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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20:04:39

자가(호칭)


왕족 또는 귀족에 대한 경칭 (서열순)
폐하(陛下) / 성하(聖下) 전하(殿下) / 예하(猊下) 저하(邸下) / 은하(恩下) 합하(閤下) / 각하(閣下)
대하(臺下) / 절하(節下) 궤하(机下) / 안하(案下) 좌하(座下) / 귀하(貴下) 족하(足下)
조선의 용어 (서열순)
마마(媽媽) 마노라(抹樓下) 자가(自家) 대감(大監)
영감(令監) 원님(員님) 나리(進賜) 선생(先生)

1. 개요2. 기록
2.1. 대군 및 군2.2. 공주, 옹주2.3. 군주, 현주2.4. 무품빈 및 정1품 빈2.5. 친왕 및 비(대한제국)2.6. 기타
3. 자가의 유래 및 표기
3.1. 自家와 慈駕
4. 사용 빈도

1. 개요

國俗稱王子大君王孫爲自家 或呼資階者非也 國初亦呼進賜 今則通稱百官
나라의 풍속에 일컫기를, 왕자와 대군, 왕손을 자가(自家)라 하였다. 혹 직품과 관계가 있으면 그리 부르지 않기도 했다. 나라 초기엔 나으리進賜라 부르기도 했으나, 나으리는 오늘날 백관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 이재난고 14권 #
東人稱宗室貴者日自家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실의 귀한 사람을 일러 '자가(自家)'라 한다.
- 순암집#

자가()조선 시대 의 가까운 자손, 즉 왕자(대군, ), 왕녀(공주, 옹주), 왕세자의 아들(군), 왕세자의 딸(군주, 현주)[1], 혹은 후궁 무품빈 및 정1품 [2]에게 붙는 존칭이다. 오직 조선에만 존재했던 호칭으로 한국사의 다른 왕조들과 중국, 일본에는 이런 호칭이 없었다. 즉 한국의 다른 왕조들과 중국, 일본에서는 군주의 후궁이나 왕족에게 '자가'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조선 왕실 경칭 '자가'의 표기가 '慈駕'이며 여성에게 쓰던 경칭이라 널리 퍼져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해당 주장은 196~70년대 김용숙 박사와 황경환 박사가 당시의 한정된 자료만 보고 내린 결론으로, 지금은 수많은 문헌이 발굴되고 해석되며 自家라는 것이 명확히 밝혀졌다. 아래 문단 서술을 보면 알겠지만 '自家'가 옳은 표기이며 왕자에게도 두루 썼던 경칭이다.

자가의 유래는 중국어로 '자기 자신'를 뜻하는 자기(自己)/자가(自家)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대어의 '당신이' 라는 3인칭 재귀적 존대어로 쓰이다 3인칭 존칭어로 자리잡은 것이다. 한국고문서학회 명경일 박사는 ''자가’는 ‘자기(自己)’의 의미로써, 예스럽게 조금 높여 이르는 3인칭이다.'라고 덧붙였다.

보통 드라마나 소설에서 왕자, 왕녀와 빈을 '대군 마마', '공주 마마', 'O빈 마마'로 부르지만 이는 심대한 고증오류다. '대군 자가', '공주 자가', 'O빈 자가'가 옳은 고증이다. (대감 호칭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고) 실제로 자가를 마마라고 불렀다면 역모죄로 의금부에 잡혀갔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왕녀왕자는 보통 '아기씨'로 불린다. 그러나 봉호를 받지 않은 아기 옹주를 '옹주 자가'라고 칭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3] 책봉 전에도 왕자, 왕녀에게 자가 경칭을 쓸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자는 보통 '대군 자가', '군 자가'로 불리며, '왕자 자가' 또는 '왕자군 자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4] 왕녀와 왕손녀는 '공주 자가', '옹주 자가', '군주 자가', '현주 자가'라고 불렀다.

