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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5:01:22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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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천민의 역사3. 천민 집단 사이의 관계4. 고려시대의 차별계층
4.1. 향, 소, 부곡민4.2. 신량역천
5. 팔반잡류와 팔반사천6. 칠반공천과 칠반천역7. 유명한 천민출신의 인물8. 해외의 천민 계급
8.1. 중국8.2. 일본8.3. 인도8.4. 서유럽

1. 개요

천민()은 고려, 조선 시대의 신분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놈 또는 상것이 천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상민는 원래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다. 양반-중인-상민-천민 식이다. 법적 신분제인 양천제에서는 양인-천민 구별이다. 즉, 상것은 원래 양반평민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에 가깝다. 다만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양반 인플레이션을 통해 양반이라는 표현이 '이 양반 저 양반'하는 식으로 떨어진 다음에 상민이라는 표현도 같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2. 천민의 역사

천민의 범위는 시대별로 달랐다. 한국사에서 가장 부침이 심했던 것은 승려 계층으로, 신라, 고려까지는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상위 계층이었고 왕가와 귀족가에서도 출가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승려는 단숨에 천민의 지위로 떨어지고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

조선 시대 경국대전에 따르면 천민은 곧 노비다. 노비 제도가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폐기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적 신분제는 양천제였지만 실제로는 양인들에게 천시되는 계급은 노비에만 그치지 않았다. 법적 신분이 진짜 천민인 노비가 아니더라도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롭다면 이것도 천민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신량역천으로, 일반적으로 천민 하면 떠오르는 직업군은 대부분 여기 속한다.

왕족이나 관료, 양반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보다 하층 계급이기 때문에 나이를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말을 편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양반과 천민이 말을 할 때는 양반이 어린 아이고 천민이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양반은 하대를 하고 천민은 존댓말을 쓰며 우대를 해야 했다. 다만 천민이라도 나이가 80세가 되면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면천되었다.

양반이라도 대역죄로 몰락하였을 때는 무조건 천민으로 격하되며 그 후손도 마찬가지로 천민으로 격하되어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국가에 공로를 세웠거나 왕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행적이 인정된 경우, 국왕의 어명하에 면천(免賤)되어 신분이 상승하는 경우도 있다. 광해군/인조대의 무신이였던 정충신도 본래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면천을 받아 양인이 되었고 이후 무과에서 급제해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인한 지역 공동체 사회의 붕괴와 이촌향도로 인한 농어촌 인구의 급감으로 천민을 따지지 않게 되었다.

3. 천민 집단 사이의 관계

이 계급은 일단 같은 천민으로 묶이기는 했지만 팔천의 신분 서로 간에 연대의식은 의외로 희박했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천시하기도 했다. 사극 등에서는 현대적인 계급 의식이 반영되어 "우리는 다 같은 천민이잖아?" 라는 식으로 서로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묘사가 많지만 실제로는 천민들끼리도 부류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멸시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인도카스트도 마찬가지다.

신분상 천민은 노비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천하게 여겨지는 직업일 뿐이지 신분상 평민이다. 당연히 '천시당하는 이유'도, '생활 양식'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연대 의식이 생길 일이 없었다. 개화기에 해방운동이 벌어질 때도 각각의 집단을 대표하는 조직은 별도로 활동했지 "천민 계급으로서"의 연대 의식을 드러낸 적은 없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형평사(옛 백정 출신들의 인권 운동 단체)에서 잔치를 열고 기생들을 불렀지만 권번(기생조합)에서 "지저분한 백정 놈들 술 따라주는 것은 싫다!"고 거부하고 가지 않아서 형평사와 권번이 충돌한 사건도 있다.

