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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준가르의 영토 및 청나라와의 전쟁 경로 |
언어별 명칭 | |
오이라트어 | Zöünɣar |
몽골어 | ᠵᠡᠭᠦᠨ ᠭᠠᠷ/Jegün-ghar, Зүүнгар/Züüngar(현대 몽골어) |
중국어 정체 | 準噶爾(준가얼) |
영어 | Dzungar |
1. 개요
오이라트계 유목민족.몽골어계 종족으로, 북원 이후 인류 역사 최후의 유목 제국[1][2]이며, 마지막 몽골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준가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왼손, 좌익을 뜻하는 '제군가르'[3]에서 왔다. 전통적인 유목국가는 남면하여 중앙[4], 우익[5], 좌익의 3부 구조를 취하고 있었으며, 오이라트를 이루는 호쇼트, 초로스, 토르구트, 두르베트 중에 두르베트 정권에 있어 좌익(동방)을 담당하고 있었던 자들이 '준가르'로 불리게 된 것이 그 시초이다.
기병에만 의존하지 않고, 화약과 무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했으며, 강력한 전투력으로 최후까지 청나라를 괴롭혔다. 유목과 수렵채집 생활을 주로 했으나, 상업 발달은 물론 기후가 허락하는 한 농경도 병행했을 정도로 유연한 경제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준가르의 가장 큰 특징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잔혹사의 주인공이라는 점일 것이다. 시조인 하라후라부터 나라를 버린채 도망쳤고, 준가르의 역대 군주들을 보면 임기를 제대로 마치거나 제명에 죽은 케이스가 하나도 없었으며, 존속 기간 내내 타민족들을 열심히 학살하며 다녔고, 본인들도 열심히 학살당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뭐 그래도 비슷하게 역사에서 사라진 스키타이족이나 훈족, 거란족같이 인류사에 기여한 바라도 있으면 모르겠으나 인류사에 남긴 업적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짐 싸고 나가서 딴 살림 차린 토르구트부조차 딱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뜬금포로 쳐맞아서 지금은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겨우겨우 명맥을 잇고 있을 따름이다.
서북부 신장-위구르 지역 북부의 중가리아와 카스피해, 그리고 외몽골과 티베트에 걸쳐 거주했다.
준가르 기병 | 준가르 전사들 |
아무르사나의 사슬 갑옷.
준가르군의 갑옷.
2. 역사
2.1. 기원
기원은 예니세이 강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 오이라트였다. 12세기경에 칭기즈 칸에게 정복당하여 4만 호로 편성되었고, 이후 몽골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원나라 시대에 색목인으로 우대받았다. 그런데 몽골 제국 내에서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와 툴루이 가문의 쿠빌라이 칸 사이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내전에서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으며, 주로 원나라 대칸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다. 1368년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맞서 싸웠다.이렇게 몽골과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쪽의 유목 민족들을 흡수했다.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1206년) 이전 카마그 몽골에 맞서 가장 거세게 싸웠던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등의 부족들을 흡수한 결과, 말이 오이라트였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나이만과 케레이트 계열이 되었으며, 원 오이라트계는 오히려 소수 부족으로 전락했다.
에센 타이시의 시대에 전 몽골을 통일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고, 급기야는 토목의 변(1449년)을 일으켜 명나라의 정통제를 생포하면서 위명을 떨쳤다. 하지만 1454년 에센 칸이 암살당한 후 오이라트는 혼란에 빠져 국력이 약화되었고, 이를 틈탄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했다. 이후 몽골 최후의 명군인 알탄 칸[6]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1600년대 초반부터 오이라트는 재흥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인 1623년 몽골의 할하부를 격파하고, 완전한 독립에 성공했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의 후예인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칼미크인이 되었다.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들 중 호쇼트부[7]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이주해 떨어져 나갔고, 잔존 오이라트는 1640년 청나라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준가르의 군주 칭호는 갈단 때를 제외하면 '한'(Xān)이 아닌 홍타이지(Xong Taiǰi)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홍타이지는 청나라의 태종 숭덕제의 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숭덕제의 휘에 대해 논란이 있다.