승정원일기에서 왕의 가까운 자손들과 관련한 예를 논하는 부분에서 주로 왕손의 구분을 '대군, 왕자, 적왕손, 공·옹주, 군·현주'로 분류하는데, 아마도 이들에게 '자가' 경칭을 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5]

민간에서도 상대방 혹은 제3자를 높여 이르는 말로 '자갸', '자걔'라는 말이 쓰였다. 세조 시기 편찬된 월인석보에 보살, 미륵 '당신이'의 뜻으로 '자걔, 자걋' 등이 쓰였으며, 1850년 여강 이씨가 남편 김진화에게 쓴 편지에서 남편과 아주버님을 이르는 말라 '자갸'라는 표현이 쓰였다. 명행정의록, 효의정충예행록 등의 한글 소설에도 '자갸', '가' 등의 표현으로 같은 용법으로 자주 쓰였다.

중세 국어에서 '자가(자갸)'는 부처, 보살 등을 이르는 존칭어로서 쓰였으며, 근대에 들어서 존중어로서의 현대어의 '당신'에 해당되었다.[6] 또한 15세기 국어에서 강조적, 재귀적, 존대적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7]

1960년대까지 간간이 썼던 '자갸'라는 말은 옛 존칭 자가(自家·‘당신’이란 뜻)가 변한 말이다. 원말인 ‘자가’를 제치고 ‘자갸’가 표준어로 올랐다. 3인칭 대명사였던 ‘자기’를 예스럽게 조금 높여 이르는 말로,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옛 신문을 보면 1960년대까지 이 말을 간간이 썼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이성간에 친근함을 담아 '자기야'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이 바로 자가에서 유래된 것이다.

2. 기록

2.1. 대군 및 군

왕의 아들인 대군과 군, 왕세자의 아들 군은 보통 '대군 자가(大君自家)' 또는 '자가(自家)'로 불렸다. 또한 '왕자군 자가', '왕자 자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왕자와 왕손이 봉군된 뒤에는 '대감'이라 불렸다고 알려져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8] 왕의 아들과 왕세자의 아들은 봉군되기 전에는 '아기씨' 또는 '자가', 봉군 이후 '자가'로만 불렸다.[9][10]

이재난고에 '왕자와 왕손 중 직품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자가'라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쓰여있기도 하다. 만약 왕자가 세자가 되면 '세자 저하', 세손이 되면 '세손 각하'와 같은 것이다. 이외에 왕자가 자가가 아닌 다른 경칭으로 불린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11]

왕자가 봉군되면 무품에 해당하기 때문에 원칙상 '대감'으로 불릴 수는 있다. 그러나 대감 호칭은 정2품 당상관 이상이면 모두 불릴 수 있는 호칭이나, 자가는 고위 왕족만 받을 수 있는 더 높은 경칭이었다. 왕자에 대한 대감 호칭이 자가 경칭보다 우위에 있거나 빈번하게 불렸을지는 회의적이다. 빈번히 불렸다면 왕자가 자가라 불린 사례만큼 왕자를 대감이라 부른 사례도 많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높은 '자가' 경칭을 바칠 수 있는데 굳이 '대감'으로 낮춰 부를 이유가 없다.

왕족이 대감이라 불린 사례는 종친부에서 정2품 이상의 군 봉작을 받거나[12], 높은 관직에 제수되어 당상관에 이르러 불린 것이다. 왕족이 아닌 사람이 공을 세워 봉군되어도 이와 마찬가지로, 작호와 상관 없이 그 사람의 직계가 당상관에 이르렀기 때문에 대감이라고 불린 것이다. 정2품에 미치지 못한 이들은 군 봉작을 받았어도 'OO군 영감'이라 불렸다.