4. 고려시대의 차별계층

, , 부곡민 들을 천민이 아니라 양민으로 보는 이상 고려시대에도 노예를 제외하면 천민이라고 할 계층이 없었지만 이들도 실질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4.1. 향, 소, 부곡민

예종(睿宗) 3년(1108) 2월 판(判)하기를,
“경기(京畿)의 주현(州縣)에는 상공(常貢) 이외에도 요역(徭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百姓)들이 이를 괴롭게 여겨 날로 점차 도망치고 유망하고 있다.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계수관(界首官)에 그 공역(貢役)의 많고 적음을 물어 참작하여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동소(銅所)·철소(鐵所)·자기소(瓷器所)·지소(紙所)·묵소(墨所) 등의 여러 소(所)에서 별공(別貢)으로 바치는 물건들을 너무 과중하게 징수하여 장인(匠人)들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여 도피하고 있으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각 소에서 별공과 상공으로 바치는 공물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다시 정하여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고려사 예종 3년 2월 기사
향과 부곡민들은 농업, 소의 주민들은 광업과 수공업에 종사했는데 군현민들에 비해서 명백하게 차별을 받았다. 조세와 노역의 부담도 훨씬 컸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으며 과거 응시도 불가하였고 국자감 입학 자격도 없었다.

4.2. 신량역천

말 그대로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는 조선 시대 천민들의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힘든 일이 많다보니 수공업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거주구역만 소가 아니었지 실질적으로 소에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취급은 비슷했지만 신량역천이라는 명칭이나 아래 직역명들은 조선시대 초에 만들어진 예가 많다.[1] 다만 조선시대 초인 세조 때 간이나 척이라는 차별적 명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면서 염부, 어부, 목자, 봉수군 등으로 부르게 했지만 인식이나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명칭만 바꾼다고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조선시대에도 사실상 천민 취급을 받았다.

5. 팔반잡류와 팔반사천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八賤
조선시대의 여덟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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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노비 승려 백정
무격 광대 공장 상여꾼 }}}}}}}}}

공적인 일이 아닌 사사로운 위치에서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사실 조선시대의 법률 기준으로 이 사람들은 천민이라고 노비와 같은 취급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량역천이라고 해서 일에 따라서 천민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이다.

사실 8천에는 어디에 누가 속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다. 단적으로 정약용목민심서에서는 팔반잡류(八般雜類)라고 해서 조운책을 담당하던 창촌(倉村)에 들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열거하였다.[5]
창촌(倉村)에서 금해야 할 대상에는 사당이라 부르는 우파優婆와 창기娼妓가 있다. 늙은 퇴기도 금해야 한다. 소주나 약주를 파는 주파酒婆도 그러하다. 무당의 서방으로 광대라 칭하는 화랑花郞과 악기를 켜며 노래하는 악사도 그 대상이다. 초라니라 하는 뇌자櫑子도 마찬가지다. 투전과 도살도 금지해야 한다. 이들 잡류는 노래와 여색과 주육酒肉으로 온갖 유혹을 하니 창촌 관리와 뱃사람이 이 유혹에 넘어가 창고의 세곡에 손을 대고 씀씀이가 헤프게 된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탐욕마저 깊어지면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 들여 축난 창고를 채우게 되니, 이 여덟 부류인 팔반잡류八般雜流는 마땅히 엄금해야 한다.[6]
이다.

이팔반사천(八般私賤)을 꼽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등이 꼽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분류할 때는 진짜 천민인 노비는 언급되지 않고 풍수를 보는 지관이나 하늘을 보고 점치는 천문관, 각종 장인(철물은 상황 따라서 제외), 의관 등은 중인으로 분류하므로 신량역천도 아니다.

6. 칠반공천과 칠반천역

이쪽은 공적인 일과 엮여 있는데 웃기게도 더 복잡하다. 칠반공천(七般公賤)에는 진짜 오리지널 노비인 공노비와 도망죄인이 포함되어 있고 칠반천역(七般賤役)은 일반적으로도 양인 아닌가 싶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로 치면 대부분 공무원인 이들이 천역 취급을 받는 이유는 농업사회인 당대의 환경에서 제대로 된 경제적 기반을 영위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업무에 매여있어야 하니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세율이 턱없이 낮은 조선의 재정기조 상 이를 상쇄할 만한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는 것도 아니니 자연히 누구나 꺼리는 직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앙관료들조차도 녹봉만으로는 제대로 먹고 살 수 없어 부패가 관례화된지라 국가적으로 청백리를 따로 선별해야 할 지경이었다.

일단 팔반사천과 비교되는 칠반공천부터 언급하면이다.

