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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1:16:57

재한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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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재북 일본인4.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5. 재한일본인이었던 사람6. 재한일본인
6.1. 가수&연습생6.2. 배우6.3. 방송인6.4. 유튜버&BJ&스트리머6.5. 운동선수6.6. 기타
7. 관련 사건사고8. 대중문화 속의 재한일본인9. 같이보기

1. 개요

在韓日本人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1] 일본 기준으로는 자이칸(在韓)이라 불린다. 2021년 5월 31일 기준 재한일본인의 숫자는 27,764명이다.[2][3]

2. 특징

일제강점기 시대 한반도에 건너온 재한일본인은 일본 현지에서 가난하고 생계에 곤란을 겪던 사람들이 식민지에서 한 탕 해먹으려고 건너온 경우가 많았다. # 기본적으로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도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 한국인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성향이 강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권력을 등 뒤에 업고 많은 부를 쌓았다. (이권이 있는 파이는 수요는 많지만 공급이 적었다)

과거 재한일본인의 숫자는 19세기 말에 수백 명 수준이었으나 점점 늘어나 광복 직전엔 민간인만 70만, 군인까지 합하면 90만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불어났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재한일본인의 절대 다수는 일제 패망과 동시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남은 재한일본인은 광복 이후 한국에 남겨진 한국인들의 일본인 부인(모임도 있다)이 많았다.

35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 본토가 더 낯선 재한일본인도 많았기에, 떠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일부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역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한국 땅에서 모은 재산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4] 하지만 광복 이후의 혼란기에는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거셌고, 무엇보다 미군정소련군정이 이를 용납치 않아서 이들 대부분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채 강제 송환되었다.

그래서 재일교포와는 달리 현재 대부분의 재한일본인은 그 기원이 일제강점기에 있지 않다. 한국인과 결혼한 극소수의 일본인 처나 실수로 가족과 함께 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게 되어버린 사람이나 한반도에서 계속 살기 위해 한민족으로 위장한 이들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도 6.25 전쟁에 휘말려서 학살당하거나 한민족에 동화되거나 일본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거의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광복 후 한국인 남편들이 일본인 아내를 데리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 도망가거나 변심하여 쫓아낸 경우도 많았다. 경주 나자레원이란 곳이 이렇게 남은 일본인 여성들을 위한 요양원으로 1972년에 세웠다. 현재는 잔류한 일본인이 대부분 고령자[5]라 세상을 떠난 탓에 몇 명 안 남았다. 설립자는 김용성(1918-2003)인데 아버지가 일본인한테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일 간에 갈등과 차별 심하고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을 위해 세웠다고. 250여명이 이 시설에 와서 일본의 단체 등의 도움으로 147명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100여명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2023년 12월에 3명의 일본인 할머니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98세다.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

2014년 08월 05일 방영된 KBS '일본인 처' 다큐

일본인 처 문제는 거의 반세기 동안 역사문제나 국민감정 때문에 언론이나 매체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으나, 21세기 부터 점차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들 일본인 처는 여성이 살기 힘들던 구시대 시절 한국에 온뒤 온갖 고생을 했으며, 이마저도 남편에게 버림받은 경우에는 생계곤란과 성범죄를 당하는 등 목숨을 위협받으며 시달려야 했다. 아오키 츠네 할머니의 사연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1동의 일본인 마을은 1000명 넘는 일본인이 거주해 ‘리틀 도쿄’로 불리지만, 일본의 거리 모습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에 중장기적으로 머무는 일본인들은 한강변에 위치해 환경이 쾌적하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모여 들어 지금까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걸어서 골목길을 다녀 보면 ‘일본어 상담 가능’ 등의 문구를 적어놓은 일본인 대상 부동산 중개업소, 일본어를 병기한 안내표지판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선술집(아지겐)이나 우동집(미타니야)도 있다. 일본인 어린이만 다니는 유치원이 있고 부동산과 약국, 동네 병원, 은행 등에서도 일본어가 통한다. 또란 이 동네를 경유하는 시내버스의 경우 일본어 안내방송이 나온다. 예를 들어 6211번 버스라든지.

