이 그리하겠다고 답한다.

며칠 후, 상왕으로 유배된 우왕이 사주한 김저와 정득후가 연회 중인 자택에 침입해 암살 위협을 겪는다. 역전의 무장답게 50세를 넘긴 나이에 단도를 든 자객을 맨 손으로 손쉽게 때려잡았으나 무예에 서툰 방원이 다른 한명과 싸우다 칼에 찔리는 부상을 당한다.[11]

김저 사건을 계기로 방원을 점점 더 자신 가문을 대표할 아들로써 신뢰하게 된다. 한편 붙잡힌 김저가 심문당한 끝에 암살 배후를 우왕이라고 불면서 우왕에 대한 거취 논의를 하기 위해 정몽주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을 자신의 자택에 초청해서 회의를 하는데, 여기서 자기 가문을 대표하는 아들로써 이방원을 앉힌다. 다만 뭔가 획기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고, 총애하는 아들을 챙겨줄 겸 우두머리인 이성계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다소 과격한 의견들을 대신 해주는 역할로 그를 앉힌 것으로, 그래서인지 이방원이 회의에서 창왕 폐위론을 꺼내 들자 그만하라면서 이방원을 진정시키지만, 나중에 이방원과 둘이서 대화를 나눌 때는 자기 마음과 맞는 얘기를 해줘서 흡족했다며 이방원을 칭찬한다.

그럼에도 명분을 찾아야 한다면서 이방원이 명분을 찾아주기를 기대했고, 늦은 밤에 이방원이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아들과 손자가 아닌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며 폐가입진론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설득하자, 정도전을 불러서 이방원이 내세운 명분을 말해주자 정도전도 동의하면서 새로 즉위시킬 왕으로 사돈댁 식구인 정창군 왕요를 낙점한다.[12]

창왕 폐위에 대한 교서를 받기 위해 자기 세력들을 이끌고 정비 안씨의 처소로 찾아가는데, 가별초로 대비전을 온통 둘러싸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폐위 교서를 내려줄 것을 종용한다. 정비 안씨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들을 노려보아도 일체 미동 없이 버텨 앉아 압박하며 결국 교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공양왕 즉위 후 자신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 중 견디다 못한 정몽주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를 따라가 위로하며 앞으로는 정몽주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부질없는 약속이라는 말만 듣게 된다.

그 뒤 공양왕이 즉위한 직후 열린 첫 조회 때는 밀직부사와 우부대언으로 각각 임명되어 조정에 출사한 방과와 방원과 함께 일찍 나와서 그들에게 용상을 보여주며 얘기하던 중[13] 자신들 다음으로 온 정몽주와 이방원 간에 벌어진 임금을 향한 충성에 대한 논쟁을 보게 되고, 자신은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된 사이 공양왕이 조정의 두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관직인 판문하부사와 영삼사사로 이색과 변안열이 각각 임명한 것을 알게 되자 겉으로 티는 내지 않으나 크게 동요한다. 그로 인해 정전이 시끄러워진 가운데 공양왕이 그에게 신하임을 강요하는 모습에 마지 못해 자신이 신하임을 인정한다. 공양왕에게 길들이기를 당한 뒤 자신을 걱정해서 찾아온 이방과와 이방원에게 '권력이라는것이 그런 것이다'라며 손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휘두르고 싶은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2.2. 정몽주를 회유하려 노력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지 않고 정도전, 남은, 윤소종을 필두로 한 자신의 세력들을 통해 이색과 변안열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면서, 공양왕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공양왕이 꿋꿋이 버티면서 고비를 맞던 찰나 이방원이 자기 몰래 이방과와 계획을 짜서, 가별초를 궁궐 밖에서 행진시키면서 공양왕에게 공포감을 선사한다. 이후 이방원은 공양왕과 독대하며 직접 공양왕에게 '신우와 신창의 뒤를 따르기 싫다면 원하는 대로 해라'고 경고한다. 한편 장남 이방우도 만취한 상태로 자신에게 찾아와서, 고려에 대한 충의를 지켜줄것을 울면서 사정하자 미안하다며 달래준다. 다음날 아침에 등청하기 전 강씨에게 이방우가 먹고싶어하는 음식을 해달라고 부탁한 뒤 등청하게 된다.

얼마 후 공양왕이 순순히 이색과 변안열을 파직해버리고, 더 나아가 우왕과 창왕까지 참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자신도 당황해하며[14] 우왕과 창왕은 살려달라는 주청을 올리나, 공양왕은 이미 집행관을 어제 보냈으니 그리 알라고 하며 나가버린다.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멈추기 위해, 바로 사람을 보내려했으나 정도전이 만류한다.

이후 우왕과 창왕의 제거가 방원이 기획한 일임을 알고 그를 만나러 움직이는데, 그때 방원은 방우를 만나서 서로 칼부림을 벌이고 있었다. 방우가 방원을 칼싸움으로 제압했으나, 차마 천륜을 저버리지 못해 방원을 죽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착잡해하며 돌아간다. 이후 부인 강씨에게 "아들 한 놈은 자신을 용상에 앉히려 점점 야수가 되어가고 있고, 다른 한 놈은 자신이 용상에 앉는 것이 두려워 형제에게 칼을 들었다"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다. 이후 우왕과 창왕의 처형으로 민심이 급격히 이반되자 측근들과 부인, 아들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북면으로 낙향한다.[15]

도성을 지나 동북면으로 가던 도중 방우와 방원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자신들이 뒷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벌인 일이며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다시 돌아갈 것을 요청하나 너희의 잘못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니 그만 일어서라고 다그친다. 이성계가 낙향을 생각한 건 아들들에게 분노해서가 아니라, 이대로 간다면 골육상쟁이 기다린다는 것을 부지불식간 깨달았기 때문이다.[16]

동북면으로 낙향하려고 가다 중간에 쉬는데, 조영무가 "이대로 돌아가면 동북면에서도 환영 못 받습니다. 가서 왕 하십시오. 시작한 건 끝내십시오"라는 간언에 마음을 돌이켜 하룻밤 만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역시 개경 밖에 나갔다 돌아온 정몽주를 만나는 데, 이성계는 정몽주에게 "개경 밖을 나가보니 길이 다 이어져입디다. 다른 길을 향했지만 언젠간 만날 것"이라며 회유하지만, 정몽주는 단호하게 "마음속 길이 다르니 결국 만날 곳은 외나무다리"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자신에게 맞설 것을 암시하고 먼저 떠나버린다.

이후엔 정도전이 모든 정치 공세에 앞장서고 본인은 뒤에 있으면서 기다린다.

이방원으로부터 공양왕과 정몽주의 선전포고를 전달받자, "선비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가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느냐?"면서 "정몽주를 건드리는 자는 그 누구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가족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개경으로 다시 돌아온 뒤 대업을 위해 전진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몽주의 존재로 인해 번번히 고비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몽주를 놔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결국 정몽주와 공양왕이 협력해서 정도전을 유배보내게 되는데, 그럼에도 조정회의에 출석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자 급진파 신진사대부들 사이에서 이성계가 이러는데 어찌 뜻을 같이 할 수 있겠느냐며 불만까지 터져나온다.

