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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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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야구장 vs 타이론 우즈
통산 홈런 일지 유발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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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VS 타이론 우즈3. 야구4. 가족
4.1. 결혼 및 아들부자
5. 취향6. 인맥7. 기타 이야깃거리

1. 개요

이승엽의 기타 사항 내역을 정리한 문서.

2. VS 타이론 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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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구


3.1. 유발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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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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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엘도라도 관련


두산 베어스 감독이지만 사실 뒤에서 몰래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비밀사자[2], 삼성의 첩자라는 밈이 있다. 이는 이승엽이 처음 두산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부터 '삼성 왕조무너뜨린 두산을 부순다'라는 밈으로 존재하긴 했으나 마이너했다.

본격적으로 밈이 시작된 것은 2024년 삼성의 최고 인기 응원가 엘도라도가 부활한 시점이었다. 과거 왕조 시절 삼성 소속이었던 선수들이 몰래 뒤에서 엘도라도를 따라 부르고 있을 거라며 김상수, 최형우 등의 선수들과 함께 드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위상이 높은 이승엽이 가장 비중이 높았다. 특히 2024년의 두산은 이승엽의 선수 시절 친정팀인 삼성 라이온즈와 경기만 했다 하면 두산의 경기력이 수직 하락하며 삼성에게 승 수를 퍼주는 상태였는데[3]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 올라온 "츠긍슴승 승니흐리르 으으으으"[4]가 빵 터져서 본격적으로 밈이 시작되었다.

주로 두산과 삼성 중 한 팀만 이겨도 '나는 이겼다'면서 만족하거나, 둘 다 이기면 유일한 하루 2승 감독 같은 식으로 사용한다. 덕아웃에서 환호하는 사진은 엘도라도를 열창하는 모습으로 왜곡된다. 두산의 연승으로 감독으로서의 여론이 좋아졌을 때는 당당하게 두산의 응원가를 부르는 변화구도 던졌다##. 주변에 다른 두산 코칭스태프[5]나 선수가 있는지 살피면서 직구인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에 두산의 응원가가 나오며 급격히 틀어버리는 게 포인트. 또 다른 변화구들로는 아무도 없나 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삼성 응원가를 불러버리거나, 주변인들이 있는 걸 확인했음에도 부르는 게 있다.

파일:최강삼성승리하리라.jpg
최강삼성 승리하리라
워어어어 워어어어어

밈과 함께 자주 사용되는 사진. 사실은 2023년 5월 25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김재호의 끝내기 안타를 보고 환호하는 사진이다.

2024년 6월 11일부터 이어진 대체선발 2명 포함한 대구 LG전에서 스윕을 달성하는 기적적인 결과가 나오자 LG와 삼성 모두에서 감독을 맡았지만 삼성 시절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좋은[6] 류중일과 역시나 두 팀 모두에서 뛰었으나 해당 시리즈에서 친정사랑을 시전한 박해민 등이 함께 추가되어서 스파이 밈이 절찬리에 퍼지고 있다.

비단 위에 서술한 인물들 뿐만 아니라 24시즌 SSG[7], 두산처럼 특정 팀에게 약한 팀이 그 팀의 팀 응원가를 부른다거나, 심지어는 응원가와 전혀 상관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부분만 따로 떼서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방출된 동료를 찾는다거나, 주자가 없으니 내보낸다는 등의 바리에이션도 등장하였다.