아래는 왕의 아들을 자가라고 부른 기록들이다.
二月 二自家惠送紙十東 硯一面 墨五笏
三月 兩自家惠送朔紙 二卷 筆五枚 墨三笏 黃柑十枚
右 壬申 正月十七日 自家惠送
2월 : 이자가 (봉림대군)께서 종이 10속, 벼루 1면, 먹 5덩이를 보내주셨다.
3월 : 두분 자가께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삭지 2권, 묵 5자루, 먹 3덩이를 보내주셨다.
이상은 임인년 정월 십칠일 자가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 1632년 윤선도 은사문 (봉림대군방에서 보낸 선물 목록)#
봉림대군방에서 보내온 선물 목록에 윤선도가 기록을 덧붙인 것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이(二)자가'라고 부르고 있다. 이 외에도 윤선도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으로 지내며 대군방에서 선물을 많이 받았고, 이때 받은 기록을 모두 남겨두었다. 역시 대군을 모두 '자가'라고 부르고 있다.
柳承旨最後扶疏醉入來蹲座則座客謂曰大君自家在此矣柳承旨顚倒起拜稱小臣不察云座
유승지(승지 유도삼)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좌객이 "(인평)대군 자가께서 계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승지가 깜짝 놀라 일어나 절을 하며 '소신의 불찰입니다'라고 말했다.
- 추국일기 3권 #
효종7년 5월 13일 유도삼이 왕이 아닌 대군에게 '칭신(신하라 칭함)'한 사건으로 의금부에서 추국받을 때 한 증인의 기록이다. 증인은 인평대군을 '대군 자가'라 불렀다.
我朝義原君。麟坪大君之孫也。嘗遊海西。有一人來見曰。小人祖母以自家(東人稱宗室貴者曰自家。)婢子。犯過逃亡。今已許多年。而子孫甚繁矣。隱漏不見。罪莫大焉。故敢此進告。願有以處之。
아조(我朝)의 의원군(義原君)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손자이다. 일찍이 해서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소인의 조모는 자갸(自家)(저자주:우리 나라 사람이 종실의 귀한 자를 ‘자갸’라고 부른다.)의 계집종이었습니다. 잘못을 범하고 도망하였는데,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자손이 매우 많습니다. 숨어 살면서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죄가 더없이 큽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나아와 고하는 것이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하였다.
- 순암집#이미지
여기서 저 사람이 말한 '자갸'(자가)'는 '인평대군'이다. 이 사람의 할머니가 인평대군의 여종이었으며, 그 손자가 인평대군의 손자인 의원군에게 찾아와 할머니의 죄를 대신 고하고 벌을 내려달라 청한 것이다.
兩自家講小學以爲涵養之本。(...) 伏願自家因箴以自警。
지금 두분 자가께서 소학을 강독하시며 함양을 근본으로 삼는다.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자가께서 잠(箴)으로 인해 스스로 경계하시길 바란다.
- 서계선생문집 권3 잠(箴-훈계하는 글) #
이득윤은 선조시절 (1600년) 일 년간 왕자사부를 맡아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광해군은 세자로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따로 받았고, 서출 왕자 여럿을 가르쳤는데 그 중 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光海之廢赴江華也 士民擁路觀者 或爲之泣 押去都事曰 人心如此 自家若不廢母殺弟 則豈有今日之行哉
광해가 폐위되어 강화로 향할적에 선비와 백성이 나와 구경하니 우는자도 있었다. 압송해가는 도사가 말하기를, "인심이 이러한데 자가께서 폐모살제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오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 이재난고 14권#
인조반정 이후 폐위되어 세자 책봉 전 봉호인 광해군으로 돌아간 광해에게 하급 관리가 '자가'라고 부르고 있다.
而已至撥所喝曰, 王子君自家來臨云。
이미 발소撥所에 이르러 고함쳐 이르기를, 왕자군 자가께서 왕림하였다고 아뢰었다.
王子自家, 參於茶禮, 而不得參於節祀, 故十六日自峯峴直到陵所, 留一日,仍向高靈山所, 亦留一日
왕자 자가께서 다례에 참여하시나 절사엔 참여하지 못하시니, 16일 봉현에서 곧장 능소로 도착해 하루 머무르고 이어서 고령산으로 향해 또 하루를 머무셨고
승정원일기#
영조의 왕세제 책봉 전날 행적을 기록한 부분이다. 왕자군은 왕의 서자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숙종의 서자이자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왕자군 자가', '왕자 자가'로 부르고 있다.