정도전이 유배 가는 길에 배웅을 나가게 되고, 정도전에게 미안하다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향처인 한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포천으로 가서 가족들과 같이 장례를 치러준다. 장례 이후 가족들을 모아놓고서 3년상을 치를 적임자로 이방원을 선택했는데, 이방원이 치르는 대신에 정몽주를 마음속에서 버려달라고 부탁하지만 아비의 뜻을 따르거라라고 말한 뒤 거절하고 결국 방원만 남겨둔 채 나머지 가족들과 같이 개경으로 돌아온다.

2.3. 낙마, 그리고 정몽주를 잃고 아들을 버리다

공양왕의 명으로[17] 귀국하는 세자 왕석을 모시러 해주로 간다. 가는 길에 의형제 이지란과 이복동생 이화를 데리고 함께 가며 돌아오는 길에 사냥을 나서기로 한다. 이 자리에서도 이지란과 이화가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나를 믿어달라고만 대답한다.

세자 왕석의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보위에 오르더라도 역할을 다해달라는[18] 요청을 받자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수락한다. 이후 이지란, 이화와 사냥에 나섰다가 낙마하여 머리를 돌에 부딪히는 중상을 당하고 혼절한다. 그 사이 개경에서는 정몽주의 계략에 따라 자신을 따르던 급진사대부들이 일거에 숙청당하며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다.

이방원의 주장으로 혼절한 상태에서 개경으로 복귀하다가 도중에 정신을 차린 후, 채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앉은 상태로 자신이 건재함을 개경 주민들에게 알렸다. 이때 옆으로 쓰러질뻔했지만 아들 이방원이 옆을 받쳐준다.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이 정도전, 조준, 윤소종 등 급진사대부에 대한 처형을 미루면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아직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19] 이방원은 옆에서 이성계를 간호하면서 다시 한번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호소했지만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생모 한씨의 3년상을 마저 치르러 가라고 명한다.

자신을 찾아온 정몽주를 웃으면서 맞이하며 "하고 싶은 걸 다해보고 안된다면 나와 같이 새 나라에 살자."고 마지막까지 설득하지만 정몽주는 씁쓸한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거부한다.[20] 그리고 이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파일:(8) 정몽주 사후 갈등.png

이방원이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부하들을 시켜 독단으로 정몽주를 참살해버리자, 조카 이화상으로부터 이를 듣고는[21] 이지란의 부축을 받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이방원에게 충격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정몽주가 죽은 것이 "정말이냐", "이미 죽었느냐"라고 묻다가 방원이 모두 "예"라고 하자 슬픈 표정으로 일어서면서 왜 내 말을 거역하느냐고 한뒤 "네가 나보다 더 높이 날아 보았느냐, 네가 나보다 더 멀리 가보았느냐"라고 버럭 윽박지르고 대노한 상태에서 방원을 내려보고 멱살을 잡은 채 일으켜 세우다가 다시금 왜 말해보라면서 "내 말을 거역하느냐"며 묻는데 방원이 "아버지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이끌 백성들을 위해서 그랬습니다"고 변명하자 내동댕이친뒤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넌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매몰차게 말한 뒤 "너는 나를 거역했다"며 슬픈 표정으로 말하고 가별초 두 군사들에게 명해 그를 집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죽은 정몽주를 생각하며 오열한다.[22] 방원을 매몰차게 내친 후 이지란이 "내가 아파서 누워있으면 너라도 말렸어야지"라며 그 역시 매몰차게 쫓아버린다. 이후 정몽주를 생각하며 계속해서 울던 중에, 강씨가 다그쳐서 잠시 진정되는 듯 하지만, 이번에는 이방과를 포함한 나머지 한씨 소생들이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아 효수하는 일을 주도하자 역시 분노하며 그들을 질책하고"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다는 말이냐"라고 질책하다가 방과가 "도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방의가 "충신을 죽였다는 비난을 피하려면 정몽주를 역적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간이 "모두 아버님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라고 하자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벼루와 붓을 엎어버린 뒤 "네 뜻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너희들이 정녕 내 아들이더냐", "내가 알던 너희들이 맞느냐"라고 질책한 뒤 나머지 한씨 소생 자식들까지 "방원이랑 똑같은 놈들"이라고 역정을 낸 뒤 방과가 "아버님"이라고 하자 "아비라고 부르지도 말거라"며 꾸짖고는 매몰차게 쫓아내버린 뒤 방으로 가버린다.

이후 정도전에게 이런 식으로 왕위에 오르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며 대업을 거부한다. 이에 정도전은 충신과 역사가들에게 환영받으며 왕이 되고 싶은 이성계의 야심은 욕심이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수는 없다며 만백성을 구한 영웅이 될지 만백성에게 지탄받는 역적이 될지 선택하라는 일갈을 듣는다.

얼마 후 방석을 비롯한 강씨 소생의 아이들이 오자 즐거워하며 환담을 나누지만[23] 이내 아이들이 떠나곤 다시 고뇌에 휩싸인다. 강씨에겐 솔직히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진심을 호소하고, 강씨는 돌아온 길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갈 길을 알게 될 것이라고 답하고, 이것이 또한 "숙명"이라 일러준다. 이에 이성계가 "숙명"이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8화가 종료.

2.4. 조선을 건국하고, 가족은 분열되다

파일:(9) 화가위국.png
화가위국(化家爲國)
"서기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4년 만에 왕좌에 오른다.
강씨와 함께 저택을 거닐다가 국새를 든 정도전을 앞세우고 자신의 집에 찾아온 대신들을 보고 놀란다.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정도전 등의 권유로 처음에는 자신은 자격이 없다며 거절을 했으나 무릎을 꿇은 강씨에 이어 조준, 이지란, 윤소중까지 간곡히 청하고 정도전까지 받으라고 간청하자 국새를 받는다.

이후 그날 밤 김 내관의 충성 맹세를 받고 그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그를 격려한다. 그리고 강씨와 함께 마당을 걸으며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빠른 시일 내에 강씨의 거처를 옮겨 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강씨가 자신과 강씨 소생의 자식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며 한씨를 왕비로 세워 달라고 하자 말없이 강씨를 안아준다. 다음날 강씨와 강씨의 소생 자녀들에게 다녀오겠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해준 후 즉위식을 위해 호위병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말에 탄 채 궁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궁궐에서 치르는 즉위식에서 한씨 소생의 문전박대한다. 시녀들이 구장복을 입히고 면류관을 씌웠을 무렵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돌려보냈다는 김 내관의 보고에 뒤를 돌아보고 즉위식을 치르러 가자는 대신의 보고에 밖으로 나간다. 규를 든 채 이성계는 걸어서 어전으로 이동하며 왕위에 오른다.

즉위식 후, 어좌에 앉아있다가 어좌를 피하고 일어서서 대신들을 둘러본다. 어찌 서 계시냐는 정도전의 물음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줘야 하는 일이 남았으니 아직 대업은 끝난 것이 아니라며 대신들을 독려한다. 왕위에 오른 후 청룡포를 입은 상태로 연못을 보다가 정도전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정도전과 둘이서 독대하는데 정도전에게 한씨 소생 아들들의 아름을 공신록에 올리지 말라고 지시한다. 정도전이 이를 말리며 아버지로서의 노여움은 접어두라면서 방원의 공로를 말하려 하지만 중간에 내 말대로 하라며 독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도전이 물러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한 가문의 수장이 아나라 이 나라[24]의 국왕이십니다", "방원 왕자는 더 이상 아버자를 거역한 아들이 아닙니다", "전하를 보위에 올린 일등 공신이옵니다"라고 만류하지만 듣고만 있다가 정도전에게 "삼봉, 다른 일들은 모두 그대가 원하는대로 처리하시오. 허나 이 일만은 내 뜻을 받들어주시오."라며 우직하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인다. 정도전이 간곡하게 부르며 말리지만 이성계는 오늘은 이만하고 퇴궐하겠다면서 정도전이 염려하는 와중 퇴궐을 위해 어좌에서 일어선다.