2.2. 갈단 칸의 치세와 청나라와의 대결
청나라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되었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나라의 정벌로[8]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거나 정복되었다. 반면 서쪽의 오이라트계 종족들은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 칸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나라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갈단은 준가르의 초대 홍타이지였던 에르데니(에르딘) 바아투르의 4남이었다. 원래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으나 그의 친형이자 아버지의 후계자였던 셍게가 이복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피살당하자(1670년) 환속해(1676년) 준가르를 평정했다. 홍타이지의 칭호를 쓰던 갈단은 과거 오이라트의 맹주였던 호쇼트 부족[9]을 정복하면서 서몽골을 통합하고,(1677년)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보쇽투 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갈단은 한때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던 경력 및 고승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로 공인받은 인연으로 티베트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림 분지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청나라군과 준가르군의 전투. |
갈단의 부와 인구는 서역을 장악했다. 그는 모래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흙을 구워 유황을 추출하고, 황산을 이용하여 초석을 만들었다. 구리, 납,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다. 준마와 오랑캐 기수의 규모에서 그들을 능가할 자들이 없었다. ... 갈단은 질 좋은 무기를 직접 만들 수 있었기에 군용 자재를 멀리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고리 미늘을 연결하여 사슬 갑옷(Chain mail)을 만들었는데, 마치 직물처럼 가벼웠다. 만약 화살이 이를 뚫으면 그는 갑옷 제작자를 죽였다. 또한 그는 회회족에 사절을 보내 화약 무기 사용법과 전술, 즉 먼저 총을 쏜 뒤 활과 검으로 싸우는 전법을 가르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총, 소검, 활과 화살을 휴대시키고 허리에 단도를 착용시켰다. 그들의 천둥 같은 고함을 들은 이들은 원근을 불문하고 항복했다.
《진변기략》 1687년
1688년 초에 갈단이 외몽골에 있었던 할하 부족의 내분을 틈타[10] 할하를 공격하자,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과 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 울란 부퉁[11] 전투(1690년, 9월 초)에서 준가르군을 격퇴한 뒤, 몽골 고원으로 갈단을 추격하며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1691년 5월~6월 내몽골의 돌론 노르에서 몽골 수령들과 회맹을 맺었다. 이로써 내몽골에 이어 외몽골도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갈단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인 준모드(자운 모도)에서 벌어진 전투(1696년)에서 참패한 후 반격을 노렸지만 본국에서 조카인 체왕 랍탄이 반란을 일으키고[12] 티베트와의 연락도 끊긴 와중에[13]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했으며,(1697년, 4월) 그 시신은 청나라에서 인수해 장례를 치렀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었는데,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러시아나 청나라에 비하면 인구수[14], 농업 생산력, 기술력 등 여러 면에서 뒤쳐져 있었다.《진변기략》 1687년
2.3. 준가르의 반격
하지만 그렇다고 준가르가 청나라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었다. 강희 연간(1662년~1722년) 말기 청나라는 티베트의 내정에 개입하여 호쇼트부의 라짱 칸을 라싸로 보내 1705년 섭정인 상게 갸초를 살해하고, 달라이 라마 6세인 창양 갸초를 청나라로 호송했다. 하지만 도중에 달라이 라마 6세가 사망하자 라짱 칸은 25세나 된 청년 예셰 갸초를 찾아내 달라이 라마 5세의 전생이라고 내세웠다.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 6세 예셰 갸초를 책봉함으로써 호쇼트부를 지지했다. 하지만 청해(코코 노르) 호쇼트 세력과 살해당한 상게 갸초를 지지하는 티베트인들은 라짱 칸이 옹립한 달라이 라마 6세 예셰 갸초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1708년 리탕 출신의 겔샹 갸초를 달라이 라마 7세로 선포하며 준가르를 끌어들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겔샹 갸초를 납치하여 쿰붐 사원에 연금했다.(1715년) 준가르의 군주 체왕 랍탄은 티베트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체렝 돈돕 휘하 6,000명을 파병해 라싸의 호쇼트 칸 라짱을 급습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군의 수중에 있는 쿰붐 사원의 달라이 라마 7세를 탈취하여 라싸의 체렝 돈돕 휘하 준가르군과 합류하도록 했다. 달라이 라마 7세 탈취는 실패했지만 라싸 공략은 성공하여 호쇼트군을 격파하고, 라짱 칸을 죽인 뒤 학살과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1717년, 겨울) 이에 분노한 라싸의 티베트인들은 준가르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호쇼트부의 잔여 세력들과 함께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청나라는 기회를 포착하여 달라이 라마 7세 겔상 갸초[15]를 앞세우고 라싸에 진주해 준가르 세력을 몰아냈다.(1720년, 9월) 이때부터 티베트는 준가르로부터 떨어져 나와 청나라의 세력권 내에 놓이게 되었다.