칠반천역은 칠반공천보다 더 상위로 중인인 아전급 직책에 가깝지만 속대전에서는 대놓고 신량역천 취급한다. 더욱이 황당한 것은 위아래에 기재된 직급들이 없었더라면 조선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을 확률이 높으니 당시 유교 사상에 매몰된 사대부의 몰지각한 의식이 세상을 얼마나 혼탁하게 바라보았는지를 여실하게 나타내는 증례라고 할 수 있겠다.

7. 유명한 천민출신의 인물

8. 해외의 천민 계급

외국에서도 비슷한 개념은 있었다. 중국에는 세습은 되지 않지만 노비 계급이 있었다.[11]

일본에도 노비와 각종 천민이 있었다. 흔히 조선통신사 때 바지도 안 입고 다닌 가마꾼들이 보이는데 얘네가 일본의 노비다. 마리아 루스 호 사건처럼 일본의 유곽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노예계약이라고 국제분쟁이 일어난 적도 있다. 센고쿠 시대부터 서로서로 조총을 먼저 더 빨리, 더 많이 사서 서로 더 잘 죽이려고[12][13]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해외로 팔려나간 자국 일본인 성노예들(훗날의 가라유키상)도 천민 취급을 받았을 터였다.

일본의 천민들은 일반인의 눈을 피해 특정한 지역에 서로 무리를 지어 살았는데 현대에는 그들의 후손들을 부라쿠민이라고 한다. 일본의 부라쿠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일반인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는 대우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현재의 일본 사회에는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아직 은근히 남아 있다.

서유럽에서도 카고라는 천민 비슷한 계급이 20세기 중반까지 남아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사라졌다. 주로 사형 집행인과 같은 천대받는 직업군이 카고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성인인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생전에 아는 신자의 집에 가려다가 집을 착각해서 망나니의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마침 망나니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청하지 않았는데도 신부가 자기네 집에 와 주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대단히 고마워했다. 그 바람에 요한 보스코 신부는 "잘못 들어왔습니다" 라는 말을 못 하고 그대로 눌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조차도 꺼리는 존재라는 뜻이니 망나니들을 포함한 카고에 대한 사회적 천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14]

8.1. 중국

중국에도 세습 노비와 천민이 존재했고 심지어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에까지 존재했다.

청나라에는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계급들도 존재했다.[15] 이들은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이 천민 계급들은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없어졌다.[16]

아울러 청나라 건륭제 36년인 1771년 청나라 정부는 천민 호적에서 벗어난 사람이 과거시험을 보려면 먼저 자격을 심사해야 하는데 4대(증조부, 조부, 아버지, 본인)에 걸친 성분을 모두 조사하여 본 가족의 직계친속이 모두 청백해야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으며 만약 그들 중 제 1대와 2대 및 삼촌 이내의 사람들이 여전히 천민들의 직업인 취고수나 심부름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면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않겠다고 규정했다. 당시 대다수 천민들은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천민 시절의 직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대부분이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 예로 소주의 걸호(거지들)들은 봄을 맞을 때 할 수 없이 심부름꾼으로 일하거나 취고수로 일해야 했다. 안휘성 남부의 세부들도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까지 계속 있었으며 절강성의 타민들도 여전히 배를 집으로 삼고 살면서 육지에 오를 때는 신발을 신지 못했다.[17]

중국 쓰촨성 지역과 섬서성 지역에는 방호(旁户)라는 이름의 소작농들이 지주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송사에는 이들을 가리켜 "서민임에도 소작농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노예처럼 일했다."고 기록했으며 20세기 역사학자 범문란(范文澜)의 중국통사에도 방호에 대해 "실제로는 소작에 의존해 살아가야 했고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마치 노비처럼 사역했다."고 기술했다. 이들도 넓게 본다면 노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18]