당일 퇴궐하려고 막 궁궐을 나서는데 방원이 길을 막자 여기서 뭐하냐고 묻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자 잠자코 이를 들어주지만 방원과 다른 한씨 소생 아들들의 용서를 빌자 방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늦었다", "나는 너를 버렸다."며 매몰차게 말하지만 이방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에 방원을 차갑게 내려보며 어명이라고 강조하지만 물러서지 않는 방원에게 마지막이라고 경고한 뒤 아들이 물러서자 그대로 아들을 지나쳐 말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간다.[25]

퇴궐 후 강씨와 단둘이서 기분좋게 다과를 즐기면서 강씨에게 왕이 된 느낌을 말해준다. 그러다 강씨에게 다시 한번 왕비 책봉 얘기를 꺼내지만 강씨가 또 거절의 뜻을 밝히자 강씨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켜주면 안전해질거라면서 책봉시켜주겠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강씨가 자신도 돕겠다고 하자 놀란 듯 강씨를 바라본다.[26]

이후 회의에서 대신들에게 자신의 나이가 60에 가까워지니 뒷일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며, 세자를 누구로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묻는다. 신하들이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을 차례로 언급하지만 전부 마뜩찮아 하고,[27] 방번의 이름을 꺼내 보지만 대신들이 왕씨 가문과 혼인했다는 것을 들어 반대의 뜻을 밝히자 그때서야 방석을 세자로 앉히고 싶다고 의견을 밝힌다.[28] 이에 놀란 조준이 장성한 형들 두고 막내를 세자로 세울 순 없다고 반대를 표하지만, 편전 밖에서 강씨가 직접 조준을 논박하고, 이성계는 조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이 자신의 뜻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여 방석을 세자로 임명하는 것을 강행한다.

세자 책봉이 결정된 후, 강씨를 만나러 저택에 들어왔다가 배신감이 폭발해 난리 친 이방원을 보면서 무엇이 잘못됐길래 이리 소란이냐며 야단을 치고, 이방원더러 권력에 눈이 돌아간 놈이라고 비난하고 쫓아내면서 정몽주 격살 사건으로 인한 분노를 여전히 표출한다. 그러나 이방원이 이전과 달리 아무 대꾸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떠나자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강씨를 중전에, 이방석을 세자에 책봉한 뒤, 그들이 궁궐에 들어서자 푸근한 웃음을 짓고 함께 입궁했다.[29] 그날 밤, 강씨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용서해달라는 청을 하자 표정이 굳어지며 잠시 고민을 한다. 정사를 돌보던 중, 사돈인 민제가 올린 안건[30]을 승인한 후 "정안군은 요즘 어찌 지냅니까"라면서 은근히 방원의 근황을 물어보는데, 방원이 처가에서 조용히 칩거하고 있다는 민제의 답에 복잡한 표정을 지은 것을 보면 아마도 손자의 급사를 듣고 걱정이 되기는 한 모양이지만 방원은 이미 강씨와 이성계에 대한 증오심으로 눈이 돌아간지 오래인 상태였다. 일단은 현비 강씨의 설득도 있고, 정도전 등 중신들의 의견도 받아들여 영안군 이방과를 궁으로 불러들이고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하며 정안군 이방원에게 추가로 가별초 중 500호의 지휘권을 넘긴다. 하지만 "저희들을 용서해주시는겁니까"라는 방과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만 가보라며 돌려보낸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조선 건국에 대해 온갖 트집을 다 잡은 서신을 보내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자, 고심한 끝에 방원을 명나라에 보내기로 결심하며 오랜만에 직접 불러 이를 전하게 된다. 김 내관이 뒷짐을 지며 풍경을 보던 중 정안군이 오셨다는 김 내관의 보고에 뒤를 돌아보고 방원을 애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방원 역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바라본다. 그리고 즉위 전 가족을 구한 방원과 술자리를 가졌던 정자 근처를 거닐며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주제로 정몽주 척살 후 오랜만에 훈훈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았냐는 방원의 물음에 맡기고 싶은 일이 있다며 명에서 조선의 왕자를 사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며 명나라에 사자로 가줄 것을 부탁한다. 이때에도 "어려운 길이 될 게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다", "그래도 가겠느냐"[31] 방원이 대답하기 전 여쭤볼 게 있다고 하자 해보라고 하지만 "그건 아버지로서의 부탁입니까, 아니면 왕으로서의 명령입니까"라고 다그치듯 물어보자, 어디까지나 왕으로서 내리는 어명이라고 끝끝내 선을 그었다.[32] 이 때부터 이방원은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만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방원을 보낸 직후에 걱정에 찬 표정을 지은 채 뒷짐을 지면서 궁궐을 걷던 중 강씨가 자신의 결정을 존중해주자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한편으로 침전에서 현비 강씨를 등진채 슬픔에 찬 표정을 지어보이고 밖을 나와 달을 보며 걱정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이는데, 강씨는 이를 이성계 자신이 직접 사지로 보낸 이방원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성계가 즉위한 후 한씨 소생 아들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뒤늦게나마 받아주는듯한 제스쳐를 취한 듯 해도 군왕의 자격으로 신하로서만 받아들일 뿐,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결코 용서한 것은 아님이 드러났다. 정도전과의 담화에서 아들들에 대한 이성계 자신의 심리가 일부 드러나는데,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을 용서할 것을 청하는 정도전에게 내가 먼저 아들에게 고개를 숙이란 말이냐고 역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인다. 전주 이씨 가문의 수장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에 대한 집착이 끝내 아들을 용서하도록 허락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효심 깊은 방과를 제외하곤 모두 아버지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품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33] 또 문제는 이성계의 입으로 신하들이 한씨 소생들에 내린 직급들을 두고 "부족하다"는 평을 내렸음이 드러났다는 것인데, 정작 이성계는 눈 밖에 난 자식들을 신경쓰는 자기 마음의 불편함을 드러내며 이만해도 잘 한 것이다며 만족 중이었다. 실제 병력을, 그것도 정예병인 가별초 500호를 하사받은 방원과 달리 병사 명부만 받은 방의와 방간은 불만이 가득했다. 방간이 모두 배고픈 것보다 남이 받은 걸 보고 배 아픈게 더 고통스럽다며 하소연하는데, 불공평한 논공행상이 되려 불만만 더 불러 온 꼴이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34]

정도전, 조준, 남은 등 대신들에게 개성 민심이 흉흉하니 강화도로 유배한 왕씨를 숙청할 것과 함께 한양 천도를 추진하도록 지시한다.[35] 조준이 개경에 근거지를 둔 관료들의 반발을 우려했으나 이성계는 "각오하고 추진해주시오"라고 밀어붙이며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방원이 사신으로 떠나고 반년이 지나자 명에 사신으로 갔던 이방원과 남재가 귀국한다. 양국간 갈등을 해결한 이들에게 큰 일을 해냈다고 말한다. 다만 이방원에게 의례적인 격려만 하고 돌려보낸다.[36]

2.5. 강씨의 죽음, 비극의 서막

한편, 한양에 도착한 후 쓰러진 강씨의 병세를 알고나서 불사를 드리면서 중전 옆을 지키는데, 강씨의 상태가 좋지 않자 울먹이는 모습을 보인다. 강씨가 세자를 찾자 직접 불러오겠다고 나간다. 그 사이 이방원이 침전에 들어오자 강씨가 같이 지옥에 떨어지자며 이방원의 목을 조르는데, 그 사이 돌아온 이성계는 놀란다. 이후 강씨가 승하하자 강씨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37]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져눕는다.