김상수는 진짜 부르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8]

3.4. 영광의 순간들

파일:이승엽/삼성 라이온즈/2015.jpg
2003년 6월 22일, 세계 최연소 300홈런
파일:external/weekly.chosun.com/2120_55_02.jpg
2003년 10월 2일, KBO 리그 홈런 신기록(56호)[9]
파일:20171003000136_0.jpg
2017년 10월 3일, 은퇴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

4. 가족

4.1. 결혼 및 아들부자

파일:이승엽 가족.jpg
2017년 이승엽 은퇴경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5. 취향

6. 인맥

7. 기타 이야깃거리

파일:hxdOcWV.jpg

파일:이승엽 평창올림픽.jpg
Q: 야구를 그만 둔 이유
A: 후배들과 한국 프로야구를 위한 것이고 현역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으며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를 다시 보내기 싫기에 다시 야구를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Q: 야구를 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는 질문
A: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중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Q: 본인에게 삼성 라이온즈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
A: 본인의 꿈이었던 구단이며 앞으로 지도자가 된다면, 삼성 이외의 유니폼을 입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운동으로 성공하는데에는 재능과 노력,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1] 종목은 다르지만 이와 반대되는 케이스가 안정환이다. 안정환은 지금도 이탈리아에 갈 수 없다고 한다.[2] 여담으로 이승엽은 2008년 일본시리즈를 보면 알듯 바다건너 일본에서도 비밀사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3] 2024년 최종 두산의 대 삼성전 전적은 4승 12패로 매우 열세인 상태이다.[4] 엘도라도 응원가의 가사인 '최강삼성 승리하리라 오오오오'를 조용히 몰래 부른다는 뜻이다.[5] 주로 김한수 코치가 있는지부터 찾는데, 김한수 또한 삼성의 레전드다 보니 원본 밈에서는 "한수형도 같이 불러야 된다" 같은 드립이 따라나오고는 한다.[6] 삼성 시절은 말할 필요도 없는 프랜차이즈 역대 최고 감독이나 LG 시절은 암흑기 탈출인 2013시즌 이래 최악의 감독 중 하나로 언급된다.[7] 7월 4일 기준 NC에게 1승 9패 기록 중이다.[8] 번외로 외야수들은 경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팀의 응원가를 따라부르며 경기에 몰입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며, 이는 외국인 선수도 마찬가지이다.[9] 2023년 현재까지도 한국프로야구동양인 단일시즌 공동 최다 홈런 기록이며,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야구에서도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깨뜨리기 이전까지 최다였다. 3루 베이스를 돌고 있는 이승엽을 축하해주는 코치는 류중일이다. 이 기록은 2022년에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56홈런을 치면서 타이.[10] 결혼 생활 때문에 캠퍼스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어찌어찌 졸업은 했다고 한다.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이승엽을 따라 일본을 간 후 중앙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니혼대학교에서 1년 반 정도 학교를 다니며 졸업장을 땄다고.[11] 둘째 아들의 이름이 '은엽'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승엽의 마지막 올스타전 시타자로 나왔을 때 입은 유니폼 마킹은 '이은준'으로 되어 있었다.[12] 증언이라기보다는 경북고 문서에 기록된 부분을 인용.[13] 한국인 대다수가 행운의 숫자로 여겨 좋아하는 숫자이다.[14] 36번에 대해서는 이 감독이 36번을 감독으로서 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사했다.[15] 36, 33, 25, 3번.[16] 1위는 총액 2000억 3000만원을 기록한 추신수로 총액 1521억 4000만원을 벌어들여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류현진이 향후 연봉에 따라 1위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있으나 이 기록 또한 1497억 5700만원을 벌어들인 이정후가 갈아치울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17] 야구선수들이 운동선수치곤 유독 흡연자 비율이 높은 편이다. 경기시간 내내 뛰어다니는 종목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심폐지구력이 덜 요구되기 때문.[18]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8 베이징 올림픽. 