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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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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1]
Peter Handke
파일:Peter-handke.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white,#191919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출생 1942년 12월 6일 ([age(1942-12-06)]세)
독일국 케른텐주 그리펜
거주지 오스트리아
국적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주요 작품 관객모독(Publikumsbeschimpfung, 희곡)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 소설)
소망 없는 불행(Wunschloses Unglück, 소설)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 시나리오)
최근 작품 과일을 훔친 여자(Die Obstdiebin, 소설)
학력 그라츠 대학교 법학과 수료
배우자 립가르트 슈바르츠 (1967년 ~ 1994)[2]
소피 세맹 (1991년 ~ )[3]
자녀 아미나 한트케 (1969년 ~ )[4]
레오카디 한트케 (1992년 ~ )[5]
수상 및 경력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상(1967)
페터 로제거 상(1972)
프리드리히 폰 실러 상(1973)
게오르크 뷔히너 상(1973)[6]
조르주 사둘 상(1978)
프란츠 카프카 상(1979. 수상 양보)
잘츠부르크 문학상(1985)
그라츠 프란츠 나블 상(1985)
빌레니카 국제문학상(1987)
대 오스트리아 국가상(1988)
브레멘 문학상(1988)
프란츠 그릴파르처 상(1991)
프리드리히 폰 실러 기념상(1995)
카리치 형제 상(2000)
프랑크푸르트 블라우어 살롱 상(2001)
아메리카 문학상(2002)
지크프리트 운젤트 상(2004)
하인리히 하이네 상(2006. 수상 거부)
바이에른미술아카데미 최우수상(2008)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2009)[7]
세르비아 황금십자가상(2009)
빈첸츠 리치 상(2010)
네스트로이 연극상(2011)
뮐하임 극작가상(2012)
국제 입센 상(2014)
노벨 문학상(2019)

1. 개요2. 생애3. 논란

[clearfix]

1. 개요

"독창적인 언어로 인간 경험의 섬세하고 소외된 측면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
(For an influential work that with linguistic ingenuity has explored the periphery and the specificity of human experience)''
― 2019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
― 2004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프리데 옐리니크의 연설 中[8]

페터 한트케는 오스트리아극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이다. 기성 문학의 질서를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창작 활동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문학계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쓸었다.

희곡 <관객모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후술할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문학적 성취와 업적을 인정받아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 생애

1942년 12월 6일 오스트리아의 케른텐주 그리펜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 속에 태어나 알코올 중독에 따른 아버지의 가정폭력슬로베니아인 어머니[9]의 언어적 문화적 이질성을 경험했으며 이는 그의 유년기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1년 그라츠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첫 소설인 <말벌들>이 고무적인 반응을 얻자 학업을 중단하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그해 독일어권의 신예 작가 그룹인 47 그룹에 참여하여 기성 작가들과 문학관에 독설[10]을 퍼부으면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1966년 발표한 희곡 <관객모독>은 첫 상연과 동시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별다른 서사 없이 배우들이 관객들의 관습적인 관람 형식을 고발하고 험담과 모욕을 내뱉는 게 전부인 이 작품은 잠시 논쟁의 중심에 섰으나 희곡의 기성 어법을 완전히 파괴한 혁신성을 인정받았고 이를 통해 페터 한트케는 단숨에 세계적인 극작가로 떠올랐다.

그의 주도 하에 47 그룹은 독일어 문학계에서 새로운 비평 질서의 중심에 섰으나 68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학생 저항 운동으로 구성원들의 정치적 견해가 대립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회합이 끊어지며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고 1977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페터 한트케 또한 회의를 느끼고 그룹 해체 전부터 독자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관객모독>을 통해 보여준 논문적 성격은 이어서 발표한 희곡 <카스퍼>를 통해 더 심화시켰으며,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1]과 <소망 없는 불행> 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의 입지 또한 공고히 하였다.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여 1978년에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소설인 <왼손잡이 여인>을 영화화하였으며 1987년 빔 벤더스[12]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시에도 관심을 가져 1969년 시집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를 통해 시적 언어의 재구축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파격성과 불가해성으로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유럽 문학계는 수십 년간 그에게 매년 크고 작은 문학상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치열한 언어 실험의 의의를 인정해주었다. 그의 실험은 47 그룹과 성향이 전혀 다른 61 그룹[13]과 70 그룹[14], 빈 그룹[15], 그라츠 그룹[16] 등의 다른 문인 그룹에도 영향을 끼쳤다.