세종 옹정제의 치세때 준가르는 청나라 변방의 목마장들을 습격해 말을 대량으로 털어가고, 청국령인 투루판을 공격하여 청 조정을 놀라게 했다. 청나라의 대신 악종기[16]는 준가르쪽의 변방에 300,000명의 대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16차례나 건의했으나 옹정제는 그건 너무 많다며 망설이다가 결국 악종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200,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푸르단이 이끄는 북로군이 호톤노르에서 준가르의 유인전술에 넘어가는 바람에 50,000명을 잃고, 주요 장수들이 줄줄이 전사하거나 자결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서로군을 이끌던 악종기도 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그나마 칭기즈 칸의 20세손인 보르지기트 체링[17]이 준가르군을 격퇴하고 그 중 10,000명을 살해하여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18]
2.4. 참혹한 멸망
하지만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 제국을 세운 몽골 제국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을 겪으며 약해져 갔다. 여기에 고종 건륭제가 즉위한 후의 청나라는 이전과는 다른 철저한 준비 끝에 본격적인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나라군의 진격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나라에 복속했다.그러나 청나라가 준가르의 영역에 4명의 대등한 칸을 세워 분할통치하려 하자[19] 자기가 유일무이한 칸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이에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아무르사나는 청나라군에 맞섰다가 패배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피신하여 이역만리의 러시아 땅에서 죽었다.
이후에도 준가르가 복속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여 피해가 막심해지자 더 이상 보다못한 건륭제는 준가르의 복속을 포기하고 아예 전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채 준가르족을 주도면밀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족에 대한 멸족 시도를 부정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20] 설상가상으로 천연두까지 돌면서 준가르인은 최소 80%, 최대 90% 이상이 사망했으며, 당시 사망한 준가르인들의 수는 최소 420,000명에서 최대 48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준가르인들조차 러시아 제국과 카자흐 칸국으로 도망쳐서 현지 주민들에게 동화되거나, 청나라군에 붙잡혀서 노비가 되고 말았다. 후자의 경우는 만주족이나 내몽골족 내지는 한족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준가르는 멸족당하다시피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건륭제는 준가르에게 질렸던지 중국 내에서 -준가르'라는 이름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고, 이후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 준가르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청나라는 준가르족이 살던 땅에 자신들이 복속시킨 한족, 위구르족(회홀족), 후이족(회족, 回族) 등의 타민족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청나라군이 침략하기 이전에 신장에는 준가르인이 600,000명, 위구르인이 370,000명 정도 거주했던 것으로 추산되지만, 정복 이후에는 위구르인이 번영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준가르를 평정한 이후, 이리에 텐산 남•북로를 관할하는 판사대신과 협판대신을 파견하고, 주요 거점에는 병력을 주둔시켰다. 1768년 청나라는 이 지역을 '새로이 개척한 강역'이라는 의미로 '신강'(新疆)이라 명명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는 지명의 유래였다.
3. 통치자 목록
출처- 1대: 하라후라(?~1634년)
- 2대: 에르데니(에르딘) 바아투르(?~1653년)
- 3대: 셍게(?~1671년. 재위기간 1653년~1671년)
- 4대: 갈단 한(1644년~1697년. 재위기간 1671년~1697년)
- 5대: 체왕 랍탄(1643년~1727년. 재위기간 1697년~1727년)
- 6대: 갈단 체렝(?~1745년. 재위기간 1727년~1745년) - 체왕 랍탄의 장자. 3남 1녀를 두었다. 딸의 이름은 울란 바야르였다.
- 7대: 체왕 도르지 남잘(Tsewang Dorji Namjal, 1731년~1750년. 재위기간 1745년~1750년) - 갈단 체렝의 2자.
- 8대: 라마 도르지(Lama Dorji, 1726년 또는 1728년~1753년. 재위기간 1751년~1753년) - 갈단 체렝의 장자. 체왕 도르지 남잘과 막내동생 다시 다와와를 투옥하고, 권력을 잡았다.