2.2. 공주, 옹주

왕의 딸 역시 '공주 자가', '옹주 자가'라고 불렸다.
아래는 공·옹주자가라고 칭한 기록들이다.
샹이 동쟉(銅雀)의 니라샤 비로소 그 긔별을 드라시고 급히 니공 졍귀(李公 廷龜) 신공 익셩(申公 翊聖)을 명하샤 자가를 마자오시다
상(임금)이 동작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기별을 들으시고 급히 이공 정귀와 신공 익성에게 명하여 자가(정명공주)를 맞아오셨다.
- 조야회통 갑신 이십이년 동양위 신익성의 졸기#
선조의 사위였던 동양위 신익성의 졸기와 관련한 기록이다. 이괄의 난 때 상황을 묘사한 기록 중 일부로, 당시 신익성은 삼궁을 호종하고 있었다. (당시 대비, 중전, 인조의 생모 구씨) 이때 위험한 상황에 인조의 명으로 이정귀와 함께 정명공주를 맞아 피난시킨 것을 이르는 내용이다.
자가 슈자 흉배도 잇사올 거시니 흉배와 자가 홍댱삼의 안고인 후슈 폐슬 패옥은 쓰이와사올디라도 그려 쓰이옵고 잇사올 듯하오니 한대 드려보내오시고 삼간택의 입고 나아오신 초록 단녕도 잇삽거든 한대 드려보내오쇼
자가(덕온공주)의 수놓은 흉배도 있을 것이니 흉배와 자가의 붉은 장삼에 단 후수, 폐슬, 패옥은 쓰였을지라도 그려 쓰였을 듯하니 한데 들려보내시고, 삼간택에 입고 나가신 초록 단령도 있거든 한데 들여보내십시오
-원 상궁이 윤의선에게 보낸 편지#이미지
순원왕후전 제조상궁 원 상궁이 덕온공주의 남편인 남영위 윤의선에게 보낸 편지로, 덕온공주의 의상과 관련한 내용이다.
公主自家出闕道路自耀金門由把子橋大路由校洞至...
공주자가께서 궐을 나오시어 가는 길은 요금문에서 파자교를 지나 대로를 이어 교동에 이르고..
- 명온공주가례등록#
醫官鄭檍書啓, 醫女言內, 德溫公主自家始産之意, 詮次啓達。 傳曰, 知道。
又書啓, 醫女言內, 德溫公主自家, 胞衣順下, 羹飯亦爲善進之意, 詮次啓達。 傳曰, 知道。
又書啓, 德溫公主自家, 今月二十八日三更二點, 順生女阿只之意, 詮次啓達。 傳曰, 知道。
의관 정윤서가 아뢰기를, 의녀가 말을 전하니, 덕온공주자가께서 아이를 낳았으니 차례를 정해 임금께 아뢰라 하였다.
다시 윤서가 아뢰기를, 의녀가 말 전하니, 덕온공주자가께서 태반이 순조롭게 나왔으며, 갱반을 잘 소화하고 있다 임금께 아뢰라 하였다.
다시 윤서가 아뢰기를, 덕온공주자가께서 금월 28일 삼경 이점(시간), 딸 아기씨를 순산하였으니 임금께 아뢰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위 기록을 통해 공주를 '공주 자가'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傳敎本宮自家封爵以後至今朔儲蓄祿米太領納云云
전교를 내리니 본궁 자가의 봉작 이후 지금까지 저축한 녹미와 콩을 영납하라 하였다.
- 명온공주방가례등록#
壬辰五月二十六日 本宮自家敎是移接于樂申軒 六月十三日戊子丑時 卒逝于樂申軒溫堗
임진(壬辰) 5월 26일에 본궁 자가께서 낙신헌으로 으로 이접(移接)하시었다. 6월 13일 무자(戊子)시 낙신헌에서 졸서하시었다.
- 명온공주방상장례등록#
공주를 '본궁 자가'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문헌의 주체가 되는 대상이나, 휘하의 사람이 자신의 주인을 부를때 '본궁 자가'라고 했을 것이다.
麟坪大君 房陪奴故恐有漏通婢矣身所聽處 切不言其宮之事分叱不喩翁主自家進去于其宮時段置矣身亦不率去爲白齊腹心使喚
인평대군은 곁에서 노비가 모시기 때문에 혹시나 여종이 우리에게 들은 비밀을 누설할까봐 걱정되어 절대 궁중의 일을 말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효명)옹주자가께서 궁으로 갔을 때에도 사람을 거느리고 가지 아니하옵고 믿을 수 있는 자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 효종2년 국청일기#
新生翁主二翁主自家有紅疹之
새로 태어난 옹주, 둘째 옹주자가께서 홍진(홍역)에 걸려
- 효장궁일기#
여기서 말하는 옹주 자가는 당시 태어난지 돌이 지나지 않은 영빈 이씨 소생 이옹주이다. 봉호를 받기 전 왕의 서녀도 옹주 자가라 부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淑善翁主自家制服長衫頭𢄼羅兀次生細布
숙선옹주자가 제복 장삼 두수(머리띠) 너울 삼베
- 현목수빈빈궁혼궁도감의궤#
위 기록을 통해 옹주를 '옹주 자가'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2.3. 군주, 현주