페터 한트케 본인은 프란츠 카프카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카프카는 나의 글쓰기에 한 문장마다 척도가 되었다"는 말로 자신이 받은 영향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자아와 객관적인 외부 세계가 너무나 큰 긴장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도 표명했다.[17]

3. 논란

밀로셰비치는 영웅이 아닌 비극적 인간이다. 나는 작가일 뿐 재판관이 아니다

일단 한트케의 가정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 슬로베니아인으로 언급된 한트케의 모친 마리아는 본래 슬로베니아 영토였으나 1920년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케른텐 태생으로 2차 대전때 케른텐에 주둔한 독일군 병사와의 불장난으로 아들을 잉태했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유부남이어서 마리아를 떠났고, 마리아는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다른 병사 브루노 한트게와 원치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마리아는 결혼 생활을 비관했다. 어릴때부터 슬로베니아어를 독일어와 함께 사용하며 자란 한트케는 성을 물려준 계부보다는 피가 이어진 어머니와의 유대감이 훨씬 강했다. 또 한트케의 이웃들은 마리아와 같은 슬로베니아 이민자들이었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해 한트케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지고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인, 슬로베니아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오히려 독일에는 미묘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으며 독일쪽에서도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꽤 있다. 그의 이런 성향들은 한국에도 번역된 자전적 소설 '반복'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어머니와 이웃들은 정치적으로 친세르비아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도 그런 정치관을 이어받았다. 2007년 베를린 앙상블에서 5만유로(약 7천만원) 가량의 성금이 들어오자 전액을 코소보의 세르비아 마을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을 정도로 세르비아와 통합된 유고에 애착을 갖고 있다.

그의 이런 성향은 논란을 낳기에 이르렀는데 유고 내전에서 인종청소를 저지른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 정부를 옹호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참여해 조사를 읽고, 비슷한 논조를 담은 글까지 썼다. 한트케의 수상은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안 주면 노벨문학상의 수치"라고까지 언급되던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피노체트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외면한 전례 등을 들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있다.

한림원이 출신 따라 사람 차별(비유럽권 약세, 북유럽에 대한 은근한 우대)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왔는데 그런 의혹에 한줄 더 얹었다. 이를 두고 유럽 난민 사태 이후 유럽에서 반이슬람 정서가 강해지면서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보스니아인들을 '인종청소' 명목으로 학살한 밀로세비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는 평도 나온다.

게다가 구 유고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스트리아의 시민권법은 자국민이 공식적으로 요청을 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복수 국적을 금지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박탈할 수도 있도록 하고 있어서 오스트리아 내 논란이 커지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 생존자들이 사라예보의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을 취소하라항의 집회를 가지고도 하였으며, 노벨상을 시상식 앞두고 알바니아 ·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 코소보 · 북마케도니아· 터키가 유고 내전 관련해서 외교사절 파견을 거부하기로 했다.# 코소보, 보스니아는 그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했다.#

이 때문에 시상식에서도 거의 소외받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수상 이후에도 만년 노벨상 후보인 알바니아의 대문호 이스마일 카다레에게 인터뷰를 통해 까였다.

#2021년 5월에는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수여받았다.


[1] 독일어 발음은 [ˈhantkə\](한트커)에 가깝다.[2] 1974년부터 별거하였으나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으며 이후 재결합하기도 했다.[3] 전처와의 혼인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였다. 페터 한트케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카티아 플린트와 동거했으나 소피 세맹과의 혼인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법적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4] 립가르트 슈바르츠와의 딸. 립가르트 슈바르츠와 결별 후 페터 한트케가 혼자서 맡아 키웠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소설 아이 이야기을 집필했다.[5] 소피 세맹과의 딸.[6] 역대 최연소 수상자.[7] 1979년에 수상을 양보한 프란츠 카프카 상과는 다른 상이다.[8] 페터 한트케는 노벨문학상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거절성 대답을 했지만 15년 뒤 본인이 상을 받게 되니 후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9] 1971년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자살했다. 이때 그가 경험한 충격은 소설 <소망 없는 불행>의 바탕이 되었다.[10] 당대 작가들을 "묘사 불능"이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거장으로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을 "거들먹거리기나 하고 콧물 같은 문장을 쓰는 끔찍한 작가"라고 비난했다. 당시 47그룹은 2차 세계대전에 따른 반성을 위해 현실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하자는 사실주의 사조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젊은 페터 한트케는 이것을 문학 예술이 아니라 단순히 현실 모방에 그친다며, 언어성 그 자체를 살리는 문학을 추구했다.[11] 1972년 빔 벤더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12] "페터 한트케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냥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페터 한트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3] 정식 명칭은 도르트문트 61 그룹. 노동자를 중심으로 내세운 '노동문학'을 주창하여 계급 문학 논쟁을 촉발하였으며 47 그룹과는 다르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경계를 그었다.[14] 정식 명칭은 작업조 70. 61 그룹의 한계를 느낀 문인들이 탈퇴하여 새롭게 설립한 그룹으로 61 그룹보다 강한 계급성을 띠었으며 1970년대 독일어 문학계에서 다큐멘터리 문학의 융성을 이끌었다.[15] 을 중심으로 활동한 아방가르드 시인들의 그룹.[16]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한 실험적 문인 그룹.[17] 2017년 박경리문학상 후보로 올랐을 때 김승옥 문학평론가가 그를 소개한 기사에 잘 설명되어 있다.