- 9대: 다와치(Dawachi, ?~1759년. 재위기간 1753년~1755년) - 방계 가문인 체링 돈둘의 손자로, 라마 도르지를 죽인 뒤 권력을 잡았다.
- 아무르사나(1723년~1757년) - 제5대 체왕 랍탄의 손자
4. 평가
준가르의 전성기때는 '제2의 몽골 제국'이 될 것처럼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 및 청나라와 달리 준가르의 지배층들은 피지배민족과 주변 국가를 철저히 강압적으로 대한 탓에 반감을 쌓아왔다. 결국 단순히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준가르 민족 자체가 전멸당하는 것으로 업보를 치르고 말았다. 만약 준가르가 피지배민족 및 주변 국가에 어느 정도 온건하게 대했다면 몽골 제국이나 청나라처럼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흉노, 돌궐, 위구르처럼 중국 왕조를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태평천국[21], 아시리아, 아즈텍 제국[22]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셈이다.사실 운도 꽤 없었던 것이, 중가리아의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북쪽은 러시아, 동쪽은 중국이라는 답이 없는 위치 선정으로 인해 사실 준가르가 딱히 잔인하지 않았어도 저 지리적 조건에서 살아남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23] 또한 통치방식이 유사했던 몽골의 경우, 그들의 터전 자체가 워낙 척박해서 중원 왕조가 저들이 발흥하지 못하도록 싹을 자르려 해도 척박한 몽골 초원에서 원정군이 버티지 못하고 오히려 큰 피해를 입으며 퇴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24] 오이라트의 주요 터전이었던 중가리아[25]나 칼미크는 워낙 살기 좋은 비옥한 토지였기 때문에 청나라나 러시아 제국이 각잡고 원정군을 파병하면 갈아버리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준가르의 판단 또한 경솔했던 것이, 저렇게 말이 안 통하는 이웃을 끼고 있으면 나머지 이웃들하고라도 친하게 지냈어야 맞는데[26], 준가르는 그 나머지 이웃들인 카자흐 칸국과 티베트, 심지어 같은 오이라트계인 호쇼트에게까지 잔혹했던 것이 문제였다. 카자흐야 원래 오이라트한테 시달렸던 유구의 역사가 있다보니 친해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겠지만, 티베트는 준가르 군주들 입장에선 대칸이 되기 위해서라도 친하게 지냈어야 맞는 나라인데도[27] 몽골의 황금씨족과는 달리 달라이 라마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폭발해 티베트를 무참히 짓밟고, 포탈라궁까지 불태우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본시 견원지간이었던 카자흐는 물론,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티베트와 동포인 호쇼트까지 등을 돌려 버리면서 준가르는 북쪽으론 러시아, 남쪽으론 티베트, 동쪽으론 청나라, 서쪽으론 카자흐라는 원수들로만 둘러싸인 희대의 개막장 형국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인들이 학살당할 때쯤에는 퇴로가 완전히 막혀버리면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설령 준가르가 운 좋게 청나라를 멸망시켜 당장은 조선의 입장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갚아준 고마운 나라가 되었다 해도, 준가르가 앞서 말한 것처럼 피지배민족과 주변국을 철저히 강압적으로 대했음을 감안하면 결국 청나라의 뒤를 이어 새롭게 조선을 침략하는 중국 정복왕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이 경우 어떻게 생각하면 몽골 제국의 재림이 됐을 것으로 보이나, 일단 항복하면 살려주는 등 보편제국을 꿈꿨던 몽골 제국 및 그 몽골 제국의 후신을 자처하면서 몽골족에게 회유책을 쓰고 마찬가지로 항복하면 살려주었던 청나라와는 달리 준가르는 정복하는 순간 말 그대로 문답무용으로 멸족시킬 정도로 잔혹함의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준가르가 청나라를 멸망시켜 중원과 만주를 차지하는 대체역사에서 조선은 원 간섭기나 삼전도의 굴욕급의 자존심의 상처 문제 이전에 조선 민족 자체가 소멸되냐 아니냐의 생존 문제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5. 번외: 토르구트의 귀환
유럽의 유목민, 칼미크그후 1771년, 17세기에 카스피해 인근 지역으로 떠나서 살던 오이라트의 일파인 칼미크인(토르구트인)이 준가르가 소멸되어 사라진 땅에 다시 돌아오길 청원하자 고종 건륭제는 이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기회라 여기고 허락했다.[28]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군대와 휘하 다른 유목민족을 동원해 칼미크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다. 특히 칼미크를 싫어하던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들은 칼미크인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칼미크인들은 카자흐인, 키르기스인이 포함된 러시아군의 협공으로 9,0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다. 물론 칼미크인들도 러시아군에게 저항하여 격퇴하기도 했지만 전원이 전투병이고 보급까지 받아 여유가 있는 러시아군과 달리 칼미크인들은 식량과 무기 사정이 좋지 못한데다가 여성과 아이들이 같이 있었기에 맞서 싸울 때마다 피해가 막심했다.
