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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54:34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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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보병사단 주요 사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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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일자 사건명
<colcolor=#000,#fff> 1984년 06월 26일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
1998년 12월 4일 제22보병사단 불발탄 폭발 사고
2012년 10월 2일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2014년 6월 21일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2019년 4월 4일 2019년 고성-속초 산불
2020년 5월 1일 2020년 5월 고성 산불
2020년 11월 3일 북한이탈주민 철책 훼손 귀순 사건
2021년 1월 5일 제22보병사단 병사 폭행 사건
2021년 2월 16일 2021년 동해 민통선 무단침입 사건
2022년 1월 1일 귀순 탈북자 2022년 월북 사건
2023년 6월 25일 고성 제진검문소 민간인 무단침입 시도 저지사건
2023년 10월 24일 2023년 속초 목선 귀순 사건
2024년 8월 20일 2024년 북한군 하사 귀순 사건
† 동일 인물에 의한 사건 }}}}}}}}}

1. 개요2. 전개3. 조준희 일병은 왜 월북을 하였는가?4. 관련 문서

1. 개요

1984년 6월 26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에서 복무 중이던 조준희 육군 보병 일병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해, 12명을 살해하고, 11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월북한 사건.

참고로 본 사건에 대한 기사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난리 났을 사건이지만, 1994년에 개정될 때까지 군사기밀보호법 제11조에 따라 보도 자체를 원천 금지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에도 여타 이슈에 밀리면서 남북의 창이나 통일전망대 등에 가끔씩 언급되거나 22사단 제대자들에 의해 후문이 전해지는 수준에 그쳤다가, 2005년 530GP 사건을 계기로 연합뉴스가 제대로 된 보도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환경운동가 서재철의 2015년 저서 <지구상의 마지막 비무장지대를 걷다>에서 본 사건을 언급했다.

2. 전개

1984년 6월 26일 오전 10~11시경 강원도 동부전선 까치봉에 있는 육군 22사단 제56보병연대 4대대 TOC 상황실에서 522GP로부터 아비규환전화보고 소리와 수류탄 폭음이 들리면서 사건이 알려졌다. 초기접보시에는 북측의 강습으로 판단했으나,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소총을 난사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으며, 사건 바로 다음 날 조 일병의 대남월북권유 방송을 통해 조 일병의 월북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로동신문은 한 달 후인 7월 26일에 <남조선괴뢰군 사병이 헌병초소를 까부시고 공화국북반부로 의거>라는 기사를 게재함으로 공식적으로 월북을 알렸고, 조준희의 얼굴, 나이, 소속 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조 일병은[1]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3학년[2]까지 다니고 22사단에 입대한 후 56연대 4대대 특공 13중대에 배치되어 군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일 새벽 치밀한 계획하에 내무반에서 잠을 자던 사병들에게 M16A1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했으며, 총에 맞은 피해자들은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한편, 도주하던 조준희 일병을 추적하던 13전초중대 수색대원 3명이 지뢰, 오발 사고 등으로 순직했다. 해당 GP 신임 소대장 소위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이 사건으로 당시 사단장 장기하 육군 소장, 연대장, 대대장 곽근용 육군 보병 중령 모두 보직해임/전역 조치되었다.[3]

사건의 규모나 파급효과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군 건군 이래 최악(아군 사살+에게 투항)의 총기사고로 기록될 정도로 심각했지만, 제5공화국 정권에서 보도지침과 같은 언론통제 정책을 강력히 시행한 데다, 1993년 이전까지 군사기밀보호법상 TV나 출판물 등지에서 보도가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 군 사고로 처리되어 유가족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2006년에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초로 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다.