이후 아들들을 다 불러 세자를 잘 지켜 달라고 당부하고, 이방원은 따로 남겨 왜 중전이 방원의 목을 조르고 있었냐고 묻는다. 이에 방원이 사실대로 말하자 네가 중전을 죽게 만들었다고 매도하며 중전의 말대로 넌 세자를 해칠 놈이라고 말한다.[38] 이방원도 이에 지지 않고 어머니(한씨)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니 중전이 돌아가시니까 울고 몸져눕기까지 한다며 말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닥치라고 윽박지른다. 이에 방원이 자신이 그렇게 위협이 될 것 같다면 지금 죽이라며 말하자 칼을 빼들었으나 관모와 상투만 베며 아버지로서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고 다음에는 진짜로 죽이겠다고 말한다. 상투가 잘린 채 퇴궐하는 이방원을 보고 놀라서 부자관계에 대해 걱정하는 조영무에게 더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며 방원과의 관계를 포기한 모습을 보인다.

강씨의 처소는 아직 정리하지 않았으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말게 하라고 했기에 다른 사람이 강씨의 처소를 들어왔다는 사실에 분노하나 처소에서 어머니의 베개를 끌어안고 자고 있는 방석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강씨를 그리워한다.[39]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공을 드리러 세자와 함께 떠나던 중 방원이 사병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고 누구를 베기 위해 이러는거냐면서 분노하며 칼을 겨눈다. 억지로 무릎을 꿇린 방원에게 조용히 살라는 자신의 명을 어겼다며 목을 베려고 하지만, 방원은 어디까지나 전라도 절제사로서 소임을 다했을 뿐이고 군졸 하나를 베는데도 이유가 필요한데 자신을 목벨 이유가 무엇이냐며 물러서지 않고 또 세자도 이를 제지하자 칼을 내던지고 순군부로 방원을 압송하라 명하고는 물러난다.

그 뒤 사당에서 정도전과 대화할 때 "애비를 바라보는 그 놈의 눈에 살기가 있었다"면서 세자를 위해서는 이유고 뭐고간에 바로 목을 베어야했으나 아버지로서 차마 그럴 수 없어 물러났다고 토로하자, 정도전은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하겠다고 답하게 된다. 그 뒤 궁으로 돌아와서 조영무가 방원을 순군부에 가두지 않고 창고에 가두었다가 풀어준 이유를 물은 뒤 너까지 내 명령을 어기냐며 앞으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명에 절대복종하고, 전장이었으면 목을 베었을 것이라 경고한다.[40]

한편 명나라에서 조선에 보내온 표문의 내용이 불손하다며 표문을 쓴 정도전을 명으로 압송하라는 표전문 사건이 일어나고 신하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의 곁에 있고 세자의 곁에 있어야 할 정도전을 전쟁이 나더라도 명나라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 못박았다. 나중에 정도전의 표문에 계속 트집을 잡던 명나라가 급기야 강씨를 기리기 위해 조선 사신들이 흰 옷을 입은 것을 또 문제삼아 사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을 듣고는 신하들을 물린 뒤 주변 기물들을 내던져 깨뜨릴 정도로 분노한다.

정도전이 방원을 막아보겠다면서 사병 혁파를 추진하자 어명을 통해 이를 지지하여 방원과 모든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사병 혁파의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천명한다. 이와 함께 신덕왕후 강씨를 향한 3년상을 마무리하지만 그 와중에 크게 쇠약해졌고, 결국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그 사이에 조급함을 느낀 정도전이[41]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모두 제거할 계획을 세우며 이방원의 거병에 기폭제를 들이붓고 말았다.

더불어 그가 일족의 피를 보기 싫어하는 성향이란 점을 정도전이 너무도 잘 알기에, 정도전은 역심을 품는 왕자들을 일거에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얻었음에도 포기하고 만다. 이후 정도전이 다급해져 이성계에게 용서를 빌며 왕자들을 죽이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2.6. 아들에게 소중 을 모두 빼앗기다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도성이 소란스러워지자 의문을 품지만 병 간호를 하는 이화가 애써 안도시키며 관심을 돌리려 한다. 결국 이방원이 심효생을 포함한 세자파 대신들을 척살하고, 도당과 삼군부를 장악했으며, 삼봉은 이방원이 손수 참살했다는 사실에 충격과 분노로 가득찬다. 그리고 조영무를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조영무마저 방원에게 투항해버리고 숙위대장 박위마저 죽게 되어 자신을 지켜줄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자, 칼을 달라고 하며 직접 나가려고 하는데, 이 때 자신을 말리는 이화가 평온한 것을 보고, 이미 자신을 배신하고 이방원에게 붙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분노하면서 쫓아내버린다.[42]

이후, 칼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니, 칼을 들고 무장한 상태로 다가온 이방원과 마주친다. 정도전을 왜 죽였냐고 묻는데, 이방원은 그 이유를 '정실 소생의 왕자들을 제치고 서자[43]인 방석이를 세자로 책봉한 뒤 세자의 권세를 등에 업어 왕자들을 시해하려 했다'고 답하고, 이성계는 분노하며 스승숙부까지 죽인 이방원을 괴물이라 칭하며, 내가 낳았으니 내가 직접 거두겠다면서 이방원에게 칼을 들고 다가서려다 이방원 측 군사들에 의해 저지를 당한다.[44][45] 이방원은 이성계가 온갖 수를 다 쓰며 고려을 뒤집어 엎고 조선을 세운 것처럼 자신도 그럴 것이라 이성계에게 선언하고, 궁 안에 있으라는 사실상의 협박을 한다. 이방원이 떠난 후, 본인이 손쓸 방법이 없어 졌다는걸 체감한 것인지 아니면 이방원의 포부를 듣고 인과응보가 떠오른 것인지 그 자리에서 실성한 사람 마냥 웃다가 망연자실 한 채 결국 안으로 들어간다.

이후 이방석을 폐세자시키라는 대신들의 상소를 받게 되고, 이방석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이방석이 자신을 위해 포기해버리자 안타까워 한다. 결국 이방석은 유배를 떠나기 위해 나서던 중 죽임을 당했고, 무안군 이방번도 이방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신덕왕후의 핏줄 중 경순공주만 살아남았다. 거기다 사위인 이제까지 이방원의 지시로 박포에게 죽어 하루아침에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김 내관에게 자식들과 사위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면서 통탄해한다.