왕세자의 딸 역시 '군주 자가', '현주 자가'라고 불렸다.
아래는 군·현주를 자가라고 칭한 기록들이다.
계ᄉᆞ듕츈의 곽댱냥문녹을 ᄡᅳ이고 두 궁과 모든 ᄂᆡ인들이 벗기니 일권 일궁 이권 이궁 ᄌᆞ가 ᄡᅳ오시니 후ᄅᆡ의 뉘 글시 줄 모ᄅᆞᆯ거시니 표ᄒᆞ야 두라 ᄒᆞᄋᆞᆸ샤옵기 ᄡᅥ두옵ᄂᆞ...
계사중춘의 곽장양문록을 쓰이고 두 궁과 모든 내인들이 벗기니 일권 일궁(자가) 이권 이궁 자가 쓰오시니 후래에 누구 글씨인 줄 모를것이니 표기해두어 하옵샤옵기 써두옵나...
-홍태한 소장 곽장양문록 1권 표지 안쪽[13]
일궁 자가는 사도세자의 장녀인 청연군주, 이궁 자가는 사도세자의 차녀인 청선군주를 말한다.
晝茶禮兼行王大妃殿別茶禮兩郡主自家自內設行爲為之
주다례를 겸해 왕대비전 별다례에 두분 군주자가께서 대궐 안에서 설행하시었다.
-문희묘일기#
여기서 두분 군주 자가는 사도세자의 딸인 청연군주청선군주를 말한다.
二郡主自家敎是喪出故二十日習儀二十一日行傳曰..
이군주자가께서 졸하시어 20일 훈련은 21일 행한다 전하여 가로되..
-훈국등록#
여기서 이군주는 사도세자의 차녀인 청선군주를 지칭한다.

위 기록을 통해 군주를 '군주 자가'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郡縣主自家制服長衫頭𢄼羅兀及守侍園官制服...
군주, 현주 자가 제복 장삼 두수 너울 및 수원관과 시원관 제복은..
- 현목수빈빈궁혼궁도감의궤#
현주 또한 '현주 자가'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헌경혜빈빈궁혼궁도감의궤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4. 무품빈 및 정1품 빈

왕의 후궁 중 무품빈 및 정1품 빈은 빈호 또는 별호를 붙여 'OO 자가'로 불렸다.
션왕의 션효(聖孝)를 생각하고 (가순궁)자가(自家) 졍승<셩>을 다하미니 한심(寒心)하며 감격하미 엇디 다 측냥(測量)하리오.
- 원본 한중록 제1편 읍혈록 中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가순궁 수빈 박씨를 자가(自家)라 부르고 있다. 수빈 박씨는 무품으로 입궁한 빈이다. 무품빈에 대한 경칭은 '자가'와 '마노라' 모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14]
禮曹啓言中部童蒙 李英上言以爲其五代祖贈吏判信瑄卽延祐宮靖嬪自家之祖也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부의 동몽 이영이 임금께 말씀을 올리니, 이조판서에 추증된 그의 오대조 이신선(李信瑄)은 연호궁 정빈 자가의 조부이다.
- 일성록 451책#
이신선은 정빈 이씨의 조부였다. 연호궁은 정빈 이씨를 모신 사당으로, 정빈을 칭하는 별호이기도 하다.