8.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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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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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서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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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서 후술할 목자간은 원래 몽골의 목장에서 일하던 사람(牧子)들이었는데 여기에 '간'만 붙여서 만든 명칭이다.[2] 조선시대에는 '먹자'라고도 불리는 사헌부 소속 나장의 별칭으로 쓰였다. 이들은 주로 체포와 수색 업무를 했는데 입고 다닌 옷이 검은색이라서 저렇게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죄인으로 확정되면 그 집 대문에 먹칠을 했다고 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3]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에서는 이들이 스스로 달단인들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문서를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조선에서 달단이란 그냥 북방오랑캐라는 말로 대신해도 될 정도로 쓰이고 있었다.[4] 도살업도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식적으로 고려는 불교 국가라서 대놓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5] 다만 그 취지는 차별을 위한 '차별'이 아니라 국고로 직행하는 조세제도가 중간의 유희거리를 업으로 삼은 이들에 의해 부질없이 소비되는 것으로 어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정약용이 열거한 팔반잡류는 대표적으로 남사당이나 주색잡기, 그리고 사치재였던 육식에 관한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인지라 해당 지역 관료가 이들을 들여 피 같은 혈세를 함부로 쓰는 일을 막기 위해서 출입 자체를 엄금하자고 주장했다.[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촌(倉村))[7] 물론 말이 천민 취급이지 1950년대까지 승려무당들은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대단히 존중받았다. 종교 국가가 아닌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사제 등 종교인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심지어 왕실 인사들 중에도 불교 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왕의 성향에 따라 대우를 받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은 보우임진왜란 당시의 국가적 영웅들인 사명당서산대사의 일화들, 그리고 김동리의 소설인 무녀도의 주인공인 모화가 작중에서 사람들에게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8] 다만 기득권층의 차별은 확실히 있어서 유생들이 절에서 깽판을 거나 반달리즘을 벌여도 아무 반항도 할 수 없었고 특히 사림이 집권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무시를 당했다.[9] 일본의 만담가처럼 중국에도 이야기를 해주거나 책을 읽어주고 돈 받는 사람이 있었다.[10] 이는 향리가 수령을 모욕한 경우도 처벌 대상에 넣었기 때문에 부민고소금지법과 함께 중앙집권화 과정으로 보면 된다.[11] 다만 법적으로는 세습이 불가능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노비 계급이 세습되었다. 주인이 노비의 자식들을 자기 가문에 입적시켜서 계속 노비로 부려먹던 방법도 있고 외국에서 조공이나 선물로 보내 온 노예나 군대에서 부리는 노비들은 대대손손 부려먹었다. 자세한 것은 부곡, 노비종모법 문서 참조[12] 흔히들 착각하는데 일본에서 조총을 개발하는 건 나중이지, 전쟁통에 당장 써야 하고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급한대로 막 사 왔다. 처음에도 그랬고 나중에 조총을 자체 수급할 수 있을 때도 많이 조달할 필요가 있으면 수입했다.[13] 반면 화포는 전국시대에는 찬밥 취급해서 포르투갈제 화포 몇 개 수입하고 조총에만 신경쓰다가 1592년 조총보다 아득히 멀리서 쏴대는 조선 화포쇼크를 먹고 상황이 급변했으며 화포만 그런 건 아니지만 왜군 측 보고에 의하면 개전 1년만에 병력 1/3인 5만명을 잃었다고 한다... 당시 북방 최전방에만 신경쓰던 조선군 전체가 5만명인 상태로 올린 전과다. 사실 사무라이들도 배신하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주군을 살해하는 것도 흔하던 센고쿠 시대였는데 백성들도 낙오 무사 사무라이 목 따서 적군 다이묘에 몰래 바쳐 포상금 먹고 다시 백성들 사이로 잠수하려고 벼르는 천지인 전국시대 출신 왜군들이 의병이란 개념이 생소한 상태에서 자신만만하게 뿔뿔히 흩어져 민가 약탈하려고 하다가 의병에게 각개격파되는 경우도 많았다. 1609년에 개발에 착수해서 1614년 오사카 성 전투에 처음 일본제 화포를 데뷔시킨다.[14] 요한 보스코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단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조차 천대하지 않고 받아주어 다시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했을 만큼 존경받는 성인이다. 그런 사람조차 꺼렸을 정도였다.[15] 이들 천민 계급이 생겨난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원나라가 절강을 점령한 후 남송 백성들을 징벌하여 육지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도 한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16]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17]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18] 출처: 민, 란: 중국 민중의 항쟁 기록/ 최종명 저/ 썰물과밀물/ 2015년 11월/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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