결국 무인정사 주동자들의 요구대로 이방과를 세자에 책봉한 뒤, 입궐하는 이방원과 마주치자 앞서 세번의 기회에서[46] 그를 베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이방원이 맞장구를 치면서 그때 자신이 언젠가 큰 죄를 지을 놈이니 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못했느냐고 묻자, "그것이 부모의 업"이라면서 자식은 부모에게 칼을 겨눌 수 있으나 부모로서 자식에게 그렇게 할 순 없는 것이라 졌다면서, 이방원에겐 부끄러운 승리를 거둔 것이라 비난하고, "결국은 너한테 돌아갈 것이다. 네가 뿌린 씨앗은 네가 거둬야 하는 법이다"라며 업보를 당할 것이라 경고한다.[47]이후 죽은 자식의 명복을 빈다며 사찰에 갔다오겠다고 허락을 받고서 겨우 궐 밖을 나선다. 경순공주의 자택을 찾아가서 경순공주에게 생존을 위해 비구니가 될 것을 권유했고, 결국 경순공주는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한다. 직접 머리를 깎아주면서 오열을 하였고 끝끝내 머리를 다 깎아주지 못하고 비구니가 대신 깎아준다.[48] 이후 비구니가 된 경순공주에게 머리를 깎아도 어여쁘다고 칭찬하며, 성불하라는 덕담을 남기고 헤어진다.

2.7. 방원과의 투쟁을 시작하다

강씨 소생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 세자가 된 이방과를 부르는데, 처음에 이방과가 세자빈 김씨와 함께 어전에 들어가려 하니 이성계가 통곡하고 있어서[49]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날이 밝고 나서야 알현이 성사되고, 이방원을 벌하고 자신의 원한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방원에게 있어 가장 큰 벌은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며 이방과에게 반드시 왕위를 사수한 후 이방과의 핏줄에게 물려줄 것을 당부한다.[50] 이때 이방과가 받들지 못할 것 같은 반응을 보이자 "방원이 놈 꼭두각시 역할을 자처할 거냐"고 역정을 내면서 만약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기면 자신은 자결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자신을 살리든지 이방원을 살리든지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한 후 바로 어보를 넘겨주고는 결국 양위를 하면서 상왕으로 물러난다.

파일:(19) 상왕 이성계.png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무기력하게 물러나있기보다는 아들이자 왕에 오른 이방과에게 믿을만한 신하를 연결해주고 여러 정치적인 조언을 해주는 등 이방원을 견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서 이성계가 생각하는 정치가 드러나는데, 이성계의 정치는 리더가 카리스마를 내세워 아랫사람들은 휘어잡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모은 신하들을 이방원이 모두 내치면서 이성계의 방식은 금세 물거품이 된다. 그리고 이방원과 이방과의 대담에서 아버지의 방식으론 자길 이길 수 없다며 간접적으로 비판받는다.[51]

이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도성 안에서 함성 소리가 들리자 놀래면서 김 내관에게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도록 시킨다.[52] 그러다가 2차 왕자의 난 이후 방과가 결국 방원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하자 "결국 방원이 그 놈에게 용상을 넘겨줬단 말이냐, 주상이라면 내 한을 풀어줄 줄 알았다"라며 실망을 표하면서 그를 질책하고 결국 방과와의 인연도 파하고 만다.

세자로 책봉된 이방원과 세자빈 민씨가 알현을 하지만 그들의 인사에도 대답하지 않고 방과가 이제 그만 방원을 용서해달라고 청해도, 빌지도 않은 용서를 혼자 하란 말이냐며 일갈한다. 이에 이방원이 형식적으로 용서를 구하자 용서는 벌을 다 받고 난 후에 비는 것이라며 여전히 이방원에 대한 깊은 한을 내보인다. 자기가 무슨 벌을 받기를 원하냐는 방원의 물음에는 네놈의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답하고, 자신을 궐 밖으로 내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방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이지란을 은밀히 불러 동북면의 군사들을 모으라는 지시를 한다. 병력이 모자르면 서북면의 병사와 여진족도 끌어 오라는 명도 내린다.[53] 하지만 이지란이 건국하고 10년도 안돼서 내전이 일어나면 나라가 망한다며[54], 성님이 세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은 못한다고 반대하자 속을 태운다.[55]

결국 식음을 전폐하며 단식 투쟁을 한 결과, 방과의 독단으로 출궁을 한다.[56] 이방과는 몰랐겠지만 이방원을 칠 기회를 얻게 되면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동북면으로 떠난다.[57] 한편 이방과가 이성계와 이방원만 궁궐에 두면 참사가 벌어질 것을 염려하여 양위를 미루고 있었기에, 이성계의 출궁은 태종의 즉위가 곧 이루어질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8. 아들과의 마지막 싸움

파일:(21) 태상왕의 복수전.png

이방과의 도움으로 출궁한 이후 조사의를 시켜 북방의 군사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모으고 군량을 준비한 뒤 회암사로 연통을 넣을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저승에서 통곡하고 있는 중전과,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세자를 위한 일이다" 란 말을 남긴다.

이후 조영무가 이방원의 지시를 따라 자신을 추격해오자, 회암사에서 나무로 불상을 깎아 만들고 있다가 자신을 찾아온 조영무에게 자신에게 왕 하라고 말해놓고는 배신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한편 이방원이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났고, 자연스럽게 자신은 태상왕이 되었다. 태상왕이 된 후 추가 의전 문의가 궁으로부터 도착했다는 김 내관의 보고에 자신은 현재 머물고 있는 사찰 옆에 작은 궁궐이나 짓고 여생을 마칠 생각이니, 목재나 보내달라고 요청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방원을 방심시키려는 기만책임을 김 내관에게 밝히면서, 동북면에서의 군무가 어찌 진척되고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지란에게 안부를 묻는데, 이성계가 동북면의 군사들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지란이 이제 칼을 내려놓으라며 만류하지만, 이성계는 자신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원혼이라며 원한을 갚기 전에는 떠날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지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에 건강이 좋지 않아 죽음을 앞둔 이지란이 하직 인사를 하고, 이성계 역시 오랜 세월 이지란과 함께 보낸만큼 "의원한테 가거라. 어명이다"라며 눈물로 그를 배웅한다. 나중에 조사의의 난 발발 직후 이지란의 부고 소식을 듣고는 왜 그리 급하게 갔나면서 슬퍼한다.

이지란의 하직 인사를 받고 그가 떠나는 것을 본 뒤, 김 내관으로부터 조사의가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움직이기로 하고, 회암사를 지키는 군사들은 어찌하냐는 내관의 물음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답한다. 회암사를 나온 뒤에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조사의를 포함한 지휘관들에게 전투가 장기화되면 온 나라가 피폐해질 것이니 속전속결로 끝낼 것을 당부하고, 조사의에게 준비된 군대를 서북면으로 집결시키라 지시하면서, 자신은 백성들에게 왕실 부자 간의 전쟁이라는 인상을 최대한 피하게 하기 위해 주력군을 서북면으로 먼저 보낸 뒤 그 후 뒤따라간다. 이 때 군사들을 지휘하고 전략을 지시하는 것을 보면 왕년 백전불패의 명장[58]으로서의 경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듯, 수적 우위를 갖췄음에도 이천우의 군대를 깊숙히 끌어들여서 치고 잔당들은 산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라는 치밀한 군사 능력을 보여준다.

한편 재차 관군을 출정시키면서 이방원이 친정을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조사의에게 주력군을 지휘하여 전면전을 개시하라 하고, 남은 300명의 병력을 빼내어 이방원이 있는 본영을 기습하도록 한다. '주상을 공격하라'는 명의 진의를 다시 묻는 군관에게, "베어도 좋다"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 기습 공격은 오히려 이성계 자신의 패착이 되고 마는데, 기습으로 인해 이방원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위기에 처할 정도였으나, 이숙번과 박은, 민무질이 이끄는 남도의 징발군들이 때마침 당도하여 기습 병력들을 제압하고, 오히려 방원은 그 순간 이성계의 위치를 알아낸 다음, 올라온 병력들을 이끌고 본영을 기습한다.