1882년 재간택시 상발기#에도 자가(自家)가 등장하는데, 순화궁 경빈 김씨로 추정된다.[15]

상술했듯 군주의 후궁을 '자가'라고 부른 것은 오직 조선대한제국만이 유일했으므로 한국사의 다른 왕조들과 중국, 일본에서는 군주의 후궁을 '자가'라고 하지 않았다. 이들은 군주의 후궁에게 다른 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일례로 중국 한족계열 황실의 예법에 따르면, 품계가 없고 서열만 존재하는 내명부서 빈 이상의 위치부터는 낭랑(娘娘) 또는 양양(孃孃)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고 그 아래인 귀인, 상재, 답응은 "소주" 라고 칭했다.

2.5. 친왕 및 비(대한제국)

대한제국 시기엔 내부적으로 조선의 호칭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왕자에 해당하는 제국의 친왕과, 조선의 빈에 해당하는 제국의 귀비 또는 비 역시 '자가' 라고 불리었다.
경차칠월 친왕자가, 순빈자가 봉작시 의복발기 (경자년 칠월, 친왕 자가와 순빈 자가의 봉작의례 시 준비할 의복 목록)
- 친왕자가 봉작시 의복발기#
여기서 친왕은 고종의 서자인 영친왕이고 순빈은 순헌황귀비이다. 대한제국 이후 조선의 경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영친왕 (조선의 군) 및 황제의 후궁 빈 (조선 순빈→얼마 뒤 순비 책봉, 직제 교체 혼란기로 곧 순비가 될 예정이기에 조선의 빈 예우에 따라 자가 경칭을 바쳤다)에게 자가 경칭을 사용했다.
계묘십일월초칠일 귀비자가 봉비시 의복 발기(뒷면)
귀비자가 봉비시 의복 발기#
귀비 역시 조선시대로 치자면 무품빈 정도에 해당하므로 자가 경칭을 바쳤다. 여기서 귀비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이다.

2.6. 기타

1882년 조선 마지막 무품빈인 경빈 김씨를 '자가'라고 경칭한 적이 있다.[16] 기존 표기와는 달리 자가(慈駕)라고 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1907년 의대발기 문서에 기재된 '빈 마누라'가 경빈 김씨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마누라로 경칭했다.이미지[17]
兩殿媽媽 慈殿媽媽 王大妃媽媽 順和慈駕 大監 本宮媽媽
양전마마 자전마마 왕대비마마 순화자가 대감 본궁마마
- 동궁마마가례시어상기#
순화는 순화궁 경빈 김씨를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自家라 쓰지 않고 慈駕라 표기했다.

여기서 대감은 흥선대원군이고, 본궁마마는 그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다.

3. 자가의 유래 및 표기

俗談自家謂之자갸者。出於漢語。按韻書家華音갸。
속설에 의하면 自家를 가리켜 '자갸'라 한다. 중국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운서韻書에 의하면 家의 음은 '갸'이다.
- 입재집#

자가의 유래는 중국어로 '자기'를 뜻하는 자기(自己)/자가(自家)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한국고문서학회 명경일 박사는 1628년 윤선도 은사문 해제에 ''자가’는 ‘자기(自己)’의 의미로써, 예스럽게 조금 높여 이르는 3인칭이다.'라고 덧붙였다.

자가(自家) 경칭 기록이 조선 중기 이후로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재난고에 이르기를 '조선 초기엔 왕자와 왕손을 나으리(進賜)라 불렀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조선 전기부터 두루 쓰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3.1. 自家와 慈駕

자가를 慈駕라고 표기한 경빈 김씨의 기록때문에 빈을 지칭할때는 自家가 아닌 慈駕로 표기한다는 설이 있었으나, 1794년 정조가 일성록에서 정빈 이씨를 '연호궁 사당의 정빈 자가(延祐宮 靖嬪自家)'라고 쓴 기록과 한중록의 기록을 미루어보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18]

경칭 '자가'를 自家로 표기 하다 조선 말기로 가며 혼동되어 慈駕라고 표기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경칭 자가自家의 기록이 불과 한 달 전 기록으로[19] 헷갈릴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인다. 또한 자가의 명확한 유래가 한자어 自家임을 명시하는 기록이 있으므로[20] 표기를 혼동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은 고종이 순종의 가례를 맞이하여 순화궁 경빈 김씨를 기존보다 더욱 예우하여 '어머니(慈)'의 뜻을 담아 慈駕라는 경칭을 바쳤다는 설이다.[21][22]

분명한 것은 조선 왕실 경칭 자가는 自家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며, 慈駕가 예외 사례라는 것이다.