특히 러시아의 칼미크 학살도 준가르를 멸망시킨 청나라만큼 주도면밀했는데 숲과 초원에 불을 지르고, 산짐승을 죄다 잡아서 칼미크인들이 가져갈 만한 식량과 땔감, 가축 사료를 철저하게 없애버렸다.[29] 게다가 계절까지 겨울이라서 식량 차단의 효과는 더욱 좋았다. 무엇보다 칼미크인들을 추격하기 쉽도록 전원 기병으로 편성했기에 찾아서 헉살하는 것이 쉬웠다. 그러다보니 칼미크인들은 러시아군을 피해서 사막이나 늪지로 가야만했는데,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늪지에서만 3,000여 명이 죽고, 바람이 끝도 없이 불며 눈이 내려 하루에 10리를 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휘하의 카자흐 기병대와 키르기스 기병대를 시켜 여기까지 추격해와서 공격했기에 이들과의 전투때마다 많은 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또한 러시아군은 사막과 늪지에서도 식량 차단 전술을 잊지 않고 실행하니 칼미크인들의 사망자수는 더욱 늘어났다. 더구나 그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도 러시아군의 사주를 받았던 탓에 칼미크인들을 공격해왔다.
결국 80,000명의 칼미크인만이 준가르 분지에 돌아오긴 했으나, 계속된 전투와 학살, 질병, 기아 등으로 남성 대부분이 사망하여 떠나올 때 170,000명이었던 인구가 고작 69,000명 정도만이 살아서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에 도착한 칼미크인들의 상태는 이들을 받아주던 청나라 관리 서현덕이 건륭제에게 보고할 때 이렇게 묘사할 정도로 나빴다.
투항한 자들을 살펴보니 노약자나 부상자, 아녀자들이 많았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이 우리 주둔지로 들어온 후 모두들 통곡하고 애원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의 참혹하고 궁핍한 모습을 보면서 실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 제대로 없었으며, 그나마 입고 있던 옷도 다 찢어지고 아이들은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입니다. 도중에 극도의 기아에 허덕였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고기를 포식한 후 온몸에 열이 나자 물로 뛰어 들어 배가 불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30]
이 생존자들은 대부분이 여성[31]이었고, 이들은 청나라에 충성하는 몽골인과 위구르인에 동화되었다.그러나 칼미크족 자체가 준가르에서 떨어져 나온 민족이라는 점과 준가리아로 귀환하지 않고 남은 칼미크족들이 지금도 러시아령 칼미키야 공화국에서 불교를 믿으면서 사는 것을 보면 오이라트 자체가 완전히 멸족당한 것은 아니다. 칼미크뿐만 아니라 준가리아로 귀환했던 인원들 (토르구트) 또한 중국과 몽골에서 아직까지 소수민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거기에 티베트로 이주한 호쇼트부의 후손인 상몽골인들도 현존하고 있다.
6. 여담
- 《조선왕조실록》에 '서달' 또는 '서단'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은 여러 보고를 통해 청나라가 준가르를 정벌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관련 논문 또한 조선에 보내는 공식 칙서에도 이 준가르 정벌을 자화자찬하는 내용을 담은 적이 있다. #
- 준가르족을 다룬 역사 서적으로 2000년에 일본 학자가 쓴 책인 《최후의 몽골유목제국》#과 2012년 미국 학자인 피터 퍼듀가 쓴 책인 《중국의 서진》#이 출간되었지만, 출간된지 오래 시간이 지난데다가 소재부터가 한국에선 관심이 적은 유목제국의 역사이다보니 지금은 모두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사려면 인터넷 중고 서점을 뒤져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으로 특히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대학 도서관을 뒤져보자.