2.9. 모든 것을 잃은 뒤

본영 막사에서 이성계가 긴장한 마음으로 작전의 성공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 막사 문을 열고 무장한 이방원이 들어온다.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방원을 보고, 결국 하늘이 자신을 버렸고 방원이 또 이겼다면서 체념하고는 자신을 베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아버지를 벨 작정이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어떠셨냐"고 묻고는 조용히 그를 태상전으로 데려간다.
파일:(25) 이성계 통곡.png
아들에게만 두 번을 지고 만 이성계

태상전에 들어간 뒤 자신을 찾아온 방원에게 다시는 찾지 말라고 냉정하게 내보내지만 그후 밖에 다 들릴 정도로 서럽게 운다. 이후 방원이 또 자신을 찾아와 문후를 여쭙자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찾아오는 거냐며 자신이 이 꼴인 걸 즐기고 조롱하러 온 거냐고 비꼰다. 하지만 이방원은 "저도 태상전에 들 때마다 숨막히는 기분이며, 그럼에도 찾아 뵙는 것이 제가 받는 벌입니다. 그러니 오래 사십시오"라고 어떻게든 아버지의 삶의 목적을 제공하고자 하고 나간다. 이방원이 나간 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도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한 방울 흘린다. 그러니까 방원은 용서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날 미워하는 마음을 기둥삼아, 오래 살아달라는 소망을 이성계에게 전한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아버지가 자결을 택할 수도 있으니 이렇게라도 아버지를 살리려 하는 것. 최후의 싸움을 시작하기 전,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자신이 원령이라 이 원한을 풀 때까지는 갈 수 없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이방원이 자신에 대한 원한을 이용해 살아달라고 부탁을 한 걸 보면 묘하다. 역시 부자라 뜻이 통한 것인지. 더불어 이 말은 이성계가 사망하는 시기가 바로 그의 원한이 풀리는 때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방원이 자신을 모실 사람으로 승녕부 윤 유정현을 붙여주지만 시름에 빠져 수라를 남기는 등 심신이 모두 비참한 상태로 연명하게 된다. 방원이 어떻게든 아버지를 돌봐드리기 위해 이화상을 시켜 이지란이 그랬던 것처럼 노루고기를 만들어 대접하게도 했지만, 이 노루고기 요리도 조금 밖에 먹지 않았다고 언급된다.

2.10. 말년, 용서와 화해로 생을 마감하다

이성계의 말년(1408년), 성인이 된 세자의 잇다른 돌출 언행에 답답해하던 태종 앞에 유정현이 다가와 태상왕께서 위중하다고 알려 태종이 태상전으로 찾아갔는데, 진찰을 마친 어의가 다행히 괜찮아졌다면서도 이제 천수를 다하신지라 아무래도 며칠 못 갈 것 같다고 알려준다.

이후 아들 이방원이 반항하는 세자를 꺾지 못하고 결국 낮술을 들이키다가 밤에 만취한 상태로 태상전에 찾아오자 이젠 네멋대로 한밤중에 찾아와 술주정까지 하느냐며 꾸짖긴 했지만[59] 이내 방원이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면서 벌해달라고 울면서 용서를 빌자,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안타깝게 아들을 바라보며 힘 없는 목소리로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나는 이제 너를 벌할 힘[60]도, 용서할 힘[61]도 없다."고 얘기한다. 이 때 외모가 많이 노쇠화된 상태로 이전보다 머리와 수염이 온통 허옇게 변했다.
파일:(27) 원한을 내려놓은 이성계.png
아들을 용서하고 인정하며 원한을 내려놓는 이성계

며칠 후 정전에서 신료들과 생일 연회를 치르던 방원의 앞에 청룡포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해 예전의 이방원을 아끼던 시절의 그 선한 미소를 다시 보여주고, 생일을 축하한다며 술을 한 잔 따라주고는 "막중한 국왕의 책무를 다해달라"며 방원의 손을 잡고 격려한 뒤 밖으로 나간다. 작중에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하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내친 것이 1392년 봄의 일이라 약 16년만의 부자 간의 화해가 되는 셈이다.

이후 정전을 나와 태상전으로 가는 복도에서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오랜 애증을 내려놓은 덕분인지 후련한 웃음을 지으면서 홀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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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승하

그러고 아들과 화해의 손을 맞잡은 그 날 밤[62]에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지켜보는 이 없이 숨을 거둔다.[63] 상왕 이방과왕 이방원을 비롯해 며느리들과 세 손자(세자 이제, 효령군, 충녕군)들과 대신들의 애도를 받으면서 장례가 치러졌고[64],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돈 민제도 세상을 떠났다.
서기 1408년, 태종 8년, 조선의 창업 군주 태조 이성계가 숨을 거두었다. 불패의 명장이었던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만 두 번이나 패배하며 비극적인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방원을 국왕으로 인정하여주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 태조 이성계의 훙기