4. 사용 빈도

흔히 사극 등에서 '대군 마마', '공주 마마'라는 말은 익숙하나 '대군 자가', '공주 자가'는 익숙하지 않을 텐데, 이는 역사물에서 왕족에게 마마라는 호칭을 붙이는 대표적인 고증 오류 때문이다.

왕실에서 '마마', '마노라' 경칭은 , 왕비, 상왕, 대비,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 세자빈 에게만 바칠 수 있었다.[23] 또한 민간에서 높은 신분의 여인을 마마, 마노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즉, 왕, 중전, 대왕대비, 왕대비, 세자, 세자빈을 '마마' 라고 부를 수 있었고, 왕, 중전, 세자, 세자빈, 무품빈을 '마노라'라고 불렀다.

따라서 왕자와 왕녀를 부를 때에는 '자가' 경칭을 사용해야 바른 고증이다. 왕자를 '대감'이라 부르는 작품도 간혹 있으나,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왕의 아들은 보통 '자가'라고 불렀다.

상궁을 칭하는 '마마님'과는 아예 다르니 주의해야 한다. 마마님은 정1품 빈을 제외한 후궁과 상궁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다.

2012-13년 방영된 MBC 해를 품은 달에서는 가상 인물인 민화공주를 혼인 전에는 애기씨, 혼인 후에는 자가라고 부르며 고증하였으나, 왕자인 양명군을 '양명군 자가', '왕자 자가'가 아닌 '양명군 대감'이라 잘못 불렀다. 작가가 60년 전 오류가 있는 연구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020-21년 방영된 tvN 철인왕후에서 가상 인물인 정1품 의빈 조씨 조화진을 두고 의빈 자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다만 '자가'보다 '자가님'이라고 부르는 오류가 있다.

2021년 방영된 MBN 보쌈-운명을 훔치다에서 광해군의 딸을 모티브로 한 인물인 화인옹주를 두고 옹주자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24]

2021년 방영된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 정조후궁화빈 윤씨의빈 성씨 성덕임에게 자가라고 호칭한다. 또한 혜경궁 홍씨게도 자가라고 하는데, 혜빈은 후궁이 아니라 왕세자빈이기 때문에 '저하'나 '마노라' 혹은 '마마'라는 호칭이 적합하다. 제작진 측에서 후궁 정1품 빈과 왕세자빈을 혼동하여 벌어진 고증 오류다.

2022년 대체역사소설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과 사극로맨스 웹소설 '비밀이 내게 걸어오면(이은비)'과 '은밀하게 전해드립니다(권도하)' 두 작품에서 대군 및 왕자군의 호칭으로 자가를 사용하며 제대로 고증하였다

2022년 웹툰 비에 젖은 흔적들이다에서 경빈 예씨를 '경빈 자가'로, 효림군을 '효림군 자가', '왕자 자가'로 부르며 고증을 지켰다. 2011년에 연재된 동작가의 같은 세계관 작품인 십이야(웹툰)에서는 장레이를 두고 '현빈 마마', '현빈 마마님'등으로 부르는 등 고증이 지켜지지 않았으나 차기작에서 시정된 것이다.

2022년 방영된 KBS 2TV 붉은 단심에서는 중전으로 내정되어 정1품의 품계를 받은 유정이 '내궁 자가'라고 불렸다.

2024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에서 진한대군을 '대군 자가'라고 부르며 고증을 지켰다. 드라마로서는 대군의 경칭을 옳게 고증한 첫 번째 사례이다.