오늘날 재한일본인들 중에는 한국 주재 기업인들이나 국제 결혼한 사람들이 많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제일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동네인 한국 특성상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기독교 선교를 중심으로 뭉쳐있다. 숙명여대 근처에 통일교 신자인 일본인들이 많다고 한다. 뉴커머들에도 기독교가 많은 걸 보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가 많이 퍼지긴 한 모양. 한국 화교들도 기독교 비율이 높은 편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한일 외교 간의 정치 외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많이 고생하는 부류이다. 한일 무역 분쟁에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재한일본인들이 직장을 잃고 일본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국가로 이주하면서 2019년에 8만 명 대에 달하던 재한일본인 인구가 2020년에는 2만 명 대까지 크게 줄어버렸다. 한국에서는 재일교포에 관심이 많았지, 재한일본인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재한일본인을 다룬 문학은 고려대에서 출간한 식민지 조선의 기억에 실린 단편에서도 나온다. 여기서 재한일본인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결혼 기피 대상이었다.

3. 재북 일본인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93,340명이 북한으로 갔는데 이중 최소 6,839명이 한반도 계통의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이거나 그들 사이에 태어난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그 외에 북한의 외국인 납치 등으로 인해 북한으로 끌려온 일본인도 있다.

4.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

일본 내 중국계(대만계 포함) 주민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인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8.15 광복 후에는 이들의 이주가 없어졌다가 훗날 한일수교로 다시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한화교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며, 야마토 민족 혈통인 재한일본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5. 재한일본인이었던 사람

6. 재한일본인

6.1. 가수&연습생

6.2. 배우

6.3. 방송인

6.4. 유튜버&BJ&스트리머

6.5. 운동선수

6.6. 기타

7. 관련 사건사고

8. 대중문화 속의 재한일본인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재일 한국인 문제와 비슷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터부시되는 일이다. 재한일본인 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브라질일본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다뤄지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90년대 말부터는 부산 같은 곳을 배경으로 재한 일본인이 등장하는 소설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아예 없는 것처럼 치부하기도 힘든게 이제는 오히려 "어랍쇼? 부산이 배경인데 거기 사는 일본인이 왜 안 나옴?" 같은 말이 나올 정도로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이 많다는 걸 일본인들도 안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재미교포가 많이 거주하는 로스앤젤레스 정도 된다. 한편 부산에서 일본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네를 꼽으라면 단연 동광동이다. 동광동의 부산호텔은 일본인 전용 호텔이라 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거기서 부산데파트에 이르는 거리는 일본어 간판을 내건 상점들이 즐비하다.[9][10]

9. 같이보기


[1] 한국계 일본인 포함.[2] 파일:Screenshot_20210625-035232_Chrome.jpg[3] 따라서 대한민국국적이 없을경우에는 일본계 한국인은 포함이 안된다.[4] 재산적인면도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이 식민지 조선을 일본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재한 일본인들의 여러 수기를 보면 조선이 독립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조선인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거나 하는 등 적어도 이들에겐 식민지 조선은 자신의 고향이고 일본 본토가 오히려 철저한 타향이었다.[5] 1945년에 스무 살이라 쳐도 90세 가까이 되었다.[6]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일제강점기였으므로 당시에는 경성부였다.[7] 일본대한민국을 오가면서 활동한다. 코로나 19 이후로는 일본에서 머무르는 기간이 많다.[8] 서울지방법원은 '저항력이 없는 유치원생의 머리를 가격한 것으로 보아 살의가 없다고 볼 수 없다.'라면서도, 범인의 심신미약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여 형량을 고려하였다고 했다.[9] 물론 동광동이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들만을 위한 곳이라기 보다는, 일본인 여행자들을 위한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게 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로 숙박, 식당, 유흥, 환전 위주의 상점이 간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10] 물론 동광동 일대가 일본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지역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90년대에 해운대 신시가지가 개발된 후로는 해운대 쪽에도 집을 사려는 일본인들이 많이 생겼었다. 이들 일본인 중에는 한국에 한국인 현지처를 두고 현해탄을 오가며 두집살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