[1] 여담으로, 이런 장면에서 보통 입에서 피가 흘러 넘치는 것이 사극의 고질적인 연출인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굳어 있다가 이방원이 자신을 보며 절규하자 무너지면서도 장엄한 인상을 유지하려 했다. 다수의 사극들에 출연하며 수준급 연기력을 다진 베테랑 연기파 배우 김영철의 표정 연기가 돋보이는 장면.[2] 장남 이방우와 차남 이방과는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과 서경에 인질로 있었고, 오남이자 본 드라마 주인공인 이방원은 '전리사 정랑'으로서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3] 이러면서도 천륜을 저버린 죄를 지었으니 후에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데 앞날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대사다.[4] 이 때 기병들이 방패로 방진을 짜고 있는 병사들을 돌격해 짓밟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촬영하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장면이었다. 실제 본작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면 더더욱.[5] 최영과 이성계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로 묘사되지만 본 드라마에서는 전우로 간략하게 언급되고 만다. 아버지를 돕고 싶어하는 이방원과 대화하는 와중에 언급이 되는데 적은 회차속에 드라마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6] 지휘봉으로 방과의 복부를 찌르고, 그 다음에 방간을 어깨 쪽으로 휘둘러 주저앉게 했다.[7] 이때 방간에게 "네 형이 왜구냐?"라고 호통을 치는데, 이방과 역을 맡은 김명수불멸의 이순신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연기했다. 또한 방과에게는 "네 동생이 홍건적이냐?"라고 꾸짖었는데, 이방과 역을 맡은 배우가 7년 전 무슨 배역을 맡았는지 생각해보면 참 적절한 배우 개그가 아닐 수 없다.[8] 이후 이방원의 표정을 클로즈업하였다.[9] 이 때 이성계는 부패 혐의로 몰아 실각시킨 조민수와 처형당하는 최영, 사복 차림으로 홀로 돌아다니다 본 성계육을 파는 상인을 회상한다. 이를 두고 자신과 은원관계에 상관없이 적이 된 자를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처리해야 했고 그로 인해 만 백성에게 고개들기도 부끄러운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한다며 한탄하는 건 덤.[10] 회상을 통해 설명하듯 왕이 되기 위해 정치가가 되었으나 정치판이 깊숙히 들어갈 수록 감당하기 무거운 죄의식과 불명예스런 멍에를 짊어지는 고통만큼은 이방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배려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방원은 훗날 태종이라는 명군의 길을 걸은 대가로 임종의 날이 되기 전까지 고독과 죄의식으로 피폐해지게 되며 아버지인 이성계의 우려를 그대로 겪게 된다.[11] 오히려 칼에 찔린 방원을 보면서 자신에게 덤벼든 사람을 그쪽으로 날려버리며 2명을 동시에 제압했다.[12] 이 집안이 꽤 복잡하게 얽혔는데 공양왕의 아우 정양군 왕우의 두 딸이 각각 이성계의 7남 이방번과 장남 이방우의 차남 이덕근과 혼인했다. 이색의 손자를 사위로 들이고, 선양 대신 저항을 택한 공양왕의 조카 딸을 며느리로 들인 게 이방우가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나중에는 공양왕과 정양군의 아버지 정원부원군 왕균의 딸(즉 공양왕과 정양군의 여동생)이 뒷날 이방간의 맏이 이맹종과 혼인한다. 나이 대를 고려하면 맹종에게 시집 간 딸은 왕균이 말년에 얻은 늦둥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집안 사이에 청송 심씨가 끼어들어 서로서로 혼맥이 이어진다. 왕우의 또 다른 딸이 심덕부의 7남 심정(沈泟)과 혼인했는데, 심덕부의 5남이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 6남이 조선 개국후 경선공주와 혼인해 이성계의 부마가 되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이다. 전주 이씨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건국 세력과 개성 왕씨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는데 이는 '왕씨 몰살론'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13] 참고로 저 세 사람 모두 용상에 앉게 된다.[14] 정몽주가 그와 갈라서기 전, 우왕과 창왕은 살려달라고 부탁한 약속을 지키려 했기 때문.[15] 우애가 좋았던 아들들이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도 원인이지만, 민심이 바닥나서 자신의 집에 돌덩이까지 투척당한 영향도 있다. 거기다 돌덩이를 맞았을 때 쓰고있던 글자가 하필 '백성 민(民)'자 였다는 것을 클로즈업하며 이런 상황을 더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16] 이후 자신이 계속 가면 아들들에게 닥칠 일이라며 하는 말(형이 아우를 죽이고, 아우가 형을 찌를 것)은 미래에 두 차례나 벌어진 왕자의 난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 형제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이 국가 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 예감했다는 뜻이며, 이는 미리 앞을 내다봤다는 것이다.[17] 정몽주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나온다.[18] 사실상 보위를 넘보지말라는 경고다.[19] 물 또는 약으로 추정되는 음료를 마시면서 옷에 흘리는 장면으로 미루어 보아 몸이 꽤 안 좋은 것으로 추측된다.[20] 본인이 유자가 아니라 불자였다면 다음 생을 기약했고, 그 다음 생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모셨을 거라는 얘기를 한다.[21] 직접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고 이방원이 이화상으로 하여금 이지란에게 정몽주 참살을 아버님(이성계)께 고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지란이 이를 받아들였다.[22] 다만 무조건 분노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자식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상황 자체에 슬퍼하다가 분노로 바뀐 것에 가깝다. 붙잡고 싶던 사람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장 믿고 아꼈던 아들이 죽였다는 슬픔이 배신감과 분노로 바뀐 것이다.[23] 강씨 소생의 방석이가 한씨소생의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다는 것을 미리 암시하는 내용으로 보인다.[24] 조선이라는 국호는 1393년 2월에 정해졌기에 아직은 고려다.[25] 실제로 이성계는 즉위 초기에는 여론이 험하다보니 한동안 궁궐과 저택을 출퇴근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이성계가 타고 간 말이 백마였다.[26] 기존 사극에서는 정도전의 권유로 이성계가 신덕왕후 소생의 자녀를 세자로 책봉한 걸로 나오나 본작에서는 사료에서처럼 이성계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세자 책봉을 밀어붙이는 걸로 묘사된다.[27] 방우는 새 왕조개창에 반대하고 자신의 곁을 떠났으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들어 반대했고, 방과는 무공이 훌륭해 대군을 맡기면 안심이 가지만 정치에는 미숙하단 이유로 거부했다. 방의와 방간은 아예 신하들과 이성계 모두 거론하지 않았으며, 방원의 경우에는 조준의 논리가 워낙 정연하자 아예 입을 꾹 닫아버렸다(...)[28] 당연히 이방번을 세자로 세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방우, 방과, 방원, 방번 등 다른 왕자는 모두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방석이를 세자로 삼는 듯한 모양새로 보인다.[29] 이때 셋째 아들을 잃고 매장을 하는 이방원이 오열하는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연출이 잔인하다는 반응이 있었다.[30] 고려의 옛 신하들을 다시 불러 조정의 빈 자리를 채우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명분이고, 사위에게 힘이 되줄만한 하륜과 같은 인재를 모으는 게 주 목적이었다.[31] 실제 역사에서 태조가 명나라에 가려는 이방원을 두고 '''너의 체력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 리의 길을 별 탈없이 다녀올 수 있겠는가?"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걱정하는 대목에서 따온 듯한 대사지만 말 그대로 모티브인 수준이다. 다만 후술하듯이 이방원이 명나라로 출발한 후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방원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는데, 이는 실록을 바탕으로 한 창작으로 보인다.[32] 사실 이방원의 질문과 이성계의 캐릭터성을 따져보면 왜 이성계가 어명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부탁, 왕으로서의 ,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는데, 문제는 부탁이란 대등한 관계끼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성계는 11화 초입에 아들에게 어찌 고개를 숙일 수 있냐는 의사를 표할 정도로 아들을 자기 아랫 사람으로 여기는 성향이 강하고 윗사람으로서 권위를 중시한다. 당연히 어명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어쩌면 가장 = 아버지 = 왕이란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대비로 둔 왕과 아버지이란 개념도 이성계에겐 동일한 개념이니 어명을 택하는데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33] 사실 이미 즉위식과 세자 책봉, 공신 작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면서 한씨 소생 아들들은 믿었던 아버지에게 사형선고를 받은거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이성계가 실제 역사보다 먼저 훙서했다면 왕이 되었을 이방석과 여전히 정국을 주도할 정도전 및 강씨 일파들은 본인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유교적 정당성을 지닌 한씨 소생 일가를 숙청할 것임이 자명한 상황이었기 때문. 