참고로 WBC의 경우 2006년 대회 한정으로 병역특례가 적용되었다.[19] 비슷한 사례로 정대현이 있다. 정대현은 경희대학교 4학년 시절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혀 동메달을 목에 걸었기에 이때 병역특례를 받았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전에 제2국민역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20] 직접 옆 소파에서 보고 작성한 내용인데 당시 이승엽에게 사인 부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처연하고 인터뷰에 몰입해 있었다.[21] 일본에서 이승엽의 별명은 아시아의 대포였다.[22] 카와카미의 빈볼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하자면, 2005년 5월 20일 교류전 경기였던 주니치 대 롯데 경기에서 8회 2사까지 주자를 한 명도 내주지 않았던 카와카미는 이승엽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퍼펙트 게임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당시 빈볼은 이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결국 보복구도 통하지 않고 되려 큰 홈런을 얻어맞아 버렸다.[23] 여담으로 <성공시대>에 출연할 당시 만 23세로, 이 프로그램 전체로 통틀어 봤을 때 최연소 출연자였다.[24] 이런 이야기는 사실 과거 다른 유명 야구인들에게도 흔히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재일교포 스포츠인의 신화이자 위대한 야구인인 장훈과 한때 같은 팀에서 뛰었던 백인천 역시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 숙소에 있는 식당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장훈이 불 꺼진 식당 구석에서 속옷만 입은 채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걸 보고 “장이형, 뭐하우?”라고 하자 “오늘 훈련할 때 좀 스윙이 안 좋아서 잠깐 연습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최고의 타자였던 그가 자신의 위치에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한다는 걸 알고 크게 감명을 받아 자신도 더 노력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25]수성알파시티역.[26] 군 면제를 이미 받아 놓고 대학을 갔다.[27] 다만 이승엽은 은퇴식이었던 반면, 이니에스타는 고별식이었다. 이니에스타는 캄 노우에서 고별식을 치른 뒤 일본의 빗셀 고베로 이적했다.[28] 타자로서의 롤모델은 이만수였다.[29] 1998년 대구대학교 입학 목적으로.[30] 이승엽야구장학재단[31] 두산 시절에는 이승엽을 상징하는 번호인 36번을 달았었고, kt로 트레이드된 후에도 36번을 선택했다. 삼성으로 이적할 때에는 36번이 영구결번으로 남아있으니 이렇게 된 것이라고.[32] 하지만 두산과의 PO에서 패하며 최종 순위는 3위를 기록하게 되었다.[33] 특히 2008년 한신과의 13경기차를 만회하고 역전 우승하는 데 기여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34] 게다가 이승엽이 요미우리 초창기 엄청나게 활약하자 한국의 방송사들이 요미우리 구단에 1년에 수십억 원을 중계권료로 지불하면서 연봉 보전을 성공적으로 해 주면서 금전적인 손해는 거의 없었다. 어차피 연봉만큼 중계권료를 받고 경기에서도 활약하면 데려온 값은 하는거다.[35] 사실 성적만 보면 그럭저럭 평타는 친 선수들도 많은데, 교진의 문제는 돈을 시세보다 너무 많이 준다는 점. 원래 잘하던 선수는 당연히 많이 주고, 이승엽이나 후일의 카타오카, 노가미, 게레로, 야마구치, 카지타니 등등 커리어 내내 시원찮다가 딱 한해 잘한 성적을 찍은, 누가 봐도 FA로이드인 선수들도 덮어놓고 비싼 값에 모셔온다. 이러니 당연히 먹튀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야마구치와 카지타니의 경우는 전성기가 지나서 요미우리에 들어온 이후 드러누우면서 그야말로 망해버렸다. 야마구치는 잠시 메이저리그에 진출 했지만 그 전에 쳐놓은 사고가 많아서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다.[36] 당장 다니시게는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홈런 두 방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 2007년에는 요미우리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당시 리그 최소 피홈런을 기록하던 아사쿠라가 이승엽에게 동점 홈런을 얻어맞아 리그 우승 타이틀을 요미우리에게 내줘야 했고, 바로 다음해인 2008년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는 당시 팀 에이스 가와카미 켄신이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역전 쓰리런을 얻어맞는 바람에 시리즈를 내준 바 있다.[37] 이승엽 감독은 현역 시절 36번(삼성, 지바 롯데), 33, 25번(요미우리), 3번(오릭스)과 감독 데뷔 후 77번(두산)을 사용했다.[38] 강병식 코치는 3번을 사용하지 않았다.[39] 강병식은 우투, 이승엽은 좌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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