7. 같이 보기
[1] 준가르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준가르와 달리 20세기 초인 1912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청나라야말로 가장 최근까지 살아남은 유목 제국이자 최후의 유목 제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의 원거주지인 만주는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 그리고 타민족과의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을 뿐더러 중원을 완전히 점령한 후 강희제의 치세를 기점으로 점차 중국화되면서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하던 청나라 말기에는 변발과 호복을 제외하면 심하게 한화되었다. 그리고 전신인 여진족도 농경, 수렵, 어업, 유목을 모두 하는 민족이었기에 진짜 유목만 하던 유목민족은 아니었다. 따라서 금나라나 청나라를 정복왕조로 볼 수 있지만 유목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다.[2] 야쿱 벡이 세운 카슈가리아를 최후의 유목제국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3] 몽골어: ᠵᠡᠭᠦᠨ ᠭᠠᠷ Jegün-γar[4] 몽골어: ᠳᠤᠮᠳᠠ Dumda[5] 右翼, 몽골어: ᠪᠴᠷᠴᠭᠤᠨ ᠭᠠᠷ baraγun-γar[6] 알탄 칸은 제33대 대칸이었던 다얀 칸의 손자였지만 몽골의 대칸은 아니었다. 알탄 칸은 몽골 6투멘(만호) 중 튀메드부의 칸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러차례 중국을 침략하고,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 공격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는 등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 몽골 전부족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 몽골의 제36대 대칸이었던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덴 칸의 차하르부는 요하 상류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대칸의 권력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7] 칭기즈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의 후예를 자칭했다.[8] 청나라로선 반드시 제압해야하는 것이 변방을 계속 약탈하는 몽골을 방치했다가는 후환이 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역대 중화제국들이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토벌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중원에서 조금이라도 혼란이 생기면 유목민족들이 공격해왔다. 한나르는 흉노에게, 당나라는 티베트와 위구르에게, 송나라는 거란, 여진, 몽골에게, 명나라는 오이라트에게 침략당했다.[9] 호쇼트 부족은 셍게의 아내인 아누다라의 출신 부족이었으며, 당시 지도자는 오치르투 칸이었다. 셍게가 살해되자 갈단은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형수인 아누다라를 아내로 맞았다.[10] 당시 할하는 우익의 자삭투 칸과 젭춘담바 후툭투의 동생이었던 투시에트 칸(좌익)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갈단은 자삭투 칸을 지원했으나 갈단의 동생이 투시에트 칸에게 살해당했다. 또한 웬사 투르크는 몽골 활불인 젭춘담바 후툭투 1세의 스승이었고,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를 자처한 갈단은 1688년에 할하에서 열린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의 대리인(간단사원 좌주)과 젭춘담바가 동석에 앉자 아니꼽게 여겨, 할하를 침공할 때 젭춘담바가 머물던 에르덴 조 사원을 공격했다. 피신한 젭춘담바는 청성조 강희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1] 오늘날 내몽골 자치구 츠펑(赤峰, 적봉)시 커스커텅(극신극등)기에 속해 있다.[12] 체왕 랍탄은 셍게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장성하자 왕위를 노릴 걸 경계한 갈단이 숙청을 시도하자 도망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갈단이 외몽골에서 패배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13] 당시 티베트는 갈단을 지지하던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가 사망한(1682년) 후 6세 창양 갸초가 즉위하기(1697년)까지의 과도기였지만, 섭정인 상게 갸초는 갈단을 지지했다.[14] 준가르는 600,000명 정도였다.[15] 청나라로 호송되는 도중에 죽은 달라이 라마 6세 창양 갸초가 미리 지명한 환생자였다.[16] 남송 초기의 명장이었던 악비의 21대손이었다. 옹정제와의 대화 형식으로 된 《대의각미록》으로 유명한 증정에게 모반을 권유받은 바로 그 인물이었다.