이 때문에 자기 밑에 들어온 조영무를 맞이한 방원의 첫마디가 "나를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소?"일 정도로, 한씨 소생 왕자들은 본능적으로 무력으로 판을 엎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위태로운 입지에 처했던 것이다.[34] 정몽주 건에도 나오지만, 가장 온건한 방의가 불만을 드러냈다는 건 한씨 형제들 모두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한 요소다.[35] 왕씨 학살을 하던 조영규가 끝내 환멸을 느끼고 그만둘 것이라 말하고, 냉혹하게 어린 왕씨도 죽이던 조영무도 "전하,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혼잣말 하면서 탄식하는데, 이성계의 충복 중인 충복인 가별초의 핵심 인물들도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에서 왕씨 학살은 이성계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그만큼 이방원이 부상할 당위성을 더해주는 계기로 활용된다.[36] 이때 이방원 역시 명에 가기 이전과 달리 담담하게 대답하고 퇴궐한다.[37] 향처 한씨가 죽었을 때도 슬퍼했지만 강씨가 죽은 이때는 왕의 체통이고 뭐고 없이 강씨를 끌어안고 엉엉운다.[38] 이때부터 '너 때문에 중전이 세자와 인사를 나눌 마지막 기력을 써서 일찍 죽었다'고 우기는 등 이성계의 편집증이 점점 심해진다.[39] 훗날 이방원이 민씨의 죽음을 슬퍼하던 아들 이도에게 만백성의 국왕으로서 정사를 돌봐야한다고 일갈했던 것과 대비된다.[40] 다만 이성계의 명이라면 다소 무리하고 폭력적인 것이라도 무조건 복종하던 조영무가 단독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미 조영무의 마음 역시 이방원 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인다.[41] 쓰러진 이성계를 진찰한 어의가 정도전에게 승하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하자 크게 당황한다. 신덕왕후가 이미 없는 상황에서 이성계까지 승하하게 되면, 한을 품은 한씨 소생 자녀들로부터 방석을 지켜줄 사람이 정말 자신밖에 남지 않기 때문.[42] 재미있는 건 대왕 세종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김영철이 태종, 이원발이 좌군절제자 박실을 연기했는데, 박실이 군부를 휘어잡고 세종을 압박하는 조말생을 잡아들이라 밀지를 내리는 데 이미 군부를 장악한 조말생에게 붙어 항명을 하고 태종의 병권을 회수하는 데 일조하여 뒤통수를 친 것.[43] 즉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 취급하고 있는 뜻이다.[44] 1회의 이방원의 꿈에서 이성계가 방 둘러싸여 창을 온몸에 맞는 장면과 구도가 일치하는데, 어찌보면 이방원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성계에게 향한 창 끝이 창날이 아닌 창대라는 점과 이성계를 공격하는 병사가 이방원측의 병사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 이 꿈에서 이방원은 칼을 뽑아 들고 있음에도 어떤 병사도 베지 않으며, 병사들은 이방원을 공격하지 않고 이성계에게 가지 못하게 붙잡기만 하는데, 시점에 따라선 이성계에게 가려는 걸 말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45] 2회에서 최영을 포위한 장면과도 같은 구도라 최영을 죽인 업보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최영을 포위한 이성계의 병사들은 창이 아닌 칼을 들고 있기 때문에 전자만큼 싱크로가 높진 않다.[46] 강씨의 장례 이후 독대중이던 이방원의 목이 아닌 관모와 상투만 잘라 내보낸 것, 이방원이 사병 훈련 도중에 베지못한 것은 이방석의 만류가 있었고, 마지막은 이방원이 동원한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제압되었다. 사실 맨 처음말고는 기회조차 없었다.[47] 이에 이방원도 지금 일어난 모든 일 역시 이성계 본인이 심은 씨앗을 거두는 것이며 죽은 어머니와 그 아들인 자신들을 버린 대가라며 맞받아친다.[48] 서글픈 운명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게 어려워 괴롭다는 듯이 묘사된다. 용의 눈물과 마찬가지로 실제 실록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온 장면인데 용의 눈물 때도 그랬지만 본작도 배우들의 실감나는 호연 덕분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49] 이때의 씬은 10화와 정반대의 구도이다. 이방원이 요절한 삼남을 장사하고 부인과 함께 통곡할 때 이성계는 강씨를 중전으로 맞아들이면서 화기애애한 장면으로 대비되었는데, 이번에는 이성계가 강씨를 생각하며 통곡하는 장면이 넘어가고, 바로 민제와 이방원의 가신들이 거사의 성공에 축배를 들며 기뻐하는 장면으로 매치된다. 차이가 있다면 이방원은 그 축배 자리에 없고 다시 얻은 아이들 중 첫째를 업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50] 드라마 속에서 이방과가 이성계의 뜻을 따르고 이방원에게 '네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면 너도 내 아우가 아니고 그러면 나도 너를 못 벨 것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다. 물론 이성계로서는 울며 겨자먹기일 수밖에 없는데, 이방원, 심지어 이방간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면 그들에게 완패했다고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차라리 이방과에게 내주는 쪽이 나은 편이었다. 이방과는 이성계 곁에 남은 자식들 중 가장 장남이라는 입지에 있던만큼 왕위에 오른 순간 없던 욕심이 생겨 자기 대신 이방원과 이방간을 제거해주기를 의도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51] 이방원은 조정의 요직을 모두 자기 사람을 채우고, 그들에게 공신직을 내려 기반을 튼실히 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그렇기에 정종이 모았던 신하들은 이방원파가 장악한 사헌부 손에 순식간에 쓸려갔다. 어찌보면 이는 이성계와 이방원의 간접적인 정치대결로 볼 수 있으며 이방원은 이성계로부터 단번에 한판 승을 따낸 것이다.[52] 기록, 그리고 용의 눈물에선 이방간의 반란을 듣고 방간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말(소 같은 놈!)을 남겼다. 하지만 드라마에선 이쯤에서 이성계의 반응을 끝맺고 그 이상은 묘사되지 않는다.[53] 한 마디로 국방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소리. 이지란의 말처럼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키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조선이 망할 것은 자명한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걸 보면 이성계가 아들에 대한 분노때문에 판단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54] 실제로 무인정사 동안 도성 밖에 있다가 거사 이후 돌아와 상황 파악을 한 이지란 역시 격분하면서 동서북면 군사들을 끌고 오겠다고 노발대발 하였다. 하지만 흥분이 가라앉자 정말 이방원군을 제압할 수 있는지도 미지수고 이러면 조선군 자체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반대한 것이다.[55] 이성계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정몽주를 죽인 뒤 효수해버린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냉정하게 내쳐버리고, 그들을 막지못한 이지란에게도 윽박질렀던 과거에 비해 입지가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56] 이때 방과가 출궁을 허락하자 갑자기 기운이 넘치듯이 일어난다. 다만 처음엔 깜짝 놀라는 것이 방과가 독단으로 허락해줄 거라고 생각 못했던 듯.[57] 그전까지 기력을 모두 잃은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궁궐에 남아있었으나, 출궁하자마자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나가며 불패의 무장이었던 과거의 패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58] 조사의의 난에 이성계가 연루되어있다는 정보를 조영무로부터 들은 하륜은 백전불패의 무장이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셨으니 잘못하면 우리가 다 끝장이라며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다.[59] 이어서 왜 술을 마셨냐고 묻는 장면은 영락없는 아들 걱정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다.[60] 25화에서 이방원이 "태상전에 들어오는게 내가 받는 벌입니다. 오래 사십시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벌할 힘'은 이성계의 실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성계의 남은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61] 이 용서할 힘이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나 좀 벌해 달라고 찾아온 아들에게 "니가 뭘 잘못한 줄은 아냐? 이제 와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건 또 무슨 변덕이래니? 너 하고 싶은 대로 지금까지 해 놓고?"라는 비아냥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62] 실제로는 이방원의 탄일로부터 정확히 8일 후에 죽었다.[63] 실제로는 태종이 임종을 지켰고, 담이 있는 태조가 일어나 앉아 있다 태종이 직접 청심환을 올리나 기력이 쇠한 태조가 삼키지 못했고, 태종이 상태를 확인하자 이미 승하한 상태였다. 당시 상왕 정종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걸 듣고 서둘러 단기로 말을 타고 왔으나 이미 태조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64] 특히, 조영무가 가장 서글프게 울었는데, 그동안의 행보를 보면 죄책감이 묻어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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