한편, 동료를 사살하고 월북했던 조 일병은 월북 이후 1달여간에 걸쳐 대남방송을 통해 월북 조장 방송 및 매체 등에 출연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2사단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전방 경계근무를 설 때마다 조 일병의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치를 떨어야 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뿌린 삐라에 나온 조준희의 모습
조준희는 사건 이후에도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 방송에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북한의 언론에 등장한 사례는 없고,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되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며, 이러한 주장들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6.25 전쟁 이전에 월북8연대 강태무, 표무원 육군 소령도 처형당했다는 설이 많았으나, 둘 다 2000년대까지 80세가 넘도록 북한에서 천수를 누리고 사망한 것으로 보았을 때, 조준희도 현재까지 천수를 누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4]

황해북도 사리원시 인민위원회 과장직을 역임하고 있다고 대남선전에 나온 적이 있는 걸로 봐서는 현재 북한에서 살아 있는 걸로 보인다. 80-90년대 대남선전지를 몇 번 확인해 보면, 월북자 가족 소개 사진에 나온 조준희는 아내와 쌍둥이 두 아들을 데리고 북한에 살고 있는 듯하다.

참고로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1999년 6월 26일에 만료되었고, 설령 공소시효 만료 전에 불구속 기소되었다면 재판시효도 2014년에 만료된 것으로 보인다.[5] 하지만 내란죄에 해당한다면, 공소시효[6]가 없어서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남북통일된 후에야 이 사건의 처벌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3. 조준희 일병은 왜 월북을 하였는가?

최전방 부대로 강제 배치된 조준희 일병의 범행 및 월북 동기는 여러가지로 조사되었지만, 제5공화국 출범기였던 1984년 당시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정치상황과 연계된 자생 좌파라는 설과 군대 내의 폭력 문화의 비극이란 설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강제입대한 데다, 월북 직전에 휴가 때 여자친구와 이별하는 등의 행동을 볼 때[7] 전자가 범행 동기로 강력히 대두되었으나, 조 일병의 대남방송에 따르면, 군대 내 극심한 폭력이 원인인데, 자신이 대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것을 가지고 선임병들이 '데모하다 끌려왔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8]

제5공화국 시절에는 대학 교수의 울며 겨자먹기식 승인 하에 운동권 대학생을 강제 입대시키는 지도휴학 제도가 있었는데, 국군보안사령부가 학생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주도한 일명 녹화사업으로 이는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이나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묘사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대개 사살되거나 자살로 끝장내는데, 월북까지 감행한 것을 보면,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우발적인 범행인데, 피해가 피해인지라 이미 정상적으로 살 길이 없으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다.

4. 관련 문서


[1] 북한은 7월 26일 기사에서는 조준희의 고향을 서울 양천구 신정동으로 소개했는데, 8월 9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준희는 자신의 고향이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이라고 밝혔다.[2] 당시 대한민국 국군 의무 복무자들 사이에서는 이라는 아주 못된 문화가 있었는데, 나이를 많이 먹고 입대할수록 똥군기를 심하게 가했다. 특히, 삼수를 한 뒤 대학교 4학년까지 마치고(졸업하고) 이등병으로 입대할 경우, 지옥을 맛봤다.[3] 이후 장기하는 하나회 멤버로 전두환의 비호를 받아 청보식품 사장을 거쳤고, 1985년부터 8년간 (주)진로 사장을 지냈으며, 1990년 진로그룹 주류/식음료부문 부회장, 1992년 회장, 1995년 고문을 지내면서 1997년 퇴직할 때까지 장진호 그룹회장을 모시기도 했다.[4] 강태무는 1980년 북한에서 만든 기록영화인 <조국해방전쟁사>에 출현하여 자신이 미국이 지원한 이승만 정부의 학살 만행에 분노하여 월북을 했다고 증언했다.[5] 북한은 법적으로 반국가단체이기 때문에 헌법상으로도 북한의 영토는 대한민국의 영토이며, 해외 도피로 인한 공소시효 정지를 적용하지 못한다.[6] 내란죄는 1995년에 공소시효가 철폐되었다.[7] 왜냐하면 그 시점에 이미 사고칠 결심을 했기에 이별을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8] 3학년을 마치고 늦게 입대한 케이스라, 실제로 데모하다가 강제 입대당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보통 군 입대는 늦어도 2학년을 마치고 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인 데다, 당시 대학생들은 데모하다가 징역을 선고받아 병역면제가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