[17] 박이제길특 책릉. 1672년~1750년. 1692년 그의 조부가 성조 강희제에게 충성을 맹세함에 따라 체링은 강희제의 10녀인[32] 화석순각공주[33]와 결혼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공주들의 외가는 옹정제의 동복여동생인 온헌공주, 3황자 성군왕 윤지의 동복동생인 고륜영헌공주 정도를 제외하면 그렇게 높은 신분이 아니었지만 이 결혼이 청나라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결혼인 관계로 할하 좌익의 투시에트 칸 돈다포다이제, 파림부 군왕 오이곤의 결혼과 함께 체링의 지위는 결혼 이후 태길에서 패자로 2단계 올라갔다. 이후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1720년 장인인 강희제에 의해 패륵의 작위를 받고, 1723년 처남인 옹정제가 즉위한 후 몽골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군왕으로 작위가 올라갔다.[34] 이후 체링이 준가르 정벌전에서 큰 전공을 세워 1731년 체링은 새음약액부 군왕에서 친왕으로 진봉되었을 뿐 아니라 1710년에 죽은 순각공주는 화석공주에서 고륜공주로 높여졌다. 또한 체링의 자녀들 중 한 명은 강희제와 경민황귀비 장가씨[35]의 차녀이자 당대 실력자인 윤상[36]의 여동생인 화석돈각공주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37] 그리고 체링의 손자인 납왕다이제(1752년~1814년)는 심지어 고종 건륭제와 효의순황후 위씨의 딸인 고륜화정공주와 결혼(=가경제 처남)하여 일가가 출세했다. 참고로 1803년 인종 가경제 피습사건 당시 납왕다이제는 처남인 가경제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18] 보르지기트 체링은 그 공으로 울랴수타이 정변좌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고종 건륭제는 그를 맹기 몽골의 상징적인 인물로 삼았으며, 사후 태묘에 그 신위를 봉안했다.[19] 외몽골, 신강, 티베트도 이런 방식으로 경영했다.[20] 사실 이렇게 반란이 일어나거나 반란의 중심지였던 지역을 점령한 뒤 포로를 대량 학살하는 것은 청나라의 전통이었으며, 이후 태평천국의 난 말기에도 수도였던 천경(난징)이 함락되자, 천경에 있었던 장정들을 모조리 처형했다.[21] 전성기에는 청나라를 멸망시킬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수뇌부의 무능함으로 멸망한 점이 준가르와 비슷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다른 점이 많다.[22] 아시리아와 아즈텍 제국 둘 다 피지배민족 및 주변국에 가혹했던 점이 준가르와 비슷하다.[23] 비슷한 지리 조건 중 그나마 할하는 운좋게 독립을 쟁취했지만, 저들 역시 저 답이 없는 지리 조건에서 발전하지 못한채 고전하고 있다.[24] 이는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정주민족이 유목민족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유목 제국 문서 참고[25] 현재의 신장 자치구는 사막이 주를 이루지만 원래 오이라트는 '숲의 민족'이라 불릴 만큼 울창한 삼림에 위치하고 있었다.[26] 한국이 이웃인 중국, 일본 둘 다에게 똑같이 적대시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소한 둘 중 하나하곤 친하게 지내놔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으며, 한국에서 친중, 친일 성향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중국, 일본이 예뻐 보여서라기보단 그 대척점인 일본, 중국이 상대적으로 더 싫어서 그러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27] 칸이란 직책 자체가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이기도 하고, 칸이 되려면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절대 칸이라 불릴 수 없었으며 홍타이지(황태자)나 타이시(태사)로 불려야했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가톨릭의 수호자임과 동시에 교황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황제라 불릴 수 없었던 것과 비슷했다.[28] 하지만 《청사고》에서는 한때 준가르에 의탁했던 칼미크인이 러시아로 망명한 후, 칼미크인의 칸을 설득해 준가르인들이 소멸된 땅에 빈집털이를 목적으로 떠났다가 후술하듯 피해를 크게 입고, 청나라의 수비가 엄밀하기도 해서 태세를 바꿔 복속으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29] 심지어 숲과 초원에 식량을 구하러가던 칼미크인들이 러시아군이 놓은 불에 많은 수가 타죽기도 했다.[30] 원래 기아에 허덕인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시킬 때, 무턱대고 고기나 간식류 같은 것을 먹이면 몸이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묽은 죽 같은 몸이 소화시킬 수 있는 음식부터 먹여야 한다.[31] 전쟁을 많이 하다보면 전장에 나선 남성들의 많은 수가 전사함에 따라 후방에 남은 여성 인구의 비율이 급증하게 된다. 또한 청나라군과 러시아군은 종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 남성과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