2024년 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에서도 수성대군을 '자가'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왔다.
[1] 본래 대군의 적녀에게도 '현주' 봉호를 주었으나, 경국대전 반포 이후 세자의 서녀에게만 주는 것으로 바뀌고 대군의 적녀와 서녀는 '향주'가 되었다.[2] 이 빈은 왕세자빈이나 왕세손빈과 다르다. 왕세자빈과 왕세손빈은 품계를 가리지 않는 무품이며 왕세자빈은 '저하', 왕세손빈은 '각하'로 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빈'은 왕의 간택후궁 및 승은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인 무품 혹은 정1품의 자리이다.[3] 효장궁일기에서 돌이 되지 않은 영조의 왕녀를 '새로 태어난 옹주, 이옹주 자가'라고 칭했다. #[4] 승정원일기에서 왕세제 책봉 전 연잉군을 '왕자군 자가', '왕자 자가'라고 불렀다.#[5] 세자의 적장자인 원손에 대한 경칭은 밝혀진 바 없으나, 원손의 부인을 '원손부인'이 아닌 '원손빈'이라 이른 기록이 빈번한 것으로 보아, 미래의 왕세손 지위를 말미암아 '원손 마노라' 또는 '원손 마마'라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 국어국문학회 안병희(1963), 「자(ㅏ→·)갸」 어고(語攷)[7] 양영희(2004), 15세기 국어 '자갸' 기능에 대한 새로운 해석[8] 1963년 황경환 박사의 궁중어 사전, 1987년 김용숙 박사의 조선조궁중풍속연구 등에서 대군과 군이 무품인것을 들어 대감으로 불릴 수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공개되고 해석된 자료들로 미루어보아 왕의 아들인 대군과 군은 대감으로 불리지 않았다. 또한 대감은 자가보다 낮은 존칭으로, 대감이라 부르는 것은 신분을 내려부르는 행위이다.[9] 갓 태어난 왕녀와 봉군되기 전 왕자를 자가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예시 항목들 참고.[10] 원손의 호칭은 남은 기록이 없으나, 원손의 아내를 원손부인(夫人)이 아닌 원손빈(嬪)으로 칭한것으로 미루어보아, 미래 세손의 지위를 인정받아 원손마노라/마마 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사항은 원손 항목 참조.[11] 디지털장서각에 '의화군대감정자단자'라는 자료가 있으나, 이는 관리자가 붙인 자료명으로 실제 원문 텍스트는 의화군강(항아리)정자단자(義和君堈定字單子)이다. 또한 조선 말기 궁중예법을 상당부분 그대로 사용했던 대한제국 시기, 왕자군이었던 친왕들은 '친왕 자가'로 불렸다.#[12] 군 봉작에도 품계가 여러가지 있다.[13] 지연숙(1999)[14] 마누라 문서 참고[15] 당시 자가 경칭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경빈 김씨와 고종의 서자 의친왕 둘이었는데, 해당 문서 바로 다음에 '아기씨주물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아기씨가 당시 5살에 아무런 봉호를 받지 못했던 의친왕으로 보인다.[16] 정1품 빈과는 엄연히 다른 품계이다.[17] 디지털장서각에 1787 정미년이라 제목이 붙어있으나, 1907년 '정미정조 영친왕의복발기'와 종이, 글씨체, 문서상태 등 모든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907 정미년 문서로 추정된다. 클릭하여 비교해보자 여기서 말하는 '빈 마누라'는 그해 여름 사망한 무품빈 경빈 김씨로 추정된다. 디시털장서각엔 은근히 오탈자나 오기재된 자료명들이 많다.[18] 일성록 451책#[19] 위 1882년 재간택시 상발기[20] 입재집[21] 이전까지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慈駕'는 말 그대로 '자전의 수레/가마', 즉 '대비'를 뜻하는 말이었다[22] 다만 順和慈駕 기록이 나타난 1882년 당시 동궁의 가례 예식에는 순화궁 경빈 외에 자전(신정왕후 조씨)과 왕대비(효정왕후 홍씨)가 참석했기에, 같은 자리에서 과연 순화궁에게 '대비'를 뜻하는 경칭을 바쳤겠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여지가 있다.[23] 무품빈은 '빈 마누라'라고 불렀다.[24] 마마라는 호칭도 같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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